김굉필의 교육활동과 교육사상
Kim Koengpil's Educational Activities and Educational Thoughts 지도교수 이 해 준 이 논문을 교육학 석사학위 청구논문으로 제출함 2000년 6월 공주대학교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 조 계 민 석 사 학 위 논 문 조계민의 교육학 석사학위 청구논문을 인준함 2000년 6월 공 주 대 학 교 교 육 대 학 원 |
목 차 Ⅰ. 서론1 Ⅱ. 김굉필의 생애와 도학사상7 1. 생애7 2. 도학사상12 Ⅲ. 김굉필의 교육활동19 1. 희천에서의 교육활동19 2. 순천에서의 교육활동20 Ⅳ. 김굉필의 교육사상24 1.「寒氷戒」에 나타난 교육사상24 2.「家範」에 나타난 교육사상42 3. 도동서원 규약에 보이는 교육사상45 Ⅴ. 결론51 참고문헌54 Abstract57 |
Ⅰ. 서 론 여말선초의 사회적 전환기를 정리한 조선의 정치적?사회적 지배체제는 건국이래 약 1백 년이 경과한 成宗朝(1469-1494)에 이르러 그 대체적인 완성기에 접어든다. 즉 성종대에 이르면 각종 제도의 정비나 법전의 완성, 사회경제적 안정 등을 모두 이루어 조선적 질서가 새로운 모습으로 정착되기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燕山君 때에는 개국이래 정치적?사상적인 차별성을 보이며 물밑으로 대립하여 오던 훈구계와 사림계 인사들 간에 일대 상쟁이 빚어지는데, 戊午?甲子의 二大 士禍가 바로 그것이다. 다수의 士類가 일시에 희생되고 朝野가 혼미를 거듭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같은 사화가 훈구파와 사림파간의 갈등이었음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고, 결과만으로 본다면 사림들이 피해를 당하는 것으로 정리되는바, 그것이 당시의 학문과 교육 현실에 끼친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이러한 15, 16세기의 정치적?사상적 변동은 크게 보아 결국 기성관료세력과 사림출신의 신진관료세력 사이의 대립 투쟁에서 연유된 것이기도 하였다. 士林이란 16세기 초 중종반정 이후 조선왕조의 정치사 전면에 등장한 성리학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개국이래 조선 정부의 지속적인 성리학 중심의 이데올로기 확산정책에 발맞추어 거대한 세력집단으로 성장하여 마침내 朋黨 정치의 주역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지식계층이었던 만큼 사림세력은 자연히 학문과 정치 양면에 걸쳐 조선 시대사 전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15, 16세기의 대표적인 사림파 학자로는 ?畢齋 金宗直, 寒暄堂 金宏弼, 一? 鄭汝昌, 靜菴 趙光祖, 晦齋 李彦迪, 退溪 李滉, 栗谷 李珥 등이 손꼽힌다. 그러나 이들 중 특히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서, 선비의 삶에 철저하였으면서도 대조적이었던 한훤당 김굉필과 정암 조광조는 주목되는 인물이다. 김굉필은 修己的 義理의 구현에, 조광조는 修己보다는 經世의 治人面에 치중하여 이후 사림계 인물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두 갈래의 사상 경향을 주도했던 인물 중 김굉필의 사상, 그 중에서도 교육사상 부면에 초점을 맞춘 연구이다. 김굉필의 교육사상을 연구해야 하는 이유로는 첫째, 김굉필의 실천적 의리 정신을 새롭게 재조명하고, 둘째, 소학의 덕목을 현대사회에 맞춰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고, 셋째, 가훈을 통하여 가정윤리의 기본자세를 확립함으로써, 요즘 온 나라에 걸쳐 비등하고 있는 교실붕괴, 학교붕괴의 실상에 슬기롭게 대처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교육사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하여 교육활동 부면도 아울러 규명하여 보고자 한다. 김굉필은 주지하듯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弔義帝文으로 비판한 金宗直의 제자로서, 戊午士禍(연산군 10년, 1504년)로 인해 평안도 희천과 전라도 순천에 유배되었던 조선전기 사림의 대표적 인물이다. 지금까지 김굉필에 대한 선행 연구들을 보면 철학부면(도학, 윤리)과 문학부면, 그리고 교육부면(교육사상) 등 전 부면에 걸쳐 있고, 연구량도 그렇게 적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김굉필을 직접 연구대상으로 하여 한훤당선생기념사업회가 斯界의 저명한 학자들에게 위촉하여 받은 논문들을 모아 집성된 傳記的 연구서인 『한훤당의 생애와 사상』(보문사, 1998)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저술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고 인물사의 시각에서 업적과 칭송이 주를 이루는 이러한 연구들은 대부분 관념적이고, 일반론적인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김굉필의 도학사상은 본고의 주된 연구 관심은 아니지만, 이미 조선시기부터 사림계 후학들에 의하여 성격 규정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 증빙할 자료들은 대개 2차 사료들이다. 본고에서 필자가 주로 관심을 집중하는 교육사상과 교육활동에 대하여도 다소 피상적이기는 하지만, 손인수와 이종욱, 그리고 일본인 渡部學이 다룬 바가 있다. 손인수는「한훤당?율곡?우계의 교육사상」(배영사, 1989)에서 김굉필의 교육사상은 “가정 윤리의 기본 자세와 유교적인 도의를 확립하고, 사람되는 도리로서 가훈을 창도하여 밝히고, 또 이를 일생동안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함에 있다”라고 결론 짓고 있으며, 앞에든『한훤당의 생애와 사상』(보문사, 1998)에서도 교육사상을 이와 비슷한 시각에서 정리하고 있다. 이종욱의 연구는 김굉필의 교육사상을 도학적 관점에서 규명한 것으로 철학적인 연구성과들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아 교육사상가로서 김굉필의 면모를 부각하지는 못하고 있다. 다만 그가 이 논문에서 김굉필을 修己的 義理의 구현에 힘쓴 교육사상가로 자리 매김하고, 이를 조광조의 經世 治人과 대비시킨 것은 주목된다. 渡部學은 한국교육사 연구에 정열을 가진 일인 연구자로서 김굉필의 교육활동 중에서 도동서원 교육활동에 주목하여 서원규약을 분석하고 있다. 김굉필은 조선조 사림계 인물로서 정암 조광조와 대비될 정도로 비중 있는 인물임에도 사실상 그의 교육사상에 대하여는 정밀한 연구가 진전되지 못하였다. 더욱이 교육사상을 다룬 논문에서도 도학사상에 치중함으로써 철학적 연구와 차별성이 없다거나, 실제 교육활동과 연계하여 교육사상을 다루지 못한 점 등은 연구한계로 지적이 될 수 있다. 이에 필자는 김굉필의 遺緖가 남아 있는 순천지역에 근무하면서 이 같은 문제점을 아쉽게 생각하여 왔다. 본 논문에서는 기존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하여, 우선 김굉필의 생애와 도학사상을 개관함으로써 그의 교육사상이 지닌 사상사적 배경을 검토하여 보고, 다음으로 그의 교육사상이 나타나 있는 저술(경자상소와 한빙계)을 분석하며, 끝으로 실제 그의 생애 속에서 교육활동이 이루어졌던 희천과 순천에서의 교육활동 등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를 전개하여 그의 교육사상과 교육활동이 어떠한 모습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살피고자 한다. 본 연구는 문헌 정리와 현지 답사로 이루어졌는데, 활용한 문헌자료는 김굉필의 문집『景賢錄』이 중심이 되고, 이후 여러 후학들이 기록하고 평한 글들이 참조되었다. 원래 그의 문집은 무오사화 때 후환을 두려워한 후손과 후학들이 소각하여 거의 남겨진 것이 없었다. 이에 김굉필의 후손과 후학들은 유문들을 계속하여 수집?편찬?추보하여 이를『景賢錄』,『景賢續錄』,『景賢續錄補遺』,『景賢附錄』 등으로 간행하였다. 김굉필의 遺著로서 오늘에 전하는 것은 景賢錄에 실려 있는 약간의 詩, 賦, 文이 있을 뿐이다. 龜巖 李禎은 순천부사로 재임(1563-1566)하면서 부의 서쪽 3리쯤에 景賢堂을 신축하였는데 景賢이란 선생을 思慕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李禎은 김굉필의 家系와 行狀 등을 모아 한 책으로 엮었는데 내용이 소략(疏略)하고 의심되는 바가 적지 않자 이를 자신의 스승인 退溪 李滉에게 물어 보았다고 한다. 이에 퇴계는 한훤당 김굉필의 손자인 金立과 외증손인 鄭崑壽 등의 기록을 참고하여 정본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퇴계는 김굉필을 “近世道學之宗”이라 극찬하였고, 景賢堂의 額字도 친필로 써 주었다. 퇴계 이황이『景賢錄』을 개정한 것은 退溪 年譜에 의하면 그의 65세 때인 명종 20년(1565) 9월이었다. 한편『景賢續錄』은 선생의 외증손인 寒岡 鄭逑가 선생의 行狀과 遺事中에서 앞에 소개한『경현록』에 실려 있지 않은 것을 수집하여 편찬한 것인데, 그 후 화재로 인하여 그대로 전하는 것이 없었으므로 김굉필의 후손인 夏錫이 다시 당초의 자료를 찾아 모아 편집한 것이다. 상권에 연보, 하권에 師友門人錄, 書院, 祠宇 등에 관한 기사가 있다. 『景賢續錄補遺』는 선생에 관한 逸話 또는 다른 문헌 중에 나오는 記事, 기타 선생을 추모하는 후생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여러 行事의 기록 등으로 續錄을 補遺한 것이며,『景賢附錄』에는 1496년(연산군 2) 선생 나이 43세 때에 玉溪 潘佑亨에게 준 寒氷戒라는 글이 실려있다. 이 글은 선생의 사상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遺著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들 자료 중 그의 교육사상이나 교육활동을 집약적, 체계적으로 정리한 글은 별도로 없다. 따라서 본 연구는 그의 여러 단편적인 글 중에서 관련된 부분을 발췌하여 이를 종합하고 체계화하였다. 한편 그의 교육활동을 보다 생생하게 확인하기 위하여, 김굉필의 古宅과 宗宅, 희천에서 移配되어 梅溪 曺偉와 함께 유배 생활을 하다 생을 마친 곳에 후학들이 세워 놓은 전남 순천시 옥천동에 있는 玉川書院과 臨淸臺, 경북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있는 道東書院과 김굉필의 묘소 등의 김굉필과 관계되는 유적지 등을 현지 답사하였다.
Ⅱ. 김굉필의 생애와 도학사상 김굉필의 생애를 景賢錄 가운데 있는 年譜를 좇아서 소개한 후 김굉필에 있어서 가장 주목되는 도학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을 하고자 한다. 1. 생애 김굉필(1454~1504)의 자는 大猷, 호는 寒暄堂, 처음의 호는 蓑翁이며 본관은 瑞興이다. 김굉필(1454-1504)은 서울 정릉동(지금의 정동)에서 아버지 紐와 어머니 청주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세조 8년 무과에 급제한 뒤 忠佐衛 司勇을 지냈고, 어머니는 淸州韓氏 韓承舜의 따님이다. 원래 그의 가문은 증조인 中坤이 조선초에 工曹典書를 지낸 郭珠의 딸과 혼인하여 처향인 경상도 현풍에 이거한 뒤 현풍을 세거지로 삼았으나, 조부 小亨이 개국공신 趙?의 사위가 되면서 가문의 위세와 품격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고, 이후 서울에 옮겨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생애는 행장 기록이나, 후학들의 술회를 통하여 보면 참으로 순탄하지 못했고, 어떤 의미에서 보면 당대의 사림들이 지닌 사회적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뒤늦은 도학 입문, 짧은 관력, 그리고는 士禍로 인한 유배와 만년의 은거, 강학 활동 등은 바로 그러한 모습을 대변한다. 그가 본격적인 학문수업에 몰입하게 되는 것은 보통 사람들과 달리 나이 21세가 되던 1474년(성종 5) 늦은 봄이었다. 왜 이렇게 뒤늦게 학문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이때 함양군수로 있던 ?畢齋 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이전의 생활에 대하여는 한마디로 골목대장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6~7세 때 성품이 매우 활달하여 市街에 다니며 장난칠 적에 뭇 아이들이 두려워하여 피하였다고 하며, 무례하게 조롱하고 거만스러운 자를 보면 문득 채찍으로 그들이 파는 고기나 두부 등을 갈겨서,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선생이 온다는 말을 들으면 각기 그 물건을 감추었다고 전한다. 점필재 김종직은 김굉필이 와서 배우기를 청하니 小學을 가르치며 말하기를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두려면 마땅히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된다. 광풍제월(光風霽月)도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김굉필은 이를 마음에 간직하여 잊지 않고 게을리하지 않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김종직에게 사사하면서 김굉필은 小學의 중요성이나 의미를 비로서 철저하게 이해하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그는 郭承華와 같이 점필재의 문하에서 수업할 때 점필재가 두 제자에게 詩로써 ‘궁벽한 곳에서 무슨 다행으로 이 사람을 만난 것이냐(窮荒何幸遇斯人)’라 적어 준 것을 보면 점필재도 이들 두 제자를 매우 아끼고 만남을 즐거워했음을 알 수 있다. 1475년(성종 6) 늦은 봄에 申挺之와 같이 점필재를 모시고 頭流山(智異山) 天王峰을 從遊하였고, 24세 되던 1477년(성종 8) 5월에는 李承彦, 元?, 李鐵均, 郭承華, 周允昌 등과 더불어 善山鄕校에 모여 經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이 때 점필재 선생은 善山府使로 재임 중이었다. 뒤늦게 점필재를 만나 학문의 길에 접어든 그가 당시 중앙의 기라성같은 인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는 것은 27세 되던 1480년(성종 11) 生員試에 입격하면서였다. 김종직에게서 익힌 소학에 대한 철저한 이해는 이후 그의 사상 형성에 있어서 확실한 철학사상으로 자리 잡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것은 이후 그가 소학서에 제시된 규범에 따라 행동하고 小學을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것이나, 사람들이 국가의 일을 물으면 반드시 ‘소학동자가 어찌 대의를 알겠느냐’고 하였다는 것들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잘 알려주고 있다. 그리하여 나이 30세가 된 후에야 비로소 다른 글을 읽었고, 후진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니, 찾아오는 제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1486년(성종17) 33세 때, 점필재가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실제로 과감한 개혁 정치를 하지 않자 詩를 지어 풍자하였는데, 점필재가 이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화답 詩에 상당한 불만을 나타내었는 바, 이로부터 선생과 점필재의 사이가 갈라졌다고 한다. 이러한 지적은 秋江 남효온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김굉필과 점필재가 갈라섰다고 南秋江이 기록한 것은 필시 선생을 보호하려는 추강의 배려로 추측되기도 한다. 한편, 34세 때에는 부친의 喪事를 당하자 무덤 옆에 廬幕을 짓고 모든 것을 家禮의 예절대로 따랐으며, 어머님을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여 효자로 이름이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추강 남효온과는 일찍이 절교하였는데 그가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서 문병하니 추강이 거절하였다. 이에 문을 밀치고 침실 안으로 들어가 손수 이불을 들고 그 피부를 어루만져보니 수척함이 너무 심하므로, 김굉필이 깊이 탄식하고 애석히 여기며 말하였으나 추강은 끝내 말 한 마디도 응답하지 않았다. 얼마 안 가서 추강은 세상을 떠났다. 이 같은 도학자로서의 학문과 행업을 이룬 김굉필이 官職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은 1494년(성종 25) 41세 되던 해였다. 물론 그는 45세 때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배되기까지 불과 4년 남짓의 짧은 官歷으로 이렇다할 활동을 남기지 못한다. 41세 되던 해 여름 경상감사 李克均이 그의 行義를 임금께 아뢰어 남부참봉을 除授하였는데, 당시 一? 鄭汝昌은 안음현감이 되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두 인물은 그들이 사는 중간지점인 非汝川(지금의 거창군 가조면 도리)에서 서로 만나 道義之交를 맺었다. 지금 非汝川 자리에는 두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인들이 지은 慕賢亭이 있다. 이후 김굉필은 1495년(연산군 원년, 42세) 典牲暑 ?奉, 1496년(연산군 2, 43세) 軍資監 主簿, 司憲府 監察, 1497년(연산군 3, 44세) 刑曹佐郞으로 옮겨다녔다. 형조좌랑으로 있을 때는 獄訟을 판결함이 한결같이 지성에서 나오니 모두 공정함에 복종하였으며 모든 행동이 법과 같았다고 전한다. 1498년(연산군 4) 45세가 되던 7월에 戊午史禍가 일어났다. 주지하듯이 무오사화는 성종 실록 사초가 발단이 되어 사림파가 피화를 당한 사건이다. 성종실록을 편수할 때에 李克墩이 堂上이 되었는데, 과거에 金馹孫이 獻納으로 있으면서 이극돈을 논핵한 내용의 史草를 보니 자기의 나쁜 일을 매우 자세히 써넣었고, 또 세조 때의 사실을 기록하는데 점필재가 의제를 조상한 글(弔義帝文)을 기재한 것을 보고는 드디어 유자광과 모의하여 사화가 시작된 것이다. 무오사화로 인해 김굉필은 점필재의 문도로서 붕당을 맺어 서로 칭찬하며 혹은 나라의 정치를 비난하고 시국을 비방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곤장 80대를 맞은 뒤 평안도 熙川에 付處되었다. 2년 뒤인 1500년(연산군 6) 47세 때, 죄를 減等해서 順天府로 이배되었다. 순천에서 김굉필은 순천부의 북문 밖에서 寓居하였다. 이 때 禍가 어느 때, 어떤 모습으로 미칠지 하루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태연하여 평상시의 志操를 변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순천 유배 4년여 동안 가장 가까이 사귄 친구가 바로 함께 순천에 귀양온 梅溪 曺偉였다. 순천부 서쪽에 있는 玉川은 水石이 맑고 기이하며 고목 나무가 삐죽삐죽하여 절경을 이루는데, 매계는 이곳 언덕에다 돌을 포개어 臺를 만들고 왕래하면서 詩와 술로 즐기는 장소를 만들었다. 선생도 때때로 혼자 가서 거닐었으나 시를 짓는 것은 일삼지 않았다. 그러나 1503년(연산군 9) 겨울에 曺 梅溪가 세상을 떠나자 선생은 그 초상을 맡아 치러주고 또 글을 지어 제사지냈다. 한편, 무오사화의 여파가 가시기도 전인 1504년(연산 10) 9월에 士禍가 재발하여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의 일로 戊午 黨人에게 죄를 더 주도록 명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甲子士禍이다. 이 사화의 여파가 다시 김굉필에게도 미치게 된다. 그는 이날 죽으라는 명이 있는 것을 알고 목욕하고 冠帶를 바로 하여 나가면서도 神色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하며, 우연히 신이 벗겨졌으나 다시 신고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어 입에 물고 조용히 죽음에 나아갔다. 아들 彦塾, 彦庠, 彦學과 사위 河珀, 李長培, 鄭應祥 등이 관을 모시어 현풍 오설리 보로동의 선영이 있는 동쪽 1리 거리의 산 酉坐 卯向의 땅에 장사지냈다. 집은 籍沒을 당하고 여러 아들은 나뉘어 귀양갔는데, 언숙은 河東으로 언상은 泗川으로 가고, 언학은 어리기 때문에 면하였다. 1506년 中宗反正으로 모두 방면되어 돌아왔다. 1507년(중종 2)에 김굉필은 신원되어 通政大夫 承政院 都承旨 兼 經筵參贊官 尙瑞院 正을 贈職하였고, 1517년(중종 12)에는 領議政 鄭光弼 등이 건의하여 마침내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右議政 兼 領經筵事를 贈職하였다. 1575년(선조 8)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右議政 兼 領經筵 監春秋館事로 追贈되고 文敬公이란 諡를 내렸다. 한편 1568년(선조 원년)에는 成均館과 四學의 여러 儒生이 상소를 올려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을 함께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기를 여러 달 동안 계속하였다. 4년 뒤인 1572년(선조5)에는 李滉까지 합하여 모두 五賢을 文廟에 從祀시키라는 상소를 올렸고 거의 매년 이어졌다. 그러다가 1610년(광해군 2) 成均館, 四學 및 8道 儒生의 청을 받아들여 9월 초나흘에 孔子廟廷에 從祀하도록 명하였다. 이 때에 다섯 분이 文廟에 從祀되었다. 곧 김굉필을 포함하여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이다. 이 다섯 분을 일반적으로 조선의 五賢이라고 부른다. 2. 도학사상 김굉필의 사상은 큰 줄기를 도학사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특히 그가 소학을 중시하였음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 있다. 여기에서 김굉필이 小學童子로 자처한 讀小學이란 詩를 보면 공부를 하여도 천기를 모를러니(業文猶未識天機) 소학에서 어제까지의 잘못을 깨달았구나(小學書中悟昨非) 이로부터 정성껏 자식 도리 다하련다.(從此盡心供子職) 구구하게 어찌 잘 살기를 부러워하랴(區區何用羨輕肥) 라고 하여 道學을 깨달은 뒤에 뜻이 확고하게 굳어져 물욕에 흔들리지 않게 된 것을 보여준 도학적인 詩이다. 그러므로 김종직도 이 詩를 보고 기뻐하며 “聖人이 될 수 있는 터전이다(乃作聖根基)”라고 찬양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天機란 天地의 기밀로서 天道를 가리킨다. 天道를 안다는 것은 上達한다는 것이다. 공자는 下學而上達을 말하였는데, 下學 즉 人道를 배워서 마지막에 上達 즉 天道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가 小學童子로 자임한 그 근본정신이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선생이 지은 賦에 秋毫의 微細를 泰山의 巨大에 비유한 것이 있는데, 그 題目은 秋毫可?於泰山賦이다.아아 우뚝한 태산은 만 길이나 솟아 높은데, 가느다란 秋毫는 겨우 형상이 있는 둥 만 둥 이름뿐이네. 큰 엄청난 차이는 하늘과 땅처럼 멀리 동떨어졌네. 어찌하여 李白의 호탕한 생각은 추호와 태산을 같이 볼 수 있다는 기발한 말을 내놓았는가. …… 나는 알겠노라. 천하의 물건은 원리가 있고 갈래(分)가 있다. 원리는 萬가지를 뭉쳐서 하나(一)가 되지만 갈래는 萬가지로 달라도 문란해지지 않는다. …… 하나에서 둘이 생긴 후에 물질은 만가지로 다르게 되었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마침내는 환하게 근본이 같은 줄을 알 것이다. 추호가 아무리 작지마는 太極의 이치를 갖추었으며, 泰山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역시 하늘이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물질로서만(形而下) 볼 때에는 하늘과 땅도 하나의 물질이요, 물질의 원리(形而上)로 볼 때에는 모든 물질이 다 無極이다. 어찌하여 세상사람들은 근본을 버리고 말단만 쫓아 千差萬別로 眩惑하는고. 혹은 대통(竹管) 속으로 하늘을 측량하며 송곳(錐)으로 땅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것이 크니 저것이 작으니 하고 다투며, 그르니 옳으니 하며 시끄럽게 한다. …… 비록 물질이 가지런하지 않지마는 그것은 물질의 실정이다. 자줏빛이 어찌 붉은 빛을 어지럽히겠으며, 피(稗)가 곡식과 혼동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혼동하여 마찬가지라 한다면, 질서를 어지럽히며 도덕을 어지럽힐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 출발점을 찾아보지 아니하며 그 끝을 묻지도 않았으니, 말(言)만 크고 타당성이 없어서 그림자를 잡아매고 바람을 붙잡는 것과 같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즉, 天地는 大, 物物은 小로서 形而下的 存在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모든 無極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는 無極의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 없다. 이 賦에서는 대체적 취지로 보면 世人들이 根本은 버리고 末端을 좇는 것을 개탄한 것으로서 人倫의 질서를 바로 잡고자 함을 알 수 있다.김굉필에게 있어서 가장 주목되는 것이 도학이다. 율곡에 의하면 도학이란 “본래 인간 윤리의 내면성을 밝히는 데 그 본질이 있으므로 인간의 도리를 극진하게 하는 것이 곧 도학이다(道學本在人倫之內 故於人倫盡其理 則是乃道學也).”고 하여 도학을 人道實現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東湖問答에서는 도학을 “格致로써 善을 밝히고 誠正으로써 몸을 닦아 그 학문이 몸에 지녀져 있으면 天德이 되고, 정치에 베풀어지면 王道가 되는 것(格致以明乎善 誕正以修其身 蘊諸窮則爲天德 施之政爲王道)”이라 하여 修己를 통한 인격완성과 왕도의 실현을 위한 治人의 결실임을 강조하였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 도학의 始端을 정몽주로 보는 것은 그의 이론적 학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 왕조에 대한 節義를 실천한 데에 역점을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 도학의 학통을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보는 것은 學問 授受의 사실여부나 학문업적보다는 士大夫의 의리 정신을 기준으로 하여 파악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寒暄堂의 도학 사상에 대하여 張顯光은 神道碑文에서도라는 것은 무슨 도인가. 그 타고난 양심을 따르는 것이다. 선생은 그것을 깊이 알아 스스로 책임을 지며 의심하지 않았다(曰道何道 率其秉? 先生是契 自任不疑).”라고 하여 김굉필은 도라는 것은 천명 내지 양심에 따르는 것을 말하며, 개인이나 공적인 생활에 있어서 항상 이러한 떳떳한 도리에 따르는 생활 속에서 살았다고 평하고 있는 것이다. 또 같은 碑銘에서 김굉필 도학의 근원이 공맹의 유학의 근원에 있으며 주자의 도학을 계승했다. 이렇게 우리 나라에 전래된 도학이 널리 잘 베풀어질 줄 알았더니 시대가 용납되지 못하여 도학을 펴려다가 도리어 화를 당했다. 그러나 김굉필의 도학 진흥의 공은 백세에 존속하고 그 혜택은 많은 선비들에게 베풀어졌다.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金元行이 撰한 玉川書院 廟庭碑文에서도大賢이 나심이 어찌 우연함이랴. 그 사람이 있으면 도학이 밝아 인륜이 펴져서 그 나라가 잘되고, 그 사람이 없어지면 도학이 어둡고 인륜이 무너져 그 나라가 어지러워지나니, 大賢의 나심이 어찌 우연함이랴. 그러므로 살아서는 그를 높이고 친애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돌아가면 슬퍼하고 사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은, 역시 그 이치가 그러한 까닭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사람의 마음이라 하겠는가(大賢之生豈偶然哉 其人存則道?明 彛倫? 而其?治 其人亡則道?晦 彛倫? 而其?亂 大賢之生豈偶然哉 是故生則人莫不尊親 ?則人莫不悲慕 亦其理然也 不然豈所謂人心者歟). 라 하여 그의 도학사상을 적실(的實)하게 분석하고 있다. 끝으로 김굉필의 도학적 풍모를 좀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하여 그의 불교에 대한 태도를 검토해 보고 싶다.그의 도학적 풍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글로는 흔히 庚子上疏가 예시된다. 이는 1480년(성종 11) 生員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修學하던 때, 圓覺寺 중이 불상을 몰래 돌려 놓고, ‘불상이 저절로 돌아섰다.’고 선전하여 서울의 佛信徒들이 다투어 施主하고, 이러한 소문이 전국적인 화제가 되고 조정에서도 연일 이 문제를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으며, 대간들은 번갈아 글을 올려 그 중을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김굉필은 이러한 非違를 제거할 것을 건의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려 그 간사한 정상을 철저히 추궁하여 시장에서 사형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이때의 상소가 바로 경자상소이다. 이 상소문은 김굉필이 현실적으로 부딪쳐 있는 문제를 어떠한 이론적 기저 하에 해결하려 했느냐를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다. 특히 이 부문은 불교에 대한 당시 김굉필의 견해를 살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현실 참여적인 사상을 살펴보는 좋은 내용이기도 하다. 상소문에서 김굉필은 儒釋同異之辨을 論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무릇 일에는 마땅히 하여야 할 것이 있고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이 있으니 그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은 바르고(正) 곧은 것(直)이며, 그 마땅히 버려야 할 일은 비뚤어짐(邪)과 굽은 것(曲)입니다. 지금 儒釋의 同異를 논하면 그 道와 文이 다르고 그 法과 行이 다릅니다. 儒는 그 道가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의 五倫에 있고 그 文은 詩經 書經 周易 春秋요, 그 法은 禮樂과 刑政이요, 그 行은 服仁守義(仁을 行하고 義를 지키는 것)이므로 그 道는 밝히기가 쉽고 그 敎는 行하기 쉬운 것입니다. 이것으로 자기를 위하면 순리하여 평안하고, 이것으로 남을 위하면 사랑하고 공평하며, 이것으로 천하국가를 다스리면 어디에서나 합당하지 않은 곳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佛은 그 道가 君臣을 버리고, 父子 관계를 버리고, 사람이 생산하고 양육하는 것을 버리고는 그들이 말하는 청정적멸(淸淨寂滅)만을 추구합니다. 그 文은 금강(金剛), 반야(般若), 능엄(楞嚴), 법화(法華)경 등이며, 그 법은 觀空見性(空을 觀하고 性을 깨닫는 것), 그 행은 ?言絶穀(말하지 않고 단식하는 것)이니, 그 도리는 허무요, 그 교리는 헛되며 망령스러운 것입니다.대개 위와 같은 내용이 그의 상소가운데서 말하는 儒와 釋의 同異論인데 이를 요약하면 儒는 五倫과 齊家治國平天下之道를 말하는 것이고, 佛은 一身의 淸淨寂滅만을 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성종의 임금 됨이 명철하여 사찰을 헐고 승군을 만들고 儒術과 文德을 크게 하시었다는 지적과 함께, 근자에 불자들의 해괴한 소문에 대해 어떠한 바로 세움도 없이 유야무야 넘어가고 있는 자들을 크게 징벌할 것을 상소하는 내용도 보인다. 그 책을 불사르고 그 절은 살림집으로 하며, 선왕의 도를 밝혀서 인도한다면, 홀아비, 과부, 고아, 무자식한 자와 병든 자를 나라에서 扶養하게될 것입니다. … 불상을 몰래 돌려 세워놓고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소문을 퍼뜨려서, 사방의 남녀들이 바람에 쓰러지듯 다투어 몰려들어 옷을 벗어서 보시하며 돈을 흩어서 바치는 자가 문을 메우고 뜰에 가득하여 그 수가 셀 수도 없사오니 … 죄는 경하고 중한 것이 있는데, 지금 이 중들이 감히 거짓을 꾸며서 위로는 전하를 속이고 아래로는 公卿과 士庶人을 속였으니, 이는 온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마다 모두 그 술책에 빠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 이를 징계하지 않으면 뭇 사람의 의혹을 무엇으로 풀겠으며, 간사하고 거짓을 꾸미는 무리를 무엇을 징계하시겠습니까. ……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日月과 같은 밝으심을 돌리고 뇌정(雷霆) 같은 위엄을 베풀어, 죄악의 우두머리가 되는 중을 철저히 신문(訊問)하여 市街에서 死刑을 집행함으로써 …… 당시 큰 고을에는 절이 많으면 백여 개소나 있고, 적어도 6?70 개소가 있었으며, 작은 고을에는 많으면 5?60 개소나 있고, 적어도 3?40 개소는 있었으며, 거주하고 있는 중은 큰절에는 많으면 백여 명에 달하며, 적어도 6?70명은 되었습니다. … 옛날에 한 사람이 농사를 지은 것을 가지고 열 사람이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한 사람이 지은 농사를 가지고 천백 사람의 먹을 것을 어떻게 당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죄악의 우두머리가 되는 중을 철저히 신문하여 시가에서 사형을 집행할 것과 나라의 생업을 좀먹는 僧徒의 肅正을 호소하였다. 또한 言路를 열어 허심탄회하게 말하는 신하를 신문(訊問)하지 말고, 나라 위함이라 하여 너그러이 해 주시고 사교의 우두머리를 처벌하시어 시정에 뭇 의혹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바르고 의로운 일에 준열한 자기 반성과 통찰함으로 나라의 기강을 바로 해야 한다는 김굉필의 도학에 바탕을 둔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김굉필은 인간의 정당한 생활 방식으로서의 道와 사람이 행해야 할 올바른 도리를 궁구하는 학으로서의 道學을 모두 진흥시켰다는 점에서 공을 인정해 줄 수 있겠다. 또한 道學은 성리학적 이론과 그 실천을 함께 가지며 실천궁행을 강조하므로 ‘성리학적 실천유학’이라 정의할 때, 김굉필에게서 修身齊家로서의 修己의 道學과 治國平天下로서의 治人의 도학의 양면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양면은 둘이 아니고 근원이 하나임도 알 수 있겠다. Ⅲ. 김굉필의 교육활동 김굉필은 戊午士禍로 인한 流配 중에도 후진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였다. 평안도 희천에서의 교육활동과 移配地 순천에서의 교육활동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희천에서의 교육활동 김굉필이 희천에 머무르게 된 역사적 배경은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로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결에서 훈구파가 득세한 후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빌미 삼아 김일손 등 김종직의 제자들을 몰아내고 죄의 경중에 따라 사형과 귀양을 보내면서였다. 점필재 김종직의 문도였던 김굉필은 장 80대를 맞고 평안도 희천으로 귀양을 가 3년간(1498-1500)을 머물렀다. 희천에 있으면서도 비록 멀리 계시는 편모이지만 효경의 도리를 다하였고, 문교의 혜택을 열어 미개한 풍속을 교화하는데 힘썼는 바, 소학에 기초한 유학사상을 펼침으로써 마침 어천에 머물던 조광조가 제자로 들어오는 등 사람들이 줄을 이어 배우기를 청하니, 평안도의 학풍이 열리게 되었다. 김굉필과 조광조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김굉필이 멀리 고향에 계신 어머니에게 보낼 꿩을 삶아 말리는데 고양이가 도둑질해 먹고 말았다. 김굉필(당시45세)이 지키던 계집종을 크게 꾸짖으매 말이 너무 높고 기색이 지나쳤다. 이에 정암 조광조(당시14세)가 앞에 나아가 여쭙기를 “부모에게 봉양하는 정신이 비록 간절하시지마는, 군자가 말과 기색을 살피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니 小子가 마음에 그윽히 의심됨이 있으므로 감히 여쭙습니다.”하니, 김굉필이 일어나 손을 잡으며나도 바야흐로 스스로 뉘우치는데 네 말이 또 이와 같으니, 내가 절로 부끄러워 굴복한다. 그리고 네가 나의 스승이요, 내가 너의 스승이 아니로다(吾方自悔 而汝言又如此 吾不覺愧服也 且汝乃吾師 吾非汝師也).하고 그 뒤로 정암을 더욱 중하게 여겼었다한다. 이것은 소학에 나오는 불이과(허물을 두 번 다시 짓지 않는다.)라는 덕목을 배운 것이다. 이처럼 자식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크게 드러나고,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사제간에 서로의 인격과 心志를 이해하고 존경하는 면을 배울 수 있다. 소학을 통한 정암 조광조와 김굉필과의 만남은 정암 조광조의 도학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것은 김굉필의 스승인 점필재 김종직(당시56세)이 일찍이 이조참판에 올라 있을 때, 조정에 건의를 아니하고 있어 김굉필(당시 33세)은 시로써 스승을 풍자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일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멀어졌다고 남추강의 사우록에 나와 있는데, 이를 비교하면 이 두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가 뚜렷하다 할 수 있다. 김굉필이 배소에서 행한 교육활동은 평안도 희천에 있을 때 어천에서 찾아온 조광조에게 그의 학문을 전수함으로써 도학정치사상을 심어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유배 중에 후진교육은 쉬운 일이 아니며 연산군 치하의 정치상황에서는 더욱 어려웠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후학을 가르치고 계도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므로 평소에 원근에서 모여든 학도들이 집안에 가득하였고, 날마다 경서를 소지하고 강당에 모여든 사람들로 자리가 부족하여 그들을 다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 2. 순천에서의 교육활동 김굉필의 학연이 전라도에 미친 것은 5년간에 걸친 유배생활과 관계 있다. 1498년 무오사화 때 평안도 熙川에 유배되었던 그는 2년 뒤(1500) 전라도 순천에 移配, 그 때부터 1504년 갑자사화로 賜死되기까지 5년 동안 순천에 기거하였다. 그의 호남 출신 제자들로는 崔忠成?李勣?尹信과 崔山斗?柳桂隣?孟權?張自鋼 등이 알려져 있다. 전자 3명은 뚜렷한 행적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무오사화 직전 김굉필이 서울에 거주할 때 그 문하에 출입하던 문인들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가 사사된 직후 지리산에서 도보로 내려와 모두 함께 問喪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순천에서도 접촉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후자 4명은 순천에서 김굉필과 사제관계를 맺은 것이 확실하다. 그 가운데 특히 최산두와 유계린은 16세기 호남지역의 사림 형성에 있어서, 그리고 김굉필의 학통을 다음 세대까지 잇는 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들이다. 최산두(1483~1536)는 기묘사화 때 同福에서 15년간 유배생활을 보낸 기묘명현으로서 유배지에서 장성의 金麟厚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김굉필의 학통이 최산두를 거쳐 김인후에게 이어진 다음, 김인후는 鄭澈?奇孝諫?卞成溫?梁子徵 등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유계린(1478~1528)은 진사 公濬의 아들로 순천에서 생장하여 孟權과 함께 김굉필에게 글을 배웠다. 그는 김굉필의 동갑 契員이면서 학문의 道를 같이했던 崔溥의 사위가 된 후부터 주로 처향인 해남에 거주하였다. 그러나 장인 최부가 무오사화를 당하여 함경도 단천에 유배된 뒤, 그의 장인과 가장 가까웠던 벗 김굉필이 순천에 移配되어오자 다시 순천에 돌아와 김굉필을 모시면서 그 제자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굉필과 최부는 김종직 문하의 동문으로서 무오년에 화를 입었고 훗날 갑자사화 때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는 점에서, 유계린은 김굉필을 스승 겸 장인처럼 여겼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학연과 인맥에서 두 사람의 영향을 함께 받았으며, 그것을 다시 그의 두 아들 성춘?희춘에게 이어주었다. 유성춘은 기묘명현으로서 기묘사화 직후 28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타계하였다. 그러나 유희춘은 을사명현으로서 선조 때까지 학명을 떨치면서 崔尙重?梁澍(양주)?曺大中?羅德峻 등에게 학맥을 이어주었다. 김굉필의 학연이 최산두?유계린 등을 거쳐 김인후?유희춘 등에게 이어짐으로써 이후 호남지역의 사림 흥기에 중요한 계기가 이루어졌다. 김굉필의 학문과 사상이 호남지역에 접목될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순천에서의 유배생활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우선 유배지의 후진들에게 비친 그의 면모는 같은 배소의 동료와는 대조적이었다. 그 예를 순천의 지방사료를 통하여 살펴보기로 한다.늙은 아전의 이름은 張雨同인데 나이 80여 세에 이르렀을 때 龜巖 李禎(1563~1566년 순천부사로 재임)이 두 선생의 遺事에 대하여 물었다. 張老吏가 말하기를 “내 나이 18~19세 때 曺參判(曺偉)은 의주로부터, 金佐郞(金宏弼)은 희천으로부터 순천부에 移配되어왔는데 조참판은 서문 밖에 살았고 김좌랑은 북문 밖에 기거하였다. 또 조참판은 고을 노인들과 자주 어울려 옥천변에 노닐면서 노거수 아래에 돌을 쌓아서 臺를 만들어놓고, 때로는 바둑을 두거나 술을 마시기도 하고, 때로는 시를 읊조리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편 김좌랑은 때때로 홀로 老巨樹 밑 臺 위를 배회하였으나 시 읊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참판은 병으로 1년 먼저 세상을 떠났고 좌랑은 마침내 갑자사화를 당하여 변을 당했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유배지에서 보인 두 사람의 면모를 단적으로 나타낸 것으로서, 도학자 김굉필의 행동이 풍류를 즐긴 시문장가 조위와는 전혀 달랐음을 말해준다. 김굉필이 이와 같은 풍류의 모임에 어울리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칙신제행(飭身制行)의 엄격함을 알 수 있다. 김굉필이 순천 유배지에서 5년씩이나 보내면서 그가 현지의 유림사회에 남긴 교육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修己治人의 도학이념을 實踐躬行했던 교육의지는 유배지 순천에서도 다름이 없었다. 이는 유희춘이 전해주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옥천군수 金立이 찾아와 그의 조부 한훤당 김굉필의 遺事에 대하여 서로 말하였다. 김굉필이 순천에 계실 때 나의 先親과 孟權氏가 그 분 밑에서 글을 배웠는데 맹권씨의 모친 설씨 부인이 자식교육을 위해 정성껏 선생을 대접했다는 것이다. 뒤에 선생이 갑자사화로 참혹한 화를 당했을 때, 연산군의 명으로 家産까지 몰수당해 선생의 治喪조차 어렵게 되자 설씨 부인이 喪事의 비용까지 마련해주었다고 한다.여기에서 유희춘이 지적한 선친이란 김굉필의 문인이었던 유계린을 말한다. 그는 이적?최충성?윤신?임우리 등 김굉필의 다른 제자들이 그랬듯이 그 역시 평생을 隱逸로 마친 인물이었다. 스승 김굉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그의 道學風의 행동은 아들 유희춘의 문집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김굉필이 노비들에게도 가족처럼 관심을 가졌던 것처럼 그 역시 그러하였고, 나이 30세가 되어서도 문밖 출입을 함부로 하지 않고 幽貞함을 즐기며 두문불출하였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특히 그는 스승의 ?가범? 가운데 ?居家儀?를 모방한 것으로 보이는 ?居家篤行十條?를 유희춘에게 남겼는데, ?眉巖集?에 수록된 庭訓(정훈 10훈과 정훈 내?외편 포함)의 내용은 그 대개가 김굉필로부터 이어받은 도학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김굉필의 학문과 사상적 영향은 유계린 외에 최산두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구체적인 사료가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것을 알 수가 없다.
Ⅳ. 김굉필의 교육사상 김굉필의 교육사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나 寒氷戒, 家範, 道東書院 規約 등을 보면 그의 교육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들을 찾아 정리하는 작업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것도 느낄 수 있다. 이제 그의 저술인 한빙계와 가범의 내용을 분석하고 도동서원 규약 내용을 검토하여 김굉필의 교육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1. 寒氷戒에 나타난 교육사상 1) 寒氷戒의 저술 도학적인 면모에서 더 나아가 김굉필의 교육사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寒氷戒라는 저술이다. 김굉필의 저술이 많았겠지만 戊午士禍 때 소실되어 온전히 전해 오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寒氷戒는 金宏弼이 43세 때인 1496년(연산군 2) 사헌부 감찰로 있으면서 玉溪 潘佑亨에게 師弟의 緣을 맺고 써 준 것이다. 이 ‘한빙계’는 김굉필의 교육사상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遺著라고 하겠다. 潘玉溪의 哭史禍詩序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옥계 반우형은 평소 ?畢齋와 그의 문인 寒暄堂 金宏弼?一? 鄭汝昌?濯纓 金馹孫의 도덕과 문장을 흠모하여 그 덕을 보며 그의 문장을 외웠었다. 반옥계가 연산군 2년(1496) 가을에 김굉필(43세)에게 제자의 예로 뵈오니 선생이 굳이 사양하기를 ‘文甫(潘佑亨의 字)는 나이가 나보다 다섯 살이 적고 벼슬은 나보다도 높으니, 벗을 한다면 할 수 있으나 스승이라는 것은 불가하다’고 했다. 이때 반옥계는 말하기를 ‘道가 있는 곳에 스승이 있는 것이니, 어찌 연령의 다소와 벼슬의 차등을 논하오리까’한 즉, 김굉필은 말하기를 ‘오는 사람을 어찌 거절할 수 있으랴마는 오늘날 선비들의 풍습이 東漢시대의 풍습과 같으니 장차 뜻밖의 禍變이 박두하겠으므로 동지들과의 교제를 끊는 사람이 많은데, 하물며 다시 남을 가르칠 수 있느냐’ 하였다. 반옥계는 오도 가도 못하게 되어 다시 말씀 드리기를 ‘아침에 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습니다.’한 즉, 김굉필이 반옥계의 성의가 확고함을 보고 마침내 이르기를 ‘서적을 널리 보고 문장에 풍부하면서도 배우기를 원하는 바는 오직 道로다. 道란 것이 어찌 별다른 것이랴. 아들이 되어서는 마땅히 효도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마땅히 충성할 것이며 나머지도 모두 이에 따라서 행하여 간다면 모든 사물이 일상 생활에서 당연한 이치가 아님이 없을 뿐이다.’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은 매우 위급했던 모양이다. 한빙계의 내용 대부분이 戒懼로 일관하고 있는 것에서 당시 士林들의 目前에 가로놓인 위기를 짐작할 수 있겠다. 18조로 되어있는 한빙계를 짓게 된 동기에 대해서 김굉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潘君 佑亨이 나를 스승(非泰之右)으로 대접하려 하였다. 나는 너무 과분하다고 사양하였으나 그는 말하기를, ‘이것은 우형 자신의 본뜻일 뿐 아니라, 선친이 평소에 하신 말씀이 있었다’하므로, 나는 그의 효성에 감동되어 이를 거절하지 못하였다. 三餘(독서하기에 적당한 세 가지의 餘暇, 곧 겨울, 밤, 비올 때를 일컬음)의 틈을 이용하여 그와 함께 공부를 해야 되겠지만, 내가 문을 닫고 들어앉아 방문객을 사절한 지가 오래인지라, 그는 곧 돌아가게 되었다. 나의 마음이 매우 섭섭하여 마침내 자신을 수양하며 事物에 대응하는 방법 몇 가지 조항을 손수 써서 한빙계라는 제목을 붙이어 떠나는 그에게 주고, 또한 나 자신도 경계하려 하노라. 공자가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고 말한 道란 진리를 뜻한다. 공자가 열 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는 말도 바로 이 道에 뜻을 두었다는 뜻이다. 김굉필과 반우형의 대화에서 나타난 학문도 바로 이 道를 가리키는 것이다. 오늘날의 학문이 지식의 증가를 목표로 하고 있다면 道란 정신의 함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김굉필이 반옥계에게 ‘한빙계’를 써서 주면서 말한 다음 글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옛 사람의 말에 靑色이 쪽(藍)에서 나왔으면서도 쪽보다 푸르고, 얼음(氷)이 물에서 나왔으면서도 물보다 차다고 한 것은, 제자가 스승보다 나은 것을 칭찬한 말이다. 너의 재주와 덕으로써 비록 학문을 늦게 시작하였다 하나, 어찌 내가 가르친 「소학」만을 공부하고 그칠 것이랴. 그러므로 청색과 얼음이라 하지 아니하고 특히 찬 얼음의 경계(寒氷戒)라고 쓴 것은, 그 공부가 나보다 훨씬 높기를 바라는 동시에, 엷은 얼음 밟듯 하라는 뜻으로 경계함이다. 소학에 이르지 아니하였는가. 曾子 말씀에, ‘깊은 못에 다다른 듯 엷은 얼음 밟듯 하라.’ 하신 것은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함이 지극한 것으로, 실로 「소학」을 공부하는 대강령이 되는 것이니 인의예지, 효제충신과 생각이 사특함이 없을 것과, 공경하지 아니함이 없을 것과 공경함이 태만함을 이겨 낼 것과, 구사와 구용과 쇄소응대하는 것과 스승을 높이며 벗을 친하는 도리가 모두 이 門戶를 통과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정성이 깊지 아니하면, 經을 배우는 것은 한갓 겉치레만 되고 실지의 공부가 없는 것이다. 제자가 스승보다 낫다는 것을 칭찬하는 말로 靑色은 藍에서 나왔어도 藍보다 푸르고 얼음은 물에서 나왔어도 물보다 더 차다는 말이 있는데, 김굉필은 자신을 수양하며 事物에 대응하는 방법 몇 가지 조항을 손수 써서 寒氷戒라는 제목을 붙이어 떠나는 반우형에게 주고 자신도 경계하려 한다고 하였다. 한빙계의 내용은 動靜有常?正心率性?正冠危坐?深斥仙佛?痛絶舊習?窒慾懲忿?知命敦仁?安貧守分?去奢從儉?日新工夫?讀書窮理?不妄言?主一不二?克念克勤?知言?知幾?愼終如始?持敬存誠 등 18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하나 하나의 조문에는 그의 교육사상이 지향하려는 뜻이 잘 나타나 있다. 2) 寒氷戒 18條의 내용 한빙계 18조의 내용을 중심으로 김굉필의 교육사상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1) 動靜有常(活動과 安靜에는 常道가 있다.) 하늘의 道는 둥글어서 움직이며 땅의 道는 반듯하여 안정해 있다. 陽은 생기면서부터 활동하며 陰은 생기면서부터 안정되어 있다. 그런즉 안정은 곧 활동의 기본이다. 그러므로 하늘은 땅을 기본으로 삼으며, 陽은 陰을 기본으로 삼는다. 天下의 모든 물건이 기본이 없이 생기고 이루어지는 것은 없는 것이다. 하늘의 바람, 비, 우뢰, 번개가 변화하며 움직이지마는 모든 물건이 땅에 의존하니 이것은 안정에 기본을 두는 것이다. 사람은 仁義禮智가 변화하며 움직이지마는 모든 이치가 몸에 갖추어 있으니 이것은 안정함에 기본을 둔 것이다. 이것은 하늘, 땅, 사람이 활동하며 안정함의 떳떳한 이치이다.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그릇(器)을 몸에 간직하였다가 때를 기다려 쓴(用)다 하였으니, 그릇을 간직한다 함은 道의 본체니 곧 안정함이요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道의 작용이니 곧 활동함이다. 안정하지 아니하면 그릇이 본체를 이루지 못하여 활동할 때에 쓸 것이 없다. 안정한 가운데서 그릇을 이루어 놓았다가 때를 기다려 활동한다면 무엇인들 되지 아니하리요.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마땅히 안정함으로써 주장을 삼아 함부로 움직이지 않아야 된다. 이 글은 공부하는 사람이나 독서하는 사람은 마땅히 안정함으로써 바탕을 삼아서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공부할 때나 독서할 때 더욱이 안정함을 지키는 것이 선비가 가야할 도리라는 것이다. 성취의 욕구가 강한 나머지 때로는 망령된 거동을 취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함몰한 경우가 많은 것을 경계하여 준 김굉필의 충정을 잘 읽을 수가 있다. (2) 正心率性(마음을 바르게 하여 性을 따르라) 마음이 바르지 아니하면 사욕이 서로 침공하고, 性을 따르지 아니하면 나쁜 생각이 함부로 침노할 것이니, 굳세게 철저히 반성하여 私를 치고 악을 치기를 적소(赤?)로 뱀을 베며 황간(黃間)으로 범(虎)을 쏘듯 하여야 한다. 그런 뒤에는 내가 이겨 내지 못할 염려가 없을 것이다. 사욕과 나쁜 생각이 생긴 뒤에 이를 퇴치하는 것은 미리 방지하는 것의 요긴함만 못하다. 마땅히 두 번 생각함으로써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세 번 반성하여 그 性을 따르게 할 것이다. 人心은 위태로우며 道心은 은미한 것이니, 바로잡아서 수양해야만 위태로운 것이 편안해지고 은미한 것이 나타난다. 관습에서 생기는 성격은 조급하며, 타고난 天性은 바른 것이니 천성을 따라서 이를 인도하여야 조급한 것이 바르게 되며 바른 것(貞)이 밝아지리라. 이 글은 관습에서 생기는 성격은 조급하며 타고난 천성은 바른 것이어서 천성을 따르면 조급함이 바르게 되며 바른 것도 더욱 바르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심리적 근거를 마음에 두고 그 마음이 바르게 나아갈 때 좋은 성격을 형성하게 된다. 즉 사람의 성격은 관습에서 생기는 것을 무시할 수 없으니, 마음을 잘 다스려 하늘에서 준 좋은 성격을 간직해야 된다는 것이다. (3) 正冠危坐(갓을 바로 쓰고 똑바로 앉아라) 마음 속의 이치가 곧으면 바깥 몸이 반드시 단정하여지나니 거처를 공손히 하며 편안할 때에 반드시 위태할 것을 생각하자. 눈길을 존엄하게 하는 것이나 앉기를 시(尸)와 같이 하라는 것은 모두 공경함을 이른 것이다. 어찌 감히 방자하고 태만하리요. 갓(冠)을 바로 쓰지 않은 것을 보고 버리고 가는 이도 있고, 다리를 뻗고 앉은 것을 보고 감정을 품은 이도 있었다. 威儀를 잃는 것은 학문하는 데에 큰 병이니 공경히 하라, 공경히 하라. 이 글은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理致가 곧으면 마음의 밖에 있는 몸이 반드시 단정하게 되어지니 거처를 공손하게 하며 편안할 때에는 반드시 위태로움을 생각하라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위엄 있는 거동을 잃어버리는 것은 학문하는데 큰 변동을 가져올 것이니 공경한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으로서, 다시 말하면 마음의 가짐이 바르면 행동양식도 바르게 나타나는 것이고, 또 바른 태도를 자주 갖다 보면 마음도 바르게 되니 마음 밖의 몸도 단정히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4) 深斥仙佛(仙과 佛을 깊이 배척하라) 神仙이란 方士들의 허탄(虛誕)한 말인데 秦始皇이 藥을 캔다는 데에 속임을 당하였으며, 부처(佛)란 것은 적멸(寂滅)의 道인데 漢나라 明帝가 불경을 수입해 들어왔으므로 후세에 비방을 듣는다. 이로부터 그 뒤에 간간이 거기에 빠져서 돌아오지 못하니 左道가 사람을 미혹시킴이 심하도다. 우리 동방이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사찰이 더할 수 없이 번성하고, 崔孤雲 같은 높은 선비도 신선과 부처에게 의탁하였으니 어찌 해괴하지 아니한가. 나는 매양 안회헌(安晦軒=裕)의 ‘香과 촛불로 곳곳마다 다 부처에게 기도하고 퉁소와 피리로 집집마다 다투어 굿을 하는데, 오직 두어 간 공자의 사당에는 봄 풀이 뜰에 가득하고 적막하게 사람이 없구나.’ 한 시를 욀 때마다 세 번 되풀이하여 외며 탄식하지 아니하지 못하였다. 학자는 항상 邪道를 배척하는 마음이 있으면 자연히 道에 향하여 바른 데에 점점 물들 것이다. 이 글은 특히 학자는 항상 邪道를 배척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저절로 道를 향하여 바른 곳을 찾아 들어가게 된다는 것으로서, 다시 말하면 유가의 道만이 正道이고 仙(道敎)이나 佛(佛敎)은 邪道이니 유학을 공부하는 이는 이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5) 痛絶舊習(옛 버릇을 철저히 없애라) 지금의 벼슬하는 자들은 대개 출세에 조급하여 의리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구멍(穴)을 뚫고 담을 넘어 서로 엿보아 첩(妾)들과 같은 행동을 즐기고 있다. 벼슬을 얻으려고 걱정하며 놓칠까 걱정하여 못할 짓이 없나니, 이것이 어찌 도에 뜻을 둔 자가 할 짓이랴. 어려서 배워 장성해서 실천하려던 뜻은 허탕으로 돌아가고, 버릇이 천성처럼 되어 일생을 마치도록 깨닫지 못하나니 딱한 일이다. 이 버릇을 철저히 없애야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점점 道의 맛있는 경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 글은 지금 벼슬하는 이들은 대개 출세에 조급하여 義理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다는 내용으로서, 이는 도에 뜻을 둔 자가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려서 잘 배우지 않은 채 장성하여 실천하려면 뜻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고 나쁜 버릇이 천성처럼 되기 때문에 일생을 마칠 때까지 깨닫지 못하게 되어지니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이러한 버릇을 철저히 없애야만 좋은 사람도 될 수 있고 점점 도의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으로서, 이것은 김굉필 자신이 어렸을 때의 일을 회상하며 몸소 체험한 느낌을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젊어서 출세에만 급급하여 의리를 저버리고 행동하면 이것이 타성이 되어 도의 경지에까지 가지 못하는 못난이가 되기 쉬우니 의리를 지키는 선비로서 큰 길을 가야 대성한다는 뜻이다. (6) 窒慾懲忿(욕심을 막고 분함을 참아라) 사람의 욕심은 음식과 남녀 관계보다 더한 것이 없다. 禮를 가지고 억제하지 아니하면 누가 貪하고 음란한 짓을 하지 않겠는가. 사람의 분노는 벼슬과 재물을 다투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義로서 재단(裁斷)하지 아니하면 누가 간악하고 낭패(狼狽)되는 데에 이르지 아니하랴. 그러므로 聖人이 예의로 이를 제약하여 가르치며 지도한다. 공부하는 사람이 언제나 ‘무죄한 사람 하나를 죽이고 천하를 얻을 수 있어도 그것은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분함과 욕심이 스스로 없어지고 도리가 절로 밝아지리라. 이 글은 사람의 욕심은 음식과 남녀관계보다 못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聖人이 禮儀道德으로 이를 제약하여 가르치고 지도하는 것이다. 특히 공부하는 사람이 언제나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천하를 얻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하지 않겠다는 마음만 가지면 분함과 욕심이 스스로 없어져서 도리가 저절로 밝아진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욕심이 지나쳐서 배운 사람도 천하를 얻으려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분함을 참지 못하여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聖賢의 가르침인 道에 밝아지는 것이 道理인데, 이것에 따라 욕심을 버리고 분함을 참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7) 知命敦仁(命을 알고 仁을 도탑게 하라)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命을 아는 고로 걱정하지 아니한다.’ 하였고 또 말씀하시기를 ‘仁에 돈독한 고로 능히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였다. 이 글은 공자의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하늘의 命을 알고 仁에 가까이 하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自然法則의 眞理는 人間的 道德法則으로써 仁의 眞理와 서로 통하기 때문에 그것은 人間愛의 도덕성을 뜻하는 것이다. (8) 安貧守分(가난을 편안히 여기며 분수를 지켜라) 하늘이 뭇 백성을 내고 각각 나누어 준 직분을 갖게 하였으니, 감히 어기고 넘지를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모두 부자가 되기를 원하나 부자 되기는 어렵고 가난하기가 쉬운 것은 분수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은 天機가 높지 못하여 가난함을 싫어하며, 부자 되기를 구하여 분수 밖의 일을 지나치게 행한다. 비록 용한 꾀를 내어 교묘히 행하여도 마침내 법망에 걸림을 면하지 못하여, 심하면 몸을 망치고 자손이 끊어지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가히 두려워하지 아니하랴.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富貴를 만일 구하여 얻을 수 있다면, 비록 말(馬) 채찍을 잡는 천한 일이라도 내가 하겠다마는, 해서 되는 것이 아닌 바에는 내가 좋아하는 바(道德)를 따르리라.’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선비가 道에 뜻을 두면서 좋지 못한 옷을 입으며 좋지 못한 음식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는 더불어 말할 것도 없느니라’ 하였으니, 구한다고 반드시 얻지 못할 바에야 도리어 나물밥에 굵은 베옷으로 지내는 나의 생활을 만족히 여기면서 道를 즐기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아름답도다, 어진 선비는 주로 그의 處地를 생각하라’하였으니 窮하여서는 홀로 그 자신을 착하게 하고, 出世하여서도 天下 사람에게 모두 착하게 하라. 이 글은 선비가 道에 뜻을 두면서 거친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지적과 함께, 구한다고 반드시 얻어지지도 못할 바에야 도리어 나물밥에 굵은 베옷으로 지내는 나의 생활을 만족하게 여기면서 도를 즐기는 편이 오히려 낫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비정신이란 가난이나 출세에 구애되지 않고 道를 追求해야 된다는 修身의 道를 말하는 것이다. (9) 去奢從儉(사치를 버리고 검소하게 하라)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사치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하게 하라’ 하셨으니 어찌 예절만이 그러하리요. 지금 풍속이 옛날과 달라서 사치와 화려함을 다투어 숭상하여, 정원을 넓고 크게 하고 비단옷을 입고 진수성찬을 먹는 것을 호걸스러운 풍치(風致)로 생각하므로, 선비들의 풍습도 거기에 따라 빠져 들어가서 道를 아는 자가 적으니 애달픈 일이다. 사치라는 것은 하늘이 낸 물자를 함부로 없애는 도둑이다. 옛날로부터 사치를 숭상하여 그 끝까지 사치스런 생활을 보존한 자는 없었다. 검소하고 절약하는 것은 사람과 물자를 유지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검소함을 숭상하면서 검소하기 때문에 잘못되는 일은 듣지 못하였다. 道에 배반하는 자로서 검소한 자는 적고 道를 지향하는 이는 사치를 버리는 자가 많다. 이 글은 사치는 하늘이 내려준 물자를 함부로 없애는 도둑이라는 것이다. 옛날부터 사치를 숭상하여 끝까지 사치스런 생활을 보존한 자는 없었다는 내용과 검소하고 절약하는 것은 사람과 물자를 유지하는 중요한 방법으로서 검소함을 숭상하면서 검소하기 때문에 잘못되는 일은 듣지 못하였다는 내용, 도에 배반하는 자로서 검소한 이는 적었다는 사실과 도를 지향하는 이는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한 생활을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0) 日新工夫(날마다 새로워지도록 공부를 하라) 오늘 당연한 이치대로 행하고 내일 당연한 이치대로 행하여 일상생활이 당연한 이치대로 하지 않음이 없으면, 곧 날이 달이 되고 달이 해가 되어 仁을 쌓고 義를 쌓아서 그의 극치에 이르게 되면, 강물을 터놓음과 같아서 좍 쏟아지는 것을 막을 수 없음과 같게 될 것이다.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날마다 새롭게 되는 것, 이것이 盛한 德이다.’ 하였다. 이것을 두고 이름이다. 벌써 내일까지 기다려 보자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옳지 않다. 이 글은 공자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즉 ‘날마다 새롭게 되는 것 이것이 성한 덕이다.’고 한 것으로 벌써 내일까지 기다려 보자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옳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날마다 새로워지게 공부를 하자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매일 매일 해 나가야 한다는 것으로 학습하는 태도와 방법을 뜻하는 것이다. (11) 讀書窮理(글을 읽어 이치를 연구하라) 글을 읽는 법은 많이 보기를 탐내고 널리 읽기를 힘써서는 안 된다. 넓기만 하고 요령이 적은 것보다는 간추려서 요령을 얻도록 하는 것이 옳다.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아 공경히 책을 대하여 익숙히 읽고 뜻을 음미하면 그 이치가 스스로 나타날 것이고, 이치가 나타나면 곧 肉味가 입맛에 좋은 것과 같을 것이니, 단단히 씹어서 소화시킨 뒤에 곧 다른 책을 읽을 것이다. 만일 聖人의 글이 아닌 것을 읽는다면 비록 하루에 萬字를 왼다 할지라도 우리의 무리가 아니다. 이 글은 글을 읽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데, 많이 보기를 탐내고 널리 읽기를 힘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넓기만 하고 요령이 적은 것보다도 간추려서 요령을 얻도록 하는 것이 옳다는 독서의 방법을 밝히고 있다. 즉 독서는 많이 읽고 빠르게 읽는 것보다는 요령 있게 간추려 그 이치를 이해하며 읽는 것이 좋다는 뜻으로 선비들의 독서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12) 不妄言(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방안에서 말을 하여도 그 말이 착하면 千里 밖에서 이에 호응하는데, 하물며 그 가까운 데에 서랴. 방안에서 말을 하여도 그 말이 착하지 아니하면 천리 밖에서 이에 반대하는데, 하물며 그 가까운 데에 서랴. 말은 몸에서 나와 백성에게 퍼지고, 행실은 가까운 데서 출발하여 먼데에 나타나는 것이니, 말과 행실은 君子의 추기(樞機)인 것이다. 추기의 출발은 영화롭고 욕되는 기본이다. 말과 행실은 군자가 천지를 움직이는 것이니 삼가지 아니하면 되겠는가.’ 하였고, 또 말씀하시기를 ‘亂이 생기는 것은 언어가 그 매개가 되는 것이다. 임금이 기밀을 지키지 못하면 신하를 잃고 신하가 기밀을 지키지 못하면 몸을 잃고, 일기에 기밀을 지키지 못하면 해가 생기는 것이니, 이로 인해 군자는 삼가고 비밀히 하여 함부로 내지 않는다. 말과 행실이 이렇게 엄하고 어려운 것이다. 지금 많은 선비들은 그 기개를 높이 올리며 의논이 바람일 듯하여 꺼리는 바가 없으니, 그들에게 患亂이 닥칠까 염려된다. 그러나 집집마다 다니면서 타이를 수는 없다. 그대는 조심할지어다. 말을 삼가는 방법은 정성스러움과 공경함에 있다. 그러므로 정성스러움과 공경함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하였다. 이 글에서는 말과 행동은 君子가 天地를 움직이는 것과 같은 것이니 삼가 하여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것과 말을 삼가 하는 방법은 정성스러움과 공경함에 있으므로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데서부터 정성스러움과 공경함은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언행을 일치하여 모든 일에 임해야 한다는 군자의 도리를 말한 것이라 하겠는데, 즉 선비는 말과 행동에서 정성과 공경을 잃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13) 主一不二(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두 갈래로 하지 말라) 朱夫子가 경재잠(敬齋箴)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기를, ‘그 衣冠을 바르게 하고 눈길을 존엄히 하라. 마음을 안정하고 있으면서 上帝를 대한 듯 하라. 발(足)의 모양은 반드시 무거우며 손(手)의 모양은 반드시 공손 하라. 땅을 가려서 밟아 개미굴에도 걸음을 꺾어서 돌아라. 門에 나설 때에 큰손(賓)을 보는 듯하고, 일을 대하면 제사지내는 것같이 하라.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혹시라도 감히 경솔히 하지 말라. 입(口)으로 지키기를 병마개 닫듯 하고, 뜻을 방비하기를 城과 같이 하라. 삼가고 삼가서 혹시라도 감히 경솔히 말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하지 아니하며, 남쪽에서 북쪽으로 하지 말라. 일을 대할 때에는 마음을 거기에 두고 다른 데로 가지 않아야 된다. 두 갈래로 하여 둘이 되게 하지 말고, 세 갈래로 하여 셋이 되지 않아야 한다. 오직 마음이 한가지로 하여 일만 가지 변화를 주장해야 한다. 이러한 方面에 힘을 쓰는 것을 공경함(敬)을 가지는 것이라 한다. 잠깐만 틈이 생기면 私慾이 만가지로 일어나서, 불이 아니면서 뜨거우며 얼음(氷) 아니면서 차다. 털끝만큼만 틈이 있으면 하늘과 땅이 자리가 바뀐다. 三綱이 이미 없어지고 九法이 또한 무너지리라. 아, 小子여 생각하며 공경하라. 묵경(墨卿)이 경계함을 맡아서 감히 영대(靈臺)에 고한다.’ 하였다. 어떤 이가 묻기를, ‘두 갈래로 하여 둘이 되게 하지 말고, 세 갈래로 하여 셋이 되지 말아야 한다 하며, 동에서 서로 하지 말고 남에서 북으로 하지 말라는 것은 어떻게 구별되는 것인가.’ 하였다. 나는 답하기를, ‘모두 하나의 敬을 형용한 말이다. 경이란 하나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것인데, 처음에 한 가지의 일이 있는데 또 한 가지를 보탠다면, 이것은 곧 두 갈래로 하여 두 가지가 되는 것이요, 세 가지가 되는 것이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하지 말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지 말라는 말은 다만 일심으로 동쪽으로 가다가 또 서쪽으로 가려한다든지 또는 북쪽으로 가려 한다는 것은 모두 하나에 집중함이 아니다. 이것은 마음이 이리저리 달리지 않을 것을 설명한 것이니, 이것은 곧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공부가 극치에 달해야 되는 것이다. 앉는 옆의 벽에다 써 붙여 두고 아침저녁으로 보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아 힘쓰고 힘써서 쉬지 아니하면, 능히 천하의 도리를 모두 연구하여 알아서 전일하게 되는 데에 이를 것이다.’ 하였다. 이 글은 일을 대할 때는 마음을 거기에 두고 다른 데로 가지 않아야 된다는 내용으로서, 두 갈래로 하여 둘이 되게 하지 말고 세 갈래로 하여 셋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며 오직 마음을 한가지로 하여 일만 가지 변화를 주장할 것을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방면에 힘을 쓰는 것을 공경함을 가지는 것이라 한다. 이것은 곧 마음을 오로지 하나되게 하는 공부가 필요한 것임을 말한 것으로 다시 말하면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모든 일에 전념해야만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14) 克念克勤(잘 생각하고 부지런히 하라) 생각하지 아니하면 잊어버리고, 부지런히 하지 않으면 폐지된다. 그러므로(이하는 글이 없어졌음) 이 글은 原文이 다 있지 않고 대부분 失傳하여 있으므로 자세한 뜻은 말할 수 없으나 여기에 있는 부분만 가지고 해설한다면, 늘 생각하여 잊지 않도록 하고 또 부지런히 일에 임하여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즉 늘 깊은 생각과 부지런함을 잊지 말고 열심히 살아가라는 뜻이다. (15) 知言(말을 알라) 書經에 이르기를 ‘사람을 알아보는 이는 哲이니 帝(堯 임금)도 그것을 어렵게 여겼다.’ 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을 알려면 반드시 그 말을 살펴야 한다. 말은 마음의 표현이다.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장차 배반하려는 자는 그 말이 부끄럽고, 마음에 의심을 가진 자는 그 말이 지엽(枝葉)이 많고, 길(吉)한 사람의 말은 적으며, 조급한 사람의 말은 많고, 착한 이를 모함하는 사람은 그 말이 들떠 있으며, 그 지킴을 잃은 자는 그 말이 비굴하다.’ 하였고, 맹자는 말씀하시기를, ‘편파된 말에는 그가 속이는 것임을 알고, 음(淫)한 말에는 그의 빠진(陷)데가 있음을 안다.’ 하였으니, 이 말들을 자세히 깊이 유의하면, 곧 말을 알아듣는 방법은 정말 사람을 아는 거울이다. 배반한다 함은 반역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저버리며 信義를 버림이 모두 그런 것이니, 말이 신의에 배반되고 진실함과 어긋나므로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요, 길한 자는 안정하므로 말이 적고, 조급한 자는 동요하므로 말이 많다. 의심을 가진 자는 자신이 없으므로 말이 지엽(枝葉)이 많고, 모함하는 자는 남을 망치므로 말이 들떠 있고, 지킴을 잃은 자는 스스로 패하였기 때문에 비굴하다. 맹자의 말씀도 역시 이 여섯 가지로써 미루어 알아 낸 것이다. 대저 사람의 정상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仁한 자는 침묵하고, 용맹스런 자는 떠들고, 말을 잘하는 자는 믿음성이 적고, 순하기만 한 자는 결단이 적고, 꾀 있는 자는 음험함이 많고, 글 잘 하는 자는 중심이 적다. 이러한 이치로 미루어 보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며,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면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다. 이 글은 書經에 있는 글을 인용하였는데, ‘사람을 알아보는 이는 哲이니 帝(堯임금)도 그것을 어렵게 여겼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을 알려면 반드시 그 말을 살펴야 한다. 말은 마음의 표현이다. 말을 알아듣는 방법은 정말 사람을 아는 거울이다. 의심을 가진 자는 자신이 없으므로 말의 지엽(枝葉)이 많고, 모함하는 자는 남을 망치므로 말이 들떠있고, 지킴을 잃는 자는 스스로 패하였기 때문에 비굴하다. 이러한 이치로 미루어 보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면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알아보는데 말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즉 말이 많은 사람, 말이 들떠있는 사람, 말이 비굴한 사람 등은 각기 다른 이유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16) 知幾(일의 징조를 알라)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일의 징조를 아는 이는 神이로다. 징조는 움직임의 微細한 것이요, 길하고 흉한 것이 먼저 보이는 것이다. 군자는 징조를 보고는 일어서서 그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지 아니한다.’ 하고, 周易에 이르기를, ‘돌보다 굳고 단단하고 <징조를 보거든> 그날이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으면 바르고 길하다.’ 하였으며, ‘굳기가 돌과 같으니 어찌 하루 해를 마치랴. 단정코 알 수 있을 것이다. 군자는 미세함을 알고 드러남을 알며, 부드러울 줄을 알고 강(剛)할 줄을 아는 것이다. 일만 사람의 신망을 가진 자로다’ 하였다. 그러나 위태로운 징조를 알고도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있으니, 몸을 죽여 仁을 이루어야 할 곳이 있으면 죽음을 보기를 집에 돌아가듯 하여 구차스레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윗사람과 교제하는 자는 반드시 공손하되 아첨이 되는 징조를 알아서 조심하고, 아랫사람과 사귀는 자는 반드시 화평하고 간소하게 하되 위신 없고 실없게 될 징조를 알아서 조심하여, 일에 대해 징조를 알고 사건에 따라 징조를 알아서, 일마다 사건마다 다 그 징조가 있으니 각기 그 도리대로 進退하여 미세한 것, 드러난 것, 부드러운 것, 강한 것을 막론하고 이를 모두 안다면, 어찌 뭇 사람의 큰 신망을 얻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이 글은 상하질서에 대한 처세술로써 윗사람과 사귈 때에는 공손해야하고 또 아첨으로 윗사람을 대하는 이는 조심해야하며 아랫사람과 사귈 때도 부드럽고 고르게 대하여야 하고 위신 없는 행동이나 실속 없는 언행을 삼가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조직사회 속에서 살아가자면 처세술이 중요하며 그 처세술은 위계질서를 잘 지켜가면서 하여야 한다는 등 위계질서의 도덕성을 강조하고 있다. (17) 愼終如始(마지막을 시작할 때처럼 조심하라) 詩經에 이르기를, ‘처음 시작은 없는 사람이 없으나 마지막이 있는 이는 적다.’ 하였으며, 周易에 ‘처음을 추구하여 마지막 있기를 구하라.’ 하였으며, 禮記에 이르기를, ‘처음을 잘하는 이도 마지막을 잘하지 못한다.’ 하였으니, 진실로 마지막을 시작할 때처럼 조심한다면 어찌 聖賢의 지위에 이르지 못할 것을 걱정하랴. 이 글은 시경, 주역, 예기 등을 인용한 것으로 ‘처음을 잘하는 사람도 마지막의 끝맺음이 없다.’는 뜻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즉 진실로 마지막을 시작할 때처럼 조심한다면 어찌 성현의 지위에 이르지 못하겠느냐 하였는데 다시 말하면 사람이 일을 할 때는 처음부터 마지막 끝까지 시종일관해야 한다는 뜻으로 깔끔한 일 처리에 대한 도덕성을 강조한 것이다. (18) 持敬存誠(공경함을 가지며 성실함을 지니라) 공경(敬)한다, 정성(誠)스럽다 하는 것은 모두 이 마음의 오묘(妙)한 것을 밝히는 바이다. 仁義禮智가 공경하지 않음이 없고 孝悌忠信이 정성스럽지 않음이 없나니, 정성스러움과 공경함은 곧 修身하고 齊家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요긴한 도리이다. 子思는 말하기를, ‘오직 천하의 至誠이라야 능히 천하의 큰 일을 經倫한다.’ 하였으니, 정성스러움과 공경함의 작용이 지극하고 큰 것이다. 천지의 조화를 통할 수 있고 귀신의 덕을 감동시킬 수 있고, 그것을 마음에 새겨서 잃어버리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믿어지고 행하지 않아도 이르러지는 것이니,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이 지경에 이르리요. 三綱, 五倫, 六藝, 八政이 그 道具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의 요긴한 것이다. 그 요긴한 것이 여덟 가지가 있으니, 천하를 평하게 하는 요긴한 道理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있고, 나라를 다스리는 요긴한 도리는 齊家함에 있고, 齊家하는 요긴한 道理는 몸을 닦는 데에 있고, 몸을 닦는 요긴한 도리는 마음을 바르게 함에 있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요긴한 도리는 뜻을 정성스럽게 함에 있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요긴한 도리는 致知格物함에 있다. 송나라의 옛 학자는 그 뜻을 부연하고 해설하여 황제에게 아뢰기를 ‘齊家하는 요긴한 도리가 네 가지이니, 배필을 소중히 여길 것, 궁내의 처리를 엄하게 할 것, 나라의 근본(태자)을 정할 것, 척속(戚屬)을 교양할 것이요, 몸을 닦는 요긴한 도리는 두 가지가 있으니, 말과 행실을 삼갈 것, 威儀를 바르게 할 것이요,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요긴한 도리는 두 가지가 있으니, 공경함과 두려워함을 숭상할 것이며, 안일함과 욕심을 경계할 것이요, 치지 격물의 요긴한 도리는 네 가지가 있으니, 도술을 밝힐 것, 人才를 분별할 것, 정치의 대체를 살필 것, 人情을 알아 살필 것입니다.’ 하였으니 이 여덟 가지 요긴한 도리는 곧 聖人과 성인들의 서로 전하는 心法이므로, 마땅히 居處하는 좌석 옆에써 두고 小學의 嘉言, 善行을 참고하여 밤으로 외며 낮으로 보아서 間斷할 때가 없이 부지런히 노력하여, ‘이욕의 한 근원을 끊으면 만 배나 군사를 쓴다.’는 효과를 얻을 것이다. 이 글은 仁義禮智가 공경하지 않음이 없고 孝悌忠信이 정성스럽지 않음이 없나니 정성스러움과 공경함은 곧 修身하고 齊家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태평하게 하는 요긴한 도리라는 것이며, 子思의 말을 인용한 부분을 보면 정성스러움과 공경함의 작용이 지극하고 큰 것임을 알 수 있다. 김굉필은 여기서 誠敬의 쓰임이 지극하고도 큼을 찬탄(讚歎)하여 天地의 造化를 통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의 내용으로 보면「소학」으로부터 시작하는 그의 교육도 결국 持敬存誠에 이르기 위한 것이요 道學의 極致도 여기에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공경스러움과 정성스러움을 가지고 처신한다면 그 보다 훌륭한 道는 없다. 敬과 誠만이 선비의 第一의 처세술이니 모든 사람이 따르는 것이 도리라는 것이다. 즉 誠敬의 原理로서 모든 행동의 指標로 삼는 것이 선비의 취할 바가 되는 것은 물론이요 모든 사람이 이에 따르는 것이 도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김굉필이 도덕적 가치의 중요성을 의식하고 있는 점에서, 그는 공자나 소크라테스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도의의 기본자세를 확립한 것이요, 길이 우리의 사표로서 빛나는 것이라고 하겠다. 3) 한빙계에 나타난 김굉필의 교육사상 한빙계 18조에 나타난 김굉필의 교육사상이 가진 특징을 교육내용, 교육방법, 교육방향의 세 가지 측면으로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으로 본다. 첫째, 교육내용을 살펴보면, 그가 학도들의 교육에서 특히 중시한 것은 도덕교육이었다. 한빙계의 내용도 도덕적 정신 함양을 말해준 교육내용인 것이며 ‘소학’으로부터 시작하는 교육도 결국 ‘持敬存誠’에 이르게 위한 것이요, 도학의 극치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둘째, 교육방법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소학’을 표준으로 삼아 기초적인 것으로부터 높은 수준의 학문에 이르기까지 순서에 따라 점진적으로 배워나가는 ‘下學上達의 漸進的方法’을 취했다는 점이다. 또 김굉필은 학습하는 마음자세로 항상 정신이 집중된 ‘主一不二’의 상태를 지니도록 하였고, 독서를 할 때는 精讀?熟讀하기를 권장하고 講讀에 있어서는 개인별 능력에 따라 강독의 과정을 다르게 하였다. 셋째, 김굉필의 교육 방향은 고상한 이론보다는 일상생활에서의 바른 몸가짐을 중시하고 있다. 그는 30여 년의 오랜 세월을 실천위주의 도학에 힘을 쏟은 결과 참된 성현의 학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어 조선조 학문과 교육의 방향을 확립하였으며 그의 이러한 도학은 조선시대 교육사상의 근본정신이 되었다. 2. ?家範?에 나타난 교육사상 김굉필이 소학동자라고 자칭하였을 정도로 소학을 중시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것이거니와, 이러한 모습을 교육사상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소학에 대한 그의 이해는 매우 주목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것이 바로 그의 저술 ?家範?이다. 여기에서는 그의 교육사상을 소학에 대한 김굉필이 태도와 가범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소학사상 김굉필의 修學은 매우 늦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의 나이 21세 때 김종직 문하에 나가면서 비로소 수학의 길로 들어섰다. 그가 김종직의 문하에 뒤늦게 나가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뒤늦게 학문적 立志를 분명히 하면서 김종직의 문하에서 여러 학인들과 유교 경전을 토론하는 등 공부에 매진하였다. 김굉필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小學書가 가지고 있는 시대적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종직으로부터 소학을 배우면서 확실한 철학사상으로 자리잡아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이후 그가 소학서에 제시된 규범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 순간도 소학서를 놓지 않았다는 말에서도 나타나지만, 사람들이 당시의 국가적인 문제에 대해서 물어보면 “소학을 읽는 동자가 어찌 대의를 알겠느냐(小學童子 何知大義)”라고 답변하는 데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후의 그의 생활은 소학의 실천으로 일관되고 있다. 이점은 소학을 놓고 김굉필이 글공부를 하여도 아직 천기를 모를러니 소학에서 어제까지의 잘못을 깨달았구나(業文猶未識天機 小學書中悟昨非) 라고 시를 짓자, 김종직은 이에 답하기를 이 말은 곧 성인이 되는 기초다. 노재 이후에 어찌 계승할 사람이 없겠느냐(乃作聖根基 魯齋後豈無其人乎) 라고 김굉필을 크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 적어도 성종 17년(김굉필의 나이 33세)에 이르러서 김굉필의 관심은 점차 修身에 근거한 소학적 실천에서부터 국가와 사회에 대한 經世문제쪽으로 확대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의 은사인 김종직과 멀어지게 된 사건이라 하겠다. 김종직이 이조참판으로 재직하면서 시사문제에 대해 건의한 일이 없다는 점을 들어 김굉필이 시를 지어 풍자하고 비방하자 김종직은 답시 중에 분수에 벗어나 관직이 대부에 이르니 임금을 바로 잡고 세상을 구하는 것을 내 어찌 감당하리 가르침을 받은 후배가 우둔하다고 조롱하나 勢利의 구구함은 편승하기에 족하지 않네(分外官聯到伐氷 匡君救俗我何能 從敎後輩嘲迂拙 勢利區區不足乘) 라고 하여 ‘임금을 바로 잡고 세상을 구하는 도(匡君救俗)를 내 어찌 할 수 있겠는가’라는 자조적으로 답하고 있는 바 김굉필과 김종직과의 생각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생각컨대 이러한 자세 전환, 다시 말하면 소학적 일상윤리의 실천에서 국가 사회적인 문제로의 관심확대가 그와 절친한 道友였던 남효온과 끝내 결별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자세 전환이 다음 그의 행적에서 出仕로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출사는 연산군 원년 그 동안 그가 닦아왔던 行義가 평가되어 천거된 것이긴 하지만 이를 받아들였던 데는 김굉필의 자세 전환이 깔려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여기서 말하는 行義란 그가 행동으로 보여온 소학적 실천을 포함하여 그가 오랫동안 계속해온 童蒙들에 대한 가르침, 그리고 일상사에서 나타난 유교적 예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2) ?家範?과 家訓 ?海東雜錄?에는 김굉필이 ?예기?의 內則篇을 본떠서 家範을 짓고 儀節을 마련하여 자손들에게 보이되 훈계하는 방법으로는 인륜을 더욱 중하게 하였다고 한다. 특히 아래로는 남녀 종들에게도 내외가 분명하게 하였으며, 그들 능력을 헤아려 임무를 맡기되 절하고 꿇어앉고 일하는 것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게 함으로써 가족과 전혀 차이 없게 하였다고 한다. 이는 김굉필이 중국과 같은 家訓書가 제대로 없음을 한탄하면서 禮記의 內則 등을 참조하여 만든 것으로 이에 대하여는 앞으로 좀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나 그 내용의 일부는 가족 안에서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가정 내에서의 남녀 노비들의 활동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일의 처리에 따라 상과 벌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家範?은 제자인 유계린에 의하여 계승되어 그 가운데 ?居家儀?를 본뜬 것으로 보이는 ?居家篤行十條?를 찬술하여 아들인 유희춘에게 남겼는데, ?眉巖集?에 수록된 정훈(庭訓:정훈 10훈과 정훈 내?외편 포함)의 내용은 그 대개가 김굉필로부터 이어받은 도학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3. 도동서원 규약에 보이는 교육사상 모든 서원은 그 운영 또는 참가자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어떠한 형식의 條規, 즉 學規 또는 學則이 있다. 道東書院은 文敬公 寒喧堂 金宏弼(1454-1504)을 享祀하는 서원으로서 玄風의 烏舌里 甫老洞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선조원년(1568) 縣東 琵瑟山 밑의 溪流合流地에 건립된 雙溪書院(賜額)에서 移築重建(1605)하여 賜額(1607)을 받은 것이고 숙종4년(1678)에는 文穆公 寒岡 鄭逑(1543-1620)를 배향하게 되었다. 도동서원의 규목은 漢字 三字로 뭉뚱그려진 형태의 어구로 된 다음의 8개조로 성립되어 있고, 그 밑에 약간의 項을 配設해서 내용을 보다 상세하게 규정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 서원은 김굉필을 配享하고 있는 서원인 만큼 그 규약에 담겨있는 교육사상 중에도 김굉필의 교육사상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에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1) 제1조 謹享祀 제1조는 세 개의 항을 포함하고 있다. 제1항은 국립지방교육기관인 향교가 근래에는 퇴폐가 심하여, 유식한 선비조차도 流俗에 흘러서 향교의 일을 남의 일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다음과 같은 높은 내용을 담고 있다. 院徒는 매년 上丁(2월8일, 孔子의 祭日임)에는 경내의 儒生들이 모여서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뒤 中丁에는 이 서원의 祀事를 행함으로써 이 양자가 일체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으로서 서원이야말로 향교를 대신해서 人倫之道의 유지를 담당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2항은 이 서원의 享禮不參者에 대한 처치를 규정하고 있는데 원장은 매회 출석상태 및 有故?無故?不參의 이유를 기록해 두었다가 다음 회에 面責한다는 것과 이것을 7회 行하였는데도 불참한 자는 黜斥하고 無故?不參은 5회에 이르면 黜斥한다고 되어 있다. 물론 질병, 出行遠方者는 이를 적용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2) 제2조 尊院長 제2조도 3개항으로 되어있다. 제1항은, “院長은「一院之長」이기 때문에 入院之士는 모두 尊長矜式을 不敢輕忽하여야 하고 원장 자신도 스스로 욕됨이 없도록 해야한다.”라고 하고 있다. 제2항은, 원장은「不可數數輕改」해야 한다는 원칙을 먼저 제시하여 부득이 할 경우의 薦任手續에 대해서 규정해 놓고 있으며, 그 교체할 때의 書冊, 什物 등의 인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제3항은, 원장에게 과오가 있을 경우의 조치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다. 이상의 3항은 원장의 서원에 있어서의 중요성을 십이분 확인하고 또 확인시키는 조항이다. (3) 제3조 擇有司 제3조는 1항뿐이다. 여기에서 有司는 一院之事의 管攝者이기 때문에 원장과 院中이 同議해서 이를 擇任한다고 되어 있다. (4) 제4조 引新進 제4조는 6항으로 되어있고 入院者의 일에 대해서 상당히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제1항은, 매향사일에 引新進에 관한 일을 의논하되 각인이 1인씩을 천거해서 원장에게 제출한다. 추천할 만한 적당한 사람이 없을 때에는 무리하게 行하지 않는다. 원장은 가부간 중의에 의해서 결정한다. 그리하여 일정한 기록을 해두는 일 등을 규정하고 있으며 특히 추천한 사람의 성명을 기록해 둘 것을 정해 놓고 있다. 제2항은 被薦進者에 대한 규정으로서, 연령 20세 이상으로서 有學行可觀者 또는 未滿의 弱冠者라도 司馬入格者이거나 累中鄕擧하여 才行超異하고 三益之友에 들만한 자를 그 자격으로 하고 있다. 제3항은 入院者中에 行實不修, 擧止踰違가 있을 경우의 벌칙 및 그 운용상의 주의 사항이다. 제4항은 成業에 가망이 없는 자는 諭示退學의 규정을 하고 있다. 제5항은 遠方之士의 願入者로서 추천자가 없는 자라 할지라도 學行成就의 희망이 있고 명확한 결점이 없는 자는 許入한다는 규정이다. 제6항의 내용은 “新學의 小兒, 대체로 20세 이하에 있는 자는 모두 養蒙齋의 입학을 聽許한다. 20세 이후라 할지라도 아직 入院의 選에 미치지 못하여 養蒙齋에 입학을 원하는 자는 또한 聽許한다.” 즉 정식 원생이 되기 전에 童蒙 20세 이하 자를 수용 취학시키는 예비교육기관을 이 서원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5) 제5조 定坐次 제5조는 좌석을 규정한 간단한 1항뿐이다. 좌석은 ‘序齒’ 즉 연령의 長幼에 의해서 석차가 정해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異爵者’나 ‘他客’이 있을 경우에는 그때 그때의 경우에 따라서 ‘別席’을 마련한다. 또 前出의 ‘養蒙’ 諸生은 ‘南行’ 즉 南面해서 앉아 있는 長上 편에서 보아 南쪽 편, 따라서 下坐에 앉는다는 것이다. (6) 제6조 勤講習 제6조는 도동서원의 가장 중점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10개항으로 되어있다. 제1항은 院長의 임무, 강습내용, 學問科業兩道, 學問根本敬의 네가지를 말하고 있다. 제2항은 소극적 성격이 짙은 금지사항 중에서 중요한 것은 제8조의 ‘嚴禁防’의 條에 독립시켜두고 있다. 제3항은 이른바 ‘淸談’을 경계하는 조항이니, 조정과 관원의 長短得失에 대해서 衆人이 과오로 삼으면서 이것저것 언급을 하지 말 것을 규정하고 있다. 제4항은 淫?女色, 不正之言, 干索食物, 無恥之事는 모두가 이것을 해서는 아니 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제5항은 諸鄙狎之事는 모두가 해서는 아니 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제6항은 特志制行을 잘하며 和厚 謹愼해야 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제7항은 養蒙諸生에 관한 조항인데 日常起居, 교육의 내용 및 방법, 행동지침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제8항은 足?手?目?口?聲?頭?氣?立?色의 九容, 持身과 坐?行 紀律 및 入院之士의 勉勵 및 養蒙諸生의 警飭(경칙)을 규정하여 이것을 창벽에 게시하여 언제나 觀省시킨다고 하고 있다. 제9항은 ‘士主’는 勤導?乳液(유액)하는 책임을 맡길 것을 규정하고 있다. 제10항은 前項을 이어 받아서, 守命을 書院諸生 觀導의 責에 임명해야 할 所以 즉 서원의 존재의의를 첨명하고 있다. (7) 제7조 禮賢士 제7조는 1항만으로 되어 있으며 在鄕賢士의 일반적 實在의 확인을 行하고 있다. 그러한 賢士를 발견하여 원장이 朋徒를 이끌고 禮로서 延請?尊師하여야 한다. 그러한 賢士를 얻어서 諸生이 거기에 觀感하는 바가 있고 이것을 사모하고 기뻐하게 되기를 구하여 가게되면 在鄕賢士를 禮待하는 의의는 충분히 있게 된다. (8) 제8조 嚴禁防 禁防事項은 6항으로 되어 있는데, 제1항은 老莊의 書, 碁局博奕(기국박혁)의 入院을 금하며, 제2항은 異色의 人(예컨데 武夫, 雜術의 徒)의 출입을 금하며, 제3항은 祭祀用 이외의 釀酒를 금하며, 제4항은 尹祭 이외의 殺牛를 금하며, 제5항은 婢子의 齋堂出入, 擧案進止를 금하며, 제6항은 修學?點書?考?(고름)?會計 등을 준수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현풍 도동서원 강당의 中正堂에 게시되어 있는 현판의 하나에 도동서원규목이 있으나, 그 성립연대는 미상이다. 그러나 전체 8개조(통산31개항을 포함)로 된, 서원학규로서의 구성형태, 구성내용에서 볼 때 조선조 중기의 서원학규로서 잘 정비된 것이고, 서원운영의 실태를 알기 위한 귀중한 자료이다. 더욱이 제6조 1항을 보면 문경공 김굉필의 학문?교육상의 근본사상을 이어받은 講學共同體로서의 서원임이 분명하다. 이 규목의 특색은 조항을 8개조로 묶어 그 자세하고 구체적인 禁防事項의 대부분은 그 밑에 항으로 포함시키되 그것도 느닷없이 금지조항을 내어놓은 형태를 취하지 아니하고 원칙이나 이상을 적극적으로 먼저 제시해서 그 실현에 방해되는 사항을 금지하는 그러한 표현형태, 즉 적극적 표시속에 수렴된 소극적 사항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은 서원의 중추적 기능을 교육(강습)에다 두는 근본태도와 首尾一貫해 있다. 더욱이 ‘尊賢’부터 시작한다고 되어있는 서원의 ‘敎’원칙을 최초로 설정한 결과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또 養蒙齋에 관한 규정이나 ‘禮賢士’의 조항에 의해서 국민의 在鄕民間敎育機關으로서의 서원관을 자각적으로 확립하고 있으며 지역교육센터로서의 서원의 교육기능을 첨명해 놓고 있다. Ⅴ. 결 론 김굉필은 정몽주 이후 도학을 스스로 얻어 전 생애를 통하여 도학정신의 구현과 참된 스승의 모습을 보여준 근세 道學의 倡道者이자,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교육자였다. 그런데도 오늘날에 있어서 김굉필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다른 학자들에 비하여 매우 부족한 편이다. 이에 본 연구는 김굉필의 교육자로서의 사상과 활동을 정리한 것이다. 學問上으로 볼 때 김굉필은 金宗直의 門人 및 후배에 속하며 우리 나라 도학의 정통을 계승하였지만, 그의 학문적 경향이 스승 김종직과는 달리 詩文보다는 實踐을 중시하여 덕을 이루고 道를 성취한 것은, 스승의 後光보다는 몸소 체험하여 자기 스스로 깨달은 공부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실천적 의리 정신과 인격 수양을 통하여 이룬 교육자로서의 업적 때문에 근세 道學之宗으로 존중되는 것이며 光海君 때 文廟에 配享되었던 것이다. 김굉필의 도학적 풍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글로 경자상소가 있다. 김굉필은 경자상소에서 불상을 몰래 돌려놓고, ‘불상이 저절로 돌아섰다.’고 거짓 선전한 원각사 중의 우두머리를 철저히 신문하여 시가에서 사형을 집행할 것과 나라의 생업을 좀먹는 僧徒의 숙정을 청하였다. 또한 언로를 열어 허심탄회하게 말하는 신하를 신문하지 말고, 사교의 우두머리를 처벌하시어 나라의 기강을 바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무오사화로 평안도 희천에 귀양을 가 있을 때, 김굉필은 미개한 풍속의 교화에 힘쓰고 소학에 기초 한 유학사상을 펼쳐서 많은 사람들이 배우기를 청하여 평안도의 학풍이 열리게 되었다. 김굉필이 배소에서 행한 교육활동으로는 어천에서 찾아온 조광조에게 그의 학문을 전수함으로써 도학정치사상을 심어준 것이 주목된다. 김굉필이 평안도 희천에서 전라도 순천으로 移配된 뒤, 순천에서 김굉필과 사제관계를 맺은 최산두와 유계린은 16세기 호남지역의 사림 형성에 있어서, 그리고 김굉필의 학통을 다음 세대까지 이어주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김굉필의 학연이 최산두, 유계린 등을 거쳐 김인후, 유희춘 등에게 이어짐으로써 이후 호남 지역의 사림 흥기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김굉필의 학문과 사상이 호남지역에 접목될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순천에서의 유배 생활에 기인한 것이지만, 유배지의 후진들에게 비친 그의 면모는 같은 배소의 동료와는 대조적이었다. 풍류를 즐긴 시문장가 조위와 달리 김굉필이 풍류 모임을 좋아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 飭身制行의 엄격함을 알 수 있다. 김굉필이 순천 유배지의 유림사회에 남긴 교육의 영향은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바, 修己治人의 도학이념을 實踐躬行했던 김굉필의 교육의지는 유배지 순천에서도 다름없었다. 김굉필의 교육사상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한빙계와 가범, 도동서원 규목 등이 있다. ‘한빙계’는 김굉필이 반우형에게 사제의 연을 맺고 써준 것인데 그 내용은 도덕적 정신 함양을 중시하고 있으며 학습하는 마음 자세로 항상 ‘主一不二’의 상태를 지니도록 하였고, 독서 할 때는 정독과 숙독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김굉필은 개인별 능력에 따라 강독의 과정을 다르게 하였고, 교육방법으로 특히 주목할 것은 ‘소학’을 표준삼아 기초로부터 점점 높은 수준의 학문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배워나가는 ‘하학상달의 점전적방법’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굉필의 교육의 방향은 고상한 이론보다는 일상생활의 몸가짐으로서 실천을 더욱 중시하고 있다. 김굉필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소학서에 제시된 규범에 따라 행동하였을 뿐 아니라 한순간도 소학서를 놓지 않았으며 그의 생활은 소학의 실천으로 일관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굉필은 ‘예기’의 내측편을 본떠서 家範을 짓고 儀節을 마련하여 자손들에게 보이되 훈계하는 방법으로는 인륜을 더욱 중하게 하였다고 한다. 남녀 종들에게도 내외가 분명하게 하였으며, 그들 능력을 헤아려 임무를 맡기되 절하고 꿇어앉고 일하는 것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게 함으로써 가족과 전혀 차이가 없게 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현풍 도동서원 강당 중정당에 게시되어 있는 도동서원 규목은 전체 8개조로 되어 있으며, 서원학규로서의 구성형태, 구성내용에서 볼 때 조선조 중기의 서원학규로서 잘 정비된 것이고 문경공 김굉필의 학문과 교육사상을 이어받은 講學共同體로서의 서원임이 분명하다. 이 규목의 특색은 조항을 8개조로 묶어 그 자세하고 구체적인 禁防事項의 대부분은 그 밑의 項으로 포함시키되, 그것도 느닷없이 금지조항을 내어놓은 형태를 취하지 아니하고 원칙이나 이상을 적극적으로 먼저 제시해서 그 실현에 방해되는 사항을 금지하는 표현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서원의 중추적 기능을 교육(강습)에다 두는 근본 태도와 首尾一貫해 있다고 하겠다.
이상 몇 가지 관점에서 김굉필의 교육활동과 교육사상을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도학의 신념 위에 교육자로서 유배지에서까지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에 정성을 다하였고,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유지하였으니, 현대에 있어서도 師表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모든 사람이 聖人의 자질을 가지고 있으며 교육을 통하여 인위적으로 계발될 수 있다고 주장한 김굉필의 선비정신을 오늘날 스승상의 요건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景賢錄』 『景賢續錄』 『景賢續錄補遺』 『景賢附錄』 『栗谷全書』 ?江南樂府?(조현범) ?昇平誌?(이수광) ?眉巖日記?(유희춘) ?海東雜錄?(?대동야승?Ⅴ, 민족문화추진회) 『國譯景賢錄全』(한훤당기념사업회, 삼화출판사, 1984) 유명종,『조선후기 성리학』, (한국사상사 Ⅱ), 이문출판사, 1985. 이태진,『한국사회사연구』, 지식산업사, 1986. 손인수,『한국인의 가훈Ⅰ』, 서울:문음사, 1986. 정옥자,『조선후기 문화운동사』, 일조각, 1988. 이태진,『조선유교사회사론』, 지식산업사, 1989 윤사순,『한국유학사상론』, 서울:열음사, 1989. 손인수,『한국교육사상사Ⅲ』, 서울:문음사, 1989. 손인수,『한훤당?율곡?우계의 교육사상』, 서울:배영사, 1989. 손인수,『한국교육사상가평전Ⅰ』, 서울:문음사, 1990. 정옥자,『조선후기 지성사』, 일지사, 1991. 이범직,『조선중세예사상연구-五禮를 중심으로-』, 일조각, 1991. 윤사순,『한국의 성리학과 실학』, 서울:열음사, 1992. 이성무?정만조외, 『조선후기 당쟁의 종합적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유초하,『한국사상사의 인식』, 한길사, 1994. 지두환,『조선전기 의례연구』, 서울대출판부, 1994. 고영진,『조선중기 예학사상사』, 한길사, 1995. 이수건,『영남학파의 형성과 전개』, 일조각, 1995. 순천시사(문화?예술편), 순천시사편찬위원회, 서울:큰기획, 1997. 박선정, “점필재 김종직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4. 이태진, “이회재의 성학과 사환”,『한국사상사학』1, 1987. 이선민, “이이의 경장론”,『한국사론』18, 서울대 국사학과, 1988. 이원균, “한훤당의 윤리사상에 대한 연구-한빙계와 유시?유문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8. 송영일, “정암 조광조의 교육사상연구 -실천도학이념을 중심으로-”,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9 하상규, “하서 김인후의 도학과 교육사상연구”, 한국교원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9. 고영진, “15?16세기 주자가례의 시행과 그 의의”,『한국사론』21, 서울대 국사학과, 1989. 정옥자, “17세기 사상계의 재편과 예론”,『한국문화』10, 1989. 이병휴, “조선전기 지배세력의 갈등과 사림 정치의 성립”『민족문화논총』11집,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1990. 김윤제, “남명 조식의 학문과 출사관”,『한국사론』24, 서울대 국사학과, 1991. 문철영, “조선전기 유학사상의 역사적 특성”,『한국사상사대계』(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허남진, “조선전기의 성리학 연구”,『국사관논총』26, 1991. 이해준, “기묘사화와 16세기 전반의 호남 학맥”,『전통과 현실』제2호, 1992. 한영우, “이수광의 학문과 사상”,『한국문화』13, 1992. 허남진, “유학파들의 사상적 갈등과 변천”,『한국사상사대계』(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한관일, “조선전기의 「소학」교육연구”, 중앙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2. 이종욱, “한훤당 김굉필의 도학의 관점에서 본 교육사상연구”,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3.12. 정옥자, “조선후기 사상사연구의 방향”,『조선후기 역사의 이해』, 일지사, 1993. 조광, “조선후기 사상계의 전환기적 특성”,『한국사 전화기의 문제들』, 지식산업사, 1993. 정만조, “조선시대의 사림정치-17세기의 정치형태”,『韓國史上의 정치형태』, 일조각, 1993. 김항수, “조선전기의 성리학”,『한국사』(8), 한길사, 1994. 마종락, “한국 중세의 유학과 정치권력”,『한국중세사연구』창간호, 1994. 김용곤, “조선전기 도학정치사상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4. 8. 조원래, “사화기 호남 사림의 학맥과 김굉필의 도학사상”,『동양학』제25집, 동국대학교부설 동양학연구소, 1995. 성교진, “한빙계에서 본 한훤당의 천이정신”, 대구효성카톨릭대학교, 효대논문집 제50집, 1995.2. 배종호, “한국도학에 있어서 한원당의 위치”,『한훤당의 생애와 사상』대구:보문사, 1998. 강주진, “사림정치와 한훤당의 도학”,『한훤당의 생애와 사상』, 대구:보문사, 1998. 윤사순, “한훤당 선생의 선비정신”,『한훤당의 생애와 사상』, 대구:보문사, 1998. 손인수, “한훤당 선생의 교육사상”,『한훤당의 생애와 사상』, 대구:보문사, 1998. 조종업, “한훤당과 그의 문학론”,『한훤당의 생애와 사상』, 대구:보문사, 1998. 성락훈, “소학동자 도학의 조 한훤당 선생의 지위”,『한훤당의 생애와 사상』, 대구:보문사, 1998. 渡部學(日本武藏大學 교수), “도동서원규목의 구성과 내용”,『한훤당의 생애와 사상』, 대구:보문사, 1998. ABSTRACT
Kim Koengpil's Educational Activities and Educational Thoughts Jo, Kye-Min Department of Historical Education Graduate School, Kong Ju National University Kim Koengphil was one of the great educators representing the early Chosun era. He was a model of true educator and implemented the spirit of 'Do-hak' all through his life. However, not much of the work is done on the study of Kim Koengphil's thought. This study is for the summary of his activities and spirit as an educator.
Kim Koengphil was an apprentice of Kim Jong-gik and he inherited the authenticity of 'Do-hak'. He emphasized a implementation than poetry and literature. He tried to learn from experiments and experiences. Due to his accomplishment as an educator, he has been recognized as the pioneer of Modern Dohak. He was also enshrined to the a Confucian shrine at the era of Kwang-Hae Kun. Kim Koengphil was exiled to 'Heechon' Pyung-an Do because of 'Muo-sawha'. While he was staying in Heechon, he tried hard to enlighten the uncultured tribes and taught Sohak. As a result, many people came to see him hoping to learn from him, and he finally established a new 'Pyung-an Do' learning atmosphere. He taught his apprentice 'Cho Kwang-cho' in there. Cho Kwang-cho later developed this to 'Do hak' political idea. Kim Koengphil moved to Sunchon, another palace of exile. He met 'Choi San-du' and 'Yu Kye-rin' who occupied a very important role in conforming of 'Honam Sa-lim' in 16th century, and succeeding Kim's scholastic mantle to next generation. Kim Koengphil's attitude was a good contrast to other exile colleagues in Sunchon. He concentrated rather on education while other exile scholars enjoyed poetry and social gatherings. He gave a great positive impact on Sunchon society. Kim Koengphil's book 'Hanbing-kye' shows his educational thoughts. He wrote Hanbing-kye during he taught Ban Woo-hyung. He regarded fostering moral sprit as the most important thing and recommends students to do a careful and intensive reading. He differentiated the level of reading according to the level of students' reading ability. He also recommended students to start from the basic 'Sohak' and go eventually to the advanced learning. His overall educational goal was implementation of learning that can be reflected to a daily life rather than fancy idealism. Kim Koengphil made a family code of conduct on the basis of 'Yaeki' and made rules and conventions for the teaching of descendants, thus made people recognize the importance of a moral. He even taught servants to distinguish the roles and etiquettes as man and woman, and treated them equally to his family. 'Dodong Seowon' rules are posted in 'Dodong Seowon' hall. The rules are consisted of 8 items. 'Dodong Seowon' rules are well organized as Seowon rules in the middle Chosun era. It succeed to Kim Koengphil's spirit. As we have seen so far, Kim Koengphil's activities and sprit as an educator and Kim Koengphil was eager to teach his apprentices even when he was exiled to isolated place and he maintained high standards of moral. He strongly believed that everybody has a quality of a saint and it can be developed by education. So he set the purpose of education on implementaion 'Soha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