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1906-1975)
<인간의 조건> (1996, 한길사, 이진우 역) (영문판, The Human Condition, 1958,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역자 해제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전체주의적 지배의 본질은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완전히 박탈하고 또 인간의 무용성을 증명함으로써 인간을 완전히 배제하고자 하는 태도에 있다. ..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전체주의적 과정’이란 ... 인간이 필요없는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목표 아래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쓸모없게 만드는 모던적 태도를 의미한다. ...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근본악은 이와 같이 인간을 쓸모없게 만들고자 하는 전체주의적 체계 속에서 탄생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을 자신의 기술적 통제하에 두고자 하는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는 그 자체 이미 전체주의적 요인을 함축하고 있다. ... 근대와 근대적 인간은 ...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는 기호를 달고 탄생하였다. 그것은 세계의 중심이 인간과 지구로 옮겨졌음을 뜻한다. ...인간중심주의는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만든 것만을 이해할 수 있다”는 작위성의 이데올로기를 동반한다. ...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전체주의적 믿음을 가지고 근대인은 자신과 이 지구를 하나의 실험장으로 즉 작위성의 실험장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 전체주의적 실험을 통해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본질이다. ... 심각한 위험은 ... 근대인이 가능성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데 있다. ... 나치정권에 의한 전체주의의 실험이 실패로 끝났다고 해서, 누가 감히 ‘가능한 모든 것을 만들고 또 불가능한 것은 가능하게 만들고자 하는’ 전체주의가 끝났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우리는 나치 정권보다 더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기술적 전체주의의 경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렌트는 오늘날 전체주의적 경향이 전체주의적 국가뿐만 아니라 ‘세계의 도처에서’ 발견된다고 말하면서, 전체주의적 지배의 핵심적 체계는 전체주의적 지배의 핵심적 체계는 전체주의적 정권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31-32)
<인간의 조건>에서는 기술시대의 근본악을 철저하게 분석함으로써 활동적 삶의 가능성을 탐측하고 있다. ... 인간은 자신이 살 세계를 스스로 창조한다는 점에서 자연과 구별된다.
인공적 세계를 건설하며 할수록 인간이 자연적 환경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자연적 생명체계와 인위적 인공세계는 대립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과의 신진대사를 통해서만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학과 기술은 인간실존의 자연적 조건을 파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인공세계를 건설해야 한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은 가능한 한 인간을 자연적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인간에 의해 완전히 통제될 수 있는 인공세계를 구축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기술시대에 내재하고 있는 전체주의적 경향이라고 말한다. 만약 생명체로서의 인간에게 부여된 자연적 필연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고자 하는 과학과 기술의 시도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 우리는 과연 인간의 삶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인간조건을 파괴하는 기술의 근본악을 이해할 수 있는가? ...
어떻게 이 지상에서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떤 일을 하기에 도대체 근본악이-우리가 원치 않는데도 불구하고-실존할 수 있는 것인가? ... “우리가 활동할 때 우리가 진정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한나 아렌트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이 질문은 21세기의 문턱에선 우리에게도 여전히 타당하다. (33-34)
<인간의 조건>은 라틴어 개념 Condition humana의 번역용어로서 이미 인간존재가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아렌트는 자신이 이 저서를 Amor Mundi(세계애, love of the world)로 불러주기를 바랐듯이 <인간의 조건>은 세계에 관해 단순히 관조하고 성찰하는 형이상학적 전통을 넘어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실천철학적 방향을 제시한다.
... 인간이 실존하기 위해서는 첫째, 하나의 생명으로서 살아 있어야 하며, 둘째,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자연의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난 영속적인 자신의 세계가 있어야 하며, 셋째, 말과 행위를 통해 이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는 생명, 세계성, 다수성을 인간실존의 세 조건이라고 명명한다.
... 생명으로서 산다는 것은 신진대사를 통한 자연과의 교통을 의미하는 까닭에 노동은 생명의 조건에 부합하는 인간의 기초적 활동이다. ... 한나 아렌트는 ... 모든 사람에게 의미있는 공동의 세계에 관해 논의하는 기초적 활동을 행위라고 규정한다. 행위는 노동의 필연성과 작업의 도구성 어느것도 절대화되지 않도록 하고 동시에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도록 만드는 인간의 기초적 활동이다. (34-35)
전체주의는-그것이 정치적이든 아니면 기술적이든 간에-인간의 탄생성과 사멸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영구화하고자 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전체주의는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수단만을 영구화할 뿐이다. (36)
한나 아렌트의 철학은 이 유한한 세계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할 수 있는 행위양식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다.(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