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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년 을사(1725)4월 11일(무인) 맑음
01-04-11[26] 이이(李珥)를 무함한 윤선거(尹宣擧)의 관작을 삭탈하고 원우를 훼철할 것 등을 청하는 황해도 유학 윤수갑(尹壽甲) 등의 상소
황해도 유학 윤수갑(尹壽甲)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시골에서 삼가 듣건대 우리 전하께서 새로 즉위하신 초기에 밤낮으로 근심하고 애쓰며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림에 힘을 쏟아서 성고(聖考)의 유지를 계승하여 흉역(凶逆)한 도당을 몰아내었는데, 먼저 선정신의 무함을 씻어 주고 이어 향사를 회복하는 성대한 은전을 거행하여 원통함이 모두 신설(伸雪)되고 시비가 크게 정해져서 선비와 벼슬아치가 눈을 비비고 바라보고 중외의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듣는다고 하니, 선비들의 추향이 바르게 되고 사설(邪說)이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대현(大賢)이 입은 무함을 여전히 전부 분변해서 설파하지 않았으며 올바른 사람을 해친 흉당(凶黨)을 여전히 모두 물리치지 않았기에, 신들이 감히 천 리 길도 멀다고 여기지 않고 궁궐에 와서 우러러 호소하니,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조금이나마 헤아려서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선정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는 타고난 자질이 매우 고명하고 조예가 출중하여 도의 본체를 꿰뚫어 보고 미묘한 것을 크게 천명하였으며, 그 공부의 순서는 반드시 격치(格致), 존양(存養), 천리(踐履)의 세 가지를 평생의 노정(路程)으로 삼았습니다. 한 가지라도 주돈이(周敦頤)와 이정(二程)의 종파(宗派)에 바탕을 두지 않은 것이 없었고 고정(考亭 주희(朱熹))에게서 터득한 것이 특히 많았으며, 학문은 반드시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운 뒤에야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할 수 있다고 일찍이 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격몽요결(擊蒙要訣)》, 《자경문(自警文)》,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의 책을 지어 학문을 하는 순서를 명시하였으니, 근본과 말단이 모두 갖추어지고 순서가 어지럽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단을 분별하고 사설(邪說)을 물리치는 데에 더욱 엄격하였으니, 원인을 궁구하여 편벽되고 음란한 것을 분석하여 깨뜨린 것은 지금 《학부통변(學蔀通辨)》과 《격몽편(擊蒙編)》 등의 발문(跋文)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선정신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과 뜻이 통하고 도가 합치하여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었고, 함께 이(理)와 기(氣)를 논하여 장문의 서찰을 주고받았는데 그 분량이 거의 수천여 글자에 가까웠으며, 분석이 정미(精微)하여 지난날 밝혀내지 못한 것을 밝혀내었습니다. 선묘조(宣廟朝)의 성세를 만나 임금과 백성을 요순(堯舜) 시대처럼 만들려는 뜻을 품었으며 삼대(三代)의 훌륭한 정치를 일으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계미년(1583, 선조16) 이래 삼간(三奸)이 앞에서 해치고 흉악한 무리가 뒤에서 무함하여 살아서는 물여우 같은 간신들의 공격을 당하고 죽어서는 흉악한 무리의 참언을 입어 그 품은 뜻을 펴지 못하고 끝내 사림의 천고의 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의(公議)가 사라지지 않고 인심은 속이기 어려워 문묘(文廟)에 종사하도록 해 달라는 청이 인묘조(仁廟朝) 을해년(1635, 인조13)에 처음 발의 되었지만, 삼간의 후예와 잔당들이 여전히 제멋대로 비방하고 헐뜯었으며, 기사년(1689, 숙종15) 이현령(李玄齡)의 상소에 이르러서는 극에 달하였습니다. 오직 우리 숙종대왕께서 사설(邪說)의 무함과 비난을 통렬하게 배척하고 두 현인의 도덕을 표창하시며 여러 선비가 일제히 호소한 것을 흔쾌히 따르시어 문묘에 올려 종사하도록 하셨으니, 국시(國是)가 이로부터 크게 정해지고 사설이 이로부터 사라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성혼의 외손으로 윤선거(尹宣擧)라는 자가 있었는데, 씻기 어려운 허물을 지녀서 세상에 용납될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서도 학자라는 이름을 가탁하여 유현(儒賢)의 문하에 종유(從遊)하면서 실정을 속이고 겉을 꾸미며 세상을 기만하고 이름을 훔침으로써 허물을 가리고 흠을 숨기는 계책으로 삼았습니다. 한 시대의 유현이 그가 스스로 새로워졌다고 인정하며 지나치게 칭찬하고 추켜세웠더니, 이에 감히 거만하게 스스로 뽐내며 글을 지어 의견을 발표하는 것을 흉내를 냈는데, 편벽되고 바르지 못한 개인적인 의견으로 대현(大賢)의 도덕의 높낮이를 함부로 논하며 제멋대로 사설(邪說)을 만들어 ‘유사(遺事)’라고 일컬으면서 그의 아들 윤증(尹拯)에게 주었습니다. 그러고서 그로 하여금 은밀하게 잘 보관하였다가 반드시 사문(斯文)의 장로(長老)가 모두 죽기를 기다렸다가 비로소 기회를 보아 발표하게 하여 후세 사람을 기만하고 전대의 현인을 속이고자 하였으니 그 계책이 교묘하고 참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이이를 논한 말에서는, ‘먼저 위로 천리를 통달하는 곳에서부터 들어갔기 때문에 학문에 의거할 만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으며, 끝에서 또 결론을 내리기를, ‘정자(程子)의 학문은 소학(蘇學)과 함께 세상에서 행해졌는데 주자에 이르러 크게 정해졌으니, 덕을 아는 자가 드물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대개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우고서 위로 천리를 통달하는 것은 바로 성문(聖門)에서 학문을 하여 도에 들어가는 순서이며, 그 선후와 천심(淺深)은 분명하여 어지럽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하늘이 내신 성인이라도 반드시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는 자립하였고, 마흔 살에는 미혹되지 않게 되었고, 쉰 살에는 천명을 알게 되었다.’라고 하였으며, 자공(子貢) 이하는 성(性)과 천도(天道)를 들을 수 없었으니, 어찌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우지 않고서 먼저 위로 천리를 통달하는 도리가 있겠습니까. 오직 불교의 선학(禪學)이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우지 않고서 위로 천리를 통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정호(程顥)는 ‘부처는 위로 천리를 통달하려고만 애쓰고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우지는 않았다.’라고 말하였으며, 주자도 ‘성문의 학문은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워서 위로 천리를 통달하는데, 만약 부처의 학문이라면 이치상 갑자기 깨달아야 하며 점진적으로 수양할 겨를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위로 천리를 통달하려고만 하고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우지 않은 것입니다. 정자와 주자가 엄한 말로 통렬하게 변론한 것은 참으로 우리 유학과 선학(禪學)의 그릇됨과 올바름의 구분이 오직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이가 학문이 체용(體用)을 갖추고 도가 본말을 관통하여 한결같이 주자의 법문(法門)을 따른 것이 어찌 터럭만큼이라도 선학과 비슷한 점이 있겠습니까. 대개 이이의 학문은 지식과 행동을 함께 진전시키고 경(敬)과 의(義)를 함께 지니고서, 심오한 이치를 깊이 궁구하고 기미를 연구하였으나 일상생활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일상적인 말과 행동이라도 반드시 성명(性命)의 본원에 바탕을 두었으며, 널리 학문을 닦고 예로써 자신을 단속하는 일을 둘 다 지극히 하여 집대성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윤선거가 이이를 가리켜 먼저 위로 천리를 통달하는 곳에서부터 들어갔다고 한 것은 맹자가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말하였다고 무함하고 정자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빠뜨렸다고 헐뜯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유직(柳稷) 등이 성혼의 상소 가운데 ‘정신을 보전하고 아껴야 한다’라는 설을 가지고 이단이라고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정자의 학문은 소학과 함께 세상에서 행해졌는데 주자에 이르러 크게 정해졌다.’라고 한 것에 이르러서는, 그 뜻이 정자를 성혼에 비유하고 소학을 이이에 비유하며 주자를 자신에 의정(擬定)한 것입니다. 소학의 소(蘇)는 곧 소식(蘇軾)입니다. 주자는 일찍이 ‘소공(蘇公)은 젊어서는 장의(張儀)와 소진(蘇秦)의 찌꺼기를 주워 모았고, 만년에는 불교와 노자의 지게미에 취하였다.’라고 하였으며, 또 ‘성인이 말하는 달(達)이라는 것은 근본과 말단, 정밀한 것과 거친 것을 아울러 하나로 관통하는 것이고, 소씨(蘇氏)가 말하는 달(達)이라는 것은 기(器)를 버리고 도(道)로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소씨의 학문은 참으로 이른바 먼저 위로 천리를 통달한 뒤에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우는 것입니다. 윤선거는 이이를 일컬어 먼저 위로 천리를 통달하는 곳에서부터 들어갔다고 하고서 그를 소학(蘇學)으로 귀결시켰으니, 그 말이 비할 데 없이 패악하기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그가 현인을 무함하고 올바른 사람을 해치려는 마음은 바로 계미년(1583, 선조16)에 삼간(三奸)이 이이가 불학(佛學)에 물들었다고 무함한 것과 동일한 투이지만 그 폐해는 도리어 그보다 심합니다. 저 삼간이 불학에 물들었다고 말한 것은 이이가 젊었을 때의 일에 지나지 않으니, 이는 장사 지내는 놀이와 물건 파는 놀이를 하였다고 맹자를 비방한 것과 사냥을 하였다고 정자를 비방하는 것과 거의 같아서 그 무리 가운데 교활한 자들도 그것이 그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윤선거는 그 본원과 조예를 직접 가리켜서 한마디로 단정하고, 제멋대로 무함하고 헐뜯어 스스로 백대(百代)의 공안(公案)을 정하였다고 여기면서 삼간의 무리로 하여금 구실을 붙이는 효시가 되도록 하였으니 그 폐해가 어찌 단지 홍수나 맹수 정도에서 그치겠습니까. 지금 저 무리도 그 주장이 현인을 무함하게 됨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도리어 소학이 이이를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를 통해서도 저 무리가 이치가 이지러지고 말이 궁해져서 끝내 스스로 해명할 수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그 문세(文勢)로 살펴보면 오로지 두 선정신에 대해서만 말하고 한마디도 다른 사람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끝에서는 곧 소학의 설로 결론을 맺었으니, 그 말의 의미는 저절로 가리키는 바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대개 윤선거의 편벽되고 바르지 못한 견해가 비록 이이를 헐뜯고 성혼을 높이고자 한 것이었지만, 두 현신(賢臣)은 도와 덕이 부합하였으며 살아서는 뜻을 같이 하고 죽어서는 이름이 함께 전해졌습니다. 이이는 성혼에 대하여 ‘선(善)을 좋아하여 천하를 다스리기에 충분하다.’라고 칭찬하였으며, 성혼은 이이에 대하여 ‘삼대(三代)의 인물이며 진실로 나의 스승이다.’라고 하였으니, 두 현신이 서로 높이 평가한 뜻을 애연하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품(資稟)의 높고 낮음과 조예의 얕고 깊음은 천박한 학자의 얕은 견해로 우열을 나누어 취하고 버릴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윤선거는 감히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하는 사심(私心)과 치우치고 가려진 견해를 가지고 기필코 장단점을 비교하여 저쪽을 억누르고 이쪽을 찬양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이를 겉으로는 존숭하면서 속으로는 배척하여, ‘먼저 위로 천리를 통달하는 곳에서부터 들어갔다’라는 말을 뒤집어씌우고 끝에서는 소학으로 귀결시켰으며, 성혼을 정자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을 주자에 비유하여 성혼의 도통의 전수를 자신에게 소속시키고 곧바로 문정공 조광조(趙光祖)의 통서(統緖)로 곧장 거슬러 올라가려고 하였으며, 이이를 배척하여 다른 일파로 귀속시키고 그 통서를 독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현신의 도덕과 학문이 피차 한가지여서 이이를 존숭하는 것이 바로 성혼을 존숭하는 것이요 이이를 헐뜯는 것이 바로 성혼을 헐뜯는 것임을 전혀 알지 못하였으며, 또한 도통의 전수는 약탈하여 가질 수 없고 백대(百代)의 공의(公議)는 억지로 정할 수 없음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도리에 어긋나고 망녕되며 한쪽에 치우친 그의 죄는 단지 이이의 반졸(叛卒)일 뿐 아니라 또한 성혼의 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윤선거가 이렇게 한 데는 또한 이유가 있습니다. 윤선거는 주자에 등을 돌린 난적 윤휴(尹鑴)와 서로 매우 절친하였으며 뒤섞여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선정신 문정공 송시열(宋時烈)이 윤휴와 절교하라고 여러 차례 권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고 겉으로는 절교하였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실제로 비호하였으니, 그 마음 씀은 사실 난적 윤휴와 겉만 다르지 속은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송시열에 대하여 도리어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몰래 해치려는 계책을 꾸몄습니다. 송시열이 선정신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아 실제로 이이의 적전(嫡傳)을 이었다고 하여, 먼저 이이를 헐뜯어 선학(禪學)에 물들었다는 죄로 몰아붙인다면 송시열을 그의 학문적 연원인 이이와 함께 헐뜯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몰래 거짓으로 꾸며 내어 이러한 글을 지어서 한편으로는 이이를 비방하는 칼자루로 삼고 한편으로는 송시열을 공격하는 도끼로 삼았으니 그 계책을 쓰는 것이 음흉하고 간사하기가 너무나 교묘하고 지독합니다. 그의 아들 윤증(尹拯)이 감히 ‘실제로 입산(入山)한 일이 있었다.’라고 말하여 이이를 비방하고, 40년 동안 아버지처럼 섬기던 스승을 하루아침에 원수처럼 여기고는 몰래 흉적을 부추겨서 기사년(1689, 숙종15)의 큰 재앙을 일으킨 것은 그 아비의 교묘하고 참혹한 술수를 이어받지 않은 것이 없으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도 우리 숙종대왕께서 성학(聖學)이 고명하시어 뭇 이치를 전부 살피시고 사정(邪正)과 진위(眞僞)를 남김없이 통찰하여 분별하신 덕택에 사문의 시비를 크게 정하여 백대의 의혹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선대왕께서 대리청정을 하시던 날에 또 윤선거가 성조(聖祖)를 무함하고 이이를 헐뜯은 두 가지 큰 죄로 인하여 그 원우(院宇)를 훼철하고 그 관작을 삭탈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두 임금께서 사설(邪說)을 배척하고 정학(正學)을 부지(扶持)하신 성대한 뜻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음을 여기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윤선거의 무리인 황욱(黃昱)과 김범갑(金范甲) 등이 감히 기회를 틈타 날뛰면서 제멋대로 상소를 올려 윤선거를 위하여 변론을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이를 무함한 부분에 대해서는 교활하고 간사한 저들로서도 일언반구도 해명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귀를 막고서 마음 내키는 대로 자행하여 못하는 짓이 없어서, 이미 삭탈한 관작을 회복하고 이미 훼철한 원우를 설립하여 꺼져 가던 사설이 다시 타오르게 하고 밝아지려던 사문이 다시 어두워지도록 하였으니, 사림들의 애통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해서(海西) 유생 박번(朴蕃) 등이 5, 6백 명의 많은 선비들을 인솔하여 부월(鈇鉞)의 주륙(誅戮)을 피하지 않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으며, 발이 부르트도록 먼 길을 달려와서 해를 가리고 있는 구름을 밀치고 대궐에 호소하여 대현이 무함을 당하고 사설이 정학을 해친 사실을 변론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자 승정원과 양사에 있는 흉악한 무리가 그 상소를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또 이어서 중형을 가하여 절새(絶塞)로 유배하여 도깨비를 막도록 청하였으니, 뜻 있는 선비들이 통곡하고 눈물을 흘림이 이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습니다. 또 최활(崔活)과 이태익(李泰翼)이란 자는 혹은 이이의 방계 후손이고 혹은 문생의 후손으로, 이이가 머물렀던 고장에서 성장하여 함께 공맹(孔孟)의 교화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권간에게 빌붙어 거꾸로 사문에 창을 겨누었으며, 윤선거와 윤증이 있는 것만 알고 이이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불령한 무리를 불러 모아 바른 사람을 해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이를 무함하고 모욕한 윤선거와 윤증은 유현(儒賢)이라고 부르며 존숭하고 이이를 변론한 많은 선비들은 사악한 무리라고 부르며 배척하였습니다. 그 본래의 일은 저들이 변명할 말이 없음을 알았다면 단지 간략한 몇 마디 말로 범연하게 설명하고 지나갔을 텐데, 끝에서는 김홍석(金弘錫)의 여론(餘論)을 끌어다가 송시열을 무함하여 그를 왕안석(王安石)에 비유하기까지 하면서 거리낌 없이 공공연하게 능욕하였으니, 윤리와 기강을 해치고 명교(名敎)를 폐기한 죄는 본래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암암리에 함정을 설치하고 몰래 대관을 사주하여 박번을 때려 죽이려고 꾀한다는 설이 원근에 왁자하게 퍼지자 선비들이 모두 두려워서 바로 서지도 바로 쳐다보지도 못하였으며, 이어서 또 현관(縣官)에게 부탁하여 상소 아래에 연명한 유생들을 백방으로 무함하여 죄에 얽어 넣어 수금하거나 형을 가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금고(禁錮)하여 기필코 사류들을 일망타진하기 전에는 그만두려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수년이 지났더라면 사류로서 이이를 변론한 자들은 남김없이 전멸되었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우리 성상의 덕택에 요순의 태평성대처럼 훤히 청명해져서 도깨비나 무지개 같은 간신배들이 형적을 감출 수 없게 되었고 편벽되고 사악한 말들을 더 이상 제멋대로 떠들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만 성고조(聖考朝) 때에 이미 삭탈하였던 윤선거의 관작을 아직도 삭탈하지 않고 있으며 이미 훼철하였던 윤선거의 원우를 아직도 훼철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선정신이 입은 무함을 여전히 씻지 못하고 윤선거가 무함한 죄를 여전히 바로잡지 못하여 전하의 처분에 끝내 미진한 바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이 끝내 밝혀지지 않고 사악한 것과 올바른 것이 끝내 분별되지 않아 여윈 돼지가 날뛰는 것을 장차 더 이상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 몹시 두렵지 않겠습니까. 신은 제왕의 효도는 선왕의 뜻을 계승하고 사업을 발전시키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처음 정치를 하실 때 먼저 해야 할 것은 오직 효제(孝悌)에 달려 있으니, 두 분 선왕의 뜻을 계승하고 사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어찌 효제 가운데 큰 절목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두 분 선왕께서 정도(正道)를 부지(扶持)하고 사도(邪道)를 억누르신 지극한 뜻과 현인을 본받고 악인을 징계하신 성전(盛典)을 깊이 받들어, 속히 담당 관사에 명하여 윤선거의 관작을 도로 삭탈하고 또 윤선거의 원우를 훼철하도록 하시고, 이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윤선거가 기록한 글 가운데 선현을 함부로 논한 부분을 조목조목 분변해서 설파하도록 하여 사방에 반시(頒示)하고, 또 최활과 이태익 등이 현인을 무함하고 올바른 사람을 해친 죄를 바로잡아 먼 변방으로 유배하여 편벽되고 간사하며 무고하는 말들이 세상에 더 이상 난무하지 않도록 하여, 선조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는 성상의 효도를 빛내시고 사림들의 추향(趨向)을 바로잡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들은 지극히 황공하고 간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처분은 이미 정해졌다. 관작과 원우는 사문이나 조정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며, 사가(私家)의 글을 사방에 반시하라는 청은 더욱 지나치다. 사문의 시시비비는 본디 유생들이 해야 할 일이며, 이미 명백하게 안 다음에 참작하여 처분하는 것은 조정에 달려 있다. 그대들은 더욱 격화시키는 논의를 더 이상 제기하지 말고 물러나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상소에 연명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유학(幼學) 윤수갑ㆍ박재발(朴載發)ㆍ이정무(李正茂)ㆍ강면주(姜冕周), 생원(生員) 김서오(金敍五), 유학 최수도(崔守道)ㆍ민제연(閔齊淵)ㆍ이정협(李鼎協)ㆍ강진숙(姜晉塾)ㆍ이호신(李虎臣)ㆍ정청하(鄭淸河)ㆍ고덕후(高德垕)ㆍ박재항(朴載恒)ㆍ이정인(李正寅)ㆍ오태흠(吳泰欽)ㆍ이종협(李宗協)ㆍ박재순(朴載淳)ㆍ이인수(李仁壽)ㆍ이정화(李正華), 진사(進士) 윤수준(尹壽俊), 생원 이광규(李光奎), 유학 윤간(尹侃)ㆍ강덕봉(姜德鳳), 생원 오명주(吳命周), 진사 이광시(李光蓍), 유학 윤수대(尹壽岱)ㆍ박재길(朴載吉)ㆍ강진명(姜晉鳴), 생원 강진기(姜晉基), 유학 오명백(吳命伯)ㆍ이사익(李師翼), 진사 이광위(李光緯), 유학 박재렴(朴載濂)ㆍ윤수륜(尹壽崙)ㆍ박면(朴葂), 진사 이인제(李仁濟), 유학 박훈(朴薰)ㆍ오태귀(吳泰龜)ㆍ김상오(金相五)ㆍ안희갑(安喜甲)ㆍ봉일진(奉日晉)ㆍ이석하(李錫夏), 진사 이정하(李靖夏), 유학 윤광준(尹光俊)ㆍ이진하(李鎭夏)ㆍ이원갑(李元甲)ㆍ강시복(姜時復)ㆍ이정춘(李正春)ㆍ이승익(李升翼)ㆍ윤수악(尹壽岳)ㆍ강진후(姜晉垕)ㆍ이정륜(李正倫)ㆍ박재익(朴載益)ㆍ이붕익(李鵬翼)ㆍ윤수채(尹壽采)ㆍ오태봉(吳泰鳳)ㆍ안희천(安喜天)ㆍ이화익(李華翼)ㆍ박재청(朴載淸)ㆍ윤수회(尹壽會)ㆍ오태진(吳泰鎭)ㆍ김현(金睍)ㆍ윤수성(尹壽星)ㆍ안용경(安龍慶)ㆍ조여호(趙汝豪)ㆍ이필수(李必壽)ㆍ이공협(李公協)ㆍ이방익(李邦翼)ㆍ윤헌(尹瀗)ㆍ이복하(李福夏)ㆍ김윤오(金允五)ㆍ안명국(安命國)ㆍ봉일림(奉日臨)ㆍ조여준(趙汝俊)ㆍ이인협(李仁協)ㆍ이한원(李漢源)ㆍ김정구(金鼎九)ㆍ박재주(朴載周)ㆍ윤맥(尹脈)ㆍ이인항(李仁恒)ㆍ오태덕(吳泰德)ㆍ김경(金暻)ㆍ이덕하(李德夏)ㆍ윤광좌(尹光佐)ㆍ신희천(愼喜天)ㆍ김순오(金順五), 생원 권담(權譚), 유학 이창익(李昌翼)ㆍ윤화(尹俰)ㆍ이인태(李仁泰)ㆍ강진홍(姜晉弘)ㆍ이정만(李正萬)ㆍ박무(朴茂)ㆍ이인점(李仁漸)ㆍ오태유(吳泰裕)ㆍ이덕하(李德夏)ㆍ윤광우(尹光佑)ㆍ안창국(安昌國)ㆍ조여선(趙汝宣)ㆍ이덕룡(李德龍)ㆍ민이수(閔頤修)ㆍ이함(李緘)ㆍ윤현(尹俔)ㆍ이인관(李仁觀)ㆍ김질(金晊)ㆍ윤광리(尹光履)ㆍ이원화(李元華)ㆍ김광세(金光世)ㆍ안주국(安柱國)ㆍ이진혁(李震爀)ㆍ이형원(李亨遠)ㆍ민항수(閔恒修)ㆍ김상하(金相夏)ㆍ김익귀(金益龜)ㆍ김서구(金敍九)ㆍ이재무(李才茂)ㆍ이한봉(李漢鳳)ㆍ이광(李絖)ㆍ박위(朴葳)ㆍ윤전(尹倎)ㆍ윤광선(尹光宣)ㆍ김정세(金挺世)ㆍ안빈국(安賓國)ㆍ이덕기(李德基)ㆍ김익태(金益泰)ㆍ김쟁(金鏳)ㆍ김학구(金鶴九)ㆍ김성해(金聖楷)ㆍ이문익(李文翼)ㆍ윤검(尹儉)ㆍ이광선(李光選)ㆍ오태진(吳泰晉)ㆍ윤광후(尹光垕)ㆍ봉명좌(奉明佐)ㆍ김광필(金光弼)ㆍ이한명(李漢明)ㆍ김용구(金龍九)ㆍ이덕관(李德寬)ㆍ이형복(李亨福)ㆍ박행(朴荇)ㆍ윤황(尹)ㆍ이광유(李光維)ㆍ오태준(吳泰俊)ㆍ안국빈(安國賓)ㆍ이현식(李玄植)ㆍ이한일(李漢逸)ㆍ김광한(金光漢)ㆍ이정발(李正發)ㆍ박준(朴葰)ㆍ윤현(尹𠉌)ㆍ이광순(李光純)ㆍ김몽호(金夢虎)ㆍ이덕칠(李德七)ㆍ박침(朴葴)ㆍ박정찬(朴廷燦)ㆍ김정기(金鼎基)ㆍ안국관(安國寬)ㆍ이진욱(李震郁)ㆍ조수명(趙壽溟)ㆍ조동연(趙東淵)ㆍ이채욱(李彩郁)ㆍ박성(朴荿)ㆍ박정혁(朴廷赫)ㆍ강필제(姜必濟)ㆍ조준(趙晙)ㆍ이형로(李亨老)ㆍ김진유(金振維)ㆍ이시방(李時芳)ㆍ김시익(金始益)ㆍ박정(朴莛)ㆍ박선(朴𧂍)ㆍ윤준(尹儁)ㆍ조현(趙睍)ㆍ이형천(李亨千)ㆍ권박(權搏)ㆍ신복화(申復華)ㆍ이시훈(李時薰)ㆍ박진기(朴鎭紀)ㆍ김하구(金夏九)ㆍ박조(朴藻)ㆍ박지규(朴之奎)ㆍ박윤(朴荺)ㆍ김정상(金鼎相)ㆍ박숭(朴)ㆍ이필무(李必茂)ㆍ정이하(鄭离夏)ㆍ이재덕(李才德)ㆍ윤승규(尹承奎)ㆍ박지두(朴之斗)ㆍ김성보(金聖輔)ㆍ이희명(李熙明)ㆍ김이하(金爾夏)ㆍ박경헌(朴景憲)ㆍ김성모(金聖模)ㆍ윤진하(尹振夏E)ㆍ박문흥(朴文興)ㆍ김시휘(金時輝)ㆍ박원도(朴元道)ㆍ김홍만(金弘萬)ㆍ정윤하(鄭潤河)ㆍ김하일(金夏一)ㆍ김접(金惵)ㆍ박형도(朴亨道)ㆍ김성집(金聖楫)ㆍ박필(朴苾)ㆍ정양하(鄭量河)ㆍ김진옥(金振玉)ㆍ박동화(朴東華)ㆍ김명덕(金命德)ㆍ강시형(姜時亨)ㆍ김하삼(金夏三)ㆍ박동원(朴東元)ㆍ강필대(姜必大)ㆍ윤서(尹偦)ㆍ강시겸(姜時謙)ㆍ박동로(朴東老)ㆍ현광우(玄光宇)ㆍ송상하(宋相夏)ㆍ고배후(高配厚)ㆍ최석후(崔錫垕)ㆍ황진후(黃鎭垕)ㆍ박동필(朴東弼)ㆍ김경명(金景命)ㆍ김문주(金文柱)ㆍ유원(柳垣)ㆍ김세갑(金世甲)ㆍ윤태채(尹泰采)ㆍ김문형(金文衡)ㆍ박동상(朴東相)ㆍ김세중(金世重)ㆍ김응세(金應世)ㆍ윤초(尹偢)ㆍ김창세(金昌世)ㆍ현계우(玄啓宇)ㆍ유증(柳增), 진사 이석복(李錫福), 유학 박필형(朴弼亨)ㆍ송희안(宋希顔)ㆍ민제맹(閔齊孟)ㆍ김중백(金重百)ㆍ성덕기(成德基), 진사 박사동(朴師東), 유학 송현(宋炫)ㆍ김관(金瓘)ㆍ김성대(金聲大)ㆍ이광두(李光斗)ㆍ이광석(李光錫)ㆍ이기언(李基彦)ㆍ오명신(吳命新)ㆍ신희윤(愼希尹)ㆍ장제식(張齊栻)ㆍ황진장(黃鎭璋)ㆍ이석조(李錫祚)ㆍ문응표(文應豹)ㆍ김중후(金重垕)ㆍ송희렴(宋希濂)ㆍ조세빈(趙世彬)ㆍ유상권(柳尙權)ㆍ한재후(韓載垕)ㆍ조수대(趙壽岱)ㆍ강우무(姜遇武)ㆍ조수장(趙壽長)ㆍ한필흠(韓必欽)ㆍ강태세(姜泰世)ㆍ강시찬(姜時燦)ㆍ안희태(安喜泰)ㆍ이종하(李宗夏)ㆍ이봉기(李鳳紀)ㆍ정완주(鄭完周)ㆍ정현주(鄭顯周)ㆍ이몽협(李夢協)ㆍ정수교(鄭壽喬)ㆍ오세붕(吳世鵬)ㆍ윤진하(尹振夏)ㆍ조태일(趙泰逸)ㆍ윤익하(尹翊夏)ㆍ조태엽(趙泰燁)이다.
[주-D001] 계미년 …… 무함하여 : 1583년(선조16) 6월 11일에 동인(東人) 계열의 송응개(宋應漑), 박근원(朴謹元), 허봉(許篈) 등이 군정(軍政)을 마음대로 행한 일 등을 빌미로 이이(李珥)를 탄핵하고 파직하기를 청하였다. 《宣祖實錄 16年 8月 28日》[주-D002] 기사년 이현령(李玄齡)의 상소 : 1689년(숙종15) 3월 12일에 이현령이 올린,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서 출향(黜享)해 달라고 청하는 상소이다. 이 상소로 인하여 이이와 성혼은 3월 18일에 문묘에서 출향되었다. 《肅宗實錄》[주-D003] 유현(儒賢)의 문하에 종유(從遊)하면서 : 윤선거(尹宣擧)는 김집(金集)의 문인이다.[주-D004] 기사년의 큰 재앙 : 1689년(숙종15) 숙종의 후궁 소의(昭儀) 장씨(張氏)의 소생을 원자로 정하는 문제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한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말한다. 이때 송시열은 원자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이해 6월에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肅宗實錄 15年 6月 3日》[주-D005] 김범갑(金范甲) : 원문은 ‘範甲’인데, 《승정원일기》 영조 1년 1월 3일 기사 등에 근거하여 ‘範’을 ‘范’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6] 김홍석(金弘錫)의 여론(餘論) : 1723년(경종3) 5월 1일에 경기 유학(幼學) 김홍석 등이 상소하여, 송시열(宋時烈)이 성혼(成渾)을 무함하고 욕보였다는 이유로 직명을 추탈하라고 청하였다. 《景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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