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파트숲 건너 서원마을 – 이정골 마을> 발제-20220124
Ⅱ. 이정골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이미희
♦ 이정골의 위치
이정골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에 있다.
느티나무 정자가 있어 ‘유정골’(有亭-), ‘유정리’(有亭里)라고 한다. 신항서원 묘정비에 유정(有定)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정(定)이 정(亭)으로 바뀌었는지 불분명하지만 ‘유정’이 ‘이정’으로 바뀌어 ‘이정골’이 된 것이다.
이정골은 상당산의 줄기가 뻗어 내려와 것대산, 상봉, 낙가산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마을 한가운데 흐르는 영운천은 마을 입구 버스 정류장에서 이정골 저수지에서 흘러나온 물과 만난다.
1. 이정골의 주요 산줄기
*상당산
상당산의 높이는 491m 이다.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에 있다. 산의 서쪽과 남쪽이 급사면을 이루고 동쪽은 완만한 지형이다. 남서쪽 물이 무심천을 거쳐 금강으로 흐르고 동쪽 물은 미원천을 거쳐 남한강으로 흐른다. 산성 안의 성내방죽은 상당산 동쪽 골짜기를 타고 모인 물이다.
*것대산
것대산은 이정골 마을 뒷산에서 보이는 가장 높은 산이다.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의 선도산(547.2m) 자락에 있는 봉우리다. 옛 문헌에 ‘거차대산’ ‘거질대산’ 등으로 표기되었다. 정상에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26호 거질대산봉수지가 있다. 2009년 5기의 봉수를 복원하였다.
*낙가산
이정골에서 산 쪽을 볼 때 가장 오른 쪽 봉우리로 높이는 475m이다.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과 용암동에 걸쳐 형성되었다. 청주시의 동쪽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남쪽에 충청북도유형문화재 보살사가 있다.
*상봉재
상당산성에서 것대산 봉수대로 오는 길목에 상봉이 있다. 상봉아래 상봉재를 지나는 산길은 청주의 대표적인 옛길이다. 상봉재 옛길에는 옛 사람들이 만든 서낭당, 목을 축이던 옹달샘, 충청병영무관들의 선정비가 있다.
2. 산길에서 만나는 이야기
상봉재 옛길은 청주시내에서 보은으로 넘어가는 512번 지방도가 생기기전까지 상당산성 주변의 낭성면과 미동산 수목원이 있는 미원면 지역에 소몰이꾼들이나 청주로 장보러 오가던 이들이 주로 이용하던 옛길이다. 산성터널 옆 공원에서 상봉재 옛길을 따라 오르면 선정비군이 있다. 7개 선정비는 바위에 비석을 직접 새기거나 자연석을 이용해 비각형태를 조각하였다.
산행을 시작하여 왼쪽 갈림길에 선정비 푯말이 있으니 병마절도사 윤구연(왼) 병마우후 한완(우) 선정비다. 다음으로 홍충병사 전문현과 홍충병우후 이광기의 영세불망비를 만날 수 있다. 산길을 따라 옹달샘에 못 미쳐 바위군락을 만나니 병마우후 이의장 마애선정비, 충청병사 민지열 선정기리는 마애비, 충청병사 이삼△ 마애선정비가 있다.
상봉재 근처 전설을 만나 볼 수 있으니 애기바위라고 불리는 부녀상 바위에 얽힌 이야기다. 상봉재에서 잠시 쉬어가기 좋은 곳에는 솟대와 가마솥을 짊어진 지게를 만나게 된다. 이 길을 오갔던 사람들을 기억하는 조형물이다.
상봉이란 만난다는 뜻도 있다. 만남의 의미로 전해지는 상봉재 옛이야기가 전해지니 모자 상봉의 애틋한 전설이 상봉재 안내판에 소개되어 있다.
2022.01.24 / 신항서원 발제 이정골의 지명(p30-51) / 이흥선
*신항서원으로 향하는 청주 사림들의 길:신항서원이 설립 이후 사림들이 서원을 왕래하던 길 이정골 옛길. (관내→중고개→신항서원.미원·낭성 ·내수 방면→상봉재 →신항서원). 이정골 옛길: 이정골 방죽→상봉재, 신항서원→과수원→낙가산→것대산
*이정골 옛길에서 만난 금광:이정골 방죽(낚시터)를 지나 이정골 옛길 중간에 버려진 건물(휴게소, 금 선별장)
한국광해관리공단과 주민들에 따르면 청주 지역에 4곳(청주광산:이정골 관산, 복대광산:비하동금광, 무심천광사:율량천 금광, 남용광산 사직동)의 금광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청주광산(이정골금광)은 1932년부터 채굴했다. 현재 청주광산은 붕괴 사고를 대비해서 입구를 철문으로 봉쇄했다. 금광 인근 농가에서는 금광에서 나오는 물을 식수로 사용하이기도 했다. 마을 주민 오석태씨에 따르면 철문으로 막은 금광은 상당산성 쪽으로 파 들어가다 네 곳으로 갈라졌다고 한다. 그중 한 곳은 우암산 어린이회관 건물 밑까지 파들어 간 것, 또 한 곳은 상당산성 지하 입구까지 파들어 갔다. 1980년대만 해도 광부 20여명이 이곳 숙소에서 지내며 금방아(파쇄기)를 돌려 금광에서 금을 뽑아냈다고 했다. 한국해양관리공단은 이정골금광의 경우 1932년 12월 10일 광업권이 등록 1997년 3월까지 금은동을 광물을 캤다.(2009충청매일 기사 내용)
3. 마을을 지키는 고목
-마을 가운데 위치한 느티나무(6.25때 피난민들의 장, 단오 때는 그네)
-서원입구에서 오랜 풍상으로 커다란 구멍이 뚫린 느티나무(서원을 지키는 터주대감, 화재로 인해 나무 밑 둥이 반만 남았지만 시원한 그늘을 제공)
Ⅲ. 이정골 마을 사람들
위치: 용정동 김수녕 양궁장 가는 사이길, 이정골로다. 이 길로 따라 영운천이 흐르는 길을 따라 펼쳐진 들이 ‘문앞들’이다. 문앞들에 청주의 미소로 불리는 ‘순치명석불입상’이 있다. 이정골 마을로 들어오는 버스 노선 (872-1,872-2)
1. 마을의 지명 유래
이정골은 행정구역상 용정동에 속한다. 용정동은 본래 청주군 사주내면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정책에 따라 유정리, 구곡리, 용성이, 구하리 일부를 통합하여 용정리라 명명하고 사주면에 편입했다. 용정은 ‘용성’과 ‘유정’리에서 한자씩 따서 만든 명칭이다. 1963년 용정동으로 바꾸어 청주시에 편입되었다.
-것대골: 용암방죽 위에 있는 골짜기
-구중고개/ 이정골 고개(재떨이→이정골로 넘어가는 고개): 옛 중들이 지나던 고개라 하여 구중고개라 하고, 새로 넘나드는 길목을 중고개라 한다. 구중고개의 구중은 고개가 겹겹이 굽이져 있는 것. 현재 호미골 용정축구공원에서 자동차 중고매매센터를 거쳐 이정골로 들어오는 고개로 차량의 통행이 가능
운선과 상백의 아픈 사랑길, 구중고개 전설
광해군 무렵 청중에 낙향한 이참판에게는 외동딸 운선이 있었다. 운선은 자기 집 하인 상백을 사랑했다. 양반이 상놈을 사랑한다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운선은 그만 상사병에 걸려 몸져눕게 되었다. 이참판은 병을 고치려고 의원도 부르고, 굿도 했다. 하지만 조금도 회복될 기미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참판은 경기도 용인에 명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상백에게 명의를 데려오라고 했다. 이 사실을 안 운선은 성황당에서 상백을 기다렸다. 그리고 자신이 아픈 이유를 말하며 함께 도망가서 살자는 뜻을 전했다.
이 말을 들은 상백은 두려운 마음에 보살사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이 된 상백이 청주성으로 시주를 나왔는데 운선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운선은 보살사로 상백을 찾아가 함께 도망가 살자고 했다. 스님이 된 상백은 울며 호소하는 운선의 뜻을 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그날 밤 보살사를 빠져나와 청주성으로 가던 길에 이정골고개에서 쉬게 되었다.
상백은 석 달도 안 돼 환속의 몸으로 고갯길을 넘는 자신의 약한 의지를 후회했다. 또 양반과 혼인해서 살아갈 날도 두려워서 운선에게 함께 죽자고 했다. 운선도 신분의 벽을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함께 죽기로 했다.
다음날 새벽 마을 사람들은 젊은 중과 젊은 아녀자의 시체를 발견하고 관가에 알렸다. 이에 보살사 주지 스님은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고 그 고개를 중들이 왕래하지 못하도록 금했다고 했다.(이를 알게 된 보살사 주지 스님은 그 고개로 중들이 다니지 못하도록 했어. 그리하여 옛날에 중들이 지나던 고개라고 해서 ‘구중고개’라고 하고, 새로 중들이 넘나드는 길을 ‘중고개’라고 불렀대.-김병진 할머니 이야기)
-도둑길/ 도독골:도독골은 상봉재 밑에 있는 골짜기다. 도독골 이라고도 한다. (도둑이 숨기에 좋을 만큼 후미진 곳, 실제 이곳에서 자주 도둑을 맞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기도 하지만 의문) 도둑은 도둑골은 도둔골이라는 지명으로 쓰이는 것으로 보면 두둑한 골짜기로 해석할 수 있다.
-동그배미: 이정골 앞에 있는 들. 동그배미는 둥그런 모양을 하고 있는 논배미. 그런데 여기서 둥그배미는 논배미가 아니라 ‘들’ 이름으로 쓰인 것이다.
-산제당골 :산제당골은 가니봉에 있는 골짜기다. ‘산제당’과 ‘골(산제당이 있는 골짜기)
-안골: 안골은 신항서원 안에 있는 골짜기다. 안은 내(內) 골은 곡(谷)의 뜻이니 안골은 안에 있는 골짜기로 해석된다. 신항서원으로 보아 안쪽으로 들어와 있는 골짜기여서 붙여진 이름
-애미장골: 애미장골은 용정방죽 위에 있는 골짜기다. 죽은 애를 묻었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나 신비성이 없다. 애미장골의 애미는 ‘애미말’ ‘애미산’ ‘애미재’의 애미와 같은 성격으로 파악. 애미의 어원은 기원을 알기 어렵다.
-재떨이: 재떨이는 용정동에 있는 마을이다. 재떨이는 ‘재들’이 변형된 지명으로 추정. ‘재들’의 고개에 있는 들‘로 해석. 재들→ 재뜰→ 재뜰이→ 재떨이로 변한 것으로 추정
2. 청주의 미소 순치명석불입상(順治銘石佛立像)
정식 명칭은 ‘청주 순치명 석조 여래 입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150호) ‘순치9(효종3년, 1652년) 11월 16일’에 세웠다. 화강암 상단부에 두상을 조각했는데 거의 선으로 그린 모습이다. 이마에 커다란 백호가 도드라져있고 눈은 내려뜬 모양으로 누두덩이가 도드라져 마치 장승같은 모습, 코는 작고 짤막하며 입은 반달모양을 새겨 눈과 함께 전체적으로 웃는 모습, 양쪽 귀는 조각되지 않았고 목은 짧다. 얼굴에 잇달아 두 팔을 수평으로 나타냈다. 두 손을 모아 턱 밑에 괴고 있어서 미숙한 특징. 불상이면서 마을의 수호신적인 장승의 기능.(마을을 장승배기 마을) 마을 사람들은 ‘선 돌멩이’, ‘돌장승’ 등으로 마을의 이정표.
석불에 전해지는 이야기.
옛날 금강산 산신령이 일만이천봉을 만들기 위해 전국의 돌들에게 금강산으로 모이라고 했다. 소문을 들은 석불도 금강산으로 가다 이정골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그런데 일만이천봉을 완성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그냥 이 마을에 있기로 했다.
옛날에 ‘꼭끼 할매’는 상당산성을 쌓을 때 치마에 돌을 담아 날랐다. 그런데 치마에 구멍이 나서 두 개가 떨어졌다. 그 중에 하나가 석불이라고 전해진다.
어느 해인가 선돌이 사라졌다.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큰 비가 내린 어느 날 중고개 옆 개울에서 석불이 솟아올랐다. 동네 사람들이 밧줄로 나무 기둥에 석불을 묶었다. 그 기둥을 어깨에 메고 와서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세워 놓았다. 마을에 큰 복이 들어오라고 마을 입구에 장승처럼 세워놓았다. 해마다 마을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제사(동제)를 지내기도 했다.
신항서원-이정골 발제(52~76p)/20220124/서월석
3. 골목골목 남아있는 마을 이야기
1) 100년을 이어온 마을 동계와산신제
1902년 이정골은 동계를 중심으로 마을 규약이 생기고 공동체가 유지되어왔다. 산신제 제관인 김정진 씨의 증조부가 이정골에 장가오면서 동계에 참여했다. 이정골은 상당신을 모시는 산신제와 하당신을 모시는 장승제와 용왕제가 있었다.
이정골 산신제
♦ 인터뷰 : 김정진(마을총무)
120여년 전인 1902년부터 마을 동계에서 산신제를 지내게 되었다. 신항서원이 먼저 생기고 서원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게 되어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금 도로공사하는 곳이 원래 신항서원 자리(기왓장 다수 발견)인데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마을 기록물은 없지만 동계계칙(책)이 있는데 내용은 ‘동네에서 잘못한 사람은 멍석에 말아 볼기를 치고, 간음한 사람은 동네에서 내쫒고, 동네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은 쌀 서 되를 내고, 분가하는 이는 쌀 한 되 반을 내야하는’ 등의 계칙이 적혀있다. 동네 사람들을 위한 계율을 적어 동네법으로 만들어 놓았다. 동계는 음력 시월 그믐날 하는데 예전엔 먹고살기가 어려워서 동계 하는 날 점심과 떡을 준비해 동네 분들과 다함께 나눠 먹었다. 신항서원은 도조(땅을 빌려주고 대신 농사지은 벼를 받는 것)를 했는데 도지 금액을 동계에서 정했다. 도조 받기 전에 동계를 진행해 그 해의 쌀금이 얼마인지 정하는데 그 날짜를 이어받아 동계날을 그믐날로 정하게 되었다.
동계는 마을 공동체를 유지하는 역할도 했지만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례의식도 담당했다. 이정골은 민간신앙인 산신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마을이다. 현재는 의식이 간소화되고 그나마 제관을 이어갈 사람조차 찾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이정골 동제의 제장은 선돌(용정동 앞 냇가), 산제당(산지당, 뒷산 산제당골), 천지당(산제당 뒤편) 세 군데이다.
①선돌 : 수구맥이, 장승,
②산제당 : 산지당골 간이골 새터쪽에 위치, 신당은 두 칸인데 좌측은 부뚜막이 있고 창고 겸 부엌으로 사용하며, 우측은 산신령을 모신 신당으로 사용한다. 신당에는 갓 쓴 노인이 호랑이를 타고 있는 산신도가 있다.
③천지당 : 산제당에서 50m 아래 부근, 소나무에 둘러 쌓인 암갈색의 방구(자연석)를 세워놓았고 하부에는 잡석이 쌓여있다.
제일이 정해지면 주민들은 언행을 조심하고 비린 것을 금하며 마을 밖에서 궂은 것을 보면 제가 끝난 후에야 마을로 들어왔다. 생기복덕을 가려 제주를 선정하는데 도가·축관·고양주 각 1인씩이다. 도가는 음식 장만을 담당하고, 고양주는 제물을 올리는 역할을 한다. 제비(祭費)는 동제답 800평과 동계의 마을 기금, 추렴을 통해 마련한다. 제물은 시루떡 3통, 삼색실과 나물, 명태, 돼지머리 등을 올린다. 도가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입에 백지를 물고 금언하며, 일곱 번 씻고 일곱 번 일굴 정도로 정성을 들인다. 제사의 순서는 천지당→산지당→선돌 순이다.
①천지당 : 분향, 재배, 강신, 독축, /제주들만 참석
②산지당 : 분향, 재배, 강신, 독축, 소지, /제주들만 참석
③선돌 : 황토를 뿌리고 왼새끼를 걸친 후 촛불 켜고 제물진설(떡시루 통째, 삼색실, 술 한 잔, 명태 등)을 차린 후 제주 재배와 헌주 한잔과 축으로만 간단히 지냄/마을 주민들도 참석
제사를 마치면 마을 주민들이 모여 음복을 겸한 마을회의(제비 결산과 마을사업 논의)를 한 후 풍장(농악)을 치거나 윷놀이를 하며 즐긴다. 마을 주민들은 여전히 동제의 신성성을 굳건히 믿고 있다. 산지당 건물이나 물건을 훼손한 사람은 꼭 화를 입게 되었다. 산신당이 예전에는 기와집이었는데 오래되고 허물어져서 2000년쯤에 복원을 한다고 했는데 조립식으로 복원되어서 품위가 없다.
예전 이정골 입구에는 큰 팽나무(현 모래공장 위치, 당시 마을의 당산나무 역할)와 참나무가 있었고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이 세워져 있었다. 커다란 돌이 넓적하게 있어서 거기다 금줄을 치고 제사를 지냈다.
♦ 인터뷰 : 최명규, 이상옥(마을주민) - 산신제는 동네에서 지내는데 책임자를 도가라고 한다. 부정 타지 않도록 도가 집 앞에는 붉은 황토흙을 뿌리고 백설기를 준비한다. 어르신들이 집에서 목욕하고 지게에 떡지고 가고 과일은 대추, 밤, 곶감을 가져가고 술 대신 보리차를 썼다. 산제당에 산신령이 호랑이 등에 타고가면서 담배피는 그림이 있었는데 누가 훔쳐갔다. 오래된 보물이라 도둑맞은 듯 한데 1년에 한번만 가는 곳이라 언제 없어졌는지도 알 수 없다. 50~60년 전에 도둑맞고 똑같은 그림을 다시 사서 걸어두었다.
♦ 인터뷰 : 김홍순(마을주민) - 예전엔 산신제 지내려면 마을 입구에 금줄을 쳐서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세월이 지나니 산신제 하기 전에 마을방송을 통해 비린 거 먹지 말라, 피 빨래 하지 말라 등을 전달한다. 지금은 방송도 안 하고 산신제 안내만 알려주고 있다. 어릴 때는 먹을 게 귀해서 제사 음식을 얻어먹으려고 줄 서서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제사가 많이 소박해졌다.
이정골 장승제
정월 초 주민이 모여 제일과 제관을 정한다. 제관 선정 시 부정을 막기 위해 생기복덕을 가리고 동네의 우환은 없는지, 제관으로 뽑을 집안 여자의 생리는 없는지 등을 살핀다. 제일이 되면 제관 집 대문에 왼새끼로 꼰 금줄을 치고, 대문 앞 황토 세 무더기씩을 뿌린다. 제관은 목욕재계 후 제수를 마련한다. 제수는 육거리시장에서 돼지머리, 삼색실, 포, 백설기, 보리차, 막걸리 등으로 준비해 올린다. 보리차는 산신제에, 술은 장승제에 올린다. 제관들이 돌아오면(오후 1시쯤) 삶은 돼지머리를 준비해 바로 산으로 올라간다. 산제당에 도착해 청소를 하고 샘을 파 물을 모은다. 산제당에 제수 준비를 마치면 천제당으로 올라가 같은 준비를 반복한다. 제 준비가 끝나면 바로 제를 올리고 촛불과 향을 그대로 피워놓고 제수를 조금씩 떼놓은 다음 산제당으로 내려온다. 산제당에 내려오면 샘물을 떠다 손과 얼굴을 닦고 산신제를 지낸다. 재배, 축문을 읽고 소지(마을 전체의 안녕과 복을 기원, 제관 가족과 개인을 복을 기원)를 올린다. 제사를 마치면 음복하고 음식을 조금씩 떼어 제당 주위에 뿌린 후 나머지는 가지고 내려온다. 마을에 내려오면 왼새끼를 꼬아 금줄을 만들어 장승에 친다. 금줄에 포를 매달고 제수를 차린 후 재배를 하고 간단히 제를 마친다. 모든 제가 끝나면 주민이 함께 음식을 나눠 먹는다. 예전에는 제일, 제관 선정 기준이 매우 까다로웠지만 지금은 형식도 준비도 많이 간소화되었다.
이정골 용왕제
마을 공동체 신앙과 개인 신앙이 겹쳐진 형태이다. 정월 보름날 마을 주민이 모여 우물 주변을 청소하고 풍장을 치며 우물물이 마르지 않기를 기원한다. 저녁이 되면 집집마다 부녀자들이 샘에 떡시루를 올려 용왕제를 지낸다. 이정골은 본래 물이 부족한 곳이라 수도시설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공동우물을 사용했다. 한때 6~7개의 우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폐쇄된 우물 1곳만 남아있다.
♦ 인터뷰 : 최명규(마을주민)
처음에는 산에서 물을 끌어다 마을주민이 다함께 이용했다. 물이 나올 때도 있고 막힐 때도 있었는데 막힐 때면 마을 주민이 모두 가서 공사를 했다. 일부 주민이 개인적 욕심에 파이프를 달아 다툼이 일기도 했다. 그러다 자가 수도(지하수)를 하나둘씩 파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물이 사라지게 되었다.
2) 전쟁을 피해 찾아든 이정골
이정골은 진입이 어려운 곳이라 한국전쟁 당시 피난골로 이용되었다.
♦ 인터뷰 김정진(마을주민) - 6.25때 7살이었는데 청주시내 사람들이 모두 이정골로 피난왔어. 우리는 할아버지가 피난가라고 보내서 낭성으로 갔다가 밥도 못먹고 감자 이런거 먹고 고생만 하다 다시 이정골로 왔지. 돌아와 보니 시내 사람들로 바글바글 했어. 빈대도 엄청 생겼지. 동네가 숨기 좋은 형세라 청주시 강원도라고 불렀어. 예전엔 길도 없고 논하고 밭뿐이라 도랑가로 다녔어. 전엔 학교 다니기도 불편했는데 지금은 공기 좋은 곳이야.
♦ 인터뷰 김홍순(마을주민) - 전쟁이 나서 엄마가 오빠를 업고 다른 동네로 피난을 갔더니 그 동네 사람들이 ‘유정리가 피난터인데 왜 이리 왔냐’고 하더래. 전에 절에 가면 스님이 ‘이정골은 산태미 마을같이 폭들어 앉아서 좋다고’ 하셨어. 길나기 전이 좋았지.
3) 또랑마다 청올치를 담근 사람들
이정골 마을 주민은 한국전쟁 이후 마을 도랑을 이용해 청올치(칡덩굴에서 나오는 섬유질)를 가공, 판매하는 일을 부업으로 했다. 청올치 부업은 봄, 여름, 가을까지 가능했다. 소년, 소녀와 아낙네들은 칡덩굴을 찾아 수십 리 되는 먼 곳까지 다니기도 했다.
♦ 인터뷰 최명규(마을주민) -칡을 예전엔 청얼치(청올치, 칡 줄기)라고 불렀어. 산에 가서 칡을 끊어다 가마솥에 삶아서 그걸 둘둘 말아서 물에 흔들흔들하면 뽀얗게 되는데 3~4일 발효시키면 껍질이 잘 벗겨져. 개울에서 껍질을 까서 줄에다 바짝 널면 잘게 갈라지는데 그걸 공장에 가져가면 키로에 40원씩 벌 수 있었어. 그걸로 옷감(마옷)을 짜는거지. 돈벌려고 청올치 담그는 걸 많이 했지.
♦ 인터뷰 정기홍(마을주민) - 칡 끊어다 삶아서 물에 썩혀서 껍질을 까. 껍데기가 하애지면 손으로 비벼서 노끈이나 자루를 만들어. 이정골에 칡이 엄청나게 많어.
4)마을에 길이 생기고 –이은주 발제
이정골 마을로 진입하는 2가지 방법 중 첫 번째는 용정동 양궁장 5거리에서 길성이백숙 쪽으로 진입하는 버스 길과 두 번째 방법은 용정교차로에서 용정축구공원을 지나 자동차 중고매매센터(구중고개)로 넘어오는 길이 있다.
-마을주민 인터뷰 : 구정승(신항서원 아홉 선현)이 넘어 다녔다고 해서 구정고개라고 했다가 구중고개라고 된 것 같다. 서원에 예전에는 재산이 엄청 많아서 동네 사람들이 도조를 바치고 신항서원 덕에 먹고 살았다. 서원 건물 관리비와 제사 비용, 나무를 해주고 일 해주고 품삯을 받아 먹고 살아서 현재는 서원에 재산이 별로 없다.
-마을주민 인터뷰 : 이정골로 들어오는 길은 논, 밭, 도랑 가로 걸어 다녔다. 마을 특화사업으로 6천만 원 지원받아 길을 넓혀 준다고 했는데 마을 앞으로 쓰레기 매립장이 생겨 밥을 못 먹을 정도로 파리가 엄청 많았다. 길을 닦아 준다고 하고 쓰레기 매립장을 만들려고 마을주민들을 속였다. 25년 동안 쓰레기 매립장 속에서 살았다. 신항서원이 있어서 그런지 주민들이 착했다. 지금은 제3 외곽순환도로가 나는데 엄청 시끄럽고, 주야로 발파 작업을 해서 땅이 울리고 떨어지고 동네 사람들이 애로사항이 많다. 올 12월 말이면 관통이 된다고 두산건설에서 그러더라.
-용정 매립장에 관한 청주시지의 기록 : 1985년 용정 매립장이 조성됨으로써 청주시 최초로 대규모 매립장이 운영되기 시작. 주민들로부터 매립기간 동안 끊임없이 민원이 발생, 1993년 매립이 종료된 후 추가 적으로 복토와 우수배제시설 설치 가스포집 및 소각시설 보강 등 사후 환경오염 방지와 안전 등을 고려한 노력을 기울였다. 매립된 쓰레기 중 당시 연탄재가 주성분을 이루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무기물 함양이 높은 탓에 비교적 안정화가 빠르게 진행된 것으로 추정. 현재는 공원과 풋살장 등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의 활용도가 매우 높은 시설로 인기를 얻고 있다.
-청주시 제3 외곽순환도로 공사현황 : 통합 청주시 ‘30분 생활권 시대’ 개막
효촌-휴암-오동-국동 전 구간 개통으로 청주는 동서남북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20분 이내 연결할 수 있는 환상형 우회도로로 인프라가 구축돼 시민들의 경제, 여가, 물류, 수요를 획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됐다.
청주 3차 우회로는 국토교통부의 전폭적인 지원에 따라 국비로 조성돼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 시민들에게 경제적 혜택을 줄 뿐만 아니라 원활한 지역 간 이동이 가능해져 도시 균형 발전에도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5) 지붕만 봐도 마을의 나이가 보인다.
이정골 마을은 158가구 325명이 사는 비교적 큰 마을이다. 하지만 빈집이 늘어가고 이주민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마을 행정시설은 마을회관 2개 동으로 앞 건물은 슈퍼였지만 현재는 폐업하였다. 뒷 건물이 마을회관과 경로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100년 전 초가집의 뼈대를 가지고 외관만 조금씩 손봐서 살고있는 집, 새마을 사업 때 지붕을 개량한 집, 80년대 들어서 새롭게 재건축한 집까지 마을의 주택에서 시간의 흐름을 읽어 낼 수가 있다.
1970년대 말~80년대 말에 재 건축된 눈썹지붕이라고 하는 집이 큰 도로를 중심으로 보인다. 80년대 슬라브 집을 지으면서 시골 마을에 지붕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옥상을 마당 대체용 공간으로 쓰게 되자 외관상 지붕처럼 보이는 눈썹지붕 방식이 등장하게 되었다. 슬라브 지붕도 재건축된 집이다. 눈썹지붕보다 앞서지어진 집들이라고 보면 된다. 전형적인 농가주택에 시멘트로 만든 왜식 기와지붕은 1970년대~80년대 초에 유행하던 지붕이다. 시멘트 기와는 구운 기와와 달리 가볍고 수명이 짧다.
빈집은 해방 이후 목재가 충분치 않을 때 지어진 집이다. 지붕만 왜식 기와로 개량되었다. 살창이 있는 집들은 적어도 100년 이상 된 집으로 봐야 한다. 아궁이는 불 빼기 쉽게 올려서 그을음이 많이 생겼고 환기가 안 좋은 구조이거나 땔감을 다른 걸 썼거나이다.
초가집을 함석이나 슬레이트로 지붕만 개량한 주택도 다수 있다. 1970년대 초는 슬레이트 골이 넓고 큰 형식이다. 기둥, 나무, 기둥 그다음에 맞 겹치게 드러나 있고 회바름이 있다. 적어도 50년대 이전으로 내려갈 수 있다. 유리 기술이 발달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잘게잘게 창문을 짰다.
양철 슬레이트는 50년대 중반 이후에 많이 쓰고 일제강점기 때도 많이 쓰였다. 골목길 담장도 시대별로 다양하게 남았다. 돌담 위에 시멘트 담장, 새마을 운동 때에 블록 담장, 허물어진 담장을 대신하는 양철 판넬 담장이 골목의 시간을 말해주고 있다.
6) 그 밖의 마을 이야기
마을주민 인터뷰 : 이정골에서 태어났는데 일찍 마을을 떠났어요. 어린 시절 버스 정류장 지나서 오른쪽 첫 번째 집이 친가예요. 방앗간을 크게 하셨어요. 한옥이고 부엌 안에 큰 단지 묻어놓고 물을 길어다 큰 제사를 지냈어요. 큰 마당을 가진 사촌 큰어머니 댁에서 흰 천을 걸고 동네 분들이 모여 차로 와서 영화 영사기를 돌려 상영을 했어요. 70년대까지 상영하고 80년대 갑자기 개발 붐이 일어나면서 온 동네 한옥이 다 없어진거죠. 우물도 크게 있었어요. 박씨 집성촌이었는데 지금은 얼마 안 남아 계세요. 천도제도 크게 했던 기억이 나요. 냇물에 가서 빨래도 하고 동면하는 개구리도 많아서 동네 분들이 많이 잡았어요. 중태기도 굉장히 많이 잡았죠. 마을 뒷산에 도토리가 많아서 동네 분들이 주어서 냇물에 담가놓으면 물이 까매져요.
서원을 염두하지 않고 집을 지어 후회하고 있는 것 중 하나예요. 신항서원이 문화재 지정이 되면서 반경 500m 안에는 집을 지을 수 없게 되어 리모델링을 할 수 없어요.
이 동네 사시는 어르신들은 치매, 뇌경색 그런 걸로 쓰러진 분이 없으세요. 8~90 되신 분들이 많으세요.
마을주민 인터뷰 : 시집왔을 때 이정골 길은 전부 울퉁불퉁한 돌길이었고 돌담길이었어요. 신항서원은 벽이 헐어지고, 누가 보존하고 안 했어요. 대충 고치고 가마솥 걸어서 국 끓이고 했어요. 서원에서 재향 할 때도 마을 분들 집에서 장만해 가지고 왔어요. 서원에 땅이 많았는데 지금은 그 땅들이 다 들어가고 팔고 이런 식이에요.
신항서원은 옛날에는 조그맸는데 다시 짓다가 대들보가 부러졌어. 지으면서 부러져서 다시 지은겨, 공사를 두 번 한 거지. 서원 마당이 넓으니까 야구도 하고 명절도 거기서 했어. 놀고 싶으면 놀고, 여름에는 마루에서 자고, 바깥에서 자고 사랑방에서 자고 3일씩 있는 사람들도 있어.
4. 이정골 마을의 종교·문화·교육 시설
1)봉선사 : 봉선사 이전에는 성불사였고 그 이전에는 성덕사였다. 현재 위치에서 70년 정도 절터였다고 한다. 봉선사 주지 스님인 도연 스님이 이정골 마을에 정착한 것은 10년 전이라고 한다. 도연 스님은 천안 병천에서 백일기도 수행 중 선몽을 받고 이곳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용이 하늘로 솟는 그런 동네였었다는 단서로 불교 신문에 난 사찰을 내놓았다는 광고를 보고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2)용화수도장
3)포도원교회
4)라폼므 미술관 : ‘폼므’는 프랑스어로 사과, ‘라’는 명사 앞에 붙는 부사. 사과는 인류 역사 속에서 혁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현재 라폼므 현대미술관은 어린이미술관 운영과 부설 예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5)어린이집
(1) 이정숲어린이집
(2)청주유치원
6) 놀·체·인 양업 사회적 협동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