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를 들여 외국을 다녀온 최초의 여성유학생
유관순 열사의 스승으로 알려진 우리나라 최초의 신여성
고종의 여성 밀사-왕의 밀서를 전하라
김란사(1872.9.1.~ 1919.3.10.)
그녀는 교육과 나라에 대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자 신앙인이었다.
그녀의 삶은 이화학당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1894년 당시 그녀는 남편과 아이를 가진20대 어머니로서 이화학당에 자격이 없은 자였으나
선교사인 프라이교장을 설득해 학교에 입학하게되었고 여기서 영어를 배우고 예수님을 영접했다.
미국 출신의 선교사 룰루 프라이 학당장(교장)은 금혼 학칙을 들어 거절한 뒤
"가정을 이뤄 풍족하게 사는 당신이 왜 소녀들과 똑같이 순종하며 여기에 다니기를 원하는지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자 그는 하인이 들고 있던 등불을 입으로 불어 끈 뒤
"우리가 캄캄하기를 이 등불 꺼진 것 같다. 어머니들이 무엇인가 배우고 알아서 자식을 가르칠 수 있게 될 때까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나. 우리에게 밝은 빛을 줄 수 없겠는가"라고 부탁했다.
간곡한 호소에 감명받은 학당장은 입학을 허가했다
평양 안주 출신의 김란사 지사는 인천 감리서 책임자인 남편 하상기 선생의 배려로 외국 문물을 자주 접할 수 있었고 신학문의 필요에 눈을 일찍 떴다.
김란사 지사는 이화학당을 거쳐 일본 동경의 경응의숙(慶應義塾)에서 1년간 유학한 뒤, 1900년 남편 하상기 선생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유학하여 오하이오주 웨슬렌 대학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이화학당에서 선생님으로 활동합니다.
당시 이화학당에는 비밀여성독립단체인 이문회가 있었는데 이를 지도하는 역할도 합니다.
바로 이 이문회에 유관순 열사가 속해 있었답니다.
김란사 선생님이 제자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 있습니다
교감이었던 김란사가 이문회(학생자치단체)를 통해 유관순과 민족의식을 가지며
조선의 등불이 되어라..부탁하였습니다.
김란사는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고종의 통역사로도 활동하기도 하고 비밀리에 독립운동에 가담한 김란사는 일본과 미국에서 같은 시기에 유학했던 이강(고종의 둘째 아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고종은 일본에 조선 침략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이강을 파견하고자 계획하였으나 1919년 1월 22일 갑작스럽게 승하하여 그 계획이 중단되었고. 온 나라가 3.1운동의 열기로 뜨거운 그때, 나라를 염려하는 인사들은 김란사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고 이를 위해 기금을 모으고 지원하였습니다..
김란사는 북경을 경유하여 파리로 갈 계획을 세우고 출국하였으나, 분명하지 않은 원인으로 북경에서 사망.
중국 경찰이 조사한 사실에 따르면 김란사는 중국에 와서 미국교회 부속 부영병원에 입원하였으나 폐렴으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의사가 자살일 수도 있다는 소견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김란사의 죽음을 듣고 북경으로 건너간 남편에 따르면 시신이 검게 변해 있었다고 하여 독살에 의한 타살이 아닐까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녀가 순국한 지 76년 만이 지난 1995년 8월 15일, 김란사는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