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시 정량동에 위치한 청마 생가는 시인 청마 유치환 선생을 기념하여 청마 문학관을 건립하면서 옛 생가를 복원하여 청마 선생이 살아온 삶의 흔적과 숨결을 느낄 수 있게 했다. 본채와 아래채로 나누어져 있으며 본채에는 약방, 안방, 부엌, 마루 등이 있고, 아래채에는 사랑방, 광, 측간이 있다. 청마 생가는 원래 통영시 태평동 552번지였으나 부지가 협소하여 제자리에 생가를 복원할 수 없어 부득이하게 현 위치에 옛날 생가의 모습을 갖추어 복원하였다.
대한민국의 시인·교육자. 시의 기교나 표현에 집착하지 않고 생에 대한 의지를 진지하게 추구했다. 호는 청마(靑馬),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생애와 활동
아버지 준수(焌秀)의 8남매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극작가 치진(致眞)은 그의 형이다. 1922년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 중학[豊山中學]에 입학했다. 이때 형이 펴낸 동인지 <토성>에 시를 발표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한의원을 경영하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1926년 귀국, 동래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해 졸업했다. 이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1학년 때 중퇴했으며, 사진관을 경영하는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1937년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가 된 뒤 교육계에 종사했다. 1937년 문예동인지 <생리(生理)>를 주재했고,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를 펴냈다.
1940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 옌서우 현[煙首縣]에 가서 농장관리인으로 일하다가 8·15해방 직전에 귀국하여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조선청년문학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6·25전쟁 때는 문총구국대 일원으로 참여했다. 해방 직후 생명에의 열애를 노래한 점에서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 시인'으로 불렸다. 1954년 경상남도 안의중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어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을 비롯해 경주고등학교·경주여자중학교·대구여자고등학교·부산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1967년 교통사고로 죽었으며 묘지는 부산광역시 서구 하단동에 있고, 경주 불국사, 부산 에덴 공원, 통영 남망공원 등에 시비가 세워졌다.
-문학세계
1931년 <문예월간> 12월호에 <정적(靜寂)>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으며, 이후 35년 동안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펴냈다. 그의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은 허무와 애수이며, 이 허무와 애수는 단순히 감상적이지 않고 이념과 의지를 내포한다. 특히 대표시 <깃발>(조선문단, 1936. 1)은 연민과 애수를 통해 존재론적 차원의 허무를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깃발'은 이상향에 대한 동경의 상징이다. 또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되는 <행복>에서는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절망의 애수를 보여주었고, 이러한 시세계는 첫 시집 <청마시초>(1939)와 제2시집 <생명의 서>(1947)에 잘 나타나 있다.
<청마시초>에 나타난 허무는 정신편력과 더불어 다양하게 변모하는데 이것은 죽음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출발한다. 여기서의 죽음의 의미는 2가지로 나뉜다. 첫째, 일제 말기의 극한상황과 결부되어 자학적 분노와 생명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이는 결국 종교적 자아로 승화되고, 둘째, 인간의 숙명인 죽음이 역설적으로 인간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수로 나타난다. 이는 제6시집 <보병과 더불어>(1951)에 실린 종군시(從軍詩)들에 이어져 전장에서 애수에 젖기도 한다.
한편 제2시집 <생명의 서>에 실린 시는 만주에서 쓴 것이 대부분이며, 여기에 실린 <생명의 서>와 <일월>에서는 허무와 고독을 극복한 강인하고 웅건한 의지를 보여주었고, 후에 대표시 <바위>로 이어져 순수한 본질적 자아로 복귀하려는 의지로 나타났다. 그는 후기에 와서 허무에 회의를 느껴 이를 극복한 다른 시세계를 보여주려 했으나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써 이루지 못했다. 시인 스스로 "윤리를 갖지 않은 글, 윤리의 정신에서 생산되지 않은 문학은 무엇보다 첫째 그것을 읽어 줄 독자가 없을 것"이라 했듯이 현대시사에서 보기 드문 도덕적인 시인으로 평가된다.
시집으로는 <울릉도>(1947)·<예루살렘의 닭>(1953)·<청마시집>(1954)·<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미류나무와 남풍>(1964) 등이 있다. 1950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58년 자유문학상, 1962년 대한민국 예술원상과 부산시 문화상 등을 받았다.
문학세계
1931년 〈문예월간〉 12월호에 〈정적 靜寂〉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으며, 이후 35년 동안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펴냈다. 그의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은 허무와 애수이며, 이 허무와 애수는 단순히 감상적이지 않고 이념과 의지를 내포한다. 특히 대표시 〈깃발〉(조선문단, 1936. 1)은 연민과 애수를 통해 존재론적 차원의 허무를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깃발'은 이상향에 대한 동경의 상징이다.
또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되는 〈행복〉에서는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절망의 애수를 보여주었고, 이러한 시세계는 첫 시집 〈청마시초〉(1939)와 제2시집 〈생명의 서〉(1947)에 잘 나타나 있다.
〈청마시초〉에 나타난 허무는 정신편력과 더불어 다양하게 변모하는데 이것은 죽음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출발한다. 여기서의 죽음의 의미는 2가지로 나뉜다. 첫째, 일제 말기의 극한상황과 결부되어 자학적 분노와 생명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이는 결국 종교적 자아로 승화되고, 둘째, 인간의 숙명인 죽음이 역설적으로 인간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수로 나타난다. 이는 제6시집 〈보병과 더불어〉(1951)에 실린 종군시(從軍詩)들에 이어져 전장에서 애수에 젖기도 한다.
한편 제2시집 〈생명의 서〉에 실린 시는 만주에서 쓴 것이 대부분이며, 여기에 실린 〈생명의 서〉와 〈일월〉에서는 허무와 고독을 극복한 강인하고 웅건한 의지를 보여주었고, 후에 대표시 〈바위〉로 이어져 순수한 본질적 자아로 복귀하려는 의지로 나타났다. 그는 후기에 와서 허무에 회의를 느껴 이를 극복한 다른 시세계를 보여주려 했으나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써 이루지 못했다. 시인 스스로 "윤리를 갖지 않은 글, 윤리의 정신에서 생산되지 않은 문학은 무엇보다 첫째 그것을 읽어 줄 독자가 없을 것"이라 했듯이 현대시사에서 보기 드문 도덕적인 시인으로 평가된다.
시집으로는 〈울릉도〉(1947)·〈예루살렘의 닭〉(1953)·〈청마시집〉(1954)·〈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미류나무와 남풍〉(1964) 등이 있다. 1950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58년 자유문학상, 1962년 대한민국 예술원상과 부산시 문화상 등을 받았다.
07시41분...남파랑길 27코스 안내 간판(26코스 종점 및 27코서 시점)
방하마을 쉼터
방하마을 표석
방산교도 지나고...
제21대 대통령후보 선거 벽보
농막 마을로 진입.. 평화로운 농촌 풍경
오래만에 보내 보리논.. 다 익은 보리.. 반갑다
둔덕기성 3.54키로미터 이정목
거림 소류지
법륜사 입구
법륜사(암자)
어렵게 핀 엉컹퀴
둔덕기성 입구
둔덕기성
***둔덕기성***
*정의
경상남도 거제시 둔덕면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성곽. 사적.
*개설
2010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폐왕성(廢王城)으로 불리는 둔덕기성은 거제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된 성곽으로 알려져 있다. 발굴조사 결과 신라시대에 초축되어 고려시대에 수축되었으며 삼국시대 거제의 옛지명인 상군(裳郡)의 치소성(治所城)으로 추정되고 있다.
*입지와 연혁
둔덕기성은 둔덕면과 사등면의 경계지역에 있는 우봉산의 지봉(해발 326m)에 있다. 이곳은 서쪽으로 통영 및 견내량과 가깝고 북쪽에는 조선시대의 평지성인 오랑역이 위치하는 등 거제도 내에서는 교통상 주요 거점지이자 조망이 매우 양호한 지역이다. 가까운 거리에 고려시대 거제군의 치소로 추정되는 거림리유적이 있으며, ‘폐왕성(廢王城)’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 의종(毅宗: 재위 1127∼1173)이 정중부의 난으로 폐위된 뒤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004년 동쪽 체성과 동문지, 2007년 집수지에 대한 시굴·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성곽의 축조시기 및 축조수법이 밝혀지게 되었다.
*내용
발굴조사 결과 초축성벽은 단면 L자 또는 계단상의 형태로 생토를 굴착한 후 판상(板狀)의 할석을 이용한 기저부 지정, 내탁부 조성, 외벽 면석의 다른 층 쌓기 수법, 외벽기저부의 보축성벽과 현문식(懸門式)성문을 특징으로 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성내의 남동쪽에는 호안석축을 갖춘 원형의 집수지가 조사되었다. 집수지는 모두 3차에 걸친 사용시기가 확인되었으며, 최초의 집수지는 직경 16.2m, 깊이 4m 정도로 원형수혈을 굴착하고, 바닥과 측벽부에 1m 정도의 두께로 점토를 발라 물이 빠지지 않도록 하고, 바닥과 측벽부를 석축으로 마감하였다. 석축은 3단으로 조성되었는데 직경은 1.5m, 깊이는 3m 정도이며, 바닥은 점판암계의 판석을 깔고 측벽은 화강암석재를 다듬은 면석으로 정연하게 쌓았다.
성벽구간과 집수지내에서는 토기와 기와류, 목기류, 자기, 금속기류 등 삼국시대 신라부터 고려·조선시대의 유물까지 여러 시기에 걸친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기관에서는 둔덕기성은 축성기법과 성내에서 출토되는 유물 등을 고려하여 7세기 후반에 신라에서 쌓은 성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삼각집선문이 시문된 단각고배라든가, 판상석재로 쌓은 체성벽과 원형 집수시설의 구축기법 등을 고려할 때 6세기 말경으로 올라갈 수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징
둔덕기성은 판석형의 석재로 정연하게 쌓은 체성벽과 보축성벽, 그리고 현문식 성문, 원형집수시설을 특징으로 하는 전형적인 신라산성으로서 동시기 신라의 토목기술의 단면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산성이다.
의의와 평가
둔덕기성은 거제도에서 확인된 가장 이른시기의 성곽으로서 거제지역의 옛지명인 상군(裳郡)의 치소성으로 추정되는 만큼 거제지역의 고대문화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체성벽과 문지, 성내의 연지 등에 대한 축조기법은 삼국시대의 토목기술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참고문헌
『거제 폐왕성 지표조사보고서』(거제시, 2000)
『문화유적 시굴조사보고서-거제 폐왕성』(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2006)
「거제 폐왕성 성격에 관한 연구」(심종훈, 『석당논총』41,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08)
거제 둔덕기성은 7세기 신라시대 축조 수법을 알려 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사다리로 출입하는 현문식 구조인 동문지와 삼국시대에 처음 쌓고 고려 시대에 보수된 성벽 등은 축성법의 변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학술적 자료이다. 상사리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 청자 접시 등 다양한 유물들은 눌러찍어 무늬를 만든 토기들로 신라 문무왕 때 설치된 상군의 치소성으로 추정할 수 있다. 둔기성은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 따르면, 고려 의종이 3년간 거제도에 유배됐고, 조선 초에 고려 왕족들이 유배된 장소였다. 사등면과 둔덕면의 경계가 되는 우봉산 자락에 위치하는데, 성벽의 둘레는 약 526m이고 최고 높이가 4.85m이며, 성 안에는 여러 곳에 건물 터와 연못 터가 남아 있고, 북쪽에는 기우제와 산신제를 지냈던 제단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의 서쪽과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 사이의 견내량해(見乃梁海)에 건설된 다리.
*내용
교폭 10m, 높이 53m(해상 26m, 해저 27m), 교장 740m의 연륙교(連陸橋)이다. 이 다리는 1965년 착공하여 1971년 4월 준공하였다. 다리의 하부구조는 라멘형식으로 되었고, 상부구조는 강 I형교 형식의 21경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제도는 경상남도 중남부에 인접한 해상에 자리하여, 북쪽으로 진해만을 사이에 두고 창원시, 서쪽으로 통영시, 동쪽으로 대한해협, 남쪽으로는 남해에 접하고 있다.
지형적으로 구릉성 산지가 많고 경지율이 낮은 영세 농업 지역이었으나, 이 다리의 가설로 말미암아 지역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게 되었다. 지금은 기존의 거제대교에 많은 교통량으로 인하여 새로운 거제대교가 1992년 10월에 착공하여 1999년 4월에 완공되어 개통하였다.
신거제대교는 총연장이 940m(접속교량 220m, 본교량 720m)이고, 폭이 20m인 내하능력 DB24의 1등교로서, 상부구조는 본교량의 경우 강 박스거더 강상판교이고, 접속교량은 강 박스거더 합성교의 형식을 가진다.
경상남도거제시의 서쪽 견내량해안에 있는 도선장이다. 견내량은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용남면 장평리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현재는 거제대교로 연육되어 있다. 폭이 좁은 탓에 거센 물길이 있어 임진왜란 당시 유인작전과 함께 한산대첩을 비롯한 주요 해전의 지점이기도 했다. 견내량은 하루에 두 번 조수에 의해 물길의 방향이 바뀌기 때문에 썰물 때는 쉽게 남해와 대마도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견내량은 고려 의종이 정중부의 난으로 3년간 유배되었던 탓에 전하도(殿下渡)로 불리기도 했다. 해방 후 1950년 UN군 포로수용소 설치로 견내량이 차도선장(車導船場)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여지도서』에는 관아의 서쪽 40리에 있는 바다를 뜻하며 고성에서 거제부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견내량을 건너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에는 둔덕기성의 서쪽에 견내량진(見內梁津)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통영항은 1963년 9월에 개항하여 주로 수산물의 수출입을 담당하고 있는 국제무역항이다. 한려수도의 비경을 간직한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기도 한다.
*형성 및 변천
1906년 민간사업으로 해안 9,256.24㎡를 매립함으로써 건설이 시작되었다. 1940년부터는 일본 군항으로 탈바꿈되었으며, 이후 충무항으로 불리다가 1995년 시·군통합으로 다시 통영항으로 바뀌었다.
1963년 9월 25일 개항장이 되었는데, 임진왜란 당시의 사적과 유물이 보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동쪽 중심지로서 관광항구의 기능도 하고 있다. 1962년 이후 방파제 축조와 선착장이 설치되었다. 통영항은 부산·여수·사천·마산·진해·거제 등과 그 밖에 인근 도서지방을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중심지로서 일반 여객선 ·쾌속선 등이 정기 및 부정기적으로 운항되고 있다.
*현황
2009년 현재 주요 항만시설은 안벽 1,337m, 방파제 1,637m, 잔교 12기, 물양장 3,312m 등이 있다. 선박접안능력은 모두 8척으로, 6천톤급 1척과 1천톤급 7척이다. 연간하역능력은 29만 6천톤이다.
정기 여객선 항로는 통영∼욕지 구간을 포함하여 5개가 개설되어 있으며, 낙도 보조항로는 통영∼매물도 항로를 포함하여 3개 항로가 개설되어 있다.
2009년의 전체 입출항 선박은 4,978척이며 총톤수는 389만 9,310톤에 달한다. 그 가운데 외항선은 1,084척에 169만 5,003톤이고, 내항선은 3,894척에 220만 4,307톤이다. 외항선의 입항 척수는 522척이고 총톤수는 22만 1,179톤이며,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에서 입항한 선박이 204척에 13만 6,250톤으로 가장 비중이 크다. 그 다음은 대양주에서 입항한 선박이 17척에 4만 2,914톤, 일본에서 입항한 선박이 301척에 4만 2,015톤 등이다.
외항선의 출항선은 562척이고 총톤수는 147만 3,824톤이며, 동남아시아로 출항한 선박이 25척에 62만 8,327톤으로 가장 많다. 그 다음은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로 출항한 선박이 244척에 54만 8,536톤, 대양주로 출항한 선박이 13척에 21만 8,620톤, 일본으로 출항한 선박이 278척에 4만 7,270톤 등이다.
2009년의 입출항 화물물동량 처리실적은 모두 53만 5,976톤으로 입항 물동량이 53만 5,938톤이고 출항 물동량은 38톤이다. 품목별 화물은 철강 및 관련부품이 34만 8,689톤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그 뒤를 이어 광석 및 생산물 6만 7,313톤, 어페류 및 갑각류 등이 6만 6,721톤 등이다.
2009년에 연안으로 입출항한 입항 척수는 모두 1,945척이고 입항 톤수는 111만 4,677톤이다. 출항 척수는 1,949척이고 출항 톤수는 108만 9,630톤이다. 한편 연안 입항화물은 44만 4,866톤이고 연안 출항화물은 2만 4,154톤이다.
‘동피랑’이라는 이름은 ‘동쪽’과 ‘비랑’이라는 말이 합쳐져서 생겼다. ‘비랑’은 ‘비탈’의 통영 사투리인데 그 앞에 ‘동쪽’을 나타내는 말 중 ‘동’만 떼어 붙인 것으로 그래서 사람들은 ‘동피랑’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푸른 통영 21 추진 협의회는 2007년 10월 전국적으로 동피랑길에 그림 그릴 사람들을 모았다. 그 사람들이 마을 담과 벽 길 등에 온통 그림을 그렸고 바닷가 언덕 마을이 그림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동피랑 골목길은 그 갈래가 수십 개다. 그 모든 골목에 그림이 있고 하늘과 맞닿은 마을, 그곳에 그려진 그림은 마을을 동화나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또 마을에서 내려다보는 강구안 바다 풍경도 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