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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2015년 3월 1일 / 대예배 / 막 6:30-44
막 6:30-44 / [5천 명을 먹이신 이적 ; 마 14:13-21, 눅 9:10-17, 요 6:1-14] 사도들이 여행에서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일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예수께 말씀드렸다. 31)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여기를 떠나 잠시 한적한 곳에 가서 쉬자.”고 말씀하셨다. 너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제자들과 조용히 식사할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32) 예수와 제자들은 배를 타고 한적한 곳을 향해 떠났다. 33)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사방에서 달려 나와 해변길을 따라 그곳에 먼저 가 있었다. 34) 예수께서는 배에서 내려 많은 군중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없는 양처럼((민 27:17 / 참조 왕상 22:17, 겔 34:5) 측은히 여겨져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35-36)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모인 사람이 너무 많으므로 제각기 음식을 사먹도록 근처 마을이나 농가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기는 외딴 곳이라서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37)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무엇을 가지고 먹입니까? 이 많은 사람이 먹을 만큼 사오려면 200데나리온은 있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자 38) 예수께서 물으셨다. “지금 가지고 있는 음식이 얼마나 되느냐? 가서 알아보아라.” 그들이 돌아와서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다고 보고하였다. 39-40) 예수께서 많은 무리에게 모두 앉으라고 명하시자 그들은 50명씩, 100명씩 떼를 지어 풀밭에 앉았다. 41) 예수께서는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드리셨다. 그러고는 떡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물고기와 함께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 42) 많은 무리가 모두 배불리 먹었다. 43-44) 그리고 남은 떡덩이와 물고기를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그날 떡을 먹은 사람은 남자만도 5천 명이나 되었다.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이 천국복음 전파에 분주하셨습니다. 한적한 곳에 가서 쉬어야 할 필요성이 생겨서 배를 타고 한 곳으로 가는데, 사람들이 미리 알고 먼저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은 멀리서부터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기 위하여 오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아주 은혜롭기에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해가 저물어 갈 때까지 앉아서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에 염려가 된 제자들이 말씀만 전하고 계신 예수님께 “이곳은 빈들이요 때가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셔서 식사를 하도록 하셔야겠습니다.”라고 건의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이에 당치도 않은 말씀에 빌립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예수님. 여기가 어딘데 우리 보고 먹을 것을 주라 하십니까? 광야입니다 광야요. 여기는 빵집도 없습니다. 설령 있다고 해도 200데나리온이나 되는 거액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돈도 없습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고 재촉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도 들립니다. ‘나에게만 주라고 할 것이 아니라 너희가 작을지라도 주라.’고 말입니다.
여하튼 안드레가 즉시 가서 알아보니 어린아이 하나가 도시락으로 가지고 온 5병2어가 있기에 그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받으셔서는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실컷 먹고도 남은 것을 거두어보니 12바구니가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리를 떠나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과거에도 이러한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손길을 통하여 이런 기적을 베푸시기 원하십니다. 지금도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손길을 통하여 이런 기적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적은 바울과 같은 어떤 위대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주어지는 말씀임을 명심하며 말씀을 이어갑니다.
1. 예수님은 제자들이 와서 건의하기까지 말씀만 계속 전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저희들의 굶주림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배에서 내려 많은 군중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없는 양처럼 측은히 여겨져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막 6:34)라고 하였듯이 누구보다도 방황하는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셨고, 또한 그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실 일만 하신 후에는 하늘나라로 승천하셔서 다시 보좌로 올라가십니다.
이 땅에는 누군가 예수님의 대를 이어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무리들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저희들에게 관심을 받고 사랑을 베풀어 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즉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일만 구경하고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따라 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가 얼마 남지 않는 것을 보시고는 제자들에게 각가지 실습을 시키셨던 것입니다.
막 6:6-13 / [열두 제자를 보내시다 ; 마10:1-5, 15, 눅 9:1-6] 예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시며 가르치셨다. 7)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불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보내셨다. 8-9)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여행할 때 지팡이 외에는 먹을 것도, 자루도, 돈도, 갈아 신을 신과 갈아입을 옷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이르셨다. 10)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마을에 가든지 그곳을 떠날 때까지 한 집에 머무르라. 11) 어떤 마을이든지 너희를 환영하지 않거나 너희 말을 듣지 않거든 그곳을 떠나되 나올 때에는 그들에게 경고하는 표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리라.” 12) 제자들은 길을 떠나 만나는 사람마다 회개하라고 가르치고 13)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며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낫게 하였다.
그들이 흩어져서 현장에서 돌아왔을 때에 잠시 쉬게 하시며 말씀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서 복음도 전하고 귀신들린 자와 병든 자를 고치다보니 무리들이 얼마나 불쌍한가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께 몰려와서 늦게까지 귀가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무리들을 보고 이러한 건의를 올렸던 것입니다.
막 6:35-36 /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모인 사람이 너무 많으므로 제각기 음식을 사먹도록 근처 마을이나 농가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기는 외딴 곳이라서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주변에 있는 상황을 모른 체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마치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모른 척하며 지내치려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곳에는 기적이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두 번째 계명이라고 하시면서 강조하신 말씀이 너희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약 2:14-17 / [행동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믿음이 깊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남 돕는 일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 신앙으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15) 여러분의 친구 한사람이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었다고 합시다. 16) 그런 사람에게 여러분이 ‘참 안됐구려. 따뜻하게 지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는 말만 하고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따위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17) 이것으로 알 수 있듯이 믿음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선한 행실로 증명해 보이십시오. 증명해 내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죽은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렇게 하십니다. 우리의 행함(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민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함께 하시며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제자들의 형편과 사정을 아시면서도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바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무리를 돌려보시지 않는다면 기적을 베풀어서라도 무리들로 하여금 배불리 먹게 하였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아마 무리들이 10명 정도였다면 “네 그렇게 하지요.”라고 대답하며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5천명이나 넘는 무리들을 어떻게 제자들이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제자들은 당황해 하면서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나 명령은 육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리 ‘믿음, 믿음!’하지만 어떻게 이해를 하라는 말입니까? 그렇다고 예수님이 착각을 하셔서 자기네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실 이도 없고, 무리들이 수 천 명이 넘는 것을 모르셔서 그렇게 말씀하실 리도 없고.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고 한 말은 어이가 없다는 표현도 되지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 잠시 빌립의 이론을 생각해 봅니다. 빌립은 계산에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리를 잘 분별하는 사람입니다. 들판에 앉아 있는 사람이 2만 명 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할 것인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컴퓨터 같은 머리를 굴려서 결론이 나왔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조금씩만 먹인다 해도 200데나리온 어치의 떡을 구해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1데나리온은 아시다시피 노동자 하루 일당입니다. 최소한 하루에 5만원 일당을 번다해도 1천만 원 정도의 돈이 필요합니다. 빌립은 1천만원 어치의 떡을 사다가 주어도 이 많은 사람들의 배를 채우는 데는 부족할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빌립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결국 2만 명을 먹이는 것이 가능하다는 소리입니까?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소리입니까?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빌립은 돈만 의지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지 않는 계산은 항상 모자랄 뿐입니다. 그는 지금 두 가지 부정적인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조금씩’이라는 단어와 ‘부족하다’는 단어입니다.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대단히 합리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합리적인 사람을 필요로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합리적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합리적인 사람을 찾지 아니하시고, 믿음의 사람을 찾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만일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그러기에 빌립과 같이 당황하거나 엉뚱한 답변이 나오지 않도록 미리 미리 준비하자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무섭게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처럼 기적을 일구어 낼 수 있는 분들이 되십시다. 아니면 믿고서라도 시키시는 대로 순종하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행 3:1-7 / [앉은뱅이를 고친 베드로] 어느 날 오후 베드로와 요한은 3시 기도 시간이 되어서 성전으로 올라갔다. 2) 그들이 성전에 도착했을 때였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인 사람 하나가 실려 왔다. 그는 날마다 성전의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서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구걸해서 먹고 살았다. 3)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지나가는 것을 보자 손을 내밀어 구걸하였다. 4)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눈여겨 보았다. 이윽고 베드로가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자 5) 그는 무엇을 얻으려니 생각하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6) 다시 베드로가 말하였다. “우리는 돈이 한 푼도 없소. 그러나 다른 것을 주겠소. 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 앉은뱅이는 당장에 다리와 발목에 힘이 생겨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그는 걸어 보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어보기도 하더니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하나님의 명령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자꾸 토를 달거나 ‘왜 그러느냐?’고 반문만 한다면 결코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저 구경만 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3.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고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7, 38절에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병2어의 기적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0, 00 or 000의 역사가 더해지는 역사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천지창조 후에 성경에 나타난 모든 기적은 적은 것일지라도 현재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일어났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작은 겨자씨만한 믿음을 외쳤던 것이 아닙니까!
마 17:19-21 /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물었다.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습니까?” 20)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만일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을 향하여 ‘옮겨지라’고 하여도 옮겨질 것이다. 그런 믿음만 있다면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21) (없음) (어떤 사본에는 21절이 ‘이런 병을 기도와 금식 외에는 고칠 길이 없다’로 된 것도 있다)
우리가 흔히 기적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 과거나 미래에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이 과부의 두 렙돈 일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한 소년의 한 끼 식사인 오병이어 일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장본인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어부일지라도 상관이 없고, 세관에 앉아서 일을 보는 욕심쟁이 세리일지라도 하나님이 쓰시기에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가진 것이 없으나 장차 벌어서 내 소원이 만족할 만큼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께 헌신을 하겠다고 하는 분들도 없지 않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핑계에 불과할 뿐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작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한다면 이후에 큰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내일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장차 성공해서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또는 아름답게 보이려고 꾸밀 것도 없고 잘된 다음에 잘된 것을 보이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내게 있는 것을 찾아 하나님께 드리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다면 있는 그대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 모세의 경우를 봅니다.
출 4:1-2 / [모세가 이의를 제기하다] 모세가 하나님께 여쭈었다. “그들이 저를 믿지도 않고 제 말을 듣지도 않으며 여호와께서 제게 나타나시지 않으셨다고들 말할 것입니다.” 2) 그러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팡이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애굽에 내려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라고 하시자 모세는 자기의 형편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저를 믿지도 않고 제 말을 듣지도 않으며 여호와께서 제게 나타나시지 않으셨다고들 말할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네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양치는 지팡이 뿐입니다.”, “그 지팡이를 가지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정말 모세는 지팡이를 사용하여 바로왕의 교만을 꺾었고,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으로 인도할 수 있었고, 홍해를 가르고, 반석을 쳐서 생수가 나는 기적을 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팡이가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모세가 가지고 있는 유일(唯一)한 목자의 지팡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구어 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팡이와 같이 겨우 양치는 데 사용하는 막대기와 존재인 모세, 너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양떼를 모는 지팡이가 온통 기적을 이루는 기적의 능력의 지팡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 이러한 예도 있습니다. 왕상 17:9-16 / “너는 베니게 지역의 사르밧 마을로 가서 지내라. 네가 먹고 마실 것은 이미 내가 그 마을의 한 과부에게 부탁해 놓았다.” 10) 이리하여 엘리야는 160여 킬로미터의 먼 길을 걸어 사르밧에 이르렀다. 그곳은 시돈에서 남쪽으로 약 11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해변의 마을이었다. 그가 성문에 이르자, 어떤 여인이 나무를 줍고 있었는데 바로 엘리야가 찾던 과부였다. 엘리야는 그 과부에게 “물을 좀 갖다 주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11) 그 과부가 물을 가지러 성문 안으로 들어갈 때에 엘리야는 그 등 뒤에 대고 “떡도 좀 갖다 주시오!” 하고 큰소리로 간청하였다. 12) 그러자 과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걸고 맹세하지만 우리 집에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 집에 남은 것이라고는 항아리 밑바닥에 깔린 밀가루 한 움큼과 병에 묻은 기름 몇 방울뿐입니다. 나는 지금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그 남은 것으로 마지막 떡을 구워 아들과 나누어 먹고 함께 죽을 작정이었습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의 풍년을 위하여 베니게의 바알신을 모셔들였으나 그 대가로 이스라엘과 베니게가 다같이 오랜 가뭄과 흉년에 시달리는 벌을 받게 되었다. 13) 그러나 엘리야는 과부에게 그 마지막 남은 것까지도 아끼지 않는 희생을 요구하였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우선 그 손에 든 나뭇가지를 돌고 집으로 가서 내가 먹을 떡부터 구워 가지고 오시오. 그런 다음에 다시 들어가서 식구들이 먹을 떡을 구우시오. 이제부터 식량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시오. 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가 다시 비를 내려 줄 때까지 밀가루도 바닥이 나지 않고 기름도 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15) 사르밧 과부는 이때부터 엘리야의 말대로 따랐다. 그러자 세 사람이 매일 충분히 먹고 살게 되었다. 16) 주께서 엘리야에게 약속해 주셨던 것처럼 그 밀가루도 바닥이 나지 않고 그 기름도 마르지 않았다.
■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어느 날 아주 잘 생긴 돌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 돌을 보고 거의 미칠 지경으로 큰소리로 웃으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야, 다윗이 걸어 나온다. 다윗이 걷고 있어.” 주변 사람들은 그의 한심하고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고 다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그 돌을 가져다가 정성을 쏟아 드디어 다윗상을 완성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평범한 돌을 보면서 그 돌이 다듬어지고 깎여져, 다윗 상이 만들어질 위대한 가능성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능성의 안목입니다. 믿음의 안목인 것입니다. 안드레는 믿음으로 5병2어를 보았습니다. 비록 2만 명을 먹이는 데는 5병2어로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계산기를 아무리 두드려 보아도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그래도 그는 예수님 앞에 5병2어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안드레와 같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인간의 계산으로는 분명히 부족하지만, 그래도 믿음으로 가능성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도시락을 내준 어린아이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는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적은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5병2어의 기적은 내 손에 있는 것에다 하나님의 능력이 더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 손에 아무 것도 없으면 하나님의 능력도 임하지 않습니다. 내 믿음이 제로(0)이면 아무리 많은 숫자를 곱해도 제로(0)입니다. 그러나 내 믿음이 하나(1)라도 있을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임할수록 더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돈이 없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문제는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한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렘 5:1 / [의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주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의인을 찾아보아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모든 광장을 둘러보면서 진실한 사람을 찾아보아라. 너희가 거기서 법대로 사는 사람이 있어서, 누구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단 한사람이라도 찾는다면 내가 그 성읍 전체의 죄를 용서하겠다.”
우리 자신부터라도 5병2어를 예수님께 드렸던 그 한 사람이 되십시다.
4.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요 6:9-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 후에 (눅 9:1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
▶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합리적인 사람을 찾지 아니하시고, 믿음의 사람을 찾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 빌립과 같이 항상 주판알만 굴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판알만 굴리다보니 어떻게 결론이 나옵니까? 항상 ‘안’된다는 것입니다. 항상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입술에서 ’불가능하다’는 글자 앞의 ‘불’자를 빼고, ‘안 된다’는 글자 앞의 ‘안’자를 빼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뀝니다. 안 되는 것이 되는 것으로 바뀝니다.
여러분, 빌사일삼을 아십니까? 사도 바울이 고백한 빌립보서 4장 13절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빌립과 달리 안드레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말도 안 되는 줄 알면서 가능성을 찾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먹였으면 좋겠느냐고 물으셨을 때, 빌립은 1,000만원어치 음식이 있어도 모자란다며 얼른 계산을 끝내 버렸습니다. 빌립은 더 이상 음식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다릅니다. 믿음으로 뭔가 찾아보려고 하면서 일단 한 번 부딪혀 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적극성을 띱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앉아서 계산하고 안 된다는 결론부터 내리고 움직여 볼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비록 비관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일어나서 조그마한 가능성이라도 그 가능성을 찾습니다. 안드레는 믿음으로 가능성을 찾았습니다. 사람들 사이로 가서 한 어린 아이에게서 도시락을 받아옵니다.
사실 이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웃기는 장면입니다. 지금 광야에 몇 명이 모여 있습니까? 남자만 5천명, 적어도 2만여 명이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그 2만여 명을 먹이기 위한 양식으로 어린 아이의 작은 도시락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 여기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왔는데요. 그런데 이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안드레도 이 작은 보리떡 두 개과 물고기 두 마리는 이 많은 사람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지했습니다. 비록 작은 양이지만 예수님의 손에 맡기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5병2어를 5병2어로 보지 않고, 믿음으로 가능성을 찾았습니다.
▶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을 먹이고도 남는데 쓰인 그 도시락은 어른의 것도 아니었고, 장정의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린 아이의 도시락이었습니다. 다시 어린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역사를 위해서 자신의 도시락을 내준 것입니다. 이것은 기적을 일으키기에 그럴듯한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보리떡은 유대 나라에서 가장 값싼 음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먹었는데, 부잣집에서는 가축의 사료로 사용합니다. 또 물고기 두 마리라고 하니까 굴비 두 마리를 들고 온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흔하게 잡히는 피라미나 멸치 같은 작은 생선입니다. 메마른 보리떡을 입에 넣으면 목에 걸려 잘 넘어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금에 절인 작은 물고기를 밑반찬으로 곁들여 싸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기적과는 전혀 상관없는 음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손에 들려졌을 때, 수많은 무리들을 먹일 수 있는 기적의 음식이 된 것입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5병2어를 가지고 주님께서 어떻게 주셨습니까? 원대로 주셨습니다. 생선을 한 10마리는 먹어야 배가 차는 사람에게는 10마리를 주셨습니다. 생선킬러라서 20마리는 먹어야 배가 차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20마리를 주셨습니다. 생선을 싫어하고 떡만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원하는 대로 떡을 주셨습니다. 원대로 주셨습니다.
조금 전 빌립이 7절에서 “조금씩 나누어도 부족 합니다.”라고 했지만, 예수님의 손에 들려진 5병2어는 어떠한 역사를 일으켰습니까? 11절 하반절을 보니까 사람들이 ‘원대로’ 먹었다고 합니다. 또 12절을 보면 사람들이 ‘배가 부르도록 먹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스러기를 거두어 보니 12바구니에 찼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비싸거나 싼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많거나 적은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손에 맡겨지면 넘치고 남는 역사가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려지기만 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자기 인생을 초라하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하나님이 쓰시는 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람의 눈에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손에 들려지면 위대한 능력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 그럼에도 제자들은 아직도 기적을 일구어낼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그들이 배와 그물과 식구들을 뒤로 하고 예수님을 따랐지만, 아직 기적을 일구어낼 만한 믿음이 못되었나 봅니다. 그러기에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고 말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러한 불신적인 믿음에 대하여 한 마디도 하시지 않고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중에는 제자들로 인하여 많은 기적이 베풀어질 것이지만, 아직은 그러한 단계가 아닌 것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 여기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도와 같은 역할은 못할지라도 제자들로서의 역할은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리에 앉히고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의 산물인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이 처음에는 ‘너희가 사도로서 기적을 베풀어 저희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것이었지만, 그것도 못하겠거든 ‘이 사람들로 앉게 하고 기적을 통하여 얻어진 것을 나누어 주기도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나가서 하나님의 능력을 베풀어 병든 것을 고쳐주고 복음을 전하십시오. 그것을 못하겠거든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오기 바랍니다. 기적은 우리에게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사도 바울이 훌륭한 분이었다 할지라도 기적을 일구어내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일을 맡은 청지기일 뿐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위하여 하나님께 합심하여 기도하십니다. 앉아서 구경만 하거나 얻어먹기만 하는 사람은 되지 마십시다.
▶ 이러한 하늘나라의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나누어주면 줄수록 늘어가지만 혼자 가지고 있으면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고 맙니다. 우리는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떠날 때도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나의 손안에 있는 것이라고 다 내 것이 아닙니다.
딤전 6:7-8 /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 일전 한 푼 손에 들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또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역시 빈손으로 갈 것입니다. 8)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으면 모든 것이 만족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내 이웃에게 나누어 주려고 하면 할수록 넘치도록 채워질 것입니다.
눅 6:38 / 만일 너희가 남에게 주면 너희는 그것을 다시 얻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서 차고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 너희에게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분량대로 되돌려 받을 것이다.
▶ 5병2어의 기적은 나누어주는 데서 일어난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떡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나누어 준 것이 아니라 예수님 손에서 떡을 떼어 받아서 제자들이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떼어주시는 대로 계속 나누어 주었더니 5천명이 먹고도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세상 사람은 무엇이든지 쌓아두려고 합니다. 받으려고만 합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썩고 물질도 썩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를 나눌 때 지혜가 더 증가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도 나누어 줄 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물질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도 나누어 주지 않고 감추어 두면 썩어버리고 맙니다.
우리 모두 마지막 생을 마칠 때까지 계속 나누어 주어도 풍성히 남는 축복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5.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12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가 5천 명이었더라
5천 명의 남자가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다고 하였습니다. 놀랄만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이런 저런 말은 줄이고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진리를 결론적으로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의 내용에 대하여 세밀히 보았습니다.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있었던 일을 분명히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가룟 유다를 빼고 보충시킨 12제자가 말입니다. 그들로 인하여 복음은 예루살렘뿐만이 아니라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까지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12제자가 베이스캠프가 되어서 말입니다.
우리는 12명이 넘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커다란 기대를 해도 됩니다. 큰 꿈을 마음에 담고, 심호흡 한 번하고 2015년 12월 31일 향해 달음질하십니다. 12바구니가 아닌 7광주리도 남기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