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이 있기에 날마다 죽는 백성
2016년 3월 27일 / 부활절 / 고린도전서 15:29-34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세 번째 전도여행을 하던 중(주후 55년경)에 쓴 편지입니다. 그 때에 바울은 에베소에 수년 간 머물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에는 두 번째 전도 여행 때 약 18개월 간 머물면서 전도활동을 했습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상당히 세속적인 교인들이었습니다. 내세 문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주로 현세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뒀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❶ 그들이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신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❷ ‘고린도’라는 도시의 환경입니다. 고린도는 상업 문화의 중심지로써 우상 숭배와 타락한 문화가 지배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 사람들은 내세보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주로 세상적인 문제였습니다. 돈 문제, 여자 문제, 가정 문제, 이웃과의 다툼 등등. 천국이나, 내세 문제는 다음다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음란한 습관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저마다 좋아하는 지도자를 따라 파벌을 만들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들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신자끼리 싸우고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결혼, 이혼, 재혼, 성관계가 복잡했습니다. 우상 제물을 먹어도 되는지 마는지를 가지고 싸웠으며, 각종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마다 자기가 더 좋은 은사를 받았다고 자랑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도 바울이 진짜 사도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두 차례의 편지에서 이런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하나하나 교훈하고 있습니다.
❸ 고린도전서 1:4-5에서 바울 사도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려 주신 모든 놀라운 은사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감사의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의 생활 전체를 풍부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이 그분을 위하여 담대하게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며 진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많은 은혜로 은사를 받은 것은 사실이나 계속 성장하지 못하고 아직 어린아이의 신앙에 머물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만의 잘못이 아닌 누구나 겪는 과정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잘못된 과정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큰 잘못이었던 것입니다. 젖을 먹는 것은 아기들에게는 자라나는 과정의 일부기간이지만 다 큰 아이가 계속 젖을 먹겠다고 한다면 문제가 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31에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런 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도록 최선을 다하십시오. 이제 나는 이러한 은사보다 더 나은 것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은사에 대하여 가르쳤던 것입니다.
고전 13:9-13 / 우리가 알고 있는 것도 지극히 적은 부분일 뿐 예언도 부분적일 뿐 10) 모든 것이 온전해질 때 온전치 못한 이 모든 것도 없어집니다. 11)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판단하는 것이나 모두 다 어렸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적 말이나 생각이나 판단을 모두 다 내버렸습니다. 12) 우리 비록 지금은 희미한 거울속 들여다보듯 희미한 모습만을 비춰 보지만 그날이 오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분명히 볼 것입니다. 나 비록 지금은 알고 있는 것 모두 다 몽롱하고 흐리나 그날이 오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꿰뚫어 보시듯 모든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3)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이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 고린도전서의 내용 가운데 유일하게 내세를 집중적으로 가르친 것이 바로 15장의 부활입니다. 왜 바울은 부활 문제를 특별히 언급했을까요? 두 가지 이유입니다.
❶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 중에 죽은 사람은 결코 다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고전 15:12)
그리스 사람들은 물질세계는 가장 저급한 세계라고 생각했습니다. 육체도 물질이므로 저급한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영혼 구원은 높이 평가하면서도 육체 구원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도 ‘부활은 없다! 부활은 필요없다!’며 아예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❷ 35절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면 어떻게 어떤 몸으로 살아난다는 것인가?” 그들 중 상당수는 부활의 실체를 믿지 않았습니다. 요즘 교인들 중에도 고린도교인들과 비슷한 교인들이 많습니다.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면서도 부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설령 부활에는 관심이 없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깊은 관심이 있었으면 합니다.
▶ 뉴스위크에 종교 특집이 실렸습니다. “제목은 목사님과 무신론자”입니다. 그 내용 가운데 재미난 통계가 있습니다. 전 미국인의 91%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응답했고, 그 중 82%가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절반가량이 자신은 개인적으로 무신론자와 교분을 갖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또한 그들의 47%가 미국이 과거보다 무신론을 더 받아들이고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내용이 뭐냐 하면 겉으로는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크리스천이다.”라고 대답을 했지만 속으로는 불신앙에 가까운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렇습니다.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에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부활이나 영생 같은 것은 그다지 관심도 없고 믿지도 않습니다. 내심 이렇게 말할 겁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나? 도대체 어떤 몸으로 살아난단 말인가? 그리고 지금은 당면한 문제로 인하여 머리가 아픈 데 뭐 그런 것까지 생각하여 머리만 아플 필요가 있겠는가?’
예수님 당시 제사장족들인 사두개인들을 보십시오. 예수님께 묘한 질문을 했습니다. “생전에 결혼을 7번 한 여자는 부활 때에 누가 남편이 되나요?” 이런 생뚱맞은 질문이 바로 오늘의 질문입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살지? 도대체 어떤 육체로 오나? 30대 모습으로 살아날까? 80대의 할망구 모습으로 살아날까?”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이 두 가지 질문에 답을 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어떻게 살아나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둘째는 어떤 몸으로 살아나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1. 어떻게 살아날까
첫 번째 질문은 부활의 방법입니다. 어떻게 살아날까? 살아나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물리적으로, 혹은 화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불가능합니다. 우선 현재까지의 경험상 시체가 살아난 사례가 없습니다. 강시 영화에 보면 시체가 일어나 깡충깡충 뛰어 갑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지식으로도 불가능합니다. 현재까지의 생명과학의 힘으로는 생명을 살리는 방법은 없습니다. 더구나 땅에 묻혀서 썩어 없어진 시체를 어떻게 살려 냅니까? 그러면 우리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됩니까?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날까요?
‘인간은 불가능하되 하나님은 가능하시다! 하나님이 보여주셨으니 믿어라!’ 대답은 그것뿐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과연 있는지? 그것을 보여준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첫 열매라고 합니다. 추수 때에 첫 열매를 수확하면 나머지 열매도 수확할 것을 예상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역사적으로 믿을 만한 일입니까?
■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성취(成就) 확률을 보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 【한 두 가지 예언이 한 사람에게 우연히 일치될 수는 있다. 그러나 300-450가지의 예언이 한 사람에게 우연히 일치될 수는 없다. 1963년 무디출판사에서 발행한 Dr. Peter Stoner의 ‘과학은 말한다’라는 책은 미국과학협회(고센대학)의 검토를 받은 책인데, 그 책에 의하면 수학의 확률법칙으로 보아 예수님에 관한 예언 들이 우연히 적중될 가능성은 생각할 수가 없다고 한다.
예수님의 출생지와 동정녀 탄생, 가룟 유다가 팔 것과, 세례요한의 메시야의 길 예비, 은 30냥에 팔릴 것과 십자가의 죽음을 둘러싼 예언 등 8가지만이라도 우연히 예수님에게 성취 시키는 수학적 확률의 기회는 100,000,000,000,000,000분의 1 즉, 10의 17자승 분의 1이 된다.
달리 설명하면, 1달러짜리 은돈 10의 17자승개를 미국 텍사스 주(한국의 약 3.5배 넓이) 전 지면에 깐다고 하면 5피트(1.5m) 높이로 깔 수 있다. 그 중에 동전 하나에 표시를 해놓고 섞어 버린 후 눈가림한 사람에게 마음껏 달리게 하여 텍사스주 전면에 5피트 높이로 깔린 1달러짜리 은돈 중에서 한 개를 단 한번만의 기회에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면서 골라잡았을 때 적중되는 확률이 메시아 예언 8가지를 우연히 한 사람에게 적중시키는 확률이 된다.
그러나 만일 48개의 예언이 우연히 한 사람에게 적중되는 확률은 10의 157자승분의 1이 된다. 10의 157자승분지 1에 대한 수학의 우연의 확률을 생각해 보자. 물리학적 단위인 전자(電子)는 지극히 작은 물질이다. 전자의 크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 전문가의 계산에 의하면 1인치 선(線) 위에다 10의 15승의 2.5배되는 수(數)의 전자를 늘어놓을 수 있다고 한다. 이 1인치 선위에 배열한 전자의 수는 10의 15승 곱하기 2.5가 된다.
이 전자 수를 1분에 250을 세는 속도로 24시간 쉬지 않고 세면 19,000,000년이 걸린다. 만일 그 전자를 1입방인치에 가득 채운 것을 센다면 19,000,000*19,000,000*19,000,000년이 걸린다. 이상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48개의 예언이 한 사람에게 적중되는 확률 10의 157승을 상상해 보라. 구약성경(舊約聖經)은 450회 이상 메시야 되시는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언했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이 당신의 부활하심에 대하여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일과 거기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제자들에게 비로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그 일이란 예수께서 유대인 지도자들인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는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이었다.”(마 16:21) 3번이나 말씀하셨는데 오늘날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나는 보지 못하였으니 믿을 수 없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에게 무엇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들이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마 13:14-16 / 이것은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너희가 듣기는 아무리 많이 듣더라도 깨달을 수는 없을 것이다. 너희가 보기는 끊임없이 보더라도 그 의미는 알 수가 없을 것이다. 15)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귀를 막아 버려라. 눈을 아예 감겨 버려라. 그들이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마음으로 깨달아 내게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여라. 그들이 고침받는 일이 없게 하여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볼 줄을 아니 행복하고 너희 귀는 들을 줄을 아니 행복하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15:3-8 / 나는 먼저 내가 전해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 전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4)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또 예언자들이 말한 대로 사흘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5) 그리스도께서는 게바에게 나타나신 후에 다시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6) 또 한 번은 500명이 넘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들 가운데 죽은 사람 몇 명을 빼고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7) 그리스도께서는 또 야고보에게 나타나셨고 나중에는 모든 사도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8)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팔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었다면 베드로를 비롯한 열 두 사도들이 순교를 당했겠습니까? 이 세상에 거짓에 목숨을 걸고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설사 그들이 거짓 증거를 했다고 합시다. 거짓 증거를 하다가 잡혀 죽은 사람들이 환희에 찬 모습으로 찬송을 부르면서 돌에 맞아 죽고, 화형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수 천 수 만 명의 사람들이 믿음을 위해서 몇 백 년 동안이나 카타콤의 지하 동굴에서 대를 이어 살다가 죽어갔겠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기록은 동시대 어떤 역사적 기록보다도 풍성한 자료들을 남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것은 주후 55년경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지 20여년이 경과된 시점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목격자들이 상당수 남아 있던 시기입니다. 바울이 거짓말을 전파하러 결혼도 하지 않고 지중해를 세 바퀴나 돌면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참수형을 당했겠습니까? 문제는 믿음입니다.
▶ 유명한 철학자 파스칼의 신앙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파스칼은 환상 가운데 본 번쩍이는 생각들을 생생히 기록했습니다. 그의 환상은 경험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공상적(fantastical)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파스칼의 마음에는 전혀 의심이 없었습니다. 분명히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파스칼은 수학자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수학적으로 단련된 두뇌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환상을 본 사건을 정확히 기억합니다. 1654년 11월 23일, 순교자 성 클레멘트의 축일, 월요일 한밤중 10시 30분에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실제이시다! 기독교인의 이야기는 사실이다! “확실하다. 확실하다. 진심이다.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리고 당신의 하나님!” 이 내용은 파스칼이 죽은 후에 수집하여 “팡세”란 이름으로 출간된 책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파스칼은 수학과 믿음 두 가지 열정을 섞었습니다. 이것을 파스칼의 도박(Pascal`s Wager)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하나님을 믿는 쪽에 거는 것이 현명하다는 얘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가 사실로 드러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안 계신다 해도 잃을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왜 하나님을 믿지 않겠는가? 이것이 파스칼의 도박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도박을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부활 사건은 어느 날 돌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성경에 예언되었고, 많은 징조로써 보여주신 바 있습니다.
엘리야는 죽었던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려냈습니다(왕상 17장). 엘리사는 죽었던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려냈습니다(왕하 4장). 엘리야나 에녹은 죽음 없이 승천했습니다. 이것은 장차 나타날 부활에 대한 그림자들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몇 차례 살려내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죽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살려내셨습니다(막 5장).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장사지내려고 시체를 가지고 가는 도중에 살려내셨습니다(눅 7장). 나사로는 무덤에 장사지낸 지 사흘이 지나 썩은 냄새가 났지만, 예수님은 무덤까지 가셔서 그를 살려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죽은 도르가를 살려냈습니다(행 9장).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들으면서 졸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란 청년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청년을 살려냈습니다(행 20장). 이와 같이 성경에는 상당히 많은 부활의 예표들을 얘기합니다. 부활은 예고된 일입니다.
부활의 확실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근거는 자기 자신의 삶입니다. 즉 부활이 없다면 자기가 그토록 복음을 위해 헌신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는 논리입니다. 그의 말을 들어봅니다.
고전 15:30 / 또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생명의 위협을 감내하고 있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가 세상이라고 알고 있던 모든 곳을 다 다니려 했습니다. 그 당시 여행을 한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온갖 위험을 다 무릅쓰고 쉬지 않고 여행을 했습니다. 그 여행에서 그는 수없이 많은 위험과 고난을 겪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겪은 고난과 위험을 그 자신의 입을 통해 들어봅니다.
고후 11:23-27 / 그들이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말합니까? 나는 그들보다 더 오래 그리스도를 섬겼습니다. 이렇게 자랑하고 있는 내가 정신이 나간 사람일까요? 나는 그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여러 번 감옥에 갇혔고 수없이 채찍으로 맞았으며 죽음을 눈앞에 둔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24) 유대인에게 서른아홉 번씩 맞는 태형을 다섯 번이나 당하였습니다. 25)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 돌로 맞은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그리고 밤낮 하루를 바다 위에서 표류한 일도 한번 있습니다. 26) 여러 번 길고 어려운 여행을 하면서 강이 범람하고, 강도를 만나고, 내 동족인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의 박해 등으로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겼습니다. 여러 동네에서 폭도들에게 곤욕을 겪고 광야와 사나운 바다 위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일도 있습니다. 거짓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려움을 당한 일도 있습니다. 27) 피곤에 지치고 고통에 시달려 잠못 이루는 밤을 수없이 지냈습니다. 주리고 목말랐으며 먹을 것 없이 지낸 날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몸에 걸칠 옷이 없어서 추위에 떨었던 일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독사에 물리는 일도 있었습니다(행 28:3). 여행에서의 위험만이 위험이 아닙니다. 이교도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 자체도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 일로 바울은 법정에 서기도 하고 살해의 위협도 받았으며 결국은 순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또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생명의 위협을 감내하고 있는 것입니까?” 한 것은 하나의 물음이 아니라 대답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만일 부활이 없다면 왜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겠느냐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과 확신 때문에 그런 온갖 위험과 고난도 다 무릅쓴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고전 15:31 / 사실 나는 날마다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나의 자랑으로 삼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그 일 또한 틀림없는 사실입니다.(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날마다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다시 인용합니다.
고후 4:8-12 / 우리는 사면에서 닥치는 고통에 짓눌리지만 움츠러들지도 쓰러지지도 않습니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에 당황할 때도 있지만 절망하거나 자포자기 하지 않습니다. 9) 우리가 박해를 받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얻어맞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달려 나갑니다. 10) 우리 몸은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부단히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11)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위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오히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나타내 보일 기회가 언제나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12)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영원한 생명이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날마다 죽는다’는 말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진다.’는 뜻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마 16:24-27 / [예수를 따르는 길]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26) 너희가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생명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생명의 가치를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 사람이 살아온 대로 심판할 것이다.
여기서의 자기 부인 즉 자기를 버리는 것은 자기절제의 삶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렇게 날마다 죽는 이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다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고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듯이 우리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부활과 영생을 믿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갈 2:20 / 그리스도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해 그 몸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은 덕분에 지금 내가 참생명을 얻었습니다.
갈 5:24-25 /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은 악한 욕망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25) 만일 우리가 지금 성령의 능력으로 살고 있다면 모든 생활 역시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은 계속됩니다.
고전 15:32 / 만일 내가 이 한 목숨을 부지하려고 야수 같은 에베소 사람들과 싸운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죽은 뒤에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가서 진탕 먹고 마시고 유쾌하게 놀아보세. 어차피 내일은 죽을 목숨이 아닌가? 만사가 다 끝장이란 말일세!” 하는 식이 되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를 쓴 에베소에서는 맹수들과 싸우는 경기를 즐기는 것이 일상생활의 일부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격투기장에서든 어디에서든 맹수와 싸웠다는 기록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또 당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형벌로서든 구경거리로서든 맹수와 싸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로 미루어볼 때 그가 실제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워야 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은 오히려 사도 바울이 맹수와 싸우는 것 못지않게 힘든 대결을 그를 적대하는 자들과 벌여야 했음을 뜻할 것입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왜 맹수와 싸우는 것 같이 힘든 싸움을 그의 대적들과 싸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답을 암시하는 것이 그 다음에 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한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내가 무슨 유익이 있다고 맹수와 싸우는듯한 그 힘든 싸움을 싸우겠는가?’ 되묻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과 확신 때문에 그저 먹고 마시며 즐기는 삶이 아니라 맹수와 싸우는듯한 그 힘든 싸움을 싸운다는 것입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살아있을 때 먹고 마시며 순간순간을 즐기는 것이 중요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삶이 무덤을 넘어 계속되며 이 땅에서의 삶은 영원히 계속될 우리의 삶을 위한 준비일 뿐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의 자세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달리 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서 부활신앙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으로 연결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과 확신 때문에 “내일은 없다. 오늘 먹고 마시고 보자.” 하는 식의 삶의 태도와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을 내려놓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적 원칙을 제시한 사도 바울은 그 원칙을 무너뜨리고 그 삶을 파괴할 수 있는 세상의 사고와 논리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고전 15:33-34 /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만일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여러분도 똑같은 짓을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34) 정신을 똑바로 차리십시오. 죄 짓지 말고 바른 일만 하십시오. 부끄러운 줄 알라고 하는 말입니다만 여러분 가운데는 아직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는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죽음 이후의 삶은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오직 오늘만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중에 죽은 후에 즐길 삶이 없다면 매일매일 그때그때의 최대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의례 유혹하기를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입니다. 그런 삶의 자세는 십중팔구 불의를 행하고 죄를 짓게 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속지 말고 정신 차려서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34절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십시오. 죄 짓지 말고 바른 일만 하십시오. 부끄러운 줄 알라고 하는 말입니다만 여러분 가운데는 아직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는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부활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부활과 내세를 믿지 않는 자들은 현세적 쾌락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 있고 그런 자들의 유혹과 속임수에 넘어가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행하는 자들이 있음을 경고함으로써 고린도 교회가 각성하고 부활신앙 위에 바로 서기를 바라서 편지를 쓴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은 부활과 영생에 이르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교리는 단지 신학적 진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에서의 윤리적 삶을 좌우하는 중대한 진리입니다. 새롭게 맞은 이 사순절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부활과 영생의 구원과 그 기쁨을 깊이 묵상하며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죽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분명히 깨닫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2. 어떤 몸으로 살아날까
두 번째 질문은 어떤 몸으로 살아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부활은 영혼에 대한 논의가 아닙니다. 육체에 관한 논의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혼이고 하나는 육체입니다. 영혼은 비물질이고 육체는 물질입니다. 영혼은 시공을 초월하지만 육체는 시공을 초월하지 못합니다. 영혼은 무한하지만 육체는 유한합니다. 하나님은 비물질이시며, 초시간적이시며, 초공간적인 분입니다. 무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유한한 물질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물질이 뭘까요? 물질을 이루는 기본 요소를 원소라고 합니다. 현재까지 약 118개의 원소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원소는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원자핵은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 중간자로 되어 있습니다. 핵물질은 더 작은 쿼크로 구분됩니다. 이 쿼크도 더 작은 부분으로 분해되며, 최근에는 이보다 더 작은 물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물질이 뭔지 깊이 들어갈수록 헷갈립니다. 사람의 육체를 원소로 분해하면 별 것 아닙니다.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원소를 알아보면, C(18%), H(10%), O(65%), N(3%)로 성인의 경우 총 96%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4%는 무기질(無機質)입니다. 골격이나 치아의 Ca, 세포내에 존재하는 K, 체액에 존재하는 Na, 그리고 다른 유기물과 결합하고 있는 S, P, Fe, Zn 등이 3%를 차지합니다. 나머지 0.5%∼1% 원소는 철, 망간, 동, 요오드, 아연, 몰리브덴, 불소 , 크롬, 비소 등입니다. 이 모든 물질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원소들입니다. 생명체든지 무생물이든지 다 이 원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본 원소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천만 가지의 물질들이 생겨납니다. 다이아몬드나 석탄은 같은 탄소 성분이면서 구조만 다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 기본적인 물질로 지구상에 있는 수백 만 가지의 생물들을 만들어내셨습니다. 고등학교시절 배운 생물의 분류법에 의하면 ‘종속과목강문계’ 또는 거꾸로 하면 ‘계문강목과속종’입니다. 현재 지구상에는 약 35만 종의 식물과 100만 종의 동물이 살고 있습니다. 인간을 예로 든다면 동물계, 후생동물 문, 척추동물 아문, 포유류 강, 영장 목, 호미니드 과, 호모 속, 사피엔스 종입니다.
하나님은 원소의 조합에 따라서 최소한 135만 종 이상의 생물을 만들어내셨습니다. 같은 인간이라도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이 다릅니다. 같은 황인종이라도 일본인과 한국인, 중국인이 다릅니다. 같은 한국인이라도 가문에 따라서 생김새가 다릅니다. 같은 가문이라도 개체에 따라서 모양과 지문이 다릅니다.
▶ 그러면 이제 부활의 몸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도대체 부활 때에는 어떤 몸으로 살아날까요? 그 해답은 첫 번째 질문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몸으로 살아날 것이다! 어떤 모양이 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하나님 손에 달렸다!’ 본문을 보십시오.
고전 15:37-38 / 그리고 씨앗에서 돋아나온 새싹은 처음에 뿌린 씨앗과는 별개의 것입니다. 여러분이 땅에 뿌린 씨앗은 밀이든 무엇이든 마르고 작은 씨앗이었지만 38)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그 씨앗에 합당하게 새로운 몸을 주십니다. 그래서 씨의 종류에 따라 각각 다른 식물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씨앗을 땅에 뿌릴 때에 어떤 모양을 뿌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씨앗 알갱이를 뿌릴 뿐입니다. 씨앗은 다 비슷합니다. 밀, 옥수수, 벼, 콩, 팥, 참외, 수박, 다 비슷비슷합니다. 그런데 씨앗에서 본체가 나오는 것을 보면 각양각색의 모양이 나옵니다. 인간의 부활도 마찬가집니다. 마치 지구상에 여러 동물의 모양이 종에 따라 개체에 따라 다르듯이, 하나님께서 각양의 육체를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수박을 먹음은 ‘수박'이라는 형체를 심어서가 아닙니다. 조그마하고 까만 씨앗 하나 땅에 심었는데 거기서 싹이 나고, 줄기가 생기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점점 커져 씨보다 수천만배 큰 ‘수박'이 됩니다. 녹색에 까만 줄무늬 겉옷, 하얀 속내의 속에 빨간 살과 수많은 씨앗들... 제 아무리 두뇌가 뛰어나고 말을 잘할지라도 이 신비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인생은 씨앗을 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보이지 않는 어떤 형체의 씨앗을 심고 있습니다. 헌데 지금 내가 뿌리고 있는 씨앗 속에 내일의 내 형체가 숨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내일 만들어질 내 형체를 생각지도 아니하고 분별없이 마구 나쁜 씨를 뿌려댑니다. 여기에 인간의 어리석음이 있고 불행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품어야 할 생각이 있고 품지 말아야 할 생각이 있으며, 할 말이 있으며, 안 할 말이 있고, 행동해야 될 것이 있고 행동치 않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어떤 종자를 심든지 종자대로 되어집니다.
현재는 미래의 출발점이긴 하나 내일의 형체를 결정짓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지금'이라는 순간도 잠깐후면 과거가 됩니다. 지금 나는 모르지만 현재 나의 삶은 내 미래와 심판의 원인입니다. 삶은 생각, 말, 행동으로 미래의 나를 짜는 것입니다.
※ 부활의 육체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❶ 현재의 육체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육체라는 점입니다.
고전 15:42-44 / 이와 같이 죽으면 썩어질 우리의 땅 위의 몸도 다시 살아날 때에는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43)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은 병이 들거나 죽기 때문에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게 하지만 다시 살아날 때에는 영광에 가득찬 몸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몸이지만 우리가 다시 살아날 때에는 굳센 몸이 될 것입니다. 44) 지금은 죽음을 앞에 둔 인간의 몸이지만 다시 살아난 뒤에는 영적인 몸이 될 것입니다. 자연적인 인간의 몸이 있는 것처럼 초자연적인 영적인 몸도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육체는 내용적으로 썩어 부패하는 육체입니다. 그러나 부활체는 썩지 않는 몸입니다. 현재의 육체는 가치적으로 볼 때 욕된 것입니다. 생로병사의 고통 속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부활체는 축복 가운데 거하는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현재의 육체는 능력적인 면에서 약한 육체입니다. 그러나 부활체는 모든 질병과 환난을 이기는 강한 몸입니다. 현재의 육체는 본질적으로 육의 몸입니다. 그러나 부활체는 신령한 몸, 영적인 몸입니다.
❷ 같은 인간의 몸일지라도 각 개체에 따라 영광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고전 15:39-41 / 씨앗이나 식물에도 여러 종류가 있듯이 육체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인간, 짐승, 새, 물고기가 각각 다 다른 것입니다. 40) 하늘에 속한 것도 있고 땅에 속한 것도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것의 아름다움과 영광은 땅에 속해 있는 아름다움과 영광과는 다릅니다. 41) 태양에는 태양의 영광이 있고 달과 별에도 각기 다른 영광이 있습니다. 그리고 별 하나하나에도 아름다움과 광채에 차이가 있습니다.
같은 몸이지만 동물과 인간은 육체의 등급이 다릅니다. 같은 형체라도 지상에 있는 것보다는 하늘에 있는 형체가 더 영광스러워 보입니다. 해와 달과 별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지상에 속한 형체만 가진 게 아니라 하늘에 속한 형체, 즉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형체를 갖고 있습니다. 같은 하늘에 있는 형체라도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이 다릅니다. 같은 별이라 해도, 별과 별의 영광이 다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선 지상에 속한 육체와 하늘에 속한 육체입니다. 세상 끝 날에 죽은 자들이 다 부활합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같이 부활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하나님께 속하기 위해서 부활하고, 불신자들은 지옥에 속하기 위해 부활합니다.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영광이 다릅니다. 같은 성도들이라 해도 개체의 모양들이 다릅니다. 이것은 본질적인 영광의 차이라기보다는 개체의 특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튼지 우리가 주목할 것은 부활입니다. 마치 농부가 곡식이 생겨날 것을 믿고 씨를 뿌리듯이, 우리는 부활을 믿고 육체를 장사지냅니다. 본문에 심는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심는다’는 말은 흩어버린다는 뜻입니다. 농부가 만일 씨앗이 나올 것을 믿지 않는다면 씨를 뿌리지 않을 겁니다. 새로운 몸으로 나올 것을 믿기 때문에 씨를 뿌립니다. 장례식도 그렇습니다. 비록 육체는 매장을 하거나 화장을 하지만 영혼은 하나님 나라에 갈 것입니다. 그리고 행한대로 갚음을 받을 것입니다.
요 5:24-29 / 내가 특히 강조해 둔다. 누구든지 내가 전하는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는 결코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25) 내가 분명히 말한다. 때가 오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내 음성을 듣게 될 것인데, 지금이 바로 그때이므로 듣는 사람들은 살 것이다. … 29) 그때가 오면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다시 살아나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고, 악한 일을 저지른 자들은 다시 살아나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마 25:34-36 / 그리고 왕인 나는 내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사람들아, 와서 천지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에 들어가라. 35)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 집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였다. 36)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와 주었다.”
눅 18:29-30 /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리는 사람은 30)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의 보상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갈 6:7-10 / …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8) 만일 자신의 악한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악한 씨앗을 심은 셈이 되어 그 결과 죽음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하여 좋은 것을 심는 사람은 성령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9) 낙심하지 말고 선을 행하십시오. 실망도 포기도 하지 않고 꾸준히 선을 행하다 보면 복을 거두어들일 날이 올 것입니다. 10) 기회 있을 때마다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푸십시오.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하십시오.
▣ 그러므로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의 사건 때문에 힘을 얻고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힘써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권능을 받았기에 담대히 나아가 복음을 전파할 수가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따르고 좇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끝이 났다면 충성을 바쳐 따르고 섬길 대상이 없어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예수님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절망은 없습니다. 오직 새로운 희망과 감격과 충성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한 것입니다.
■ 1914년 당시 정동교회는 1893년 교회 건축시 진 많은 빚이 있었는데, 거의 20년이 지났음에도 갚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목사님은 빚을 갚기 위해 헌금을 하자고 했지만 그날 걷힌 헌금은 빚을 진 금액에 고작 1/4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교인은 이화학당 학생이 많았습니다. 기숙사로 돌아온 학생들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바치기로 의논하고 주일저녁 교회에 다시 모였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찬송을 부른 후 한사람 씩 나와 자기들이 아끼던 것들을 바쳤습니다. 동전 17달러 정도, 반지 35개, 손거울, 자명종 시계 2개, 양말, 내의, 구두, 혼수감으로 어머니가 주신 붉은 명주도 있었습니다. 어떤 여학생은 댕기머리를 잘라서 하나님께 드린다며 내어 놓았습니다. 놀랍게도 그날 그 교회의 빚은 해결되었습니다. 그 당시 이화학당 학생들은 믿음이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누가 주의 일에 더욱 힘쓸 수 있습니까?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누가 자신의 댕기머리를 잘라서 드릴 수 있습니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한평생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서 교회 섬기고 직분 감당하고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내 대신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시는 교우 여러분! 언제 주님이 재림하실지 알 수 없지만, 이런 현상 저런 징조를 볼 때에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신앙을 가지고 세파에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심으로 주님이 오실 때 변화 받고 주님을 기쁘게 영접할 수 있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최효섭 목사님의 부활절 기도로 우리의 기도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여 당신은 오늘 나의 마음속에서 다시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당신은 오늘 나의 관을 깨뜨리고 나에게 다시 생명을 주셨습니다. 무덤 속에 가득 찬 광명과 향기, 그것은 오늘 나의 영혼에 가득 차는 소망의 기쁨입니다. 주여, 이 새봄에 나의 마음 밭에 오소서. 당신이 오시면 사람이 살고 당신이 오시면 어제의 슬픔이 가고 당신이 오시면 저 밝은 하늘 열리고 당신이 오시면 미움도 사라지고 당신이 오시면 마음과 마음 다시 만나고 당신이 오셔야 사람다운 사람, 남편다운 남편, 아내다운 아내, 자식다운 자식이 되겠습니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여 넘어져도 얼른 일어나게 하시고 먼지가 묻어도 빨리 털어내게 하시고 미움을 품고 잠자리에 들지 않게 하소서.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굼벵이가 매미가 되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말랐던 뿌리에서 백합의 미소가 피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어두운 태에서 생명의 울음이 터지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사나운 소리가 들려도 너무 겁내지 말게 하시며 꾸지람을 들어도 너무 낙심하지 않게 하시며 바람이 분다고 아무데로나 끌려 다니지 않게 하시며 햇볕이 뜨겁다고 그늘만 찾지 않게 하소서. 갈 길이 멀다고 걱정만 하지 말게 하시며 지나온 길 되돌아보지 않게 하시고 어둠이 와도 외로워하지 않게 하소서. 몽치가 다가올 때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던 주님, 배반하는 제자에게도 위로의 시선을 던지시던 주님, 침 뱉는 자들도 용서하시던 주님, 십자가위에서도 어머니를 생각하시던 주님, 오 주님!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내 가슴이 푸른 하늘이 되게 하시고 내 생각이 넓은 하늘 되게 하시며 내 영혼을 봄 동산으로 만들어 주소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시여, 나의 무덤을 헤치고 새롭게 태어날 힘을 주소서. 하루하루를 기쁨으로 맞이하게 하시고 미래를 설레는 흥분으로 기다리게 하시며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꿈꾸게 하시며 알지 못해도 소망으로 전진하게 하소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시여, 이 봄, 이 부활절에 나도 새 출발하게 하소서. “두려워 말라(마 14:27), 염려하지 말라(마 6:34)”고 하신 주님을 온전히 믿고 오늘 새 출발하게 하소서. 주님은 나의 선장이시오 진정한 후원자, 주님은 나의 모든 문제의 해답자시오니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 품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최후까지 나를 사랑해 주시는 주님, 나도 오늘 부활하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