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고니시 유키나가 (일명: 소서행장) [일본천주교회사]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의 무장으로 대표적인 천주교 신자 영주(다이묘)로서 1584년 아우구스티노 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활동한 유명한 일본 장수들 중 한명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일본에서는 고위 다이묘가 아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종 출신 다이묘들이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한국에 들어올 때포르투칼 출신 예수회 신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를 데려와 일본 병사들과 밤마다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웅천왜성 참조)
1600년경 세키하라 전투 때 싸우다 패하였으나 고니시는 교리에 따라 할복자살을 거부하고 효수 당하였다 합니다. 후손 중 외손자 고니시 만쇼는 훗날 신부가 되었다 합니다.
가) 일본 전국시대 무장. 키리시탄(キリシタン) 다이묘로 유명하며,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Augustino).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선봉 중 한 명이다.
국내에선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 무장 중 가토 기요마사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인물. 당시 조선에서도 일본 장수 중에서 제일 유명한 인물 중 하나였다. 임진왜란 관련 조선측 사료에서는 소서행장(小西行長)이나 그냥 행장(行長)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한다.
다른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와는 앙숙지간이다. 가토는 바로 옆동네의 다이묘인데, 원래 이웃끼리가 더 사이가 안 좋은 법. 상시 접경에서 영토 문제로 다투었다고 한다.
다만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히데요시 집권 후 지방 다이묘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직신들을 각 지방에 골고루 분배했고 특히 둘의 영지가 있는 규슈는 시마즈가 자리하고 있고 옛 류조지 가문의 세력을 등에 업은 나베시마(鍋島) 가문도 있었기 때문에 직신들 중에서도 제일 믿을 만한(혹은 능력있는)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간베에, 고니시 유키나가를 배치했다.
특히 가토와 고니시의 영지는 남북으로 붙어 있기 때문에 둘의 연계가 중요했다. 그때 당시만 해도 히데요시의 권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영토로 싸운 기록은 없다. 오히려 히데요시의 구상에 걸맞게 서로 도와가면서 잘 지냈다.
다만 임진왜란 몇 년 전부터 가토가 영지 내 가톨릭 신자들을 박해하면서 가토의 영지 내 신자들이 대거 고니시 측으로 도망, 그들의 처우 문제로 다툰 적은 상당히 많다. 둘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가토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울산성 전투에서 고니시가 조선측과의 화친을 위해서 가토의 지원요청을 묵살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가토가 얼마나 한이 맺혔는지 귀국 후 만든 구마모토 성은 식수공급용 우물을 900개 정도 팠고 성내 다다미나 외벽재를 죄다 고구마 줄기로 만들어서 유사시 장기간 농성에 대비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훗날 시마즈 군대와 정부군이 격돌했을 당시 최대 격전지였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서남 전쟁 항목이나 구마모토 성 항목 참조.
본래 사카이의 상인의 아들이자 자신도 상인으로서 본명은 고니시 야쿠로였다고 한다. 최초 우키타 나오이에를 섬겼으며, 주로 외교시의 사자로 활동하였다. 1581년 우키타 나오이에가 사망한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발탁되었다.
히데요시 밑에서는 후나부교(船奉行)로서 수군을 통솔하였고, 다이묘가 된 것은 1585년이다. 상인 시절에는 약종상(藥種商), 즉 약재를 주로 취급하였는데 이 때문에 창작물에서 그를 두고 '약장수'라고 표현할 때가 많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고니시는 군기로 붉은 비단 장막에 하얀색 십자가를 그린 것을 사용했고, 고니시의 휘하 병사들 다수도 천주교 신자였다. 고니시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그의 진중에는 로마 교황청이 파견한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신부인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가 사목했고, 밤마다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특히 부장이자 사위인 소 요시토시에게도 가톨릭을 믿으라고 권해서 세례성사를 받게 했고, 요시토시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외손자 고니시 만쇼는 훗날 신부가 되었다. 그의 사촌 역시 세례를 받아 안토니오란 이름을 받았다.[7] 고니시의 봉토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후에 시마바라의 난의 진원지가 된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대마도주인 사위의 무역문제와 자신의 가톨릭 신앙 등의 이유로 전쟁을 반대하던 쪽의 인물이었다. 이시다 미츠나리 등과 전쟁을 막기 위한 시도도 하였다.
하지만 실패하자 이에 초친 가토에게 보란듯이 가장 먼저 조선에 상륙, 한성을 가장 먼저 점령하고 평양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무리한 진격으로 공세 종말점에 이르면서 평양서 시간을 허비하게 되면서 조선 육군의 승리로 어려워지는 전세 상황. 보급문제와 명나라군 등의 등장으로 물러나게 된다. 한성까지도 겨우 후퇴하였고, 행주산성에서 권율의 3천 병사에게 대패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는 총대장인 우키타 히데이에의 잘못이 크다.
고니시의 1달간의 체류에 대해서는, 상인 출신이기에 가진 한계[9]라는 설과 고니시의 반전 의사라는 설, 보급 부족 등의 설도 있다. 하지만, 평양까지의 빠른 진격으로 인한 반대급부로 병력들이 이미 상당히 지쳐있다고 보는 것이 진정한 원인으로 보는 것이 최근 견해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조선군들을 계속 상대하면서 경상도부터 평양까지의 긴 거리를 보군으로 단기간에 돌파한다는 것부터가 상당한 부담이였고 평양성 점령 후도 부상자가 상당하였다.
이순신의 보급로 지연으로 보급 문제로 철수했다는 전의 서술과는 다르게 평양성 점령 후 상당수의 군량과 평양성이라는 요충지를 획득했기에 고니시군은 어느 정도 버틸 보급 능력이 있었지만 이순신의 활약에 의한 추가 지원 가능성이 없어지고 명군의 도착이 부담이 되어서 철수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전쟁이 늘어지기 시작하자 이시다 미츠나리와 함께, 명과의 강화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고니시는 말빨로 한 이름 하는 명나라의 심유경과 함께 열심히 교섭을 해봤으나, 일본의 조공을 요구하는 명과 조선 8도 중 남쪽 4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를 요구하며 명의 황녀를 운운하는 일본 사이에 강화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결국 고니시와 심유경이 양쪽 정부 모두에게 거짓을 고하고 명에게는 모든 요구조건이 수락되는 대신 도요토미에게 일본 왕 책봉을 내리는 수준으로, 일본에는 명이 마치 일본을 인정한 것처럼 사기를 쳤다. 문맹인 도요토미의 성향을 이용한 대사기극이었으나… 결국 붕괴, 심유경은 목이 잘리고 고니시는 마에다 토시이에, 요도도노 등의 간청으로 가까스로 살아남게 된다.
이후 고니시는 평소 원수같던 사이인 가토 기요마사를 조선의 손을 빌어 처리하고자 가토의 상륙 정보를 조선 조정에 흘렸으나, 이는 상상 이상의 수확을 거두게 된다.
고니시가 흘린 정보는 이순신이 받아들이지 않아, 가토가 이미 상륙을 한 뒤라서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선조가 이에 낚이는 바람에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당하고 후임에 원균이 임명되면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키는 어마어마한 일을 해낸 것이다.
이렇게 정유재란에 다시 참전하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노량해전에 대패하면서 후퇴. 다만 이 때 고니시군은 전장에서 벗어나 일본으로 철군하는 중이었다.
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진영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벌인 내전에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지지하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하여 잘 싸웠으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과 함께 공격당하여 패배, 1600년 쿄토의 로쿠조 강변에서 처형당했다. 가톨릭 신자라 할복을 하지 않고[10], 온갖 수모를 겪은 후 참수되었다. 죽기 전 같은 가톨릭 신자였던 쿠로다 나가마사를 통해 고해성사를 받게 해달라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요청했는데 거절당했다고 한다. 참수시 불교의 승려가 관례적으로 고니시의 머리 위에 불경을 얹고 염불을 했는데 고니시가 "나는 키리시탄이다. 어딜 불교의 것을 나에게 들이대느냐!" 하고는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죽었다고 한다.
숙적 가토 기요마사의 공격을 받고 있던 우토 성은 끝까지 버티다가 고니시의 처형 소식이 들어오자 항복하고, 성을 지키던 고니시의 동생 유키카게는 할복하였다.
쓰시마 섬 도주 소 가문의 소 요시토시에 시집갔던 딸 마리아는 세키가하라 이후 이연당하여 갓 낳은 아들과 함께 쫓겨났으며,[11] 아들은 모리 가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후 고니시의 가문은 멸문되었으며 고니시의 봉토는 가토 기요마사가 소유하였다. 고니시의 가신들 역시 많은 수가 가토 가문으로 흡수되었다. 고니시의 우토 성을 점령한 가토는 그 성의 망루 하나를 자신의 구마모토 성에 옮겨 설치하고 "우토 망루"라고 불렀다고 하나, 후대의 연구에 따르면 우토 망루는 원래부터 있었고, 우토 성 출신 가신들이 있는 곳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한다.
조선의 전쟁 고아들을 많이 양육했다고 하여 그중 유명한 인물로는 조선인 양녀 오다 쥬리아가 있다. 평양 혹은 순천에서 주운 고아를 양녀로 삼아 이름을 오다로 짓고 가톨릭에 입교시켰다. 고니시의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다가 막부의 천주교 박해로 유배되어 여생을 유배지에 보냈다.
참고로 말하자면 한반도 땅을 처음으로 밟은 네임드급 가톨릭 신자이다. (무명 신자가 교역상 이전에 왔을 가능성은 충분하므로…)
전쟁을 좋아하는 성향은 아니었지만 일단 전투에 임하면 돌아보지 않는, 소위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에 끼친 피해 자체는 가토보다 더 크다. 하지만 주군 히데요시를 속여가면서까지 강화를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에 일본 창작물보다는 한국 창작물에서 대우가 조금 더 좋은 편이다.
일본에서는 한국에 잘 알려진 것처럼 가토 기요마사와 라이벌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인지도나 인기에서 가토에게 밀리고 대중매체에서도 잘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묘하게도 여성향에서는 인기가 좋은 편이다.
선봉장으로서 부산진성,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의 주력군을 괴멸시키고 한양과 평양을 점령해 조선을 불바다로 만들었다는 점과 전쟁 반대, 국서 위조, 조선인 양녀 등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복잡한 인물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인물이기에 한국에서는 다른 일본군 장수들과 비교했을 때 대우가 미묘하다.
당대 조선 조정에서조차 가토는 불구대천 원수로 여기면서도 고니시에게는 비교적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강화회담을 주도한 것에서 엿보이듯 일단 조선이 좋아할 만한 학문적 소양은 갖추고 있었던 것 같다. 일단 한자를 알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메리트다. 또 제2차 진주성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는 미리 조선 측에 알려 백성들을 대피시키자고 주장했다.
명나라와 일본이 화평조약을 맺은 와중에 뜬금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진주 공격을 명하자 일본 장수 어느 누구도 그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당시 명나라 사신 신분이었던 심유경이 부산에 있을 때 이야기한 대목이다. 물론 화평약속을 깨는 공격이기에 반대한 것이기도 하다.
고니시의 이익은 쓰시마의 이익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것은 분명하다. 순전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을 막으려 했다는 것도 물론 맞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려고 무진장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다.
애초에 사카이 상인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일찍이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서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국력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이묘로서 전국시대를 통일한 히데요시의 명령에 하복하는 것은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허무맹랑한 조선과 명나라 정복에는 애초부터 반대했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일본에서도 그다지 언급도 없고 높이 평가되지 못하지만 애초에 평범한 장수였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봉장으로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러가지로 생각해볼 점이 많은 인물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