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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말씀: 누가복음 15:11-24]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말씀나눔]
요즘 부모님이 하시는 가업을 잇기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최근 TV의 한 프로에서는 20대 청춘들이 아버지가 하시는 바나나 농장에 내려와서 과학적인 영농을 시도하는 젊은이들을 소개 한 적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부모님이 하시는 가업을 이어가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온 젊은이들의 사연을 매스컴을 통해서 종종 접하게 됩니다. 고향으로 내려온 젊은이들은 저마다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고향으로 내려 온 후에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이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과거에 어떤 성과나 자격 조건이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고향에 돌아오겠다는 결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3포 7포 9포 세대라는 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고향으로 내려 갈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맞아주는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에 이전의 삶을 과감히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실패를 딛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아들을 볼 수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아직 생존해 계심에도 유산을 미리 달라하였습니다.
그리고 받은 유산을 팔아 도시로 나가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재산을 다 까먹고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설상가상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고, 먹을 것이 없어 굶기를 밥 먹듯이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둘째 아들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돼지를 치는 일을 할 정도로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더 비참한 것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어도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은 유대인들이 경멸하는 돼지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은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아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을까요?
이 둘째 아들은 비참한 상황 속에서 비로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 자신이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는 방법은 지금 바로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면 최소한 돼지보다 못한 삶은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 전에 아들의 상태는 죽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체면도 자존심도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살 수 있는 방법, 지금의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면 죽음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습니다.
고난에 처한 모든 사람들이 둘째 아들처럼 고향에 있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결단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붙잡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결단이 막는 것은 아직 내려 놓지 못한 내 욕심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그럴만한 용기를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돌아갈 아버지 집이 없을 때 입니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 둘째 아들에게는 큰 복입니다.
그 돌아갈 집에는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돌아갈 천국 본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둘째 아들이 비참한 상황 속에서 깨달은 것 두 번째는,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부모가 죽기도 전에 유산을 상속 받는 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할 때는 그것이 좋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 일이 이렇게 큰 죄라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타지에서 돼지보다 못한 삶을 살다보니 그 일이 아버지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큰 죄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죄인 인줄 알아야 죄 문제 해결을 위한 길을 찾게 됩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단한 아들은 최소한 아버지에게 자신의 잘못을 빌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지 알지 못하면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주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할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비참한 상황 속에서 깨달은 것 세 번째는,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결단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아들은 이미 아버지의 유산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아들의 권리를주장할 수 없습니다.
자신은 이미 아들의 자격을 잃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도덕적으로도 아버지를 거부하고 떠났기 때문에 그 집안의 아들이라고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자신이 아버지 집에 있을 수만 있다면 품꾼의 하나가 되어도 좋겠다생각한 것입니다.
둘째 아들의 이러한 생각은 시편 84편 10절에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는 고백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렇게 둘째 아들은 비로소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가장 가치있게 대접 받을 수 있는 곳은 아버지 집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집에 거할 때 우리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비참한 상황 속에서 깨달은 것 네 번째는,
자신이 당연하게 누리고 있었던 것이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는 시절에는 모든 것이 다 불평과 불만투성이였습니다.
어차피 나누어 줄 유산인데 미리 좀 주면 어떤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참다운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둘째 아들은 타지에서 빈털터리가 되어서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돼지를 치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 해도 그마저도 어려울 때, 그때서야 비로소 아버지 집에서 당연하게 먹던 음식이 감사함으로 느껴진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대로 예배드릴 때는 예배의 소중함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코로나로 예배가 제한되면서 예배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서 마스크 없이 지냈던 지난 일상의 소중함을 절절히 느끼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내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한 적이 있습니까?
아침에 일어나 내 손으로 세수하고 밥을 먹고 옷을 입고, 내 두 발로 걸을 수 있음에 감격하여 하나님께 날마다 감사의 찬양을 올리십니까? 사람들은 오늘 해가 떴으니 당연히 내일도 해가 뜰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오늘 내가 잘 걸을 수 있으니 내일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건강을 잃으면 그 때서야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게 됩니다.
아파 봐야 건강의 소중함을 압니다. 일상의 작은 몸짓들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제가 잠시 휠체어에 앉아 있어야 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조그만 턱만 있어도, 조그만 경사가 있어도 내 마음대로 이동할 수 없는 상황에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내 손으로 밥을 먹고, 내 두발로 일어나 걸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큰 은혜인지!
여러분! 우리들이 어떤 자격이 있어서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를 누리는것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덜 악해서도 아닙니다. 우리들은 똑같이 하나님 앞에 감히 설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회개의 기회를 얻어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추악한 죄인이었지만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온 우리들을 품에 안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돌아온 탕자에 대한 비유를 누구에게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수군거리고 비방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15:2)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의 비유, 읽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에 이어서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에서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음에 대한 기쁨을 말씀하십니다.
15장 7절과 10절에서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기쁨이 됨을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을 사랑으로 안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미지를 우리에게 심어 주십니다.
특히 32절에서는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영혼들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명확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들은 본문을 돌아온 탕자의 비유라 말합니다.
그러나 명확하게 말하면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라 말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는 도덕적 관념와 관습을 초월하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버젓이 생존해 있는데,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또한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집을 나가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아주 더럽고 부정한 상태로 돌아오는 아들을 아버지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맞이하였습니다.
아들이 돌아 올 때 아버지는 먼저 달려가서 그 더러운 몸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버지께 떼를 써서 받은 유산을 다 잃어버리고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맞이하여 씻기고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새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끌어다가 잔치를 벌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가지고 나가 탕진한 재산에 대하여는 단 한마디도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었던 아들을 다시 되찾은 것에 대한 기쁨을 전하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에 불평하는 큰 아들에게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의 비유, 읽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를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15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회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을 다 기뻐하지는 않습니다.
돌아온 동생에 대해 기뻐하지 않는 큰 형처럼, 예수님을 대적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한 영혼이 구원받는 것에 대한 기쁨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저 현생에 누릴 즐거움에 초점이 있습니다(29절).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고 안주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하신 이 말씀을 동일하게 우리에게 주십니다.
성도들이 이 말씀을 들을 때는 내가 혹시 영혼 구원에 대한 기쁨을 상실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같지는 않는가?
혹시 염소 새끼라도 잡아서 친구들과 먹고 마시고 노는 이 땅의 것에관심을 쏟고 있지는 않았는가?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구령에 대한 우리의 열정을 점검해 보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있습니다.
또한 아직 평안을 찾지 못한 구도자 분들에게는 내 문제를 어디서 해결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있으십니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뜻 모를 고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고난을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전에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를 책망하시지 않으십니다.
아직 먼발치에 있던 아들에게 먼저 달려가 며칠을 씻지도 못하고 옷을갈아입지도 못해서 구질구질한 아들에게 입 맞추신 것처럼, 아직도 흉악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온 영혼을 기쁨으로맞아 주십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간 둘째 아들이 빈곤의 문제 등을 해결하고 다시 풍족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처럼,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죄 문제를 해결 받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돌아갈 우리의 본향인 아버지 집에 두시길 원합니다.
이 땅의 것에 마음을 빼앗겨 정작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을 잃어버리는 실수가 없기를 원합니다.
큰 아들은 동생보다 재산에 더 많은 가치를 두고 동생이 받은 재산을모두 탕진 하여 아버지께 돌아올 자격이 없다 판단했습니다.
마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처럼, 하나님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내 의로 하나님의 의를 판단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아버지는 큰 아들과는 다르게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 오는 조건을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들아 살아 돌아오는 것이면 되었습니다.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아가는 길은 주님을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 뿐입니다.
주님을 영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됩니다.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일상조차도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 예배드리고 있다는 것은 정말 더 큰 은혜입니다.
그 만큼 영육 간에 건강하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후 이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알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추천찬양]
CCM : 주 은혜임을, 그 사랑, 소원(One thing), 전심으로(주님 손에 맡겨드리리), 여호와께 돌아가자
찬송가 :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
결단찬양: 은혜 / 오직 예수 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