重遊摩訶衍(중유마하연) - 다시 마하연에서 노닐며
靈聞登人口 영문등인구
신령 스러운 소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기를
山中第一基 산중제일기
산중의 제일가는 터전이라 하네
白峯含古色 백봉함고색
흰 봉우리는 옛빛을 머금고
赤木長新枝 적목장신지
적목에는 새로운 가지 자라났네
聽澗蘇兼恨 청간소겸한
계곡물 소리 들으니 한스러움이 되살아나고
看雲喜却悲 간운희각비
구름 바라보니 기쁨이 슬픔을 밀어내네
客懷神莫測 객회신막측
나그네 회포는 귀신도 헤아리지 못하니
唯佛只應知 유불지응지
오직 부처님만이 알아주시네
余志學之歲 隨師到此庵中剃梁 故 詩有隱而不現之語
서지학지세 수사도차암중체량 고 시유은이불현지어
내나이 열다섯에 스승을 따라 이 암자 안에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 그러므로 이 시 속에는 숨겨서 드러나지 않은 말들이 있다.)
摩訶衍(마하연) ; 대승(大乘) 크나큰 수, 또는 위대한 가르침이라는 뜻. 의상대사가 청건한 절.
靈聞(령문) ; 신령스러운 소문.
白峯(백봉) ; 산 봉우리가 희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맑고 깨끗한 대승경전을 이른다.
赤木(적목) ; 3,4연의 대(對)를 맞추느라 백봉과 적목을 썼다. 주목(朱木)을 지칭한 듯 하다. 주목이라 해도 작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제목부터가 일반 시와 향을 달리한다.
이 시는 마하연(摩訶衍)을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가 창건한 절이다. 내금강의 요지에 자리한 절로 해동제일이라고 불릴만큼 엄청난 규모였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신령한 소문이 알려질 정도로 훌륭한 수행터라고 적었다.
대사는 지학(志學-15세)에 마하연에서 출가하여 이 절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다시 돌아와 감회를 적었다고 보는 풀이다.
한 편으로 마하연을 대승의 뜻으로 풀고
그 풀이를 절 이름과 곁들여 상상의 날개를 펴고 살펴보자.
중유(重遊)라 하면 연거푸 노닐다 인데 한 번 더 라는 뜻이 강하다.
마하연(摩訶衍)은 한자씩 해서를 해서는 이해가 어렵다.
대승교(大乘敎)를 가리키는 말로, 이타(利他) 구제의 입장에서 널리 인간 자체의 평등과 성불을 이상으로 삼고, 그것이 불타의 가르침 가운제 참다운 대도(大道)임을 주장하는 교파를 지칭하기도 하고 산스크리트어 마하야나(mahā-yāna)를 한문으로 음사 하여 대승(大乘)이라 번역 하기도 한다. 대승(大乘)은 위대한 가르침이라고 간단하게 풀 수도 있다.
허응당 보우대사(虛應堂 普雨大師)가 대승불교를 공부했음은 이 시제에서 알 수 있다.
1970년대에 발생한 대승진리교와 혼돈은 금물이다. 어떻든 대승적 차원의 불교교리에 심취하여 공부 한 것을 또 그 진리의 향연에 젖어 든다는 의미의 시제다.
그러니 전개는 다분히 추상적 개념이 개입할 소지가 크다. 작가는 조선중기 한참 불교 탄압이 심하게 진행될 때 불교 진흥을 부르짖던 승려였으니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환영받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으므로 그의 명성은 빛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신령스러운 소문이라 하여 령(靈)을 놓았다. 그리고 인구(人口)즉 사람입을 빌어 회자되는 증명할 수 없는 이야기로 기구(起句)를 꾸몄다.
이어서 산중(山中)이라 하였는데, 지리산, 백두산의 산으로 보면 이해가 어려워진다.
여기서 산중 이라함은 승가(僧伽)즉 스님들 사이에서 공부하는 여러 가지 경전 가운데라고 이해하면 쉽다. 그래서 경전중에서 대승을 설한 경전이 제일이더라 가 된다.
3연의 백봉(白峯)도 하얀 산봉우리라고 쓰고 ‘뛰어난 경전’이라고 읽는다.
4연은 적목(赤木)보다 신지(新枝)가 중요하다. 적목은 대승을 설한 경을 의미하고
신지는 그러한 대승불교의 세세한 가르침이다.
스님의 한(恨)이 무엇이었을까? 덧글에 지학(志學)즉 열다섯에 머리를 깎았다 하였으니 “무슨 한이 그렇게 많으세요?”라고 묻지는 말자. 글 속에 다 나타내지 못하고 숨겨논 뜻이 있다 라며 사전(事前)에 양해를 구하고 있지 아니한가. 홀연히 구름은 왜 바라보나? 것 또한 물어 무삼 하리오. 구름뒤의 푸른하늘을 넘겨다 보고 있다. 희각비(喜却悲)는 구름이 걷히고 있음이다.
시인은 스스로 나그네라 한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가 인생길을 헤매는 나그네다. 나그네는 모두 저마다 회포가 있는 법, 그러니 귀신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마라. 오로지 부처님만이 나그네의 회포를 풀어줄 수 있느니라.
시로 쓴 법문인 셈이다. 공은 공이로되 허응당의 공은 한(恨)서린 공인가 보다. 그래서 권하노니, 마하연을 절 이름으로 엮어 대승불교 신봉자의 시심으로 들어가 보면 읽는 재미가 한 층 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