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뫼별곡(15)-솔뫼를 뒤집으려는 시도들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마태 10,25).
2002년에는 김대건 신부님의 탄생지를 솔뫼에서 용인으로 뒤집으려했다.
2011년에는 김대건 신부님의 신분을 양반에서 평민으로 뒤집으려 했다.
순례자가 몰리는 성지들에 김대건, 최양업, 정하상은 ‘약방의 감초’다.
그래서 유명세를 타는 순교자에 대해 자극적인 주장들도 출몰하곤 한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역사나 역사학이 아니라 신앙이다.
물론 신앙이나 신심은 인간 이성에 의해 허구에 빠지지 않도록 도움을 받아야 한다.
또한 이성에 기초한 신앙을 계시신앙보다 우선시하려는 이신론적 위험도 경계해야 한다.
순교자들에 대한 사료들은 빈약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다.
관변문서들도 박해자들의 기획수사에 따른 기록이거나 순교자들이 박해가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꾸며낸 증언을 기록한 것도 많다.
교회사료라고 하는 것들에도 순교 사실과 시공적으로 먼 이들의 착오나 과장된 구전을 기록한 것들이 많다.
하지만 국가기록이든 교회기록이든 그 오류를 짚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사실이나 진실에 대한 확실성보다는 기록한 이나 전하는 이의 권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단편적이고 소소한 예다.
“다블뤼 주교는 그곳에서 20리 되는 세거리 마을에 있던 위앵신부를 불러오게 하여, 셋이서 온 하루를 보냈다. ··· 다블뤼 주교는 그들이 모였던 거더리에 남았고, 오매트르 신부는 15리 떨어진 소덜로 갔으며, 위앵 신부는 세거리로 돌아갔다.”[1]
다블뤼 주교님과 두 신부님이 모인 장소는 거더리(嶋村)[2]다.
위앵 신부님이 사목하던 곳은 세거리[3]다.
오매트르 신부님이 다블뤼 주교님과 위앵 신부님을 만나고 은신한 곳은 소덜[4]이다.
거더리에서 세거리까지는 1.6km로 채 5리가 되지 않는다.
거더리에서 소덜(점원리)까지는 5.7km로 대략 15리가 된다.
그럼에도 다블뤼 주교님의 기록에 대부분 근거하여 저술된 <달레 교회사>는 거더리에서 세거리를 20리 떨어졌다고 전한다.
다블뤼 주교님 체포와 순교에 대한 기록은 안 주교님 본인이 기록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 순교자 기록물들에 위와 같은 오류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료들은 사실과 최대한 근접하는 근거지만 학자의 권위나 대중의 동조나 호기심에 힘입어 진실로 확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계시도 성서에만 의존하지 않고 성전과 교회에 의해 보완된다.
구원과 신앙의 역사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은사적이어야 한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하고, 사람의 성화와 구원에 이바지 해야 한다.
생체를 해부한 의학도가 “인간의 몸 안에는 영혼이 없더라.”며 갖는 과학적 신념처럼 과학적 방법론으로만 해부되는 구원과 신앙의 역사는 허구가 될 수 있다.
믿음도 확증성도 없는 교회 내의 뒤집는 주장들로 선한 영혼들은 영적 혼란에 빠지고 교회는 불신을 당하게 된다.
검증되지도 않고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예수님을 가짜로 몰아붙여서 누가 이득을 보았던가?
[1]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下권 p. 425.
[2] 거더리 : 당진시 합덕읍 신리 105-2(도촌). 손치호 니콜라오 집. 거더리공소회장 박기봉씨 집.
[3] 세거리 : 당진시 합덕읍 대합덕리 233-11(삼호), 현재 세거리공소강당 소재지
[4] 소덜 : 당진시 합덕읍 점원리(하궁원). 복자 김사집 프란치스코의 생거지 하궁원의 비방구지와 합덕읍 옥금리 덕산촌 일대 옛교우촌. ‘소덜’은 ‘소들’의 오기다. ‘소들강문’은 당진시 우강면에서 삽교천 하구까지 펼쳐지는 평야지대이다. 삽교천을 끼고 있는 이 지역을 범근내포(泛斤內浦)라 한다. 범근내포에는 크고 작은 포구들이 많이 있었다. 우강 지역의 대표적인 포구는 우평포(牛坪浦), 강문포(江門浦)였다. ‘소들’은 ‘우평’(牛坪)의 순우리말이고, ‘강문’은 강문포의 앞 두 글자다. 강문포는 당진시 면천면에서 발원하여 삽교천으로 흐르는 남원천과 천안과 아산을 거쳐 삽교천으로 흘러드는 곡교천이 합류하는 삽교천 입구에 있는 포구명이었다. 1966년에 개교한 당진시 합덕읍 서야중학교 교가 옛가사 첫소절 “새아침에 동이 튼다 서들광문에”도 나중에 ‘소들강문’으로 바로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