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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집(寒岡集) 정구(鄭逑)생년1543년(중종 38)몰년1620년(광해군 12)자도가(道可)호한강(寒岡), 사양병수(泗陽病叟)본관청주(淸州)시호문목(文穆)특기사항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
寒岡先生續集卷之一 / 詩 / 泛舟洛江。分韻萬頃蒼波欲暮天。得波字。
平生何事最爲多。今日船遊亦可歌。邂逅良朋仍共醉。斜陽倒影照平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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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집(寒洲集) 이진상(李震相)생년1818년(순조 18)몰년1886년(고종 23)자여뢰(汝雷)호한주(寒洲), 산교(汕嶠), 동교(東嶠), 정와(定窩),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 운도재(雲陶齋)본관성산(星山)특기사항장복추(張福樞), 이정상(李鼎相), 허훈(許薰) 등과 교유
寒洲先生文集卷之三十七 / 行狀 / 玉山先生李公行狀
李起春 | 1541 | 1597 | 星山 | 季郁 | 玉山 |
昔我文穆公鄭先生。以退陶嫡傳。倡道南州。並時從遊之士。得其一言爲輕重。嘗有詩曰東岡直誰似。季郁貞不磨。季郁玉山先生李公起春之字也。夫東岡大賢。乃對擬而稱誦之。其所存所造可知已。先生本貫星山。以高麗開國勳大匡司空諱能一爲鼻祖。四世而太保正臣生大卿堅守。又四世而贊成宇唐。再傳而典工判書益孫生禮儀判書培。禮判生少尹文廣。少尹生三子。長汝忠知仁州事。先生之祖。季汝良左正言吾祖也。仁州生士澄號松塢。入本朝官獻納。
始家高靈之館洞。生縣監諱克剛。是爲先生高祖。曾祖諱錫保進義副尉。祖諱蓊翰林。考諱彥泓。隱德不仕。先生生于嘉靖辛丑。資稟淸介。性度恬靜。自幼時絶不遊戲。潛心經典。不煩師受。深造而自得之。嘗讀論語。至漆雕開吾斯未信之對。曾點詠歸之撰。三復歎尙。及長不屑功令業。益究性理諸書。有契於主靜之旨。自守泊如也。鄭先生一見嗟異曰吾黨之雅澹無累。不失赤子心。惟季郁是耳。遂結道義交。徵隨講磨無虛日。嘗遊伽倻登奉夫臺。望玉山曰幅巾雍容。守所見樂所得。今日大觀。惜不相挽而共覩。及會于海印寺。談笑講說。喜氣可掬。翠嶽尖頭。白日方昇。執手而指點之。煖酒微醺。臨溪而睡。掬水以沃醒之。觀此錄可知其相與之篤也。又嘗與先生及金松庵沔,朴大庵惺,李晴暉承,李六一弘量,李茅齋弘宇。同舟泛洛。分韻賦詩。時人謂之洛江七賢。詩並載本邑誌。先生處約。簞瓢屢空。室無戚嗟之聲。門多講說之客。崔守愚永慶敬重之。來輒留止旬日。先生倣德公故事。引見夫人。夫人下堂迎拜。禮容嚴整。守愚出語人曰此友刑家有素。果如所聞。所居對玉山亭。亭獨立有似乎高士淸標。築精舍其中。集濂洛以來圖畫箴銘切要語。貼壁觀省。端居靜坐。不以外物經心。山底有盤石平鋪。可坐五六人。命曰釣臺。朋來則講討於其上。每當花紅樹錄之際。登臨山水。靜觀仁智之實體。嘯詠風月。發舒灑落之襟懷。嘗語人曰人之所爲。苟無愧於俯仰之間。平生志願畢矣。至於富貴貧賤。皆天所命。非人力可容。何足介意。宣廟初元。當路縉紳。有以遺逸薦先生者。先生聞而不樂曰與其弊弊乎名利。孰若自適于林泉。鄭仁弘竊時譽嚮用。問於先生曰從政當何先。先生婉辭答曰自治不暇。豈能達治人之道。且不在其位。不謀其事。鄭憮然而退。壬辰松庵金公奮義旅。住陣牛旨。要先生協力王事。先生嘗以白衣入其陣。見其部伍齊整有紀律。歎曰不圖志海之武略至是。非吾觚墨之手所可佐鞭。賦二絶詩以勉之。及其卒于陣。奔赴而相其殮。仍述輓語三章。蓋以居同井年同庚。志同道合。出處雖殊。氣義相許也。萬曆丁酉。先生卒于乃谷寓所。享年僅五十七。是時島夷再猘。權欑某所。越三年庚子。始葬于星州琴菴谷高方乾坐原。從先兆也。配晉陽河氏。世系生卒並無傳。墓祔右。夫人無育。側室男東尙生雲龍。後竟絶。先生之遺文賸跡。散佚殆盡。靡所徵信。本其敎誨之所及於家庭者。有可以觀其世。從兄子東禮號謹齋。逸薦除持平。再從孫見龍號竹圃。以大君師傅。進講宮筵。言修齊治平之道。循循有序。其弟菊圃文龍,梅圃澤龍。並有學行。人皆謂玉山心法有傳。文穆公之還自忠原。爲文祭墓曰山澤之癯。德義之腴。我眉不皺。人眼誰白。言其愛好之情也。學慕濂洛。年止橫渠。浩然全歸。無愧厥初。言其期許之義也。義則朋友。情則骨肉。如塤篪和。如鍾鼓樂。言其追隨之歡切偲之益也。又於祭大庵文。有玉山東岡信宿。皆古迹之語。大賢之稱許如此。亦足以千古也。且以諸賢敍述言之。河暮軒渾曰動不近名。行出血誠。樂善春溫。疾惡霜烈。圓不混俗。方不忤物。處貧甘飴。劬書嗜炙。又曰愷悌其質。眞實其學。一生顔樂。千古夷淸。朴鶴巖廷璠曰溫淳之性。端雅之姿。恬靜寡欲。淡然無爲。識見疏明。論議平正。志操淸著。和而不流。二君子皆先生莫逆之交。而摸寫出眞心實際。決非阿好之言也。顯廟丙午。鄕道章甫及館學儒生。一辭言先生學問德義。可以儀表百世。遂建祠於本縣衙後。與松庵金先生一廟雙侑曰道巖書院。後己酉移建于縣西之七洞。憲廟戊戌重修。我仲父定憲公記其事。先生詩編之附載於世稿者。僅出於佗家之所錄傳。而旁裔之所裒輯。無異於零金片羽。然其皭然之光瀏然之氣。猶可以想像風標者。立齋鄭先生宗魯序家乘而贊之曰斂迹丘園。專心學業。夫以倻弘之全盛。而先見其終之必敗。有若守愚之少可而盛稱家法之甚美。遺芬餘馥。不待更說而自明。此眞百世之確論也。嗚乎。使先生遭遇淸平之世。展布經濟之蘊。則黼黻笙鏞。何適不宜。而世値艱虞。畢命巖穴。使先生而永其年壽。卒究遠大之業。則爐韛後生。標幟斯文。何遽不若。而壽止中身。莫繼瑤琴之韻。使先生而昌其後嗣。收拾咳唾之餘。闡揮幽潛之光。則亦足以垂家範而扶世敎。惜乎。薪火無傳。影響寢泯。此固吾黨之士不能無憾於天。而欲求先生之道者。但考諸先生推重之語而足矣。亦何必多乎哉。族從斗勳輯行錄來請狀。其言鑿鑿有據。余於景慕之餘。謹受而撰次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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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집(響山集) 이만도(李晩燾)생년1842년(헌종 8)몰년1910년(순종 4)자관필(觀必)호향산(響山), 직재(直齋), 모암(某巖)본관진성(眞城)특기사항권승하(權承夏), 권연하(權璉夏)의 문인. 김흥락(金興洛), 유필영(柳必永), 유기호(柳基鎬), 곽종석(郭鍾錫) 등과 교유
響山文集別集卷之四 / 碑 / 晴暉堂李先生墓碑銘 幷序
李承 | 1552 | 1598 | 全州 | 善述 | 晴暉堂 |
晴暉堂李先生之歿也。梧里李文忠公哭其櫬曰道學則千載眞儒。忠孝則百世標準。寒岡鄭先生誌其墓曰稟之醇而德之厚。質之魯而學之力。又酹之曰早歲志學。求道親仁。晩益自力。期以古人。惟此足以不朽先生。然世愈邈而俗愈渝。顯詩之作。亦不容已者。而後生小子。豈敢容喙於大先生定評之下。遜辭者久。責之甚勤。謹按先生諱承字善述。系出璿源。太宗次子孝寧大君六世孫。孝寧生寀誼城君。誼城生怟西林都正。西林生貞孫森溪副正。森溪生二子。長曰咸興判官涑。次曰司評涿。判官生贈戶曹參議希雲。娶洪州李氏,南陽洪氏,星州李氏皆無子。司評生禦侮將軍思雲。娶延日鄭氏生先生。未晬入嗣于宗。四五歲丁兩庭內憂。號哭不離殯側。人異之。八歲始受學。究索文義。藻思日就。參議公患手疔。吮之得效。及丁憂居廬墓下。有強盜露刃劫禦侮公。先生以身蔽而請代。盜兩釋之。弱冠從高杜谷先生謁陶山。質大學疑義。又拜南冥先生于山海亭。自此棄擧業。專心古人之學。與寒岡及東岡金先生隔岑而居。恩若兄弟。寒岡常以畏友稱之。自以姿稟之魯。常加勉勵。尤致力於朱子書。未嘗釋手。以爲終身服行之資也。所居新塘。臨溪築亭。扁以晴暉。又於伽川上流立立巖精舍。每約兩岡及遠近諸賢。或講討經旨。或吟弄風月。西厓柳先生高其行。薦擬繕工郞。壬辰難。與金松庵先生倡起義旅。擊破知禮,金山,茂溪等賊。事詳松庵事畧及鶴峯金先生褒啓。俄丁李氏憂。寢苫而不忘枕戈之義。乃傾家財。辦粟米造弓矢。輸納於龍起山城。丁酉賊再猘。牧使李守一,兵使鄭起龍藉以爲用。梧里時以體察使。以忠孝啓聞。而先生遽歿于淸州寓舍。卽萬曆二十六年戊戌三月二十九日。得年四十七。臨歿謂諸子曰吾倡義從戎。未雪國耻。是可恨。無一言及家事。翌春還葬于新塘粉土谷先兆下南向原。先生風儀英秀。器局峻整。端靜沈重。不形喜怒。平居未明而起。深衣大帶。拜家廟省母夫人。正襟危坐。講讀不輟。戰兢自持。尤嚴於幽獨得肆之地。嘗恨吾東禮敎襲謬。倣文公家禮。纂抄四禮之要。行于家。常訓子弟以忠孝和忍四字。又曰汝輩行一善行言一善事。雖羹藜含糗。足於爲養。苟或反是。雖用三牲。於吾何有哉。肅宗己巳。多士䟽請。贈通訓大夫掌苑署別提。
甲戌奉享新溪書院。平日著述。盡入兵燹。惟
洛江七賢分韻詩在焉。
配固城李氏。左議政容軒原六世孫同副承旨景明之女。後先生十三年庚戌三月四日歿。祔葬左旁。生四男一女。男堉,埱,壆,坰俱遊寒岡門。追享新溪。女適東萊鄭錘。孫十人惟銓,爾銓,益銓,命銓,邦銓,國銓,廷銓,時銓,世銓,東銓。外孫四人天澍,天沃,天濡,時潤。曾孫十七人。淶,潯,沐,濋,澤,潪,溍,㵑,𣻢,浚,浯,澄,浤,洛,沆,浣,㶅。餘不錄。來請銘者十世孫漢儀,晩儀也。銘曰。
講朱質陶。學之正也。刮磨淵上。友而敬也。遯世志而敵愾忠。是宜梧老之表章而後學之師宗也。有卓其巖。有淵其塘。想像道德。百世之光。
향산집 별집 제4권 / 비(碑) / 청휘당 이 선생 묘비명 병서〔晴暉堂李先生墓碑銘 幷序〕
청휘당(晴暉堂) 이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오리(梧里) 이 문충공(李文忠公)이 널 앞에서 곡하며 “도학은 천년의 진유요, 충효는 백세의 표준이다.〔道學則千載眞儒 忠孝則百世標準〕”라고 하였으며, 한강(寒岡) 정 선생이 묘지명에서 “천품은 순수하고 덕은 돈후하며, 자질은 둔하고 학문은 노력하여 이루었네.〔禀之醇而德之厚 質之魯而學之力〕”라고 하고, 또 묘 앞에 올린 제문에서 “어릴 적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도를 구해 어진 사람 가까이했네. 늘그막엔 더더욱 스스로 노력하여, 고인처럼 되고자 기약하였네.〔早歲志學 求道親仁 晩益自力 期以古人〕”라고 하였다.
이것만으로도 선생을 영원히 기리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세대가 멀어질수록 풍속이 투박해지니, 명사(銘辭)를 짓는 것을 그만둘 수가 없다. 하지만 후생인 소자가 어찌 감히 대선생들의 정평(定評) 아래에서 입을 뗄 수 있겠는가. 하여 사양한 지 오래되었으나 너무나 열성으로 부탁하기에 이 글을 쓴다.
삼가 살펴보건대 선생의 휘는 승(承)이고, 자는 선술(善述)이다. 가계는 선원(璿源)에서 나왔으니, 태종(太宗)의 차자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6세손이다. 효령대군이 의성군(誼城君) 이심(李宷)을 낳고, 의성군이 서림도정(西林都正) 이기(李怟)를 낳고, 서림도정이 삼계부정(森溪副正) 이정손(李貞孫)을 낳았다. 삼계부정이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함흥 판관(咸興判官) 이속(李洓)이고, 둘째는 사평(司評) 이탁(李涿)이다. 판관이 증(贈) 호조 참의(戶曹參議) 이희운(李希雲)을 낳았고, 이희운이 홍주 이씨(洪州李氏)ㆍ남양 홍씨(南陽洪氏)ㆍ성주 이씨(星州李氏)에게 장가들었으나 모두 자식이 없었다. 사평 이탁이 어모장군(禦侮將軍) 이사운(李思雲)을 낳았고, 이사운이 연일 정씨(延日鄭氏)에게 장가들어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돌이 되기 전에 종가에 후사로 입양되었다. 4, 5세에 본생모와 모부인 두 분의 상을 당하였는데, 곡을 하며 빈소에서 떠나지 않으니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8세에 수학하기 시작하여 문의(文義)를 탐색하자 문사가 날로 진보하였다. 참의공이 생손을 앓았는데, 입으로 빨아내니 즉시 효험이 있었다. 참의공의 상을 당해서는 묘소 아래에서 살았다. 강도가 들어 칼로 생부 어모공을 위협하였을 때 선생이 몸으로 막아서며 자신을 대신 베라고 청하니, 강도가 두 사람을 모두 풀어 주었다.
약관의 나이에 두곡(杜谷) 고 선생(高先生)을 따라 도산에 와서 퇴계 선생을 뵙고 《대학(大學)》의 의심나는 의리를 여쭈었다. 또 산해정(山海亭)에서 남명 선생을 뵈었다. 이로부터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고인의 학문에 마음을 오롯이 쏟았다. 한강(寒岡) 및 동강(東岡) 김 선생과 산을 사이에 두고 살며 마치 형제처럼 가깝게 지냈고, 한강을 늘 외우(畏友)로 일컬었다. 스스로 타고난 자질이 둔하다고 여겨 늘 노력하였으며, 그중에서도 주자서(朱子書)에 더욱 힘을 쏟아 손에서 놓지 않고 종신토록 실천하는 바탕으로 삼았다.
신당(新塘)에 살며 개울 앞에 정자를 짓고 청휘당(晴暉堂)이라고 편액을 걸었다. 또 가천(伽川) 상류에 입암정사(立巖精舍)를 세우고, 매양 한강과 동강 및 원근의 제현들과 만나 경서의 뜻을 강구하고 토론하거나 풍월을 시에 담아 읊조렸다. 서애(西厓) 유 선생(柳先生)이 그의 조행을 높이 사 선공감 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천거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송암(金松庵) 선생과 의병을 일으켜 지례(知禮), 금산(金山), 무계(茂溪) 등의 왜적을 격파하였다. 상세한 전말은 《송암사략(松庵事畧)》 및 학봉(鶴峯) 김 선생(金先生)이 올린 포계(褒啓)에 실려 있다. 얼마 뒤 모부인 홍주 이씨의 상을 당하였는데, 거적자리를 깔고 거상을 하면서도 왜적을 물리치는 의리를 잊지 않았다. 이에 가산을 정리하여 군량미를 마련하고 활과 화살을 만들어 용기산성(龍起山城)에 보내었다.
정유재란이 발생하였을 때 목사 이수일(李守一)과 병사 정기룡(鄭起龍)이 이 군량미와 무기를 의지하여 이용하였다. 오리 이원익이 당시 체찰사(體察使)로서 선생의 충효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청주(淸州)의 우사(寓舍)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만력 26년 무술(1598, 선조31) 3월 29일이었다. 향년 47세였다.
임종에 여러 자제들에게 “내가 의병을 일으켜 전쟁에 참여하였으나 나라의 수치를 갚지 못했으니 이것이 한이다.” 하고 집안일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이듬해 봄 신당 분토곡(粉土谷) 선영 아래 남향 등성이에 반장(返葬)하였다.
선생은 풍도가 영특하고 빼어났으며 기국이 우뚝하고 반듯하였다. 단정하고 침착하여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평소 생활은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심의(深衣)와 대대(大帶)를 갖추고 가묘에 배알하고 모부인에게 문안을 올렸다. 의관을 정제하고 꼿꼿이 앉아 쉬지 않고 강독하였다. 삼가고 조심스레 스스로를 지켰으며, 홀로 있는 곳에서는 신독(愼獨)의 태도를 더욱 엄격히 하였다.
일찍이 조선의 예교가 잘못 답습되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주자의 《가례(家禮)》를 기준하여 사례(四禮)의 주요 절목(節目)을 발췌해 묶어 가정에서 행하였으며, 늘 자제들에게 ‘충효화인(忠孝和忍)’ 네 글자를 가르쳤다. 또 “너희들이 한 가지 착한 행실을 실천하고, 한 가지 착한 일을 말한다면 설령 나물국과 거친 밥을 먹는다 하더라도 나를 잘 봉양하는 것이 되겠지만, 만약 이와 반대로 한다면 날마다 진수성찬을 차려 낸들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숙종 기사년(1689, 숙종15)에 고을의 선비들이 상소를 올려 청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에 추증되었다. 갑술년(1694) 신계서원(新溪書院)에 봉향하였다. 평소 지었던 글은 모두 병화에 타 버리고 오직 낙강칠현(洛江七賢)과 운을 나누어 읊은 시만 남았다.
배위는 고성 이씨(固城李氏)이니 좌의정 용헌(容軒) 이원(李原)의 6세손인 동부승지 이경명(李景明)의 따님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13년 뒤 경술년(1610, 광해군2) 3월 4일에 눈을 감았다. 왼쪽 옆에 부장하였다.
4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이육(李堉), 이숙(李埱), 이학(李壆), 이경(李坰)이다. 모두 한강의 문인이고, 신계서원에 추향(追享)되었다. 딸은 동래(東萊) 정추(鄭錘)에게 출가하였다. 손자가 10명이니, 이유전(李惟銓), 이이전(李爾銓), 이익전(李益銓), 이명전(李命銓), 이방전(李邦銓), 이국전(李國銓), 이정전(李廷銓), 이시전(李時銓), 이세전(李世銓), 이동전(李東銓)이다. 외손이 4명이니, 정천주(鄭天澍), 정천옥(鄭天沃), 정천유(鄭天濡), 정시윤(鄭時潤)이다. 증손이 17명이니, 이래(李淶), 이심(李潯), 이목(李沐), 이초(李濋), 이택(李澤), 이지(李潪), 이진(李溍), 이하(李㵑), 이용(李𣻢), 이준(李浚), 이오(李浯), 이징(李澄), 이굉(李浤), 이락(李洛), 이항(李沆), 이완(李浣), 이학(學㶅)이다. 그 외는 생략한다.
나에게 묘비명을 청한 자는 10세손 이한의(李漢儀)와 이만의(李晩儀)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주자서를 강학하고 퇴계에게 질의함은 / 講朱質陶
학문의 바름일세 / 學之正也
한강과 학문 강마할 때엔 / 刮磨淵上
벗으로 사귀면서 공경하였네 / 友而敬也
향리에 은둔한 것은 뜻이었고 / 遯世志
의병 일으킨 것은 충정이었네 / 而敵愾忠
오리(梧里)가 표창하고 / 是宜梧老之表章
후학이 종사로 받듦이 마땅하네 / 而後學之師宗也
우뚝한 입암(立巖)과 / 有卓其巖
깊은 신당(新塘)에서 / 有淵其塘
선생의 도덕 상상해 보니 / 想像道德
백세토록 빛나리로다 / 百世之光
[주-D001] 청휘당(晴暉堂) 이 선생 : 이승(李承, 1552~1598)으로, 청휘당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전주, 자는 선술(善述)이고, 효령대군(孝寧大君)의 6세손이다. 퇴계와 남명 양문(兩門)을 모두 출입하였으며, 한강 정구, 동강 김우옹 등과 교유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선공랑(繕工郞)이 되었으며 임진왜란에는 김면(金沔)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지례(知禮), 김천(金泉), 무계(茂溪) 등지에서 적을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또 재산을 털어 곡식을 모아 군량으로 제공하고 무기를 제조하여 군비 물자를 도와주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정유재란으로 경상도 지역이 왜적의 소굴이 될 상황에 놓이자 가족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피난 가던 중, 1598년(선조31) 3월에 청주(淸州)에서 46세로 병사하였다. 묘소는 성주군 소건리(所件里) 신당(新塘)에 있다. 성주(星州)의 신계서원(新溪書院)에 봉향(奉享)되었다. 《청휘당선생실기》가 남아 있다. 《寒岡集 卷13 李晴暉墓誌銘》[주-D002] 오리(梧里) …… 하였으며 : 오리는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이다. 이 글은 이원익이 지은 칠언의 만사인데, 《오리집(梧里集)》에는 실려 있지 않다.[주-D003] 한강(寒岡) …… 하고 : 이 구절은 《한강집》 권13에 실린 〈이청휘묘지명(李晴暉墓誌銘)〉의 명사(銘辭) 도입부 두 구이다.[주-D004] 제문에서 …… 하였다 : 이 구절은 《한강집》 권12에 실린 〈이청휘 묘소에 올리는 제문[祭李晴暉承墓文]〉의 일부분이다.[주-D005] 4, 5세에 …… 당하였는데 : 4세에 본생모 연일 정씨를, 5세에 모부인 남양 홍씨를 여의었다. 《晴暉堂實記 年譜》[주-D006] 두곡(杜谷) 고 선생(高先生) : 조선 중기 영남의 학자 고응척(高應陟, 1531~1605)으로, 두곡은 호이다. 자는 숙명(叔明), 또 다른 호는 취병(翠屛)이고, 부친은 고몽담(高夢聃)이다. 김범(金範)의 문인이다. 저서에 《두곡집》과 《대학개정장(大學改正章)》이 있다.[주-D007] 김송암(金松庵) 선생 : 고령의 의병장 김면(金沔, 1541~1593)으로, 송암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고령, 자는 지해(志海)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조종도(趙宗道) 등과 함께 거창, 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금산과 개령 사이에 주둔한 적병 10만과 우지(牛旨)에서 대치하다가 지례(知禮)에서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적의 선봉을 역습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어, 이 공으로 합천 군수가 되었다. 또 무계(茂溪)에서도 승리를 거두어 11월에 의병대장의 호를 받았다. 저서에 《송암실기(松庵實記)》가 있다.[주-D008] 선생이 …… 말았으니 : 당시 왜적이 다시 창궐하여 남쪽 지방이 적의 소굴이 됨을 면치 못할 상황에 처하자, 이승(李承)은 깊이 고려한 끝에 고향을 떠나 북쪽으로 넘어갈 생각으로 가족을 이끌고 길을 떠났다. 그러나 지병이 재발하여 객지에서 제대로 약물을 쓰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못한 나머지 1598년(선조31) 3월 29일 청주(淸州)의 임시로 머물던 집에서 죽었다.[주-D009]
낙강칠현(洛江七賢) : 이승을 비롯하여 고령의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 모재(茅齋) 이홍우(李弘宇), 송암(松庵) 김면(金沔), 옥산(玉山) 이기춘(李起春), 성주의 한강(寒岡) 정구(鄭逑), 현풍의 대암(大庵) 박성(朴惺)이다.
[주-D010] 이원(李原) : 1368~1429. 본관은 고성, 자는 차산(次山), 호는 용헌(容軒)이다.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와 병조의 낭관을 역임하다가, 조선조에 들어와 사헌부에서 활약하였다. 1419년(세종1)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뒤에 좌의정에 올랐다. 정몽주와 권근의 제자이다. 저서에 《용헌집》이 있다.[주-D011] 이경명(李景明) : 1517~? 자는 여회(如晦), 호는 모헌(慕軒)이다. 경북 성주에 살았으며, 청백리로 이름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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泛舟洛江 晦川集
송순익(宋順翼) : 송홍래(宋鴻來, 1876~1948)를 말한다. 자는 순익(順翼), 호는 회천(晦川), 본관은 야성(冶城)이다.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문덕리 소래마을에서 태어났다.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1837~1902)의 문인이다. 1919년 삼일운동 때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ㆍ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1851~1929)ㆍ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 1869~1944)과 더불어 연서 동참하여 대구감옥에 6개월간 복역하고 2년 집행유예로 출옥하였다. 저서로는 《회천집》이 있다.[주-D002] 옛날 …… 기억하니 : 이와 관련된 사실은《회천집》 권1에 〈조심재 중근 긍섭ㆍ이성종ㆍ문장지와 사문진을 건너며〔與曺深齋仲謹 兢燮 李聖宗 文章之 渡沙門津〕〉와 〈조중근ㆍ이성종 등 여러 벗들과 낙동강에 배를 띄워, 낙엽초비포로 운자를 나누었는데, 초 자를 얻었다〔與曺仲謹 李聖宗諸友 泛舟洛江 以落葉初飛浦分韻 得初字〕〉는 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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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재집(樂齋集) 서사원(徐思遠)생년1550년(명종 5)몰년1615년(광해군 7)자행보(行甫)호낙재(樂齋), 미락재(彌樂齋), 만오당(晩悟堂), 고시자(顧諟子)본관달성(達城)특기사항정구(鄭逑)의 문인. 장현광(張顯光), 손처눌(孫處訥) 등과 교유
樂齋先生文集卷之一 / 詩
辛丑暮春。與諸賢船遊琴湖。分韻得出字。朱子漁艇詩。出載長烟重。歸粧片月輕。千巖猿鶴友。愁絶棹歌聲。
선조 | 34 | 1601 | 신축 | 萬曆 | 29 | 52 | 1월, 玉果 縣監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2월, 伊川의 仙査에 강당을 짓다. |
春殘恨不堪。滿載烟霞出。心人自東南。雲霧欣初豁。伊洛始沿泝。源泉期濬發。麗日爲明媚。光風振林樾。搖搖入銀漢。直抵探月窟。淸風生兩腋。醉挾飛仙忽。
收拾春光盡。滿却孤舟載。乾坤百戰餘。山河無恙在。沿洄擊空明。連天流浼浼。飄飄任所之。萬頃凌滄海。儒仙去不返。景物如我待。三盃豪氣發。宇宙皆度內。呂聖遇
追思昨日遊。事過意何長。長幼數十人。一船爲醉鄕。隨風縱所如。去去迷其方。悠悠箇中樂。豈但在詠觴。暮投江上村。梨花來遠香。曉起囑諸勝。玆遊永不忘。張德晦
淸流涵麗景。遠峀生雲烟。柔櫓擊空明。滿船俱英賢。搖搖棹復棹。點點山連山。雲影凈如掃。天光凝碧漣。撑蒿驗用力。俯仰知淵天。豪思若雲湧。此身挾飛仙。李景發
長風輕帆遠。直向桃源洞。滿載烟霞趣。扁舟知幾重。李士彬
春江生夜雨。桂楫問何歸。粉壁危松倒。古亭芳草菲。滿船仙客輩。應懷德星輝。宋仲裕
我家在洛上。歸舟幾日粧。波濤何杳茫。津涯難可量。今來泛此湖。山高水自洋。度內鳶魚理。無邊楊柳光。少者眞易解。溪山勝滄浪。無寧人不識。何不學海長。張正甫
紅花落紛紛。白鳥飛片片。東湖春欲暮。放舟因風便。新酒樽中滿。知心蓬底遍。鼓枻浮江去。淸風來水面。鄭君爕
日暮輕櫓疾。疑聞楚峽猿。巖花紅綺爛。汀柳綠袍翻。追陪作高會。綢繆情更敦。何幸干戈後。重傾酒一罇。閒分白鳥雙。心逐孤雲奔。收將不盡意。更泝伊洛源。都廷彦
芳洲風景好。白鳥方鶴鶴。桃花逐水紅。楊柳緣江綠。道人樂鳶魚。小子懼茅塞。從容陪談話。醉酒又飽德。高會是萍逢。後面何由續。江風吹西日。瀟灑興不俗。鄭平甫
光風三月暮。邂逅東南友。滿載一葉船。繫馬巖邊柳。唱和百編詩。自酌一罇酒。先生樂有餘。小子分左右。濯足淸江上。何羡羊裘叟。只恨分袂去。何處追先後。都諧仲
孤舟放夕風。忘却人間多少愁。憑虛浩浩然。任隨波邊閒白鷗。水綠欵乃聲。風輕楊柳洲。仙査初解纜。晩向浮江浮。中分二水間。坐客皆仙流。何處見天心。潑擲銀鱗遊。紅花杳然去。桃源此耶不。聚散水東流。後會期以秋。徐精甫
江洲春欲暮。江山皆勝絶。道義四五賓。佳辰二三月。同舟下中流。欵乃歌數闋。帆急千山遠。棹搖萬頃濶。淸風左右至。香煙起欲滅。風光無限好。只恨明朝別。李而沃
暮烟起春江。空明擊孤棹。舟中滿神仙。晩山春已老。水面花亂落。眼前風景好。淸風左右至。孤帆歸晩浦。借問今日會。興味知多少。朴汝順
有朋自遠方。泛泛聞棹歌。靑靑楊柳色。灼灼桃李花。杳然雙白鷗。蒼茫千頃波。膾細翻霜鍔。紅肌散綺羅。飛觴亂無廵。不覺朱顔酡。中流任所如。疑是神仙耶。金汝謹
[주-D001] 欵 : 欸[주-D002] 欵 : 欸
첫댓글 낙재집(樂齋集)
樂齋先生文集卷之一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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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丑暮春。與諸賢船遊琴湖。分韻得出字。朱子漁艇詩。出載長烟重。歸粧片月輕。千巖猿鶴友。愁絶棹歌聲。 b007_022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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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殘恨不堪。滿載烟霞出。心人自東南。雲霧欣初豁。伊洛始沿泝。源泉期濬發。麗日爲明媚。光風振林樾。搖搖入銀漢。直抵探月窟。淸風生兩腋。醉挾飛仙忽。
收拾春光盡。滿却孤舟載。乾坤百戰餘。山河無恙在。沿洄擊空明。連天流浼浼。飄飄任所之。萬頃凌滄海。儒仙去不返。景物如我待。三盃豪氣發。宇宙皆度內。呂聖遇
追思昨日遊。事過意何長。長幼數十人。一船爲醉鄕。隨風縱所如。去去迷其方。悠悠箇中樂。豈但在詠觴。暮投江上村。梨花來遠香。曉起囑諸勝。玆遊永不忘。張德晦
淸流涵麗景。遠峀生雲烟。柔櫓擊空明。滿船俱英賢。搖搖棹復棹。點點山連山。雲影凈如掃。天光凝碧漣。撑蒿驗用力。俯仰知淵天。豪思若雲湧。此身挾飛仙。李景發
長風輕帆遠。直向桃源洞。滿載烟霞趣。扁舟知幾重。李士彬
春江生夜雨。桂楫問何歸。粉壁危松倒。古亭芳草菲。滿船仙客輩。應懷德星輝。宋仲裕
我家在洛上。歸舟幾日粧。波濤何杳茫。津涯難可量。今來泛此湖。山高水自洋。度內鳶魚理。無邊楊柳光。少者眞易解。溪山勝滄浪。無寧人不識。何不學海長。張正甫
紅花落紛紛。白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