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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지역 천주교 전파와 순교자의 탄생
1) 천주교의 홍주 전파 시기
지금의 홍성(洪城) 지역, 즉 이전의 홍주(洪州)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면,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1784년 말에서 1785년 초에는 예산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 거주하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에 의해 ‘내포(內浦) 신앙 공동체’가 설립되었고, 이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홍주 지역에도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홍주 출신의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은 일찍이 서울의 지황(池璜, 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신앙 생활을 하였고, 홍주 응정리에 살던 원시보(야고보)․원시장(베드로) 사촌 형제는 1788~1789년 무렵에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또 홍주의 이여삼(바오로) 형제는 1790년에 천주교 교리를 배웠으며, 홍주 출신의 황일광(黃日光, 시몬 혹은 알렉시오)은 1798년 홍산에 살던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리고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이전에 청양 태생의 이도기(李道起, 바오로)는 홍주의 이세채(李世采)에게, 내포의 회장 정산필(鄭山弼, 베드로)은 홍주의 김일찬(金日贊)에게, 청양의 김복성(金卜星), 정약용의 기록에 나오는 金福成인 듯)은 홍주의 최맛재(崔唜才)와 이취번(李取蕃) 등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하였다.
2) 초기 박해와 홍주 순교자
홍주 지역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자가 체포된 것은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 때였다.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순교자, 즉 조정의 정식 박해로 참수를 당한 순교자를 탄생시킨 이 신해박해로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 출신인 윤지충(尹持忠, 바오로)과 권상연(權尙然, 야고보)이 전주에서 순교한 뒤, 각처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이때 면천군에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된 것 같다. 그러자 홍주 출신의 박취득(라우렌시오)은 면천으로 가서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을 위로하고, 군수에게 “무고한 백성들을 가혹하게 매질하고 여러 달 째 옥에 붙들어 두니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항의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그는 체포되어 매를 맞은 뒤, 해미를 거쳐 홍주로 압송되었다. 홍주에서도 그는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나 한 달 며칠 후 조정의 명에 따라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가 석방된 이유는 알 수 없다.
또 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배울’인 듯)에 있던 이여삼(바오로)의 집안도 박해를 당하였다. 당시 이여삼과 9세 된 조카 이태권(李太權, 베드로, 일명 ‘승화’) 등이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는데, 그 후 이여삼과 맏형 이무명(이태권의 부친)은 전라도로, 또 다른 숙부(이여삼의 둘째 형)는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 집안 사람들은 1790년에 천주교를 받아들여 신앙 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한편 내포 출신으로 덕산에 거주하던 강완숙(姜完淑, 골룸바)이 1791년의 박해 때 옥에 갇힌 신자들을 돌보다가 체포되어 홍주로 끌려갔다는 기록도 있으나, 당시 강완숙이 끌려간 곳은 홍주가 아니라 공주(公州)였음이 분명하다.
홍주에서 첫 순교자가 탄생하게 된 것도 바로 신해박해 때였다. 홍주 윽전이(즉 응정리) 태생인 원시장(베드로)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사촌형인 원시보(야고보)와 함께 일찍이 천주교를 받아들여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을 알고 있던 홍주 목사가 1792년에 포졸들을 보내 원시보를 체포해 오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원시보는 피신하고 대신 원시장이 체포되어 홍주로 압송되었다. 이후 원시장은 홍주 관원들 앞에서 문초를 받은 후, 다시 목사 앞으로 끌려가 주뢰형과 치도곤 70대를 맞고 투옥되었다. 그런 다음 영장 앞에서 세 번째로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여전히 신앙을 굽히지 않자, 목사는 옥에서 얼려 죽이도록 명하였고, 이에 따라 원시장은 임자년(1792년) 12월 17일(양력 1793년 1월 28일) 6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홍주 지역에서는 1794년에도 박해가 발생하여 이곳 출신인 박경화(바오로)가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일이 있었다. 그리고 1797년에 시작되어 1798~1799년(戊午․己未)에 가장 심했던 충청도의 정사박해(丁巳迫害) 때 다시 홍주 순교자가 탄생하게 된다.
정사박해는 충청 감사 한용화(韓用和, 1797년 윤6월~1798년 7월 재임)가 일으킨 박해였으나, 1795년 이후 조정에서 비밀리에 추진해 온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의 체포 활동과도 일정한 연관이 있었다. 실제로 정조는 충청 감사와 병사 정충달(鄭忠達)로 하여금 주문모 신부를 수색하면서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밀고자 조화진(趙和鎭)이 왕의 밀지를 가지고 천주교 신자를 가칭하고 다니면서 충청도 일대를 염탐하였다. 1799년 청주에서 순교한 당진의 배관겸(프란치스코)은 바로 조화진이 밀고한 신자였다.
정사박해 때, 홍주에서는 가장 먼저 방(方) 프란치스코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면천의 여름이(ie reumi, 현 충남 당진군 면천면 대티리) 마을 출신으로, 감사의 비장(裨將)이었다. 그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내포의 회장 정산필(베드로), 앞에서 말한 원시보(야고보)와 박취득(라우렌시오) 등과 함께 교리를 실천하면서 순교의 원의를 다지게 된다. 그러다가 1798년 홍주에서 체포되어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받은 뒤 1798년 12월 16일(양력 1799년 1월 21일) 홍주 옥에서 교수형(혹은 장사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와 함께 두 명의 다른 신자가 순교하였다고 하지만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음으로 프란치스코의 동료이자 1791년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적이 있는 박취득(라우렌시오)이 다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1797년에 그는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일시 몸을 피하였으나, 그 대신 아들이 체포되자 1798년 8월 19일 숨어있던 곳에서 나와 홍주 관아에 자수하였다. 이후 그는 16~17차례에 걸쳐 온갖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교회 기록에 따르면, 1천 4백 대 이상 매질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숨은 좀처럼 끊어지지 않았고, 형벌을 받은 후에는 기적적으로 상처가 나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결국 1799년 2월 29일(양력 4월 3일) 약 30세의 나이로 홍주 옥중에서 옥리에 의해 목이 졸려 순교하고 말았다.
세 번째로 홍주 순교자가 탄생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였다. 이 박해로 홍주에서 입교하여 경기도로 이주해 살던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고, 예산 출신의 홍낙민(洪樂敏, 루가), 내포 출신의 여회장 강완숙(골룸바)과 홍필주(洪弼周, 필립보) 모녀 등이 서울에서 참수를 당했으며,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과 김정득(金丁得, 베드로)이 예산과 대흥에서, 이국승(李國昇, 바오로)이 공주에서 각각 순교하였다. 그리고 덕산․면천․보령․청양․공주 등지에서 체포된 많은 신자들이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이때 홍주에서 유배형을 받은 신자들은 앞의 1-⑦에서 언급한 최맛재․이세채․이취번․김두천․김일찬․김만기, 이점손․이태문 부자와 함께 김행득(金行得)․박성화(朴成和)․홍덕용(洪德用)․유공이(劉公伊) 등 12명이었다.
그 와중에서 1801년 말(양력 1802년 초)에는 홍주에서 한두 명의 순교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 중의 한 신자는 천민 출신으로 입교하여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한 황일광(시몬)이다. 황일광은 홍주의 백정 출신으로 1798년 무렵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이후 좀더 자유롭게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아우 황차돌(黃次乭)과 함께 경상도로 이주하였다가 1800년 초에는 경기도 양근의 분원(分院, 현 광주)에 살던 명도회장(明道會長)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의 집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리고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11월 12일 형조로 이송되어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죽음을 당할지라도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굳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런 다음 12월 26일 해읍정법(該邑正法, 죄인의 고향이나 거주지로 내려보내 참수함으로써 그 지방 백성들에게 경각심으로 주도록 하는 판결)의 명에 따라 홍주로 이송되어 1801년 12월 27일(양력 1802년 1월 30일) 45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았다.
황일광의 동료로는 제천 배론(舟論, 현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의 옹기점 주인으로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을 숨겨준 김귀동(金貴同)이 있다. 그가 열심한 신자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세례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김귀동은 본래 홍주(혹은 전라도 고산이나 충청도 청양)출신으로 일찍이 배론으로 이거하여 옹기점을 운영하면서 살다가 신유박해 때 황사영이 그곳으로 피신해 오자 그를 숨겨주고 <백서>(帛書)를 작성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다가 황사영 일행과 함께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고 굳게 신앙을 증거한 뒤 해읍정법의 명에 따라 홍주(혹은 고산․청양)로 이송되어 1801년 12월 27일(양력 1802년 1월 30일) 순교하였다.
이 밖에도 신유박해 때는 덕산 줄울(Tsiouroul) 출신인 윤 바오로와 면천 올구지(Olkoutsi) 출신인 한 토마스가 홍주에서 순교하였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내용은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이와 같이 홍주에서는 1791년의 신해박해와 1797년의 정사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문초를 받거나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순교하였다. 그 중에서 기록으로 알려진 순교자는 1792년(양력 1793년)에 옥중 동사로 순교한 원시장(베드로), 1799년에 옥중 교수(혹은 장사)로 순교한 방 프란치스코와 2명의 동료 순교자, 1799년에 옥중 교수형으로 순교한 박취득(라우렌시오) 등 5명뿐이다. 이어 1801년의 신유박해 때는 다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으나 대부분 유배형의 판결을 받았다. 반면에 끝까지 신앙을 굳게 지킨 황일광(시몬)은 참수형으로 순교하여 여섯 번째의 홍주 순교자가 되었고, 윤 바오로와 한 토마스도 이때 홍주에서 순교하였다. 다만, 황일광과 같은 날 순교한 김귀동의 순교지가 홍주였는지, 아니면 고산이나 청양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들의 순교 약전을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박해 초기의 홍주 순교자 일람(1791~1801년) : 8명(혹은 9명)
* 순교일과 나이는 음력
성 명 | 세례명 | 출생지 | 거주지 | 순교 형식 | 순교일 | 나이 | 신분 |
원시장 | 베드로 | 홍주 응정리 | 홍주 | 옥중 동사 | 1792년 12월 17일 (양력 1793년 1월 28일) | 61 | 양인 |
방 | 프란치스코 | 면천 여름이 | 면천 | 옥중 교수 (혹 장사) | 1798년 12월 16일 (양력 1799년 1월 21일) | 비장 | |
프란치스코의 동료 2명 | 미상 | ||||||
박취득 (朴取得) | 라우렌시오 | 홍주 | 홍주 | 옥중 교수 | 1799년 2월 29일 (양력 4월 3일) | 약30 | |
황일광 (黃日光) | 시몬(혹 알렉시오) | 홍주 | 경상 양근 | 참수 | 1801년 12월 27일 (양력 1802년 1월 30일) | 45 | 백정 |
윤 | 바오로 | 덕산 줄울 | 미상 | 1801년 | |||
한 | 토마스 | 면천 올구지 | 미상 | 1801년 |
* 김귀동(金貴同) : 홍주(혹 전라도 고산이나 충청도 청양) 출신, 1801년 12월 27일 홍주
(혹 고산․청양) 참수 순교
2. 천주교의 확산과 순교자수의 증가
1) 신자들의 이주와 새 순교자의 탄생
홍주를 포함하여 내포 지역의 신자들은 일찍부터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여 신앙 생활을 하였다. 아마도 그 이유는 자신의 신분과 천주교 입교 사실이 알려져 있는 고향에서 신앙 생활을 계속 하기란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801년 이전에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살던 홍주 출신 신자로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황일광이 유명하다.
신유박해 이후 홍주 신자들의 이주는 더욱 활발해지게 되었다. 1815년의 을해박해(乙亥迫害) 때 대구에서 순교한 구성열(具性悅, 바르바라)은 홍주의 한내장벌(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 출신으로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으로 이주하여 살았고, 최봉한(崔奉漢, 프란치스코)도 충청도 홍주 다래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 출신으로 노래산 교우촌에서 거주하였다. 또 1815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흥금(金興金)․김장복(金長福) 부자는 홍주 출신으로 연풍을 거쳐 경상도 진보의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石浦面 葡山洞) 교우촌으로 이주해 살다가 체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27년의 정해박해(丁亥迫害) 이후에도 홍주 출신의 신자가 다른 지역에서 순교한 것으로 나타난다. 우선 앞에서 설명한 적이 있는 박경화(바오로)는 홍주 출신으로 상주 멍에목에서 살다가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대구에서 순교하였다. 그리고 1833년 서울에서 옥사한 황석지(黃石之 베드로)는 홍주 당산리(堂山里, 현 홍성군 홍북면 산수리의 ‘당산’인 듯) 출신으로 서울로 이주해 살다가 체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서울에서 순교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과 이성례(李聖禮, 마리아) 부부는 홍주 다래골(다락골)에서 신앙 생활을 하다가 경기도 수리산(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 4동)으로 이주한 뒤 그곳에서 체포되었으며, 대구에서 순교한 이재행(李在行, 안드레아)과 박경화의 아들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도 홍주 출신이었다. 또 1839년 서울에서 순교한 손경서(안드레아)는 홍주 출신으로 한때 앵베르(Imbert, 范世亨 라우렌시오) 주교를 모신 일이 있었고, 1839년 전주에서 옥사한 이독심(아우구스티노)은 홍주 출신으로 전라도 용담에서 체포되었다.
그러나 1812년에서 1839년 사이에는 홍주에서 순교한 신자도 있었다. 앞에서 설명한 적이 있는 홍주 배울(올) 출신의 이여삼(바오로)이 바로 그 첫 번째 순교자였다. 이여삼은 1791년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맏형 이무명과 함께 전라도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다가 1801년의 박해 때 맏형 이무명과 그의 두 아들(즉 이태권 베드로와 형)이 체포되어 홍주로 끌려갔고, 이무명은 유배형을 받아 배소에서 사망하였다. 또 이여삼은 박해를 피해 또 다른 형과 함께 공주 산중으로 들어가 생활하다가 1802년 그곳에서 아우와 함께 체포되어 각각 유배형을 받게 된다. 1812년에 해배된 그는 전라도 금산의 개지기(현 충남 금산군 남이면 건천리의 ‘개직리’인 듯)로 가서 살던 중 그 해 6월에 체포되어 홍주 관아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갖가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형벌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고수하다가 1812년 12월경 장사로 순교하였으니, 당시의 나이는 약 43세였다.
1837년에는 홍주에서 김윤우(시몬)가 순교하였다. 그러나 그에 대한 더 이상의 내용은 알 수가 없다. 이어 1839년의 기해박해 때에는 홍주 옥중에서 유 바오로가 순교하였다. 바오로는 덕산 청정이(T'siong tsiengi, 현 충남 예산군 삽교읍의 ‘창정리’인 듯) 태생으로 집안에서 혼자 입교하여 어렵게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39년 3월에 체포되어 홍주 관아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고, 옥중에서는 외교인 박춘오를 권면하여 천주교에 입교하겠다는 다짐을 받아낸 후 1839년 7월에 순교하였다. 박춘오는 그 후에 석방되어 ‘루치아노’라는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하였다.
기해박해 때 홍주 옥에 투옥된 신자는 유 바오로 외에 최대종(요셉)이 있었다. 그는 홍주 다래골(다락골) 출신으로 앞에서 말한 최경환(프란치스코)의 친척이었다. 1839년 8월에 한 배교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홍주 진영으로 압송된 그는 문초와 형벌을 받던 중에 마음이 약해지기도 하였으나, 곧 배교를 철회하고 용감하게 형벌을 참아냈다. 그런 다음 옥에 갇힌 지 9개월 후인 1840년 5월 5일(양력 6월 4일) 51세로 순교하였다. 이와 같이 1839년 이전까지 홍주의 출신의 신자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살다가 순교한 경우가 많았다. 홍주에서 순교한 신자는 1812년에 장사로 순교한 이여삼(바오로)과 1837년에 순교한 김윤우(시몬), 1839년에 옥사한 유 바오로, 1840년에 옥사한 최대종(요셉) 등 네 명뿐이다.
<표 2> 박해 중기의 홍주 순교자 일람(1812~1839년) : 4명
* 순교일과 나이는 음력
성 명 | 세례명 | 출생지 | 거주지 | 순교 형식 | 순교일 | 나이 | 신분 |
이여삼 | 바오로 | 홍주 배울 | 홍주 금산 | 장사(옥사) | 1812년 12월경 | 약43 | 양인 |
김윤우 | 시몬 | 미상 | 미상 | 1837년 | |||
유 | 바오로 | 홍주 청정이 | 홍주 | 옥사 | 1839년 7월 | ||
최대종 | 요셉 | 홍주 다래골 | 홍주 | 옥사 | 1840년 5월 5일 (양력 6월 4일) | 51 | 양반 |
아울러 이 시기의 교회사에서는 홍주와 관련된 다른 사실들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1836년에는 홍주 다래골(다락골) 출신으로 경기도로 이주해 살던 최경환의 장남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홍주에서 태어나 경기도 남양에 살던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첫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최방제는 1837년 마카오에서 사망하였고, 최양업은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두 번째의 한국인 사제로 서품되었다. 또 1839년에는 모방(Maubant, 羅 베드로)과 샤스탕(Chastan, 鄭 야고보) 신부가 홍주 땅에서 포교(포도 군관)에게 자수한 사실이 나타난다.
기해박해 이후 홍주 지역은 비교적 평온한 시기가 지속되었다. 동시에 천주교 신자수가 계속 증가하여 교회 안에서 주목할 만한 지역이 되었으니, 이는 1861년 10월에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가 전국을 8개의 지역 본당으로 나누었을 때,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안토니오) 부주교가 ‘홍주 지역 본당’(상부 내포)을 담당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처음 홍주 지역 본당의 중심지는 ‘보령 판서골’(현 충남 보령군 미산면 삼계리)이었으나, 후에 ‘홍주 거더리’(그더리, 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로 이전된 것 같다. 또 랑드르 신부가 맡은 서부 충청도 지역의 본당 중심지는 거더리 이웃인 ‘덕산 황모실’(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에 있었다.
이때부터 프랑스 선교사들은 자주 홍주 지역을 순방했던 것 같다. 경상도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페롱 신부가 1860년 성탄절에는 거더리 공소를 방문하고 성사를 주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또 1865년에 입국한 위앵(Huin, 閔) 신부는 2년 전에 사망한 랑드르 신부를 대신하여 서부 충청도 지역을 맡으면서 본당 중심지를 다블뤼 주교의 거더리에서 가까운 세거리(현 당진군 합덕읍 대합덕리)에 두었다. 그러나 신자수가 증가하고 프랑스 선교사들이 자주 홍주 지역을 순방하고 있었다는 점은, 그만큼 박해를 받게 될 가능성이 컸다는 사실도 의미한다.
2) 병인박해 이후의 홍주 순교자
병인박해(丙寅迫害)는 1866년 2월 23일(음력 1월 9일), 서울의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충청도 지역에서는 1866년 3월 11일(음력 1월 25일), 거더리의 손치호(니콜라오) 회장 집에 있던 다블뤼 주교가 처음으로 체포되었다. 이어 위앵 신부, 오메트르(Aumaître, 吳) 신부, 황석두(黃錫斗, 루가) 등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제천 배론 신학교의 집 주인 장주기(張周基, 요셉)가 이들과 함께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들 5명은 3월 30일(음력 2월 14일) 보령 수영으로 이송되어 그곳 갈마진터(渴馬津頭, 현 충남 보령군 오천면 永保里. 일명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이후 충청도 전역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고, 홍주를 비롯하여 공주․해미․청주 등지에서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또 충청도에서 거주하다가 경포나 다른 지역 포교들에게 체포되어 서울과 다른 지역에서 순교한 신자들도 많았다.
홍주에서는 병인박해 초기부터 신자들에 대한 체포가 시작되어 1869년까지 계속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한 것으로 나타난다. “교회 순교록(殉敎錄)”을 종합 정리해 보면 홍주 순교자는 총 113명이 되는데, 이 중에서 병인박해 초기인 1866년의 순교자가 51명(순교 사실만 확인되는 무명 순교자 11명 포함)으로 가장 많고, 1867년 순교자가 19명, 1868년 순교자가 27명, 1869년 순교자가 2명, 순교 연도 미상자가 16명으로 확인된다. 다만, 순교 연도 미상자들이 많은 것을 볼 때, 1869년 이후로도 순교자가 탄생했을 가능성은 있다.
<표 3> 병인박해기의 연도별 홍주 순교자(교회 순교록)
연 도 | 순교자 | 특기 사항 |
1866년 | 51명 | 1866년 11월 21일 서산 강당리 거주 심 회장, 김선양(요셉) 부부 등 도합 17명이 함께 체포되어 교수형으로 순교. 무명 순교자 11명 |
1867년 | 19명 | 예산 간양골과 홍주 원머리 교우(박 회장, 양 도미니코 회장 등) 함께 순교. 간 그레그리오와 신 그리산도 동정 순교자 탄생 |
1868년 | 27명 | 최 베드로, 김 루치아, 김 마리아, 원 아나스타시아 등 생매장 순교자 탄생 |
1869년 | 2명 | 순교자수가 급격하게 감소 |
연도 미상 | 16명 | 순교록에 수록된 이들 중 순교자가 아닐 가능성도 있음 |
합계 : 115명(혹은 114명) |
* 다만, 1866년의 순교자로 나오는 홍주 원머리(현 충남 당진군 신평면 한정리) 출신의 ‘양
명삼 회장’(병인치명사적, 6권 75쪽)은 1867년의 순교자 ‘양 도미니코 회장’(치명일기,
정리 번호 604번)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교회 순교록의 병인 순교자 총수는
115명이 아니라 114명이 된다.
위의 내용에 나타나는 서산 강당리(현 충남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 홍주 원머리(현 충남 당진군 신평면 한정리), 예산 간양골(현 충남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 등은 교우촌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들 교우촌은 병인박해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면서 일시 폐허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원머리․간양골은 박해 후에 다시 신자들이 거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과 같이 병인박해는 1866년 9~10월의 병인양요(丙寅洋擾) 이후 확대되다가 1867년 말과 다음해 초에는 일시 완화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1868년 4월 17~26일(양력 5월 9~18일) 홍주 이웃의 덕산에서 독일 상인 오페르트(Oppert)의 주도로 발생한 ‘남연군묘(南延君墓) 도굴 미수 사건’으로 인해 다시 확대되었다. 특히 이 사건으로 충청도 각지에서 수많은 신자가 체포되어 순교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1868년의 홍주 순교자가 27명에 이르는 사실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는 교회 순교록에 나타나는 홍주 순교자 관변 기록에 그 이름이 나타나는 경우는 순교 연도 미상자인 박사행(朴士行, 베드로)뿐이었다. 아마도 병인양요 이후에 내려진 선참후계령(先斬後啓令)과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러나 최근에 발견된 공충도사학죄인성책(公忠道邪學罪人成冊)을 통해 순교록에 수록된 순교자들이 일부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는 1868년 윤4월(음)부터 7월까지 공주․충주․해미․홍주 등지에서 복법(伏法, 즉 처형)된 순교자(처형자)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홍주 순교자(총 102명)를 시기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4> 공충도사학죄인성책의 홍주 순교자
순교 월 | 거주지 | 순 교 자 |
1868년 윤4월 <27명> | 홍주 | 文京千, 洪命祿, 孫汝道, 李希中, 李致亨, 申石仁, 李召史 |
신창 | 朴應祿, 申正老, 李召史, 崔召史, 表召史, 陳召史, 朴士根, 趙致雨, 金召史, 全召史, 崔召史 | |
대흥 | 林士達 | |
덕산 | 尹召史, 李召史, 金正化, 李義福, 李汝長 | |
보령 | 元原執 | |
천안 | 金厚連 | |
예산 | 金鼎夏 | |
1868년 5월 <46명> | 홍주 | 金召史, 李召史, 田召史, 朴正局, 李召史, 金召史, 崔召史, 李召史, 李汗奎, 金召史, 崔召史 |
신창 | 高召史, 李太和, 黃召史, 金召史, 金召史, 李召史, 李召史 | |
온양 | 金玉明, 元召史, 尹召史, 尹召史 | |
덕산 | 朴忠卜, 朴忠萬, 朴二萬, 田召史, 韓召史, 金水吉, (婢)雪梅, 李今石, 鄭致民, 金召史 | |
해미 | 禹官大 | |
예산 | 朴京石, 李永汝 | |
정산 | 白才得, 朴召史, 金朱煥, 金己亥, 趙召史 | |
대흥 | 李召史 | |
서산 | 兪春京, 任萬玉, 兪召史 | |
태안 | 兪致三, 宋召史 |
순교 월 | 거주지 | 순 교 자 |
1868년 6월 <27명> | 공주 | 李永孫 |
비인 | 姜召史, 金召史 | |
홍산 | 宋召史 | |
덕산 | 朴京心, 馬辰甲, 金召史 | |
홍주 | 洪召史, 南召史, 朴召史, 金召史, 李召史, 沈召史, 李召史, 金召史, 金麻在, 李召史, 卞豊信, 黃召史 | |
덕산 | 朴奉學 | |
신창 | 朴卜孫, 金召史 | |
홍주 | 崔法尙, 金召史①, 金召史②, 李召史 | |
면천 | 李景三 | |
1868년 7월 <2명> | 보령 | 崔希元, 金永權 |
총 102명 |
공충도사학죄인성책의 내용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1868년의 남연군묘 도굴 미수 사건 이후 홍주 인근에서 대대적인 체포가 이루어진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해 주고 있다. 아울러 1868년의 순교자수는 교회 순교록에 나오는 27명보다 훨씬 많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한편 성책에 나오는 이들 102명의 순교자(처형자) 중에는 교회 순교록에 나타나는 순교자와 동일한 인물로 추정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의 <표 5>에서와 같이 17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 숫자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또 교회 순교록에 나오는 이들 순교자들은 관변 기록에 의해서도 그 순교 사실이 입증되는 좋은 예가 된다.
<표 5> 순교록과 공충도사학죄인성책의 내용 비교표
교회 순교록 | 공충도사학죄인성책 |
홍주 원머리 출신의 김 루치아(1868, 50세, 생매장) | 6월 순교자 金召史① |
홍주 원머리 출신의 김 마리아(1868, 생매장) | 6월 순교자 金召史② |
홍주 원머리 출신의 최 베드로(1868, 50세, 생매장) | 6월 순교자 崔法尙 |
홍주 거더리 출신의 손여도(1868, 32세) | 4월 순교자 孫汝道 |
교회 순교록 | 공충도사학죄인성책 |
홍주 옥금재 태생인 이 요셉(1868, 64세) | 5월 순교자 李汗奎 |
홍주 거더리 출신의 이사성(1868, 41세) | 4월 순교자 李希中(혹은 李致亨) |
홍주 출신의 신 요셉(연도 미상, 28세) | 4월 순교자 申石仁 |
천안 노루지 출신의 김 비오(1868, 61세) | 4월 순교자 金厚連 |
온양 배동 출신의 김 사도 요한(1868, 40여 세) | 5월 순교자 金玉明 |
온양 배동 출신의 윤 필로메나(1868, 19세) | 5월 순교자 尹召史(2명 중 한 사람) |
신창 출신의 박 바오로(1868, 39세) | 4월 순교자 朴應祿(혹 6월 순교자 朴卜孫) |
신창 출신의 박사근(1866, 42세) | 4월 순교자 朴士根 |
신창 출신의 조 치릴로(1868, 40세) | 4월 순교자 趙致雨 |
서산 용나인 출신의 유 마르가리타(1868, 58세) | 5월 순교자 兪召史 |
서산 용나인 출신인 임만억(야고보, 1868, 17세) | 5월 순교자 林萬玉 |
안변 출신(서산 용나인으로 이주한 듯) 유 서방(1868) | 5월 순교자 兪春京 |
보령 출신의 원 에오리오(1866, 60여 세) | 4월 순교자 元原執 |
중복 순교자수 : 17명(1866년 순교자 2명, 1868년 순교자 14명, 연도 미상자 1명) |
이상의 내용 중에서 교회 순교록에 나오는 1866년의 순교자수 51명은 관변 기록에 1868년의 순교자로 나오는 박사근과 원 에오리오(즉 원원집) 2명(중복 순교자)을 제외하면 49명이 된다. 또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1866년의 순교자 양명삼 회장을 1867년의 순교자인 양 도미니코 회장으로 본다면 1866년의 순교자수는 다시 48명으로 줄어들게 된다. 물론 1867년의 순교자수(19명)는 변함이 없다.
다음으로 1868년의 순교자는 순교록에 나오는 27명과 관변 기록에 나오는 102명을 합한 129명에서 1868년의 중복 순교자 14명을 제외한 115명이 된다. 그러나 1869년의 순교자수(2명)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순교록의 연도 미상자 16명도 실제로는 15명으로 보아야 한다. 16명 중에서 신 요셉 1명(중복 순교자)을 관변 기록에 따라 1868년 순교자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병인박해기의 홍주 순교자수(199명)와 연도별 순교자수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표 6> 병인박해기의 연도별 홍주 순교자(종합)
연 도 | 1866년 | 1867년 | 1868년 | 1869년 | 연도 미상 | 계 |
순교자 | 48명 (51-3명) | 19명 | 115명 (27+102-14명) | 2명 | 15명 (16-1명) | 199명 |
3. 홍주 순교자 총수와 순교 형식
1) 홍주 순교자 총수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초기의 홍주 순교자는 8명(혹은 9명)이고, 중기의 홍주 순교자는 4명이었다. 그러다가 병인박해기에 와서는 순교자수가 199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이를 종합해 보면 다음의 <표 7>에 정리한 것과 같이 박해기 홍주에서 순교한 것으로 확인되는 천주교 신자수는 도합 211명(혹은 212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기록상의 순교자일 뿐이므로 실제의 순교자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1868년의 순교자수만 보더라도 교회 순교록(27명)과 공충도사학죄인성책(102명) 사이에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도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표 7> 박해기의 홍주 순교자 총수
박해 구분 | 순교자수 | 비 고 |
초기 순교자(1791~1801년) | 8명 | 1801년 순교자 김귀동을 포함하면 9명 |
중기 순교자(1812~1839년) | 4명 | |
병인박해 순교자(1866년 이후) | 199명 | 무명 순교자 11명 포함. 기록상의 중복 순교자는 17명(증가할 가능성이 있음) |
합계 : 211명(혹은 212명) |
홍주 순교자 211명 중에서 병인박해기의 무명 순교자 11명(서산 강당리 출신)을 제외하면 성별을 알 수 있는 순교자수는 200명이 된다. 다음의 <표 8>에서 보는 것처럼 이 중에서 남자 순교자는 모두 119명, 여자 순교자는 모두 81명이었다. 특히 병인박해기의 교회 순교록에는 남자 순교자가 73명, 여자 순교자가 30명(무명 순교자 9명 제외)으로 남자 순교자수가 훨씬 많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관변 기록인 공충도사학죄인성책에는 1868년 4월에서 7월까지 홍주에서 처형된 순교자 102명 가운데 남자 순교자가 47명, 여자 순교자가 55명으로, 오히려 여자 순교자가 더 많았다. 따라서 교회측에서 조사하여 순교록에 수록한 순교자의 경우에는 실제보다 남자 순교자가 더 많이 수록된 사실을 알 수 있다.
<표 8> 홍주 순교자의 성별 구분
박해 구분 | 성별 구분 | ||
남자 순교자 | 여자 순교자 | ||
초기․중기 순교자(1791~1839년) | 12명 | ||
병인박해 순교자 (1866년 이후) | 교회 순교록 | 73명 | 30명 |
관변 기록 | 47명 | 55명 | |
중복 순교자 | 13명 | 4명 | |
소 계 | 107명 | 81명 | |
합 계 : 200명(무명 순교자 11명 제외) | 119명 | 81명 |
2) 홍주 순교자의 순교 형식
일반적으로 조정에서는 행형(行刑) 규정에 따라 신앙을 고수하는 천주교 신자들을 정법(正法), 즉 참수형이나 교수형, 효수형 등의 사형에 처하도록 했으며, 해당 신자의 거주지에서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준다는 목적에서 해읍정법(該邑正法)의 영을 함께 내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1801년의 홍주 순교자 황일광이 참수를 받은 이유도 그가 삼복제(三覆制)의 형식에 따라 형조에서 결안(結案, 사형 결정) 후 해읍정법의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신유박해가 끝날 무렵에 반포된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 대제학 이만수 제진)은 신유박해 때의 처형 판결에 이어 왕의 재가 없이도 천주교 신자들에게 사형을 내리는 법령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홍주와 같은 지방 관아에서는 박해 초기부터 정해진 옥송(獄訟, 일종의 형사 소송) 절차나 삼복제 형식에 따라 사형 판결을 내린 경우가 거의 없었다. 법전의 결옥일한(決獄日限)을 넘겨 수감하는 경우도 많았고, 천주교 신자들에게만 적용되던 사형 판결 형식이 취해지게 되었다. 초기와 중기의 홍주 순교자 12명(혹은 13명) 중에서 참수형을 당한 황일광 1명(김귀동을 포함시킬 경우에는 2명)을 제외하면, 옥사(동사 및 장사)가 4명, 교수가 2명, 미상이 5명으로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따라서 홍주의 순교자들은 법외형(法外刑) 즉 남형(濫刑)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조선의 전통적인 행형 제도에 대한 인식이 왜곡된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천주교 신자들에게 적용된 법외형 때문이었다.
병인박해기에 와서도 이러한 현상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대원군이 내린 선참후계령(先斬後啓令)에 따라 지방 각처에서 수시로, 그리고 한번에 여러 명의 신자들에 대한 처형이 이루어지면서 참수형보다는 교수형이나 갖가지 남형이 사용되었다. 교회 순교록에 나오는 홍주의 병인 순교자 115명 중에서 참수형을 받은 경우는 1868년 1월에 참수형을 당한 것으로 나오는 ‘유 마르타’의 경우뿐인데,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그의 순교 형식도 교수형이 참수형으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한편 공충도사학죄인성책에 수록된 102명의 홍주 순교자는 모두 복법(伏法, 즉 처형)으로만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순교 형식을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이 복법은 ‘정법(참수)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처형했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 따라서 순교자들의 순교 형식은 교회 순교록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이 순교록을 바탕으로 초기․중기 순교자(12명)와 병인 순교자(115명) 도합 127명의 순교 형식을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9> 박해기 홍주 순교자의 순교 형식(순교록)
순교 형식 박해 | 교 수 | 옥 사 | 생매장 | 참수 | 미상 | 계 | ||||
교수 | 추정 | 소계 | 옥사 | 추정 | 소계 | |||||
초기․중기 박해 | 2명 | 2명 | 4명 | 4명 | 1명 | 5명 | 12명 | |||
병인박해 | 80명 | 18명 | 98명 | 8명 | 1명 | 9명 | 4명 | 1명 | 3명 | 115명 |
합 계 | 82명 | 18명 | 100명 | 12명 | 1명 | 13명 | 4명 | 2명 | 8명 | 127명 |
이와 같이 박해기의 홍주 순교자는 대부분 교수형(100명)으로 순교하였다. 그에 이어 옥사(早死 즉 徑斃)가 13명, 생매장이 4명, 참수가 2명(유 마르타는 불명)으로 나타난다. 특히 1868년 5월에 생매장으로 순교한 4명(최법상 베드로, 김조이 루치아, 김조이 마리아, 원 아나타시아)은 모두 홍주 원머리에 거주하던 친척 사이로, 공충도사학죄인성책에 따르면 포교 김만성(金萬成)에 의해 체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들과 함께 덕산의 박봉학(朴奉學), 신창의 박복손(朴卜孫)과 김조이(金召史), 홍주의 이조이(李召史), 면천의 이경삼(李景三) 등 5명도 포교 김만성에게 체포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렇다면 이들 또한 생매장으로 순교했을 가능성이 있다(생매장 순교자 최대 9명). 이 형벌은 천주교 박해사에서도 대표적인 남형(濫刑)에 속한다.
교수형은 옥중이나 옥 부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교회 순교록에 보면, 교수형은 구멍이 있는 큰 돌(일명 형구돌)이나 옥벽에 뚫은 구멍, 혹은 다음과 같이 널판 구멍에 줄을 넣고 순교자의 목을 얽어맨 다음 옥졸들이 반대편에서 줄을 당기는 방법으로 행해졌다. 1866년 11~12월 서산 강당리 출신의 김선양(요셉) 등 17명의 교우가 이러한 방법으로 순교했는데, 옥졸들은 이들 중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한 구덩이에 묻었다고 한다.
참소(斬所)에 나아가 널판 앞에 당도하니, 그 가운데 구멍 내고 줄을 넣어 1인을 밖에 서고, 1인은 안에 서서 줄로 목을 걸어주며 금장(禁將)이 소리 크게 하며 ‘당기라’ 할 때, 성호 긋고 예수․마리아 소리 한 번밖에 못하고 죽으니라. 죽은 후에 그 시체는 17인을 모두 한 광중에 묻으니라. ……옥졸이 청령(聽令)하고 금장ㅅ 소리 높이 하며 죄인 하나씩 내어 널판 앞에 세우고, 옥졸 중 하나는 밖에 서서 줄을 잡고, 하나는 안에 서서 줄로 목을 걸어 당길 때 최 마리아의 말이……그러한 후 목을 걸어 죽이니라.
4. 홍주(홍성)의 순교 터 고증
초기 박해 때의 천주교 순교자들은 각자의 거주지에서 체포되어 온 뒤, 홍주 진영(鎭營, 즉 충청도 前營)의 동헌 혹은 목사의 동헌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3~4개월에서 8~9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처형되었다. 대체로 법전의 결옥일한을 넘겨 수감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참후계령이 내려진 후의 병인 순교자들은 문초와 형벌 기간, 혹은 옥중 생활이 크게 단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병인박해기의 순교록을 보면, ‘옥에 갇힌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혹은 ‘체포된 지 10일 후에’, 혹은 ‘하옥된 지 20일 후에’, 혹은 ‘옥에 갇힌 지 한 달도 안되어’ 순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홍주 토포청(討捕廳, 영장 겸 토포사 관할)에서 파견된 포교(포도 군관)와 포졸들에 의해 끌려온 순교자들은 갖가지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도 굳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일반적으로 박해자들은 문초에 앞서 ‘배교하면 살려주겠다’고 신자들을 회유하였고, 실제로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도 ‘이제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는 한 마디만 하면 석방해 주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이러한 회유에 넘어가지 않았다. 비록 순간적으로 마음이 약해진 경우라 할지라도 이내 회두하여 신앙을 증거하곤 하였다. 그리고 순교의 영광을 얻기 위해 갖은 고초도 마다하지 않았다.
신앙 증거 터인 목사와 전영장의 동헌(근민당과 경사당) : 홍주 순교자들이 처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장소는 목사의 동헌, 즉 목사가 집무를 보던 근민당(近民堂)과 홍주 진영(즉 충청도 前營)의 동헌, 즉 전영장(토포사 겸임)이 집무를 보던 동헌인 경사당(景士堂) 앞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중에서 근민당은 현존하는 목사의 동헌인 안회당(사적 231호, 현 홍성군청사 경내)이 아니라 그 서쪽에 있던 사달정(四達亭, 7칸, 옛 政事堂)의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또 전영장의 동헌인 경사당은 지금의 동문(즉 朝陽門) 서쪽에 위치한 한국통신 건물 자리(일제 강점기 때의 홍성 우편국 사무실)로 추정되고 있다. 초기와 중기 박해 때의 순교자들은 목사와 영장 앞에서 신앙을 증거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병인박해기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포교들에 의해 영장 앞으로 끌려가 경사당 앞에서 신앙을 증거한 것으로 나타난다.
신앙 증거 터인 옛 저자거리 : 홍주의 저자거리는 순교자들이 관아로 끌려갈 때, 혹은 처형되기 전에 조리돌림을 당했던 곳으로 전승되고 있다. 그러나 옛 저자거리, 즉 구장터는 지금의 홍성군청 앞에 있었다고 하는 증언도 있고, 조선 후기의 저자거리는 본래 홍주성의 동문 즉 조양문(朝陽門)에서 북서쪽의 북문 방향에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지금의 군청 앞으로 이전되었다고 하는 증언도 있다. 따라서 앞으로 더 면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옛 저자거리도 순교자들이 수난을 겪으면서 신앙을 증거한 곳으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신앙 증거 장소요 최대의 순교 터인 홍주 옥 :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은 이내 옥으로 끌려가 고난의 옥살이를 하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스스로의 순교 원의를 다짐하곤 했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의 홍주 옥은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한 장소요 순교를 준비하던 의미 있는 장소가 된다. 1925년도에 발간된 홍성군지(洪城郡誌)에서는 물론 현재의 향토사가들도 한결같이 옛 홍주 옥터가 훼철되면서 그 자리에 공주지방법원 홍주지청사가 건립되었고, 이곳이 지금의 법원 및 검찰청 자리라고 하는데, 이는 홍성 지역의 전승에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홍주 옥의 이러한 위치는 1871년에 작성된 <홍주목 지도> 안에 표시되어 있는 옥의 위치와도 거의 일치한다.
다만, 홍주의 박해사는 1866~1868년에 가장 심했고, 1870년에 이르러는 거의 끝난 상태였다. 반면에 위에서 말한 <홍주목 지도>는 1870년(고종 7년) 홍주목사 한응필(韓應弼)이 대규모의 읍성 개수 공사를 끝낸 지 1년 뒤에 작성된 것이므로 시기상으로 차이가 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1870년의 성역 공사 내역 중에 옥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을 볼 때, 홍주 옥은 성역 공사 중에도 이설되지 않고 이전 위치에 그대로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실 홍주 옥은 신앙의 증거 장소이기도 하면서 최대의 순교 터도 된다.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교수형 100명, 옥사 13명 등 113명이 옥중이나 그 인근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었기 때문이다.
참수 터인 형장 : 홍주의 또 다른 순교 터인 처형장, 즉 1801년의 황일광(시몬)과 1868년의 유 마르타(교수형의 가능성도 있음)가 참수형을 받은 장소는 홍주성의 북문 밖, 즉 지금의 홍성읍 오관리에 소재한 북문교(일명 덕산통) 인근의 월계천변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문 밖의 월계천변으로, 일반적인 형장의 조건(개천과 백사장,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장소 등)을 갖추고 있다.
생매장 터와 순교자 안장 터 : 1868년 5월 최법상(베드로), 김조이(루치아), 김조이(마리아), 원 아나타시아 등 4명(생매장 추정자는 최대 9명)이 순교한 생매장 터는 지금까지 확인된 적이 없었다. 교회 순교록에는 당시 생매장을 했던 이유를 “많은 교우들을 죽이기 어려우매”라는 데 있었다고 한다. 물론 순교자들은 성안이 아니라 성밖 어느 장소에서 한 구덩이에 생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옥사하거나 교수형을 당한 순교자들의 시신이 안장된 장소도 이 생매장 터와 거의 같았을 것이다.
맺 음 말
홍성(홍주)의 첫 순교자는 1791년의 신해박해로 체포되어 이듬해에 순교한 원시장(베드로)이었다. 또 홍성에서는 1801년의 신유박해 때까지 연이어 순교자가 탄생함으로써 초기 박해(1791~1801년) 때의 순교자수가 모두 8명에 이른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어 박해 중기(1812~1839년)에 순교한 신자로는, 홍주 배울 출신으로 1812년 12월경 장사(옥사)로 순교한 이여삼(바오로), 1837년에 순교한 김윤우(시몬),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옥사로 순교한 유 바오로와 최대종(요셉) 등 4명만이 기록에 나타난다.
홍성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1866년에 시작되어 1870년대 초까지 계속된 병인박해기에 탄생하였다. 즉, 교회 순교록에는 모두 114명(혹는 115명)의 순교자가 이 시기에 순교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관변 기록인 공충도사학죄인성책에는 1868년 4월~7월의 순교자만 모두 102명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중복되는 순교자수는 17명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기록상의 병인박해 순교자수는 199명(혹은 200명)이 되는 셈이다.
이와 같이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홍성의 순교자 총수는 초기의 순교자 8명(혹은 9명), 중기의 순교자 4명, 병인박해 순교자 199명을 합해 모두 211명(혹은 212명)에 이른다. 그러나 그 순교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무명 순교자들을 감안한다면, 실제의 순교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임에 틀림없다. 전국의 어느 지역보다 많은 순교자가 홍성에서 탄생한 셈이고, 따라서 앞으로 조성되어야 할 홍주 읍성의 순례지가 지니는 교회사의 의미는 아주 크다고 할 수 있다.
홍성 순교자들의 순교 형식은 오직 교회 순교록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데, 여기에 수록되어 있는 127명의 순교자는 교수형 100명, 옥사 13명, 참수 2명(1868년의 유 마르타는 참수․교수 불확실), 미상 8명 등으로 나타난다. 특히 1868년 5월에는 홍주 원머리 출신의 신자들 4명이 천주교 신앙 때문에 동시에 생매장되었다(최대 생매장 순교자는 9명). 이처럼 홍성 순교자들은 참수형보다는 교수형이나 갖가지 남형으로 순교하였다.
홍성 지역은 이처럼 천주교의 중요한 순교 역사를 담고 있는, 순교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는 순례지로 자리 매김되어야 한다. 첫째, 순교자들이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신앙을 증거했던 장소로는 홍주 목사의 동헌(옛 근민당, 현 군청사 경내)과 진영장의 동헌(옛 경사당, 현 한국 통신 건물)을 들 수 있다. 둘째, 홍성의 옛 저자거리(현 군청사 앞 혹은 조양문 북서쪽 거리)도 중요한 신앙 증거 터가 된다. 셋째, 옛 홍주 옥(현 법원․검찰청 자리)은 신앙 증거 장소이자 교회 순교록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교수형 100명, 옥사 13명 등 113명)를 탄생시킨 것으로 나타나는 최대의 순교 터였다. 넷째, 순교자들이 참수형을 당한 형장은 ‘지금의 북문교 아래에 있었던 소향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인근 백사장’에 비정할 수 있다. 다섯째, 1868년에 생매장형으로 순교한 신자들과 옥사․교수형으로 순교한 신자들이 안장된 장소는 ‘전통 매장지인 숲거리와 그 인근, 즉 홍성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인근’으로 추정된다.
현재 초기 박해의 순교자 중에서 4명의 홍성 순교자(원시장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오, 황일광 시몬)는 교황청 시성성에 의해 ‘시복 시성을 추진하는 데 아무런 장애 없음’이 인가된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었고, 그 시복 재판이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 위임되어 진행되고 있다. <차기진 / 양업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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