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유항검 아우구스티노(5.29) 기본정보
성인명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柳恒儉 Augustine)
축일 5월 29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양반, 회장,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756-1801년
같은이름 아오스딩, 아우구스띠노, 아우구스띠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오스틴, 유 아우구스티노, 유아우구스티노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양반 집안에서 1756년에 태어난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또는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가 된 것이다.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 요한과 유문석 요한은 그의 아들이고, 그 이듬해에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는 그의 며느리이며, 유중성 마태오는 그의 조카이다.
유 아우구스티노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은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다. 그는 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집에서 주요 교리를 배우는 동안 이를 진리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내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은 뒤에 고향으로 내려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가족과 친척은 물론 그의 집에 있던 종들도 모두 그의 전교 대상이 되었다.
이제 유 아우구스티노에게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면서 모두에게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가난한 이웃은 물론, 자신의 종들에게도 애긍과 희사를 베풀었다.
1786년 봄, 이승훈 베드로를 비롯하여 지도층 신자들이 모임을 갖고 임의로 성직자를 임명하였을 때, 유 아우구스티노도 전라도 지역의 신부로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거나 그들을 모아 놓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지도층 신자들은 이러한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따라서 유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성무 활동을 중단하였다.
지도층 신자들은 이때부터 북경에 밀사를 파견하는 데 몰두하였다. 유 아우구스티노 역시 이 계획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1789년 말 밀사 윤유일 바오로를 북경에 파견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헌납하였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유 아우구스티노는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에 이종사촌 윤지충 바오로가 제사를 폐지한 죄로 체포된 뒤, 잠시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전주 감영에 자수하여 형식적으로 배교를 선언하고는 석방되었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유 아우구스티노는 아우 유관검을 신부에게 보내 전라도 순방을 요청하였다. 그때 마침 조정에서 신부 체포령을 내리자, 주 야고보 신부는 이를 피해 지방 순회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 전주 아우구스티노의 집을 방문하여 인근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였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이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선교사를 태운 서양 선박을 조선에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유 아우구스티노가 앞장서서 이 계획을 도왔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오랫동안 결실을 얻지 못하였고, 그러던 차에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그에 앞서 유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장남 유중철 요한과 이윤하 마태오의 딸인 이순이 루갈다가 동정 부부 서약을 하고 혼인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유 아우구스티노는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장 일찍 체포되었다. 이어 그는 전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었으며,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치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박해자들은 선교사와 서양 선박 요청 계획의 주동자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를 지목하고 모든 것을 실토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던 그는 결코 신자들을 밀고하거나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결국 유 아우구스티노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이에 그들은 그에게 모반죄를 적용하여 능지처참(陵遲處斬刑 : 대역죄를 범한 자에게 과하던 극형으로, 죄인을 죽인 뒤에 시신의 머리, 몸, 팔 다리를 토막 쳐서 각지에 돌려 보이는 형벌)을 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판결에 따라 유 아우구스티노는 전주로 옮겨져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성 다블뤼(St. A. Daveluy, 安敦伊) 주교는, 뒷날 그가 배교한 것 같다는 추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유항검이 배교하였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정하므로, 그는 하느님 앞에서 다른 순교자들의 팔마가지를 받으리라 믿는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2. 지상의 갑부에서 천상의 갑부가 된 호남의 사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1756-1801)
[신앙선조들의 발자취]
호남 지역의 첫 신자이며 사도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그 집 땅을 밟지 않고는 열 곳이 넘는 동네를 못 지나간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부호였다. 요즘 계산법으로 450만 평 규모라고 하니 유항검이 누렸던 세상의 부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랬던 그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지상 갑부의 삶을 버리고 천상 갑부의 삶을 살게 된다. 유항검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 권일신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함으로써 전라도 최초의 신자가 되었다. 이내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내려와 가족과 친척은 물론 집종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였다. 하느님의 사람이 된 그는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가난한 이웃과 종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궁궐 같은 기와집에서 살던 유항검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전교당을 지었다. 이곳에서 유항검의 부인을 필두로 여인들은 큰 가마솥에 쌀밥을 가득 지어 지상의 양식을 나누었고, 유항검은 교리를 전하며 천상의 양식을 나누었다.
주문모 신부가 박해를 피해 지방을 순회할 때 유항검은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시며 전라도 지방 최초로 미사를 봉헌하였다. 또 주문모 신부와 함께 북경 교구의 구베아 주교에게 선교사를 태운 서양 선박을 조선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하는 ‘대박청래(大舶請來)’ 계획을 주도했다. 훗날 이 계획은 유항검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죄목이 된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유항검은 체포되어 전주에서 한양으로 이송되었다. 대박청래 주동자로 지목된 그는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치면서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로 사형을 언도 받고 전주 풍남문 밖에서 능지처사(陵遲處死, 죄인을 죽인 뒤 시신을 머리와 몸통, 팔다리의 여섯 부분으로 잘라내는 극형)를 당하여 순교한다. 이때가 1801년 10월 24일, 그의 나이 45세였다. 살아남은 어린 가족은 노비로 끌려갔고, 재산은 깡그리 호조에 몰수되었으며, 그가 살던 집은 헐린 뒤 흔적조차 찾지 못하도록 연못으로 만들어졌다.
그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던 유항검의 집터에 초남이 성지(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초남신기길 128-5)가 조성되었고, 전주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치명자산 정상에는 유항검 일가의 유해가 모셔졌다. 오늘날 수많은 순례객이 그를 추앙하며 치열했던 순교 신심을 배우고 있다.
[2020년 8월 16일 연중 제16주일 의정부주보 3면, 순교자공경위원회]
3. 유항검 · 유문석 · 유중성 [복자 124위 열전] (29)
전라도 신앙 공동체 중심이 된 일가
- 복자 유항검.
1488ha. 1ha가 3025평이니, 무려 450만여 평의 땅이 유항검(아우구스티노, 1756∼1801)의 소유였다. 전주 인근 10여 개 고을에 걸쳐 1만5000마지기(1마지기 300평 기준으로 1487만633㎡)를 소유한 대부호였던 셈이다. 이처럼 ‘남부러울 것 없는’ 대부호였던 그는 왜 순교의 길을 걸었을까? 그 많은 땅과 재산, 명예, 목숨까지 바치며 온 가족이 다 함께 신앙을 증거해야만 했을까? 그 이유를 알려면, 그의 삶으로 들어가야 한다.
유항검 일가 가운데서 순교자는 모두 10위다. 유항검을 비롯해 부인 신희, 맏아들 유중철(요한, 1779∼1801)ㆍ이순이(루갈다, 1782∼1802) 동정부부, 둘째 아들 유문석(요한, 1784∼1801), 동생 유관검ㆍ이육희 부부와 그의 아들 종선ㆍ문철, 장조카 유중성(마태오, ?∼1802) 등 일가족이다. 이 가운데 유항검과 유중철ㆍ이순이 동정부부, 유문석, 유중성 등 5위가 이번에 시복됐다. 유항검의 남은 가족들은 노비로 끌려갔으며, 적몰 재산은 모두 호조에서 환수했다. 그가 살았던 집은 헐어 없애고, 그 터에는 연못을 만들었다. 유중철ㆍ이순이 동정부부는 이미 조명한 바 있기에 이번에는 유항검ㆍ문석 부자와 조카 유중성의 삶을 들여다본다.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태생인 유항검이 입교한 것은 1784년 조선 천주교회 창설 직후다. 호남 지역 첫 신자, 곧 ‘호남의 사도’가 된 것이다.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운 그는 이승훈(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친척, 이웃, 자신의 종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했다. 이제 그에게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다. 교회 가르침을 실천하고 모범을 보였으며, 가난한 이웃은 물론 자신의 종에게조차 자선을 베풀었다.
- 복자 유문석.
1786년 봄, 이승훈을 비롯한 지도층 신자들이 모임을 갖고 임의로 성직자를 임명했을 때 그는 호남의 사제로 임명돼 미사를 집전하고 성사를 줬다. 이른바 ‘가성직 제도’였다. 하지만 얼마 뒤 교회 지도층은 이런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에 따라 유항검도 자신의 성무를 중단했다. 이로부터 조선 교회는 성직자 영입 운동을 본격화하는데, 1789년 말 밀사 윤유일(바오로)을 베이징에 파견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유항검이 댔다. 1790년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가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유항검은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1791년 이종사촌 윤지충(바오로)이 제사를 폐지한 죄로 체포된 후 피신했다가 전주 감영에 자수, 형식적으로 배교를 선언하고 석방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자 유항검은 아우 유관검을 보내 전라도 순방을 요청했고, 마침 조정에서 주 신부 체포령을 내리자 주 신부 또한 박해를 피해 지방 순회에 나선다. 당시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 주 신부가 전주에 도착하자 유항검은 주 신부를 모셔와 인근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는 것을 도왔다. 그러던 차에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유항검은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돼 맨 먼저 체포됐으며, 전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돼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쳐 문초와 형벌을 받고 그해 10월 24일 전주 남문 밖에서 순교했다.
- 복자 유중성.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이 된 아버지 유항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신앙 안에서 자라난 유문석은 1801년 박해 당시 다행히 체포되지 않아 여름 내내 전주 옥에 갇힌 부친과 친척들의 옥바라지를 했다. 그러나 그해 9월 남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됐으며, 그해 11월 14일 형 유중철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다. 그의 나이 17세였다.
어려서 부친이 사망하면서 작은아버지 유항검의 집에서 자라난 유중성은 가족들과 함께 순교를 다짐했으나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 회령으로 떠나야 했다. 이에 그는 “관장이 법에 따라 처형하지 않고 유배를 보냈다”고 외쳐 다시 옥에 갇혔다가 1802년 1월 31일 전주 형장 숲정이에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그의 나이 18세였다.
[평화신문, 2014년 9월 21일, 오세택 기자]
3. 마산교구 50주년 기념 시극 ‘순교자의 딸 유섬이’ 출간
마산교구가 교구 설정 50주년을 기념해 기획한 시극 「순교자의 딸 유섬이」(강희근 지음 / 128쪽 / 가톨릭출판사 / 8000원)가 출간됐다.
유섬이는 전라도 최초의 신자였던 복자 유항검의 딸로, 1801년 신유박해로 유항검이 순교한 뒤 9살 때부터 거제도 관비로 유배돼 71세까지 동정녀로 살았다.
유섬이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거제도호부사 하겸락의 문집인 「사헌유집」(思軒遺集)에서 관련 기록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무덤도 발견됐다.(본지 2014년 4월 20일 2면, 5월 25일 3면 기사 참조)
마산교구장 배기현 주교(당시 총대리)는 이 같은 내용을 접한 뒤 시인인 강희근(요셉·73·진주 봉곡동본당) 교수에게 관련 내용을 극으로 구성해 볼 것을 제안했고, 강 교수는 짧은 문헌을 토대로 유섬이의 삶을 시극으로 풀어냈다.
시극은 ▲ 피어린 초남이 마을 ▲ 안골의 달 ▲ 매화나무에 매화 ▲ 유처녀의 성(城) 등 총 4막으로 구성됐다. 유섬이가 거제도에 관비로 유배 오는 장면에서 시작해 양반집에 위탁 관리되는 시기, 수많은 혼담을 물리치며 동정을 지키다 토굴을 짓고 들어가 25년간 동정을 지키며 기도생활 했던 시기 등을 담고 있다.
배 주교는 추천사에서 “전라도 땅 양반 가문의 귀한 따님이 천주교 박해로 관비가 되어 어린 나이에 경상도 땅 거제도로 끌려갔다 끝내 무덤 하나 남기고 간 이야기가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며 “이 귀한 문헌이 민초들의 사무치는 주제로 시극화되고 연극이 되어 우리 겨레 전체의 이야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현재 마산교구는 설정 50주년을 맞아 ‘순교자의 딸 유섬이’에 대한 지구별 순회특강을 이어오고 있으며, 내년에는 시극 공연을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가톨릭신문, 2016년 10월 9일, 정정호 기자]
4. 전주의 재지사족과 유항검 가문의 사회적 위상
국문초록(國文抄錄)
이 글은 전주 지역에서 유항검 가문의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방목(榜目) 자료를 통해 17~18세기 전주지역의 재지사족과 진주 유씨를 비교해 보았고, 진주 유씨가 전주로 이주하는 과정과 혼인을 통해 전주 지역에 정착하고, 사마시 합격자의 배출을 통해 성장하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1790년 유항검이 도동서원의 사액을 요청하는 상소에 참여한 사실을 토대로, 유항검대의 진주 유씨는 전주 지역에서 나름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아울러 유중철과 이순이의 혼인이 ‘유항검 가문 - 유헌장 가문 - 이가환 가문 - 이윤하 가문’이라는 연결고리 속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과 유항검의 서학 접촉이 그의 형인 유익검을 통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시론적으로 제기해 보았다.
Ⅰ. 문제 제기
유항검은 1784년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인 1784년 말에서 1785년 초경 양근의 권일신을 통해 입교하였다.1) 이후 전주 초남이로 돌아온 유항검은 즉시 많은 가족들을 가르치고, 친구와 친지를 비롯하여 집안의 노비, 마름, 소작인들에게도 천주교를 전파했다.
당시 유항검이 전교한 사람들은 전주뿐만 아니라, 김제, 금구, 영광, 무안 등지에 살고 있었고, 이 때문에 천주교는 자연히 전라도 각지로 퍼지게 되었다. 이에 유항검은 호남지방 교회의 초석으로 평가되고 있다.2)
유항검은 ‘호남의 사도’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초창기 한국교회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인물이다. ‘평신도 신부’로 활동한 점, ‘평신도 성직제’의 부당함을 지적하여 북경에 밀사를 파견하는 계기를 만든 점, 1795~1796년 사이에 주문모 신부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그리고 황심을 북경에 보내기 위해 자금을 마련하는 등 한국교회가 발전하는데 기여한 인물이었다.
유항검의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그에 대한 연구는 일찍부터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유항검의 신앙 수용, 교회 활동, 가계, 문지(門地), 재산, 통혼관계, 순교, 가족의 신앙과 순교 등 그와 관련된 내용은 대체로 밝혀졌다고 하겠다.3)
그런데 유항검 집안의 문지(門地)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즉 달레 신부는 유항검의 가문에 대해 “그리 높지 않은 양반 계급(une des classes les moins elevees de la noblesse)에 속한 사람이었으나, 그 덕망과 많은 재산으로 인하여 세력이 컸다.”고 서술했고, 이의 근거가 되는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에도 “les moins elevees”와 비슷한 의미인 “pas tres elevee”로 표기하고 있다.4) 그리고 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유항검 가문은 ‘그리 높지 않은 양반 가문’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유항검 가문이 맺어 온 통혼 관계를 토대로, 유항검 가문은 제법 지체 있는 가문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5) 즉 당시 유항검 가문은 유력한 집안들과 혼인 관계를 맺었는데, 이것은 유항검 가문의 지위가 그만큼 높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견해이다.
유항검 가문에 대한 두 가지 평가는 나름의 논거를 가지고 있다. 먼저 ‘그리 높지 않은 가문’의 경우는 달레 신부와 다블뤼 주교의 기록을 그대로 인정하는 입장이다. 아마도 유항검의 직계 가문에서 8대조 이래로 과거 급제자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 반영된 평가인 듯하다.
유항검은 안간공(安簡公, 유혜손)파에서 갈려 나간 소재공(素齋公, 유순선)파에 속한다〈표1 참조〉. 그의 직계에서는 소재(素齋) 유순선(柳順善, 1516~1577)이 1547년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석준(錫俊, 생원) → 진붕6)(眞朋, 감역) → 시모(時模, 부사용) → 수억(壽億) → 창진(昌辰) → 갑춘(甲春) → 동근(東根) → 익검(益儉, 생원) · 항검 · 진검 · 관검”에 이르기까지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 없었다.7) 이것은 유동근의 생부인 유재춘 계열, 즉 “시모 → 수억 → 광진(光辰) → 재춘(再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진붕이 선공감(繕工監)의 종9품직인 감역(監役)을 맡았고, 시모가 5위(五衛)에 속하는 종9품 부사용(副司勇)에 임명되었다고 하지만,8) 과거와는 무관하며 중요한 직책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나마 관직 임명은 시모 대로 끝나고, 그로부터 5대가 지난 유항검 대에 항검의 형인 유익검이 생원시(1783년)에 합격하였다.9)
이처럼 7대 유석준 이래로 문과 합격자는 물론 사마시 합격자도 배출하지 못했고, 5대조 이래로 낮은 벼슬이나마 역임한 인물이 없는 집안의 상황은, ‘그리 높지 않은 가문’이라고 해도 잘못된 평가는 아니라고 하겠다.
다음으로 ‘지체 있는 가문’이라는 평가는 유항검 가문의 통혼 관계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표2〉를 통해 볼 때, 유순선에서 유석준으로 이어지는 유항검 가문과 혼인한 집안은 18개 성씨로 이를 다시 정리하면 〈표3〉과 같다.
〈표3〉에 소개된 가문 중에 ②유석준의 처가는 대사헌과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전주 이씨 이수광(李?光, 1563 ~ 1628)의 집안이며, ⑩유중철의 처인 이순이도 이수광의 후손인 이윤하의 딸이었다.14) 전주 유씨인 ④유시재의 처는 조부가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柳永慶, 1550∼1608)이었고, ③유진붕과 ⑧유동근의 처는 안동 권씨로, 유진붕의 처조부는 서윤(庶尹)을 지낸 권수기, 증조는 판서(判書)를 역임한 권극례였다. 그리고 유동근의 처조부는 탄옹 권시(權?)로, 그는 송시열과 사돈을 맺고, 윤증(尹拯)을 사위로 삼아 당대에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다. ⑤유수억은 은진 송씨와 결혼했는데, 처조부가 장령 송석윤이고, 증조는 대사헌 등을 지낸 송응개였다. 그리고 ⑦유재춘과 유갑춘은 성종의 3자 안양군과 세종의 4자 임영대군의 후손과 혼인하였다. ⑧유회근은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 이광정의 후손인 연안 이씨와 결혼했고, ⑨유극검은 백사 이항복의 후손인 경주 이씨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⑩유중태의 전처는 윤두서의 증손녀였고, 후처는 권시와 같은 가문인 권효원의 딸이었다.15)
이처럼 유씨 가문은 종실을 비롯하여 이름 있는 여러 양반 가문들과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것은 유씨 집안이 낮은 양반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했고, 이에 이 집안의 통혼 관계는 유항검 가문을 ‘지체 있는 가문’으로 평가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유항검 가문의 문지(門地)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은 모두 나름의 논거가 있다. 이에 두 가지 입장을 포괄하는, ‘대단히 높은 가문은 아니지만, 전주 지방에서는 알려진 양반 가문’이라는 평가16)가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5대조 이래로 과거와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높은 가문은 아니고’, 여러 유력한 가문과 통혼 관계에 있었다는 점에서 ‘전주지방에서 알려진 가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단히 높지 않은 가문’이 어떻게 ‘전주지방에서 알려진 가문’이 되었을까? 그리고 높지 않았다면 어느 정도 높지 않았고, 알려졌다면 얼마나 알려진 가문이었을까? 기존의 연구를 통해서는 유항검 가문이 전주지역에서 차지하는 사회적 위상을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Ⅱ. 전주지역의 재지사족
유항검 가문이 전주지역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당시 전주지역에 어떤 가문들이 있었고, 그들 중에 어떤 가문이 유력 가문인지를 먼저 밝힌 후 그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작업을 위해 조선시대 과거합격자의 명단인 방목(榜目), 즉 문과 급제자의 명단인 『문과방목(文科榜目)』과 생원·진사시 입격자의 명단인 『사마방목(司馬榜目)』을 검토해 보았다.
조선시대 사족들이 특권계층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관직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특히 문과 합격자의 배출 여부는 가문의 가격(家格)을 결정하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문과와 함께 사마시 역시 생원 · 진사가 국가로부터 공인받은 신분이라는 점에서 지역내에서 일정한 지위를 확보하는데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17) 그러므로 방목은 한 지역의 재지사족의 존재를 파악하는데 유용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방목을 통해 전주지역의 재지사족의 현황을 소개한 글은 이미 있다. 박노석은 와그너(Wagner)와 송준호가 정리한 『조선문과방목』에서 급제 당시 전주에 거주하던 95명의 명단을 뽑은 후 시대별, 개인별, 성관별로 나누어 분석하였고,18) 오경택은 전주권의 범위를 “전주, 고산, 김제, 금구, 만경, 익산, 여산, 함열, 용안, 옥구, 임피, 태인” 등 12곳으로 설정하고, 이 지역 출신자 중 문과에 합격한 242명을 토대로 시기별 지역의 유력 가문을 분석하였다.19)
그 결과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전의 이씨, 전주 유씨, 전주 최씨, 전주 이씨, 진천 송씨, 한산 이씨, 남원 양씨, 문화 유씨 등이 전주의 유력 가문임이 밝혀졌다.20)
오경택은 유력 가문을 시기별로도 정리했는데, 15세기에는 전주를 관향으로 하는 전주 최씨, 전주 이씨, 전주 유씨가 여말 선초를 거치면서 전주를 대표하는 사족으로 활약했고, 16세기에는 여말 선초에 이 지역으로 이거한 전의 이씨가 기존의 유력 사족과 함께 새롭게 성장하는 가문이라고 하였다. 17세기에는 이거 사족으로 한산 이씨와 진천 송씨가 전주권의 새로운 유력 사족으로 등장했고, 18세기에는 커다란 변화 없이 기존의 유력 사족들이 지역의 여론 형성과 학문 발전을 주도했다고 하였다.21)
그런데 기존의 연구자들은, 부분적으로 『사마방목』을 활용하기는 했지만, 주로 문과 합격자에 초점을 맞추어 전주지역의 유력 사족을 추적하였다. 그러나 문과는 선발 인원이 적기 때문에 합격하기가 매우 어렵고, 그에 따라 합격자를 배출하는 가문도 많지 않았다. 따라서 이 방법은 지역의 유력 사족을 파악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이들 외에 지역에 존재하는 다수의 사족들을 밝혀내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다수의 재지사족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문과방목』과 함께 선발 인원이 많은 사마시 입격자들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사마시 역시 재지사족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전주 지역에서 문과와 사마시 합격자를 배출한 가문들을 정리해 보면 〈표4〉와 같다. 다만 이 글의 목적이 유항검 가문이 전주 지역에서 차지하는 사회적 위상을 살피는 것이므로, 시기는 유항검 가문이 전주로 이주하기 직전 세기인 17세기부터 전주로 이주한 18세기로 한정하였다.
〈표4〉에 따르면, 사마시 합격자를 배출한 56개 가문 중에서 “진천 송씨(20명) → 전의 이씨 · 전주 유씨(18명) → 연안 이씨(15명) → 전주 최씨(13명) → 여산 송씨 · 전주 이씨 · 한산 이씨(9명) → 밀양 박씨(8명) → 남양 홍씨(7명)” 순으로 합격자를 많이 배출했으며, 이외 6명을 배출한 가문이 2개, 5명 2개, 4명 2개, 3명 4개, 2명 6개, 1명을 배출한 가문이 30개였다.
문과는 19개 가문에서 합격자를 배출했는데, “전주 유씨(7명) → 한산 이씨(6명) → 전의 이씨(4명) → 진천 송씨 · 전주 최씨(3명) → 연안 이씨 · 태인 송씨 · 남양 홍씨(2명)” 순으로 합격자를 많이 배출했고, 이외 11개 가문에서 1명씩의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그런데 사마시 합격자와 문과 합격자를 배출한 가문의 순위가 일치하지 않는다. 〈표4〉의 비고란을 보면, 한산 이씨는 사마시 배출 순위는 6위였으나 문과 배출 순위는 2위였고, 진천 송씨는 사마시 배출 순위는 1위였으나, 문과 배출 순위는 4위로 밀려났다. 그리고 밀양 박씨와 광산 김씨, 김제 조씨, 김해 김씨는 사마시 배출 순위가 9위, 15위, 17위였지만, 문과 합격자를 배출한 19개 가문에는 들지 못했다. 반면 담양 국씨는 사마시 합격자(국민)가 1명이었는데 그 사람이 문과에 합격했고, 부평 이씨는 사마시 합격자를 2명밖에 배출하지 못했지만, 1명의 문과 합격자를 배출함으로써 가격(家格)을 높였다.
이처럼 비록 순위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사마시 입격자를 배출한 가문에서 문과 급제자도 배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과 합격자를 배출한 가문이 지역의 유력 가문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기존의 연구에서 “전주 유씨, 전주 최씨, 전주 이씨, 전의 이씨, 한산 이씨, 진천 송씨”를 전주 지역의 유력 가문으로 지적한 결과와도 부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마시 합격자를 배출한 가문에서 문과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한 경우도 있으므로, 문과 합격자의 분석만으로는 재지사족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문과 합격자를 배출한 19개 가문과 함께, 사마시 입격자만을 배출한 나머지 37개 가문도 이 시기 전주 지역의 사족으로서 주목되어야 하는데, 이 37개 가문 중에 유항검이 속한 진주 유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주 유씨는 1768년에 유극검이, 1783년에는 유익검이 생원시에 합격했는데, 이 결과는 17~18세기에 사마시 합격자를 배출한 56개 성씨 중에 21위에 해당한다. 그리고 18세기 합격자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9위가 된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진주 유씨가 전주 지역에서 대단한 사족 가문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알려진 가문이라는 것은 충분히 말해준다고 하겠다.
Ⅲ. 유항검 가문의 전주 이주와 사회적 위상
유항검 가문은 전주로 이주하기 전에 여주와 양주에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유항검의 13대조인 유염부터 8대조인 유순선대까지의 묘가 경기도 여주에 있고, 7대조인 유석준부터 5대조인 유시모대까지의 묘가 양주에 있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23) 즉 묘의 위치는 유항검의 8대조까지는 여주에 거처하다가 7대조인 유석준대에 양주로 이주했고, 4대조인 유수만대에 양주를 떠났음을 말해준다. 유수만이 양주를 떠난 시기는 동생인 유수억의 묘가 양주에 있다는 사실에서 유수억이 사망한 1671년 이후로 추정된다.
양주를 떠난 유수만은 충청도 연기로 거처를 옮겼다가, 아들인 유광진 · 유창진(유항검의 증조)대에 전주로 이주했다. 이것은 유수만의 묘만 연기에 있고, 후손들의 묘가 전주에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24) 유수만은 1705년경에 사망했으므로, 후손들의 이거(移居) 시점은 1705년 이후가 될 것이다. 그리고 1705년 당시 유광진은 44세였고, 유창진은 15세였으므로, 이 시기 전주로의 이거는 유광진이 주도했다고 하겠다.
유광진은 유우춘, 유재춘, 유갑춘 3형제를 두었는데, 유갑춘은 후사가 없는 유창진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런데 갑춘도 후사가 없었기에 재춘의 4남인 유동근이 양자로 갔는데, 유동근이 바로 유항검의 부친이다. 따라서 유항검은 족보상으로는 유수억 → 유창진 → 유갑춘 → 유동근으로 이어지지만, 실제로는 유수만 → 유광진 → 유재춘 → 유동근으로 이어지는 가계의 후손이다.
유항검 가족이 양주에서 남쪽으로 이주한 이유에 대해, 기존에는 ‘이 가문이 전통적으로 남인이었기 때문에 정권에서 소외되자 전주에 세거하고 있던 처가를 따라 이주한 것’으로 추정했다.25) ‘처가를 따라 이주했다’는 추정은 개연성이 있지만, ‘남인으로 정권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이주했다’는 추정은 개연성을 찾기 어렵다.
유수만이 양주를 떠난 1671년 이후와 유광진이 연기를 떠난 1705년 이후는 숙종의 통치기(1674~1720 재위)였다. 이 시기는 환국(換局)정치가 이루어지던 때로, 1674년에는 갑인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았고, 1680년에는 경신환국으로 서인정권이 들어섰다. 그리고 1689년에는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가, 1694년에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였다.26)
즉 숙종대는 남인과 서인이 번갈아 가며 정권을 잡던 시기로, 유항검 집안이 연기로 이주할 때는 남인의 집권기였고, 전주로 이주할 때는 서인의 집권기였다. 따라서 남인으로 정권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양주를 떠났다는 것은 수긍하기 어려우며, 유수만의 사촌인 유수방은 이들이 양주를 떠날 즈음인 167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서기도 했다. 아울러 유수만 형제와 유광진 형제는 관직에 있다 당쟁으로 피해를 보았거나, 당쟁 때문에 벼슬길이 막힌 경우도 아니다. 그러므로 막연히 ‘남인으로 정권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이주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하겠다.
정치적인 이유와 함께 유수만이 아버지를 잃고 하나 밖에 없는 동생마저 잃게 되면서 처가를 따라 낙남(落南)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유수만이 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전처인 전주 이씨와 후처인 안동 김씨 가운데 어느 한 집안을 따라 연기로 이주했다고 추정하면서, 전주 이씨와의 인연에 좀 더 비중을 두고 있다.27) 기존의 견해처럼 이들의 이주가 처가와 관련이 있다면, 김씨의 조부인 김윤후(金允厚, 1591~?)가 여주(驪州)에 살았다는 사실에서,28) 안동 김씨보다는 전주 이씨와의 인연이 좀 더 클 것으로 생각된다.
부친의 부재와 동생의 죽음, 특히 동생의 죽음은 유수만이 양주를 떠나는 시점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29) 그러나 이것이 양주를 떠나는 결정적인 이유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양주를 떠났을까? 이와 관련해서 예안에 거주하는 광산 김씨의 사례가 참고된다.
광산 김씨의 경우 예안에 정착한 지 몇 세대가 지나자 가문의 구성원이 증가하여 이들이 모두 예안에 거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장남과 직계 가족 일부를 제외한 자손들은 외가나 처가 쪽으로 이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30)
양주의 진주 유씨에게서도 광산 김씨와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다. 먼저 진주 유씨가 세거지인 여주에서 양주로 이주한 시기는 유석준대이다. 이 때도 장남인 유석필과 그 후손은 여주에 남고 나머지 자식들이 장단과 양주 등으로 이주하였다.
양주로 이주한 유석준은 대붕과 진붕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인 대붕은 후손이 없어 동생인 진붕의 아들 시재를 양자로 들였다. 그리고 시재는 수번과 수방을 낳았고, 장남인 수번과 그의 자손들은 계속 양주에 거주하며 진주 유씨의 가계를 이어갔다. 그리고 수방은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서 양주를 떠났지만, 그의 손자 대에는 다시 양주에 거주한 듯하다.
반면 유석준의 차남인 진붕 계열(진붕 → 시모 → 수만·수억)은 유수만대에 세거지인 양주를 떠나게 된다. 진주 유씨가 양주에 세거한 지 3대가 지난 시점에서, 광산 김씨처럼 차남 계열이 세거지를 떠나야 할 상황이 발생한 듯하다. 이에 유수만은 1671년에 동생이 사망하자, 이후 어느 때에 가족을 데리고 양주를 떠나 연기로 이주하였다.31)
연기로 이주한 유수만은 1705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유수만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은 다시 연기를 떠나 전주로 이주했다. 전주 이주는 유항검의 증조인 유광진이 주도했다. 유항검 가문이 전주로 이주한 이유에 대해 그들의 처향(妻鄕)이 전주였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즉 〈표2〉와 〈표3〉에서 알 수 있듯이, 유수만과 그의 장남인 유광진, 그리고 유광진의 세 아들이 모두 전주 이씨와 결혼했는데,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유광진이 처가를 따라 전주로 이거했다는 것이다.32)
유수만은 전처가 전주 이씨이고, 후처는 안동 김씨이다. 유수만의 아들인 유광진는 반대로 풍양 조씨가 전처이고, 전주 이씨가 후처이다. 그리고 유광진의 세 아들은 모두 전주 이씨와 결혼했다. 그런데 첫째인 유우춘은 1684년생으로 전주로 이주할 당시 20대 초반이었고, 둘째 유재춘은 1687년생으로 10대 후반~20대 초반이었다. 그리고 셋째 유갑춘은 1702년에 태어났으므로 나이가 매우 어렸다.
나이를 고려할 때 유우춘과 유재춘은 연기에서 결혼했거나, 전주로 이거한 후에 결혼했을 가능성이 모두 있다. 그런데 유재춘의 장남이자 유우춘의 계자(繼子)인 유회근은 1713년에 태어났다. 이 시기는 전주에 있을 때로 추정되므로, 두 형제는 전주로 이거한 이후에 결혼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주 전에 전주 지역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은 유광진의 후처인 전주 이씨가 된다. 유광진은 풍양 조씨와의 사이에서 우춘과 재춘을 낳았고, 전주 이씨와의 사이에서 갑춘을 낳았다. 그런데 갑춘을 낳은 1702년은 이들이 연기에 거주할 때이다. 따라서 유광진은 연기에서 전주 이씨와 재혼했다고 하겠다.33) 그러다가 아버지가 사망하자 연기에서 처가가 있는 전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까지 유광진의 처가가 전주 지역에 거주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바는 없다.34)
처가와 함께 주목되는 것이 유광진의 조모 집안인 희천 김씨이다. 유시모의 장인은 김택(金澤, 1584~?)으로, 1603년(선조 36) 생원시에 합격한 인물이다. 그는 합격 당시 전주에 거주했는데, 이것은 유광진의 진외가가 전주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김택에 이어 김현(金?, 1648~?)이 전주의 희천 김씨로서 1681년(숙종 7) 생원시에 합격했다. 따라서 희천 김씨는 유광진이 전주로 이주하기 전인 17세기 후반 당시, 전주 지역에서 어느 정도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진외가가 전주에 있었다는 것은 유광진이 전주로 이거한 요인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유광진의 전주 이주는 처가인 전주 이씨와 진외가인 희천 김씨를 기반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유항검 가문의 전주 이주는 만경(전북 김제시 성덕면 묘라리)에 살고 있는 일가의 영향도 있었던 듯하다. 초남이에서 50리 정도 떨어진 만경에는 같은 안간공파인 반구당(伴鷗堂) 유지화(柳志和, 1599~1680)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다. 유항검 집안은 안간공 유혜손의 첫째인 유염의 후손이고, 유지화는 넷째인 유진(柳?)의 후손이다. 이들은 유지화의 고조인 유종숙(柳宗淑) 대에 만경으로 이주했으며,35) 유종숙의 손자인 유승춘(柳承春, 유지화의 종조부)은 1552년(명종 7년)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이후 과거에 급제한 후손은 없지만 반구당 유지화가 1633년 효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진출했고, 병자호란 당시에는 인조를 호종(扈從)했다. 이후 통진현감(1637년), 보은현감·회덕현감(1653년), 진도감목관(珍島監牧官, 1656년) 등을 역임했고, 1680년에는 호종공신(扈從功臣)에 추록되고 통정대부로 승서(陞敍)되었다. 그리고 1804년에는 효자의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그의 사위인 동강 남궁제(南宮濟, 1626~?)와 함께 김제의 남산서원(南山書院)에 제향되었다.36) 유지화는 당대의 거유(巨儒)인 송준길, 송시열 등과도 교유했는데, 이러한 그의 학행으로 인해 진주 유씨가 만경 고을에서 행세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유종숙이 언제 낙남(落南)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손자인 유승춘이 1552년에 생원이 되었다는 점, 그의 현손(玄孫)인 유지화가 1599년에 태어났다는 점에서 대략 15세기 말경에 만경으로 이주하지 않았나 추정된다. 그렇다면 만경의 유지화 집안은 유항검 집안이 전주로 이거하기 200년 전에 만경으로 이주했고, 유지화대 이후에 만경에서 행세하는 집안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하겠다.
유지화가 사망한 1680년 당시 유항검 집안은 양주에서 연기로 이주해 있었다. 그러다가 다른 곳으로의 이주를 준비하게 되는데, 전주로의 이주를 주도한 유광진(유항검의 증조)도 만경의 유지화 집안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전주 초남이로의 이주를 결정할 때, 자신의 진외가 또는 처가와 함께 유지화 집안의 존재도 일정 부분 고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인근에 세거하는 일가가 있다는 것은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새로 이주한 가문의 경우, 가장 시급한 일은 되도록 빨리 지역적 기반을 마련하여 정착하는 일일 것이다. 유항검 가문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유광진은 이를 위해 지역의 유력 가문과의 혼인을 선택했다. 그는 세 아들을 모두 전주 이씨와 결혼시켰는데, 전주 이씨는 유항검 가문과 여러 대에 걸쳐 혼인을 맺은 가문이면서, 전주 지역의 유력한 사족이었다. 〈표3〉에서 알 수 있듯이, 유항검 가문이 혼인한 18개 성씨 중에 전주 이씨와의 혼인은 6대에 걸쳐 9번(33%)으로 가장 많았다. 그렇다면 새로 이주한 가문이 어떻게 전주의 유력 사족과 혼인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유순선 대부터 맺었던 전주 이씨와의 혼인 관계와 전주에 있었던 진외가 및 만경의 유지화가의 도움이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유광진은 세 아들을 모두 전주 이씨와 결혼시킴으로써, 전주 지역에 정착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했다. 아울러 유창진의 처가인 연일 정씨도 전주에 거주하며 17~18세기에 6명의 사마시 합격자와 1명의 문과 합격자를 배출한 가문이었다〈표4 참조〉. 따라서 유창진의 처가도 이들의 전주 정착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유항검 가문은 유광진 부자 대에 정착의 기틀을 마련한 이후, 여러 가문과의 통혼을 통해 외연을 확대해 갔다. 즉 유동근, 유항검, 유중태 대에 이르면, 안동 권씨, 연안 이씨, 경주 이씨, 성산 이씨, 기계 유씨, 경주 김씨, 고령 신씨, 해남 윤씨 등 다양한 가문들과 혼인을 하고 있다. 이중 안동 권씨(사마시 1명), 연안 이씨(사마시 15명, 문과 2명), 경주 김씨(사마시 1명)는 전주에 거주하며 17~18세기에 다수의 사마시 합격자와 문과 합격자를 배출한 가문이었다.
이외 유동근은 익산에 사는 홍득연(洪得淵, 1752~, 본관 남양)을 사위로 맞이했다.38) 그는 동생인 홍복연(洪復淵)과 함께 1783년 생원시에 합격한 인물이었다. 남양 홍씨는 전주에도 거주한다. 전주에 거주하는 남양 홍씨는 17~18세기에 사마시 합격자 7명, 문과 합격자 2명을 배출한 가문이었다. 익산의 남양 홍씨와 혼인을 맺었다는 것은 홍득연을 매개로 전주에 거주하는 남양 홍씨와도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진주 유씨는 유동근 대 이후 전주에서 상당히 성장해가고 있던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1768년에 유극검이, 1783년에는 유익검이 사마시에 합격함으로써, 유항검 가문은 혼인뿐만 아니라 능력을 통해서도 전주의 재지사족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표4〉에서 알 수 있듯이 유항검 가족이 이주한 18세기에, 전주에서 문과와 사마시 합격자를 배출한 가문은 29개였다. 17세기까지 포함했을 때 56개였던 가문 수가 상당히 줄었다고 하겠다. 합격자 수도 17세기에는 143명이었는데, 18세기에는 67명으로 감소했다.
29개 가문에서 3명 이상의 합격자를 배출한 가문은 8개이고, 2명을 배출한 가문은 7개, 1명을 배출한 가문은 14개이다.39) 진주 유씨는 2명을 배출한 7개 가문에 속하여, 배출 순위로만 보면 공동 9위에 해당한다. 특히 정조대에는 7개 가문에서만 사마시와 문과 합격자를 배출했는데, 유익검이 이 시기에 생원시에 합격함으로써 진주 유씨는 7개 가문 안에 포함되기도 했다.
따라서 비록 문과 합격자가 없고, 또 전의 이씨, 전주 유씨, 전주 최씨, 전주 이씨, 연안 이씨, 진천 송씨 등 기존의 유력 가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진주 유씨도 18세기 당시 전주 지역에서 나름의 사회적 위상을 갖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유항검과 유관검도 계속 과거 시험에 도전했던 것이다.40)
한편 1790년 2월 박태규(朴泰奎) 등 전라도 유생들은 부안(扶安)에 있는 도동서원(道東書院, 전북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에 사액(賜額)을 요청하는 상소를 조정에 올렸다.41) 이 상소에 참여한 전라도 유생은 272명으로, 유학(幼學)이 244명, 진사가 28명이었다. 참여한 유생들의 거주지는 알 수 없지만, 진사들의 사마시 합격 당시의 거주지를 보면, 장성, 나주, 남원, 장수, 정읍, 임실, 순창, 광주, 담양, 영광, 고부, 흥덕, 전주, 부안, 함평, 화순 등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거의 모든 전라도 지역에서, 유생들이 이 상소에 참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272명의 명단에 유항검의 이름이 있다. 전라도 각 지의 유생들이 참여한 만큼, 여기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은 해당 지역을 대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상소 건은 유항검 가문이 전주 지역의 재지사족으로서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요컨대 유항검 가문은 유광진 대에 전주로 이주하여 희천 김씨와 전주 이씨, 그리고 유지화가의 도움으로 정착에 성공한 후, 통혼 관계를 넓혀 가문의 외연을 확대해 감은 물론, 유극검과 유익검의 사마시 합격을 통해 가문을 성장시켰다. 그 결과 1790년에 전라도 유생들이 상소를 올릴 때 유항검이 전주를 대표하는 유생 중의 한 명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따라서 유항검 대는 전주에서 진주 유씨의 위상이 높아가던 시기이며, 이러한 사회적 위상은 그의 경제적 기반42)과 함께, 유항검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전파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고 하겠다.
주지하듯이 교회 창설기에 천주교를 수용한 인물들은 사회적으로 알려진 가문의 후손이면서, ‘총명하고 재변(才辯)이 있는 선비’43)들이라는 안정복의 지적처럼 학문이 뛰어나거나 과거를 준비하던 지식인들이 많았다. 양근의 권철신 가문(안동 권씨), 마재의 정약용 가문(나주 정씨), 서울의 이승훈 가문(평창 이씨), 포천의 이벽 가문(경주 이씨)이 그러하며, 이들 중 이승훈은 1780년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는 1783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진산의 윤지충도 1783년 정약용과 같은 시험에 합격했는데, 그가 생원이 되기 전 진산에 거주하며 과거에 합격한 인물은 정희수(鄭希需, 1501년 생원), 우명적(禹明績, 1726년 생원, 단양 우씨), 박기수(朴基秀, 1763년 생원, 죽산 이씨) 등 3명이 전부였다.44) 그리고 박기수의 합격 이후 20년이 지난 뒤에야 생원시 입격자가 새로 나오는데 그가 바로 윤지충이었다. 이것으로 보아 윤지충 집안도 진산에서 유력한 가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784년 당시 진주 유씨는 전주 지역에서 상당히 알려진 가문이었고, 유항검은 생원이 된 형처럼 과거 공부에 매진하던 지식인이었다. 따라서 유항검도 위에서 언급한 가문의 인물들처럼, 과거를 준비하면서 서학(西學)과 같은 새로운 분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배경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인(知人)45)들을 통해 천주교를 알게 되는데, 결국 유항검이 천주교를 수용한 것은, 그의 사회적 배경이 새로운 학문에 대한 그의 관심46)과 결합된 결과라고 하겠다.
Ⅳ. 맺음말
이 글은 전주 지역에서 유항검 가문의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였을까 라는 의문에서 출발하였다. 진주 유씨가 전주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 “그리 높지 않은 양반 계급” 혹은 “지체 있는 가문”이라는 평가가 있었고, 이러한 견해들을 종합하여 ‘대단히 높은 가문은 아니지만, 전주 지방에서는 알려진 양반 가문’이라는 설명이 통설화 되어 있다.
그런데 기존에 알려진 유항검 가문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평가는 나름의 논거는 있지만, 이를 통해 유항검 가문의 구체적인 위상을 알기에는 부족했다. 즉 “그리 높지 않은 양반 계급”은 달레 신부나 다블뤼 주교의 기록을 그대로 인정한 것이고, “지체 있는 가문”은 비록 유항검 가문의 통혼 관계를 통해 이것을 증명하려 했지만, 이름 있는 가문과 혼인했다는 사실만 확인하는데 그친 측면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유항검 가문의 사회적 위상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밝혀보고자 했다. 그리하여 방목(榜目) 자료를 통해 17~18세기 전주지역의 재지사족과 진주 유씨를 비교해 보았고, 진주 유씨가 전주로 이주하는 과정과 혼인을 통해 전주 지역에 정착하고, 사마시 합격자의 배출을 통해 성장하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1790년에 유항검이 도동서원의 사액을 요청하는 상소에 참여한 사실을 토대로, 유항검대의 진주 유씨는 전주 지역에서 나름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이와 함께 유중철과 이순이의 혼인과 관련해서, 이가환(이익의 종손)의 모친(유헌장의 딸)이 진주 유씨(익양공파)라는 점과 이순이의 부친인 이윤하가 이극성(이익의 사위)의 양자라는 사실을 들어, 두 집안의 결혼이 ‘유항검 집안 - 유헌장 집안 - 이가환 집안 - 이윤하 집안’이라는 연결고리 속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제기했고, 유항검이 서학을 접하게 되는 계기도 그의 형인 유익검이 혼인관계로 얽힌 윤지충, 정약용과 함께 같은 해(1783년)에 생원시에 합격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유익검이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얻은 서학에 대한 정보를 동생인 유항검에게 전해 주었을 가능성도 시론적으로 제기해 보았다.
물론 이러한 결론과 추정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자료의 보완이 좀 더 필요하다. 그리고 필자 개인적으로는 유항검 가문이 연기로 이주한 이유를 명확하게 밝히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유항검 가문의 사회적 위상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이 글은 유항검과 그의 가문을 이해하는데 일조(一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참고문헌
1. 자료
『만가보(萬家譜)』(한국인문과학원 편, 1998)
『문과방목』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index.aks)
『사마방목』
,중략.
[학술지 교회사학 제19호, 2021년(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방상근(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