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1년 김산향사당기(金山鄕射堂記) 최현(崔晛,1563~1640)
*1617년 향사당 재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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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山鄕射堂記(김산향사당기)
최현(崔晛,1563~1640)
列邑之有鄕射。卽古黨庠州序之制。而今之學校。相爲表裏焉。講學養士。必於學校。而尊尊老老。必於鄕黨。皆所以明人倫也。其可以輕視之乎。然而是堂也。必在閭閻之間官府之側。秪爲任事者。趨蹌公庭。奉行文書之所。務煩而任苦。地卑而處鬧。吏胥之雜沓。而鷄犬之喧啾焉。豈不病哉。金陵爲郡。居湖嶺大逵之衝。山川之美麗。人物之殷富。直與尙善相埒焉。鄕射之堂。舊在郡齋之西。逮經夷禍。沒於蓬蒿者。數十年矣。邑人欲新之而未遑焉。萬曆丁巳。鄕父老會議興廢。嫌其庭基之僻陋。移卜於城南武學堂古基。地得其新而改觀焉。制因其舊而增損焉。堂之西。有黃嶽山。千峯拱立。百泉爭流。朝雲暮靄。呈態於欄楯之上。堂之南。有鳶華池。百頃淸漣。萬朶芙蓉。月波風香。泛灎乎几席之間。眞勝槪也。躡階而登。整衣而坐。忽覺爽氣之生襟淸趣之滿眼。不知在城市喧煩之中也。於是一鄕父老曁遠近來觀者。莫不徘徊歎賞之不足。咸曰。美哉堂乎。非但金陵一邑之勝觀。吾南中鄕射之堂。無有與此甲乙者。可謂善擇其地矣。經始乎昔年。灰燼乎兵火。重新乎此日者。無非有數焉。主是議而監董者。座首鄭公維翰也。助是役而成就者。郡宰柳侯仲龍也。先建正堂九間。次建西序九間。所未備者。以待時也。噫余客也。亦嘗升堂而飮矣。抑因是而有所感矣。鄕射之堂。旣新其舊制矣。鄕射之法。獨不可復其古道耶。禮廢羊存。夫子猶有所愛焉。則矧乎斯堂名與制幷存。而鄕人之繼作者無窮。安知後日之會是堂。其不顧名思義而興飮射讀法之古禮耶。旣語鄕人。退而記之。以爲登是堂者勉焉。天啓元年暮春。烏洛晩逸完山崔晛書。
*黨庠州序당상주서) : 《예기》 〈학기(學記)〉에 “옛날의 교육은 가에는 숙이 있고 당에는 상이 있었다.〔古之敎者 家有塾 黨有庠〕”라고 하였다. 주석에 의하면, 25호 규모의 마을을 가(家)라하고 숙(塾)을 두어 마을 사람을 가르쳤고, 500호를 당(黨)으로 삼아 상(庠)을 두어서 가숙에서 올라온 사람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옛날의 교육은 집에는 숙(塾)을 두고 당(黨)에는 상(庠)을 두고 주(州)에는 서(序)를 두고 나라에는 학(學)을 두.다.의 성균관이 바로 옛날의 국학(國學)이고 향교가 옛날의 주서(州序)이고 서원이 옛날의 당상(黨庠)입니다. *趨蹌(추창) : 예도에 맞도록 허리 굽혀 빨리 걷는 것. *禮廢羊存(예폐양존) : 예를 보전하기 위한 형식뿐인 제도마저 없애면 그 예까지 없어진다는 말이다. 《논어》 〈팔일(八佾)〉에 “자공이 초하룻날 사당에 고유하면서 바치는 희생양을 없애려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사야, 너는 그 양을 아까워하느냐? 나는 그 예를 아끼노라.’ 하였다.〔子貢欲去告朔之餼羊 子曰 賜也 爾愛其羊 我愛其禮〕” 하였다. 그 주에 “예가 비록 폐지되었더라도 양이라도 남아 있으면 오히려 기억할 수 있어서 복구될 수 있거니와 만약 그 양마저 함께 없애 버린다면 이 예가 마침내 없어질 것이니, 공자가 이 때문에 아깝게 여긴 것이다.〔禮雖廢 羊存 猶得以識之而可復焉 若倂去其羊 則此禮遂亡矣 孔子所以惜之〕”라고 하였다. *飮射讀法(음사독법) :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를 행하고 법령(法令)을 낭독함.
뭇 고을에 향사가 있으니 곧 옛날에 당(黨)에는 상(庠)을 두고 주에는 서(序)를 둔 제도와 같은 것으로 지금 학교와 서로 표리가 된다. 학문을 강하고 선비를 기르는 것은 반드시 학교에서 하고, 높은 이를 높이고 늙은이를 섬기는 것은 반드시 향당에서 하였다. 이것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었으니 그것을 가벼이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집이 반드시 여염집 사이와 관부의 옆에 있으면서, 임무를 맡은 사람이 관청에 공손히 드나들며 문서를 봉행하는 곳이다. 업무는 번거롭고 임무는 고단한데 땅이 낮고 시끄러운 곳에 있어서, 이서(吏胥)들이 뒤섞여 있어 달과 개들이 울고 짓는 것과 같으니 어찌 병이 아니리오.
금릉은 군이 되어 호서와 영남의 큰 교통로에 있으면서 산천이 아름답고 인물이 많은 것은 상주와 선산에 엇 비슷하다. 향사당이 예전에는 군청 서쪽에 있었는데, 오랑캐의 화를 겪으면서 무너져 쑥대밭이 된 것이 수십 년이 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새로 짓고 싶었으나 겨를이 없었는데, 만력 정사년(1617년)에 고을의 부로들이 모여 흥망을 논의하고, 마당 터가 외지고 좁은 것이 싫어 성 남쪽 무학당 옛터에 옮기기로 하였다. 새터를 얻게 되니 달라 보이게 되었고, 제도는 옛것에서 비롯하여 더하거나 줄였다.
당의 서쪽에는 황악산이 있어 수많은 봉우리가 공손히 서 있고, 여러 물 들이 다투어 흘러내려 아침 안개와 저녁 운무가 어려 난간 위에 보여준다. 당의 남쪽에는 연화지가 있어 백경의 맑은 물결이 있고, 만송이 연꽃들이 피어나 달빛과 풍향이 궤석 사이에 넘치니 참으로 좋은 경치이다. 계단을 밟고 올라 옷을 단정히 하고 앉으니, 상쾌한 기운이 소매에서 생기고 맑은 정취가 눈에 가득한 것을 홀연히 깨달았는데, 성시의 시끄럽고 번잡한 가운데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에 고을의 부로들과 원근에서 와서 보고자 이른 사람들이 배회하며 감탄하기를 마지않으며 모두 말하기를, “아름답구나! 이 집이여. 금릉 한 고을의 좋은 경치가 아니라 우리 영남의 향사당 중에 이것과 견주어 갑을 다툴 곳이 없으니 그 터를 잘 골랐다고 할만하다. ” 하였다.
지난날 처음 지은 것이 병화에 잿더미가 되었기에, 오늘날 새로이 지었으니 운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처음 논의를 주장하고 감독한 이는 좌수 정유한 공이다. 이 역을 도와 이룬 사람은 군수 류중룡 공이다. 먼저 정당 아홉 칸을 짓고, 다음으로 서서 아홉 칸을 지었고 미비한 것은 때를 기다리게 하였다.
아! 나는 나그네로 역시 당에 올라 마시면서 감상하였고, 이에 따라 느낀 바가 있었다. 향사당은 옛 제도를 이미 새롭게 하였지만, 향사의 법은 다만 옛날의 도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예가 비록 폐해졌더라도 형식이 남아 있으면 복구될 수 있으니, 공부자께서 오히려 그것을 사랑한 것이다. 하물며 이 집의 이름이 제도와 함께 있어 고을 사람들이 이어서 만드는 것이 무궁할 것이다. 후일 이 당에 모이는 사람들은 이름을 돌아보고 의를 생각하지 않고,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를 행하고 법령(法令)을 낭독하는 고례(古禮)를 일으키는 일이 있을 줄 어찌 알겠는가. 이미 향인들에게 말하고 물러나 기록하여 이 집에 오르는 이들을 위해 권면하노라.
천계원년(1621년) 모춘 오낙일만(烏洛晩逸) 완산인 최현이 쓰다
*정유한(鄭維翰,1568~) 본관 연일. 字인보(仁輔). 김산거주. *김장생 문인. 이인거(李仁居)의 매부.
*유중룡(柳仲龍,1558~1635) [진1582][문1600] 본관 문화(文化). 字여견(汝見), 호는 어적산인(漁適散人). 유정손(柳正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하(柳賀)이다. 아버지는 증승지(贈承旨) 유유춘(柳有春)이며, 어머니는 청주경씨(淸州慶氏)로 부장(部將) 경지(慶祉)의 딸이다. 오건(吳健)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김면의 휘하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으며, 김산군수를 역임(1612.윤11.12~1617.11.6.)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