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슈바이처
Albert Schweitzer
알베르트 슈바이처(독일어: Albert Schweitzer 1875년 1월 14일 ~ 1965년 9월 4일)는 독일 출신 프랑스의 의사, 음악가, 철학자,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이다. 슈바이처는 '생명에 대한 경외'[1]라는 그의 고유한 철학이 아프리카 의료 봉사에서 더 나아가 인류의 형제애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이 철학은 그가 중앙 아프리카 서부 지역 가봉의 랑바레네에서 알베르트 슈바이처 병원을 세울 때에 설립 이념이 되었던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한편 음악가이자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했던 그는 독일의 작곡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를 연구했으며, 20세기 초의 오르간 개선 운동(Orgelbewegung)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생애
자서전 '나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슈바이처는 1884년까지 마을학교에서 공부하고, 1885년 뮌스터 실업중학교(라틴어 같은 고전말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 한국식으로 말하면 한문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에서 공부했다. 라틴어는 개인지도를 받으며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했다.
작은 할아버지댁에서 학교를 다니다[편집]
슈바이처를 다룬 여러 위인전들에서 그의 또래 친구인 게오르크가 "너처럼 고기수프를 먹고 자랐으면 씨름에서 이겼을 거야."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기록하지만[2], 이는 과장되었거나 잘못된 정보로, 슈바이처 집안은 빠듯한 살림살이였다. 자서전 《나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슈바이처는 고등학생 때에 자신의 대부모였던 작은 할아버지, '루트비히 슈바이처'[3] 댁에서 공부했다. 부친이 개신교 교회에서 목회하여 받는 박봉으로 대가족을 돌보아야 하는 빠듯한 살림살이 때문에, 자녀가 없던 작은할아버지 댁에서 학교를 다니며 생활비 부담을 덜었다. 작은할아버지 부부는 슈바이처를 엄격하면서도 자상하게 가르쳤고, 슈바이처는 그 분들의 정성어린 교육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했다.
베만 선생님[편집]
뮐루즈고등학교 때에 성적이 나빴는데 유럽 언어 어휘의 중요한 어원이 되는 라틴어가 부족해서였다. 《나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4급반 때에 베만 선생님이 공부방법을 가르쳐 주어서 성적이 좋아졌다. 베만 선생님은 미리 준비해서 학생들을 가르쳐서 슈바이처는 무척 감동받았다. 하지만 세계 1차 대전 때에 식량난이 심각해져서 굶주림과 정신장애[4]로 고통받았으며, 자살함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편집]
카이제르스베르그에서의 유년시절은 슈바이처의 기독교 믿음과 정신 성숙에 영향을 주었다. 루터교회 목사인 아버지는 아들이 성서를 읽으며 궁금해하는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으며, 교우들의 대부분이 가난한 농부들이었던 주위환경은 슈바이처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했다. 참고로 슈바이처하면 어린 시절 친구와 씨름을 해서 이겼는데 친구가 "나도 너처럼 고깃국을 먹었다면 이겼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충격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근거는 없다. 1931년에 쓴 자서전 《나의 생애와 사상》을 보면, 슈바이처는 가난한 친구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슈바이처의 아버지는 성찬예배[5] 때 아프리카 사람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서 자주 설교했다. 이러한 성장환경은 슈바이처를 역사적 예수연구 1세대에 참여한 진보적인 신학자이자, 아프리카 의료봉사자가 되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평화주의 사상[편집]
알자스는 개신교 종교개혁이라는 복잡한 기독교의 역사 때문에,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가 어울려 살고 있었다. 이들은 교단은 달랐지만 기독교인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으므로, 서로의 전례(의식(Ritual), 예식(Ceremonial), 순서(Order))로써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기독교인으로서의 평화를 유지하며 살았다. 이러한 유년시절의 경험은 슈바이처가 자신과 다른 사상을 존중하는 너그러움을 갖게 해주었다. 슈바이처가 살던 동네에는 유대 상인이 있었다. 그는 가축과 땅을 거래하는 상인이었는데, 반유대주의로 인해 마을 사람들에게 '돼지'라는 입에 담긴 힘든 모욕을 받으면서도 전혀 미워하지 않았다.[6] 이를 본 슈바이처는 용서만이 악을 굴복시키고 갈등을 극복하는 길임을 확신하는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음악[편집]
음악을 좋아한 슈바이처는 성 스테판 루터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는 오이게네 뮌히 선생님에게 오르간을 배웠다. 그는 어려서부터 오르간을 배워 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를 하였으며 1906년 파리의 바흐 협회 설립에 협력하고, 그 곳의 오르간 연주자를 겸하였다. 아프리카 봉사를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유럽순회 연주회를 가지기도 했으며, 소니음반을 통해 바흐의 푸가 등을 음반녹음도 했다. 바흐의 작품에 대한 책도 썼다(바흐의 오르간 작품 Bachs Orgelwerke).
신학[편집]
대학생 시절, 19세 이상의 독일국민은 군복무를 해야 한다는 병역법에 따라 군복무를 하였으며[7], 중대장의 배려로 특정시간(오전 11시-오후 15시)에 군인 신분으로 대학교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슈바이처는 1899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칸트 연구로 철학박사, 이듬해 예수의 생애와 초기 기독교 연구로 신학박사의 학위를 취득했는데, 신학생 시절 그는 당시 서구 신학계에 등장한 예수전들을 연구하면서 예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신학적으로 맞는가를 연구하였다. 이러한 신학적 사유는 예수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임박한 것으로 기대했으나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자 스스로 죽음을 택했으며, 2000년 전 갈릴래아에서 그랬듯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대화한다는 그리스도론을 주장하게 하였다.[8] 김영한에 의하면 "슈바이처에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세계기독교인들이 매년 사순절(四旬節)에 수난을 기념하는 대속의 죽음이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슈바이처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부정적으로 결론된 역사적 예수의 상이었다. 그리하여 역사적 예수 용어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는 전통 기독교 신자들이나 복음주의 신학자들과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하면 역사적 예수 용어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수상은 계몽된 이성으로는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실제 역사적으로 있었던 예수상을 찾자"고 하여 신앙과는 분리된 예수에게 붙은 용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역사적 예수 논구 운동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영문 번역판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을 쓴 슈바이처의 박사학위 논문을 대표적 실례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 운동은 후기 불트만 학파를 거쳐 오늘날에는 미국의 “예수 세미나” 운동에 이르고 있다.[9]
목회[편집]
1899년 스트라스부르의 목사가 되었으며, 1902년 모교의 신학부 강사가 되었다. 성 니콜라이 루터교회의 부목사로 목회할 당시 슈바이처 목사는 견신례를 준비하는 청년들과 자유롭게 토론을 했는데, 이는 그가 사목하던 교회에서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졌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아서 윌리엄 하인젤만의 에칭 작품의료 봉사[편집]
당시 아프리카의 의료 환경은 매우 열약했고 이를 개선하고자 의료봉사를 아프리카로 나갔다. 슈바이처는 행복을 모두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고 이를 실천하는 방법을 의료 봉사로 표현하였다.
회심[편집]
군대 복무 중 성령강림주일 휴가를 집에서 보낼 때에 "나는 이렇게 가족들과 행복하게 휴가를 보내는데, 이러한 행복을 나만 누려도 되는가?"라는 생각을 했다. 어려서부터 갖고 있던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나만 행복하게 살 수 없다"라는 인식으로 성숙한 것이었다.
의료봉사자가 되기 위한 준비[편집]
슈바이처의 자서전 나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그는 21세 때 '30세까지는 학문과 예술 속에서 살고, 그 후부터는 인류애의 직접 봉사 활동으로 들어가자'는 결심을 실현하기 위하여, 30세 되던 해인 1905년 의학과정에 진학했다.
아프리카로[편집]
1913년 아내 헬레네 브레슬라우와 함께 흑인을 위한 의료 사업에 평생을 바치기 위해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현.가봉 공화국)의 랑바레네에서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통역은 백인 선교사들과 동역하여 영어와 불어에 능통한 흑인 간호조무사 누쳉이 해주었으며, 병원 건물은 선교사가 사용했던 닭장을 수리하여 사용했다. 그는 저술과 강연, 연주, 레코드 등에 의한 수입으로 병원을 자력으로 운영하였다.
전쟁[편집]
그러나 자금이 부족하여 병원 운영이 어렵게 되자, 병원의 기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돌아왔을 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가 태어난 알자스 지방은 당시 프랑스의 영토였다는 이유로 구금되었으며, 1917년 프랑스 포로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그에게 준 가장 큰 상처는 어머니가 1916년 프랑스 군인들의 군마(軍馬)에 치여 죽은 사건이었다.[10]
아프리카로 돌아가다[편집]
그 후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하자 슈바이처의 고향은 프랑스 영토가 되었고, 이에 따라 그는 프랑스 국적을 선택할 수 있었다. 슈바이처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가봉에서 활동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국적을 독일에서 프랑스로 바꿨다. 그 후 6년간 유럽 각지로 돌아다니며 강연과 파이프오르간 연주로써 모금을 한 다음 다시 1924년 아프리카로 돌아갔으나, 병원은 부서져 뼈대만 남아 있었다. 다행히 여러 곳에서 후원금이 들어와 병원은 곧 다시 세울 수 있었다. 당시 유럽은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복구를 하던 때였기 때문에 후원자들의 처지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병으로 고통받는 아프리카 민중들을 위해 기꺼이 후원한 것이었다.(의료선교 이야기인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참조) 그를 돕기 위하여 의사와 간호사들이 그 곳으로 자원하러 왔다. 그는 한센병 환자 거주지도 추가로 세우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정신적 장애인들을 위한 의료시설도 만들었다. 그의 이러한 활발한 활동은 36명의 백인 의사, 간호사 그리고 다수의 원주민 직원들의 봉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병원운영에 필요한 돈은 3년에 한 번 꼴로 유럽으로 돌아와 연주회를 열어 번 돈과 저서의 인세, 강연으로 받은 돈과 기부금으로 충당되었다. 1957년 라디오 강연과 신문 기고를 통해 핵무기에 반대하는 반핵 운동을 하였으며, 1965년 랑바레네에서 90세 생신잔치를 마지막으로, 그가 사랑하는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서 9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사상[편집]
사소한 생명이라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생명 외경 사상(생명 경외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론[편집]
그는 '흑인의 아버지', '원시림의 성자'로서 그 위대한 사랑의 힘으로 모든 인류에게 행복을 나누어 주기 위하여 그의 일생을 바쳤다. 그의 신조는 적극적인 우애이며, 신학적으로는 예수의 교의에 있어서의 종말론적 요소를 강조하였다.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를 도덕적인 인간으로 묘사하였으나, 슈바이처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나라가 올 것으로 기대하셨으나 그렇지 않자 스스로 고난을 받으셨다고 보았다. 또한 예수는 갈릴리호수에서 제자들을 부를 때에 그러했듯 영리한 사람이던, 우매한 사람이던 누구나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시며, 그분을 따르는 삶으로써 예수가 드러난다고 생각했다.[11] 슈바이처에게 예수는 종말론적인 예언자이자 모든 기독교인들이 삶으로써 따라야 할 실천적 선구라고 할 수 있다.
생명에 대한 경외[편집]
슈바이처는 모든 생명은 거룩하며, 희생되어도 되는 생명은 없다는 기독교 사상인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을 저서 <나의 삶과 사상>에서 주창하였다. 따라서 그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현대사회에 분노하는 순수한 사람이 있을 때에 역사가 바뀐다고 보았다. 한국삐아제에서 철학자의 감수를 받아서 만든 슈바이처 전기에 따르면, 한센인들을 섬긴 이일선 목사(1922-1995)가 젊었을 때인 1958년부터 1961년에 알베르트 슈바이처와 당시 프랑스자치공화국이었던 가봉공화국의 랑바레네에서 같이 일한 적이 있다. 아프리카의 더운 날씨때문에 나무에 그물침대를 걸어서 쓰려고 했는데, 슈바이처가 "나무에 그물침대를 걸면, 나무가 매우 아플 거예요."라고 말씀하였다 한다. 그 말씀을 듣고 슈바이처가 생명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 분이었음을 느꼈다고 한다. 알베르트는 생명에 대한 경외를 주장하고 실천했다. 종교학자 오강남 선생과 성공회 사제인 김기석(아모스)신부에 따르면,슈바이처는 날벌레가 타 죽을 것이 가엾어 밤에는 창을 닫고 불을 켜지 않았으며, 나뭇가지 한 개도 함부로 꺾지 않았다. 김기석 신부는 기독교 사상에서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생명윤리를 한국사회에서 실천한다면, 닭을 더 많은 달걀생산을 위해 좁은 사육장에 가두어 사육하는 폭력이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평화운동[편집]
그는 바흐 연구의 권위자이며, 탁월한 오르간 연주자로, 파이프 오르간의 기술자이기도 하다. 195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일찍부터 핵무기에 반대하는 반핵운동을 하였고 평화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저서도 매우 많으며, 대부분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힌다.
책[편집]
신학 관계 저서로 《예수의 생애 연구사》(1913년작, 원제:《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 철학 저서로 <문명 철학> ,<물과 원시림 속에서>가 있다. 자서전 <나의 삶과 사상>은 독문학자 천병희 선생이 한국말로 옮겨서 한국독자들에게 소개했다.
일화[편집]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 하기 위하여 기차를 타고 가고 있었는데 슈바이처를 취재 하기 위해 기자들이 몰려왔다. 특등칸과 1등칸과 2등칸을 모두 뒤졌으나 슈바이처를 찾지 못하였다. 기자 한 사람이 3등칸에서 사람들을 진찰 하고 있는 슈바이처를 발견한 뒤 물었다. "왜 이런 3등칸을 타고 가십니까?" 슈바이쳐가 대답 하였다. "저는 편안한 곳을 찾아 다니는게 아니라 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다닙니다. 1, 2등석의 사람들은 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신학 연구와 사상[편집]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그리스도론 비평[편집]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예수의 생애 연구사》(1913년작, 원제:《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예수전들이 사실은 저자가 갖고 있던 생각과 당시 시대배경을 역사적 예수에게 투사한 것이라고 규명하여, 예수전들에서 묘사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초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생각하던 도덕적으로 이상적인 인간 즉, 성인의 이미지일 뿐이지 역사적 예수의 진짜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12] 슈바이처는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를 앞으로 오게 될 종말론적인 나라로 이해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정의와 평등이 실현되는 현실속의 나라로 이해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국 시기의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그의 생존 당시 일부 학문 집단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역사적 관점에 기초하는 비종교적 접근 방식과 예수를 세상의 종말을 예언한 그리스도로 보는 전통적인 종교적 접근 방식에 모두 반대하였다. 간혹 슈바이처를 예수를 윤리적으로 완전한 인간으로 이해하여 사회선교에 헌신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유주의 신학자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잘못된 이해이다. 슈바이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그리스도론을 예수를 완전한 윤리적 인간으로 이해한 그리스도론이 투영된 것일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슈바이처가 이해한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했으나 자신의 기대대로 되지 않자 스스로 고난을 불러왔으며, 갈릴래아에서 그랬듯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는 분이다.[13] 그의 신학은 철저하게 초자연을 거부한 이성주의에 근거한 신학연구였다고 평가된다.
보편적 윤리[편집]
슈바이처는 일생동안 현실에 근거한 보편적 도덕 윤리를 찾고자 하였으며, 또한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게 하고자 노력하였다.[14] 이러한 그의 정신은 그가 생전에 남겼던 다음과 같은 말에 잘 나타나 있다.
“ | "연대(compassion, 함께를 뜻하는 com과 고통을 뜻하는 passion을 더한 말.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 고통받음.)라는 이름의 원을 모든 생명에게로 넓히기 전까지는, 인간은 진정한 평화를 느낄 수 없다." (Until he extends his circle of compassion to include all living things, man will not himself find peace.) | ” |
“ | "나는 여러분의 운명을 알지는 못 하지만, 이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 정말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섬김이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탐구하여 깨달은 사람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I don't know what your destiny will be, but one thing I do know: the only ones among you who will be really happy are those who have sought and found how to serve.) | ” |
평가[편집]신학[편집]
의사이기 이전에 개신교 선교사로 아프리카에 갔으므로, 그의 봉사 활동 역시 순수한 인도주의가 아니라 종교적인 야심의 소산일 뿐이라는 비판도 들어야했다. 이는 부당한 비난이다. 슈바이처는 유럽 제국주의의 착취에 의해 아프리카가 병들어간다는 사실때문에 아프리카에서 사회선교를 했다. 또한 사회선교 일기인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를 읽어보면 아프리카 주민들에게 기독교를 강요하기는커녕, 근본주의 노선의 개신교에서 미신이라고 낮추어보던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소박한 전통종교를 존중했다. 슈바이처의 사회선교는 사람들에게 개신교 신학자로서 존경받으려 하거나 개신교의 교세를 넒히려는 종교적 야심의 소산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럽에서 이미 역사적 예수와 신약성서연구로써 신학박사를 취득했으므로 굳이 사서 고생함으로써 존경을 받으려고 애쓸 이유가 없었다. 슈바이처는 자유주의 신학자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그리스도교를 합리주의로써 해석함으로써 그들이 계몽주의 시대에 적응하도록 해주었다.
의료 수준[편집]
슈바이처는 정식 학위 과정을 거쳐 의사가 되었으나 진료 실력에 대한 비난도 있었다. 그가 진료했던 랑바레네의 병원 의료 수준과 슈바이처의 진료 실력은 한 마디로 수준 이하였지만 과대평가되었다는 주장도 있다.[15] 물론 현대의학자들이 보기에는 슈바이처의 의료가 수준 이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1차 세계대전 영향을 받았고, 물자와 약품이 부족한 아프리카 오지에서 진료를 하던 환경을 감안해야 한다. 중요한 점으로 유럽에서의 기득권(철학자, 음악가, 루터교회 신학자)을 버리고, 아프리카에서 사회선교를 한 슈바이처의 실천을 부정하지 못한다. 슈바이처의 자서전《나의 생애와 사상》을 읽어보면, 제1차 세계대전 때에 슈바이처가 적국인 독일사람이라서 프랑스 군대가 가택연금을 하자 현지 주민들과 백인 이민들이 진료를 받지 못해 항의했다.
저서[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