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의 기록, 우리 동네 예술가]
이어령 "내 기념관 절대 안 만들어, 서재만 남기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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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21 19:53l최종 업데이트 19.05.15 12:00l
글: 김연정(seouleditor)
편집: 손지은(93388030)
서울의 중심인 종로는 수많은 예술인들이 600여 년 동안 문화의 역사를 일궈온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종로의 기록, 우리동네 예술가'는 종로에서 나고 자라며 예술을 펼쳐왔거나, 종로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이 시대의 예술인들을 인터뷰합니다.[편집자말] |
예리한 통찰력으로 시대의 현안을 꿰뚫어보고, 사색하게 하는 화두를 던지며, 왕성한 필력으로 가르침을 전해온 이어령 선생은 줄곧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이자, 우리의 정신적 스승이었다.
무수한 과거의 어록들이 다시 회자되듯이, 그가 지금 전하는 이야기도 현재를 지나 미래로 부쳐질 전언(傳言)이 될 것이다. 암 선고를 받은 이후에도 펜을 놓지 않고 하루하루 치열한 생을 살고 있는 그는 우리의 정신적 고향을 잘 가꿔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며, 젊음이 영원하리라, 죽음이 멀리 있노라 망각하고 사는 동시대인에게 '메멘토 모리'를 잊지 말 것을 힘주어 당부했다. 지난 5일 그의 서재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였다.
시대의 지성이 되기까지
이어령 선생은 스물 둘의 나이에 <한국일보>에 기성 문단을 날카롭게 비판한 글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며 국내 문단계에 새로운 담론의 장을 연다. 혜성같이 등장한 그는 남다른 혜안과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부지런히 꿰어가며 시대가 나아갈 비전을 제시한 크리에이터였다.
4.19 직후 불과 스물여섯의 나이에 <서울신문>의 논설위원이 된 이래,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 중앙일간지 논설위원을 역임하며 시국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칼럼니스트로 우뚝 섰다. 또 서울올림픽 올림픽 개·폐막식 총괄기획자, 새천년준비위원장, 한·일 월드컵 문화관광대표로 활약하면서 두고두고 회자될 역사적인 순간을 만들어냈다.
정적의 미학을 극적으로 구현해낸 굴렁쇠 소년의 퍼포먼스와 즈문둥이(밀레니엄 베이비)가 탄생하는 장면을 전 세계에 생중계한 이벤트 모두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1990~1991년에는 초대 문화부장관으로 우리나라 문화정책의 기틀을 세웠고,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30여 년간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참교육을 전했다. 또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젊음의 탄생> 등 수 십 권의 명 저서를 집필해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새로운 영감을 일깨워주며 '시대의 지성'으로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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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의 아이콘이라 불려온 이어령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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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인생 여정을 통해서도 미루어 짐작 가능하듯, 그의 이름 세 글자에는 수많은 수식어와 직함들이 따라 붙는다. 그만큼 대중들에게는 경계의 벽을 넘어 다양한 층위의 세계를 자유롭게 노닌 인물로 기억된다. 그러나 지난해 진행된 셀레브TV 인터뷰에서 "나는 인생을 좁게 살았다"는 말을 남겨 듣는 이들로 하여금 의아함을 자아내게 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굉장히 넓게 산 줄 아는데 좁게 산거야. 정치, 경제 쪽은 전혀 안 했잖아. 문화 분야에만 있었지. 난 당장 우체국 가서 편지 부치라고 해도 못 부쳐요. 운전도 못해. 자원봉사도 못해봤고, 야구장이나 축구장에도 직접 가본 적이 없어요. 그렇지만 나는 정치부터 경제, 사회까지 모든 이야기들을 문화적 관점에서 말 할 수가 있잖아. 정치문화를 다룰 수도 있고, 운전은 못해도 자동차문화에 대해서는 논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반대로 정치하는 사람이 시 이야기 할 수 있어? 재벌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문학 이야기는 못 하잖아. 근데 우리 같이 시 쓰는 사람은 재벌 이야기 쓸 수 있거든. 소설가도 정치 이야기를 얼마든지 쓸 수 있잖아. 에밀 졸라(Emile Zola) 같은 작가는 파리 사는 사람 전체를 주인공으로 삼아 글을 썼으니까.
신문의 섹션에 대입해보면, 또 좁게 살았다고 할 수 있지. 당장 신문 1면을 차지하는 게 정치면이잖아요? 문화면은 저 뒤에 조그맣게 나오지. 난 거기 산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정신적인 영역에서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분야를 다 다뤘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이야기하다 보니 이마저도 모순인 거 같지만, 원래 사람은 모순 속에서 살아가잖아."
"난 남의 문학관 만들어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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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품격이 살아있는 영인문학관 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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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은 2001년에 부인인 강인숙 전 건국대학교 교수 겸 문학평론가와 두 사람 이름의 한 글자씩을 따서 영인문학관을 개관했다. 외부의 원조 없이 사재를 들여 만든 이 공간은 누군가가 모으지 않으면 사장될 우려가 있는 자료들을 모아 후세에 전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대중교통으로는 접근이 힘든 평창동의 언덕배기에 위치하고 있지만,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많은 이들이 찾아오는 명소로 손꼽힌다.
"남들이 왜 자신의 문학관은 없느냐고 하는데 나는 남의 문학관을 만들어주는 사람이지 나를 위한 기념관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거든. 영인문학관은 규모는 작지만 엄격히 선별한 문인들을 대상으로 했기에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요. 십 년 동안 기획전도 열고, 문인이 돌아가시면 추모전도 열어주고 그러니까."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 삶의 터전을 평창동에 세운 '1호 주민'으로서 그는 평창동이 예인들에게 좋은 창작의 안식처로 남기를 희망한다.
"한밤중에 뻐꾸기소리도 나고, 송화 가루도 날리는, 그야말로 자연의 산 속에 집을 지은 거지. 시설 외의 지역이라고 전화를 안 놔주는 걸 사비로 전신주를 열 몇 개인가 세웠어요. 그때는 경비시스템도 없고, 연락수단이 전화뿐이니까 별 수 있나요.
그 다음부터 사람들이 입주하기 시작했는데 묘하게도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들었어요. 조용하게 집필에 전념하려고 여기 온 사람으로서 도시속의 예술인들이 고요한 산속에 들어간 느낌으로 살 수 있는 '도시속의 은둔처'로 가꾸어 나갔으면 좋겠어요. 문인들이 이 다음에 은퇴해서 조용하게 창작에 몰두하고 싶을 때, 멀리 시골까지 갈 것도 없이 여기 오면 그게 가능할 수 있게요. 온실처럼 여기가 종로문화를 보존하고 양성하는 곳이 됐으면 좋겠어요."
"문학의 '수원지'를 잘 지켜야 해"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문학 위기론과 독서문화 퇴행에 대한 갑론을박 속에서 영인문학관이 추구하는 방향성은 무엇인지 물었다. 문학이 대중화된 시대에서 순수 문학의 근원적 뿌리를 지켜내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문학이 죽었다고들 하는데 죽은 게 아니라 퍼진 거야. 그만큼 대중화된 시대라는 거지. 시가 광고문의 카피가 되고 랩이 되고, 이야기하면 전부 스토리텔링이 돼. 심지어 치킨 집 이름도 닭 이야기잖아. 세계 어디를 가 봐도 한국처럼 간판 이름을 독창적으로 짓는 나라는 본 적이 없어.
똥싼바지라는 음식점 간판도 봤는데, 전위문학에서나 쓰던 비속어도 이제는 자유롭게 거리에 나서게 된 거지. 까꼬보꼬라는 이발소 이름도 있잖아. 문학이 이발소 간판까지 간 거라니까. 그렇기 때문에 본격 문학이 저수지라면, 그 저수지가 물을 뿜어서 수도꼭지들이 많아진 거예요. 그 말인즉슨 커진 저수지가 오염되면, 대중문화도 썩는다는 이야기지. 종로문학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해요. 수원지(水源地)를 잘 지켜야 하는 거죠. 영인문학관도 작은 수원지예요."
또한 굳이 더하고 꾸미지 않더라도, 예술가들의 혼과 향취를 그대로 머금은 곳이라면 진정한 문화공간으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그는 믿는다. 영인문학관을 작가들이 숨 쉬는 공간으로 오롯이 내어주고, 자신의 이름을 딴 기념관을 별도로 만들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작은 문학관이 큰 문학관보다 좋다는 것이 이것저것 다 모아놓으면 희석화가 돼요. 문학은 전시보다 아카이브 중심으로 하니까 더 전문성이 생겨. 외국에서는 따로 기념관을 짓거나 하지 않아요. 한평생 자기 예술 혼을 바친 예인들이 살던 집, 그 자체가 문학관이나 미술관이 되는 거지.
임어당(林語堂·린위탕·중국의 작가이자 문예비평가) 집에 가보니까 생전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어서 당장이라도 살아 돌아와 거기서 글 쓸 것 같더라니까. '이 사람이 여기서 이렇게 살면서 글을 썼구나.' 하고 체취를 느낄 수 있어야지.
다 쓰러진 집이라도 그게 가치가 있는 거거든. 바깥에다 지으면 그 사람과 아무런 연고가 없잖아요. 나 자신도 내 이름의 기념관을 따로 세울 생각이 없어요. 몇 군데서 지어준다고 제안도 왔는데 절대 못하게 해요. 영인문학관을 세우긴 했지만, 내 개인 기념관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글 쓰던 서재만 내 죽는 날 모습 그대로 남기려고 해요."
(다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당대 한국 최고의 지성인...
이어령님의 를 일었을때의 감동은 충격적이었습니다. 합리적인 판단과 풍부한 지식과 말의 묘미는 지식인이고 한국인이고 멋을 일깨운 예술가입니다. 리영희 김용옥 고은 송경동 서중석과 같은 무리와는 품위가 다른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