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낙수(山行 落穗)
정성영
적어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서울 강서구에 있는 우장산에 간다. 집에서 아주 가깝기 때문이다. 우장산에는 신비한 전설도 있고, 새마을 탑도 있고, 10여 년 전부터 내가 관리해 오는 자칭 내 전용(?) 평행봉도 있다. 주민들을 위해 각종 운동기구가 여러 곳에 있는데 평행봉도 네 군데나 있다. 내가 전용으로 관리하는 곳은 사람들이 별로 왕래하지 않는 곳이다. 비교적 외진 곳이라 주변에 풀이 무성하고 빗물에 패여 산사태가 나 있었다. 풀을 뽑고, 물길을 돌려내어 주변을 정리했다. 양지쪽이라 나뭇잎이 떨어진 겨울이면 햇발이 따뜻하고 여름에는 녹음이 짙어 그늘이라 시원하다. 가을이면 낙엽이 많고 봄에도 아카시아 꽃이며 벚꽃잎의 낙화가 수북이 쌓이기도 해서 수시로 쓸어내야 깨끗하다. 처음에는 나뭇가지로 빗자루를 만들어 사용했지만 금방 닳아버려 수시로 만들어야 했다. 한번은 공원 관리원들이 나무를 심고 빗자루로 쓸고 있기에, 빗자루 여유가 있으면 한 개 놔두고 가기를 부탁했다.
평행봉 주위는 앞으로 내가 청소를 하겠다고 자청했다. 그날은 여유가 없다고 하더니, 그 뒤 여러 날이 지나고 나서 보니 대나무 빗자루 하나를 남겨두고 가서, 요즘은 그것을 잘 쓰고 있다.
근래 건강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주말이면 산을 찾는 사람들이 무척 많아졌다. 나만 해도 전에는 도봉산, 북한산, 수락산이며 남한산성 등 서울 근교의 산행을 두루두루 많이 했다. 가을이면 김포 쪽으로 도토리며 알밤을 주우러 가기도 여러 해 계속했다. 산골 태생이라 도토리묵이며 밤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나이 들며 적어지는 활동량도 늘리고 건강한 삶을 위한 내 나름대로 몸부림이었지 싶다. 세월이 흘러 인생의 여덟 번째 큰 고개를 넘고도 30여 리를 내리 걷다 보니 숨이 가쁘고 다리도 아프다. 저 멀리 70여 리 밖에 아홉 번째 높은 준령이 버티고 있다. 운동하고 다리의 힘을 기르기 위한 산행하지만 높고 험한 산들은 이제 힘에 부쳐 가까운 우장산을 단골로 찾게 되었다.
수많은 세월에 뼈는 굳어 뻣뻣하고, 몸은 돌덩이를 매달은 듯 천근만근처럼 무겁다. 처음에는 평행봉에 닿는 팔뚝에 시뻘겋게 피가 맺히고 심한 통증이 왔다. 학창시절에는 위에서 물구나무서기까지 했는데 생각하니 자존심이 상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자 차츰 통증은 사라졌다. 하지만 여러 날 하지 않으면 팔에 통증이 심해, 적어도 1주일에 한 두 번은 찾아가 적응을 해야 한다.
포장된 산책로와 달리 주위로는 흙길로 된 좁다란 등산로가 조성되어있다. 사람들이 별로 없어 한적한 흙길이라 이따금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지나가는 사람도 있다. 옆에는 나무 의자가 두 개 있어 앉아 쉴 수도 있다. 요새는 문학 잡지나 시집 한 권쯤 배낭에 넣고 가거나, 가끔 간식거리를 가지고 가서 책도 읽고 시상(詩想)을 떠 올려 보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푸른 숲속이라 조용하지만,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이 들리면 숲속의 무릉도원 별천지가 따로 없다. 그런데 요새는 아주 흥미로운 또 다른 일로 호기심을 불러오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확실히 떠 오르지는 않는데 일 년여 전부터 내가 운동하는 그 시간에 옆으로 지나가는 등산로를 이용하여 산을 몇 바퀴씩 도는 젋은 여인을 자주 만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심이 간다. 그 여인은 아마도 거의 매일 오후 같은 시간대에 등산로를 몇 바퀴씩 운동 삼아 도는데, 하필 그 시간이 내가 운동하러 가는 시간과 겹치는 모양이다.
웬 머리 하얀 노인이 늘 그 시간이면 주변을 깨끗이 쓸어 놓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평행봉 위에 올라가 휘젓고 운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여인도 나처럼 궁금해할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그 여성은 아무 관심이 없는데 부질없는 내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요즘같이 말 많은 세상에 말 한 번 잘못 부쳤다간, 치한으로 몰려 큰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니 점잖은 체면에 그저 꿀 먹은 벙어리 모양 속으로 삭일 도리밖에 없어 마음이 개운치는 않다. 스쳐 가는 옆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아도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30대 전후일까 아무튼 몸이 날렵하고 체형이 반듯하고 걸음걸이가 리듬을 타듯 사뿐사뿐 가볍게 걸어, 무릎이 불편한 나로서는 활기찬 그 젊음이 부럽기 그지없다. 산책로나 산을 오르는 등산로에는 대개 중 장년이거나 노년층이 대다수다. 그러니 새파란 젊음은 그 자체로도 자랑이고, 바라만 보아도 즐겁다. 나도 한때 저런 시절이 있었으리.
간혹 못 만나는 날이면 무슨 일인가 궁금하고 걱정되기도 한다. 언제 봤다고? 누가 남의 걱정 하랬나.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면서 오지랖 넓게 웬 남의 괜한 걱정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 스스로 속으로 웃는다. 그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청춘 시절 옛날 고향마을에 비슷한 몸매의 예쁜 처자가 떠 오르기도 한다. 6.25동란 직후라 모두 어렵던 시절이었지만, 인생으로서는 스무 살 전후의 꽃 피던 봄날이었다. 그녀는 여러 동생을 둔 그 집의 맏딸로 살림꾼이었다. 늘씬하게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였다. 그 처자 또한 바람에 흔들리는 수양버들이 춤을 추듯 리듬을 타며 걷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우장산 그 묘령(妙齡)의 여인에게서 고향 처자로 연상되는 이미지가 오버랩(Overlap) 되어 온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공동 우물을 사용했다.
저녁 무렵이면 우물가로 물동이를 이고 물 길으러 오곤 했는데 그녀는 물동이 가득 물을 길어 능숙하게 머리 위에 이고 갔고, 나는 물지게로 물을 길어 왔다. 이따금 엇비슷한 시간에 우물가에서 우연인 듯 필연인 듯 만나기도 했다. 때로는 눈 마주치면 하얀 이를 보이며, 뜻 모를 웃음을 살짝 띠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왠지 내 가슴은 마구 뛰었다. 그리고는 노랑 저고리 분홍치마 위에 흰 행주치마 끈으로 가는 허리를 질끈 동여매고 물동이를 이고도 사뿐사뿐 걸어가는 그녀의 성숙한 모습이 굉장히 매혹적(魅惑的)이어서 세상 어느 꽃보다 아름답다고 느꼈다. 꽃망울이 터지듯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한없이 부풀어 오르던 시기였다. 그 처자는 고요한 내 마음에 잔잔한 물결을 뒤흔들어 놓는 바람이었다.
평행봉 옆으로 스쳐 등산로를 오르는 여인의 스타일, 걸음걸이 뒷모습에서 까마득히 아련한 옛 추억을 소환하는 것은 아마도 내 마음속 어딘가에 젊은 날 고향 처자가 떨구고 간 꽃씨 하나가 조개 속의 진주알처럼 영롱한 빛으로 싹이 터서 점점 자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산행은 높은 산을 오르는 전문가들의 산악등반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근교에서 가볍게 운동 삼아 건강을 위한 산책도 하고 꽃도 보고 가을이면 알밤도 주워 먹고, 산에는 추억과 함께 뜻하지 않은 즐거움도 많다. 사라져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도 때로는 낙수(落穗)처럼 마음속에 담아오기도 하니,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하며 약간은 기대와 설레는 마음으로 산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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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경기 용인 출생. 한국 방송 통신대학 졸업. 계간<창작산맥> 詩 등단. 월간<한국수필> 수필등단.
창작산맥 문학회 회원. 한국 수필가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서울 강서문인협회 회원.
대한민국 서예대상전 초대작가. 남부서예 초대작가. 수필집<동진이 사람들>2017년이화문화출판사.
수필집<한 밤중에 찾아온 손님>2023년 도서출판 조은. 우장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