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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제국 이후의 역사(11:1~32)
1. 페르시아 제국과 페르시아 전쟁(1~2)
다니엘서 11장 앞부분에서 다니엘은 장래 페르시아 제국과 헬라 왕국들에 관한 상세한 예언을 하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허락하신 예언이다. 다니엘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예언이 이루어지는 형편들을 예견하면서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는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한 사람들은 그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어리석은 자들은 분명한 예언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의미를 알지 못할 것이다.
다니엘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개국한 다리우스 왕 원년에 그를 도왔음을 밝히고 있다. 바벨론 제국의 고위 공직자 출신이었던 다니엘이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신흥 강국으로 부상한 메대-페르시아 왕국을 도운 것이다. 이는 일종의 정치적 배신행위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다니엘이 그렇게 한 것은 그가 바벨론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다니엘에게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에 두고 전개될 세속 왕국들의 역사적 형편에 대한 계시의 말씀을 주셨다 그것은 통치자들의 실명이 밝혀지지 않았을 뿐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들이다. 페르시아 제국에는 그 후에 세 왕이 일어날 것이며, 네 번째 왕은 매우 부요하고 강력한 힘을 갖춘 왕이 될 것이라 예언되고 있다. 그가 세력을 키워 헬라를 공격하게 되리라는 사실이 언급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니엘서에 언급된 페르시아의 왕들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가? 학자들은 대체로 다니엘서 본문에 기록된 네 왕들을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고 정복한 다리우스 이후에 등장하는 고레스(Cyrus), 캄비세스(Cambyses), 다리우스 1세(Darius Hystaspis), 그리고 크세르크세스(Xerxes)로 보고 있다.
다리우스 1세는 그의 치세 중에 발생한 ‘이오니아 지역의 반란’(BC 499~494)을 평정한 후 BC 492년과 490년에 함대를 동원해 트라키아 원정에 나섰지만 실패하고 사망하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크세르크세스 왕은 BC 480년 에게해를 건너 아테네가 있는 그리스 본토를 향해 총력적인 공격을 가한다. 하지만 페르시아 제국은 아테네 앞에 있는 조그만 섬 로도스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살라미 전투’에서 완전히 패배하고 말았다. 다니엘서에 11장 2절에 기록된 ‘헬라 왕국에 대한 침공’은 장래 일어나게 될 페르시아 제국의 그리스 공격에 대한 그 상황을 예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헬라 제국과 분열 상황(3~4)
다니엘서 11장 3절은 헬라 제국의 발흥에 관한 기록으로 보인다. 장차 ‘한 능력 있는 왕’이 일어나 큰 권세로 다스리며 자기 마음대로 행한다는 말은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을 지칭하고 있다. 페르시아 제국의 말기 마케도니아 지역을 통치하던 필립포스 2세는 자기 아들 알렉산더를 당시 최고의 석학이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하생으로 보낸다. 그가 학자적 자질을 갖춘 인물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학문에만 전념하는 성품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는 학문의 길을 접고 용맹한 장군이 되어 BC 331년에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헬라 제국을 세워 막강한 위세를 떨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학문적 관심과 자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후 알렉산더는 이집트를 정복한 후 나일강 하구의 지중해 연안에 자기 이름을 붙여 건설한 알렉산드리아에 스승을 기념하여 대형 도서관을 건립했다. 후일에 알렉산드리아가 고대의 학문과 신학의 중심도시 역할을 하며, 그곳에서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된 것은 매우 중요한 구속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또한 그가 정복한 모든 지역에서 헬레니즘 문화를 일으키고 안착시키게 된 것은 그의 학문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불과 십수 년 동안의 짧은 기간에 광범위한 지역을 정복하고 그곳에 헬라 문화의 씨앗을 뿌릴 수 있었던 것은 학문을 바탕으로 한 그의 사상에 기인했던 것이다. 그 점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헬레니즘 문화의 급속한 확산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거대한 헬라 제국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BC 323년, 삼십 대 초반의 그가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써 드넓은 그의 제국도 분할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고대 왕국들은 왕의 혈통을 지닌 자손에게 왕국이 상속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삼십 대 초반의 젊은 알렉산더에게는 그의 뒤를 이을 만한 왕자가 없었다. 더구나 설령 그에게 어린 왕자가 있었다 할지라도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는 중이었으므로 섭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결국 다니엘서에 예언된 대로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 제국은 그의 신하들에 의해 네 개의 왕국으로 분할되었다(단11:4). 그 네 왕국은 서쪽의 헬라와 마케도니아 지역을 통괄하는 카산드로스 왕국, 소아시아와 트레이스와 비두니아 지역 등을 포함한 북쪽의 리시마코스 왕국, 수리아와 바벨론과 인도 지방 등 동쪽의 광활한 지역을 통치한 셀류코스 왕국, 그리고 남쪽의 이집트와 팔레스틴 지역을 이어받은 톨레마이오스 왕국이었다.
다니엘서는 그들의 장래에 관한 분명한 예언을 하고 있다. 하지만 네 왕국들 가운데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나라는 셀류코스 왕국과 톨레마이오스 왕국이었다. 그 두 왕국은 언약의 땅인 팔레스타인과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이는 성경의 관심이 세상의 왕국들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과 직접 관련된 왕국들에 제한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3. 셀류코스 왕국과 톨레마이오스 왕국의 갈등, 그리고 로마의 등장(5~20)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 제국이 분할된 후 남방 이집트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톨레마이오스 왕국은 막강한 위세를 떨쳤다. 또한 톨레마이오스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셀류코스 왕국 역시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두 왕국은 상호 충돌을 피하고자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게 된다. 그 가운데 하나로 톨레마이오스 왕 필라델포스의 딸 베레니스가 안티오코스 2세의 후처(後妻)가 되면서 그 두 나라는 평화조약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다니엘서에 예언된 것처럼 베레니스는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그녀가 낳은 자식은 본처 라오디스에 의해 피살되었으며 안티오코스 2세도 피살당하는 국면을 맞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평화조약을 조건 삼아 정략적으로 북방 왕국에 시집갔던 남방 왕국의 공주는 모든 권세를 잃어버린 채 버림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결국 톨레마이오스 왕국에서는 정치적 내분이 일어나게 되며 국력이 약화되어 간다. 아마도 혼인 정책의 실패로 인해 적지 않은 문제가 일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베레니스 공주의 형제 유엘게테스(Euergetes)가 그 위급한 사태를 평정했다. 그가 곧 톨레마이오스 3세였다. 성경에서 ‘공주의 본 족속에게서 난 자 중 한 사람’(단11:7)이라고 언급된 인물은 바로 그를 지칭하고 있다.
톨레마이오스 3세는 셀류코스 왕국에 대해 누이의 문제로 말미암은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국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북쪽 왕국을 침공한다. 그는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여 금은 보물들로 만들어진 신상들과 아름다운 기구들을 대량 강탈해서 돌아갔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남 왕국은 셀류코스 왕국에서 금 4,000달란트와 다양한 형상물 2,500개를 빼앗아 갔다고 한다.
그 전쟁이 있은 후에 몇 해 동안은 조용하다가 이번에는 북쪽에 있는 셀류코스 왕국의 셀류코스 콜리니코스가 남쪽 왕국을 침공하였지만 실패하고 본국으로 되돌아간다. 나중 ‘그의 아들들’(단11:10)이 전력을 가다듬어 대군을 모아 다시금 공격을 시도한다. 하지만 남쪽 왕국이 도리어 역공을 시도함으로써 북 왕국의 군대는 또다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니엘서 본문에서 말하는 ‘그의 아들들’이란 콜리니코스의 아들들인 필로파터와 안티오코스를 가리키고 있다. 이 안티오코스는 안티오코스 4세의 부친이다. 당시 왕은 대군과 다양한 전투 장비를 예비하고 남쪽 왕국을 공격하기 위해 대대적인 준비를 갖추고 전투에 임했다.
그러자 남방 왕 톨레마이오스 필로파토르(Philopator)는 크게 진노하여 군대를 동원해 북방 왕국을 역공했다. 이에 북방 왕 안티오코스 3세 역시 대군을 동원하고 주변 왕국들의 지원을 받아 남방 왕국을 공격하게 된다. 그렇지만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의 부친인 안티오코스 3세가 이끄는 군대가 남방 왕의 손에 의해 패배하고 말았다. 이때 남방의 톨레마이오스 왕국은 많은 병사를 포로로 사로잡아 그 마음이 교만해져 갔지만 반면에 그 세력은 도리어 점차 기울어가고 있었다.
그 후 안티오코스가 많은 군대를 동원해 남방 왕을 다시 공격하게 된다. 몇 번의 승리로 인해 교만에 빠져 있던 톨레마이오스의 군대가 이번에는 북방 군대를 이길 수 없었다. 그때 셀류코스 왕국은 그전에 빼앗겼던 국경 지역에 있던 여러 성읍들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도 전쟁에 능한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단11:14). 그는 기회를 잡아 유대 백성들을 이용하여 톨레마이오스 왕국의 군대에 저항해 싸우며 민족 독립을 위한 정치적인 이상을 구현하려 한다. 당시에는 아직 팔레스틴이 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남쪽 톨레마이오스 왕국에 저항해 싸우면서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으로 구성된 세력은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남쪽의 톨레마이오스 왕은 나중 또다시 공격해오는 북쪽의 안티오코스 3세의 막강한 군대를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안티오코스 3세는 BC 198년 팔레스틴에서 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몰아내고 그 지역을 셀류코스 왕국에 병합시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는 팔레스틴 지역을 장악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땅인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었다(단11:16). 하지만 그는 그 땅을 파괴할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 후 그는 남쪽 왕국을 패망시키려고 총력을 기울여 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화친을 시도했다. 또다시 혼인 정책을 통해 톨레마이오스 왕국을 정복하려 하지만 그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안티오코스 3세의 정복욕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해변 지역으로 눈을 돌려 BC 197년 소아시아를 침략했으며 BC 192년에는 헬라 지역으로 군대의 기수를 돌렸다. 그러나 로마와 정면으로 맞서게 된 전쟁인 ‘시리아 전쟁’(BC 192~189)에서 로마의 장군 코넬리우스 스키피오에 의해 패배하고 본토로 돌아왔다. 본국으로 돌아온 그는 일 년 후에 사망하였다.
안티오코스 3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자는 셀류코스 4세(BC 187~176)였다. 그는 백성들을 괴롭히며 토색하는 인물이었다. 셀류코스 4세는 로마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팔레스틴 지역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총리였던 헬리오도로스에 의해 독살되고 말았다(단11:20).
4.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Antiochos Epiphanes의 성전 모독(21~31)
왕위에 오른 안티오코스 4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내외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내치(內治)는 물론 외교적인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에게 저항하는 세력을 잔인하게 진압했으며 주변의 동맹국들에 대해서도 주도권을 행사했다. 그는 권력의 보존을 위해서라면 법과 조약을 어기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후 안티오코스 4세는 그 조상들이 일찍이 행하지 않았던 악한 일들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탈취한 재물들을 가지고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모략을 베풀었으며 그것을 통해 얼마 동안 주변 국가들을 공격하여 승승장구하게 되었다(단11:24).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무모한 정복 행위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후 안티오코스 4세는 군대를 결집해 용맹을 떨치며 남방의 톨레마이오스 왕국을 침공하게 된다. BC 169년 그는 대군을 이끌고 남방 왕을 공격했다. 당시 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왕은 톨레마이오스 6세였다. 톨레마이오스 왕국 역시 그에 맞대응하여 대군을 모아 항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방 왕은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맞서 싸웠음에도 북쪽의 군대를 당해내지 못하고 패배하게 된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남북의 두 왕 안티오코스 4세와 톨레마이오스 6세는 평화를 위한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지만, 양쪽 모두 진심을 감추고 위선적인 회담을 한다(단11:27). 결국 평화조약은 성사되지 못하고 안티오코스 4세는 남쪽 톨레마이오스 왕국의 많은 재물을 탈취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안티오코스 4세는 BC 167년에 또다시 톨레마이오스 왕국을 침공하게 된다(단11:29). 그런데 안티오코스가 알렉산드리아 성에 다가갈 무렵 로마 원로원에서 그것을 중지하라는 편지 한 통이 그에게 배달되었다. 로마의 위력을 잘 알고 있던 안티오코스 4세는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퇴각하는 길에 예루살렘을 공격하였다.
“이는 깃딤의 배들이 이르러 그를 칠 것임이라 그가 낙심하고 돌아가면서 맺은 거룩한 언약에 분노하였고 자기 땅에 돌아가서는 맺은 거룩한 언약을 배반하는 자들을 살필 것이며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울 것이며”(단11:30~31)
안티오코스 4세는 예루살렘 성전을 심하게 모독하며 날마다 드리는 상번제(常燔祭)를 중단하게 했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중에도 악한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저들에게 아부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것을 지켜보던 로마는 안티오코스 4세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대항하는 유대인들을 지원하기에 이른다. 이는 셀류코스 왕조를 약화시켜 로마의 지배 아래 두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결국 남쪽 톨레마이오스 왕국에 대한 정복욕을 채우지 못하고 마지못해 본국으로 돌아온 안티오코스 4세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임의로 거스르며 마음대로 악행을 저질렀다.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을 욕되게 하였으며 그 언약을 어기고 배반하는 자들을 후원했다. 나아가 안티오코스 4세의 군대는 예루살렘 성전 남쪽에 주둔하면서 성벽을 헐어버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제우스 신상을 성전 지성소 안에 세우고 부정한 돼지를 제물로 바쳐 돼지의 피 냄새가 성전을 진동케 했다.
그는 또한 안식일과 절기를 금했으며 할례를 행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그것을 어기는 자들은 사형에 처했다. 그리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모든 성경을 불태웠다. 나아가 그는 언약의 백성들을 배도의 길로 몰아가기 위해 온갖 위협과 감언이설을 중단하지 않았다.
5. 마카비 전쟁 이후의 하스모니안 왕가(32)
안티오코스 4세의 참람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마카비 전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에 유린당하던 팔레스틴 지역은 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지배를 받다가 셀류코스 왕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최악의 상황을 겪고 있었다. 이때 남쪽의 톨레마이오스 왕국을 공격하려다가 로마에 의해 저지당한 안티오코스 4세가 예루살렘을 공격한 것은 사실상 병적인 태도였다. 그 상황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던 로마는 저들의 목적을 위해 암묵적으로 유대인들을 지원했다.
BC 167년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교(異敎) 제사가 드려지는 것을 본 다수의 유대인들은 심한 분노에 들끌었다. 경건한 유대인들(Hasidim)은 안티오코스 4세의 종교 정책에 강력하게 저항함으로써 목숨을 걸고 율법을 준수하려 애썼다. 그러던 중 예루살렘 북서쪽 모데인(Modein) 마을의 제사장으로 있던 하스몬 집안의 마타디아스(Mattathias)가 성전에서 더러운 돼지를 잡아 제우스신에게 제사 지내도록 강요하던 자를 죽인 후 광야로 피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듬해 마타디아스가 팔레스틴을 침공하는 안티오코스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그의 아들 유다 마카비(Judas Maccabius)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그는 안티오코스 4세의 종교 정책에 저항하는 지도자의 역할을 계승하였다. 그때부터 팔레스틴에서 유대인들의 조직적인 민중봉기가 일어나 시민전쟁의 성격을 띠는 반란으로 이어졌다.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속임수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라”(단11:32)
결국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의 악행에 저항했던 용맹한 유대인들은 수년간의 투쟁 끝에 예루살렘 성전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카비는 돈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샀던 메넬라우스(Menelaus)를 제거했다. 그 모든 과정에는 로마인들의 암묵적인 지원이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로 인해 유대인들이 BC 164년 12월 25일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여 정화함으로써 성전 재봉헌식을 거행하였다. 그날을 기념하여 이스라엘에서는 매년 수전절(Hanukka)이 지켜지고 있다. 그 절기는 구속사적 의미를 지니는 매우 중요한 절기로서 예수께서도 그 절기를 지키셨다(요10:22).
예루살렘이 회복되던 그해 안티오코스 4세는 페르시아 지역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곳에 가 있던 중 사망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전에 그가 정했던 유대인과 예루살렘 성전에 관련된 모든 금령들이 사문화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유대인들은 그동안 박탈당했던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다.
BC 160년에는 유다 마카비가 시리아(셀류코스 왕국)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후 그의 아들 요나단(Jonathan)이 아버지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요나단은 BC 152년 그동안 공석으로 있던 대제사장의 자리에 앉게 된다. 그러나 ‘경건한 유대인들’은 많은 피를 흘린 요나단이 대제사장이 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마카비 가문과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또한 BC 142년에 요나단이 피살당하자 그의 동생 시몬(Simon)이 그 자리를 계승하게 되었다. 시몬은 유대 군대의 총사령관과 대제사장직을 겸하였다. 시몬이 시리아 군대를 예루살렘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더 이상 시리아에 공물을 바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BC 140년에 유대의 통치권을 시몬의 가문에 위임하기로 결의했다. 그 후부터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왕위를 세습하게 되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 회복과 이스라엘 민족 독립의 기틀을 마련했던 마타디아스의 아버지 하스몬(Hashmon)의 이름을 따라 ‘하스모니안 왕가’라 불려 지게 되었다.
우리는 팔레스틴 지역에서 마카비 반란이 있은 후 권력의 중심에 서 있던 유다 마카비가 로마와 우호조약을 맺음으로 매우 강력한 동맹국을 얻게 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조약은 그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형제 시몬의 통치 때도 계속 유지되었다. 이로써 하스모니안 왕가에 대한 로마의 지원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틴 지역에서 안정적인 체제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하스모니안 왕가는 BC 63년 팔레스틴 지역이 로마의 속주가 될 때까지 유지되어 갔다. 마카비 가문의 시몬이 유대의 통치권을 공적으로 인정받은 후 그의 뒤를 이어 요한 힐카누스 1세(BC 134~104), 아리스토블루스 1세(BC 104~103), 알렉산더 얀네우스(BC 103~76), 알렉산드라 살로메(BC 76~67), 아리스토블루스 2세(BC 67~63)가 차례로 왕위를 계승했다.
우리는 다니엘서에 기록된 미래에 대한 예언적 역사 기술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일반적인 인간 역사에 관련된 장래 일을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약속의 땅 팔레스틴과 그 안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 그리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여 세우신 언약의 백성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연관된 주변 역사들을 미리 계시하심으로써 자기 백성들에게 메시야에 연관된 놀라운 은혜를 베풀고자 하셨다.
일부 신학자들은 다니엘서가 후대에 기록된 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다니엘서의 기록 내용이 역사적 실제와 너무 일치한다는 것이다. 역사를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처럼 정확한 내용을 기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다니엘서를 후대의 기록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만일 다니엘서가 후대에 기록된 책이라면 이스라엘 민족은 아예 그 책을 거룩한 성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확정하는데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주의 깊게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