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기 외국인 선교사들의 순교와 선교
[김정현] 가천대학교 강사
- 6·25 전쟁 중 폐허가 된 함경남도 덕원수도원 성당.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Ⅰ. 머리말 - 외국인 선교사들의 수난과 기록
Ⅱ. 선교사들의 순교와 ‘죽음의 행진’
III. 수용소 생활과 정전협상의 포로문제, 석방 과정
IV. 귀국과 귀환, 선교사들의 한국교회 공동체 재건
V. 맺음말
<국문초록>
가톨릭 교회는 3년이나 진행된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고 큰 피해를입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본당과 신자들을 지키기 위해 피난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군에 의해 체포되거나 희생되었다. 이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한국전쟁 기간 반공주의가 강화되고 한국전쟁을 성전(聖戰)이나 십자군 전쟁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냉전과 종교의 관계를 거시적인 조망에서 분석하는 기존의 연구들은 그리스도교 교회를 구성하고 공산주의를 만났던 구체적인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고난을 당한 선교사들이 체험하고 남긴 기록은, 한국전쟁을 악마와 대결을 벌이는 성전으로 단순화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여준다. 성골롬반외방 선교회는 전쟁 당시 납북되거나 사망한 선교사들에 대한 조사보고, 정전협상과 포로석방을 위한 노력, 전시 선교 현황보고 등의 기록을 남겼다. 지금까지 한국전쟁기 선교사들의 활동과 문서 관련 연구는, 메리놀선교회, 베네딕도회, 골롬반회의 활동과 자료소개 등 각 수도회와 외방선교회 별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포괄적으로 정리한 글은 거의 없다.
이 글은 각 수도회 선교사들이 죽음의 행진을 겪고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남긴 수기와 골롬반 문서를 추가하여, 남북한 각 수도회 선교사들의 수용소 생활, 정전협상과 석방 과정, 남한에서 교회 재건을 위한 선교사들의 노력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그들의 목소리를 재구성해 보았다. 이를 통해 선교사들이 증오와 적대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떠한 태도와 실천으로 선교 사명을 이루어 나갔는지, 전쟁 기간 선교사들이 남한 교회 재건을 위해 기울인 노력에 대해 알아보았다.
죽음의 행진을 겪고 생환한 선교사들의 수기에는 순교를 서술하면서도 반공이나 냉전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성찰을 보여주었다. 선교사들의 납북 체험기와 증언에는 순교 정신과 용서와 회개를 위한 기도가 들어있다. 증오와 적대,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전쟁상황에서 선교사들은 오히려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는 선교와 신앙의 실천이라는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였다. 선교사들의 순교와 1953-54년 수용소에서 선교사들이 석방되어 생환한 소식은 각 수도회뿐 아니라 선교사들의 고국인 미국·프랑스·독일·벨기에·영국·아일랜드·호주 등지에서도 대서 특필되었다. 납북 선교사들이 남긴 생생한 수기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출판되어 번역되고 주목을 받았다. 본국의 수도회와 가톨릭 신자들은 생환된 선교사들이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후 다시 한국으로 입국하여 선교의 행진을 벌일 때, 이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선교사들의 수난과 순교는 전시 남한에서의 선교와 구제 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기반이자 추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Ⅰ. 머리말 - 외국인 선교사들의 수난과 기록
2023년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이다. 정전협정 체결이 늦어지면서 3년이나 진행된 전쟁으로 가톨릭교회는 물적·인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한국전쟁 시기 공산 세력으로부터 가톨릭교회가 입은 피해규모 조사에 따르면, 남북한에서 공산세력에 체포된 성직자·수도자는 한국인 52명(수녀 7명 포함), 외국인 선교사 98명의 150명이다.) 인적 피해는 규모도 크지만 지도급 인사들인 교황대사 패트릭 번(Patrick Byrne) 주교, 춘천 교구장 토마스 퀸란(Thomas F. Quinlan) 몬시뇰, 광주교구장 패트린 브레넌(Partrick Brennan) 몬시뇰) 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질적인 심각성을 보여준다. 북한에서는 1949년 외국 선교사들에 대한 본격적인 체포와 감금, 순교가 시작되었고, 남한의 외국인 선교사들은 1950년 북한군의 남침에도 본당과 신자들을 지키기 위해 피난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체포되거나 희생되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납북되어 상당수가 북한에서 장기간의 포로생활을 경험했고, 일부 생환자가 있지만 나머지는 순교하였다.
한국전쟁기 외국인 선교사의 수난을 연구한 선행연구는 다수 있다.
특히 1953~54년 북한에서 생환한 선교사들의 수기와 서평, 외국인 포로 수기 연구를 통해 혹독한 추위 속 ‘죽음의 행진’은 많이 알려져 있다. 납북·감금된 성직자 수도자들은 박해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실천하였고, 생환된 사람들 또한 ‘죽음의 행진’과 수용소에서도 기도와 수도 생활을 영위하고자 노력하였다. 전쟁 기간 희생된 이들의 순교자 정신을 본받을 것과 이들을 순교자로 현양하기 위한 자료발굴과 기록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여러 기록과 증언을 기반으로 순교한 신부 수녀들을 복자품에 올리기 위한 시복 자료집 발간 등의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가톨릭 교회가 한국전쟁을 악마적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성전(‘聖戰)이나 ‘십자군 전쟁’으로 규정한 것과 관련하여, 냉전기 교회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연구가 있다. 하지만 냉전과 종교의 관계를 거시적인 조망에서 분석하는 기존의 연구들은 그리스도교 교회를 구성하고 공산주의를 만났던 구체적인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고난을 당한 선교사들이 체험하고 남긴 기록은, 한국전쟁을 악마와 대결을 벌이는 성전(聖戰)으로 단순화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한국전쟁기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의 활동과 문서 관련 연구는, 메리놀선교회 자료를 분석한 연구, 베네딕도 수도회의 한국선교와 순교자 연구, 골롬반회의 춘천교구 활동과 자료소개 등 각 수도회와 외방선교회 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를 포괄적으로 정리한 글은 거의 없다. 이 글은 죽음의 행진을 겪고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남긴 각 수도회 선교사들의 수기와 골롬반 문서를 추가하여, 남북한 각 수도회 선교사들의 순교와 포로수용소 생활, 정전 협상과 석방 과정, 남한에서 교회 재건을 위한 선교사들의 노력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그들의 목소리를 재구성, 해보자 한다. 이를 통해 선교사들이 증오와 적대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선교사들이 어떠한 태도와 실천으로 선교 사명을 이루어 나갔는지, 전쟁 기간 남한 교회 재건을 위해 기울인 노력과 그 의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Ⅱ. 선교사들의 순교와 ‘죽음의 행진’
1. 한국전쟁 초기 선교사들의 순교와 납북
1950년 6월 25일 38선을 넘어 남침한 북한군은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종교를 대표하는 선교사들의 국적·나이·성별·병약 여부에 관계없이 모두 체포하였다. 7월 11일 교황대사이자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의 패트린 번 주교와 그의 비서 윌리엄 부스(W. Booth) 신부, 명동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본원의 비에모(Villemot) 지도신부와 원장 베아트릭스 수녀, 15일 가르멜 수녀원의 공베르(A.Gombert) 지도신부와 인천 바오로 수녀원의 공베르(J.Gombert) 지도신부 등 파리외방전교회 프랑스 신부 13명, 대신학교의 코요스(Coyos) 신부 등 7명의 골롬반 사제, 가르멜수녀회 으제니 수녀 등 10명의 수녀들이 연행되었다.
목포에 머물던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패트릭 브레넌 광주 교구장은 미군의 철수 요청을 거절하고 자신이 머무르는 것이 사명이라며 교구에 머물렀다. 대전에서 체포된 9명의 프랑스 선교사 사제들과 목포에서 체포된 브레넌 몬시뇰, 토머스 쿠삭(Thomas Cusack) 존 오브라이언(John O'Brien) 신부 등은 대전에 수감되었다가 9월 24일경 희생되었다.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9월 15일) 이후 서울이 미군에게 함락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신부들을 총살한 것이다. 목동 본당의 카다르(Joseph adars) 신부와 공세리 본당의 뷜토(Bulteau) 신부는 납북되었다.
서울에 머물던 골롬반회 서울 지부장 브라이언 게라티(Brian Geraghty) 신부는 젊은 신부들을 일본으로 피신시켰으나, 잔류를 결정한 춘천교구 소양본당의 콜리어(Anthony Collier)·묵호 본당의 레일리(P.Reilly)· 삼척 본당의 맥긴(J.McGuinn) 신부들은 체포되어 총살당하는 등 골롬반회 선교사 중 7명이 희생되었다. 게라티 신부는 춘천에서 소양로 본당 주임 앤서니 콜리어 신부가 외국인 사제 최초로 6월 27일 순교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그의 어머니와 가족들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지만, 그들의 혈육 중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의무를 수행하다가 선종했다는 사실에 대해 축하를 전합니다. 죽은 사제에게 이보다 더 큰 영예는 없을 것이며, 하느님을 섬기는 데 그를 기꺼이 바친 가족에게도 큰 영광입니다.
춘천교구장 퀸란 몬시뇰은 미 군사고문의 철수 요청을 거부하고 7월2일 미사를 드리다 체포되었고, 카나반(Canavan) 신부, 크로스비 신부와 함께 춘천 유치장에 억류되었다가, 7월 16일 서울로 호송되어 소공동의 빌딩 지하에 갇혀 심문받았다. 그곳에서는 번 주교와 비서관 부스 신부,
폴 비예모·공베르 형제·코요스 신부, 가르멜 수녀 5명,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 2명, 외국인 민간인 몇 명, 한국인 민간인 200여 명 등이 심문을 받기 위해 끌려와 있었다. 북한군 장교는 이들에게 “선교사들이 자신의 고국을 위해 일하는 주재관임을 잘 알고 있다. 서양이 적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원자폭탄이 아니라 종교이다. 공산군이 곧 전국을 통제하고 모든 외국인들은 본국으로 송환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번 주교와 신부들은 인민재판 자리에 끌려 나갔다. 군중들은 번 주교에게 “저 미국놈을 죽여라”고 외쳤고 판사는 “번 주교는 방송을 통해 유엔, 미국과 바티칸을 탄핵하는 설교를 하지 않으면 사형”이라고 하였다. 번 주교는 “죽기를 택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선교사들은 송환되지 않았고 외국 민간인들과 함께 기차에 실려 평양으로 보내져 조사받았다. 9월 5일 700여 명의 미군 전쟁 포로와 함께 밤에만 이동하는 기차를 타고 9월 12일 도착한 압록강 근처의 국경도시인 만포 외곽의 가옥에 수용되었다가, 10월 초 고산으로 이동한 후 다시 만포로 행군하였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의 전세가 악화되면서 포로 이송은 폭력적으로 행해졌다. 이동 중 신발도 없고 걷지도 못하는 미군 병사들 중에 사망자가 나오자, 퀸란 몬시뇰은 “장례식을 치를 수 있게 해 달라”고 강하게 주장하여 무덤을 만들었다.
2. ‘죽음의 행진’과 순교
1950년 10월 20일 평양이 유엔군에 함락된 후, ‘호랑이’로 불린 포로 수용소장은 포로들을 학대하면서 10월 31일 만포에서 중강진으로 행군을 명령하였다. 포로들은 주머니를 모두 비우라는 명령을 받고 펜과 칼, 노인용 지팡이, 짚으로 만든 돗자리도 모두 버려야 했다. 앞장선 미군 포
로들을 민간인 포로가 뒤따랐다. 밤에는 옥수수밭 맨땅 위에서 자야 했고, 추위로 밤새 미군 포로 10명이나 얼어 죽었다. 삶은 옥수수만으로 식사를 한 후 행군은 계속되었다. 8일 동안 눈내리는 추운 산길을 얇은 옷만 입고 계속 160키로미터를 걷는 동안 인민군이 곁에서 따르며 누구든
줄에서 낙오되면 즉시 총을 쏠 태세를 하고 있었으며, ‘호랑이’는 행군 중 부상병을 쉬게 한 미군 소튼 중위를 총으로 쏴 즉사시켰다.
퀸란 몬시뇰과 크로스비 신부가 여든 두 살의 폴 비에모 신부를 업고 가기도 하였다. 행진 나흘 째, 계속된 재촉에 너무 지쳐 걸을 수 없게 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베아트릭스 원장 수녀는 기진맥진해 주저앉아 행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인민군에 총살당하였다. 마지막 길 위에서 수녀는 사랑하는 자매 수녀들에게 “수도회 규칙을 잘 지키라”는 유언을 남겼다. 같은 날 미군병사 스물한 명도 대열에서 낙오되어 사살되었다. 그 1주일 후 비에모 신부는 딱딱한 음식을 먹을 수 없어 기아 상태에서 사망하였다.
100여 명에 달하는 포로가 수용소장의 “빨리! 빨리!” 걸으라는 과도한 몰아침, 영양부족, 치료 결여, 설사, 폐렴, 동상, 학대 등으로 죽음의 행진 동안 목숨을 잃었다. 행진 중에 가르멜과 바오로회 수녀들은 함께 ‘깊은 구렁 속에서’로 알려진 시편 130편과 망자를 위한 기도를 올리고 묵주 기도의 꽃다발로 만들어 길가에 뿌렸다.
이들이 중강진으로 행진해 들어간 날에는 미군 B.29 비행기들이 머리위로 윙윙거리며 날아다녔고 중공군들이 끊임없이 지나갔다. 더 이상 행군을 할 수 없게 된 포로들은 11월 9일 중강진의 여러 학교 건물들에 수용되었다.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해 11월 16일 호랑이 수용소장은 포로들을 중강진에서 6.5km 떨어진 ‘하창리’로 이동시켰다. 끌려다닌 가르멜회 멕틸드 원장 수녀가 폐렴으로 고열에 시달리다 18일 선종하였다. 번 주교와 카나반 신부는 행진 도중 감기가 폐렴으로 악화되었다. 수용소장은 매일 아침 영하 15도의 추위에 외투를 벗고 밖으로 나와 운동하도록 명
령하였다. 번 주교는 한 번도 고통을 호소하지 않았지만 걸을 수도 없고 의약품도 없는 상태에서 11월 25일 선종하기 전 퀸란 몬시뇰과 부드 신부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늘 내 소원이었지요. 좋으신 하느님께서는 내게 이런 은총을 주셨어요. 몸조심하시고, 이제 다른 이들을 돌보세요....
내가 지닌 사제직의 은총 다음으로, 내 삶의 가장 큰 은총은 당신들 모두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수난받는 것입니다.
퀸란 몬시뇰은 후에 유해를 확인하는 증거물이 되길 바라면서 단단한 붉은 단추가 달린 자신의 수단으로 번 주교를 덮어드려 매장하였다. 12월 6일 아침 카나반 신부가 뒤이어 사망하여 번 주교 곁에 묻혔다.
죽음의 행진 자체는 멈추었지만, 그 후유증으로 사망자가 계속 나왔다. 포로들은 폐교와 폐가의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옥수수 몇 알 등 극히 적은 양식을 배급받았고, 의료지원도 전혀 없이 여름 옷을 입은 채 추위 속에서 죽어갔다. 하창리 수용소로 이동한 후 49세의 가르멜회 테레즈 수녀가 11월 30일 고열로 사망하였고,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데다 이질과 손의 상처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동료들을 격려하며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던 카다르 신부는 12월 18일 탈진하여 사망하였다. 카다르 신부를 돌보던 50세의 뷜토 신부도 점점 쇠약해져 1951년 1월 5일 코요스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받고 다음 날 선종하였다. 당시 사망한 민간인이 11명이었으며, 미군 포로들의 사망은 200명이 넘었다.
선교사들과 민간인, 미군 포로들의 귀중한 생명이 북녘 땅에 묻혔다.
매번 수녀·신부와 민간인들의 묘를 파는데 퀸란 몬시뇰은 빠지지 않았다. 언 땅을 파헤쳐 시체를 묻고 나면, 빨리 돌아오라는 감시병의 호령과 영하 40도의 무서운 추위 속에서도 퀸란 몬시뇰은 언제나 망자를 위한 경문을 다 염한 후에야 돌아왔다. 필립 크로스비 신부는 중병에 걸렸지만 퀸란 몬시뇰의 헌신적인 간호와 보살핌 덕분에 회복되었다. 퀸란 몬시뇰과 사제들은 죽음의 행진 속 공포와 고통 중에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병자를 돌보고 죽은 자를 묻어주었으며, 슬퍼하는 자를 위로해주고, 절망의 문턱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살려는 의지와 위안을 주었다.
흥남과 함흥 성당의 사제들, 원산 베네딕도 수도사들과 수녀들은 북한 당국에 의해 한국전쟁 이전인 1949년 5월 이미 체포·감금되었다.
이들은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북한 정치국의 억지 주장으로 심문을 받고 평양 감옥에서 돼지처럼 갇혀 지내야 했다. 8월 5일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주교 등 ‘주범’으로 몰린 8명은 감옥에 남고, 나머지 신부·수사·수녀들은 청천 수용소-깊은 산속 분지인 옥사덕(玉砂㯖)으로 이송되었다.
평양 교화소에서 아빠스-주교는 1950년 2월에, 루페르토 클링사이스 신부는 4월 6일 순교하였고, 나머지 여섯 사제들은 1950년 10월 북한군이 퇴각할 때 다른 포로들과 함께 북한 공산당원들에게 총살당하였다.
옥사덕 수용소에서 이들은 돌투성이 밭에서 고된 밭일과 노동을 하였고, 1949년 8월부터 1950년 8월까지 과로와 질병으로 수사와 수녀 6명이 임종하여 옥사덕 언덕 위에 묘지 여섯 개가 만들어졌다. 이들도 1950년 10월 23일부터 3개월간 북쪽으로 행진해 만포에서 압록강을 넘어갔다 오는 힘든 ‘죽음의 행진’을 하였고, 네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옥사덕수용소의 생존자 경 엘리기우스 신부는 환자들을 잠시라도 휴식하게 하고 필수적인 의약품만이라도 공급했더라면 동료 수사와 수녀들 대부분은 오늘날도 생존해 있을 것이라며,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선교사들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원산 베네딕도 수녀회 20여명의 서양인 수녀들은 옥사덕 수용소에 수감되어 굶주림 속에 강제 노동과 죽음의 행진으로 수난받았고,55) 게르트루트 수녀는 <죽음>이라는 시를 남겼다.
...죽음은 고요하고 깊숙한 눈길로 / 이 사람 저 사람 눈여겨 살핀다
하느님의 영원한 창조 계획에 / 누가 적당한지 숙고나 하듯이
죽음의 검은 눈 주춧돌을 찾는다 / 어느 돌도 그에게는 낯설지 않으니
나는 다만 기도할 뿐이다 / 하느님의 그 현명한 석수의 손에 쓸모 있기를
Ⅲ. 수용소 생활과 정전협상의 포로문제, 석방 과정
1. 수용소 생활 - 고난 속의 연대와 동료애
1951년 3월 29일까지 민간인 포로들은 하창리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선교사들은 수용소에서 생존에 필요한 것을 직접 해결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해야 했다. 크로스비 신부는 하창리에서 처음 부엌 불 때는 일을 하게되었고, 퀸란 몬시뇰은 수용소의 반장을 맡아 일거리가 더 늘어났다.
매일 물을 길어오고, 식량과 나무를 운반해 오고 옥수수와 콩을 가는 일도 해야 했다. 1951년 3월 29일부터 10월 8일까지 ‘안동리 수용소’에 머물던 때는 형편이 조금 나아져 처음으로 감자가 배급되었다. 퀸란 몬시뇰은 배급식량을 모두 맡았다가 똑같이 분배하였고, 선교사들은 수용소 주
변의 산딸기·산포도·머루·다래 등 많은 야생 과일을 채집하여 먹으며 건강을 지켰다.
수용소에서는 자본주의 비판과 자아비판을 하는 세뇌 교육이 이루어졌다. 또한 공산군은 선교사들이 포로들에게 영적 도움을 주는 것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전쟁 포로의 대우에 대한 제네바 협약을 위반하였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이 선교사들을 북한으로 데려갔을 때는 생각지 못했지만, 선교사들은 포로 생활을 영적 승리로 바꾸었고, 동료 포로들의 영적 패배를 막도록 도왔다. 사제들은 기아와 질병, 치료 부족으로 사망하고 공산주의자들이 방해하였음에도 비밀리에 사목하였다. 선교사들은 3월 30일 옮겨간 학교 건물에서 미군 장교, 병사들과 처음 함께 지내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고해성사를 몰래 하고 밤에는 방 한구석에서 묵주기도를 하면서 그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60) 공산군은 포로들이 선교사들의 용기와 자선에 감명을 받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이 허락했다면 선교사들은 포로들을 위해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선교사들과 죽음의 행진을 함께 겪은 미군 오키프 병장(Sergeant O’ Keefe) 등 생존자들은 석방된 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어떤 종교적 행위도 허용하지 않았지만, 퀸란 몬시뇰은 묵주 기도를 몰래 하곤 했다. 크로스비 신부와 부스 신부등 선교사들은 모두 훌륭했고 퀸란 몬시뇰은 지상의 성인이었다....수녀님들, 특히 으제니 수녀님은 항상 바느질을 하였고 이질에 걸렸을 때에도 남자 포로들을 위해 옷을 빨아 주었다. 안동리 수용소에서 선교사들이 땔감을 마련하고, 초막집을 흙으로 바르는 등 월동 준비를 막 끝냈을 때, 갑자기 다시 출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1951년 10월 11일 만포에서 약 10키로쯤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서 감시병들은 수용시설을 찾지 못해 허둥대면서, “당신들을 위해 준비해 놓은 집을 중공군이 차지하였다”라고 변명하였지만, 언제나 준비도 없이 포로들을 끌고 다닌 공산군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북한 죄수들이 수용된 참혹한 움막에서 죄수들과 같은 음식을 먹으며 그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목격해야 하였다. 민간인 포로들이 지내는 움막은 러시아인 고문관이 보고 놀랄 정도로 누추했지만, 그곳에서 사제와 수녀들은 계속 동료애를 발휘하였다. 퀸란 몬시뇰은 썩고 축축한 움막집 수리의 책임을 맡았고, 마리 마들렌 수녀는 수용소에서 포로 어린이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면서 교사로서의 재능을 과시하였다. 퀸란과 크로스비신부는 아침 식전 땔나무 다발을 끌어오는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일요일 아침이면 산허리에 앉아 함께 묵주 기도를 바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퀸란 몬시뇰과 사제들은 혹한이 닥치기 전에 땔나무를 구하기 위해 매일 몇시간 동안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의 가파른 야산에 나가 있었고, 비행기에서 내버린 연료 탱크 등을 구해와 겨울용 난방기구를 만들었다. 이렇게 죽음의 행진과 포로수용소의 고난 상황을 공유한 사제· 수녀들과 민간인들은 서로를 돌보면서 함께 ‘고난 속 연대’와 ‘희망’을 나누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고통과 시련의 2년을 겪으면서 민간인 포로들의 도덕 수준은 인간적 미약함과 비참함을 드러내기도 하였지만, 퀸란 몬시뇰과 선교사들은 도덕적 위풍을 보이며 힘겨운 노동일이 생기면 앞장서서 맡고, 다른 종교를 비난하거나 반대하여 시간을 허비하는일 없이 오직 침묵 속에 희생적으로 봉사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1952년 8월 15일 북한군 부대장이 전원을 집합시키고 일장연설을 하면서 이제부터 모든 종교행사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주겠다고 하였다.
당시 구세군 목사 로드씨는 가르멜회의 마리 베르나데트(M. Bernadette) 수녀가 가지고 온 『준주성범』을 빌려 열심히 읽고 감리교 선교사에게도 소개하여 수용소의 유일한 영적 서적이 되었다. 어느 날은 북한의 청년 둘이 코요스 신부에게 와서 “우리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죽을 때까지 신덕을 지키겠습니다”라는 다짐을 하기도 하였다.
2. 종군 사제의 북한 순례와 정전협상의 포로문제
1950년 10월 유엔군이 원산과 평양 등지를 함락한 후 10월 말 선교회의 군종 신부들은 38선 이북 지역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골롬반회 종군기자(N.C.W.C. News Service 특파원) 패트릭 오코너(Patrick O’Conner) 신부는 1950년 10월 평양과 원산의 폐허가 된 마을에서 교회를 찾았으나 사제들과 십자가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납북된 선교사들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이 국경도시 만포 수용소에서 나와 죽음의 행진을 강행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유엔군이 수복한 평양의 7대 평양교구장 서리로 임명된 메리놀회 캐롤(George M. Carroll) 몬시뇰과 클리어리(Patrick H. Cleary) 신부 일행도 실종된 메리놀회 선교사(번 주교, 부드 신부)의 소식을 추적하였다. 이들은 평안도 지역을 순례하면서 세례와 미사를 집전하고 살해된 신자들의 시신을 축복해 주었다. 이들은 북한지역 교회의 복구 작업에 착수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연합군이 철수하게 되면서 군 당국의 명령에 따라 서울로 돌아왔다. 클리어리 신부는 11월 12월 원산으로 이동하는 부대에 군목으로 합류하여, 함흥으로 가 미사를 봉헌하였으나,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남하하자 함흥의 교우들과 피난민들을 흥남 부두에서 철수하는 미군 상륙함에 태울수 있도록 도왔다.
북한 수용소에 수감된 납북 선교사들의 소식은 선교회와 더불어 아일랜드· 미국 등에 있는 가족들도 애타게 기다리며 계속 긴장과 극심한 고통 속에 기도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 시기부터 유엔의 휴전 중재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중공군이 1950년 12월 31일 38선을 넘는 공세(1.4후퇴)를 벌임으로써 무산되었다. 1951년 3월 7일 유엔군이 다시 서울 탈환작전을 전개하여 중공군이 38선 북방으로 철수한 후, 1951년 7월에야 개성에서 처음 만나 포로 문제가 포함된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오코너 신부는 1년이 넘는 동안 북한군이 포로에 관한 규정을 위반했기에, 협상 조건으로 국제 적십자사 같은 기관이 포로수용소를 조사하고 전체 포로 명단을 확보해야 하며, 유엔군 사령관이 민간인 석방을 주장해야 한다고 하였다. 오코너 신부는 1951년 7월 27일 북한측 협상대표 남일 대장에게 납북된 선교사들의 이름과 국적을 전달하고, 정전회담에서 논의된 ‘전쟁포로 관련 협정’에 민간인이 포함되는지 정보를 요청하였다. 8월 2일 “이후 적절한 기관에 회부하겠다”는 답신을 받고 기다리던 오코너 신부는 11월 9일 다시 선교사들의 정보를 요청하였지만 답장은 없었다.
12월 판문점 협상에서도 북한이 국제규칙을 준수하지 않고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아 포로로 잡힌 종교인이 있다는 징후조차 알 수 없었다.
“선교사를 포함한 민간인 포로 문제 해결없이 휴전 회담이 완료되고 휴전협정이 체결될 수 있느냐”는 오코너 신부의 질문에 유엔군 사령부 대변인 윌리엄 너콜스 준장은 "앞으로의 과정이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1951년 정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납북 포로들을 면담하러 온 러시아인들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내려고 하였다. 선교사들은 라디어 방송을 청취한 북한 사람을 통해 정전회담 소식을 듣고 희망을 가졌지만, 이후 진전된 소식이 없자 낙담하였다.
3. 수용소를 떠나 평양으로
1) 납북 선교사들의 수용소 석방
1952년 8월 12일 납북 민간인 포로들은 만포를 떠나, 압록강 하류를 따라 고산진, 초산진을 통과하여 운장 외곽에서 중공군이 주둔한 작은 마을에 1953년 5월까지 수용되었다. 그곳에서 북한군은 감독만 하고 중공군이 민간인 포로의 생활 필수품을 공급해주었다. 1953년 봄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소련이 외국인 석방을 위한 중재에 나서고 포로송환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되면서 북한은 정전협정 체결을 앞두고서야 죽음의 행진에서 살아남은 외국인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납북 선교사들은 1953년 3월 초 중공군과 북한군 간수·관리들이 모두 검은 완장을 두르고 있고, 수용소장실 앞에 스탈린 사진이 검은 헝겊으로 둘러진 것을 발견하였다. 어린 학생들은 선교사들에게 ‘스탈린의 사망을 포로들에게 말하지 말라’는 주의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선교사들은 스탈린의 사망이 포로 석방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궁금하였다.
과연 평양에서 장교 두 명이 와서, 퀸란 몬시뇰과 성공회 쿠퍼 주교, 구세군 로드 목사 등 영국인들은 한 시간내로 출발할 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모두 예상하지 못한 일에 크게 놀랐다. 자유를 한꺼번에 얻는게 아니라 국적으로 구분했기 때문이다. 퀸란 몬시뇰이 마지막 강복을 주고 떠나자 모두들 어버이를 잃은 듯이 슬퍼하며 ‘우리 감옥의 태양을 잃은것 같다’며 어쩔 줄 몰라 잠을 못 이룬 사람이 다수였다.
3월 27일에는 북한군 장교들이 일곱 명의 프랑스인들을 평양으로 데리고 갔다. 프랑스 출신 포로들이 평양에 도착했을 때, 북한 적십자사 수석이 찾아와 그들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데 대해 용서를 청하였다. 하지만 1950년 11월 3일부터 1951년 1월 6일까지 죽음의 행진 동안 사망자가 한꺼번에 많이 생긴 기록은 민감한 문제였다. 그들은 베아트릭스 원장 수녀의 죽음을 아무도 못 본 것에 당황해하며, 선교사와 일반인 포로 모두에게 수녀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는 서류에 서명하도록 강요하였다. 1953년 4월 15일 북한측은 프랑스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포로들을 시베리아 철도로 본국으로 송환한다고 전하였다.
서울 수도원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가르멜 수녀들은 이 소식을 듣고 실망하였다. 수용소에 남은 선교사들도 한 간수가 보여준 신문에 실린, 새 옷을 차려입은 이들의 사진과 이들이 소련을 경유하여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기사를 보고 낙담하였다. 이들은 모두 판문점에서 석방되어 자신의 선교지로 되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4월 17일 판문점에서 포로교환협정서가 서명된 후인 4월 20일 트럭이 와서 미국인들을 싣고 갔다. 호주 출신 골롬반회 크로스비 신부는 수용소장이 이름을 확인한다며 시간을 끌다가 5월 17일 동일인임을 확인했다는 평양의 메시지를 받고 수용소를 떠날 수 있었다.
평양으로 가는 도중 북한 장교들이 선교사들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이유를 묻자, 크로스비 신부는 “공산주의 체제가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정치적·종교적 자유를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
2) 옥사덕 수용소에서의 석방
옥사덕 수용소에는 3년 반 동안 독일인 선교사들을 인간이 아니라 노예나 동물처럼 취급하고 욕지거리와 소동을 일으키며 괴롭혀 ‘살쾡이’로 불린 수용소장이 1952년 10월 6일 떠나가고 새로운 소장이 왔다. 게르투르트 수녀는 자신들을 혹사시키고 떠나가는 수용소장을 증오하지 않고 강복을 비는 마음을 담은 시 <원수>를 썼다.
...멸시와 증오, 그리고 조롱을 받으면서 / 마음속에 조그마한 원한도 없어 천주님의 성의만을 의지하는 것은 / 여기 그리스도 신자의 맛스런 행복 이어라
원수, 그 안에서 형제를 찾고 / 그에 대한 증오를 사랑으로 바꾸면서
우리를 비방하는 그들에게 / 강복 있어지기를 비는 것은 오직 / 신비에
젖은 순결한 사랑이어라.
1953년 11월 15일, 북한 당국의 중령이 옥사덕 수용소의 선교사들을 수도 평양으로 데려갔다. 그는 선교사들에게 극존칭으로 말하며 지금까지 호칭이었던 ‘불량배나 도둑, 강도, 개’가 아닌 ‘북한 정부의 영광스러운 외국 손님’이라고 하였다. 새로운 솜옷을 받은 선교사들은 11월 19일 새벽 감사미사를 드리고 죽은 이들과 작별하기 위해 수용소 공동묘지로 올라가 기도하였다. 이들은 산중의 수용소를 떠나면서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고 겪었으나 또한 많은 은총의 시간이었고 이전보다 주님께 가까이 있었음을 느꼈다. 선교사들은 1954년 1월 독일로 송환되어
북한을 떠나게 되자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는 질곡에서 빠져나온 것이 기뻤지만 한편으로 어떤 우울함이 우리의 가슴을 내리눌렀다. 우리는 우리가 파견된 나라, 우리의 성스러운 선교활동의 나라인 한국을 떠나야 했다.
베네딕도회 경 엘리기우스 신부는 북한을 떠나면서 ‘하느님께서 선교회가 여러 해 동안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을 위해 일했던, 사랑하는 북한을 보호해 주시기를, 하느님께서 이 나라에 곧 다시 평화와 통일을 선사해 주시고 우리 추방당한 선교사들을 곧 우리의 사랑하는 일터로 다시 보내주시기를’ 기도하였다. 게르트루트 수녀는 <이별>이라는 시를 썼다.
길 위에 옮겨지는 자그마한 걸음 / 노예 생활도 교활한 거짓말도 마침내 마침내 다 사라졌으니 / 이제는 자유스런 해방의 몸....
길 위에 옮겨지는 마지막 걸음 / 눈물이 앞을 가리네 우리네 소명의 나라 한국이여 / 언제 다시 우리를 부르려느냐
Ⅳ. 귀국과 귀환, 선교사들의 한국교회 공동체 재건
1. 선교사들의 귀국의 여정과 환대
1953년 4월 17일 프랑스 외교관 민간인들과 함께 평양을 떠난 가르멜회 앙리에트(M. Henriette), 마들렌(M. Madeleine), 베르나데트 수녀들은 북한을 떠나는 마지막 신의주 세관에서 『준주성범』을 빼앗겼다. 이들은 압록강 다리 건너 국경에서 하창리의 두 무덤을 바라보고 기도하며, 서울에 있는 가르멜 수녀회의 딸들을 축복하였다. 중국의 단동 세관을 거쳐 시베리아 철도에 오르자, 중국인들이 친절을 베풀고 간호사가 지친 수녀들을 진찰하였다. 이제 수녀들은 ‘삶의 행진’이 시작되었다고 느꼈다.
프랑스 출신 포로들은 4월 30일 모스크바 주재 프랑스 대사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소련 비행기에 올라 베를린의 러시아 구역에 내렸다. 그곳에서 다시 프랑스 군용기로 파리 공항에 도착하자, 영접하러 나온 많은 환영 인파와 가르멜회 파리 관구장 신부님이 기쁨의 함성을 올렸다. 수녀들
은 몽마르트르 가르멜 수녀회에서 33개월 만에 성체를 다시 모시는 기쁨에 감사드렸다.
수녀들의 귀환 소식과 사진이 신문에 실렸고, 마리 마들렌 수녀는 프랑스 부비네(Bouvinès)의 성모성심 수녀원에서 북한피랍기를 등사판으로 간행하였다. 샬트르 성 바오로회 으제니 수녀는 파리 공항에서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받았고 밤 늦게 수녀원에 도착할 때까지 기자가 계속 따라와 질문하였다. 으제니 수녀는 포로기에서 “3년간 포로 생활의 곤궁은 우리에게 명령내렸던 북한의 간수대장이 불안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괴롭힌 그를 용서해 주시고 언젠가 회심시킬 수 있기를! 수녀로서 우리는 북한 땅에서 보낸 3년간의 포로 생활을 주님께 감사드리며, 돌아가신 모든 분들을 위해 주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하자”고 하였다.
크로스비 신부는 5월 25일 평양을 떠나 중국 단동에서 소련측에 인계되고,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모스크바에 도착해 호주 대사관 직원의 환대를 받은 후, 독일 본 주재 호주 대사에게 보내졌다. 크로스비 신부는 배가고프지 않고, 전깃불이 들어오며 뜨거운 물이 풍부한, 책과 신문이 자유로이 발행되고 그것을 자유로이 읽을 수 있는 나라로 돌아온 데 감격하였다.
그는 전쟁 폭력의 피해자였지만 그러한 경험을 통해 역설적으로 폭력과 복수를 끊고 감사와 기도라는 선교사로서의 본분을 실행하였다.
나는 더 중요하고 귀중한 하느님을 믿을 자유,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얘기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음에 감사하였다. 그리고 살아서 함께 이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안식과 ‘죽음의 행진’을 명령한 ‘호랑이’ 수용소장도 포함하여 모두 마지막 날에 주님과 함께 있게 되기를 기도하였다.
퀸란 몬시뇰은 평양에서 귀국길에 오른 후, 모스크바에서 2년 10개월 만에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하였다. 베를린과 런던에서 그를 마중하러 온 관리들과 친구들로부터 따듯한 환영을 받았다. 아일랜드 더블린 공항에 그가 나타나자 그를 기다리던 친구들과 수많은 환영객들의 환호성과 갈채가 터져 나왔다. <아이리쉬 프레스(Irish Press)>는 퀸란 몬시뇰을 환영하는 인파와 그의 손의 잡으려는 형제자매들, 친척들과 귀국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감격적 장면을 보도하였다. 아일랜드에 머물던 퀴란 몬시뇰은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주한 교황사절 서리(Regent, 1953.10-1957.12)로 임명되자, 이를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죽음의 행진’에서 선종한 데레사 수녀의 고향인 벨기에의 생뱅상 시는, 전쟁 때 쓰러진 용사들 기념 비석에 데레사 수녀의 이름을 새기고 ‘팔마의 월계관’이라는 훈장을 수여하였다.
미국인으로서 교황사절이었던 번 주교는 가톨릭교회에서 중요한 인물이었기에 그가 체포된 이래로 그에 대한 기사가 이어졌는데, 주교의 죽음이 확인되자 서방 언론은 그의 희생을 애도하면서 그의 죽음이 순교였음을 강조하였다.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단동에서 시베리아 횡단 특급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 폴란드 국경에서 동독 정부 대표자와 동행하여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였다. 독일의 라디오 방송이 이미 실종되었던 한국 선교사들의 귀환을 전 독일에 알렸고 신문에도 실렸기에 수많은 군중이 나와 이들을 환영하였다. 성 오틸리엔 수도회에 도착한 이들은 주교와 동료들의 대단한 영접을 받았고, 교황대사도 축하 전문을 보냈다.
2. 다시 한국으로, 교회 공동체의 재건 활동
1) 남한 교회 재건을 위한 선교회의 지원
한국전쟁 초기 가톨릭교회는 성직자들이 구금·납치·피살되어 전례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건물이 파괴되었으며, 가톨릭 신자 20만 명 중 절반 이상이 난민으로 떠도는 등 신앙 자체를 제외한 모든 것이 뿌리 뽑혔다. 이러한 전시 상황에서 외국의 선교 단체들이 대거 내한하여 사회복지 활동을 하였다. 그 선교단체 중 미국의 가톨릭 복지협의회(National Catholic Welfare Conference, NCWC) 산하 가톨릭구제회(Catholic Relief Service, CRS)의 한국지부는 한국 전쟁기 원조와 구호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국내의 모든 본당은 가톨릭 구제회에서 지원하는 식량과 의류등 구호물자를 나누어주는 센터가 되었고 사제들은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이 구호사업에 바쳤다. 또한 피난 후 파괴된 본당으로 돌아온 선교사들은 임시 교회를 세우고 공동체 재건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선교사들은 전쟁 중임에도 1951년 8월에 공산군이 물러간 지역의 파괴된 본당으로 돌아와 임시 교회를 세우고 일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지역 사회 공동체의 사기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선교사들이 다시 집을 짓기 시작하자, 한국 군대는 사람들을 기꺼이 돕고 안정감을 심어주는 선교사보다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높게 평가였다.
가톨릭구제회 특파원인 골롬반회 패트릭 오코너 신부에 의하면, 1952년 남한에 한국인 신부 159명, 외국인 신부 41명이 있었다. 그중 22명의 골롬반회 선교사들은 각지의 난민들에게 음식·숙소·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명동성당 등 교회건물 재건에 기여하였으며, 전쟁의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군인과 시민들에게 종교의식과 정신적 위로를 제공하여 피해자들의 복수심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광주 지목구장 해롤드 헨리(Harold Henry)102) 신부는 1950년 10월 본당으로 돌아가 약탈당하고 파괴된 성당을 수리하고, 가톨릭구제회가 보낸 의약품·의류 등 구호 물품으로 70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의 구제 활동을 하였다. 1952년 광주지목구에는 총 1,037명이 입교하였다.
목포의 토마스 모란(T. Moran) 신부는 공립학교가 수용하지 못한 150명의 피난민 어린이들을 위해 학교를 열었고, 중공군의 점령과 포격을 피해 흑산도로 이주한 신자들을 찾아가 미사를 집전하고 세례를 주었다. 1950년 이전 한 명의 신자도 없던 흑산도에 예비신자 50명이 나왔으며 신자들이 직접 공소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춘천 지목구는 전쟁 기간 피해가 가장 큰 지역이지만 사제가 없었던 적이 한번도 없고, 지도자 퀸란 몬시뇰을 잃은 신부들 모두가 지도자가 되었다. 춘천지목구장 대리 헤이워드(Hubert Hayward) 신부 등 8명의 골롬반회 선교사들과 한인 사제 20명은 폭격으로 파괴된 본당 열두 곳
을 다시 지어 춘천의 기적이라 불리는 재건을 이루어내었다. 강릉의 38선 바로 남쪽에 넬리간(Tom Neligan) 신부가 맡았던 학교·고아원이 다시 문을 열었고, 파괴된 성당을 더 크게 지었다.
삼척에서 패트릭 버크(Patrick Burk) 신부는 성당과 사제관 건물을 수리하고 흩어진 본당 신자
들을 찾아 보살폈다. 속초의 맥고완(McGowan) 신부는 본당이 없던 마을에 새 본당 터를 닦았다. 횡성에서 맥마흔(McMahon) 신부는 파괴된 성당을 수리해 더 큰 새 성당을 지었고, 원주의 패트릭 디어리(Deery) 신부도 한국인 보좌 신부와 함께 재건과 선교에 매진하였다.106) 오코너 신부는 이같은 선교활동의 성취는, 골롬반회 선교를 후원하는 고향의 신자들도 자부심을 가질 만한 것이라고 하였다.107) 티모시 코놀리(Timothy Connolly) 신부는 골롬반회가 이룬 성취를 기적이라고 강조하였다.
골롬반회가 1933년 처음 한국으로 왔을 때 맡은 신자수가 2,500명이었는데, 여러 선교사들이 희생되고 물질적 자산을 잃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치루면서도 1만 명으로 늘었다. 매번 이전보다 더 부족한 형편에서 새로 시작해야만 했던 사제들은 선교회의 지원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며 그러한 지원을 통해 신자 수를 배로 늘리는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
전쟁 중 그리스도교 신자 수가 성장한 데에는 군종 제도와 포로수용소에서의 교화 활동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109) 미8군 군종 신부로 참여한 캐롤 몬시뇰은 성직자들이 한국전쟁의 고통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1951년 2월 한국 군종단(The Korean Army Chaplin Corps)을 창설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선교사들은 유엔군 관할의 포로수용소에서도 활동하였다. 거제도·부산 등지에 설치된 공산군 포로 수용소에는 주로 평양교구 소속의 메리놀 외방전교회 미국인 신부들이 활동하였다. 목포의 포로수용소에서는 미국 메리놀회 페티프렌(Petipren) 신부와 한국인 장 신부가 북한군인 700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1953년 200명에게 교리교육을 하였다. 광주 지목구장 헨리 주교도 공산군 포로에게 견진성사를 주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가톨릭 성직자로서 대개 반공주의를 실천했지만, 한국전쟁을 더 가까이에서 보면서 남한 사회에서 부역자나 공산주의 혐의자들을 처리하는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크로스비 신부는 그리스도인으로 전향한 공산주의 혐의자를 총살한 남한 경찰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받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들과 부역 혐의자들에 대한 처벌이 ‘마녀사냥’이 아니라 공정하게 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피난 갔던 남한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왔지만, 집은 불타있거나 친지들이 살해되기도 하였다. 주민들은 국군이나 경찰에게 공산당에 협력한 정보원이나 반역자들을 고발했고, 처형은 대개 성급하게 이루어졌다. 선교사들은 사법 행정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마녀사냥’은 안 되며, 반드시 공정하게 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골롬반회의 패트릭 오코너 신부는 조병옥 내무부 장관에게 이 문제를 제기했으나 대답이 없자, 플림솔(James Plimsoll)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의장에게, 일부 ‘빨갱이와 혐의자들’이 적절한 재판 절차 없이 처형된다는 사실을 알렸다.
캐롤 몬시뇰은 수복된 서울의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한 후, 정부의 전쟁 부역 혐의자를 처리하는 방식에 강한 이의를 제기하였다. 당시 남한사회는 월남자들을 경계하거나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평양에서 사목했던 캐롤 몬시뇰은 스스로를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으로 여겼고, 월남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이데올로기나 출신 지역에 얽매이지 않는 적극적인 구호 활동과 개방적인 선교활동을 펼쳤다.
선교수녀회는 선교 사명으로 자선과 의료사업을 하였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고아들을 데리고 대구·부산·제주도로 피난하면서 재원 마련을 위해 세탁·재봉·수예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의료봉사활동에서는 메리놀 수녀회가 부산 메리놀 자선병원을 개원하여 피난민 환자들을 진료하였고,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들은 제15육군병원, 성가수녀회와 원산에서 온 포교 성베네딕도 수녀회 수녀들은 제3 육군병원에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제3과 제5 육군병원 등에서 봉사하였다. 군병원 봉사의 선교 효과는 탁월하여 1951년에 168명, 1952년에 961명, 1953년에는 1,030명의 신규 세례자를 배출하였다.
교회 시설의 재건에는 미국교회의 원조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1953년 6월까지 미국 가톨릭교회가 보내준 원조품은 1,130만 달러에 달하여, 전쟁 기간 미국의 각종 종교 단체들이 한국에보낸 구호물자의 70% 가량을 점하였다. 전쟁으로 파괴된 가톨릭교회 시설의 복구 작업이 1953년 이전에 절반 이상 완료되었고, 1954년까지는 나머지 대부분도 복구되었다. 전쟁의 결과 중 하나는 사람들이 초월적 가치를 추구하게 만든 것이다. 남아있는 선교사들, 목자는 적었지만 이들은 쇠약해진 양떼들의 요구에 응답하려 노력하였다.
2) 남한에서 선교사들의 새로운 희망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어 ‘군사적 전투행위’는 종결되었으나 완전한 평화-종전은 아닌 상태가 되었다.118) 그럼에도 선교사들은 정전협정이 영구적인 평화로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한국의 평화 건립을 위한 일을 하고자 하였다.119) 죽음의 행진에서 살아남아 본국으로 돌아간 선교사들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1953년 12월 4일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출발해 1954년 1월 29일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하여, 감격에찬 가르멜회 마리 앙리에트와 마리 마들렌 수녀들에게 한국의 신부들과 유엔군 종군 사제들, 성 바오로회 수녀들과 많은 신자들이 환영의 박수를 보냈다.
환영인들이 한국 순교복자 찬가를 우렁차게 부르자 수녀님들은 이치명 노래를 1839~1866년의 박해, ‘죽음의 행진’ 때 순교하신 분들에게 바쳤다. 이들은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혜화동 봉쇄 수녀회로 가서 기쁨의 포옹을 나누고 ‘마니피캇’을 노래하였다.
퀸란 몬시뇰은 북한의 수용소에서 자신의 수단을 덮여드려 매장한 번주교의 뒤를 이은 새 교황사절이 되어 1954년 4월 23일 서울에 부임하였다. 수백 명의 가톨릭 신자·주교와 사제들·관리들이 그를 영접하였다.
춘천에서는 1954년 7월 7일 돌아온 퀸란 몬시뇰을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행사가 열렸다. 교황사절 퀸란 몬시뇰은 그의 생애 동안 남한에서, 1953년 20만 아래의 가톨릭 신자가 총인구의 2.5%인 거의 백만 명으로 증가하는 가톨릭교회의 빠른 성장을 목격했다. 가톨릭이 성장한 이유는 복잡하나, 퀸란 주교 등 선교사들이 행한 역할, 순교한 선교사들의 희생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전후까지 이어진 선교사들의 난민구제와 교회 재건을 위한 선교의 행진은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는 염원이 담겨있다. 춘천 지목구 허버트헤이워드 신부와 가톨릭 군의관은 병든 이들을 위한 병자방문을 다녔고, 이를 평화의 사명으로 본 버나드 스미스(Bernard Smyth) 신부는 전후 평화를 기원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본당 사제들의 난민구호와 병자방문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평화를 이루려는 노력에 비해 너무나 사소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나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자부심 강한 예루살렘이 근처 마구간에서 태어난 한 ‘아기’를 전혀 주목하지 못했다는 것 또한 압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불안한 휴전밖에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께서만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실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 피난 온 베네딕도회 수사들과 북한 수용소에서 고향으로 추방되었다가 다시 남한으로 돌아온 선교사들도 이방인이 아닌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어, 자신의 종교적 소명을 수행하며 남한에서 수도회를 재건하였다. 덕원에서 활동했던 베네딕도회 디모테오 비텔리 신부와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새로 서품받은 노 아우구스띠노 신부 등도 1952년 지원 물자를 갖고 동료 수사들이 있는 대구로 가서 공동체 재건을 위해 힘을 보탰다.
베네딕도 수도회는 왜관과 낙산 본당을 맡았고, 가톨릭중학교와 농업학교를 운영하고 출판사업을 하였다. 낙산 본당에는 1952년 만주 선교지역에서 추방당한 연길의 독일 선교사들이 합류하여 남한에서 새로운 활동을 해나가게 되었다. 함흥교구가 여전히 베네딕도 수도회에 위임되어 있었기에 1952년 5월 로마 포교성성으로부터 함흥교구 교구장 서리로 임명된 디모테오 비텔리 신부는 1953년 연길 교구 교구장 서리도 겸하게 되었다. 옥사독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중 베네딕도회 소속 신부 일곱명과 수사 두명이 1956년부터 다시 한국에 입국, 활동을 시작하며, 베네딕도회는 1956년 한국 교회 안에 수도공동체로 재탄생하여 왜관에서 선교활동을 펼쳐나갔다.
혹독한 북한 수용소를 겪은 게르트루드 링크 수녀와 크리소스 토마 수녀도 1956년 5월 7일 선교지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남하에 성공한 툿찡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한국인 수녀들이 수도 생활을 시작한 대구에서 100명이 넘는 한국인 수녀들과 함께 수녀원을 이루고, 독일의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한 덕분에 성당과 대규모병원을 건축하였다.
이같이 그리스도교 공동체 선교사들은 ‘제국의 평화’와는 구별되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하는 본질적 사명을 실천하였다. 이러한 실천은 전쟁의 고통을 겪으면서 천주교회 안에서 ‘정의로운 전쟁’의 입장이 ‘소명인 평화주의’·전쟁반대·비폭력을 포괄할 수 있는 것으로 변화되어 간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V. 맺음말
가톨릭 교회는 3년이나 진행된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고 큰 피해를 입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본당과 신자들을 지키기 위해 피난을 가지않았기 때문에 북한군에 의해 체포되거나 희생되었다. 남과 북에서 실되거나 난민이 된 교인들을 더한다면 희생된 천주교인과 사제의 수는 훨씬 더 많다. 이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한국전쟁 기간 반공주의가 강화되고 한국전쟁을 성전이나 십자군 전쟁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냉전과 종교의 관계를 거시적인 조망에서 분석하는 기존의 연구들은 그리스도교 교회를 구성하고 공산주의를 만났던 구체적인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이 글은 여러 선교회 선교사들의 수기를 종합하고 골롬반회 자료를 추가하여, 증오와 적대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선교사들이 어떠한 태도와 실천으로 선교 사명을 이루어 나갔는지 알아보았다.
납북되어 죽음의 행진을 겪었거나 옥사독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선교사들의 수기에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지도부가 한국전쟁을 규정한 성전의 주장은 보이지 않는다. 선교사들은 고난의 수용소를 거치면서도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증오를 심화시키지 않았고, 순교를 서술하면서도 반공이나 냉전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성찰을 보여주었다. 북한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선교사들의 납북체험기와 증언에는 순교 정신과 용서와 회개를 위한 기도가 들어있다.
예컨대 북한군 포로수용소장 ‘호랑이’가 죽음의 행군 도중 포로들을 총살하거나 낙오자들을 얼
어죽게 내버려 두는 행위 등에 대해서도 반공을 내세운 비판이 아닌 인류애, 신앙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있다. 원수 같은 옥사덕 수용소장 ‘살쾡이’에게도 강복을 빌었다. 증오와 적대,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강화될수밖에 없는 전쟁상황에서 선교사들은 오히려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는 선교와 신앙의 실천이라는 자신의 사명을 수행한 것이다.
전시 군종 사목과 포로수용소 활동을 통해 전쟁 난민을 위로하고 도움을 베푼 교회의 활동은 이후 교회 구성원들에 변화를 일으켰다. 선교사들의 원조와 헌신적인 봉사활동은 인종·국가·종교를 초월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다수 한국인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의 평화를 추구하는 본질적 사명을 실천하였으며, 이는 전후 한국 교회로 이어지고 확장되었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 한국 천주교인의 수가 5년간 두 배 이상 증가하였고, 사회복지 직접적인 수혜자인 빈곤층의 입교뿐 아니라 교회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가 조성한 사회분위기에서 지식인층의 입교도 활성화되었다.
1953~54년 납북 선교사들의 고국으로의 생환과 순교 소식은 각 수도회뿐 아니라 선교사들의 고국인 미국·프랑스·독일·벨기에·영국·아일랜드·호주 등지에서도 대서특필되었다. 선교사들이 남긴 생생한 수기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출판·번역되어 주목을 받았다. 고국으로 돌아간 선교사들이 정전협정 체결 후, 다시 한국으로 입국하여 선교의 행진을 벌일 때, 본국의 수도선교회와 가톨릭 신자들은 이를 적극 후원하였다. 선교사들의 전시 죽음의 행진, 순교와 수난은 남한에서 선교와 구제 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기반이자 추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교황청은 전쟁과 박해로 숨진 ‘20세기 순교자’에 대한 추모 기도회와 미사를 정기적으로 드리고 있으며, 20세기 새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와 법적 절차를 걸쳐 시복·시성식을 거행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각 교구와 수도회별로 한국전쟁 전후 희생자에 대한 현양 미사와 추모 활동, 순교비 설립, 기념관 전시 및 시복·시성 청원을 위한 자료집 출간 등의 노력이 이어져 왔다.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을 앞당기기 위한 증거자료 발굴과 수집, 연구업적이 종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투고일 : 2023. 8.13
심사일 : 2023. 8.31
게재확정일 : 2023. 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