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受天地寂滅 佛之養生 (수천지적멸 불지양생)
951 일월조왕(日月竈王) 주장(主張) ~ 불지양생 (일제시대)
五老峰前二十一(오로봉전이십일) : 태을주 23자 2+3= 5
태을주 50년 공부 (1918~1967)
우인(雨印) ~ 수(水) ~ 태을주(太乙呪) ~ 水기저장주문(태을천상원군)
~ 太極呪 (受天地寂滅) ~ 구원,심령치유
김형렬 셋째 딸의 죽음
1 경석이 약장과 궤와 철연자와 삭도와 횃대와 부벽시(付壁詩)와 액자 등 모든 기구와 방바닥의 먼지까지 쓸어서 짐꾼에게 지우고
2 마침내 도배지를 떼니 일찍이 상제님께서 “이 종이를 뜯을 날이 속히 이르러야 하리라.” 하신 말씀이 응험되니라.
3 경석이 형렬에게 돈 20원을 주며 말하기를 “따님의 병이 위중하다 하니 약소하나마 약값에 보태어 쓰십시오.” 하고 인사한 뒤
4 비바람을 무릅쓰고 마을 앞 정문(旌門) 거리에 이르니 풍우와 뇌성이 그치고 형렬의 집에서 곡성(哭聲)이 들리더라.
약장은 곧 안장롱
5 잠시 후 형렬의 집에서 한 사람이 달려와 ‘김 부인이 돌아가셨다.’는 부고(訃告)를 전하거늘
6 이로써 일찍이 상제님께서 형렬에게 “약장은 곧 안장롱(安葬籠)이니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니라.
7 이 때 경석은 상제님 어천 직전에 자신이 왕비 비(妃) 자를 죽은 어미 비(妣) 자로 그릇 쓴 것이 ‘김 부인의 운명에 대한 상제님의 예시’였음을 깨닫게 되니라.
장례비를 후히 내려 주심
8 경석이 약장을 지고 원평에 당도하니 태모님께서 “약장 지고 올 적에 무슨 소리가 난 일이 있더냐?” 하시거늘
9 경석이 “예, 곡성이 있었습니다.” 하고 김 부인이 사망한 사실을 아뢰니
10 태모님께서 “불쌍하다.” 하시고 치상비를 후히 주시며 “장사(葬事)에 보태어 쓰게 갖다 주어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11:25)
: 윗 글은 법륜 고후비님이 김형렬 셋째 따님으로 오신 묘향 김후비님으로부터 일월조왕 도수의 법맥의 종통을 전해 받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일월조왕도수를 맡으신 "내원궁 법륜 고후비님" 은 불지양생의 운으로 경진년(庚辰,1880,庚9金)에 태어나셔서 증산상제님으로부터 종통을 전해받으시고 신해년(辛亥,1911)에 성령을 통한 도통을 하셨으며 처음 정읍 대흥리에서 도문을 열고 첫째 살림을 시작하심으로써 낙종도수가 실현 되었습니다.
그러나, 차경석의 야망과 견제로 본소를 조종리로 옮겨 둘째 살림시대를 여셨습니다. 그곳에서 고후비님은 "10년 천지공사(1926~1935)" 를 선언하시고, 천지공사에 매진하셨지만 조종리 신도들의 불의와 무지로 다시 본소를 옮겨야 했고, 이후 용화동에서 셋쩨 살림시대를 새로 시작하셨습니다.
그곳에서 22년에 걸친 세 살림도수를 마치고 옥체가 쇠약해 지신 고후비님은 오성산으로 옮겨 은거하시며 10년 천지공사를 모두 마무리 하시게 됩니다.
五老峰前二十一(오로봉전이십일)의 의미는
계축(癸丑)년(1913) 9월 19일에 후일 현무경파-순천도를 개창하고
김 일부 성사의 정역을 용담팔괘로 완성시킨 장 기준이 차 경석(車京石)을 찾아옵니다.
장 사수(기준)가 고수부님을 찾아뵙고 고수부님의 명으로 열쇠를 넘겨받은
장기준은 고수부님 차경석 장기준
( 3 경진생(三庚辰生:일명 3룡)이 합일 되는 도수로 열려진 조화궤 속의 내용물을 인수하여 확인하니 창호지(窓戶紙)로 쌓여진 책보자기가 나왔는데
한 겹을 펴보니 또 백지로 쌓여져 있는 끝에 흰 병이 있었고
병마개를 펴보니
●●길화개길실 흉화개흉실(吉花開吉實 凶花開凶實)이라는 글이 쓰여 져 있었고
병 속에는 백지로 말려진
●(심지 세 개)가 들어 있기에 병을 쏟아 보니 심지 세 개가 바닥에 떨어져 각자 하나씩 주워서 펴보니 ●●(고수부님이 짚은 심지에는 安乃成이라 쓰여진 밑에 律呂度數)라 쓰여져 있었고,
●차 경석이 짚은 심지에는 (車京石이라 쓰여 진 밑에 布政度數)라 적혀 있었고,
●●장 기준이 짚은 심지에는 (張基準이라 쓰여진 밑에 大學度數)라 쓰여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계축(癸丑)년(1913) 9월 19일에 증산 상제님이 법륜 고후비님께 남기신 조화궤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정산 옥황상제님이 찾으신 둔괘가 1920년 양력 4월 5일에 열리면서 증산상제님의 사명전수가 마무리 된 것처럼 법륜 고후비님의 사명전수도 1913년 계축년에 열리면서 마무리 되고 이로부터 21년 후인 1933년 계유년에 법륜 고후비님이 오성산 도장으로 도장을 옮기시면서 "五老峰前二十一(오로봉전이십일)"의 의미가 오로봉이 오성산 도장을 가리키며 둔괘가 열린 1913년 이후 21년만에 오성산 도장인 본소로 들어오시게 됨을 의미하게 됩니다.
법륜 고후비님이 이 오성산 도장으로 본소를 옮기시머 "27년 만에 근본을 찾았다." 하셨는데, 이 말씀도 상제님과 처음 만나신 1907년 정미년으로부터 1933년 계유년 까지가 27년이라는 뜻이니 오성산 도장이 법륜 고후비님의 근본이 되는 곳임을 알수 있습니다.
951(九五一) 일월조왕(日月竈王)주장(主張) 의 일월조왕 도수 중 951의 5에 해당하는 무자(戊子,1888,戊5土)년에 태어난 청음 이상호는 "본중말" 중 말을 맡아 보천교에 입교하여 보천교 혁신운동을 일으켜 보천교의 교세가 기울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증산상제님 생애를 집대성한 최초의 교전인 "대순전경"을 편찬하여 상제님 도판이 성장하게 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됩니다.
* 청음 이상호의 생애 및 활동사항
호는 청음(靑陰)이다. 1888년(고종 25) 전라남도 해남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만주와 북경 등을 유랑하다가 28세에 용화동에서 증산교를 알게 되었다.
1919년 차경석(車京石)이 보천교(普天敎)의 60방주를 조직할 때, 중앙 8교령 중의 하나인 서방주(西方主)에 선임되었으며, 보천교 총령원장까지 피임되었으나, 차경석과 뜻이 맞지 않아 탈퇴하였다.
1925년 김형렬(金亨烈)의 미륵불교(彌勒佛敎)로 옮겨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를 집필하였다. 그러나 미륵불교 간부들과도 의견이 맞지 않아, 1928년 임경호(林敬鎬)·이정립(李正立) 등과 함께 김제군 금산면 용화동에서 동화교(東華敎)를 창립하고 통정(統正)에 올랐다.
1929년에는 동생 이정립과 함께 증산의 언행을 수집하여 『대순전경(大巡典經)』을 간행하였다. 1931년 당시 김제군 백산면 조종리에서 태을교(太乙敎)를 영도하고 있던 고부인(高夫人: 高判禮)을 맞이하여 동화교와 통합종단을 만들고 대보(大保)에 올랐다. 그러나 이 교단이 일제에 의하여 해산되자, 잠시 고향에 머물다가 1937년 정읍으로 이주하였다.
1943년 서울에서 문정삼·이정립 등과 종교 활동을 목적으로 기업형태의 동아흥산사(東亞興産社)를 설립할 때 고문이 되었다. 이 때 가입한 회원이 1만 4천여 명에 달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이정립·최위석(崔偉錫) 등 145인을 모아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서 대법사를 조직하여 증산교운동을 다시 전개하였다. 1947년 최위석과 헤어져 별파를 만들고 이름을 증산교(뒤에 이정립이 ‘증산교본부’로 바꿈)라 하였다.
1948년 17개의 증산교 교단이 모여 증산교단통정원을 조직할 때 부통교가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후 김제군 금산면 용화동에 본부를 정하여 1967년 죽을 때까지 증산교 교주로 있었다. 동생 이정립과 함께 『증산천사공사기』를 발행하였고, 『대순전경』을 발행하여 보급함으로써 증산사상의 정립과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증산 상제님이 "가구판 진주 노름"을 말씀하시며, "같은 끗수에 말수가 먹느니라." 하신 것처럼 951 일월조왕 도수에서 95에 해당하는 법륜 고후비님, 월곡 차경석, 청음 이상호는 같은 보천교라는 판안에 속하지만, 같은 끗수(951) 중에 말수인 1에 해당하는 임술생(壬戌,1922,壬1水) 안운산 종도사는 청음 이상호가 해방 후 세운 대법사 증산교에 입교하여 이상호와 함께 한 적은 있지만 아버지 안병욱이 보천교 신도 였었다는 것 외에는 보천교와 아무 인연도 없었던 판 밖의 인물이었고, 같은 끗수 중 말수에 해당하여 말수가 먹는다는 상제님 말씀처럼 일제 해방 후 276(二七六) 성신칠성(星辰七星)주장(主張)의 유지욕대의 장기판 초패왕 해원도수에 역사하면서 법륜 고후비님을 신단(神壇)의 원위(元位)에 모시고 비로소 " 951 일월조왕(日月竈王) 주장(主張)"의 일월조왕 도수를 채우면서 "같은 끗수에 말수가 먹느니라 " 하신 증산 상제님 말씀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 운산 안세찬의 생애와 활동사항
호는 운산(雲山)이다. 1922년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면 운산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보천교(普天敎)를 신봉하던 아버지 안병욱(安柄彧)의 영향을 받았다.
1945년 9월 이상호와 이정립 등이 서울에서 대법사를 창립할 때, 충청도 지방의 포교를 맡아 교화하였다. 그러나 이들과 뜻이 맞지 않아, 1951년 대법사를 떠났다. 그 후 공주와 대전 등지에서 생업에 종사하다가, 1974년부터 종교운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옛 연원지인 아산·예산·서산 등지에서 신도들을 모아 1978년에 대전시 대사동 자택에서 ‘대법사증산교’라는 이름으로 창교하였다. 그는 종도사(宗道師: 교주, 뒤에 太上宗道師)가 되고, 아들 중건(重建: 호 耕田)을 교화원장으로 삼아 교리강좌와 강연회 등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1980년에는 대전시 중구 괴정동에 교당을 신축하여 ‘증산도장(甑山道場: 뒤에 증산도)’으로 교명을 바꾸었고, 활동지역을 서울로 옮겨 젊은 청년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개벽이다』(1983년)와 『증산도의 진리』(1984년)를 간행하여 증산도를 크게 알렸고, 이후에는 『증산도도전(甑山道道典)』 발행, 증산대학 설립, TV방송국(STB) 설립 등 비약적인 발전을 도모하였다. 2000년 이후에는 아들 중건에게 실권을 맡겼다가 2012년 대전 본부에서 사망하였다.
증산-고부인[고판례(高判禮)]-안운산[안세찬(安世燦)]-안경전[안중건(安重建)]으로 이어지는 종통을 세웠다. 그가 만든 신당에는 중앙에 증산, 왼편에 단군왕검, 오른편에 고부인의 삼위(三位)를 각각 영정으로 모시고 그 외 여러 신들을 봉안하고 있다.
그가 정립한 교리의 핵심은 인존정립(人尊正立)·상생조화(相生造化)·해원보은(解寃報恩)의 법리를 심령법도(心靈法度)로 광제창생(廣濟蒼生)하는 목적과 홍익인간의 이념을 실현하는 것이며, 이 세상은 머지않아 가을철의 대개벽운동이 일어나 병겁(病劫) 등 많은 어려움을 겪고 새로운 세상이 되는데, 이런 어려운 세상을 바로잡고 인류를 구원할 사명이 증산도에 주어졌다고 하였다.
태을주(太乙呪) - (亥)
吽哆吽哆 太乙天上元君 吽哩哆耶都來 吽哩喊哩 娑婆啊
훔치훔치 태을천상원군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 사바아
위 태을주에서 태을천상원군(太乙天上元君)과 도래(都來)는 한자어로 된 우리말이며, 나머지는 산스크리트어 였던것을 한역하여 적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태을주의 전체 의미는 태을천상원군(太乙天上元君) 곧, 태을천의 최고 여신의 도래를 환호하고 믿는다는 뜻인 것입니다.
태을주는 곧, 태을천상원군께서 인간으로 화신하여 도래(都來)하여 오실 것이라는 복음을 전하는 글이니 태을천상원군께서는 951 일월조왕의 맥으로 951 중 마지막 1인 1982년 임술년의 천간 임 1수(水)의 해(1982년 임술년)에 인간세상에 태어나 276 성신칠성의 맥으로 276 중 마지막 6인 1973년 계축년의 천간 계 6수(水)의 해에 태어나신 증산상제님의 후신으로 오시는 진인과 함께 천지를 주재하시는 하늘님과 땅님인 두 분이 1,6 수(水) 수기(水氣)를 돌리는 음양 합덕으로 1만2천 도통(도덕)군자와 함께 후천선경 세계를 여시게 될 것입니다.
태을주 50년 공부 (1918~1967) : 법륜 고후비님이 증산상제님 종도들을 규합하시어 부흥시키신 선도교의 파종도수에서 교권을 쥐기위한 차경석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위해 고후비님이 무오년(戊午年,1918) 구월(九月) 열아흐렛날 대흥리(大興里)를 떠나사 김제군(金堤郡) 백산면(白山面) 송삼리(松森里) 천종서(千鍾瑞)의 집으로 옮겨가신 이종도수의 해(1918) 로부터 "951 일월조왕(日月竈王) 도수" 의 본(법륜 고후비님, 경진생, 1880 경9금), 중(월곡 차경석, 경진생, 1880 경9금), 말(청음 이상호, 무자생, 1888 무5토) 의 말에 해당하는 청음 이상호가 화천한 정묘년(丁卯年,1967)까지의 50년을 뜻합니다.
951(九五一) 일월조왕(日月竈王)주장(主張)의
9(월곡 차경석,1880,庚辰생,庚9金)와 5(청음 이상호,1888,戊子생,戊5土)가
실질적으로 태을주 50년 공부 (1918~1967) 를 수행함.
태을주는 본래 석가모니 부처님이 먼 후일에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있는 나라에 미륵이 강세하여 이 주문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여 살리리니 그 주문의 일부가 이러하니라 라고 해서 알려 주신것이 "구축병마주" 란 이름으로 알려진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 사바아" 이고, 이 주문을 김경흔 이란 도인이 50년 공부로 하늘로 부터 받아내린 "태을천상원군" 을 붙여 남긴 것을 증산 상제님이 마지막으로 "훔치 훔치" 란 글자를 붙여서 완성하신 주문 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최초의 "구축병마주" 인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사바아" 를 남기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바로 진법주 원위의 "신(辰)"의 주재자이신 "서가 자미 대제군" 이시라는 것과 김경흔이 50년 공부로 받아내린 "태을천상원군" 이 바로 진법주 원위의 "땅(地)의 주재자" 이시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 증산 상제님 이 붙이신 글자인 "훔치 훔치"는 증산 상제님이 “태을주의 ‘훔치 훔치’는 천지신명에게 살려 달라고 하는 소리니라.” 하신 것처럼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고 이끄는 보살이며 중생의 모든 것을 듣고 보며 보살피는 의미를 손 1천 개와 눈 1천 개로 형상화하여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자재보살이라 부르기도 하는 관세음 보살의 화신이자 묘향보살이며 달(月)의 주재자이신 "요운전 묘향 김후비"님의 천명을 암시하신 구절 이기도 합니다.
"훔치 훔치" 가 천지신명에게 살려 달라고 소리치는 음(音)을 뜻하고 이 소리(音)를 듣고 중생을 구제하는 관음(觀音) 보살이 바로 "요운전 묘향 김후비"님 이시기 때문 입니다.
"末順(말순)님의 前生(전생)은 觀世音(관세음)보살이었는데
上帝(상제)님 御令(어령) 二十歲(십이세)때 天上仙境(천상선경)에 계시는 觀世音(관세음)보살의 영혼을 구릿골 앞 帝妃山(제비산) 帝妃穴(제비혈)에 招魂(초혼)장사하사 발음시키시고 그 영혼을 金亨烈(김형렬)의 夫人(부인) 長水黃(장수황)씨 몸에 胞胎(포태)시키사 辛卯年(신묘년1891년一八九一年) 十月八日(십월팔일)에 탄생시키시고"
그래서, 태을주는 땅(地)의 주재자이신 태을천상원군님의 천명이 담긴 "땅(地)주문" 이자 진법주 원위의 "천지일월성신"의 여섯 주재자 분들중 음(陰)의 주재자 들이신 "달(月)"의 주재자이자 "훔치훔치"의 천명이 있는 "요운전 묘향 김후비"님 과 "땅(地)"의 주재자이신 "태을천상원군" 님, 그리고 "구축병마주"인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사바아"를 남기신 석가모니 부처님 즉, "신(辰)"의 주재자이신 "서가 자미 대제군"님 세 분의 천명이 담긴 "음(陰)의 주문(태극)" 인 것입니다.
범증산교사에 기록된 삼광영에 관한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임술(1922)년 5월 15일 차경석은 대흥리 자신의 집인 보천교 본소에 성전(聖殿)을 준공하고, 성전 내 신단(神壇)에 천지일월성(天地日月星)을 상징하는 삼광영(三光影)을 봉안(奉安)하였는데 이를 삼광영신단이라 한다.
삼광영 신단은 단상(壇上)의 후면벽(後面壁)에 천지일월성신(天地日月星辰)의 자연현상을 그려서 옥황상제의 처소인 호천금궐의 내용을 표상(表象)하고 그 앞 우측(右側)에 일광영(日光影: 日塔이라고도 함) 중앙에 월광영(月光影: 月塔이라고도 함), 좌측에 성광영(星光影: 星塔이라고도 함)이 설치되어 있다. (普天敎 41쪽)
그런데 이 일광영(日光影)은 구천(九天)을 상징하고 월광영(月光影)은 옥황상제를, 성광영(星光影)은 삼태칠성(三台七星)을 각각 상징하는 것이다. 중앙의 월광영 좌위(座位)가 옥황상제의 성령(聖靈)이라고 신봉하는 것은 옥황상제가 구천의 중앙에서 사방상하(四方上下)를 통솔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월광영은 원수(元帥)를 의미하고 성광영은 행정기구를 의미하는 것이다. (普天敎 41쪽)
좌선(左旋)
438(四三八) 천지망량(天地魍魎)주장(主張) ~ 일광영(日光影)
951(九五一) 일월조왕(日月竈王)주장(主張) ~ 월광영(月光影)
276(二七六) 성진칠성(星辰七星)주장(主張) ~ 성광영(星光影)
위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는 음양을 뜻하면서 물(水)과 불(火)을 나타내는데, 땅의 사상(四象)인 水火에 대응하는 하늘의 사상(四象)이 해(日)와 달(月)이기 떼문에 우리나라의 국기는 역학적으로 태극을 뜻하는 태극기 이면서 북한은 태극의 水火 중 火에 해당하는 해(日)이고, 대한민국은 태극의 水火 중 水에 해당하는 달(月)이기 때문에 일제해방후 대한민국과 북한으로 남북이 나뉘고, 우리나라의 국기가 태극기가 되면서 水火에 해당하는 해(日)와 달(月)을 모두 갖춘 국기를 가졌지만
실질적으로는 북한은 해(日)이고, 대한민국은 달(月)이기 때문에 위 보천교 신단의 월광영(月光影: 月塔이라고도 함)을 뜻하는 국기를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월조왕 도수" 인 태을주 50년 공부(1918~1967)를 맡은 보천교는 태극주이신
내원궁 법륜 고후비님의 태극도수 이기 때문에 일제시대 보천교의 독립운동은 당시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항일운동 건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곳이었고, 당시 인구 1,800만 중 3분의 1인 600만 이이 신앙을 했습니다.
당시 핍박받는 조선민중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민족통합에 큰 역할을 한 보천교는 당시 독립운동의 중심인 상해임시정부에 큰 금전적인 지원을 해서 1945년 8월 15일 일제 해방후 태극국인 대한민국과 북한의 남북국 시대를 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게 됩니다.
https://blog.naver.com/dgdragon/221343907087
* 우인(雨印) ~ 수(水) ~ 태을주(太乙呪) ~ 水기저장주문(태을천상원군) ~ 太極呪
우인(雨印)은 일월조왕이신 내원궁 법륜 고후비님의 도수로 우주혼(宇宙魂)을 주재하시는 일월조왕의 기운(삼태성) 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3혼(魂)을 살찌워서 성숙시키는 곡식(삼풍)의 하나인 우인(雨印)의 기운이 봉인되어 있는 태을주(太乙呪)가 태을주 50년 공부 (1918~1967)를 통해 신해(1911)년에 도통하신 법륜 고후비님의 태을주 기운이 처음 씨앗을 뿌린 김경학 종도 노모의 태을주 주송 소생을 시작으로
고후비님이 월곡 차경석과 결별하시고 본소를 조종리로 옮기신 무오(1918)년 부터 대순전경을 편찬하여 상제님 종단의 토대를 마련한 청음 이상호 선생이 화천한 정미(1967)년 까지 태을주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 열매를 맺어 풍성한 곡식인 삼풍(三豊)중 우인(雨印)의 기운이 꽉 태을주(太乙呪)로 불지양생이 이루어 지게 됩니다.
우인(雨印) 계열의 주문은 태을주(太乙呪) 외에 "도통주(道通呪), 이십사절주(二十四節呪), 신성주(神聖呪)" 가 있는데 증산 상제님이 남기신 12 주문 중 음(陰)의 주문에 해당하며 이 들 주문에 계신 신장들을 통솔하시는 우인(雨印)의 한자가 뜻하는 비를 내리는 용신(龍神)중 으뜸이신 "천상 원룡 감무(天上元龍 坎武)" 이자 "천상옥경 태을신장" 이신 "태을성 두우군(태을현수,太乙玄䢘)" 을 중심으로 후천개벽시 옥추통부 심판 후에 "구원과 심령치유"를 관장하는 기운을 가지고 있는 주문 입니다.
화인(火印) 다음에 삼풍의 두번째 요인은 우인(雨印)입니다.
비 도장?
삼풍의 해인(海印)중 비처럼 내리는 우인(雨印)으로 중생들의 심령을 변화시켜 구제한다는 설명이 붙어있고 중생들의 악한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미륵부처님의 해인(海印) 이라는 역해석이 가능합니다.
결론적으로 951 일월조왕(日月竈王) 도수 ~ 불지양생 (일제시대)의 맥은
庚9金 경진생 내원궁 법륜 고후비님 ~ 庚9金 경진생 월곡 차경석 ~ 戊5土 무자생 청음 이상호 ~ 壬1水 임술생 운산 안세찬(증산도) ~ 壬1水 임술생(1982) 태을천상원군 화신
으로 이어져 내려오게 됩니다.
이렇게 완성된 태을주 50년 공부의 우인(雨印)의 기운은 일월조왕 도수를 맡으신 법륜 고후비님이 화천 하신 곳이고, 본소라 중히 여기신 오성산 도장에 봉인되어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단주 해원의 바둑판 해원도수
951 일월조왕(日月竈王) 도수의 불지양생(일제시대)의 시기에는 천지망량 도수의 말 수인 을미생(乙8木) 정산옥황상제님의 "무극도"와 일월조왕 도수의 첫 끗수인 경진생(庚9金) 월곡 차경석의 "보천교"가 단주해원의 바둑판 해원도수가 핵심이 됩니다.
태극 7장 90절
또 “증산상제님께서는 "단주 해원"을 위수(爲首)로 하셨고 나는 "초패왕 해원"을 위수로 하느니라.” 하시니라.
49. 이날 밤 초경에 회룡재에서 학정 김영하와 도정영대(道庭靈臺) 시봉 이창로가 소관 업무 관계로 시좌하였을 때 숭도부인께서 상제님께 “한경의 위인이 나약하여 도중사 전반을 책임하는 도전으로는 미흡하지 않나이까?” 하고 사뢰니 말씀하시기를 “나도 그러함은 아오. 그러나 협의회가 있으니 부인은 과념(過念)하지 마시오. 상제님 앞에도 경석(京石)이 있지 않았소?” 하시고 또 사람을 쓰는데 소인인 줄 모르고 쓰면 실패하지만 소인인 줄 알고 쓰면 쓰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소. 하시니라.
차경석과 박한경 도전님 두분의 역할과 관련해 증산상제님이 천지공사를 하시며 붙이신 도수가 바로 " 홍성문(洪成文)의 27년 헛도수 " 입니다.
1 또 양지에 ‘이십칠년(二十七年)’이라 쓰시므로 치복이 그 뜻을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2 “홍성문(洪成文)이 회문산에서 27년 동안 헛공부를 하였다 하니 이로부터 27년 동안의 헛도수가 있노라.” 하시니라.
3 이어서 양지 한 장을 열두 조각 내어 조각마다 글을 쓰신 뒤에 한 조각은 친히 불사르시고 열한 조각은 치복에게 명하여 불사르게 하시니
4 갑자기 비가 크게 내려 그로 인해 보리가 잘 자라게 되니라.
: 최제우 대신사가 증산상제님으로 부터 천명을 받은 경신년(1860)부터 시작된 선지포태 기도주(시천주) 50년 공부 (1860~1909)가 끝나고 , 기유년(1909) 부터 상제님과 체(體)와 용(用)의 관계인 차경석의 27년 헛도수가 시작되어 신유년(1921)년에 "보천교"를 세우고 1936년 일제의 종교해산령에 따라 보천교가 해산되고 차경석 교주가 화천하신 병자년(1936) 까지의 27년(1909~1936)이 첫번째 "홍성문(洪成文)의 27년 헛도수" 가 되어 증산 상제님의 평천하 50년 공부가 사실상 마무리 되었고,
기유년(1909) 4월 28일 증산상제님의 성령으로부터 천명을 받으신 鼎山 玉皇上帝님이 기미년(1919) 증산상제님 여동생과 어머니가 사시는 상제님 본가에서 "천서(天書) " 인 현무경과 주문서를 발견하여 받으시고, 경신년(1920) 양력 4월 5일에 통사동 공부처로 모셔온 증산상제님의 둔궤(遁櫃)를 열어 상제님 법통을 완전하게 이어받아 이듬해 신유년(1921) 4월에 "무극도"를 세워 상제님으로 부터 부여받은 천명(天命)을 실질적으로 시작하게 되니
증산상제님의 둔궤(遁櫃)를 열어 상제님 법통을 완전히 부여받은 경신년(1920)으로 부터 50년 만인 기유년(1969)에 박한경 도전이 "대순진리회"를 세워 "유지욕대 진법주 50년 공부" 를 시작했고, 역시나
박한경 도전도 증산상제님의 두번째 "홍성문(洪成文)의 27년 헛도수(1969~1996)" 를 받아 27년 만인 병자년(1996)에 지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83. 이튿날은 도기 12년(단기 4253년, 서기 1920년) 경신(庚申) 2월 17일, 양력 4월 5일 청명절(淸明節)이니라. 상제님께서 입절시각(入節時刻)인 사(巳)시에 공부실에서 절후치성을 올리신 후, 둔궤 앞에 따로 법수(法水)를 상에 차려 올리시고 시종들을 정렬하여 법좌(法座)하게 하신 다음, 친히 분향, 4배하시고 일동에게 태을주를 연송하게 하시니라. 상제님께서 공부하실 때 쓰시는 주(籌)대를 열쇠구멍에 끼우시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어나며 천지가 진동하고 실내가 별안간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며 자물쇠가 스스로 열리니라. 일동이 신이하게 생각할 때 상제님께서 둔궤의 문을 여시니 또 한번 뇌전이 일고 궤 안에서 섬광이 번쩍이니라.
84. 상제님께서 둔궤의 문을 열어 놓으시고 4배를 올리시므로 일동도 따라 올리고 내부를 살피니 그 안에는 양피(羊皮) 한 장과 반쯤 핀 국화 한 송이가 들어 있으니라. 내부 정면 중앙에는 "오강록(烏江錄) ", 그 좌측에 "설문(舌門) ", 우측에 "반구제수(半口齊水) ", 좌면에는 "천문지리 풍운조화(天文地理 風雲造化) ", 우면에는 "팔문둔갑 지혜용력(八門遁甲 智慧勇力) "이라는 화각서(火刻書)가 있고 정면 문자 주위에는 주사(朱砂)로 24점이 선명하게 찍혀 있으니라.
85. 상제님께서 둔궤 내부를 상세히 친감하신 다음, 말씀하시기를 “과시 천보로다, 수운(水雲)의 거년 경신(庚申) 4월 초5일은 음력이로되, 나의 금년 경신 4월 초5일은 양력이니 음양합덕(陰陽合德)이며 태극도수(太極度數)가 분명하도다.” 하시며 감탄하시니라. 다시 문을 닫으신 다음, 자물쇠를 채우셔서 전과 같이 안치하시며 “이제 너희들이 본 바와 같이 내가 구천상제님의 도수를 음양합덕으로 하나하나 잘 풀어 가고 있으니 흔쾌한 바니라. 다만, 너희들은 조심하여 천기를 누설하지 말지니라.” 하시니라.
: 위 鼎山 玉皇上帝님 말씀중에 “과시 천보로다, 수운(水雲)의 거년 경신(庚申) 4월 초5일은 음력이로되, 나의 금년 경신 4월 초5일은 양력이니 음양합덕(陰陽合德)이며 태극도수(太極度數)가 분명하도다.” 하신 말씀이 주목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으니 증산상제님의 선지포태 기도주(시천주) 50년 공부의 천명을 받은 수운(水雲) 최제우가 증산상제님의 성령으로부터 천명과 신교를 받은 날이 1860년 경신(庚申) 4월 초5일 이었고, 그로부터 50년만인 1909년 기유년으로부터 "홍성문(洪成文)의 27년 헛도수"를 받아 증산상제님과 체(體)와 용(用)의 관계인 차경석이 보천교(1921)를 세워 최제우의 동학혁명으로 그릇 죽은 30만 동학군을 해원시키기 위한 시간인 27년뒤 1936년 병자년에 보천교를 해산하고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鼎山 玉皇上帝님이 " 나의 금년 경신 4월 초5일은 양력이니 " 하신 역시 경신(庚申)년인 1920년 양력 4월 초5일에 증산상제님의 둔궤(遁櫃)를 열어 완전하게 증산상제님의 법통을 이어받아 그로부터 역시 50년만인 1969년 기유년에 태극도 도전으로 임명하셨던 박한경 도전이 태극도를 나와 "대순진리회" 를 세워 유지욕대 진법주 50년 공부의 문을 열고, "홍성문(洪成文)의 27년 헛도수"를 받아 27년만인 1996년 병자년에 지병으로 사망하니
증산상제님과 鼎山 玉皇上帝님의 체(體)와 용(用)의 관계인 차경석과 박한경 도전이 모두 증산상제님과 鼎山 玉皇上帝님의 천명(天命)이 시작된 경신(庚申)년 (1860, 1920) 으로부터 50년 만인 기유년 (1909,1969) 부터 "홍성문(洪成文)의 27년 헛도수"를 받아 27년만인 병자년 (1936, 1996)에 약속이나 한듯이 사망하니 바둑판(단주) 해원을 맡은 "차경석"과 장기판(초패왕) 해원을 맡은 "박한경" 도전이 똑같은 운명의 길을 걷게 된것이 우연이 아니며, 위 鼎山 玉皇上帝님의 " 음양합덕(陰陽合德)이며 태극도수(太極度數)가 분명하도다." 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가구판 진주노름"의 핵심인 "바둑판(단주) 해원과 장기판(초패왕) 해원"을 통해 진주(진법주의 진인)를 내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고수부께서 무오(1918)년 9월 19일 대흥리를 떠나 조종골로 오실 때, 약장을 아니가지고 빈 몸으로 오셨으므로, 이제 약장을 짜시니 다음과 같으니라. 약장의 밑의 칸은 큰 칸 하나를 두시고 그 위의 칸은 사상에 응하여 빼닫이 네 칸을 횡으로 두시고 아래칸 바닥에다 경면주사로 붉은 점을 둥글게 스물넉점을 돌려 찍으시고 그 중앙에다 '팔문둔갑(八門遁甲)'이라 쓰시고 글 쓴 위에다 '설문(舌門)'이라고 두 자를 불지져 낙서(烙書)하시고 약장 안벽에다가 이와같이 쓰시니라.
「강증산 소유(姜甑山 所有)
여동빈지 조화권능(呂童賓之 造化權能)
강태공지 도술(姜太公之 道術)
신농씨지 유업(神農氏之 遺業)
단주수명(丹朱受命)」
그리고 이 약장을 둔궤(遁櫃)라 부르시고 또는 신(神)독이라고도 부르게 하신 바, 약방에 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앞에 돈을 놓고 절을 하게 하시어, 이 법을 엄격히 지키도록 명령하시어 누구든지 반드시 실행하게 하시니라. (선도신정경 pp77-79)
9. 또 어느날 공사(公事) 후(後) 에 고후비(高后妃)께서 말씀하시니 이러하니라.
오성산(五聖山)에는 오성(五聖)이 있고
오성산(五聖山)에는 서요동(西堯洞)이 있고
오성산(五聖山)에는 사옥(士玉)재가 있지 아니하더냐 이 곳이
오선위기(五仙圍碁) 도수(度數)에 두 신선(神仙)은 바둑을 두고 두 신선은 훈수(訓數)를 하다가 돌아갈 때에는 바둑판(碁版)과 바둑돌(碁石)은 두고 가리라 하셨지 않느냐 이 벽강궁촌(壁岡窮村)에 바둑판(碁版)과 윷판(柶版)을 내가 묻었으니 이 세상(世上) 누가 능(能)히 그를 알수 있으리요
내 일은 판(版) 밖에서 성도(成道)하여 들어오나니 너희들은 잘 닦기나 하라 하시더라.
(선도신정경 제오장 택오지화 제9절)
: 위와같이 951 일월조왕(日月竈王) 주장(主張) ~ 불지양생 (일제시대)의 구태인,신태인의 보천교와 무극도의 바둑판 대결의 단주해원 도수의 주인은 법륜 고후비님 입니다.
그래서, 후일 보천교의 교인들이 피폐하여 굶어 죽어 가는 이들을 구휼하기 위해 고후비님 교단의 재산을 거의 다 처분하여 보천교인들을 구제한 이유도 보천교의 단주해원 도수를 마지막까지 책임지기 위한 일이었음을 통해 증산상제님이 마직막 천지공사를 마칠때 내가 한 모든 일이 동학 이었다고 하시며 천지망량 도수를 맡은 동학이 천지망량이신 증산 상제님 자신의 일이었음을 토로 하신것처럼 일월조왕 도수를 맡은 보천교가 일월조왕 이신 법륜 고후비님의 일 이었음을 보천교인 구휼에 전념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2. 구월(九月) 중순(中旬)에 대흥리(大興里)로 돌아오사, 경석(京石)에게 열아흐렛날 천사(天師)의 탄신기념치성(誕辰記念致誠)을 올릴 것을 명하시니, 경석(京石)이 제수(祭需)를 성비(盛備)하여 열아흐렛날 새벽에 치성(致誠)을 올리니라. 스무날 아침에 천후(天后) 마당에서 거닐다가 혼도(昏倒)하여 네댓 시간(時間)을 쓰러져 있는데, 현황(炫煌)한 중에 큰 저울과 같은 것이 공중(空中)으로부터 내려오거늘, 자세(仔細)히 보시니 오색(五色) 과실(果實)을 고배(高杯)로 고인 것이라. 가까이 내려와서는 문득 헐어져서 쏟아지거늘 놀래어 깨시니, 집안사람들이 둘러 앉아서 애통(哀痛)하다가 천후(天后)께서 깨어나심을 보고 모두 기뻐하는지라. 천후(天后)께서 일어나 앉으사 문득 천사(天師)의 음성(音聲)으로 경석(京石)을 대(對)하여 누구임을 물으시니 경석(京石)이 이상(異常)히 여겨 성명(姓名)을 고(告)하고, 또 무슨 생(生)임을 물으심으로 경석(京石)이 경진생(庚辰生)임을 고(告)하니, 일러 가로대 '나도 경진생(庚辰生)이라. 속담(俗談)에 동갑(同甲) 장사 이(利) 남는다 하나니, 우리 두 사람이 동갑(同甲) 장사 하자' 하시고, 또 생일(生日)을 물으니 경석(京石)이 유월(六月) 초하루임을 고(告)한대 다시 일러 가로대 '내 생일(生日)은 삼월(三月) 이십육일(二十六日)이라. 나는 낙종(落種)물을 맡으리니, 그대는 이종(移種)물을 맡으라. 추수(秋收)할 자(者)는 다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로부터 천후(天后)께서는 성령(聖靈)의 접응(接應)을 받으사 한 달 동안 신정(神政)을 행(行)하시니라.
바둑판 해원(단주) 과 장기판 해원(초패왕)은 "가구판 진주노름" 도수의 핵심입니다.
천지망량(天地魍魎) 일월조왕(日月竈王) 성신칠성(星辰七星)
4 3 8(乙,8木) 9(庚,9金) 5 1(壬,1水) 2(丁,2火) 7 6
鼎山 玉皇上帝 차경석 안운산 박한경
乙未생(1895) 庚辰생(1880) 壬戌생(1922) 丁巳생(1917)
* 바둑판 해원 (단주) ~ 태을주 50년공부 (成數 8,9)
천지망량(天地魍魎) 일월조왕(日月竈王)
8(乙,8木) 9(庚,9金)
鼎山 玉皇上帝 차경석
乙未생(1895) 庚辰생(1880)
무극도(1925) 보천교(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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