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철학사의 헤라클레스
-- 헤겔의 생애와 사상 --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8.27.-1831.11.14.).
“A man who had not read Hegel would not have been taken seriously. Whoever wanted to know truth, studied Hegel. Everyone devoured his works.“ (Tolstoy, from Museum Hegelhaus)
“헤겔과 그의 저작에 더 잘 어울리는 비유는 짧은 시간 동안 창공을 들어 매고 있는 헤라클레스(Heracles)의 형상일 것이다.” (1, 24)
헤라클레스는 광기로 자기 자식들을 죽인 죄를 씻고자 에우리스테우스(미케네 왕)가 하명한 12가지 어려운 과제를 부여받았는데, 그 열한 번째가 헤스페리데스Hesperides)의 정원에서 황금 사과를 훔쳐 오라는 것이었다. 헤스페리데스란 헤스페로스(Hesperus, 저녁별, 샛별, 개밥바라기, 太白星, 金星)의 딸들이란 뜻으로 초저녁의 님페(Nymphe)로, 바로 황금사과의 지킴이다. 헤라클레스는 그걸 찾아다니던 중 간을 쪼이는 형벌로 고통에 처한 프로메테우스를 구출해 준 보답으로 헤스페리데스의 아버지인 아틀라스(Atlas)의 도움을 받으라는 비책을 알게 되었다. 제우스로부터 대지의 서쪽 가장자리에 서서 하늘을 떠받히고 서 있으라는 형벌을 받은 그를 대신해 헤라클레스는 하늘을 잠시 짊어져야만 했다. 황금사과를 갖고 온 아틀라스는 자기가 직접 에우리스테우스에게 갖다 주겠다고 제안하자 그 속셈을 간파한 헤라클레스는 그렇게 하라면서, 잠깐 하늘을 들어주면 어깨 받침대를 넣겠다고 속여 다시 하늘을 그에게 넘기고는 헤라클레스는 사과를 갖고 도주해버렸다. 이 신화에서 아틀라스 증후군(Atlas syndrome)이란 술어가 생겨났다.
절대주의 국가 프로이센의 관제 어용철학자라는 관점부터 프랑스혁명정신을 계승한 철학자라는 평가까지 다양.
1. 뷔르템베르크 공국 회계고문 아들
조상들은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경건주의자여서 오스트리아 게룬텐 지방에서 추방당해 남부 독일 슈바벤 지역으로 이주. 조상은 주석 그릇 제조업자였다고 하며 이후 목사, 공직 등에 종사했다고 전한다.
당시의 독일 상황 ; 3백여 영방(領邦)국가(Territorialstaat), 반교회적인 프랑스 계몽주의와는 달리 독일 계몽주의는 “국가와 교회의 종사자들에 의해 추구된 민족교육적인 계획”(1, 36)의 시대.
아버지(Georg Ludwig Hegel, 1733-1799)는 뷔르템베르크 공국(Duchy of Württemberg)의 세관 감시관(revenue officer), 나중 작고 3년 전, 재무청 회계고문(Rentkammersekretär, secretary to the revenue office)으로 관청의 12자리 중 하나인 고위직. 그가 봉사했던 대공은 오이겐(Karl Eugen, 1728–1793), 폭군으로 호화스런 궁전 지어 애인에게 선물로 주고는 중과세를 부과한 전횡자이자 실러를 탄압했던 자. 미국 독립전쟁을 탄압하기 위해 영국이 1인당 15파운드를 주고 용병을 모병할 때 기꺼이 농민의 아들들을 팔아넘긴 일화는 실러의 <간계와 사랑>에 잘 묘사되어 있다.
1770.8.27. Württemberg 공국의 수도 슈투트가르트(현 Baden-Württemberg 주 주도)에서 출생. 루터교의 고장인 이 지역은 실러의 고향 마르바흐, 헤세의 고향 칼브도 있는 곳.
아버지는 무조건 아들을 신학 전공시켜 목사를 만들 작정. 나중에도 집안에서는 헤겔을 목사로 호칭.
어머니(Maria Magdalena Louisa Hegel, Fromm, 1741-1783), 뷔르템베르크 공국 고등법원 변호사의 딸로 진보적인 여성이라 헤겔은 유년기부터 다양한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여동생(Christiane Luise, 1773-1832)과 남동생(Georg Ludwig, 1776-1812). 남동생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군에 징집당해 전사해버렸고, 여동생과는 매우 친밀하게 지냄.
생가는 현재 Museum Hegel Haus. 주소 Eberhardstraße 53. 70173 Stuttgart.
16세기에 지은 주택으로 3층에 다락방. 헤겔 당시의 슈투트가르트에 대한 각종 자료와 헤겔 관련 자료 전시. 1,2층이 6실로 나눠져 헤겔에 관한 체계적인 자료 전시.
3세 때 어머니가 독일어학교에 넣음.
1776(6세), 김나지움(Gymnasium Illustre, 일반 김나지움과 달리 대학교육을 병행해 대학에 진학하면 바로 학사학위(Baccalaureus)받음. 현 Eberhard-Ludwigs-Gymnasium)입학. “그는 언제나 다섯 명씩 뽑힌 1등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모든 학년에서 매년 상을 탔다. 그리고 10학년 때부터 그는 자신이 속한 김나지움 계열에서 1등이었다.” (1, 41)
"끔찍할 정도로 조숙하고도 고루할 정도로 도덕적이었다. 그의 목마른 지식 갈증은 마지막 학년에 엄청난 양의 지식을 삼킬 정도로 커져서 그의 내면적인 다른 욕망을 모두 질식시켜버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출처?)
김나지움 시절에 댄스 교습. 이유는 예쁜 소녀 보려고.
1780(10), 튀빙겐 신학대학 입학시험에 합격(전국적인 1차 경쟁 거쳐 선발).
10-13세 때 <신약성서>와 키케로 익혔고. 히브리어를 배움.
1783(13),9.20, 어머니, 담즙열 죽음. 자신도 중병.
15세 때부터 역사, 법률, 도덕 등 여러 분야의 광범한 독서와 그걸 요약하는 일기 쓰기 시작. 괴테와 실러의 연애작품도 탐독. 15세 때의 일기 중 아래 2가지.
(1) 35세로 작고(1785.7.5.) 한 스승(Löffler 교사?) 추모. 그는 8세의 헤겔에게 독일어 번역 셰익스피어 최신판 18권 선물. “자신이 있어야 할 곳보다 훨씬 낮은 곳에서 일해야만 했다.” 고 논평.
(2) 정부 고위 관료 장례 운구행렬, 교회의 둔중한 종소리, 트럼본의 합주가 슬프게 울려 퍼지는 걸 들으며 감동. (1, 40-41).
사교적인 데서 점점 우직하고 목사 같은 성격으로 변모. 무용교사에게는 “춤 솜씨가 전혀 없었던 인간>”으로 기억.
감명 받은 그리스문학으로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3부작.
역사학 분야에서는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몽테스키외의 <로마인 성쇠 원인론> 등 읽고 역사인식 다지기.
1788(18), 9월 김나지움 졸업 연설(주제는 <터키인의 예술과 학문이 위축한 상태(The abortive state of art and scholarship in Turkey, den verkümmerten Zustand der Künste und Wissenschaften unter den Türken)>
2. 튀빙엔(Tübingen) 대학 시절
1788(18), 10월, 공작령 장학금으로 튀빙겐 신학교(루터파 정통주의의 대표학교)철학과 입학. 장학금 시험 과목은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가 가장 중요. 12월에 학사학위. 튀빙겐대학은 재학생 2백 명. Karlsschule Stuttgart사관학교에 대한 카를 오이겐 공의 관심으로 튀빙겐대학은 잠시 뒷전 취급당함. 그러나 신학과는 튀빙겐이 단연 압도. 철학과는 교수2, 신학과는 4명.
횔덜린은 입학 동기, 5세 연하의 셸링은 2년 후배로 수석입학. 급우들 간 헤겔의 별명은 ‘노인’으로 횔덜린이나 셸링처럼 “재기도, 민감도 대학시절에는 없었던 헤겔.‘ (2, 26)
입학 초년의 헤겔은 철학, 미학, 관상, 산수, 기하학, 심리학, 역사, 신학을 일겠다고 했지만 정작 탐독한 것은 당시의 베스트셀러였던 천박한 대중소설 위주. 술고래에 재치있는 대화로 여성들에게 인기. 장학생들이 칸트학회 조직해도 가입 거절, 루소 읽겠다고 함(3, 13-15).
1770-80년대 독일 계몽주의는 프랑스와 달리 "국가와 교회 종사자들에 의해 추구된 민족교육적인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독일 계몽주의는 광신과 열광, 선입견과 미신에 대항해 중용을 취하면서 논쟁적으로 오성과 이성의 발전을 거쳐 인류의 복지를 향해 가는 지속적인 진보에 전념했다." (1, 36)
셋은 그리스 라틴어를 비롯해 박물학, 찬문학, 물리학 등에 흥미. 특히 그리스 문학에 심취.
1789(19), 프랑스 혁명. 자유와 인권 관련 도서 탐독, ‘정치구락부’ 회원으로 열광하며 헤겔은 메모장에다 “자유 만세!” “장 자크 루소 만세!” “이성 있는 자유를!” “폭군에 저항아여!” 등의 문구가 등장. 혁명 열기로 신학 대신 법률학 전공으로 바꾸려 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불가능. 그러나 나중 혁명이 폭력적으로 변하자 자유를 사랑하는 한편 질서도 존중하자는 신중론으로 변함.
1790(20), 프랑스 농민들이 봉건 영주의 토지에 ‘자유의 나무’ 심는 정신을 살려 대학 교외 들판에 ‘자유의 나무’ 심어놓고 ‘자유 만세!’ ‘루소 만세!’ 절규하며 <라 마르세예즈> 부르기.
1790년 9월 교사 자격증 있는 마기스터(Magister)학위증(박사학위와 같음)받고 신학과 등록(11월). 횔덜린, 셸링 등 7명이 같은 기숙사 방.
학내 분위기는 정통 기독교리의 극복을 위한 칸트 붐.
마기스터 시험문제가 <영혼의 불멸에서 분리된 인간적 의무의 한계에 대해서>라는 토의. 헤겔은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조종교로부터 이성종교로 전환할 가능성을 추구함.
헤겔은 고대 철학과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사회계약론-정치적 권리의 제 원리(Du contrat social; ou Principes du droit politique)>(1762), <에밀-교육론(Émile, ou De l’éducation)>(1762), <고백론(Les Confessions)>(1782) 등에 심취했다. (1, 47).
이 셋은 ‘하나로서의 전체’라는 구호를 외쳤는데, 그 출처는 크세노파네스(Xenophanes of Colophon, 기원전 570-475).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사의 엘레아 학파(Eleatic School)에 속했던 이 시인이자 철학자는 전통적인 다신론을 비난하며 모든 신들 중 위대한 신(greatest God)은 하나이며 전체이자 영원하다고 주장하며, 다양성과 대립성을 부인하면서 일원론적인 입장을 취했다. “God is one, supreme among gods and men, and not like mortals in body or in mind.” 역사상 첫 유일신관이다.
올림픽은 그리스의 잘못된 다신론을 부추기기 위한 우매성을 부추기려는 사치스러운 축전이라고 비판했고, 영혼이란 프네우마(pneuma, 호흡의 기로 생명 원리)로 보았다.
프랑스 혁명에 도취한 헤겔에게 종교는 반감의 대상이었으나 신학생인지라 외면 불가. 그 첫 연구 대상은 칸트의 기독교관 문제. 칸트는 전통종교관에서 이성종교로의 승화를 주장. 즉 전통적인 기독교리는 신학이나 철학의 대상이 아닌 윤리 도덕의 문제로 보면서 이를 이성종교라고 하며,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했다.
헤겔은 인간은 감성과 이성을 동시에 지닌 존재이기에 이성의 실체인 도덕에서도 감성이 중요하다고 보며 감성에서 유발된 종교가 도덕에 영감을 주며, 그로 말미암은 파급이나 영향력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사회와 민족과 국가적인 것이기에 정치와 종교의 융합을 주장. 미공개 논문 <민족종교와 기독교>는 이런 문제를 다룸. “민족정신은 아들이요, 이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가 시대, 즉 역사이며, 어머니는 정치(법과 경제)요, 유모에 해당하는 것이 종교며, 이 유모는 보좌로서 예술을 필요로 한다.” (2, 27)
헤겔은 기독교가 유럽의 민족종교로서 정치적인 과제를 수행하기에는 미달, 그리스의 환상종교가 더 적당하다고 봄.(1, 54).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좌절과 독일의 정치 현실 앞에서 그는 종교에 대한 기대를 수정.
이 쟁점과 관련된 루소의 견해, <사회계약론>의 뒷부분(제4권)에서 시민종교론 제시. 국가체제 순응적인 국민종교는 과거지사이며, 참된 인간의 종교는 정치 체제와 무관하기에 시민들을 국가에서 떼어놓게 된다. 이런 종교를 시민종교화 해야 올바른 관계 형성. 시민종교가 되려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나 비정치성으로 오도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인간의 정신적인 억압의 도구가 되어서도 안 된다.
20세 때, 헤겔은 한 신학교수의 딸과 연애. “이성의 친구를 데리고 좁은 길 거닐 적엔, 참으로 즐거웠도다. 사랑하는 처녀의 뜨거운 키스를 받았을 적엔, 그 세 곱이나 즐거웠도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 2, 28)
이 외에도 튀빙겐 주점의 딸(아우구스테 헤겔마이어) 흠모. 그녀는 나중 바덴 지역 법무차관의 부인.
1793(23), 신학학위 위한 토론 시험(Disputation) 거쳐 9월에 종교국(宗敎局)시험 합격.
졸업증명서에 적힌 헤겔 평.
“평탄하지 못한 건강상태/중간 정도의 체격/별로 돋보이지 않는 언변술/겸손한 태도/합리적 판단/확실한 기억력/읽기 좋은 글 솜씨/바른 행실/ 가끔씩 해이해지는 성실함/ 타고난 체력은 충분함/우수한 신학 실력/열성적인 설교조의 언변/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연설가는 아님/우수한 어문학적 소양/철학적 사고를 위한 많은 시도.” (3, 19)
4등 졸업, 신학 전공 버리고 가정교사 선택.
3. 가정교사 시절
1793(23)-1796(26), 베른의 폰 슈타이거(C.F.v.Steiger)가 가정교사(Hofmeister, house tutor)로 3년간(1796년까지)로 지내다.
보수적이었던 집안이라 헤겔은 정신적으로 매우 고통. 더구나 프랑스혁명이 1793년부터 공포정치화 되더니 이듬해에는 테르미도르 반동(1794.7.27., 혁명력 제2년 테르미도르 9일)으로 로베스피에르가 실각, 총재 정부가 수립(1795)되면서 혁명정신은 형해화 되기 시작했다. 헤겔로서는 모국이나 스위스가 다 부패한 선거제와 귀족 전제정치 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현실정치에 깊은 관심.
1795(25), 5월, 제네바 여행. 7월까지 <예수의 생애(Life of Jesus, Das Leben Jesu)> 집필. 예수를 칸트의 도덕적 신앙의 체현자로 그림. 율법 준수의 원칙에 억매였던 유태교를 탈피, 이성적인 도덕법을 중시, 교화. 이어 <기독교의 실정성(Die Positivität der christlichen Religion)>(1795-6, 미공간)도 집필. 실천이성이었던 기독교가 외부적인 권위의 타율성에 복종하는 율법적 종교로 변모한 것을 비판. 율법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예수의 교훈보다 기적 신앙과 교단의 교의성을 중시하며 세속적인 권력과 타협(야합)한다.
1796(26), 베른 알프스 횡단. 연말에 우울증으로 슈투트가르트로 귀향.
1797(27), 1월, 횔덜린 주선으로 프랑크푸르트의 포도주 거상 고겔(I. N. Gogel)집 가정교사가 되어 400굴덴에 여행비 선물 등은 따로 받음. 횔덜린과 가까워지나 독자성 추구.
<독일이상주의의 가장 오래된 체계프로그램(The Oldest Systematic Program of German Idealism, Das älteste Systemprogramm des deutschen Idealismus)>(1797) 집필(집필인지 누구의 것을 필사했는지 불명). “국가란 폭력에 의해 만들어진 구성체로서 언젠가는 다시 소멸할 것”이라고 주장. 이 국가의 개념에는 봉건절대국가부터 시민국가 전체를 포함. 이런 점에서 헤겔은 무정부주의적 국가철학. (3, 47-56).
1799(29), <기독교의 정신과 그 운명(The Spirit of Christianity and Its Fate, Der Geist des Christentums und sein Schicksal)>(1799/1800) 쓰다. 예수가 율법 신앙 극복하고 인간의 고통과 직면하면서 정신적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을 중시하며, 기독교의 도덕적 이성의 궁극 목적은 ‘사랑의 세계 지배 원리’로 봄. 따라서 사랑에 의한 운명과의 화해가 기독교 정신이라며 타협점을 찾음. 예수의 사명은 그리스비극적인 정신과 칸트적인 실천이성의 통합으로 평가.
1799(29), 1월 15일 아버지 사망으로 3154굴덴의 유산 상속 받아 넉넉해지자 가정교사 사직하고 셸링에게 검소한 식사가 가능하며 많은 책과 좋은 맥주가 있는 살기 좋은 곳을 묻자 예나라는 회신에 예나 행.
1800(30), 마인츠 여행(프랑스 령).
4. 독일 관념론 철학 개요
(1) 칸트(Immanuel Kant, 1724.4.22.-1804.2.12.)
초기, 자연과학에 많은 관심. 칸트-라플라스 星雲說(Kant-Laplace Nebular Hypothesis), 이 우주 생성론은 형이상학적 세계관에 치명상. 논문 <심령을 보는 자의 꿈>(1766)에서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비판, “형이상학이라는 나비의 날개에 올라 뽐내고 있는 사람들”과 “정신적인 환상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딘지도 모르면서 출발하여, 어딘지도 모르면서 가서 앉는” 사람들이라고 조소. (USSR 과학아카데미 연구소 편집, 임석진 감수, 이을호 역, <세계철학사 3>, 청사, 1998, 42쪽)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원리>(1786), 역본설(力本說, 力動說)에서 힘은 연속적이며 물체는 힘으로 형성된다. 칸트는 물질이 힘의 견인과 반발의 통일로 형성된다고 봄.
후기 비판철학.
<순수이성비판>(1781), 무엇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를 추궁. 모든 인식은 감각과 경험에서 온다는 주장 비판, 선험적 인식 거론. 감성(직관능력, 감각적 경험 축적 통해 재료 인식)-오성(사유능력, 재료를 통해 더 많은 분석적 종합적 상관 관계와 여러 양상 인식 확대)-순수이성의 인식 단계. 이런 인식론으로 볼 때 신앙(불멸의 영혼과 인자한 창조주 등)은 순수 이성의 한계 밖이다. 따라서 종교는 과학과 신학에 기초를 둘 수 없다.
<실천이성비판>(1788), 순수이성 통해 인식된 걸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추구. 순수이성이 밝혀낸 인식에서 무슨 행동이나 다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이성의 판단으로 가능한 것만을 실천해야 된다는 주장. 예를 들면 과학과 신학에 기초한 순수이성으로는 명증 불가인 종교를 실천이성으로 보면 윤리 도덕에 기초해야 된다는 것. 그것은 최고선(das höchste Gut)을 위한 정언적 명령(定言的 命令)이지 가언적(假言的)명령이어서는 안 된다. 모든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판단력 비판>(1790), 순수이성이 지성을, 실천이성이 이성을 다뤘다면 판단력은 감성을 통한 미학적 판단력을 추구하면서 인간이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를 따진 것. 미란 모든 사람에게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주관적인 순수형식에 의해 필연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
Heine’s 1834 , 칸트가 노 시종 람페를 데리고 산책 중에 람페의 눈에 눈물이 고인 걸 보고, “람페 할아범은 신을 가지고 있을 게 틀림없네. 그렇지 않으면 이 가엾은 인간이 행복할 리가 없다고 실천이성이 말하고 있군. 실천이성이 신의 존재를 보증한다고 하면 보증하는 것도 좋겠지. 어차피 나는 아무 쪽이라도 좋으니까.” (윌 듀란트/임헌영 옮김, <철학 이야기>,285쪽).
(2)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 칸트 중 특히 <실천이성비판>을 승계, 프랑스 혁명사상(몽테스키외, 루소)도 수렴, 지식학으로 자아를 설정. 자아는 자신의 존재, 그걸 비아(非我)가 반정립(反定立), 이 둘 통해 새로운 자아 형성해 능동적 주체적 자아 완성. 이를 통해 그는 지와 절대자론에서 무신론적으로 인식되어 수난. 나중 나폴레옹 침공 때는 그를 계기 삼아 봉건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구가하는 파들과는 달리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민족 주체적인 통일을 지향.
(3) 셸링(Friedrich Wilhelm Schelling, 1775-1854), 피히테의 지식학에서 영향 받았으나 그의 자아철학 벗어나 선험적 관념론으로서의 자연철학 바탕삼아 선험적 관념론(자연과학) 형성. 지적 직관보다 예술적 직관을 더 중시하면서 암울한 신비주의로 흘러버려 헤겔과 작별.
5. 예나 시절
1801(31), 1월, 셸링(Friedrich Wilhelm Schelling, 1775-1854. 1798-1803년간 예나대 교수)과 공동작업 위해 예나 행. 피히테가 예나대학 재직 중 무신론자로 기소 당해 사직(1799), 실러는 1789년에 역사과 교수, 1799년 바이마르로 감.
당시 예나대학은 학문적 전위임에도 불구하고 학생 수는 줄어들고 50여 교수의 4분의 1이 철학교수, 그 대다수는 시간 강사.
8월, 대학 강사 자격증 구두시험, 10월, 박사논문 <행성의 운행에 관하여> 발표. 케플러를 옹호하며 뉴턴의 중력을 비판.
연말 경, 셸링(1798-1803년간 예나대)의 추천으로 예나대 사강사로 ‘논리학과 형이상학’ 과목 맡다. 첫 강의는 11명 청강, 점점 늘어나 30명(당시로서는 주의 끌만한 숫자).
그간 종교 비판적이고 국가 비판적인 논의 대신 칸트 이후의 철학에 대한 연구로 돌리다.
첫 저작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 체계의 차이(The Difference Between Fichte's and Schelling's Systems of Philosophy)> 간행. 셸링 자신도 피히테의 승계자로 인식, 헤겔이 그 차이 부각. 관계 미묘해짐.
1802(32), 셸링과 함께 학술지 <철학비판 저널(Kritische Journal der Philosophie, Critical Journal of Philosophy)> 편집(셸링이 이듬해에 뷔르츠부르크 대학으로 떠나면서 중단). <독일 국제론(国制論, Die Verfassung Deutschlands)>집필(1800–1802, 미공간). 인간집단은 자신들의 소유물 전체를 공동으로 방위하기 위하여 결합할 때라야 국가이다. 독일은 영방국가로 그렇지 못하기에 이미 국가가 아니라고 헤겔은 지적. 방위력은 가지되 시민적 자유는 보장되어야 국가. 신성로마제국이 독일 통일 주도하기를 기대, 나중 그 좌절 겪다.
1804(34), 셸링이 떠난 자리에 헤겔과 사이가 안 좋았던 동료교수(Jakob Friedrich Fries)가 선정된다는 소문에 헤겔은 괴테에게 청탁 편지 보냄.
“... 제가 철학과 강사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다는 것을 떠올리면서 이렇게 감히 선생님의 처분을 바라는 글을 드립니다. 온힘을 모아 대학교에 이바지하겠다는 제 각오와 능력이 높은 권위로부터 내려온 지시로 인해 제약을 받을 것을 염려하며....”(3, 70).
1804년까지의 자필 약력.
나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1770년 8월 27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출생. 나의 부모, 아버지 게오르크 루트비히 헤겔, 운송회계사 고문 그리고 어머니 크리스티네 루이제 프롬은 개인교수뿐만 아니라 고대어 및 현대어 그리고 학문의 기초를 가르치는 슈투트가르트의 공립 김나지움에서 수업을 받게함으로써 나를 학문적으로 교육시키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나는 18세에 튀빙겐의 신학원에 입학하였다. 나는 2년 동안 고전문헌학을 전공으로 하는 슈뉘러(Schnürer), 철학과 수학을 전공으로 하는 플라트(Flatt), 벡(Beckh) 밑에서 공부를 한 후, 철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잇달아서 3년 동안 르 브레(Le Bret), 울란드(Uhland), 스토르(Storr) 그리고 플라트의 지도하에서 신학과 관련된 학문을 공부한 끝에 슈투트가르트의 신교 총무원에서 실시한 신학과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신학과 지원생으로 등록되었다. 나는 부모님의 희망에 따라 설교사직을 선택하였으며 신학이 가진 고전문학 그리고 철학과의 연계성을 고려하여 신학 공부에 충실하였다. 신학과 졸업 후, 나는 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직업들 가운데 실제 설교사직에 별로 구속되지 않는 직업, 이를테면 고전문학과 철학 연구에 필요한 여유를 얻을 수 있으며 또한 외국에서 상이한 조건 밑에 생활하면서도 짬을 낼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직업으로서 가정교사직을 나는 베른과 프랑크푸르트에서 찾았으며, 여기에서 내가 결정한 삶의 과제인 학문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얻었다. 6년간 이 두 도시에서 시간을 보낸 후, 아버지가 사망하자 나는 철학에 마음과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예나 대학의 명성은 내 장래를 위해 보다 훌륭히 공부할 수 있고 그리고 교수직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엿보는 데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곳이었다. 나는 피히테와 셸링 철학체계의 차이점, 전자의 불충분한 점에 관한 논문을 써 그 곳에 지원하였으며, 얼마 후 나의 박사학위논문, 행성들의 궤도에 관하여(De orbitis planetarum)의 공개 변론을 통한 심사에서 그 곳 심사위원회로부터 교수 허가를 받았다. 나는 셸링 교수와 함께 <철학비판잡지(Das kritische Jurnal der Philosophie)> 두 권을 간행하였으며, 이 가운데 나의 논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서문/어떻게 상식이 철학을 취급 하는가/고대와 근대의 회의주의에 관하여/칸트, 야코비 그리고 피히테의 철학/자연법에 관한 여태까지의 개정.
3년 전부터 철학과 사강사로 있으면서 나는 여러 강의를 하였으며, 작년 겨울에는 수많은 학생이 강의를 들은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지난 해 공작 관할의 광물학 협회의 제2 부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그리고 최근에는 자연 연구 협회에 정회원으로 가입되었다. 수많은 연구 가운데 철학이 나의 천직으로 굳어졌기에 나는 친애하는 관계 당국으로부터 정교수로 채용되기를 갈망할 따름이다. (출처?)
이 이력서를 쓴 지 1년 후 1805년 헤겔은 예나 대학의 원외 교수 철학자로 채용된다.
1805(35), 2월, 프리즈와 함께 비정규(원외)철학교수(Privatdozent, abbreviated PD, P.D. or Priv.-Doz, unsalaried lecturer). 이듬해(1806)부터 봉급(연간 100탈러. 절약하는 대학생 평균 생활비가 200탈러) 받다.
1806(36), 10월 14일, 예나전투(battles of Jena-Auerstedt, Auerstädt). 나폴레옹군이 프로이센 군 격파, 베를린 진격.
이때 헤겔은 숙소 2층에서 나폴레옹 목격, 대학 동창(Niethammer)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쓰다.
"I saw the Emperor – this world-soul – riding out of the city on reconnaissance. It is indeed a wonderful sensation to see such an individual, who, concentrated here at a single point, astride a horse, reaches out over the world and masters it . . . this extraordinary man, whom it is impossible not to admire." (황제가 - 이 세계정신이- 진지 정찰을 위해 말을 타고 거리로 진군하는 웅자를 보았습니다. 한 지점에 집결해서 말 위에 타고 있으면서 세계를 압도하고 정복하고 있는 이런 개인을 목격하는 것은,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기분입니다.) (2, 33).
점령 하 예나대학은 폐쇄, 실직자 헤겔은 거의 완성 단계였던 <정신현상학> 원고만 갖고 피난. 헤겔이 나폴레옹을 긍정적으로 본 건 절대통치에 대한 비판의식. 니트함머(Friedrich Immanuel Niethammer(1766–1848)의 주선으로 <정신현상학>은 밤베르크의 한 출판사가 맡았다. 그는 튀빙겐신학대 동창으로 예나대학에서 피히테가 무신론으로 곤경에 처하자 옹호해준 개신교 신학자이자 개혁가로 바이에른의 학무고문직.
5. 지방지 편집장 거쳐 김나지움 교장
1807(37), 2월 5일, 사생아 아들 프리드리히 피셔(Georg Ludwig Friedrich Fischer (1807–31) 출생. 어머니는 크리스티아나 샬로테 부르크하르트(Christiana Charlotte Burkhardt, 1778년생으로 1817년 이전에 죽음). 남편에게 버림받은 그녀는 이미 6, 3세 사생아를 가진 상태에서 자기 방에 세 들었던 헤겔의 가정부 역할 하다가 아이를 낳음. 예나의 출판업자(Friedrich Frommann)에게 아이 대부를 부탁, 프롬만의 처제와 그녀의 미혼 여동생 등의 보살핌으로 아이들은 자람. 처제가 뤼벡 서적상과 결혼, 남편 사후 자기 아들과 함께 예나에서 사립 소년교육원 운영하며 맡아 기름. 이 아이는 나중 10세 때 헤겔이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 시절에 데려다 길렀는데 돈 훔치다가 들켜 쫓겨나 슈투트가르트에서 상인 될 교육 시켰으나 결국 ‘헤겔’이란 성 못 쓰고 어머니의 출가 전 성을 따름. 네덜란드 식민지 지원군으로 자카르타에서 헤겔과 같은 해(1831)에 열병으로 죽음.
1807년 3월, 괴테에게 예나대 강의 쉬어도 좋다는 허락 받은 후 니트함머의 주선으로 <밤베르크 신문(Bamberger Zeitung)> 편집장으로 가다. 군사기밀 누설로 사직, 니트함머 추천으로 뉘른베르크 김나지움의 교장으로 부임(1808.11.4.). 900굴덴 연봉에 100굴덴 주택비.
넉넉해진 헤겔은 니트함머에게 “아내를 얻거나 혹은 적당한 여자를 발견할” 시기라고 편지 보냄.
<정신현상학(The Phenomenology of Spirit, Phänomenologie des Geistes)>(1807),
부제 ‘의식의 경험의 학(Wissen- schaft der Erfahrung des Bewußtseins)’
시대적인 배경은 나폴레옹 침공, (1) 라인동맹(혹은 연방, Rheinbund) 형성(1806.7.12.). 독일 남서부 16개 영방국이 나폴레옹 강압으로 독일제국 탈퇴하고 맺은 동맹. (2) 신성 로마제국 붕괴(1806.8.6.).
헤겔은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혁명적인 프랑스의 의식이 도덕적인 독일로 그 흐름이 바뀐다는 낙관론.
애초에는 주관적 정신으로서의 의식, 자기의식, 이성이 객관적 정신인 법, 도덕, 학문을 거쳐 절대지(絶対知, 哲学)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추구하려던 것이 점점 확대되어 정신, 종교라는 새로운 장이 추가되었다.
정신, 개인의 정신, 인간의 정신 지양, 초개인적, 초인간적인 절대정신 추구. 이를 경험론이나 오성론, 혹은 직관론적 인식 아닌 변증법적 인식으로 절대지(絶對知) 추구. 그 인식의 실행을 주체로 설정, 이를 역사적 관점으로 서술하면서 역사철학 도출. 따라서 개인이나 인간 정신을 넘어 세계정신의 역사성을 형성. “자연서의 지옥에서 출발하여 인륜적 행위의 연옥을 통과해서 종교적인 화해와 학문적 자유와의 낙원에 도달하도록 의식을 인도한 것이다.” (2, 48).
꽃의 인식 – 봉오리는 꽃이 되며 사라지기에 봉오리는 꽃에 의해 부정 당한다. 꽃 역시 열매에 의하여 부정 당한다. 그래서 열매야말로 식물의 진리태(眞理態)인데 억견(臆見)은 식물, 꽃봉오리, 꽃, 열매의 형태가 다르다고 한다. 그 진리태는 체계지(體系知) 통해 가능. 당시 인식론은 다 신앙의 산물로, 실러의 아름다운 혼, 괴테의 신성함, 셸링의 영원한 것, 횔덜린과 노발리스의 사랑 등등이 그 예. 철학은 신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걸 넘어서는 절대지로의 도약이 필요. 그건 어린 아이가 태아-출생-성장하는 것과 같이 인식 주체인 정신도 끊임ㅇ벗이 변화한다는 것.(2, 50-52).
진리 인식의 주체는 절대자이자 생명이 있는 실체.
자기의식의 주인은 주체, 주인은 죽음도 두려워 않는 생명적 활동의 주체. 그렇지 않으면 노예. 주인은 노예의 노동 통해 물품 얻고 행복, 노예는 물품 제작에 신명을 바친다. 이러는 가운데 노예는 주인에게 종속되므로 써 소외감을 느낀다. 노예는 노동을 할 때 자기 활동을 외화(外化)하기에 소외 발생. 주인 역시 노예가 제공한 물품으로 얻은 행복, 만족 등에서 물품과 동일시되는 존재로 전락하면서 소외감 느낀다.
이성적 의식은 감성, 오성 등을 총괄한 변증법적 통일로서의 의식이다. 그 이성이 관찰하는 이성에서 실천하는 이성으로 넘어가면 개인은 본능적인 쾌락을 추구한다. 이럴 때 자각적 이성이 즉자적 자세에서 대자적 자세로 바뀌면서 입법적 이성으로 승화할 때 표준적 이성이 된다.
이런 이성의 기본 바탕에 정신이 있다. 정신은 인륜적인 생활을 짊어진 민족정신이 있는데, 이건 인륜의 실체다. 민족정신은 인륜의 세계를 형성해 나가는 실체다. 이런 정신이 집성하면서 세계정신을 형성한다. 세계정신은 (1) 인륜적 정신을 형성하는 민족정신, (2) 인륜적인 실체에서 분열되어 인간 스스로가 소외당하는 단계의 정신, (3) 그 소외 가운데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주체정신으로 전개된다.
(1) 단계에서 인간은 개별자와 보편자의 관계에 얽혀 살아간다. 여기서 각자는 인간적인 법칙과 신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적인 법칙은 국가공동체로, 그 예는 그리스 도시국가를 들 수 있다. 그게 신적 법칙과 갈등을 일으키는 현상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 나타난다.
(2)의 예는 로마의 법치상태로, 여기서는 개인이 법적인 존재로만 인정받기 때문에 개체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인륜적인 가치관과 모순을 발생, 인간 소외가 발생한다. (3)은 그 소외 극복 위한 교양(혹은 신앙)이 출현. 왕과 신하의 갈등을 완화시켜 소외 극복하려 하나 한계를 느낀다. 여기서 계몽주의가 출현, 미신에 대한 비판이 전개된다. 계몽주의는 윤리 도덕의 기준을 바꾸는 작업이다. 그러다 보니 다시 종교의 벽에 부닥쳐서 절대지를 추궁하게 된다.
감각-오성-이성을 거쳐 절대지에 이르는 과정을 즉자(即自, an sich)-대자(對自, fur sich)-즉대자(即對自, )로 승화하는 과정 다룸.
이성적 자기의식의 발전인 정신, 곧 인륜적 정신, (1) 고대 그리스적 가족국가, (2) 로마의 법률적 국가, (3) 중세 기독교 세계, (4) 계몽주의, 프랑스혁명 거쳐 (5) 칸트적인 도덕세계와 낭만주의 시대로 변모. 여기서 절대자의 표상인 종교가 개념화한 것이 절대지로, 정시현상학이란 일상적인 의식에서 철학적인 의식으로의 발전 과정을 추적함과 동시에 그에 따른 인류역사의 발전과정도 추구한다.
여기서 역사발전의 주체는 절대지로서의 절대이념, 즉 절대정신이다.
이념-논리학, 자연-자연철학, 정신-정신철학으로 구분.
1811(41), 22살 마리 폰 투허(Marie Helena Susanna von Tucher(1791–1855)와 4월 약혼, 9월 11일 결혼. 그녀는 뉘른베르크제국 국회의원, 시장, 참사원을 지낸 명문가의 맏딸로 그녀의 오빠가 헤겔 교장인 학교의 교사. 결혼 5년간 사생아 숨김.
그러나 결혼 전후에 그에게는 두 장애물. (1) 사생아의 생모, 결혼을 노골적으로 방해, 헤겔이 처리, (2) 여동생의 오빠 편애. 큰 짐 됐으나 1812년 다른 오빠가 러시아 원정군에 동원 됐다가 전사하자 그 슬픔을 달래다가 강물에 투신자살.
뉘른베르크의 헤겔 처갓집 박물관(Museum Tucher Mansion and Hirsvogel Hall).
행복한 철학자로 첫딸은 조사, 큰 아들(Karl Friedrich Wilhelm, 1813-1901)은 사학과 교수, 둘째 아들(Immanuel Thomas Christian, 1814-1891)은 브란덴부르크 주 종교국장 지냄.
“오, 마리,/내 사랑! 내 격정적인 가슴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당신의 눈길 앞에서/내 사랑에 화답하는 당신의 눈을 보며/오, 희열! 오, 지극한 행복!” (3, 108)
"결혼함에서 나는 지상 생활의 목적은 달성되었다. 직장과 애처를 가진 이상 그것으로
써 현세에서의 할 일은 일단 끝낸 셈이다. 직업과 애처는 개인이 추구해야할 으뜸가는 항목이다. 그것 외의 것은 본질적인 주제가 되지 않고 작은 항목이거나 주석일 뿐이다." (2, 36)
"결혼의 객관적인 출발점은 두 사람의 인격의 자유로운 합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각각 자연적으로 개별적인 인격을 일체성 가운데 방기하여 하나의 인격을 형성하고자 접합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체성은 자연스런 상태에서 개별적인 인격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일종의 자기제한이 되지만, 이 일체성 속에서 실질적인 자기의식에 도달되기 때문에 일체성은 양자의 인격에 있어서 해방된다. 인간의 인륜적인 의무는 혼인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법률철학 입문>)
브르노, 캄파넬라, 데카르트, 스피노자, 파스칼, 칸트, 라이프치히, 로크, 흄, 칸트 등은 독신. 헤겔은 금전 출납부도 기록, 정기적으로 복권도 구입, 오페라와 연극, 미술전시회도 다님.
1813(43), 이 무렵 라이프치히전투(Battle of Leipzig, 1813.10. 16-18)에서 독일 승리. 학생운동 격렬화로 예나대학 주도로 독일학생동맹 결성. 헤겔은 어전히 그 격렬성을 선도, 유화할 것을 주장하며 나폴레옹의 위대성 옹호. 프로이센 당국이 헤겔에게 호의 가진 계기.
1816(46), <대논리학(大論理学, Wissenschaft der Logik)>(1812-16)출간.
<정신현상학>의 연장선에서 로고스 철학의 관점으로 존재론과 형이상학적인 논리학을 탐구.
논리학은 대낮의 법칙이 아닌 그림자의 법칙을 제시한 것.
헤겔 변증법의 논리 특징은 (1) 존재(있음), (2) 본질(참 있음), (3) 개념(잡아 있음)으로 접근하는 것.
6. 하이델베르크 거쳐 베를린대학으로
1816(46),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대학 교수.
10월 29일, 첫 강의. 첫 해 수강생 4명, 다음 해부터는 늘어나 70명까지. 강좌과목은 논리학과 형이상학, 철학사, 자연법과 국가학, 미학, 인간학과 심리학 등.
원래는 베를린대 철학 교수 지망. 베를린대 총장 피히테가 1814년 사후 그 후임 철학교수 모집에 응모. 피히테는 예나대 시절에 <신의 세계지배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 근거에 관하여>(1798)란 논문이 무신론으로 몰려 이듬해에 해직. 나폴레옹 침공 때 쾨니히스베르크, 코펜하겐 등지로 피신, 1807년 8월 베를린 귀환해 연속 강연 <독일국민에게 고함>(1807-8). 베를린대 총장(1810-1812).
총장 취임사, “대학은 대학의 모든 제도와 조직을 포함하여 이 천직(연구)의 실행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반나폴레옹 투쟁 때 부상자와 환자들이 베를린대에 가득, 피히테의 부인이 간호사로 활동, 티푸스 감염으로 그가 죽음.
베를린대학의 학장(De Wette), 교육부에다 헤겔의 베를린대 교수 반대 청원. 이유는 <대논리학>의 애매성과 강의가 서투르다는 점 지적.
그래서 하이델베르크대학에 부임(1816). 봉급은 1300굴덴에 곡식 제공.
1816. 10월 29일 첫 강의, 수강생 4명, 다음해부터 증가 70명. 논리학, 형이상학, 철학사, 자연법과 국가학, 미학, 인간학과 심리학 등.
일화. 점심시간에 집에서 식사, 낮잠 자다가 3시인 줄 알고 강의실 가서 강의 시작, 한 학생이 2시라고 알려줌. 마침 2시 강사가 왔다가 헤겔 보고 자신이 1시간 늦게 온 걸로 착각, 돌아 가버림. 3시에 다시 강의, “여러분, 자신에 관한 의식의 경험 가운데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감각에서 얻어지는 확신의 진리, - 진리이기보다는 오히려 허위인 것입니다.”
1817(47), <철학의 백과사전(The Encyclopedia of the Philosophical Sciences in Outline)> 출간.
1권 논리학 / 2권 자연철학 / 3권 정신철학으로 구성.
역사관의 제시.
(1) 동양적 정신 ; 정신에서 즉자적 양상. 미분화된 1인 지배 체제.
(2) 그리스 정신. 정신에서의 대자적 입장. 개인의식의 발현.
(3) 즉자-대자적 입장. 개인적 이익 극대화, 평민과 귀족 대립화.
(4) 게르만적 기족교적 정신. 즉자대자적 정신. 신적인 본성과 인간적인 본성의 통일 이룩. 이성적인 법 출현.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요,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
일화. 에스토니아 귀족 보리스 드 이크스큐르 남작. 러시아 기병대장, 전쟁 지쳐 하이델베르크대 유학, 헤겔 명성 듣고 감동 위해 안 읽고 청강, 전혀 몰라 헤겔에게 조언. 책 읽으라고 했으나 읽어도 모르자 헤겔은 개인교수 두라고 충언. 둘은 친해져 헤겔 애독자 됨.
1817년 12월, 헤겔에게 베를린대 초청장.
프로이센 내각 개편, 종교와 건강, 교육 담당 문화부 신설, 알텐슈타인(Altenstein)남작이 장관. 대학생연맹 활동 자제를 헤겔 철학 통해 억제코자 초청. 연봉 2천 탈러로 하이델베르크의 2배, 이사비용 100탈러, 세관 통과 면세 보장.
베를린대학(Humboldt University of Berlin, Humboldt-Universität zu Berlin).
1806년 예나전쟁 패배 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훔볼트(Karl Wilhelm von Humboldt) 종무 교육국장관 건의로 건립. 프리드리히 빌헬름대학으로 개칭(1826), 1949년 창립자와 형제였던 자연과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를 합쳐 베를린 훔볼트대학으로 개칭.
1818(48), 9월20일 이사 시작. 23일, 바이마르로 가서 괴테 등 만남. 9월 27일 베를린 도착.
부르센샤프트(Burschenschaft)운동, 자유주의적인 성향의 대학생 단체로 1815년 예나대학이 주축. 그들이 1817년 10월 종교개혁 300주년과 라이프치히 전투 4주년 기념 축제 개최한 게 바르트부르크 축제(Das Wartburg Festival, 1817.10.18.-19). 자유와 통일 추구. 루터가 교황의 파문장 불 태운 걸 본받아 나폴레옹 법전과 프로이센의 경찰법령집 불태움.
바르트부르크는 중세 독일의 상징으로, 거기서 가수들의 ‘노래의 전쟁’을 벌렸던 곳.
1818년 10월 22일, 헤겔 취임 강연.
"인생에 있어서 진실하며 위대하고 신적인 것은 모두 이념에 의한 것입니다. 이념을 참다운 형태와 보편성에서 파악하는 것이 철학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루어지는 정신의 나라는 자유의 나라입니다. 정신의 나라는 진리와 법의 의식에 의해서 즉 이념의 파악에 의해서만 실재하는 것입니다." (4, 2010, 16쪽)
1819(49), 3월23일, 대학생 잔트(Karl Ludwig Sand, 1795-1820)가 만하임에서 코체부(August Friedrich Ferdinand von Kotzebue, 1761-1819) 암살.
코체부는 바이마르 출생, 예나대 졸업한 변호사이자 재판관 등 지낸 법조인, 극작가, 언론인 등 다양한 경력. 러시에를 들락날락하며 독일 낭만주의와 민족주의와 자유사상 운동가를 맹비난. 러시아 첩보원에다 반동 메테르니히의 반동체제의 대표적 작가란 설이 파다해 잔트가 “국가의 반역자, 민중이 사기꾼”으로 낙인찍어 단도로 가슴 찔러 죽임. 잔트는 민족적 영웅 되었으나 메테르니히는 민주화와 통일운동 탄압 강화. 대학도 위축.
카를스바트 결의(Die Karlsbader Beschlüsse, Carlsbad Decrees, 1819.9.20.), 메테르니히 주도로 전 독일 회의에서 내린 진보운동 전반에 대한 탄압 결의안. 학생회와 체육협회 등 해산, 모든 대학에 감시관 파견, 출판물 검열 등 골자.
메테르니히(von Metternich-Winneburg, 1773-1859), 빈 회의 의장, 1821년 재상 이후 권력 독점, 유럽 혁명사상과 진보세력 탄압의 대명사, 독일 통일 탄압하다가 1848년 3월 혁명 때 실각, 영국 망명, 1851년 귀국했다.
잔트의 평가와 처형 여부 문제로 대학들이 어수선.
데 베테(Wilhelm Martin Leberecht de Wette, 1780-1849) 교수는 잔트 적극 옹호하다가 해직, 프로이센에서 추방당함. 나중 바젤대 교수, 그곳에서 죽음. 헤겔은 그를 위한 모금운동엔 적극 나서지 않았으나 헌금.
1820(50), 헤겔. 철학과 학장. 수강생에는 문인, 장성 등 다양. 일설에는 고관들이 여학생 보러 참가했다고도.
1821(51), <법철학 요강(Elements of the Philosophy of Right,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근대국가 이론에 대한 대표적인 명저로, 부제는 ‘자연법과 국가학 강요’.
추상 법, 도덕, 인륜 3부 구성. 추상법은 소유와 경제활동의 자유가 보장된 자연법을, 도덕은 독일 관념론이 이룩한 범주에서의 윤리관을, 3부 인륜은 가족-시민사회-국가로 발전하는 인륜의 문제를 추궁.
“법, 인륜, 국가에 관한 진리는, 진리가 공공의 법률과 공공의 도덕, 종교 중에서 표명되어 있고, 숙지되어 있는 것이 오래듯이, 오랜 것”(2, 194).
그러나 인륜적 욕망에 빠진 사람들은 숲을 못 보고 나무만 보면서 인륜적 질서와 국가의 명령에 신뢰를 떨어뜨릴 우려. “인륜적 우주”인 국가의 기본이 법률. 철학이 황당한 허공의 학문 아니기에 이런 저술.
이솝 우화 <로도스 섬>, 거기서 최고의 춤을 추었다는 사람에게,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춰 보아라. 이를 헤겔은 “여기에 장미가 있으니 여기서 춤추라!” 라고 변용. 장미란 이성적인 현대 국가로 춤은 화합적인 국가 상징.
가장 이성적인 국가를 형성하는 것은 국민정신(Volksgeist, national spirit, nationalism), 여기에는 몽테스키외는 esprit de la nation(역사적 및 자연환경적 소산), 헤르더는 Genius eines Volks(민족 고유의 무의식적 활동)를 두루 수렴한 데다 민족문화와 민족사의 창조적인 통일적 소산으로 파악,
이 국민정신은 현실성의 권리를 빼앗거나 주거나 하는 재판관이 존재. 그 판관은 보편적 정신, 곧 세계정신(Weltgeist)으로, 이는 최고 권리인 세계법정(Weltgericht)의 위치에서 그 권리를 행사한다. 따라서 세계사는 세계정신에 의해 심판받는 세계법정으로 진행된다.
법이란 보통 법이아닌 객관적 이성으로 변증법적인 정, 반, 합의 단계를 거친 객관적 정신의 반영. 로마의 사법, 도덕성으로서의 칸트적 법, 가족, 시민, 사회, 민족국가의 인륜생활의 법, 세계사의 법으로 발전.
1822(52), 네덜란드 여행. 1824(54), 빈 여행.
1826(56), 신학자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aniel Schleiermacher, 1768-1834)와 극한대립. 그는 헤겔을 불쌍한 사람이라고 혹평. 스피노자 영향 받은 반 계몽주의적인 감정적 신앙 중시론 주장. 교의나 전승, 인식, 도덕의 문제가 아닌 심정적인 문제로 종교를 파악, 무한자(우주, 신)를 향한 절대 의존 감정을 종교의 본질로 인식. 정치적으로는 자유 중시.
쇼펜하우어, 헤겔을 “정신적 악한” “이류 철학자” “허풍장이” “협잡꾼” 등으로 매도. 헤겔은 그에게 교수자격 논문 쓰도록 도와 줬으나 비난만 받음. 쇼펜하우어는 강의 시간을 헤겔 강의 시간(12-1시)에 맞춰 개최, 헤겔로부터 학생 떼어놓으려 했으나 도로 자신의 강의가 폐강. 1827(57), 파리 여행, 프랑스혁명 기념할만한 곳 다 찾아다님. 베를린 교수시절에는 항상 7.14일을 기념해 학생들과 축배.
귀로에 괴테 만남.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에서 언급.
"변증법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존재하는 모순을 규칙화하고 방법화한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변증법은 진위를 구별해야 할 경우에 뛰어난 기능을 발휘합니다."
헤겔은 "저는 당신의 자식 중의 한 사람이라고 자부해도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고 함.
1829(59), 카를스바트 갔다가 사이 나쁜 셸링 만났으나 화해 못함. 귀로에 또 괴테 만남. 이 무렵 수강생 200명에서 1500명으로 급증.
10월, 베를린대학 총장(1년간). 당시 대학에 정부 감독관 배치했는데, 헤겔이 총장 되자 배치 않음. 취임사는 관례대로 라틴어로 함.
1830(60), 9-12월, 심한 열병. 프랑스 7월혁명. 회갑 맞아 제자들이 기념메달 헌정. 앞면은 헤겔 초상과 부엉이. 이 메달을 헤겔 요청으로 괴테에게도 선물 했으나 그는 불쾌하게 봄.
1831(61), 1월, 3등급 붉은 독수리 훈장 받다.
11월 14일 오후 5시 15분, 콜레라로 서거.
당시 콜레라 사망자는 외딴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헤겔은 시 외곽 공동묘지(The Dorotheenstadt Cemetery, Cemetery of the Dorotheenstadt and Friedrichswerder Parishes)의 피히테 옆에 안장. 나중 마르쿠제(Herbert Marcuse, 1898-1979)의 묘지가 헤겔 옆으로 이장됨.
이 묘지에는 Dietrich Bonhoeffer(1906–1945), Bertolt Brecht(1898-1956), Heinrich Mann(1871-1950), Anna Seghers(1900-1983), Christa Wolf(1929-2011) 등 묘지 있음.
7. 보충 자료
가장 총애한 제자 에두아르트 간즈(Eduard Gans, 1797-1839), 로마법 교수. 마르크스의 스승.
좌파
(1) 다비드 슈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 1808-1874), <예수의 생애(Das Leben Jesu-kritisch bearbeitet, The Life of Jesus-Critically Examined)>(1835). 신비적이며 비합리적인 내용 빼고 인간 예수 그리기. 인격적인 신관 부정. 자신을 좌파(die Linke), 인격신 옹호파를 우파(die Rechte)로 호칭.
(2)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 1809-1882), 초기에는 우파, 나중 헤겔을 무신론자로 평가하며 좌파로 변하여 슈트라우스에서 더 진보한 인간주의 표명해 대학에서 쫓겨남. 헤겔의 절대정신을 기독교가 방해한다며 종교와 국가 분리 주장.
(3) 루드비히 포이어바흐(Ludwig von Feuerbach, 1804-1872), <그리스도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1841) 등 혁명적 저작 다수.
우파
(1) 괴셸(Karl Friedrich Göschel, 1781-1861), 신학자이자 법학자로 슈트라우스 신학 비판.
(2) 헤닝(Leopold von Henning, 1791-1866), 헤겔 조교, 나중 교수. 헤겔 전집 발간에 참여.
1840년 1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즉위. 베를린대학에서 좌파 숙청. 셸링을 베를린으로 초치.
1841년 11월 15일, 셸링이 베를린에서 첫 강의. 헤겔 사후 10년.
청강생 중에는 마하일 바쿠닌, 야콥 부르크하르트, 프리드리히 엥겔스, 알렉산더 폰 훔볼트, 쇠렌 키에르케고르, 페르디난트 라일살레, 레오폴드 폰 랑케 등.
한국 소개 참고 문헌
1. 일반적인 개설서
H. 마르쿠제 지음, 김현일 옮김, <이성과 혁명>, 중원문화.
2. 헤겔 원작 번역서
<피히테와 셸링 철학체계의 차이(Difference of Fichte's and Schelling's System of Philosophy)>(1801) / 임석진 역(1989) <정신현상학(Phenomenology of Mind)>(1807) / 임석진 역(1989)
진 역(1983), 허우현 역(1970)
<논리학(Science of Logic)>(1812-16) / 임석진 역(1994), 임석진 역(1982)
<철학강요(Encyclopedia I-III)>(1830) / 서동익 역(1983), 김계숙 역(1955), 전원배 역(1954)
1권 논리학 / 2권 자연철학 / 박병기 역(2008) / 3권 정신철학 / 박병기 역(2000)
<법철학(Principles of the Philosophy of Law)>(1820) / 임석진 역(1990), 윤용탁 역(19766) ), 이동춘 역(1976), 윤용석 역(1972)
<종교철학(Philosophy of Religion) : 청년 헤겔의 신학론집> / 정대성 역(2005), 김종호 역(1972)
<역사철학강의(Lectures on the Philosophy of History I-III)>(1817) / 임석진 역(1987), 정영오 역(1983), 김종호 역(1970)
<미학(Aesthetics)>, 호토 전면 재편집, 두행숙 역, 1996.
1820/21년 강의 : '예술철학으로서 미학(Aesthetics as Philosophy of Art)', 아셰베르크 기록, 국내 미출간.
1823년 강의 : <헤겔 예술철학(Lectures on the Philosophy of Art)>, 호토 기록, 한동원 역, 2008.
<세계사의 철학(Philosophy of World History)>(1824-31).
<인륜성의 체계>(1802-03) / 김준수 역
<김나지움 논리학 입문>(1808-11) / 위상복 역
<철학사(History of Philosophy)> / 임석진 역
<역사속의 이성(Reason in History)> / 임석진 역(1976)
< 믿음과 지>식 / 황설중 역
<헤겔 예나 시기 정신철학> / 서정혁 역(2006)
<행성궤도론> / 박병기 역(2003)
<변증법과 회의주의> / 황설중 역(2003)
<교수 취임 연설문> / 서정혁 역(2004)
<자연법> / 김준수 역(2004)
외 다수.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