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옥사의 발단 1589년(선조 22) 10월 2일, 황해감사 한준(韓準)의 비밀 장계가 올라왔다. 정여립(鄭汝立)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고변(告變)은 정여립의 일당으로 안악에 사는 조구(趙球)의 밀고를 받아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이 함경(황해의 잘못?-운영자주)감사에게 보고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고변은 정여립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군사를 일으켜 그 해 겨울에 서울로 쳐들어와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죽이는 한편 교서를 위조해 지방관들을 죽이거나 파직시킴으로써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켜 일을 성사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정여립은 어려서부터 성격이 난폭하고 무도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자신의 악행을 고한 여종의 배를 갈라 죽였는가 하면, 아버지가 현감이었을 시절에는 고을 일을 제 마음대로 처결해 버리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글 읽기에 매진하니, 그 이름이 전라도 지방에 널리 알려졌고, 세간에서는 그를 죽도(竹島) 선생이라 불렀다. 정여립은 기백이 높고 언변이 출중해 좌중을 탄복시키는 일이 많았다. 이 시기에 그는 이이(李珥)ㆍ성혼(成渾)의 문하를 왕래하며 학문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이ㆍ성혼은 정여립이 다소 과격하고 급한 기질이 있음을 늘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박학다식에 탄복하여 조정에 천거하기까지 했다.
1584년(선조 17) 초에는 정승 노수신(盧守愼)에 의해 김우옹(金宇?)ㆍ이발(李潑) 등과 함께 조정에 천거되었다. 또 이발(李潑)ㆍ이길(李?) 형제의 추천으로 사헌부와 홍문관에 발탁되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이이가 죽었다. 그러자 정여립은 이발에게 붙어 서인에서 동인으로 당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 후로는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이이를 나라를 그르치는 소인으로 시종 매도했다. 선조는 이런 정여립을 배은망덕한 자라고 혹평하여 시골로 좇아내 버렸다.
정여립은 임꺽정(林巨正)의 난이 일어났던 황대도 안악에 내려가, 그곳에서 교생 변숭복(邊崇福)ㆍ박연령(朴延齡)ㆍ지함두(池涵斗)와 승려 의연(義衍)ㆍ도잠ㆍ설청 등과 사귀면서 비밀리에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당시 세간에는 "목자(木子=李)는 망하고 전읍(奠邑=鄭)은 흥한다"는 『정감록(鄭鑑錄)』류의 동요가 유행하고 있었다. 그는 그 구절을 옥판(玉板)에 새겨 승려 의연으로 하여금 지리사 석굴 속에 숨겨 두도록 했다. 그리고는 뒤에 산 구경을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처엄 위장해, 변숭복ㆍ박연령 등으로 하여금 자신을 시대를 타고난 인물로 여기게 했다.
수십 년 전에 천안 지방에서는 길삼봉(吉三峯)이라는 자가 화적질을 하고 있었는데, 용맹이 뛰어나 관군이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정여립은 지함두(池涵斗)를 시켜 황해도 지방으로 가서 "길삼봉(吉三峯)ㆍ길삼산(吉三山) 형재는 신병(神兵)을 거느리고 지리산에 들어가고 계룡산에도 들어간다", "정팔룡(鄭八龍)이라는 신비롭고 용맹한 이가 곧 임금이 될 것인데, 머지 않아 군사를 일으킨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했다. 팔룡은 여립의 어릴 때 이름이었다. 소문은 곧 황해도 지방에 널리 퍼져 "호남ㆍ전주 지방에서 성인이 일어나서 만백성을 건져, 이로부터 나라가 태평하리라"는 유언이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정여립은 잡술에도 능해 장차 나라에 변이 일어나게 된다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주ㆍ금구ㆍ태인 등 이웃 고을 무사들과 노비를 모아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해 놓고 있었다. 이 대동계는 왜구가 전라도 손죽도를 침범했을 당시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군사를 지원해 주기도 했다. 왜구를 진압한 후 군대를 해산할 때, 정여립은 훗날 일이 발생하면 각기 군사를 이끌고 모이라고 이르고 군사 명부 한 벌을 가지고 돌아갔다. 정여립의 반역 기미는 그가 입버릇처럼 하고 다녔다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엿보인다.
"천하는 공물이니 어찌 정해 놓은 주인이 있으리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함은 왕촉(王?)이라는 자가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이지 성인의 통론이 아니다." (『연려실기술』 「선조조고사본말」 기축정여립지옥)
의문의 죽음
그러나 1589년 10월 2일, 황해감사 한준(韓準)은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내용의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이에 선조는 정여립의 생질인 예문관 검열 이진길(李震吉)만을 빼고 중신회의를 열었다. 이 때는 이산해(李山海)가 영의정, 정언신(鄭彦信)이 우의정을 맡고, 이발(李潑)ㆍ백유양(白惟讓) 등의 동인들이 득세하고 있을 때였다. 정언신은 정여립을 변호했다. 또 백유양의 아들 백진민(白震民)은 황해도 수령의 절반이 서인이고 또 이이의 제자들이 많은 곳이라 그들의 무고일 지 모르는 만큼, 정여립이 상경하여 입장을 밝힐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재령군수 박충간의 제보에 대해서는 오히려 근거없이 발설한 것이라며 참형에 쳐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서인들은 의기양양해진 반면, 동인들은 위축되기 시작했다. 정여립이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변숭복은 조구가 고변한 것을 알고 안악에서 사흘 반나절만에 금구로 달려가 정여립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정여립은 그 날 밤으로 변숭복, 아들 옥남 등과 함께 진안현 죽도로 달아났다. 금부도사 유금이 덥쳤을 때는 이미 달아난 뒤였다. 이에 진안현감 민인백(閔仁伯)이 관군을 이끌고 정여립을 추격했다. 이들에 둘러싸인 정여립은 먼저 변숭복ㆍ옥남을 친 다음 칼자루를 땅에 꽂아 놓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정여립의 자살로 정국은 돌변했다. 그의 말을 들어 보고 결정하자던 동인들이 설 땅을 잃고 만 것이다. 그가 자살했다면, 혐의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자살했겠는가? 이에 대해서는 정여립이 누군가의 꾐에 빠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만일 꾐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가 관련 문서들을 없애 버리지 않을 리는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꾐에 빠진 것이라면, 유인한 자는 변숭복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정여립은 자살한 것이 아니고 타살 당한 뒤 자살로 위장되었을지 모른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변숭복을 죽인 것도 그에게 유인당한 사실을 알고 처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칼을 거꾸로 꽂아 놓고 자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정여립의 난과 관련하여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이 많다. 그가 도망을 가면서 하필 자신의 연고지인 죽도를 택하고, 더욱이 그 곳으로 간다고 행방을 알린 일부터가 이상하다. 진안현감이 추적한 것도 그래서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이상한 것은 정여립이 도망갔을 것이라고 정철이 미리 말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정여립의 난으로 촉발된 기축옥사는 정여립 본인을 문초한 것도 아니고 단지 그의 집에서 나온 문서들을 근거로 동인들을 일망타진한 사건이었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해 볼 때, 기축옥사는 조작된 사건[誣獄]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모사가 송익필
기축옥사를 조작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인물은 살아 있는 제갈공명이라는 말을 듣던 송익필(宋翼弼)이다. 그는 김장생(金長生)ㆍ김집(金集)의 스승이요 이이와 성혼의 친구이며, 서인의 모사(謀士)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 송사련(宋祀連)은 어머니 감정(甘丁, 堪貞)이 사예(司藝) 안돈후(安敦厚)의 서녀라고 하고, 안돈후가 그의 형 안관후의 여종을 첩으로 삼아 낳은 천첩녀라고도 한다. 감정은 안돈후의 미움을 사 배천(白川)으로 쫒겨갔다가 갑사 송인(宋璘)과 혼인해 송사련을 낳았다. 송사련은 재간이 있고 총명해 안돈후의 아들 안당(安?)의 집안일을 도맡다가, 음양과에 합격해 천문학관을 거쳐 벼슬이 판관(종5품)에 이르렀다.
좌의정을 지낸 안당은 조광조 등 사림들의 진출을 도운 이름 있는 선비였지만, 기묘사화로 파직되었다. 안당의 아들 안처겸(安處謙)은 친구들과 한담하는 자리에서 남곤(南袞)ㆍ심정(沈貞) 등 간신들을 제거하면 나라를 구할 수 있고 사림을 보존할 수 있다고 토로한 바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송사련은 안처겸의 처의 초상 때의 조문록과 발인할 때 역군들의 명부를 가지고 안처겸 등이 대신을 모해하는 모역을 꾸민다고 고변했다. 그러나 송사련은 그 대가로 당상관에 올랐고, 죄인들의 토지와 노비까지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송사련은 부필(富弼)ㆍ익필(翼弼)ㆍ한필(翰弼) 등 세 아들을 두었다. 그 중 특히 익필은 이산해 등과 함께 8문장에 들 정도로 글을 잘 했으며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이이ㆍ성혼과는 너나들이를 하는 사이였는데, 이이가 평생 서얼 허통을 주장한 것도 익필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형제는 아버지인 송사련의 죄과 때문에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서자라고 해서 과거 시험도 보지 못하고, 동인들의 공격을 받아 이름을 바꿔 숨어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 무렵 경기도 교하에 있는 언전(堰田)을 놓고 곽사원과 황유경이 소유권을 다투고 있었다. 곽사원은 바로 송한필의 사위의 아버지였다. 송한필(宋翰弼)은 서인 고관들의 힘을 빌어 곽사원을 지원했지만, 동인들의 맹렬한 반격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안당(安?)의 손자 안윤(安玧)이 동인 이발(李潑)의 사주를 받아, 송사련의 어머니는 안돈후의 딸이 아니라 사노비인 전 남편의 소생이니, 그 자손 70여 명을 모두 노비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발 등은 법의 시한이 지났음에도 그들을 모두 환천시켜 송익필과 친분이 깊었던 서인 정철(鄭澈) 등과 원수가 되었다.
이러한 수모를 당하고 송익필 형제는 동인들의 천하를 뒤바꾸어 놓으려는 계책을 세웠다. 정여립의 대동계가 그 빌미가 되었다. 더욱이 정여립은 이이를 배반해 서인들의 미움을 사고 있는 터였다. 송익필은 정여립과 함께 이이와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사로 친하게 지내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여립을 잘 알고 있었다. 송한필은 황해도 사람들에게 "전주에 성인이 났으니, 곧 정수찬(鄭修撰)이다. 그는 길삼봉과 서로 친하게 왕래하였는데, 삼봉은 하루 3백리 길을 걸으며 지혜와 용맹이 비랄 데가 없으니 역시 신인이다. 너희들이 만일 가서 볼 것 같으면, 벼슬이 스스로 올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교생 변숭복ㆍ박연령 등이 그 말을 믿고 정여립을 만나니, 여립도 그들을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그런 만큼 변숭복 등이 송한필의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이다. 조구(趙球)가 정여립의 반역을 고발한 것도 송익필 형제의 사주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송익필은 동인을 공격하는 서인의 상소문을 대신 써 주고, 정철을 조종해 정여립 사건을 주도면밀하게 추진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기축옥사를 두고 송익필이 꾸미고 정철이 실행한 사건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기축옥사
10월 8일에 영의정 유전(柳琠), 좌의정 이산해(李山海), 우의정 정언신(鄭彦愼), 판의금부사 김귀영(金貴榮) 등이 재판관[委官]이 되어 죄인들을 심문했다. 고향에 있던 정철(鄭澈)은 송익필ㆍ성혼의 권유를 받고 입궐해 차자(箚子)를 올렸다. 그는 정언신이 정여립의 일가이니 재판관으로 적당하지 않으므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철이 위관이 되어 심문을 담당하게 되었다. 송익필은 정철의 집에 묵으면서 동인 타도를 지휘했다.
정여립과 공모했다는 죄로 이기ㆍ황언윤ㆍ방의신ㆍ신여성 등이 처형되었다. 정여립의 조카 이진길은 "지금 임금의 어두움이 날로 심하다"라고 쓴 편지가 발견되어 매를 맞아 죽었다. 그 와중에 11월 2일, 정언신ㆍ정언지ㆍ이발ㆍ이길ㆍ백유양 등 동인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생원 양천회(梁千會)의 상소가 올라 왔다. 그리고 정여립의 조카 정집의 공초에서도 이들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결국 정언신(鄭彦愼)은 강계로, 이발(李潑)은 종성으로, 이길(李?)은 희천으로, 백유양(白惟讓)은 부령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그 후 12월 12일에 교생 선홍복을 문초할 때, 다시 이발ㆍ이길ㆍ이급(李汲)ㆍ백유양ㆍ이진길ㆍ유덕수 등의 이름이 나왔다. 이들은 다시 잡혀와서 곤장을 맞고 죽었다.
정철은 겉으로는 이발 등을 구하는 척했으나, 뒤로는 갖은 수법으로 이들을 옭아넣으려 했다. 그는 평소 미워하던 사람들을 모두 역당으로 몰아 처단했다. 3년 동안 죽은 자만도 1천여 명이 넘었다. 반면에 정여립의 난을 고변한 박충간 등 22명은 평란공신(平亂功臣)이 되어 관직을 올려받았다. 이 때가 1590년(선조 23) 2월이었다.
기축옥사를 사화(士禍)로 보는 시각이 있다. 기축옥사가 정철을 위시한 서인들의 동인 제거에 이용되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정개청(鄭介淸)은 정여립의 집터를 봐 준 적이 있고, 또 그의 저술 중에 절의(節義)를 배척한 내용이 있다 하여 경원으로 귀양가 죽었다. 심지어 정철은 "개청은 반역하지 않은 여립이요. 여립은 반역한 개청이다"라고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남명 조식(曺植)의 제자 최영경(崔永慶)은 정여립의 편지 한 장을 받은 죄로 길삼봉으로 지목되어 죽었다. 당시 떠돌던 말에 의하면, 길삼봉은 진주에 사는 사람으로 나이는 60이고, 낯은 쇠빛이며 수척하고, 수염은 길어서 배가지 내려가고, 키가 크다고 했다. 어이없게도 최영경의 외모가 비슷하다 하여 길삼봉으로 오인받고 죽어야 했던 것이다.
이발의 82세 된 어머니는 주리를 틀어 죽였다. 그의 11살 된 아들과 5살 된 아들도 죽였다. 좌랑 김빙(金憑)은 바람병이 있어 날이 차면 눈물이 줄줄 흐르곤 했다. 그는 정여립과 썩 좋은 사이가 아니었는데, 여립의 시체를 찢던 날 바람병 때문에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옆에서 이를 백유함은 김빙이 여립의 죽음을 슬퍼해 울었다며 역모로 몰아 죽였다. 이렇듯 기축옥사는 정여립의 역심을 역이용한 정치적인 사건으로, 실로 당쟁 중의 비극이었다.
출전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 동방미디어, 2001, pp.126~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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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옥사의 발단 1589년(선조 22) 10월 2일, 황해감사 한준(韓準)의 비밀 장계가 올라왔다. 정여립(鄭汝立)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고변(告變)은 정여립의 일당으로 안악에 사는 조구(趙球)의 밀고를 받아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이 함경(황해의 잘못?-운영자주)감사에게 보고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고변은 정여립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군사를 일으켜 그 해 겨울에 서울로 쳐들어와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죽이는 한편 교서를 위조해 지방관들을 죽이거나 파직시킴으로써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켜 일을 성사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정여립은 어려서부터 성격이 난폭하고 무도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자신의 악행을 고한 여종의 배를 갈라 죽였는가 하면, 아버지가 현감이었을 시절에는 고을 일을 제 마음대로 처결해 버리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글 읽기에 매진하니, 그 이름이 전라도 지방에 널리 알려졌고, 세간에서는 그를 죽도(竹島) 선생이라 불렀다. 정여립은 기백이 높고 언변이 출중해 좌중을 탄복시키는 일이 많았다. 이 시기에 그는 이이(李珥)ㆍ성혼(成渾)의 문하를 왕래하며 학문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이ㆍ성혼은 정여립이 다소 과격하고 급한 기질이 있음을 늘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박학다식에 탄복하여 조정에 천거하기까지 했다.
1584년(선조 17) 초에는 정승 노수신(盧守愼)에 의해 김우옹(金宇?)ㆍ이발(李潑) 등과 함께 조정에 천거되었다. 또 이발(李潑)ㆍ이길(李?) 형제의 추천으로 사헌부와 홍문관에 발탁되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이이가 죽었다. 그러자 정여립은 이발에게 붙어 서인에서 동인으로 당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 후로는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이이를 나라를 그르치는 소인으로 시종 매도했다. 선조는 이런 정여립을 배은망덕한 자라고 혹평하여 시골로 좇아내 버렸다.
정여립은 임꺽정(林巨正)의 난이 일어났던 황대도 안악에 내려가, 그곳에서 교생 변숭복(邊崇福)ㆍ박연령(朴延齡)ㆍ지함두(池涵斗)와 승려 의연(義衍)ㆍ도잠ㆍ설청 등과 사귀면서 비밀리에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당시 세간에는 "목자(木子=李)는 망하고 전읍(奠邑=鄭)은 흥한다"는 『정감록(鄭鑑錄)』류의 동요가 유행하고 있었다. 그는 그 구절을 옥판(玉板)에 새겨 승려 의연으로 하여금 지리사 석굴 속에 숨겨 두도록 했다. 그리고는 뒤에 산 구경을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처엄 위장해, 변숭복ㆍ박연령 등으로 하여금 자신을 시대를 타고난 인물로 여기게 했다.
수십 년 전에 천안 지방에서는 길삼봉(吉三峯)이라는 자가 화적질을 하고 있었는데, 용맹이 뛰어나 관군이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정여립은 지함두(池涵斗)를 시켜 황해도 지방으로 가서 "길삼봉(吉三峯)ㆍ길삼산(吉三山) 형재는 신병(神兵)을 거느리고 지리산에 들어가고 계룡산에도 들어간다", "정팔룡(鄭八龍)이라는 신비롭고 용맹한 이가 곧 임금이 될 것인데, 머지 않아 군사를 일으킨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했다. 팔룡은 여립의 어릴 때 이름이었다. 소문은 곧 황해도 지방에 널리 퍼져 "호남ㆍ전주 지방에서 성인이 일어나서 만백성을 건져, 이로부터 나라가 태평하리라"는 유언이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정여립은 잡술에도 능해 장차 나라에 변이 일어나게 된다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주ㆍ금구ㆍ태인 등 이웃 고을 무사들과 노비를 모아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해 놓고 있었다. 이 대동계는 왜구가 전라도 손죽도를 침범했을 당시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군사를 지원해 주기도 했다. 왜구를 진압한 후 군대를 해산할 때, 정여립은 훗날 일이 발생하면 각기 군사를 이끌고 모이라고 이르고 군사 명부 한 벌을 가지고 돌아갔다. 정여립의 반역 기미는 그가 입버릇처럼 하고 다녔다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엿보인다.
"천하는 공물이니 어찌 정해 놓은 주인이 있으리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함은 왕촉(王?)이라는 자가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이지 성인의 통론이 아니다." (『연려실기술』 「선조조고사본말」 기축정여립지옥)
의문의 죽음
그러나 1589년 10월 2일, 황해감사 한준(韓準)은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내용의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이에 선조는 정여립의 생질인 예문관 검열 이진길(李震吉)만을 빼고 중신회의를 열었다. 이 때는 이산해(李山海)가 영의정, 정언신(鄭彦信)이 우의정을 맡고, 이발(李潑)ㆍ백유양(白惟讓) 등의 동인들이 득세하고 있을 때였다. 정언신은 정여립을 변호했다. 또 백유양의 아들 백진민(白震民)은 황해도 수령의 절반이 서인이고 또 이이의 제자들이 많은 곳이라 그들의 무고일 지 모르는 만큼, 정여립이 상경하여 입장을 밝힐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재령군수 박충간의 제보에 대해서는 오히려 근거없이 발설한 것이라며 참형에 쳐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서인들은 의기양양해진 반면, 동인들은 위축되기 시작했다. 정여립이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변숭복은 조구가 고변한 것을 알고 안악에서 사흘 반나절만에 금구로 달려가 정여립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정여립은 그 날 밤으로 변숭복, 아들 옥남 등과 함께 진안현 죽도로 달아났다. 금부도사 유금이 덥쳤을 때는 이미 달아난 뒤였다. 이에 진안현감 민인백(閔仁伯)이 관군을 이끌고 정여립을 추격했다. 이들에 둘러싸인 정여립은 먼저 변숭복ㆍ옥남을 친 다음 칼자루를 땅에 꽂아 놓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정여립의 자살로 정국은 돌변했다. 그의 말을 들어 보고 결정하자던 동인들이 설 땅을 잃고 만 것이다. 그가 자살했다면, 혐의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자살했겠는가? 이에 대해서는 정여립이 누군가의 꾐에 빠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만일 꾐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가 관련 문서들을 없애 버리지 않을 리는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꾐에 빠진 것이라면, 유인한 자는 변숭복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정여립은 자살한 것이 아니고 타살 당한 뒤 자살로 위장되었을지 모른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변숭복을 죽인 것도 그에게 유인당한 사실을 알고 처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칼을 거꾸로 꽂아 놓고 자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정여립의 난과 관련하여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이 많다. 그가 도망을 가면서 하필 자신의 연고지인 죽도를 택하고, 더욱이 그 곳으로 간다고 행방을 알린 일부터가 이상하다. 진안현감이 추적한 것도 그래서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이상한 것은 정여립이 도망갔을 것이라고 정철이 미리 말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정여립의 난으로 촉발된 기축옥사는 정여립 본인을 문초한 것도 아니고 단지 그의 집에서 나온 문서들을 근거로 동인들을 일망타진한 사건이었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해 볼 때, 기축옥사는 조작된 사건[誣獄]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모사가 송익필
기축옥사를 조작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인물은 살아 있는 제갈공명이라는 말을 듣던 송익필(宋翼弼)이다. 그는 김장생(金長生)ㆍ김집(金集)의 스승이요 이이와 성혼의 친구이며, 서인의 모사(謀士)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 송사련(宋祀連)은 어머니 감정(甘丁, 堪貞)이 사예(司藝) 안돈후(安敦厚)의 서녀라고 하고, 안돈후가 그의 형 안관후의 여종을 첩으로 삼아 낳은 천첩녀라고도 한다. 감정은 안돈후의 미움을 사 배천(白川)으로 쫒겨갔다가 갑사 송인(宋璘)과 혼인해 송사련을 낳았다. 송사련은 재간이 있고 총명해 안돈후의 아들 안당(安?)의 집안일을 도맡다가, 음양과에 합격해 천문학관을 거쳐 벼슬이 판관(종5품)에 이르렀다.
좌의정을 지낸 안당은 조광조 등 사림들의 진출을 도운 이름 있는 선비였지만, 기묘사화로 파직되었다. 안당의 아들 안처겸(安處謙)은 친구들과 한담하는 자리에서 남곤(南袞)ㆍ심정(沈貞) 등 간신들을 제거하면 나라를 구할 수 있고 사림을 보존할 수 있다고 토로한 바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송사련은 안처겸의 처의 초상 때의 조문록과 발인할 때 역군들의 명부를 가지고 안처겸 등이 대신을 모해하는 모역을 꾸민다고 고변했다. 그러나 송사련은 그 대가로 당상관에 올랐고, 죄인들의 토지와 노비까지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송사련은 부필(富弼)ㆍ익필(翼弼)ㆍ한필(翰弼) 등 세 아들을 두었다. 그 중 특히 익필은 이산해 등과 함께 8문장에 들 정도로 글을 잘 했으며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이이ㆍ성혼과는 너나들이를 하는 사이였는데, 이이가 평생 서얼 허통을 주장한 것도 익필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형제는 아버지인 송사련의 죄과 때문에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서자라고 해서 과거 시험도 보지 못하고, 동인들의 공격을 받아 이름을 바꿔 숨어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 무렵 경기도 교하에 있는 언전(堰田)을 놓고 곽사원과 황유경이 소유권을 다투고 있었다. 곽사원은 바로 송한필의 사위의 아버지였다. 송한필(宋翰弼)은 서인 고관들의 힘을 빌어 곽사원을 지원했지만, 동인들의 맹렬한 반격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안당(安?)의 손자 안윤(安玧)이 동인 이발(李潑)의 사주를 받아, 송사련의 어머니는 안돈후의 딸이 아니라 사노비인 전 남편의 소생이니, 그 자손 70여 명을 모두 노비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발 등은 법의 시한이 지났음에도 그들을 모두 환천시켜 송익필과 친분이 깊었던 서인 정철(鄭澈) 등과 원수가 되었다.
이러한 수모를 당하고 송익필 형제는 동인들의 천하를 뒤바꾸어 놓으려는 계책을 세웠다. 정여립의 대동계가 그 빌미가 되었다. 더욱이 정여립은 이이를 배반해 서인들의 미움을 사고 있는 터였다. 송익필은 정여립과 함께 이이와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사로 친하게 지내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여립을 잘 알고 있었다. 송한필은 황해도 사람들에게 "전주에 성인이 났으니, 곧 정수찬(鄭修撰)이다. 그는 길삼봉과 서로 친하게 왕래하였는데, 삼봉은 하루 3백리 길을 걸으며 지혜와 용맹이 비랄 데가 없으니 역시 신인이다. 너희들이 만일 가서 볼 것 같으면, 벼슬이 스스로 올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교생 변숭복ㆍ박연령 등이 그 말을 믿고 정여립을 만나니, 여립도 그들을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그런 만큼 변숭복 등이 송한필의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이다. 조구(趙球)가 정여립의 반역을 고발한 것도 송익필 형제의 사주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송익필은 동인을 공격하는 서인의 상소문을 대신 써 주고, 정철을 조종해 정여립 사건을 주도면밀하게 추진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기축옥사를 두고 송익필이 꾸미고 정철이 실행한 사건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기축옥사
10월 8일에 영의정 유전(柳琠), 좌의정 이산해(李山海), 우의정 정언신(鄭彦愼), 판의금부사 김귀영(金貴榮) 등이 재판관[委官]이 되어 죄인들을 심문했다. 고향에 있던 정철(鄭澈)은 송익필ㆍ성혼의 권유를 받고 입궐해 차자(箚子)를 올렸다. 그는 정언신이 정여립의 일가이니 재판관으로 적당하지 않으므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철이 위관이 되어 심문을 담당하게 되었다. 송익필은 정철의 집에 묵으면서 동인 타도를 지휘했다.
정여립과 공모했다는 죄로 이기ㆍ황언윤ㆍ방의신ㆍ신여성 등이 처형되었다. 정여립의 조카 이진길은 "지금 임금의 어두움이 날로 심하다"라고 쓴 편지가 발견되어 매를 맞아 죽었다. 그 와중에 11월 2일, 정언신ㆍ정언지ㆍ이발ㆍ이길ㆍ백유양 등 동인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생원 양천회(梁千會)의 상소가 올라 왔다. 그리고 정여립의 조카 정집의 공초에서도 이들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결국 정언신(鄭彦愼)은 강계로, 이발(李潑)은 종성으로, 이길(李?)은 희천으로, 백유양(白惟讓)은 부령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그 후 12월 12일에 교생 선홍복을 문초할 때, 다시 이발ㆍ이길ㆍ이급(李汲)ㆍ백유양ㆍ이진길ㆍ유덕수 등의 이름이 나왔다. 이들은 다시 잡혀와서 곤장을 맞고 죽었다.
정철은 겉으로는 이발 등을 구하는 척했으나, 뒤로는 갖은 수법으로 이들을 옭아넣으려 했다. 그는 평소 미워하던 사람들을 모두 역당으로 몰아 처단했다. 3년 동안 죽은 자만도 1천여 명이 넘었다. 반면에 정여립의 난을 고변한 박충간 등 22명은 평란공신(平亂功臣)이 되어 관직을 올려받았다. 이 때가 1590년(선조 23) 2월이었다.
기축옥사를 사화(士禍)로 보는 시각이 있다. 기축옥사가 정철을 위시한 서인들의 동인 제거에 이용되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정개청(鄭介淸)은 정여립의 집터를 봐 준 적이 있고, 또 그의 저술 중에 절의(節義)를 배척한 내용이 있다 하여 경원으로 귀양가 죽었다. 심지어 정철은 "개청은 반역하지 않은 여립이요. 여립은 반역한 개청이다"라고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남명 조식(曺植)의 제자 최영경(崔永慶)은 정여립의 편지 한 장을 받은 죄로 길삼봉으로 지목되어 죽었다. 당시 떠돌던 말에 의하면, 길삼봉은 진주에 사는 사람으로 나이는 60이고, 낯은 쇠빛이며 수척하고, 수염은 길어서 배가지 내려가고, 키가 크다고 했다. 어이없게도 최영경의 외모가 비슷하다 하여 길삼봉으로 오인받고 죽어야 했던 것이다.
이발의 82세 된 어머니는 주리를 틀어 죽였다. 그의 11살 된 아들과 5살 된 아들도 죽였다. 좌랑 김빙(金憑)은 바람병이 있어 날이 차면 눈물이 줄줄 흐르곤 했다. 그는 정여립과 썩 좋은 사이가 아니었는데, 여립의 시체를 찢던 날 바람병 때문에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옆에서 이를 백유함은 김빙이 여립의 죽음을 슬퍼해 울었다며 역모로 몰아 죽였다. 이렇듯 기축옥사는 정여립의 역심을 역이용한 정치적인 사건으로, 실로 당쟁 중의 비극이었다.
출전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 동방미디어, 2001, pp.126~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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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is capture ■ 기독교가 전하는 모든 말씀을 잃어버렸다해도 이 말만 기억하면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아멘 - Welcome to Manna Church Theological Forum in Holy City! 이발과 기축옥사
기축옥사의 발단 1589년(선조 22) 10월 2일, 황해감사 한준(韓準)의 비밀 장계가 올라왔다. 정여립(鄭汝立)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고변(告變)은 정여립의 일당으로 안악에 사는 조구(趙球)의 밀고를 받아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이 함경(황해의 잘못?-운영자주)감사에게 보고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고변은 정여립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군사를 일으켜 그 해 겨울에 서울로 쳐들어와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죽이는 한편 교서를 위조해 지방관들을 죽이거나 파직시킴으로써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켜 일을 성사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정여립은 어려서부터 성격이 난폭하고 무도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자신의 악행을 고한 여종의 배를 갈라 죽였는가 하면, 아버지가 현감이었을 시절에는 고을 일을 제 마음대로 처결해 버리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글 읽기에 매진하니, 그 이름이 전라도 지방에 널리 알려졌고, 세간에서는 그를 죽도(竹島) 선생이라 불렀다. 정여립은 기백이 높고 언변이 출중해 좌중을 탄복시키는 일이 많았다. 이 시기에 그는 이이(李珥)ㆍ성혼(成渾)의 문하를 왕래하며 학문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이ㆍ성혼은 정여립이 다소 과격하고 급한 기질이 있음을 늘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박학다식에 탄복하여 조정에 천거하기까지 했다.
1584년(선조 17) 초에는 정승 노수신(盧守愼)에 의해 김우옹(金宇?)ㆍ이발(李潑) 등과 함께 조정에 천거되었다. 또 이발(李潑)ㆍ이길(李?) 형제의 추천으로 사헌부와 홍문관에 발탁되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이이가 죽었다. 그러자 정여립은 이발에게 붙어 서인에서 동인으로 당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 후로는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이이를 나라를 그르치는 소인으로 시종 매도했다. 선조는 이런 정여립을 배은망덕한 자라고 혹평하여 시골로 좇아내 버렸다.
정여립은 임꺽정(林巨正)의 난이 일어났던 황대도 안악에 내려가, 그곳에서 교생 변숭복(邊崇福)ㆍ박연령(朴延齡)ㆍ지함두(池涵斗)와 승려 의연(義衍)ㆍ도잠ㆍ설청 등과 사귀면서 비밀리에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당시 세간에는 "목자(木子=李)는 망하고 전읍(奠邑=鄭)은 흥한다"는 『정감록(鄭鑑錄)』류의 동요가 유행하고 있었다. 그는 그 구절을 옥판(玉板)에 새겨 승려 의연으로 하여금 지리사 석굴 속에 숨겨 두도록 했다. 그리고는 뒤에 산 구경을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처엄 위장해, 변숭복ㆍ박연령 등으로 하여금 자신을 시대를 타고난 인물로 여기게 했다.
수십 년 전에 천안 지방에서는 길삼봉(吉三峯)이라는 자가 화적질을 하고 있었는데, 용맹이 뛰어나 관군이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정여립은 지함두(池涵斗)를 시켜 황해도 지방으로 가서 "길삼봉(吉三峯)ㆍ길삼산(吉三山) 형재는 신병(神兵)을 거느리고 지리산에 들어가고 계룡산에도 들어간다", "정팔룡(鄭八龍)이라는 신비롭고 용맹한 이가 곧 임금이 될 것인데, 머지 않아 군사를 일으킨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했다. 팔룡은 여립의 어릴 때 이름이었다. 소문은 곧 황해도 지방에 널리 퍼져 "호남ㆍ전주 지방에서 성인이 일어나서 만백성을 건져, 이로부터 나라가 태평하리라"는 유언이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정여립은 잡술에도 능해 장차 나라에 변이 일어나게 된다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주ㆍ금구ㆍ태인 등 이웃 고을 무사들과 노비를 모아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해 놓고 있었다. 이 대동계는 왜구가 전라도 손죽도를 침범했을 당시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군사를 지원해 주기도 했다. 왜구를 진압한 후 군대를 해산할 때, 정여립은 훗날 일이 발생하면 각기 군사를 이끌고 모이라고 이르고 군사 명부 한 벌을 가지고 돌아갔다. 정여립의 반역 기미는 그가 입버릇처럼 하고 다녔다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엿보인다.
"천하는 공물이니 어찌 정해 놓은 주인이 있으리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함은 왕촉(王?)이라는 자가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이지 성인의 통론이 아니다." (『연려실기술』 「선조조고사본말」 기축정여립지옥)
의문의 죽음
그러나 1589년 10월 2일, 황해감사 한준(韓準)은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내용의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이에 선조는 정여립의 생질인 예문관 검열 이진길(李震吉)만을 빼고 중신회의를 열었다. 이 때는 이산해(李山海)가 영의정, 정언신(鄭彦信)이 우의정을 맡고, 이발(李潑)ㆍ백유양(白惟讓) 등의 동인들이 득세하고 있을 때였다. 정언신은 정여립을 변호했다. 또 백유양의 아들 백진민(白震民)은 황해도 수령의 절반이 서인이고 또 이이의 제자들이 많은 곳이라 그들의 무고일 지 모르는 만큼, 정여립이 상경하여 입장을 밝힐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재령군수 박충간의 제보에 대해서는 오히려 근거없이 발설한 것이라며 참형에 쳐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서인들은 의기양양해진 반면, 동인들은 위축되기 시작했다. 정여립이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변숭복은 조구가 고변한 것을 알고 안악에서 사흘 반나절만에 금구로 달려가 정여립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정여립은 그 날 밤으로 변숭복, 아들 옥남 등과 함께 진안현 죽도로 달아났다. 금부도사 유금이 덥쳤을 때는 이미 달아난 뒤였다. 이에 진안현감 민인백(閔仁伯)이 관군을 이끌고 정여립을 추격했다. 이들에 둘러싸인 정여립은 먼저 변숭복ㆍ옥남을 친 다음 칼자루를 땅에 꽂아 놓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정여립의 자살로 정국은 돌변했다. 그의 말을 들어 보고 결정하자던 동인들이 설 땅을 잃고 만 것이다. 그가 자살했다면, 혐의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자살했겠는가? 이에 대해서는 정여립이 누군가의 꾐에 빠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만일 꾐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가 관련 문서들을 없애 버리지 않을 리는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꾐에 빠진 것이라면, 유인한 자는 변숭복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정여립은 자살한 것이 아니고 타살 당한 뒤 자살로 위장되었을지 모른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변숭복을 죽인 것도 그에게 유인당한 사실을 알고 처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칼을 거꾸로 꽂아 놓고 자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정여립의 난과 관련하여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이 많다. 그가 도망을 가면서 하필 자신의 연고지인 죽도를 택하고, 더욱이 그 곳으로 간다고 행방을 알린 일부터가 이상하다. 진안현감이 추적한 것도 그래서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이상한 것은 정여립이 도망갔을 것이라고 정철이 미리 말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정여립의 난으로 촉발된 기축옥사는 정여립 본인을 문초한 것도 아니고 단지 그의 집에서 나온 문서들을 근거로 동인들을 일망타진한 사건이었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해 볼 때, 기축옥사는 조작된 사건[誣獄]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모사가 송익필
기축옥사를 조작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인물은 살아 있는 제갈공명이라는 말을 듣던 송익필(宋翼弼)이다. 그는 김장생(金長生)ㆍ김집(金集)의 스승이요 이이와 성혼의 친구이며, 서인의 모사(謀士)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 송사련(宋祀連)은 어머니 감정(甘丁, 堪貞)이 사예(司藝) 안돈후(安敦厚)의 서녀라고 하고, 안돈후가 그의 형 안관후의 여종을 첩으로 삼아 낳은 천첩녀라고도 한다. 감정은 안돈후의 미움을 사 배천(白川)으로 쫒겨갔다가 갑사 송인(宋璘)과 혼인해 송사련을 낳았다. 송사련은 재간이 있고 총명해 안돈후의 아들 안당(安?)의 집안일을 도맡다가, 음양과에 합격해 천문학관을 거쳐 벼슬이 판관(종5품)에 이르렀다.
좌의정을 지낸 안당은 조광조 등 사림들의 진출을 도운 이름 있는 선비였지만, 기묘사화로 파직되었다. 안당의 아들 안처겸(安處謙)은 친구들과 한담하는 자리에서 남곤(南袞)ㆍ심정(沈貞) 등 간신들을 제거하면 나라를 구할 수 있고 사림을 보존할 수 있다고 토로한 바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송사련은 안처겸의 처의 초상 때의 조문록과 발인할 때 역군들의 명부를 가지고 안처겸 등이 대신을 모해하는 모역을 꾸민다고 고변했다. 그러나 송사련은 그 대가로 당상관에 올랐고, 죄인들의 토지와 노비까지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송사련은 부필(富弼)ㆍ익필(翼弼)ㆍ한필(翰弼) 등 세 아들을 두었다. 그 중 특히 익필은 이산해 등과 함께 8문장에 들 정도로 글을 잘 했으며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이이ㆍ성혼과는 너나들이를 하는 사이였는데, 이이가 평생 서얼 허통을 주장한 것도 익필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형제는 아버지인 송사련의 죄과 때문에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서자라고 해서 과거 시험도 보지 못하고, 동인들의 공격을 받아 이름을 바꿔 숨어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 무렵 경기도 교하에 있는 언전(堰田)을 놓고 곽사원과 황유경이 소유권을 다투고 있었다. 곽사원은 바로 송한필의 사위의 아버지였다. 송한필(宋翰弼)은 서인 고관들의 힘을 빌어 곽사원을 지원했지만, 동인들의 맹렬한 반격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안당(安?)의 손자 안윤(安玧)이 동인 이발(李潑)의 사주를 받아, 송사련의 어머니는 안돈후의 딸이 아니라 사노비인 전 남편의 소생이니, 그 자손 70여 명을 모두 노비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발 등은 법의 시한이 지났음에도 그들을 모두 환천시켜 송익필과 친분이 깊었던 서인 정철(鄭澈) 등과 원수가 되었다.
이러한 수모를 당하고 송익필 형제는 동인들의 천하를 뒤바꾸어 놓으려는 계책을 세웠다. 정여립의 대동계가 그 빌미가 되었다. 더욱이 정여립은 이이를 배반해 서인들의 미움을 사고 있는 터였다. 송익필은 정여립과 함께 이이와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사로 친하게 지내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여립을 잘 알고 있었다. 송한필은 황해도 사람들에게 "전주에 성인이 났으니, 곧 정수찬(鄭修撰)이다. 그는 길삼봉과 서로 친하게 왕래하였는데, 삼봉은 하루 3백리 길을 걸으며 지혜와 용맹이 비랄 데가 없으니 역시 신인이다. 너희들이 만일 가서 볼 것 같으면, 벼슬이 스스로 올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교생 변숭복ㆍ박연령 등이 그 말을 믿고 정여립을 만나니, 여립도 그들을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그런 만큼 변숭복 등이 송한필의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이다. 조구(趙球)가 정여립의 반역을 고발한 것도 송익필 형제의 사주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송익필은 동인을 공격하는 서인의 상소문을 대신 써 주고, 정철을 조종해 정여립 사건을 주도면밀하게 추진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기축옥사를 두고 송익필이 꾸미고 정철이 실행한 사건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기축옥사
10월 8일에 영의정 유전(柳琠), 좌의정 이산해(李山海), 우의정 정언신(鄭彦愼), 판의금부사 김귀영(金貴榮) 등이 재판관[委官]이 되어 죄인들을 심문했다. 고향에 있던 정철(鄭澈)은 송익필ㆍ성혼의 권유를 받고 입궐해 차자(箚子)를 올렸다. 그는 정언신이 정여립의 일가이니 재판관으로 적당하지 않으므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철이 위관이 되어 심문을 담당하게 되었다. 송익필은 정철의 집에 묵으면서 동인 타도를 지휘했다.
정여립과 공모했다는 죄로 이기ㆍ황언윤ㆍ방의신ㆍ신여성 등이 처형되었다. 정여립의 조카 이진길은 "지금 임금의 어두움이 날로 심하다"라고 쓴 편지가 발견되어 매를 맞아 죽었다. 그 와중에 11월 2일, 정언신ㆍ정언지ㆍ이발ㆍ이길ㆍ백유양 등 동인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생원 양천회(梁千會)의 상소가 올라 왔다. 그리고 정여립의 조카 정집의 공초에서도 이들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결국 정언신(鄭彦愼)은 강계로, 이발(李潑)은 종성으로, 이길(李?)은 희천으로, 백유양(白惟讓)은 부령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그 후 12월 12일에 교생 선홍복을 문초할 때, 다시 이발ㆍ이길ㆍ이급(李汲)ㆍ백유양ㆍ이진길ㆍ유덕수 등의 이름이 나왔다. 이들은 다시 잡혀와서 곤장을 맞고 죽었다.
정철은 겉으로는 이발 등을 구하는 척했으나, 뒤로는 갖은 수법으로 이들을 옭아넣으려 했다. 그는 평소 미워하던 사람들을 모두 역당으로 몰아 처단했다. 3년 동안 죽은 자만도 1천여 명이 넘었다. 반면에 정여립의 난을 고변한 박충간 등 22명은 평란공신(平亂功臣)이 되어 관직을 올려받았다. 이 때가 1590년(선조 23) 2월이었다.
기축옥사를 사화(士禍)로 보는 시각이 있다. 기축옥사가 정철을 위시한 서인들의 동인 제거에 이용되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정개청(鄭介淸)은 정여립의 집터를 봐 준 적이 있고, 또 그의 저술 중에 절의(節義)를 배척한 내용이 있다 하여 경원으로 귀양가 죽었다. 심지어 정철은 "개청은 반역하지 않은 여립이요. 여립은 반역한 개청이다"라고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남명 조식(曺植)의 제자 최영경(崔永慶)은 정여립의 편지 한 장을 받은 죄로 길삼봉으로 지목되어 죽었다. 당시 떠돌던 말에 의하면, 길삼봉은 진주에 사는 사람으로 나이는 60이고, 낯은 쇠빛이며 수척하고, 수염은 길어서 배가지 내려가고, 키가 크다고 했다. 어이없게도 최영경의 외모가 비슷하다 하여 길삼봉으로 오인받고 죽어야 했던 것이다.
이발의 82세 된 어머니는 주리를 틀어 죽였다. 그의 11살 된 아들과 5살 된 아들도 죽였다. 좌랑 김빙(金憑)은 바람병이 있어 날이 차면 눈물이 줄줄 흐르곤 했다. 그는 정여립과 썩 좋은 사이가 아니었는데, 여립의 시체를 찢던 날 바람병 때문에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옆에서 이를 백유함은 김빙이 여립의 죽음을 슬퍼해 울었다며 역모로 몰아 죽였다. 이렇듯 기축옥사는 정여립의 역심을 역이용한 정치적인 사건으로, 실로 당쟁 중의 비극이었다.
출전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 동방미디어, 2001, pp.126~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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