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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22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 즉사(卽事)
권근(權近)
밤깊어 초생달이 새벽 하늘 비출 때 / 夜深新月照天明
길 가는 이 서로 놀라 부평을 피하나니 / 行路相驚避富平
한(漢)나라의 성제(成帝)가 사복(私服)을 입고 다니면서 스스로 부평후(富平侯)의 가인(家人)이라 일컬었다.
흰 용이 고기 형상으로 변한 경계를 드리지 못해 / 未進白龍魚服戒
간원에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 못내 부끄러워하노라 / 多慙諫院得題名
[주-D001] 즉사(卽事) : 당시에 임금이 사복(私服)으로 밤에 출입하는 것을 두고 지은 것이다.[주-D002] 흰 용이 …… 경계 : 옛날에 백룡(白龍)이 물고기의 형상으로 변하여 못에 나왔더니 고기잡는 예저(豫且)란 사람이 눈을 쏘아 마쳤다. 백룡이 하늘에 올라가서 천제(天帝)에게 호소하니 천제가 묻기를, “그 때에 어떤 형상을 하였더냐.” 하니, 대답하기를, “못에 내려가서 물고기 형상을 하였습니다.” 하므로 천제는, “그러면 물고기는 본시 사람을 쏘아 잡는 것인데, 예저(豫且)가 무슨 죄이냐.” 하였다. 《說苑》
ⓒ 한국고전번역원 | 김달진 (역)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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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선생문집 제4권 / 시(詩) / 즉사(卽事)
밤이 깊어 새 달이 하늘에 비치는데 / 夜深新月照天明
길가에선 서로 놀래 부평후를 피하누나 / 行路相驚避富平
자주: 한 성제(漢成帝)가 미행하면서 부평후(富平侯)의 가인(家人)이라 자칭하였다.
백룡어복 경계를 올리지 못했으니 / 未進白龍魚服戒
간원에 이름 적혀 너무도 부끄럽소 / 多慚諫院得題名
[주-D001] 백룡어복(白龍魚服) : 신령스러운 흰 용이 물고기로 변화하였다가 예저(豫且)라는 어부(漁父)에게 잡힌 일을 말한 것으로, 즉 임금의 미행(微行)의 비유로 쓰인 말이다.《張衡 東京賦》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역) |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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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암집 제22권 / 잠명찬(箴銘贊) / 어병십육폭찬(御屛十六幅贊) 병서
삼가 생각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를 따라서, 옛 성왕(聖王)들의 훌륭한 일들 가운데에서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들과 역대 어리석은 임금들의 나쁜 행실 가운데에서 경계해야 할 것들을 뽑아 옥당의 신하들에게 내려 그림을 그려 16폭 병풍을 만들게 하시고, 또 문형(文衡)을 잡은 신하에게 시(詩)를 지어 병풍 머리에 써서 올리게 하셨으니, 참으로 성대한 일입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은 〈단서(丹書)〉의 경계를 받고 나서 삼가고 두려운 마음으로 글을 지어, 자리, 기둥, 그릇, 궤장 등 눈과 귀가 닿고 손과 발이 닿는 곳에는 모두 명(銘)을 적어서 경계로 삼았습니다. 지금 전하의 이 거조도 당시 무왕의 뜻과 같은 것입니까? 신 현일은 참으로 감격스럽고 기쁜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에 삼가 16폭 병풍에 하나하나 감히 찬(贊)을 지어, 영탄(詠歎)하고 슬퍼도 하여 성주(聖主)의 훌륭하신 교훈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비록 생각이 평범하고 문장이 거칠어, 글을 잘 엮어 풍자를 절실하게 하지는 못했지만, 득실을 비추어 살펴 감발(感發)하고 징창(懲創)하려는 취지에는 혹 작으나마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사유하여, 안으로 반성하거나 같아지기를 생각함으로써 요순(堯舜) 시대와 삼대(三代)를 반드시 본보기로 삼으시고 혼암하던 말세를 반드시 경계로 삼으소서. 그러면 병풍을 만들어 곁에 둔 뜻을 거의 저버리지 않게 될 것이고 어리석은 신이 올리는 하찮은 정성이 조금이나마 보람이 있게 될 것입니다.
비록 그러나 요순 시대와 삼대가 성대했던 까닭은, 정밀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 중도(中道)를 잡으며 곧은 사람을 등용하고 굽은 사람을 버려두며 감히 나태하여 안일하게 지내지 아니했기 때문일 뿐이요, 말세의 혼암한 임금들이 실정(失政)을 했던 까닭은, 자기 욕심대로 멋대로 방종하며 어진 이를 멀리하고 아첨꾼을 가까이하며 안일하고 나태하게 지냈기 때문일 뿐입니다. 성인(聖人)이 되느냐 광부(狂夫)가 되느냐 하는 것은 선(善)을 좋아하느냐 이(利)를 탐하느냐에서 판가름이 나며, 그 기미는 털끝만 한 차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선을 택하여 이치를 밝히고 악을 다스려 선을 온전히 해서 옛날의 훌륭한 임금을 본받아 따르고자 한다면, 그것은 오직 학문을 하여 깨우치고 경(敬)으로 지켜서, 선을 좋아함에는 반드시 얻기를 구하고 악을 미워함에는 결단코 제거하기를 힘쓰는 데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시고 경계하소서. 신 현일은 절하고 삼가 서문을 씁니다.
요 임금이 어진 이에게 정치를 맡겨 치세를 도모하다.〔帝堯任賢圖治〕
한나라 성제가 저잣거리를 미복으로 다니다.〔漢成帝市里微行〕
한나라 황제가 궁궐을 빠져나와 / 漢皇挺身
절제 없이 놀기만 하였네 / 佚遊無節
길을 잘 수리하고 말을 몰더라도 / 惟淸道行
수레가 엎어질까 염려가 되거늘 / 尙虞銜橜
더구나 이 미복 차림이라니 / 矧玆魚服
마루 끝 경계를 아니한단 말인가 / 不戒垂堂
자신의 몸이야 아끼지 않더라도 / 縱不自愛
종묘사직은 어찌하리오 / 其奈宗祊
[주-D025] 미복(微服) 차림이라니 : 오(吳)나라 왕이 미복으로 백성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려 하자, 오자서(伍子胥)가 간하기를, “옛날에 백룡(白龍)이 청령(淸泠)의 연못에 내려와 물고기로 변신하여 있을 때에 어부 예차(豫且)가 작살로 그 눈을 쏘았습니다. 백룡이 천제(天帝)에게 호소하자 천제가 이르기를 ‘물고기는 본디 사람들이 잡아먹는 물건이다. 예차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백룡은 천제가 귀하게 기르는 동물이고 예차는 송(宋)나라의 미천한 어부입니다. 백룡이 변신하지 않았더라면 예차가 눈을 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만승의 지위를 버리고 일반 백성들과 술을 마시려 하시니, 신은 예차의 작살을 맞을까 염려가 됩니다.” 하였다. 백룡어복(白龍魚服)은 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미복 차림으로 출행(出行)하여 뜻밖의 변고를 당할 우려가 있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說苑 卷9 正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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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양집 제9권 / 어제대찬(御製代撰)○치제문(致祭文) 모두 17편이나 10편만 수록한다.
탁지대신 충숙공 어윤중 치제문 경술년(1910, 융희4) 〔度支大臣忠肅公魚允中致祭文 庚戌〕
오호라 경께서는 / 嗚呼惟卿
사회가 국정을 맡았더니 / 士會當國
도적의 무리 흩어져 달아났고 / 群盜逬逸
이강이 궁 내에 있었더니 / 李綱在內
조정이 엄숙하고 맑아졌도다 / 朝著肅淸
기이한 재앙 어찌 생각했으랴 / 何圖奇禍
백룡이 물고기 옷 입으셨도다 / 白龍魚服
안타깝다 끝내 쓰이지 못해 / 惜未究用
조야가 함께 애통해하노라 / 朝野傷衋
[주-D006] 사회(士會)가 …… 달아났고 : 사회는 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부였던 범무자(范武子)의 이름이다. 순림보(荀林父)가 죽자 집정을 담당하면서 교화에 힘을 써서 진나라 도적의 무리들을 모두 진(秦)나라로 도망가게 했다.
[주-D007] 이강(李綱) : 송(宋)나라의 재상으로 여진족에게 침략당하여 국가가 위급할 때에 정승이 되어 국운을 만회하였다.
[주-D008] 백룡이 …… 입으셨도다 : 백룡어복(白龍魚服)은 흰 용이 물고기의 옷을 입는다는 뜻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이 서민의 옷을 입고 미행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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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집(松齋集) 이우(李堣)생년1469년(예종 1)몰년1517년(중종 12)자명중(明仲)호송재(松齋)본관진보(眞寶)
松齋續集卷之二 / 記 / 字民樓重修記 剛州
列於太白山之趾者。皆爲山水之邑。而榮據其南。最得形勝焉。起樓於客館之北。正處其勝。宜以景名。而乃以字民者。去其名而志其實也。宣德年間。永嘉權公詳。綰左符于茲。未數月。民悅財阜。推餘力。先及於修繕。以爲賓慮也。乃擇勝于北。得地厥爽。斸材厥良。民爭子趨。工徒亦奮。越一歲而樓成。監司洪侯汝芳。巡按至郡。慶樓之成。嘉公之理。揭額字民。而作記以寵之。夫以黜陟之公。而記守令之績。其不虛美而取實也。較然矣。吾友權君辨之於公。親孫也。甲戌春。以親故。辭京尹乞外。偶得榮。下車之日。郡人歡欣鼓舞。相與賀曰。今日復得吾太守之孫也。翹然欲見昔年之治。旣思遺愛。又感新化。數載之間。一境煕煕。君一日登樓而歎曰。凡公館之傾毀。爲守令者固修之。況吾先世所創乎。去樓成今已九十餘年。其傾毀。亦且數十年。其間經幾知郡。而不一新之。直待今日。豈非天耶。乃進厥民而告曰。樓乃吾祖與爾祖合謀成者。而頹毀至此。重修之責。不在吾與爾乎。民咸自勵。不約而同。其缺漏之瓦桷。腐撓之板櫺。漫漊之窓壁。一切新之。其營度之功。未半前昔。而晶熒輪奐則倍之矣。以民力爲樓。而民忘其力。則足以改作。而止於修之而已者。欲存桑梓而寓羹墻之念也。嗚呼。公旣以字民之仁。唱之於前。君亦以奉先之孝。和之於後。祖孫繩繩。前後相望。由一家之政。而薰爲一郡之理。治化其可量哉。傳曰。以言敎者訟。以身敎者從。斯非以身敎歟。若登覽之時。望夏畦之病。則思粒粒之苦。見負戴於道。則知役役之勞。因風來而辨雌雄之不同。値暑雨而念小民之怨咨。是亦字民之一助也。且榮爲郡。東與吾禮相近。他日瓜滿還朝。覲省往來。必由於榮。當與君把酒樓上。南望無信塔遺基。松颸憀慄。霜野漫漫。凜凜若鄭習仁闢邪之勁氣。西望浮石寺。巖竇窅冥。紺宇蕭蕭。怳見李寅 甫遭鬼怪而茫慌。覩巿肆而悲駐蹕之荒。問捺已而歎龍魚之諷。是則斯樓瞻眺之勝蹟。而爲吾輩他日探討之一資耳。非有望於字民之主人也。旣以聞於君。退爲之記。
右我先祖松齋先生所作也。今三百有餘年。而樓已無處。記猶見錄於東文選中。此爲子孫無窮之感。而每恨其無所寓也。今吾宗使君彙溥莅是邑。余以爲建是樓而揭是記則善也。勢有所不逮。寧揭于衙軒。以示來者。猶勝於沒沒也。況字民之義。於爲治者。何間於樓與衙也。使君之意。又如是。故敬書記文。又識其下。使君能刻揭。以爲朝夕觀省之地。則當日記勉之意。至此而尤非偶然矣。乙卯重陽日。十代孫漢膺。再拜敬識。
| 李彙溥 | 1809 | 1869 | 眞寶 | 博如, 博汝 | 癡翁 |
| 李漢膺 | 1778 | 1864 | 眞寶 | 仲模 | 敬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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續東文選卷之十四 / 記 / 重修字民樓記[李堣]
| 李堣 | 1469 | 1517 | 眞寶 | 明仲 | 松齋 | 靑海君.퇴계숙부 |
列於太白山之趾者。皆爲山水之邑。而榮據其南。最得形勝焉。起樓於客舘之北。則正處其勝。宜以景名。而乃以字民者。去其名而志其實也。宣德年閒。永嘉權公詳。綰左符于玆。未數月。民悅財阜。推餘力先及於修繕。以爲賓慮也。乃擇勝于北。得地厥爽。斸材厥良。民爭子趨。工徒亦奮。越一歲而樓成。監司洪侯汝芳廵按至郡。慶樓之成嘉公之理。揭額字民。而作記以寵之。夫以黜陟之公而紀守令之績。其不虛美而取實也較然矣。吾友權君叶之。於公親孫也。甲戌春。以親故辭京尹。乞外偶得榮。下車之日。郡人懽忻皷舞。相與賀白。今日復得吾太守之孫也。翹然欲見昔年之治。旣思遺愛。又感新化。數載之閒。一境煕煕。君一日登樓而嘆曰凡公舘之傾毁。爲守令者固當修之。况吾先世所創乎。去樓成今已九十餘年。其傾毁亦且數十年。其閒經幾知郡。而不一新之。直待今日。豈非天耶。乃進厥民而告曰樓乃吾祖與爾祖合謀而成者。而頹毁至此。重修之責。不在吾與爾輩乎。民咸自勵。不約而同。其缺漏之瓦桷。腐撓之板欞。漫漶之窓壁。一切新之。至於梁楶棟礎。可存者仍之。塗墍旣畢。丹艧維新。其營度之功。未半前昔。而晶熒輪奐則倍之矣。以民力爲樓。而民忘其力。則足以改作。而止於修之而已者。欲存桑榟而寓羹墻之念也。嗚呼。公旣以字民之仁。唱之於前。君亦以奉先之孝。和之於後。祖孫繩繩。前後相望。由一家之政。而薰爲一郡之理。治化其可量哉。傳曰以言敎者訟。以身敎者從。斯非以身敎歟。然則是樓也。其不爲貯聲色揭日月之所也無疑矣。若登覽之時。望夏畦之病則思粒粒之苦。見負戴於途則知力役之勞。因風來而辨雌雄之不同。値暑雨而念小民之怨咨。是亦字民之一助也。且榮爲郡。東與吾禮相近。他日瓜滿還朝。省親往來。必由於榮。當與君把酒樓上。
南望無信塔遺基。松颸憀慄。霜野漫漫。澟澟若鄭習仁闢邪之勁氣。
西望浮石寺。巖竇窅冥。紺宇蕭蕭。怳見李寅甫遭鬼恠而茫慌。
覩市肆而悲駐蹕之荒。問捺己而嘆龍魚之諷。是則斯樓瞻眺之勝蹟。而爲吾輩他日探討之一資耳。非有望於字民之主人也。旣以聞於君。退爲之記。
속동문선 제14권 / 기(記) / 중수자민루기(重修字民樓記)
이우(李堣)
태백산 기슭에 늘어 있는 고을은 모두 산수(山水)가 아름다웠는데, 영천(榮川)이 그 남쪽에 웅거하여 최고의 형승을 얻었다. 객관(客館) 북쪽에 누(樓)를 지으매 정히 그 아름다운 곳에 처하였으니, 의당 그 경치로서 이름을 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제 자민(字民)으로 한 것은 그 헛된 이름을 버리고 그 실상을 기록한 것이었다. 선덕(宣德) 연간에, 영가(永嘉)권공상(權公詳)이 이 고을의 원이 된 지 몇 달이 되지 않아서 백성들이 기뻐하고, 재정이 풍부하기에 남은 힘을 미루어 먼저 수리에 착수하였으니 빈객을 위함이었다. 이어 그 북쪽에 아름다운 곳을 골라서 상쾌한 땅을 얻고 좋은 재물을 다듬으매, 백성은 아들처럼 다투어 이루고, 장인이 역시 힘을 써서 한 해가 넘어 누가 이룩되었다. 감사(監司) 홍여방(洪汝芳)후가 순찰길에나 이 고을에 이르러 누가 이룩됨을 경사롭게 알고 권공의 치적을 아름답게 여겨 자민이란 액자(額字)를 걸고 기문을 지어서 총애하였으니, 대개 척(黜陟)의 공평된 책임으로서 수령의 업적을 기록하였는 만큼 그 헛되게 칭도하지 않고 실사를 취하였음은 밝은 일이었다. 나의 벗 권협지(權叶之)군은 권공의 친손이다. 갑술년 봄에, 어버이를 모시기 위하여 경윤(京尹)을 사직하고 외직을 빌어 우연히 영천을 얻었다. 수레에서 내리던 날 고을 사람들이 기뻐서 북을 치고 춤추며 서로 더불어 축하하기를, “오늘에 다시금 우리 태수의 손자를 얻었구려.” 하여, 지난해의 치적을 희망하여 이미 그 유애(遺愛)를 추모하고 또 새로운 교화에 감화되어 몇 해 사이에 한 경내가 안락하였다. 권군이 어느날 누에 올라 탄식하기를, “무릇 공관(公館)이 허물어짐은 수령된 자가 의당 수리를 하거늘 하물며 우리 선세에서 창건한 것일까보냐. 누가 이룩된 지가 지금부터 이미 90여 년이었고, 그 퇴폐하여진 지도 역시 몇 10년이나 되었으며, 그 사이에 몇 번이나 원이 갈렸으나 한 번도 중신하지 않고 줄곧 오늘을 기다렸으니, 어찌 하늘의 의도가 아니겠는가.” 하고, 백성을 불러 고하기를, “이 누는 나의 할아버지요, 너희 할아버지께서 꾀를 합쳐서 이루어진 것인 바 이제 퇴폐함이 이 경지에 이르렀으니, 중수할 책임이 나와 너희들에게 있지 않겠는가.” 하였더니, 백성들이 모두 스스로 힘을 써 약속하기 전에 합심이 되어 그 이지러진 와각(瓦桷)과 썩고 흔들리는 판영(板楹)이나 더러운 창벽(窓壁) 등을 일체 새롭게 하고, 심지어는 들보와 기둥과 주초에 이르기까지도 둘 것만을 그대로 두었다. 도벽이 끝나고 단청이 새로워진 뒤에 그 경영한 공비가 옛날에 비하여 반액도 되지 않았으나 바꾸어진 그 빛이 배나 찬란하였다. 대체 백성의 힘으로서 누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백성이 그 수고를 잊었으니, 족히 개조(改造)할 수도 있거니와 다만 수리에만 그치는 이는 상자(桑梓)를 남겨 두어 갱장(羹墻)의 생각을 붙일 것이다. 아, 슬프외다. 권공이 이미 백성을 사랑하는 그 인(仁)으로 앞에 불렀으매 권군이 역시 조상의 뜻을 받드는 것으로 뒤에 화답하여 조손(祖孫)이 있고 이어 앞뒤에 서로 바랐으니[望], 이는 한 집안의 정사로서 한 고을의 다스림을 이룩함이니 그 치화(治化)를 가히 칙량할 수 있었는가. 전(傳)에 이르기를, “말로서 가르치면 송사가 일고, 몸으로서 가르치면 따른다.” 하였으니, 이것이 몸으로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이 누는 성색(聲色)을 저장하고 일월(日月)을 내어 붙이는 곳이 아니었음에 의심이 없을 것이요, 만일 올라 볼 제, 여름 이랑에 병든 백성을 보고는 곡식 한 알 한 알에 백성의 괴로움을 생각할 것이요, 길에서 지고 이고 다니는 것을 보고는 부역에 시달린 괴로움을 알 것이며, 바람이 오는 것을 보고는 자웅(雌雄)의 같지 않음을 분간하고, 더위와 비를 만나면 세민(細民)들의 원망과 탄식을 생각할 것이니, 이도 역시 백성을 사랑하는 일에 한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영천이란 고을은 동쪽으로 우리 예안(禮安)과 서로 가까우니, 뒷날 임기가 차서 조정으로 돌아갈 때 어버이를 뵙기 위하여 왕래를 할 제는 반드시 영천을 경유할 터이니, 그대와 더불어 누 위에서 술잔을 잡고 남쪽으로 무신탑(無信塔)의 끼친 터를 바라보면, 솔바람이 쌀쌀하여 마치 정습인(鄭習仁)의 벽사(闢邪)하던 굳센 기운인 듯 싶겠고,
서쪽으로 부석사(浮石寺)를 바라보면 바위 틈이 아득히 어둡고 절이 소쇄하여 마치 이인보(李寅甫)가 귀신을 만나서 당황함을 보겠고,
시사(市肆)를 보고도 주필(駐蹕)하였던 곳이 황폐함을 슬퍼할 것이고,
날기(捺己)를 물어서 용어(龍魚)의 풍유를 탄식할 것이니, 이는 곧 누에서 보는 아름다운 고적이었고 우리들이 뒷날 탐토(探討)할 하나의 자료일 뿐인 만큼 자민루의 주인에게 바랄 것은 아니리라. 이미 이것으로써 권군에게 들려주고는 물러나와서 기문으로 짓노라.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9
南望無信塔遺基。松颸憀慄。霜野漫漫。澟澟若鄭習仁闢邪之勁氣。
西望浮石寺。巖竇窅冥。紺宇蕭蕭。怳見李寅甫遭鬼恠而茫慌。
覩市肆而悲駐蹕之荒。問捺己而嘆龍魚之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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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 행의사(行衣寺) 군 서쪽 20리에 있다. 흑석사(黑石寺) 군 남쪽 15리에 있다. 응석사(凝石寺)ㆍ정불사(淨佛寺)ㆍ
부석사(浮石寺) 모두 봉황산(鳳凰山)에 있다. ○ 궁예(弓裔)가 일찍이 이 절에 이르러 벽화(壁畫)에 그려진 신라왕의 상(像)을 보고 칼을 뽑아 쳤는데, 고려(高麗) 때에 와서도 그 흔적이 그냥 있었다. 이것은 생시에 버림을 당했던 것을 원망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 《보한재집(補閑齋集)》에 “고려 사천감(司天監) 이인보(李寅甫)는 경주도(慶州道) 제고사(祭告使)로서 산천(山川)을 돌며 제사지냈는데, 일이 끝나 장차 돌아가려던 저녁에 부석사(浮石寺)에 닿았다. 객우(客宇)가 조용하고 좌우에 사람이 없었는데, 홀연히 한 여인이 언뜻 마루 사이로 보이더니 좀 뒤에 춤추듯 마당을 돌아와서 절을 했다. 절을 마친 뒤에 섬돌을 올라 방에 들어와 앉았다. 사천감은 비록 괴이하게 생각했지만 자색(姿色)이 뛰어났으므로 차마 거절치 못했다. 여인이 말하기를, ‘제가 사는 곳은 여기서 멀지 않아요. 높으신 뜻을 혼자 사모해서 왔습니다.’ 하고, 그 응대(應對)함이 총민하였다. 사흘 묵고 떠나서 우정(郵亭)에 숙박했는데, 여인이 하느적하느적 따라왔다. 사천감이 말하기를, ‘왜 또 왔소.’ 하였더니, 여인이 말하기를, ‘뱃속에 당신의 애기가 있어요. 다시 하나를 더하고자 해서 온 것이어요.’ 하였다. 새벽이 되자 작별을 고하고 흥주(興州)로 들어갔다.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여인이 또 왔다. 사천감은 후환이 될까 해서, 여인을 보고도 모르는 척하고 상대하지 않았더니 여인은 발끈 골을 내면서 방문을 나가는데, 회오리 바람이 땅을 말아올려 집의 문짝 하나를 부서뜨리고 나뭇가지를 꺾어놓고는 갔다.” 하였다. 『신증』 당 나라 고종(高宗 이치(李治)) 의봉(義鳳) 1년에,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스님 의상(義相)에게 하명하여 이 절을 창건하고 부석(浮石)이라 이름지었다. 동쪽에는 선묘정(善妙井)이, 서쪽에는 식사룡정(食沙龍井)이 있는데, 가물 때 기도드리면 감응이 있었다. ○ 박효수(朴孝修)의 시에, “새 울고 꽃 져서 꽃다운 나이 이우는데, 나그네 길 시간은 빨리도 가네. 어느 날 마셔보리, 용정(龍井) 물 차맛을, 마루에 가득한 솔과 달 인연을 함께 하고자.”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5권 / 경상도(慶尙道) 영천군(榮川郡)
佛宇
行衣寺。在郡西二十里。
黑石寺。在郡南十五里。
凝石寺,淨佛寺,浮石寺。俱在鳳凰山。○弓裔嘗至此寺,見壁畫新羅王像,拔劍擊之,至高麗時,其刃跡猶在。蓋怨生時見棄也。○《補閑齋集》:“高麗司天監李寅甫以慶州道祭告使,歷祀山川,旣畢將還,暮抵浮石寺。客宇蕭然無左右,忽有女乍見廊廡間,少選蹁躚來庭下拜之。拜訖,升自階往就室居焉。監雖怪之,以姿色絶代,不忍拒也。女曰:‘妾所居,去此不遠。竊慕高義以來。’ 其應對惠利。爲留三日而出,止郵亭宿焉,女苒苒來。監曰:‘何復來爲?’ 女曰:‘腹有君之息一矣。乞復添一,所以至耳。’ 比曉告別,行入興州。將宿,女復來,監恐爲後患,遂面之而不省。女怫然作色,卽出戶,回風卷地,擊毁廳事間一扉,截樹杪而去。” 〔新增〕 唐高宗儀鳳元年,新羅文武王命僧義相刱是寺,名曰浮石。東有善妙井,西有食沙龍井,旱則禱雨,有應。○朴孝修詩:“鳥啼花落減芳年,客路光陰去忽然。何日試茶龍井水?滿軒松月共夤緣。”
古跡
善谷縣。金富軾云:“本高句麗買谷縣。新羅景德王改名,屬奈靈郡。今未詳。”
無信塔。郡有塔,名曰無信。恭愍朝,鄭習仁爲知郡,曰:“異哉!惡木不息,盜泉不飮,惡其名也。烏有巍然其形,爲一邑所瞻視,而以無信表之者?” 命刻日夷之,用其甎修賓館。辛旽聞而怒,繫鷄林獄,移繫典法,欲置死地。廷臣憐之,營救得免,廢爲庶人。
市肆基。新羅王駐蹕于玆,久而乃返。市肆之基,在今郡西二里。
捺已郡。新羅炤智王幸此郡,郡人波路有女碧花,年十六,美而艶。其父盛飾之,置輿中,羃以色綃獻之。王以爲饌物,開視卽美女也。其後屢微行至其第。幸之路經古陀郡,宿於一老嫗家,問曰:“國人以王爲何如?” 主嫗曰:“衆以爲聖人,妾獨疑之。竊聞王幸捺已女,屢微服而來。夫龍變魚服,爲漁者所制。今王以萬乘之尊,不自愼重,此以爲聖,孰非聖乎?” 王聞之大慙,潛逆其女,置於宮中。
名宦
高麗 鄭習仁。恭愍朝以典校令出知州。將視事,吏以故事,請詣消災圖焚香。習仁曰:“人臣不蹈非彝,災何由生?若其無妄,順受而已。” 命吏撤去。
本朝 河崙。知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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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25권 / 경상도(慶尙道) / 영천군(榮川郡)
동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7리, 예안현(禮安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51리, 남으로 안동부 경계에 이르기까지 41리, 서로 풍기군(豐基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12리, 북으로 풍기군 경계에 이르기까지 14리, 서울에서의 거리는 4백 3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내이군(奈已郡)이다 내(奈)는 날(捺)로 된 것도 있다. 신라(新羅) 파사왕(婆娑王)이 취했고, 경덕왕(景德王)이 내령군(奈靈郡)이라 고쳤다. 고려(高麗) 성종(成宗)이 강주단련사(剛州團練使)라 고쳤고, 현종(顯宗)은 길주(吉州)에 귀속시켰더니, 인종(仁宗)이 순안현령(順安縣令)이라 고치고, 고종(高宗)이 위사공신(衛社功臣) 김인준(金仁俊)이 살고 있는 시골이라 하여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승격시켰다.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따라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세조(世祖) 3년에 순흥(順興)을 없애버리고, 마아령(馬兒嶺) 아래 물 동편 땅인 부석(浮石)ㆍ무짐이[水息]ㆍ관천(串川)ㆍ파문단(破文丹) 4리(里)를 끊어서 이 군에다 귀속시켰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내이(奈已)ㆍ내령(奈靈)ㆍ강주(剛州)ㆍ순안(順安)ㆍ영주(榮州)ㆍ귀성(龜城)
【불우】 행의사(行衣寺) 군 서쪽 20리에 있다. 흑석사(黑石寺) 군 남쪽 15리에 있다. 응석사(凝石寺)ㆍ정불사(淨佛寺)ㆍ부석사(浮石寺) 모두 봉황산(鳳凰山)에 있다. ○ 궁예(弓裔)가 일찍이 이 절에 이르러 벽화(壁畫)에 그려진 신라왕의 상(像)을 보고 칼을 뽑아 쳤는데, 고려(高麗) 때에 와서도 그 흔적이 그냥 있었다. 이것은 생시에 버림을 당했던 것을 원망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 《보한재집(補閑齋集)》에 “고려 사천감(司天監) 이인보(李寅甫)는 경주도(慶州道) 제고사(祭告使)로서 산천(山川)을 돌며 제사지냈는데, 일이 끝나 장차 돌아가려던 저녁에 부석사(浮石寺)에 닿았다. 객우(客宇)가 조용하고 좌우에 사람이 없었는데, 홀연히 한 여인이 언뜻 마루 사이로 보이더니 좀 뒤에 춤추듯 마당을 돌아와서 절을 했다. 절을 마친 뒤에 섬돌을 올라 방에 들어와 앉았다. 사천감은 비록 괴이하게 생각했지만 자색(姿色)이 뛰어났으므로 차마 거절치 못했다. 여인이 말하기를, ‘제가 사는 곳은 여기서 멀지 않아요. 높으신 뜻을 혼자 사모해서 왔습니다.’ 하고, 그 응대(應對)함이 총민하였다. 사흘 묵고 떠나서 우정(郵亭)에 숙박했는데, 여인이 하느적하느적 따라왔다. 사천감이 말하기를, ‘왜 또 왔소.’ 하였더니, 여인이 말하기를, ‘뱃속에 당신의 애기가 있어요. 다시 하나를 더하고자 해서 온 것이어요.’ 하였다. 새벽이 되자 작별을 고하고 흥주(興州)로 들어갔다.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여인이 또 왔다. 사천감은 후환이 될까 해서, 여인을 보고도 모르는 척하고 상대하지 않았더니 여인은 발끈 골을 내면서 방문을 나가는데, 회오리 바람이 땅을 말아올려 집의 문짝 하나를 부서뜨리고 나뭇가지를 꺾어놓고는 갔다.” 하였다. 『신증』 당 나라 고종(高宗 이치(李治)) 의봉(義鳳) 1년에,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스님 의상(義相)에게 하명하여 이 절을 창건하고 부석(浮石)이라 이름지었다. 동쪽에는 선묘정(善妙井)이, 서쪽에는 식사룡정(食沙龍井)이 있는데, 가물 때 기도드리면 감응이 있었다. ○ 박효수(朴孝修)의 시에, “새 울고 꽃 져서 꽃다운 나이 이우는데, 나그네 길 시간은 빨리도 가네. 어느 날 마셔보리, 용정(龍井) 물 차맛을, 마루에 가득한 솔과 달 인연을 함께 하고자.” 하였다.
【고적】 선곡현(善谷縣)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본래 고구려의 가곡현(賈谷縣)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치고 내령군(奈靈郡)에 귀속시켰다.” 하였다.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무신탑(無信塔) 군(郡)에 무신(無信)이란 탑이 있다. 공민왕(恭愍王) 때, 정습인(鄭習仁)이 지군(知郡)으로 있으면서 말하기를, “이상하도다. 악목(惡木)에서는 쉬지 않고 도천(盜泉)은 마시지 않는다 하니, 이는 그 이름이 나쁘기 때문이다. 탑은 고을에서 쳐다볼 수 있게 우뚝 서 있는 것인데, 어찌 무신(無信)을 표방한단 말인가” 하고서, 쪼아 없애게 하고는 그 벽돌로 빈관(賓館)을 지었다. 신돈(辛旽)이 이를 듣고 노해서 계림옥(鷄林獄)에 구속하고 다시 전법(典法)으로 얽어 사지(死地)에 처치하려고 했다. 정신(廷臣)들이 가련히 여겨 이를 구원해 주었으나 서인(庶人)으로 폐했다. 시사기(市肆基) 신라 임금이 이곳에 오랫동안 주필(駐蹕)하다가 돌아갔다. 시사(市肆)의 터는 지금 군 서쪽 2리에 있다. 날이군(捺已郡) 신라 소지왕(炤智王)이 이 군에 행행(行幸)했다. 고을 사람 파로(波路)에게 벽화(碧花)란 16세 된 딸이 있었는데, 예쁘고도 고왔다. 그 아비가 이를 잘 꾸며서 가마에 태우고 빛깔 고운 비단으로 휘장을 두르고서 임금께 바쳤다. 임금이 찬물(饌物)이라고 여기고 열어보니 미녀였다. 그 뒤로는 여러 번 그 집으로 미행(微行)했다. 중도에 고타군(古陁郡)이 있는데, 하루는 한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다. 묻기를, “나랏사람들은 임금을 어떻다고 하오.” 하니 노파가 말하기를, “모두들 성인(聖人)이라고들 하지만, 저만은 이 말을 의심스럽게 여깁니다. 듣건대, 임금께서 날이(捺已)의 계집에게 가노라고 누차 미복(微服)으로 다닌다고 합니다. 무릇 용(龍)이 고기의 옷을 입고 있으면 어부에게 제어당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임금께서는 만승(萬乘)의 존엄으로써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를 성인(聖人)이라 한다면 성인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부끄러이 여기고, 남몰래 그 계집을 데려다 궁중에 숨겨 두었다.
【명환】 고려 정습인(鄭習仁) 공민왕(恭愍王) 때, 전교령(典校令)으로 지주(知州)로 나갔다. 시무(視務)하려 할 제, 아전이 고사(故事)에 따라 소재도(消災圖)를 찾아가 향을 사를 것을 청하였다. 습인이 말하기를, “인신(人臣)이 불륜(不倫)한 일을 하지 않거늘 재앙이 어떻게 생긴단 말인가. 무망(無妄)하기보다는 순수(順受)할 뿐이다.” 하고서 아전에게 명하여 철거시켰다.본조 하륜(河崙) 지주(知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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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개요
사용자가 제시한 '날기(捺己)'와 '용어(龍魚)'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와 《동문선(東文選)》 등에 기록된 신라 소지마립간(소지왕)의 벽화 부인 일화와 관련된 고사성어 및 고적지 표현입니다. [1, 2]
이 두 단어는 '왕이 위엄을 잃고 미복(평민 복장)으로 잠행하다가 위기를 맞거나 경고를 받음'을 비유하는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을 가리킵니다. [1, 2]
1. 사건의 배경 (삼국사기 기록)
| • 날기군(捺己郡):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지역을 뜻하는 고구려·신라 시대의 지명입니다. • 사건: 서기 500년(소지왕 22년) 가을 9월, 소지왕이 날기군(捺己)에 행차했다가 그곳의 미녀인 벽화(碧花)를 보고 첫눈에 반하게 됩니다. 궁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녀를 잊지 못한 왕은 주변의 눈을 피해 평민의 옷을 입고(微服) 자주 날기군으로 잠행을 나갔습니다. |
2. '용어(龍魚)' 비유의 유래
소지왕이 미복 잠행을 하던 중 고타군(古陁郡, 지금의 안동)을 지나다가 한 노파의 집에서 묵게 되었습니다. 왕이 신분을 숨기고 노파에게 "지금 백성들은 국왕을 어떤 임금이라 하더냐?"라고 묻자, 노파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며 왕을 크게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1, 2]
| "모두가 성군이라 하지만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들리는 말에 왕이 날기군(捺己)의 여자를 좋아하여 자주 미복으로 오간다고 합니다. 대저 용이 물고기의 옷을 입으면(龍爲魚服, 용위어복) 어부에게 붙잡히는 법입니다. 지금 왕께서 만승의 높은 자리에 계시면서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시니, 이를 성인이라 한다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습니까?" [1, 2] |
이 말을 들은 소지왕은 크게 부끄러워하며(大慙) 다시는 미복 잠행을 하지 않고, 벽화 여인을 궁중의 별실로 몰래 불러들여 살게 하였습니다. [1, 2]
3. 문학적 의미와 활용
조선 시대의 문신 서거정 등이 엮은 《속동문선(續東文選)》 등 후대의 한시나 기문(記)에서는 이 고사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탄식하곤 했습니다.
| "날기(捺己)를 물어서 용어(龍魚)의 풍유를 탄식한다" |
궁금하셨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혹시 이와 관련하여 소지왕이나 벽화 부인의 뒷이야기, 혹은 해당 지명(영주 고적)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부분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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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암집(敬菴集) 이한응(李漢膺)생년1778년(정조 2)몰년1864년(고종 1)자중모(仲模)호경암(敬菴)본관진보(眞寶)특기사항이수영(李秀榮), 강필효(姜必孝), 유정문(柳鼎文), 이병원(李秉遠) 등과 교유
敬菴先生文集卷之五 / 書 / 答溥汝 乙卯
| 정조 | 18 | 1794 | 갑인 | 乾隆 | 59 | 17 | 이중연의 상을 당하다. |
| 철종 | 6 7 | 1855 1856 | 병진 | 咸豐 | 5 6 | 78 79 | 答溥汝 乙卯 겨울, 계재에서 문인들이 모여 「續近思錄」을 통독하고, 姜獻奎 등이 교감하다. |
承審歸侍有日。尊府康福。承歡養志。斯其極矣。深賀。但聞已還衙。想多離違之情。而亦勢也。旣而司牧則入而養親。出而治民。豈非忠孝兩全之道乎。諭以前書不提行止。以爲外之。何以則內之。勸其尙志拔俗。投紱高臥則以爲內乎。天下之義理無窮。而出處尤
當審處。如吾使君不必以是自高。非惟世祿。尊府台監之蒙恩。逈別於他。及其引年告退。朝廷爲其惠養而除以道邑。則在我感祝之道。何敢以超脫爲快哉。且或政不從心。事多拂亂。徒費廩而蔑治效。其在私分。亦甚未安。而似聞自從下車。吏戢而民懷。上而得於使司。下而成其治化。在我而無
簣之理。在人而有相望之情。何可勸之以遽然决歸耶。抑有一言。昔陳觀瀾有爲政三說曰久任超遷不拘品類。皆是切要之言也。愚未知今者三說之見行與否。而大抵久任似尤緊。自古治世之政。皆如是也。葢頻數遞
代則雖有仁心惠政。難以成效。豈非可惜者乎。今使君之任。不記幾何。而猶有餘限。則寧不宜優容拊摩。以卒其惠乎。又將行鄕飮禮。此尤今世所希聞者。何其盛也。葢斯禮也。先王立敎興化之法。聖人所謂觀於鄕而知王道之易易者也。自周以下。興廢無常。吾南以鄒魯著稱。想多懿蹟。而泯然無徵。惟寒岡鄭先生行於本府。而此則未及環橋而觀焉。其後至正廟朝。頒下鄕禮通編於州郡。使之遵行。而近世尹公光顔。行之於營。尹公魯東知府亦行之。吾始得見之。而更未有聞焉。每閒居潛歎。以爲敬老尊賢之風遂
以廢矣。不意今者乃有斯人。而能是將見治聲和氣洋洋充滿於籩豆杯爵之間。而丹之民士。將有日遷善而不知者。豈非盛哉。雖然。禮不徒行。必講學而後理明。理明而後禮行也。當日禮畢而後。須與賓介以下諸名勝。抽籤經傳。從容講劘。以相開發而有明焉。則是禮也。乃不歸弁髦與文具耳。尤何幸之可勝哉。老拙本是蒙然。其器數位次進退拜揖。皆未曾檢驗。而但於遺編爛簡。略有所覷得焉。今欲條擧以副所須。則只將素嘗標識者謄付。但通攷則本是二十三目。葢周古禮也。鄕禮合編則合鄕飮儀式。鄕約條列。
故爲三十一條。而又是時王之制。則兼講鄕約。尤爲美事。依而行之。未知如何。於乎休哉。治之三年。百廢俱興而境內無事。加之以禮敎。申之以孝悌。薰沐涵濡。以成治功則亦可謂知所本矣。傍人之嗤點。何足恤哉。不虞之譽。求全之毁。自古不免。是則付之世道而已。惟我本地。或無絲毫之纇乎。以是慥慥。無敢所忽則庶幾哉。歐陽子述其考崇公阡表曰。嘗燭而治官書。累廢而歎。其夫人問則曰此死獄也。欲求其生而不得。曰生可求乎。曰求其生而不得。則死者與我。皆無憾也。矧求而有得耶。求其生。猶失之死。世常求
其死也。余每讀至此。未嘗不發省而歎也。今使君當此責。故爲擧以聞。牧民者。存此心不失。則寧無所濟乎。大抵人心。久則易變。煩則易怠。使君之爲治。已過累考。米鹽之苦。不免惱撓。則或不無弛懈之慮。幸拔起神心。惕勵加勉。以圖有終。始可謂之不負初心。而亦有光於鄕飮之擧也。然後浩然而返。則正老先生所謂地上亦有神仙。投紱歸來之日是也者也。此非吾人之所共增氣處乎。愚之累累不知止者。實有以也。
[주-D001] 溥 : 博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