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7월 26일(금) 이사야 8:1-4 찬송 425장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가지고 그 위에
통용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
2.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언하게 하리라 하시더니
3. 내가 내 아내를 가까이 하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4.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겨질 것임이라 하시니라
(개역 개정)
-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징조 -
오늘 말씀은 임마누엘의 징조를 통하여 북이스라엘·아람 연합군의 멸망과
남유다의 구원에 대한 예언(7:3-16)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신앙으로 역사의 참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눈에 당장 보이는 세상 제국인 앗수르를 의지하고 있는 아하스 왕에게
다시금 ‘마헬살랄하스바스(Maher-Shalal-hash-baz)’의 징조를 주고 있는 장면이다
먼저 이사야는 큰 서판에다가 ‘탈취를 급히, 약탈은 속히’라는 뜻의
단어 ‘마헬살랄하스바스’를 써서 그것을 제사장 우리야와 스가랴로 하여금
아하스 왕에게 전하게 하고(1-2절) 그런 후 이사야는 둘째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역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함으로써 거듭 그말에 담긴 뜻대로
아람의 수도 다메섹과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의 멸망 예언을 확증하였다.(3-4절)
하나님께서 이렇게 거듭하여 아하스에게 징조를 주시는 이유는
첫째, 조만간에 있을 앗수르에 의한
다메섹의 멸망(B.C.732년)과 사마리아의 멸망(B.C.722년)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임을 깨닫게 함으로써
결국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마지막 순간까지라도 아하스와 유다 백성이 불신앙에서 돌이켜
구원받도록 하기 위한 사랑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주어지고 있는 것인 바
늘 그분의 사랑안에 거할 수 있도록
거룩과 성결의 삶을 살도록 더욱 힘써야 한다.(요일4:16, 21)
2절)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언하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은 마헬살랄하스바스 징조의 진실성을 보장하는 방편으로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세우도록 두 증인으로 지시하셨다.
여기서 스가랴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우리야는 아하스 당시의 대제사장이 분명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사장 우리야에 대하여 ‘진실한 증인’이라고 말씀한다.
즉 우리야는 적어도 하나님께서 마헬살랄하스바스 징조를 보이시기 전까지
곧 아직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유다를 침공하기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께서조차 인정하시고 증인으로 세우실 정도로 진실한 사람이었다.
타락한 유다 사회에서 대제사장이 이렇게 진실하였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 우리야에 관련된 대단히 실망스런 기사를 보게 된다.
열왕기하 16장을 보면 아하스는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유다를 침공하여 오자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에게 많은 예물을 보내며 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디글랏빌레셀은 아람을 쳐서 정복하고 아람 왕 르신을 죽였다.
이에 아하스는 디글랏빌레셀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하여
그가 머물러있던 다메섹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한 우상의 제단을 보게 된다.
아하스는 그 우상의 제단의 구조와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어 그대로 제작하게 하였다.
그런데 우리야는 대제사장으로서
아하스의 그러한 요구에 대하여 어떠한 책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요구를 그대로 따라 우상의 제단을 만듦으로써
아하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 제단에서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데 일조하였다.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실 만큼 진실하였던 우리야가
왜 이렇게 변절을 하게 되었는지 그 명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은 아무리 한때 신실한 신앙인이라도
얼마든지 변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것은 바울을 도와 복음 전파 사역에 헌신하였던
데마의 변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딤후4:10)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야나 데마의 변질, 그리고 그 외에 진실하였던 성도들의 변질은
모두 그들이 지닌 인간적인 연약한 때문이다.
그들의 신앙이 처음부터 진실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도 분명 한때는 진실하였다.
그러나 인간적인 연약함이 그들의 신앙을 변질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동일하게 연약한 인간성을 지닌 우리들도
얼마든지 변질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께 우리의 믿음이 변질되지 않도록 붙드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변질시킬 수 있는 부패한 요소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늘 각성하고 경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딤전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