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15) 허망한 발길을 돌리며
이튼날 아침,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은 영천으로 몰고 왔던 군사들을 수습하여, 다시 노식 장군이 있는 광종으로 길을 떠났다.
어제는 동쪽 싸움터에서 오늘은 서쪽 싸움터로! 고달픔 여정에, 누구 하나 대견스럽게 여겨 주지도 않는 군사 천오 백명을 거느리고 삼형제는
또다시 머나먼 정도에 오른 것이었다.
"어때, 하룻밤 자고 나니 기분이 좀 풀렸는가?"
관우는 마상에서 장비에게 물었다.
"아니오, 아직도 분이 안 풀렸소."
장비가 볼멘 소리로 대답한다.
"그러고 보면, 나라가 이꼴이 된 것은 관리들이 올바르지 못한 탓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네. 조정에 있는 장군이나 관리들 중에 주전과 같은 자들이 수두룩할 거야."
관우는 장비를 위로하는 말을 건넸다.
관우와 장비가 이런 말을 주고 받으며 어느 산중을 지날 무렵, 저만치서 한떼의 함차(檻車)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게 웬 함차일까?"
"누가 무슨 죄를 짓고 끌려가는 것인가?"
함차를 호송하고 있는 군사는 틀림없는 관군이었다.
유비, 관우, 장비 세 장수는 말을 타고 지나가며 함차 속을 들여다 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속에 들어앉아 있는 사람은 지금 자기네들이 만나러 가는 노식 장군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유비는 크게 놀라며 관우, 장비와 함께 말에서 뛰어내려 수레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함차를 호송해 오던 책임자가 앞을 가로막으며,
"누군데 함차 가까이 오는 것이냐?"
하고 힐난했다.
유비는 호송관을 향해 머리를 숙여 보이며 호주머니에서 약간의 뇌물을 내주며 물었다.
"저 함차 속에 앉아 계신 분이 누구십니까?"
호송관은 관군 장수의 복장을 하고 묻는 유비를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저분은 어제까지도 광종에서 황건적을 토벌하시던 중랑장 노식 장군이오."
"네? 그래요? 그런데 저 분은 저의 스승이시니 제가 잠깐만 만나 뵙게 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호송관은 금방 뇌물을 받아먹었는지라 부하들에게 말했다.
"애들아! 잠깐 쉬어 가자! "
하고 말했다.
함차가 그자리에 멈춰서자, 유비가 부리나케 달려갔다.
"스승님! 이게 어찌 된 일이옵니까?"
노식 장군은 유비를 만나게 되자, 쓸쓸한 얼굴 빛을 띠며 이렇게 대답한다.
"오오! 자네를 여기서 이런 꼴로 만나게 되었네그려! 일전에 자네가 다녀간 뒤에 조정에서 좌풍(左豊)이라는 자가 칙사(勅使)로 전선을 감찰하러 내려온 일이 있었네.
그자가 나한테 와서는 뇌물을 바치라고 하는게야.
군량도 넉넉하지 못한 일선에 무슨 돈이 있다고 칙사에게 뇌물을 바치겠나.
그래서 내가 이곳은 군량을 비롯한 군수품이 부족한 형편이라 오리려 조정의 지원이 매우 필요하다고 말했었지.
그런데 좌풍이란 자는 그대로 낙양에 돌아가서는 내가 싸움은 하지 않고 군수품 부족타령만 하고 있더라고 보고를 한 모양이야, 그래서 위에서 진노하여 동탁(董卓)을 내 대신 중랑장(中郞將)으로 보내시면서 나를 압송하라 하셨다네. 세상이 이꼴이다보니, 장차 이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 지 암담하구먼."
유비는 창살 너머로 스승의 손을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스승님의 비통하신 심정을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러나 죄가 없는 것은 조만간 밝혀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때까지 부디 건강에 조심하시고, 너무 상심치 마시옵소서."
"고맙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자네를 만나니 나도 모르게 원망이 나왔네그려. 나는 이미 늙은 몸이라, 앞으로 믿을 사람은 자네 같은 젊은이들 뿐이니, 자네는 부디 국가와 백성들을 위해 대의를 살려주게."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
"그럼, 어서 가 보게! 나 같은 사람하고 오랫동안 애기하다가는 자네들에게 무슨 화가 미칠지도 모르네."
노식 장군은 함차 속에서 어서 가보라는 손을 내젖는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침통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장비가, 분노에 찬 시선으로 유비를 바라보며 말한다.
"형님! 천하에 이런 법이 어디 있소. 여러 말 할 것없이 호송하는 관군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노식 선생을 구해 냅시다. 스승이 죄없이 붙잡혀 가는 것을 보고 그냥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요?"
"이 사람아! 무모한 생각은 그만하게! 사제(師弟)의 정으로 보면 나도 가슴이 아프지만 어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조정에도 공론(公論)이 있을 것인데 자네가 함부로 그렇게 한다면 어쩔 것인가? 비록 화가 나더라도 나서지 않는 것이 좋겠네!"
"형님은 별말씀을 다 하시우. 저놈들을 형님이 처치하기 싫거든 내가 혼자서 처치하리다."
장비는 말을 마치자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으려고 한다.
유비는 황급히 장비의 팔을 붙잡았다.
"장비, 이 사람아! 대의를 지키는 것이 우리의 철칙이 아닌가? 자네가 어명을 폭력으로 어기려 든다면, 우리 군율에 비춰 자네의 목을 내가 베겠네! 그만하면 알아듣겠지?"
이제까지 유비에게 듣지 못한 추상같은 호령이었다.
장비는 유비의 극렬한 제지에 입술을 깨물며 원한을 참고말았다.
이윽고 함차에 실린 노식 장군은 다시 호송길에 올랐다.
관우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떠나가는 함차를 지켜만 보고 있다가,
"노식 장군이 이렇듯 낙양으로 잡혀 가시고 동탁이라는 중랑장이 새로 부임했다니, 우리가 광종으로 가면 무엇합니까? 차라리 탁현으로 돌아가서 앞일을 새로 의논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하고 말했다.
"음! 그것도 좋은 생각일세. 그러면 일단 탁현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생각을 가다듬어 보자구! "
세 사람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북쪽으로 가던 길을?계속하였다.
탁현을 떠나면서부터 생사를 가르는 전투를 수없이 치뤘고, 전공도 수다하게 세웠건만, 아무런 공명도 얻지 못한 채 쓸쓸한 발길로 다시 고향인 탁현으로 돌아가려니 유비의 마음은 실로 착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시절이 하수상한 데다가 만나는 인물들이 자기 몫 만을 챙기려 하고 있는 시절이니, 세상 탓만을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음, 때가 우리를 부를 때 까지 고향에 돌아가서 웅지를 품고 있은 것도 좋으리라...)
이렇게 생각이 된 유비는 고향길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장비는 마상에서 지루한 하품을 길게 하면서 혼잣말 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싸운거야?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야! 차라리 이럴 바에는 탁현에 돌아가서 산돼지나 사냥하러 다니는 것이 속은 편할 거야! "
관우는 그 소리를 듣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이 사람아, 천하의 대장군이 남부끄럽게 무슨 그런 옹졸한 소리를 하고 있는가?"
"내 말이 사실이지 뭐요! "
"자네가 그런 소리를 하면 우리들 사기가 저하 될 게 아닌가 말일쎄! "
"사기가 저하되는 것이 나 때문이란 말이오? 그게 아니라 관군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꼼짝도 못하고? <네네>해버리는 어떤 사람 때문에 우리들 사기가 저하되는 거요."
유비를 대고 정면으로 비꼬는 말이었다.
그러나 유비는 그 말을 들은 체도 안 하고 묵묵히 말위에서 혼자 수심에 잠겨 있었다.
고향을 떠난 지 여러 달 만에 아무런 공명도 이루지 못한 채, 늙은 어머니를 면목없이 뵙게 될 것이 몹시 서글펐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