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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장 폐쇄된 十八關門 그것은 정녕 신기한 일이었다. 뇌어양을 만난 이후, 제강은 이제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던 동혈(洞穴) 속의 어둠을 희미하게나마 뚫어 볼 수 있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각이 흐를 무렵, 제강은 기어이 암살부(暗殺府)의 입구(入口)를 발견해내고 말았다. 오랜 세월을 말해주듯 이끼가 잔뜩 끼어있는 석문(石門)…… 제강이 조심스럽게 석문에 끼어있는 이끼를 손으로 걷어내자, 뚜렷이 양각된 몇 글자의 글귀가 그의 눈 앞에 드러났다. (으음!) <스스로 자신의 살(肉)과 뼈(骨)와 혼(魂)을 저주받은 고통 속에 내던질 수 있다면…… 죽음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입부(入府)하라.> 양각된 글귀 아래로는 살(殺)을 뜻하는 장인(掌印)이 움푹 파여진 채 새겨져 있었다. 말 그대로 죽음을 서약하는 장인(掌印)이리라. 제강은 섬뜩한 느낌과 함께 흥분을 느꼈다. "과거…… 이름없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바로 이 인장에 손을 대었을 것이다." 스윽…… 제강은 심기를 가라앉히며 천천히 인장에 자신의 손바닥을 댔다. 뼈를 에일 듯 차가운 감촉이 그의 손을 통해 전율처럼 전신으로 퍼져갔다. 순간, 쿠구구궁…… 억겁의 문이 열리듯 석문이 굉음을 울리며 좌우로 열렸다. 동시 어둠 저편에서 하나의 황금 편액이 광채를 뿌리며 나타났다. <제일관(第一關). 화폭사관(火爆死關).> 부그르르…… 용암천(熔岩泉)! 제강의 앞에 펼쳐진 것은 시뻘건 용암이 여기저기서 끓고 있는 살벌한 전경이었다. 허나, 제강은 곧 이 화폭사관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기관(機關)들이 파괴되어 있지 않은가?" 그렇다. 이 화폭사관은 그저 단순한 용암천에 불과했다. 부서진 기관들이 사면 구석에 어지러이 널려 있었던 것이다. "음…… 저절로 파괴된 것이 아니다. 분명 누군가의 손에 의해 파괴되었다." 제강은 뭔가 일이 크게 잘못되어 간다고 느꼈다. 스윽…… 그는 급히 용암천의 모서리 단단한 부분을 밟고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또 하나의 관문이 나타났다. <제이관(第二關). 암천지관(暗天之關).> 허나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참하게 부서진 기관조각들만이 장내에 무수히 쌓여 있는 백골(白骨)들과 섞여 굴러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제 삼관(第三關), 척살폐관(刺殺閉關)…… 제 사관(第四關), 백팔마관(百八魔關)……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제강은 기가 막힌 심정이었다. 한순간 그는 멍한 신색으로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이것은 실로 꿈에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 * * "모든 흔적으로 보아…… 이곳은 한 인물에 의해 폐쇄되었다. 시간 또한 오래되지 않았다. 길어야 삼년(三年)……" 제강은 암살부의 마지막 십팔관문(十八關門)에 힘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대체 어떤 인물인가?" 제강은 몸서리가 쳐지는 것을 느꼈다. 암살부를 살아서 통과하는 것조차 인간의 능력 이상을 발휘해야 한다. 헌데, 대체 어떤 인물이 아예 암살부의 전 기관을 파괴시키며 지나갔단 말인가? 실로 상상조차 하기 싫은 공포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암살부에 들어왔던 제강은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자 허탈감으로 온통 기운이 빠졌다. "대체…… 누가…… 왜?" 알 수 없는 일…… 제강은 구름같이 치솟는 의혹을 억누르며 망연히 벽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에 기이한 이채가 스쳤다. (음? 웬 글이……) 이끼가 낀 벽면에서 붉은 피로 쓰여진 글귀를 발견해낸 것이다. 제강은 몸을 일으켜 이미 세월의 풍상 속에서 희미하게 지워져 가는 글귀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아…… 하늘이여…… 나는 누구오이까? 나는 무엇하는 존재이오? 언젠가…… 꿈속에서 본 듯한…… 따스한 부모님의 손길이…… 미치도록 나를 사로잡소…… 앙증스런 누이…… 사랑했던 여인도 모두 망각의 늪으로 처박혀 버린 지금……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소. 아무것도…… … 중략(中略)……>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냄새가 글귀 곳곳에 배어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숱하게 희생되었던 저 수많은 영혼들 중 유난히 한(恨)과 피눈물이 많았던 한 젊은이가 남긴 것이었다. 아마 손톱으로 후벼팠던 게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벽면에는 아직 살점과 선혈이 점점이 묻어 있었다. <오오…… 신(神)이여…… 진정 당신이 존재한다면 들으라.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잘못했는가. 나는 이미 마음을 빼앗긴 비정한 한 덩어리 강철…… 살인기계가 되었다. 사막을 떠도는 영혼이 되었다…… 살인명령이 떨어지면…… 나는 내 사랑하는 여인이라도 베고 말 것이다. 저주받을 십팔신련초극관(十八神鍊超極關)이여…… 나는 점점 빈껍데기의 육신(肉身)으로 변해간다…… 내 자신이 무섭다…… 부탁이다. 제발 나를 죽게 내버려다오……> 제강은 여기까지 읽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이 글귀에서 한 젊은이가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내주지 않으려는 처절한 싸움을 보았다. "죽을 권리조차 없었단 말인가." 이것은 슬픈 일이다. 인생에 있어 영혼을 남에게 팔아버리는 것처럼 무서운 패배는 없다. 그 패배는 영원하며 돌이킬 수 없이 끔찍한 것이다. "아아……" 제강은 탄식을 흘려내며 계속 글귀를 읽어갔다. <…… 죽는 것은 이제 포기했다. 눈물조차 이미 메말랐다. 흐흐…… 어둠 속에 비치는 나의 육신은 한 자루 차가운 검(劍)처럼 창백하다. 신(神)이여…… 당신이 나를 저버렸듯이…… 이제 나는 당신의 심장에 칼을 겨누겠다.> <십팔신련초극관은 비정한 자들의 편법이다. 여기 나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마음을 모아 하나의 검화(劍華)를 남긴다. 이 일검식(一劍式)은 나의 무덤과도 같다. 이 일검식(一劍式)은 나를 악마로 키운 십팔신련초극관에 대한 나의 보답이다.> "아……" 제강은 여기까지 읽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전신의 소름이 한꺼번에 돋아나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벽면에 새겨진 검화! 하늘…… 어둠…… 별…… 광활한 벌판이 거기에 있었다. 어느 한순간 그 사이를 창백한 일섬(一閃)이 작렬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둠과 밝음, 하늘과 대지를 베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파괴시켰다. 척천일삭(刺天一削)-! 그 검결의 이름이었다. 제강은 검결 속에 한없이 빠져드는 자신을 느꼈다. 그의 안색은 점차로 창백하게 변해갔다. "이것은…… 결국 자기 자신마저 베어버리는 저주받은 검화다!" 그렇다. 그것은 제정신 가진 인물이라면 도저히 시전할 수 없는 끔찍한 것이었다. <…… 이 척천일삭은 이곳에서 속절없이 죽어가야만 했던 영혼들의 마지막 반항이다. 악마의 유일한 허점과도 같다. 살인기계로 변한 우리들은 단 하나, 이 척천일삭에만 패배한다.> 그것이 피와 살로 쓴 글귀의 마지막이었다. 이름조차 없는 한 살수…… 숱한 시공(時空)을 뛰어넘어…… 이 살수가 남긴 척천일삭은 제강의 가슴을 비수로 베듯 쓰리게 했다. 아아…… 최후의 심판! 이 살수는 자신과 암살부의 최후의 심판을 이 척천일삭에 건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예약된 자살과도 같다. 제강은 콧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언제까지나 망연히 벽면 앞에 서 있었다. (또 울고 싶어지는군!) 그때였다. 쿠구궁…… 쿠구구궁! 난데없이 갑자기 천정이 굉음과 함께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제강은 흠칫 정신을 차렸다. 천정에 균열이 가며 돌조각이 떨어지고 있었다. 제강은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진이란 말인가?" 바닥이 파도가 일 듯 들쭉날쭉 춤을 추었다. 콰과과광…… (틀림없이 출구로 통하는 기관장치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제강은 경황중에도 주위를 침착하게 살폈다. 과연 하나의 철사줄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황급히 철사줄을 잡아당겼다. 순간이다. 쿠릉! 오른쪽 벽면이 쩍 갈라지며 통로 하나가 나타났다. 동시에 통로 안쪽에서 뿌연 서리가 폭풍처럼 밀려나왔다. 쏴아악! "윽……" 뼈골까지 얼릴 듯한 한파! 제강이 급히 몸을 움츠리며 살피니 다름아닌 얼음동굴이었다. 예외없이 그곳 얼음동굴도 쩍쩍 균열이 가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출구가 아니었군!" 제강이 낭패하여 엉거주춤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얼음동굴의 빙벽속에 뭔가 이상한 것이 갇혀 있음을 발견했다. (여인(女人)이다!) 놀랍게도 그것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裸體)의 여인이었다. 투명한 빙벽 속 나녀(裸女)의 모습은 너무나 생생했다. 너무나 완벽한 여체…… 그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은 그야말로 사내의 넋을 앗아가고도 남을 것 같았다. 양지유로 빚은 듯한 살결, 터질 듯한 가슴, 꿈결같은 아랫배의 능선 밑으로 곧게 뻗은 두 다리…… 제강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처한 위기마저 잊어버렸다. "세상에는 희한한 일도 많다더니……" 그때였다. 쩌- 적! 빙벽의 균열과 함께 나녀의 몸이 밖으로 드러났다. 동시 나녀가 초생달같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더니 천천히 눈을 뜨는 게 아닌가! (헛!) 제강은 기절초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슨 황당무계한 경우란 말인가? 그는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시체인 줄 알았더니!) 스스스…… 나녀는 완전히 눈을 뜨고 제강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마치 투명한 두 개의 보석을 박아놓은 듯 차갑고 무심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한 전율을 느끼게 했다. (저것도…… 사람의 눈빛인가!) 그때다. 스스스…… 마치 안개를 밟고 움직이듯 괴나녀가 제강을 향해 접근해 왔다. 아니 걸어왔다는 것보다 선 자세 그대로 날아왔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당신은 나의 주인(主人)이 되었습니다." 한 줄기 삭막한 바람소리같은 음성이 제강의 귓속을 후벼팠다. 제강은 아연하여 흠칫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낭자는 대체 누구요?" "한아(寒兒)…… 백한아(白寒兒)입니다." 우르르! 얼음조각들이 무수히 그녀의 몸 위로 떨어져 내렸다. 허나, 그녀는 눈썹 하나 흔들림이 없었다. 제강은 심기가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백한아…… 이름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소. 당신은 사람을 잘못 본게 아니오?" "……" "왜 대답이 없소?" "주인……" 백한아는 한참동안 제강을 응시하더니 글을 읽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십팔인(十八人)은…… 살수가 되기 위해 삼 년 전 십팔신련초극관을 거쳤습니다." "삼 년 전…… 십팔 인…… 그들은 지금 어디 있소?" 제강은 뭔가 뇌리에 번쩍 스치는 것을 느꼈다. 백한아는 기계적으로 인형처럼 대답했다. "그들은 떠났습니다." "어디로?" "모릅……" 콰과과--- 쾅! 후두둑…… 그녀의 뒷말은 엄청난 굉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제강은 떨어져 내리는 돌더미들을 허우적거리며 피하고 있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눈썹하나 깜짝 않는 백한아와 비교해 볼 때 매우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다. (삼 년 전…… 그렇다면 누군가가 이 곳에서 살수들을 비밀리 키운 후에 십팔신련초극관을 폐쇄시켰단 말인가?) 그 와중에도 제강의 명석한 두뇌는 조금씩 의문을 풀고 있었다. 쿠구궁…… "낭…… 낭자는 어찌해서 홀로 남아 빙벽 속에 갇히게 되었소?" "모릅니다." "빌어먹을! 그렇다면 낭자가 아는게 뭐요?" "당신은…… 나의 주인입니다. 내가 눈을 뜨고 처음 보는 사람이 나의 주인이라고 뇌리에 찍혀 있습니다." "뇌리에 찍혀 있어?" 제강은 기가 막히기도 하고 어이도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그때 백한아가 그의 곁으로 바싹 접근해 왔다. "주인…… 이곳은 곧 완전히 붕괴됩니다. 위험합니다." "다가오지 마시오!" "주인…… 나는 기억이 모조리 지워졌기 때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단지 하나……" "……!" "주인이 죽으며 나도 따라 죽어야 한다는 것……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고 죽음으로 주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만 알 뿐입니다." 콰과과광…… 천정은 붕괴 직전에 직면해 있었다. 제강의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미 늦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이 수십 장의 땅 밑을 탈출할 수는 없다!) 인간은 때때로 희망이 전혀 없을 때는 의외로 침착해지는 법이다. 제강은 이미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새삼 망연히 백한아를 바라보았다. 아아…… 다시 보니 이 여인은 진정 너무나 아름다왔다. 마치 한 떨기 백합이 백설(白雪) 속에 영롱히 피어난 듯했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초월한 극미(極美)라고나 할까! 투명한 광채를 발하는 나신은 또 어떤가. 나이는 대략 십 칠팔 세 가량이다. 허나 이 투명한 아름다움 속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것이 빠져 있었다. 그것은 생명(生命)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유리알같은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마치 인형과도 같다. 그러한 백한아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뇌리에 문득 하나의 영상이 떠올랐다. 그의 가슴 속에 가장 완벽하고 고결하게 자리잡은 영상…… 단봉혜령이었다. 진회하의 백아소축에서 언젠가 본 벽안의 금발미소녀…… 그렇다. 단봉혜령이 고귀한 관음상의 자태를 지녔다면 백한아는 얼음의 천사와도 같았다. (왜 갑자기 그녀가 생각나는 것일까……) 제강은 입가에 쓴 고소를 머금었다. 그때였다. 콰과과광! "위험합니다, 주인." 천지가 떠나갈 듯한 굉음과 함께 번쩍 섬광이 제강을 휘감았다. (아……) 그것이 끝이었다. 제강은 뭔가 둔중한 것이 머리에 부딪친 것을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 암살부의 붕괴는 한 식경이나 이어졌다. 그것은 한 역사의 종말이었다. 그 붕괴는 과연 우연한 일이었을까? …… * * * 늙었다. 너무나 늙었다. 더 이상 늙을 수 없을 정도로…… 노인은 새우등처럼 굽은 노구를 지팡이에 의지한 채 이 세상 세월 다 잡아먹을 듯 느리게 걷고 있었다. 마른 고목 껍질같은 피부…… 인간이 이토록 늙어도 정말 괜찮은 걸까. 바람이라도 좀 세게 불면 노인의 몸은 폭삭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이곳은 망혼탕산(亡魂湯山) 깊숙이 자리한 운봉현(雲鳳縣), 더없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산중의 소촌이었다. "……" 어기적…… 어기적…… 정오의 태양은 용광로의 쇳물처럼 뜨거웠다. 헌데도 노인은 몹시 추운 듯 입고 있는 털옷 속에 자꾸 몸을 움츠렸다. 문득 노인은 혼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 따라 더 춥군. 이럴 줄 알았으면 갑옷을 입고 나오는 건데……" 노인은 한 순간 태양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얼굴 윤곽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살아있는 해골 그 자체라고나 할까. 잿빛 피부거죽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주름이 잡혀있는 그 얼굴엔 어딘가 음산한 귀기까지 풍겼다. "태양이 두 개였으면 좋았을 텐데……" 스윽…… 노인은 시선을 다시 움직여 자신이 걷고 있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거리는 한산했다. 빈 농부들의 집에는 잡견들이 한가로이 졸고 있었다. 그때, "할아범, 어디 가시오?" 나뭇군 차림의 촌부가 순박한 미소를 지으며 거리에 나타났다. 순간 노인의 무수한 얼굴의 주름살이 파도치듯 경련했다. "놈, 지금…… 할아범이라고 했느냐?" "아차……" "네놈을 죽이겠다." 휘익! 노인은 사정없이 지팡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노발대발하는 모습이 행여 녹슨 뼈가 부서질까 겁날 정도였다. 촌부는 질겁하여 급히 소리쳤다. "어이구…… 잘못했습…… 아니 잘못했네, 친구." 친구(友). 그 말을 듣은 순간 노인의 지팡이는 허공에서 뚝 정지했다. 동시 그는 이를 드러내고 히죽 웃었다. "그렇지, 다시 한 번 말해봐라." "친…… 친구." "음, 자네집 개를 보아 오늘은 특별히 용서해 주겠다." (빌어먹을……) 농부는 내심으로 씁쓸한 고소를 지었다. 광노우(狂老友). 이 마을 사람들은 노인을 그렇게 불렀다. 말 그대로 좀 미친 늙은 친구라는 뜻이었다. 광노우는 이 마을에 무척 오래 살았다. 이 마을 사람들의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살아 있었을 때도 광노우는 이 마을에 있었다. 그런 광노우에게는 누구나 친구였다. 그는 늙은이 대접을 극도로 싫어했던 것이다. 각설하고, 농부는 늙은 광노우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따뜻한 말을 건네고 있었다. "늙은 친구, 주름살이 많이 펴졌소. 젊어졌는걸. 허허……" "젊은 자네, 이건 주름살이 펴진 게 아닐세." "무슨 소린가?" "주름살 위에 주름살이 생기고, 또 그 주름살 위에 주름살이 생기다보니 그만 닳아서 평평해진 걸세." (맙소사!) 농부는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광노우는 농부의 혈색 좋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네 얼굴이 몹시 평평한 것을 보니…… 혹시 자네가 나보다 더 늙은 게 아닐까?" "윽……" 농부는 몹시 기분이 나빠졌다. 그는 더 이상 광노우와 말한다면 자신까지 돌아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슬픈 표정이 되어 화제를 바꾸었다. "친구, 또 아소반점(亞所飯店)에 만두를 구걸하러 가는 길인가?" "쯧쯧…… 잠시 빌려 먹자는데 소문이 헛갈렸군." "또 그 돼지같은 제자에게 먹일려고?" "그렇다네, 그놈은 정말 돼지야, 무엇이든 닥치는대로 먹어치우고도 다시 먹을걸 달라고 소리치지." 문득, 광노우는 생각이 난 듯 다시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그러한 그의 두 눈에서는 순간적으로 어떤 광기(狂氣)가 스치고 지나갔다. 농부는 측은한 듯 탄식했다. "가엾게도…… 제자란 놈에게 만두나 구걸해다 바치는 신세라니……" "이놈, 뭐라고 주절대느냐?" "아…… 아니오. 헌데 그 제자에게…… 대체 무얼 가르치고 있소?" "황금탕(黃金湯)에서 헤엄치는 방법이지. 흐흐……" "황금탕…… 똥물 말이오?" 농부는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광노우의 입가에 음산한 괴소가 떠올랐다. "그렇다." "개구리 헤엄이오?" "아니, 멧돼지 잠수다." "멧돼지 잠수……" "헌데 제자놈은 그것도 귀찮은지 똥물을 통째로 마셔버리더군." 어기적…… 어기적…… 광노우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농부는 멍청히 선 채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광노우는 느릿느릿 농부에게서 멀어져 갔다. 해질녘에 광노우는 만두 서너 개를 얻어 산으로 들어갔다. 울창한 수림 속에는 어둠이 음산하게 웅크리고 있었다. 광노우는 부지런히 걸었다. 한 손에는 만두,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든 채…… 어느 한순간, 광노우는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두 눈에 괴이한 광채를 번뜩였다. (놈의 기척이 없다. 나를 노리는 기운은 사방에 깔려 있거늘……) 그때였다. 달빛 아래 거대한 괴영(怪影)이 환상처럼 나타났다. "사부!" 어둠을 뒤흔드는 일갈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창백한 섬광(閃光)이 광노우를 향해 무섭게 뻗어왔다. 광노우의 두 눈에 뇌전같은 광망이 일었다. "좋다. 대단히 훌륭하다." 추아악! 그의 지팡이가 형용할 수조차 없도록 빠른 속도로 거대한 원을 그렸다. 순간 사위가 일시에 태고의 적막인 듯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꽈르릉! 사위의 수백 그루 잡목들이 일시에 베어져 쓰러졌다. "우욱……" 광노우의 늙은 몸에 큰 진동이 있었다. 그의 온 몸에서는 피가 흘러 내렸다. 허나 그는 무심한 시선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정확히 백 여덟 군데의 칼자국…… 끔찍했다. 보통 인물이라면 즉사를 면치 못할 중상이었다. "한 치 두 푼의 깊이…… 백팔검흔(百八劍痕)이 모두 일정하군." 광노우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늙은 얼굴에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윽고 그의 늙은 몸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그는 입가에 소리없이 괴소를 떠올렸다. "녀석, 드디어 해냈군. 축하한다." 쿵……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피투성이 몸은 쓰러졌다. 핏물이 황토흙 위에 번져가고…… 얻어온 만두가 그 위에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스윽! 한 미남자(美男子)가 쓰러진 광노우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두 자루 쌍검(雙劍)이 들려져 있었다. 미청년은 광노우의 피투성이 몸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광노우는 초점이 흐려져가는 눈으로 미청년을 올려다 보더니 피묻은 만두 하나를 애써 집어 들었다. "초우(草雨), 먹어라. 너를 위해 얻어온 사부의 마지막 만두다." "……" 초우. 이 이름을 아는 자는 이 하늘 아래 극소수였다. 이 이름은 당년 백운사에서 제강을 죽음 속으로 몰아 넣으려 한 적이 있었다. 스윽…… 초우는 만두를 묵묵히 받아 들었다. 그는 죽어가는 광노우를 바라보며 피묻은 만두를 꾸역꾸역 입속으로 삼켰다. 눈물인가? 그러한 초우의 두 눈에 투명한 액체가 맺혀 조용히 흘러 내렸다. "사부, 이제 가르쳐 주십시오. 사부께선 당신을 이 제자의 손으로 죽이게 되면…… 그들의 이름을 가르쳐 준다고 했습니다." "흐흐…… 녀석, 네놈에게도 눈물이 있었더냐?" 광노우의 입가에 괴이한 미소가 번졌다. "사부가 죽어야 되는 이유는 이 세상에 더 이상 할 일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부……" "잘 들어라. 첫 번째가 신마 뇌어양, 두 번째가 소림의 천수괴승, 마지막으로 섬마광혼 위지단이다." "셋입니까?" "현존하는…… 지상의 최강자들이다." 광노우의 음성이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허나, 초우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는 두 눈에 섬뜩한 신광을 빛내며 무심하게 물었다. "또 없습니까?" "놈…… 그들…… 삼 인의 초강자들 만으로는 부족하단 말이지, 좋다. 가르쳐 주지." 마지막 여력을 모으고 있는 것일까. 광노우의 늙은 혈신(血身)이 부들부들 경련했다. "천지간에…… 최고의 강자가 있다면…… 냉천욱(冷天旭)…… 그는 미증유의 존재다." 냉천욱, 냉천욱이라 했다. 대체 이 생소한 이름은 무엇인가? 광노우의 의식은 혼미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흐흐…… 그 녀석은 늘 혼자였었지…… 무서울…… 정도로…… 그는……" "사부! 그에 대해 더 말씀해 주십시오." 초우는 광노우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외쳤다. 광노우는 흐릿한 눈으로 초우를 응시했다. "초우…… 너는 고약한 놈이다. 자신 위에…… 강자가 있음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사부 탓입니다." "흐흐…… 내가 그렇게 키웠던가. 그래…… 초우…… 너에게는……오직 최강만이 필요하다." 광노우의 오공(五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냉천욱에 대해서는…… 네 스스로…… 만나봐야…… 초우…… 마지막으로 보여다오. 백팔초혼검(百八招魂劍)을……" "……" 초우는 말없이 광노우를 눕히고 일어섰다. 차가운 야풍이 그의 소맷자락을 휘날렸다. 그리고 초우가 쌍검을 치켜드는 순간에 광노우는 숨을 거두었다. 허나, 초우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오른손 소맷자락을 천천히 걷어 올렸다. 그러자 의수(義手), 팔뚝까지 시커먼 오철(烏鐵)로 이루어진 의수가 정체를 드러냈다. 초우는 그 의수를 뽑았다. 그러자 그 속에서 시퍼런 칼날이 창백한 광채를 뿌리며 나타났다. "동시에 세 검(劍)을 사용해야만 하는 백팔초혼검의 진수를 얻기 위해…… 나는 스스로 팔을 절단했다." 후우웅…… 그의 전신에 무형의 잠력이 무섭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누구든 내 앞에서 강자가 되지 마라. 나의 검이 용납지 않는다." 츄파앗! 그의 신형이 눈 깜짝할 사이에 어두운 야공으로 솟아올랐다. 아아…… 유성이 춤추는 것을 보았는가. 소리도 없이 창백한 섬광 줄기가 밤하늘을 가르고, 백 장 거리의 한 거대한 고목(古木)이 찬란한 빛무리에 감싸이는 듯하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번쩍! 싸늘히 식은 광노우의 시신 아래로 별빛이 떨어져 내린다. …… 초우는 시신을 뒤로 하고 어둠 속의 길을 떠났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그의 길은 고독한 운명의 여로로 이어질 것이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잼 납니다
후속 글 부탁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