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인도교 폭파
한강인도교 폭파는 6.25 전쟁 이후, 서울이 함락 위기에 처해지자, 당시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의 판단으로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에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현 한강대교)와 한강철교를 결과적으로 조기에 폭파한 사건이다.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6월 25일 국군이 창동선으로 후퇴했을 때,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불러, 한강교 폭파 준비를 지시했다. 전쟁 전 한강대교에서 폭파실습을 한 적이 있던 황원회 중위와 육군공병사관후보생들이 작업조를 맡아 구체적인 폭파계획을 수립한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북한군의 전차가 시내로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고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 폭파를 명령한 후 시흥(현재의 서울 금천구, 관악구, 경기도 광명시 일대)으로 향하였다.
6월 27일 오후부터 이미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작업조는 공병감의 명령이 떨어지자 3개의 철교와 1개의 인도교를 폭파하였다.
총참모장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김백일 대령은 병력이 빠져나갈 시간이 필요하다는 주변 사단장의 건의를 듣고 폭파명령을 취소하나, 명령이 전달되기 전 단 몇분차이로 폭파가 진행되었다.
폭파로 인해 최외각 한강철교는 완파되었으나 장약 불발로 경부선 복선철교와 경인선 단선철교는 폭파되지 않았고 인해 북한군 전차들이 통과할 가능성 때문에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하였다.
흔히 한강인도교 폭파 사건으로 부르지만 한강인도교(한강대교)와 한강철교만 폭파한 것은 아니며, 광나루에 있는 광진교 역시 같은 날 폭파되었다. 하지만 광진교의 지명도가 너무나 낮아서 이 사건은 알아도 광진교 역시 폭파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적은 편이다.
이 사건으로 강북 이북에 고립된 수 많은 국군과 피란민들은 직,간접적인 상당한 피해를 보았으며, 대한민국과 국군의 흑역사 중 하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