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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얽혀진 은원 관계 청풍명사는 비류신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그 당시의 무공 조예를 논한다면 아마 서로 막상막하라 우열을 가려내기 힘들다네. 하지만 그래도 약간의 차이는 있는 법이지. 그들 세 사람 중 황천선구가 제일 우세를 차지하고 다음이 선우휘,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대호였겠지.” 소대호의 무공이 제일 뒤떨어졌었다는 말을 듣자 비류신은 불쾌했다. 그는 경멸하듯 코웃음을 치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비류신은 소대호에게서 비할 수없는 막대한 사랑과 은혜를 받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대호는 비류신의 가슴 속 깊이 새겨진 유일한 은인이었다. 굽힐 줄 모르며 냉정하고 오만한 성격을 지닌 비류신이 스승을 멸시하는 말에 어찌 격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노한 마음을 억지로 누르며 냉랭하게 물었다. “그들은 혹시 서로 무공을 겨루어 본 일이 있소?” 청풍명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들 세 사람에게는 풀 수 없는 은원 관계가 얽혀져 있었다네. 물론 무공을 겨뤄 본 일이 있지만 무림에서 그들이 겨루는 장면을 본 사람은 한 명도 없네.” 비류신의 입가에 냉소가 꿈틀거렸다. “당신은 다만 강호에서의 소문만 듣고 어찌 함부로 그들의 강약을 평가할 수 있단 말이오?” 그는 주위를 천천히 훑어보고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야월광명지신도 소대호는 절세적인 영걸이며 인재요. 그분이 수련한 무공은 망망한 바다와 같이 깊소. 그분은 또한 정사(正邪)의 무예를 가리지 않고 모두 터득했던 것이오. 황천선구와 선우휘는 다만 사문(私門)에서 터득한 무기(武技)일뿐더러, 비록 막대한 성취를 이루었으나 어찌 소대호 노 선배와 더불어 논할 수 있단 말이오?” 선우철과 청풍명사는 비류신이 마치 교훈을 하듯 말하는 것을 듣자 슬그머니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침착한 인물들인지라 비록 화가 났으나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청풍명사가 빙긋 웃으며 받았다. “비 노제가 그처럼 소대호의 내막을 상세히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 같구먼.” 그는 비류신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계속했다. “자네 말이 옳지! 소대호는 정사 양파의 무학을 익혔으며 그가 터득한 무공은 실로 광범위한 것일세. 십팔 년 전의 무공 조예로 본다면 사실 세 사람 중에서 약간 뒤떨어졌으나 깊고 넓음을 논한다면 그는 나머지 두 사람보다 뛰어났었지… 그러나 십팔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성취는 혹시 나머지 두 사람을 월등하게 능가할지도 모르는 것이네. 그러나 아깝게도… …” 그가 아깝다고 하는 것은 소대호가 이미 세상을 등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고화룡, 비류신, 홍부용은 크게 놀랐다. 한편 선우철은 십팔 년이 지난 오늘날에 소대호가 자기 부친보다 월등할 것이라는 청풍명사의 말을 듣자 몹시 불안했다. 그는 냉랭히 말했다. “나는 십팔 년이 지난 오늘 그들 세 사람이 다시 승부를 겨루는 것을 구경하고 싶소. 솔직히 말해서 가친께서는 이미 열두 자루의 회선비검(廻旋飛劍) 절기를 터득했소. 천하에 내 가친의 일격을 막아낼 수 있는 사람이 누구란 말이오?” 비류신은 불복하는 듯 냉랭히 웃었다. “만약 기회가 있다면 나는 그 선배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소.” 그의 이처럼 건방진 말에 여러 고수들은 몹시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선우철과 기타 거물급뿐만 아니라 심지어 고화룡과 홍부용까지도 역시 비류신의 말투가 너무 건방지다 생각했다. 그러나 선우철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비형의 호기충천한 기개에 참으로 감탄해 마지않소. 우리 같은 까마득한 후배가 그들 선배들과 겨룬다는 것은 실제 매우 어려운 일이오.” 비류신은 그가 자기에게 도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냉랭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나와 실제로 겨룰 수 있다는 말이군!” 선우철이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그의 웃음 띤 얼굴은 참으로 신비스러웠다.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천천히 말했다. “용호가 충돌하면 손상을 면할 수 없는 법이오. 비형의 무예로 보아 저는 언젠가 한 번쯤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 같소. 그러나 가급적이면 우리 서로 무림에서 함께 명성을 떨칠 수 있도록 합시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하더니 다시 이었다. “오늘밤 제가 말한 비밀을 비형들은 이미 소상히 들었을 것이오. 만약 생각이 있으시다면 저는 비형들과 힘을 뭉치기를 원하는 바이오. 그리고 일이 끝나면 둘이서 겨루어 그 보물의 임자를 결정짓는 것이 어떻소?” 흑도사괴는 선우철이 비류신 등을 끌어넣으려는 것을 보자 크게 분노했다. 봉화염은 음산한 웃음소리를 내며 불쾌한 듯 내뱉었다. “선우철! 당신의 그런 행위는 우리를 친구로 생각하고 하는 말이오?” 그러나 선우철은 봉화염의 꾸짖는 듯한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온화하게 웃는 낯으로 비류신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었다. 비류신은 잠시 생각하다가 냉랭하게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이 무공을 겨루는 것이 보물의 임자를 결정하기 위해서라면 할 필요 없습니다. 훗날 선우 소장주가 날짜와 장소를 지정한다면 나는 언제든 상대해 드리리다. 그리고 힘을 뭉치자는 제의에 대해 말하겠는데 나는 항상 여러 사람과 어울려 다니길 싫어하는 성품이오. 그러므로 부득이 선우 소장주의 호의를 사양해야겠으니 용서해 주시길 바라오. 그럼 이만 물러가겠소.” 선우철은 껄껄 웃었다. “좋소!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개성이 있는 법이오. 저 역시 남이 하기 싫다는 일을 강제로 시킬 생각은 없소. 그럼 훗날 비형의 가르침을 받기로 하겠소.” 비류신은 고개를 돌려 고화룡을 향해 말했다. “고 선배님, 갑시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큰 걸음걸이로 이십사 명의 대한들을 향해 걸어갔다. 이때 그 흑의경장의 대한들은 번쩍이는 장검을 움켜쥐고 추호도 양보하지 않은 채 여전히 포위하고 서 있었다. 선우철이 갑자기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은 손님들에게 작별인사를 치러라!” “넷!”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이십사 명의 경장 대한은 수중의 장검을 재빨리 검집에 꽂았다. 그리고 검은 그림자가 얽히는 듯하더니 신속히 이 열로 줄을 지어선 후, 일제히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는데 그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다. 비류신은 이 광경을 보고 선우철의 위풍이 실로 당당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복종하게 되어 있으며 어느 누구도 감히 거역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더욱이 그들 대한들의 웃는 표정은 진심에서 우러난 듯하였고 추호도 위장된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비류신, 고화룡, 홍부용 등 세 사람은 큰 걸음걸이로 지령보 쪽을 향해 발을 움직였다. 고화룡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선우철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군! 그의 잔인하고 악독한 마음으로 보아 절대로 이처럼 손쉽게 우리를 놔주지 않을 것일세. 비 노제, 그 자는 흉계가 많고 매우 교활하며 또한 무공도 높은 인물이니 다음부터 조심스럽게 경계해야 하네.” 홍부용이 웃으며 말했다. “고 선배님, 선우철은 비 공자의 무공에 몹시 놀랐어요. 만약 격투를 벌이게 된다면 자기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거짓으로 호탕한 척 한 것이에요.” 고화룡은 신중히 생각을 하더니 다시 말했다. “홍 ?자의 추측도 있을 법한 일이오. 그러나 선우철의 무공으로 보아 당세 무림의 유명한 거물급이라 할지라도 역시 그의 적수가 되기 힘들 것이오. 낭자와 비 노제도 그자의 그 네 자루 회선비검 절기를 목격했지 않소. 선우휘의 절세적인 절기를 그 자가 터득했으리라고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오.” 비류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선우철의 심후한 무공은 우리들 보다 뛰어난 것 같습니다.그 자는 실로 깊이를 추측할 수 없으며, 또한 그 청풍명사의 무공도 필시 절묘할 것입니다. 무학이란 무궁한 것이라 설사 우리가 평생을 두고 연마한다 한들 터득할 수 있는 것이란 고작 망망대해의 편주와 같아 말할 값어치도 없는 것입니다. 저의 은사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은 과연 한마디도 틀린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듣던 홍부용이 방긋 웃으며 거들었다. “비 공자, 지금 무림의 고수들은 소문을 듣고 모두 이곳 묘지에 당도하였지요. 그리고 그들은 현기, 현청이 숨겨 놓은 보물을 수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자는 그 보물지도를 지니고 있으면서 어째서 아직 그 보물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으세요?” 비류신은 그녀의 말을 듣자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번쩍 떴다. “나는 하마터면 그 일을 잊을 뻔 했군.선우철도 그 보물지도를 지니고 있다 하던데 진가의 여부를 알 수 없구려. 만약 그가 가진 것이 진짜 지도라면 우리가 선수를 쳐서 보물을 먼저 찾아야 하오.” 고화룡이 말을 받았다. “무림의 인사들은 간사하고 흉계가 많기 때문에 만약 정확한 단서가 없다면 절대로 경솔하게 이곳까지 달려오지 않았을 걸세. 그러니 지체했다가 큰일 나네.자네는 속히 그 보물지도를 꺼내 행동을 개시하게.” 비류신은 품속에서 낡은 천을 신중히 꺼냈다. 그리고 무덤 앞으로 다가서며 그것을 천천히 펼쳤다.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지금은 날이 새기 전의 가장 어두운 시각이었다. 고화룡은 품에서 부싯돌을 꺼내 탁탁 치더니 불꽃을 만들었다. 순간 밝은 불빛이 낡은 천을 비스듬히 비추었다. 그 낡은 천에는 혈서로 된 <동서남북>이라는 네 글씨가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동쪽은 지령보를 나타내고 있었으며, 서남북 삼면은 모두 점(點)으로 무덤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남쪽과 서쪽 중간선 묘지에는 마치 절간같이 생긴 집이 한 채 그려져 있었다. 그 집의 정면 중간에 화살 표시를 해 놓았는데 그곳이 바로 보물이 숨겨진 묘지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비류신과 홍부용은 동시에 앗! 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바로 그 집이군요!” 고화룡은 그들의 모습에서 그 집이 어디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비 노제와 홍 낭자가 알아냈는가?” 비류신이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가 지령보에서 빠져나왔을 때 바로 그 괴이한 집 담장 옆에 있던 무덤의 뚫려진 구멍으로 빠져 나왔지요.그때 우리는 허기에 지쳐 있었던 터라 그 집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낡은 천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눈에 힘을 주어 살펴보더니 말을 이었다. “이 보물지도 대로라면 바로 그 집이 틀림없습니다. 정원 안에 있는 그 절간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은 그 집안에 혹시 커다란 무덤이 있을지도… 거기가 바로 보물이 숨겨진 곳일지도 모릅니다.” 고화룡은 크게 기뻐했다. “그렇다면 잘 됐네. 자네와 홍 낭자는 속히 그 곳으로 가보게. 나는 가서 음식을 준비한 후 곧 따라 가겠네.선우철 무리들은 비록 자정이 넘은 후에 행동하겠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것일세. 또한 이 넓은 묘지에는 이미 각 방면의 인물들이 서로 견제하고 감시하며 있을 테고… 만약 우리가 행운을 얻어 보물을 수중에 넣는다 해도 역시 오랫동안 치열한 격투를 벌여야 할 걸세.그렇기 때문에 필히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것일세.” 홍부용은 즉시 대답했다. “고 선배님은 속히 돌아오셔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고화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체해서 안 될 일이지. 홍 낭자와 비 노제는 어서 가보도록. 그러나 은밀히 행동해야 하네. 나는 한 시간 후면 그곳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일세.” 이렇게 말을 남긴 고화룡은 잽싸게 사라졌다. 비류신은 그를 보내고 일어서면서 낡은 천을 다시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 몸을 돌리는 순간-- 그들은 놀라움과 공포에 싸여 엉겁결에 몇 발짝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그들과 불과 이 장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무덤 위에서 커다란 사람의 모습이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을 펴도 손가락을 분간할 수 없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 더구나 음산한 분위기에 둘러싸인 묘지에서 갑자기 기다란 그림자를 발견한 순간 그들은 대뜸 유령을 연상했던 것이다. 뿐더러 바람 한 점 없고 주위는 죽은 듯이 정막에 깔려 무시무시한 귀기마저 흐르고 있을 때, 그 자는 마치 석상같이 우뚝 서 있는 게 아닌가. 비류신은 고함을 쳤다. “당신은 누구요?” 그러나 사실 홍부용과 비류신이 놀란 이유는 바로 그 자의 경공이 너무나 고명한 경지에 접어들어 있는 것에 대한 경각심 때문이었다. 그들 두 사람의 청각은 몹시 예민한 편이었다. 그러나 남이 이 장 앞에까지 접근해 오도록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 자의 경공이 그만큼 높다는 말이었다. 그의 어깨에는 한 자루 고검이 꽂혀 있었다. 유령같이 나타난 사나이는 비류신의 고함소리를 듣자 한바탕 소리를 지르며 내려섰다. “나는 지신도 소대천이오. 당신이 바로 가형 소대호의 제자인 비류신이오? 그리고 그 옆은 빙화곡 백화선녀의 제자인 만화신검 홍부용 여협이고?… …” 이 말을 들은 비류신과 홍부용은 즉시 안색이 돌변했다. 그들은 내심 더욱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이때 한마디 처량한 음성이 비류신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 …비류신아! 나의 동생 소대천은 제일 교활하고 간사하며 또한 무서운 독기(毒技)를 지니고 있다. 당세에서 너의 무공은 이미 절정 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것이나, 네가 만약 내 동생을 만났을 때는 가급적이면 피하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 비류신은 심중 크게 놀랐다. 그는 대뜸 생각했다. ‘끝장이 났구나… 저자가 만약 잔금섭혼신편 등의 물건을 뺏으려는 마음을 품고 있다면 우리 두 사람의 힘만으로 저자를 막아내기가 힘들 것이다. 더구나 저놈의 독술은…’ 생각할수록 비류신은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겉으로 추호도 그런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서릿발처럼 싸늘한 표정과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우리를 저지하는 것이오?” 이때 어둠을 헤치고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비류신은 그 서광 속에서 지신도 소대천의 웃음 띤 얼굴을 볼 수 있었다.그는 남색 장삼에 유건을 쓰고 있었다. 기다란 눈썹에 날카로운 눈초리를 하고 있는 그의 얼굴은 백짓장같이 창백했다. 그리고 번쩍이는 두 눈에는 사람을 억누르는 위엄이 서려 있었으며 풍류적인, 멋있는 중년 유생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순간적인 인상이었고, 그의 미간에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얄팍한 입술은 그가 음험한 인물이란 것을 은연중 말해 주고 있었다. 그가 입가에 띄우고 있는 한 가닥 야릇한 미소는 그의 교활함의 깊이를 예측할 수 없게 했다. 소대천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과연 훌륭하군. 가형의 안력은 비범하여 자네와 같은 사람에게 무예를 전수해줬으니 형님은 비록 돌아가시긴 했어도 두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네. 오늘 나는 자네와 상의할 일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다네.” 비류신은 내심 그를 매우 증오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생각 같아서는 그를 일격에 격살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비류신은 총명한 사람이라 자기들 두 사람의 무공으로 절대로 소대천의 적수가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소대호의 당부도 있었으므로 비류신은 심중에 맺힌 원한의 분노를 억제하고 냉랭히 소대천의 말을 받았다. “상의할 일이란 무엇이오?” 지신도 소대천은 온화하게 말했다. “그것은 자네와 잔금섭혼신편에 관해 상의하려는 것일세. 그 채찍에는 많은 사연이 얽혀 있어 자네에게 실로 백해무익한 물건일세. 내 절대로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자네를 위협하려는 것이 아니네.” 소대천은 빙그레 웃으며 비류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이야기를 계속했다. “가령 소대호는 심혈을 기울여 자네에게 무예를 전수해 줬지. 그런데 만약 자네가 그 채찍 때문에 죽음을 초래한다면 가형 소대호의 노고에 자네는 무슨 낯으로 대하겠나? 그러니 자네는 그 채찍을 나에게 넘겨주길 바라네.” 비류신은 담담하게 웃었다. “은사께서 채찍을 나에게 물려주실 때 간곡히 경고하신 말씀이 있소. 그것은 원한을 갚을 때 외에 쉽게 남의 눈에 띄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였소. 그러므로 채찍이 다시 강호에 출현했다는 소식은 절대로 퍼지지 않았을 것이오.” 비류신은 말을 끊고 소대천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당당한 태도로 다시 말을 이었다. “또한 은사께서 채찍을 저에게 물려주실 때 그분은 이 채찍이 자신의 제 이의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소. 그래서 나에게 그 채찍을 목숨같이 귀중히 보관하라고 분부하셨던 것이오.” 지신도 소대천은 갑자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류신, 자네는 그 채찍의 내력을 알고 있는가?” 비류신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만약 들려주시겠다면 경청하겠소.” 소대천은 또 다시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자네는 가형 소대호가 어째서 십팔 년간이나 유실에 갇혀 있기를 원했으며 괴로움을 당하다 돌아가셨는지 알고 있나? 자네가 생각하기에 필시 나를 형제의 정분도 없이 가형을 살해한 놈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네… …” 그는 기침을 한 번 하고 계속 말했다. “가형 소대호는 일대의 기재이네. 그는 무공이 절대적이며 인격도 훌륭했지. 그래서 무림 인물의 존경도 받고 있었던 게 아닌가? 그러나 바로 그 채찍 때문에 그런 처참한 운명을 초래할 줄을 누가 알았겠나?” 그의 언사는 자못 감동적이었다. 비류신과 홍부용이 만약 그의 잔인한 죄과를 직접 목격하지 않았다면 정말 그의 교활한 말에 속아 동정을 했을 것이다. 비류신은 즉시 야유를 던졌다. “보아하니 당신은 몹시 선량한 사람 같군요. 흥! 당신의 온갖 행위는 그림과 같이 아직도 머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소. 나는 훗날 기회가 있다면 은사의 원한을 명백히 밝혀낼 작정이오. 그때는 아마 하늘에서 그물이 겹겹이 내려와 자연히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오.”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춘 그는 결심한 듯 언성을 높였다. “만약 당신이 살인을 하여 우리의 입을 봉하고 잔금섭혼신편을 빼앗아가겠다면 우리 두 사람은 물론 목숨을 걸고 상대해 드리겠소.” 지신도 소대천은 비류신의 이런 태도에 분노를 터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의 이런 점이 상대에게 더욱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 오해하지 말게. 나는 다만 자네와 상의하려는 것뿐이네. 내가 그 채찍의 이해관계를 자네에게 알려줄 테니 그 채찍을 나에게 넘겨주겠는가의 여부는 내 말을 다 들은 후 자네의 의사에 맡기겠네.” 그는 기침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채찍은 매우 음독(淫毒)한 한 가지 피맺힌 사건과 관련이 있다네. 그 채찍이 만약 다시 강호에 출현하게 된다면 필시 커다란 풍파가 일어날 것일세. 만약 그 채찍이 가형의 수중에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가 생전에 얻었던 명예는 필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걸세. 그리고 또한 영원히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게 될 거야.” 비류신은 몹시 놀랐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은사께서 별세하시기 전에 약간 보여주셨던 표정과 말로 보아 분명 그분의 원한은 그 채찍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분 평생에 얻은 청백한 명예를 훼손시키는 일이 있단 말인가?’ 비류신은 소대호에게 무공을 전수받은 은혜를 입었으므로 그 채찍 때문에 은사의 명예가 훼손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때 한 줄기 영감이 번개같이 뇌리를 스쳤다. ‘만약 그분이 자기의 명예를 훼손시킬 우려가 있는 채찍이라면 어찌 나에게 그것을 목숨 걸고 보관하라 했을까? 그리고 또한 그 채찍에는 천하 무림을 놀라게 하는 비보가 숨겨져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 간악한 놈에게 속아선 안 된다… …’ 비류신은 고개를 쳐들고 싸늘하게 말했다. “은사는 나에게 태산과 같은 은혜를 베푸셨소. 그분이 일단 나에게 채찍을 물려준 이상 모든 뒷일을 그분은 생각해 보셨을 것이오. 만약 당신의 말대로 그 채찍이 은사와 관련 있다면 나는 모든 험악한 고비를 겪고서라도 그분의 일에 책임지겠소. 나에게서 채찍을 남에게 넘기게 하려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오.” 지신도 소대천은 그 말을 듣고 조금도 노하지 않고 오히려 웃었다. “좋아! 자네가 그처럼 믿지 않겠다면 나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지. 또한 자네를 괴롭힐 수도 없네. 자네는 그 채찍을 강호 인물의 눈에 띄지 않게 잘 간직하게나. 그렇지 않으면 자네에게 엄청난 재난이 닥쳐올 것일세. 자! 그럼 나는 이만 물러가겠네.” 말을 마친 소대천은 가뿐한 걸음걸이로 새벽안개에 자욱하게 잠긴 묘지에서 나는 듯 사라졌다. 비류신과 홍부용은 지신도 소대천이 조금도 무력을 쓰지 않고 순순히 물러가는 것을 보고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 비류신은 지난 수개월 동안 겪던 일이 문득 생각났다. 그것은 실로 꿈과 같은 일이었으며, 믿어지지 않는 일의 연속이었다. 더욱이 오늘 나타난 소대천의 언동은 비류신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사실 그들 두 사람은 소대천에 대해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비할 데 없이 악독하고 음흉한 그는 최근 악랄한 음공(陰功)을 수련 중이며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기 전까지 남과 겨루는 것을 금기(禁忌)로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그가 눈앞에 보물을 두고 그것을 포기했을 것인가? 또한 소대천은 비류신 따위는 아예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 오직 그 채찍만 뺏을 생각을 하고 있는 그였다. 순순히 얻을 수 없다고 판단을 내린 소대천은 즉시 손을 뻗쳐 뺏으려는 생각을 포기했던 것이다. 홍부용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착잡한 생각에 잠겨 있는 비류신의 상념을 깨뜨렸다. 그녀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비 공자,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우리 속히 그 집을 찾아가요.” 비류신은 처량하게 장탄식을 했다. “요즘 강호에서 생기는 괴상한 일들은 실로 추측하기 어렵구려… 아… …” 두 사람은 함께 경공을 펼쳐 그 집을 향해 달려갔다. 잠시 후 그 집에 당도한 두 사람은 동시에 흠칫 놀랐다. 이때 뜻밖에도 그 집 정원에 많은 무림의 고수들이 들끓고 있는 게 아닌가? 그들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곳에 운집한 군웅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강호의 험악하고 영통한 소식이 두려웠다. 자세히 바라보니 장중에는 월광검 소대풍이 살음귀 쌍수벽과 마곡인 마대부, 그리고 독살스러운 노인과 많은 경장 대한을 이끌고 서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남쪽에는 도장맹의 선우철이 청풍명사와 흑도사괴 및 스물네 명의 흑의경장 대한들과 더불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동쪽에는 각 방면에서 몰려든 강호의 백도고수들과 무림의 사대 섬(四大島)에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사대 섬의 고수인물들은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 각 지방의 영웅들은 평소 함께 모이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지금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이곳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괴이하게도 서로 한 마디 말도 없었다. 비류신과 홍부용은 태연히 남쪽에 있는 도장맹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 선우철은 그들을 보자 호탕하게 웃으며 외쳤다. “비형과 홍 낭자도 구경하러 오셨군! 핫하… 실로 드문 기회요.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모두 이곳에 모였소.” 지령보 쪽의 소대풍은 비류신과 홍부용을 보자 크게 놀랐다. 그러나 교활한 그는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비소협과 홍 낭자는 언제 이곳에 왔소? 당신들은 실로 하늘을 뚫을만한 재주를 갖고 있더구려. 경탄해 마지않는 바이오.” 두 사람은 그쪽을 보고 즉시 얼굴에 살기를 띠었다. 비류신은 대뜸 싸늘하게 쏘아 붙였다. “소대풍, 잠시 후 당신들은 잔인한 처사에 대한 보복을 받을 것이오. 당신은 쓸모없는 늙은이지만 한 시간이라도 더 삶을 누리라고 지금은 그냥 놔두겠소.” 월광검 소대풍은 그래도 능청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비소협, 우리는 옛 친구이거늘 어찌 만나는 순간부터 기분을 상하게 하오?” 선우철은 그들이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보자 심중으로 몹시 좋아했다. ‘저 두 사람은 우리를 돕게 되겠군! 핫하… 그렇다면 오늘의 형세는 완전히 뒤바뀔 가능성이 있다.’ 선우철은 비류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공수의 예를 올리며 말했다. “비형, 만약 두 분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면 어젯밤 말대로 약속을 이행할 것이오.” 소대풍은 선우철이 그들 두 사람을 끌어들이려는 것을 보자 슬그머니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비류신과 홍부용의 절묘한 무공을 알고 있으므로 그들이 만약 선우철을 돕는다면 자기 쪽이 크게 불리할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선우철, 당신은 그들의 힘을 빌려도 소용없을 것이오. 지령보는 이 부근에 있으며 우리 편 고수들은 대부분 아직 도착하지 않았소. 핫하… 내 오늘 도장맹을 일망타진해야 겠소이다.” 지금의 형세로 보아 선우철은 자기들 쪽 세력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령보가 지척지간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러나 추호도 내색하지 않고 침착한 태도를 취했다. “좋소! 지령보와 우리 도장맹은 언젠가 한 번 생사를 걸고 겨뤄야 할 것이오.” 월광검 소대풍은 웃는 낯으로 말을 받았다. “우리 지령보 땅에서 그토록 건방지게 날뛰는 자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소. 도장맹은 자기 세력을 너무 믿고 있는 것 같소!” 봉화염이 냉소를 치며 나섰다. “이 광대한 묘지가 설마 지령보 사람들의 뼈를 묻은 지령보 소유의 묘지는 아니겠지요?” 소대풍 뒤에 있던 독살스러운 노인이 음산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봉화염! 만약 당신들이 꼭 이곳에 뼈를 묻겠다면 우리는 그 소원을 풀어주겠소.” 바로 이때 정원 밖에서 천둥치듯 우렁찬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어 한 줄기 그림자가 번쩍하더니 귀신처럼 동쪽 정원으로 뛰어내렸다. 그 자는 어깨가 떡 벌어지고 머리를 어깨까지 풀어 내렸고, 금환(金環)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턱수염을 가늘게 여러 갈래로 땋아 내리고, 둥근 얼굴에 쭉 째진 커다란 입을 지닌 위맹한 풍채의 건장한 사나이였다. 동쪽에 자리 잡고 있던 사대 섬의 사람들은 그를 보자 갑자기 활기를 찾았다. 그러나 선우철과 소대풍은 그 괴인의 출현으로 안색이 변했다. 청풍명사는 그 자에게 공수를 했다. “진형, 그간 별고 없으셨소? 사대 섬에서는 진형 혼자 오셨소?” 알고 보니 이 무시무시한 괴인은 사대 섬의 하나인 전초도(箭樵島)의 섬주인 금환두발(金環頭髮) 진동철(震動鐵)이었다. 그는 큰 두 눈에서 싸늘한 광채를 뿜어내며 주위를 훑어보더니 오만한 어투로 말했다. “어쩐 일로 여러분 모두는 나를 맞이해 주시는 거요? 핫하… 청룡형! 오산이오. 사대 섬에는 오직 나 혼자만으로도 족하단 말이외다.” 비류신은 그들이 당치도 않은 얘기를 하는 것을 보자 참을 수 없어 말했다. “홍 낭자, 우리는 저쪽으로 갑시다.” 비류신은 성큼성큼 대전을 향해 걸어갔다. 과연 대전 안은 청석으로 된 큰 무덤이 있었다. 선우철은 비류신이 그쪽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자 황급히 명령했다. “비소협이 더 이상 참지 못 하겠다고 하시는데 너희들은 무엇을 꾸물거리느냐?” 그의 호령이 떨어지자 흑의경장을 한 네 명의 대한들이 각각 망치 등을 들고 대전을 향해 달려갔다. “흥!” 금환두발은 몹시 거만한 자였다. 그는 무명소졸인 비류신의 냉랭하고 오만한 태도를 보자 냉소를 터뜨렸다. 그는 덮어놓고 비류신에게 호통을 쳤다. “이 건방진 녀석아! 어서 걸음을 멈춰라!” 바로 이때였다. 네 마디의 처절한 비명이 정원에 울려 퍼졌다. 무덤을 파헤치려던 네 명의 대한이 망치를 쳐들고 무덤을 파헤치려는 순간 무덤 속에서 싸늘한 내력이 뻗어 나왔던 것이다. 그들은 대전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가슴뼈가 모두 부러지고, 선혈을 사방에 뿜으며 처참하게 죽어갔다. 뜻밖에 일어난 이 변화에 여러 무림 고수들은 흠칫 놀랐다. 날카로운 눈초리들이 재빨리 대전 안을 훑어보았다. 안에는 거대한 무덤이 있을 뿐 다른 고수들이 잠복해 있을 만한 곳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선우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느 고수께서 대전 안에 잠복하여 사람을 해쳤는지 어서 정체를 나타내시오.” 강호 무림의 군웅들은 어느 누구도 그 괴이한 장풍이 무덤 속에서 묘비를 통하여 뻗쳐 나왔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