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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돌아온 지 며칠도 안 되어 왕룽은 벌써 고향을 떠났던 일이 거짓말처럼 생각되었다. 고향을 떠나 있었다는 것은 꿈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실 그의 몸은 고향을 떠나 있었을망정 마음은 언제나 고향에서 헤매었던 것이다. 그는 돌아오면서 은전 여섯 닢으로 벼와 밀과 옥수수 등의 좋은 씨앗을 사왔다. 또한 돈 있는 김에 미나리와 연뿌리라든가 또 맛난 음식을 장만할 때 돼지고기와 함께 삶을 붉은 무라든가, 잘고 붉으면서도 향기 좋은 팥의 씨도 사왔다. 그리고 또 은전 열 닢을 주고 밭을 갈 황소도 샀다. 그것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서였다. 정거장에서 내린 그는 밭을 갈고 있는 농부를 발견하자 걸음을 멈추었다. 늙은 아버지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은 모두 걸음을 재촉해서 빨리 집에 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왕룽은 그 농부가 부리고 있는 황소에 눈이 팔렸다. 바탕이 큼직하고 멍에를 걸어 멘 어깨가 떡 벌어진 것이 왕룽의 마음에 꼭 들었다. 그는 농부에게 흥정을 했다. "그 소가 그리 시원치는 않으나 나는 그런 소라도 필요하니 그 소를 안파시겠소?" 그러나 그 농부도 지지 않고 대답했다. "여편네를 팔았으면 팔았지 이 소는 팔지 않소. 이제 세 살 나서 한창 부리기 좋을 땐데." 농부는 왕룽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밭만 갈았다. 왕룽은 지금까지 이렇게 좋은 소를 본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내와 아버지에게도 물어 보았다. "저 소 어떨까요?" 늙은이는 유심히 바라보더니, "훌륭한 소다!" 하고 맞장구를 쳤다. 오란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이 말보다 한 살 더 먹었나 봐요." 그러나 왕룽은 그 소가 힘이 세 보이고 또 미끈한 누런 털빛이나 검고 어글어글한 눈에 마음이 끌려서 사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아무 대꾸도 없었다. 이 소만 있다면 밭갈이도 할 수 있고 연자방아를 매어 곡식도 찧을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농부의 곁으로 다가서며 말을 붙였다. "값은 잘 해 줄 테니 내게 파시구려." 마치 싸우다시피 오랫동안 흥정한 나머지 마침내 이 지방의 시세보다 절반이나 더 비싼 값에 소를 사게 되었다. 왕룽은 농부가 달라는 대로 값을 치르자 멍에를 풀기가 바쁘게 고삐를 끌며, 이것이 자기 소가 된 것을 기뻐하며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문짝은 떨어져 나가고 지붕의 이엉은 간 곳도 없었다. 집안에 남겨 두고 간 괭이도 쇠스랑도 누가 훔쳐 갔고 엉성한 대들보와 무너져 가는 흙벽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크게 놀랐으나 그에게는 돈이 있으니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는 곧 성안으로 들어가 아주 단단한 쟁기와 괭이, 쇠스랑을 두 자루씩 사왔다. 지붕은 가을에 추수한 다음에 다시 하기로 하고 우선 거적을 사다가 ㄷ었다. 그날 해질 무렵에 그는 문간에 서서 그의 밭을 바라보았다. 겨울 동안에 얼었던 땅이 녹아 푹신해져서 파종하기에 알맞았다. 못에서는 개구리들이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고요한 봄바람을 타고 담 밑엔 죽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황혼 빛 속에 가까운 밭둑길에 서 있는 한줄기의 나무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복숭아 나무는 예쁜 봉오리를 맺고 있었고 버드나무는 연초록 새싹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고요한 대지 위에 달빛같이 은은한 안개가 피어 올라 나뭇가지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것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왕룽은 한동안 다른 사람을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혼자 밭에만 나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을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간혹 지난 겨울에 죽지 않고 살아난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도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가 내 사립문을 부수었소? 쇠스랑과 괭이를 훔쳐간 놈이 어떤 놈이오? 또 내 집 지붕을 벗겨다 땐 놈은 누구요?" 그러나 그들은 모두 점잖은 군자처럼 머리만 저었다. 어떤 사람은 '자네 삼촌이 그랬네.' 하고 말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런 흉년에 전쟁이 났으니 어딘들 비적이 없겠나. 그런 세상에 누가 무얼 훔쳐 갔느니 어떠니 할 나위 있나? 배 고프면 누구나 도적질 하는 게지.' 하고 말했다. 이웃집의 칭 서방이 기다시피 왕룽을 찾아왔다. "이 겨우내, 비적들이 자네 집에 틀어 박혀서 이 부근 마을을 노략질했지. 자네 삼촌이 비적들과 가까이 지냈다고들 하지만 이런 시절에 그런 풍설을 믿을 수 있나. 누구도 탓할 수 없는 노릇이야." 칭 서방은 뼈만 앙상하게 남아 몰골이 아니었다. 아직 마흔다섯 살도 안 되었는데 머리가 백발이었다. 그를 바라보던 왕룽은 갑자기 측은한 생각에 가슴이 저며왔다. "자네는 우리보다 지내기가 더 어려웠던 모양이네. 뭐라도 먹고 살았는가?" 칭 서방은 또 다시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무엇인가 안 먹었겠나? 성안에 가서 구걸하러 다닐 땐 개처럼 길바닥에 내버린 썩은 창자 같은 것도 주워 먹었지. 무슨 고기인지 알아보지도 못할 지경이었지...... 그저 여편네는 짐승을 자기 손으로 잡을 사람이 못되니까 어디서 주웠거니만 생각하고 먹었지. 그리고 여편네는 나보다도 기운이 약해서 먼저 죽어 버리고 딸년도 잇따라 죽을 것 같아 군인에게 주었지......" 말을 끊은 칭 서방은 울먹이며 서 있더니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종자나 있다면 뿌려라도 보겠는데, 그것도 없으니......" 이 말을 들은 왕룽은 칭 서방의 손을 잡고 "이리 오게" 하고 방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는 칭 서방의 옷자락을 벌리고 남방에서 사 가지고 온 씨앗을 나누어 주었다. 벼, 밀, 배추 등의 씨앗을 주면서 왕룽은 칭 서방에게 말했다. "내일 자네 밭에 우리 소를 끌고 가서 갈아 주지." 칭 서방은 갑자기 훌쩍거렸다. 왕룽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참으며 성난 사자처럼 말했다. "자네가 내게 팥 한줌 나누어 주던 것을 내가 잊은 줄 아나." 그러나 칭 서방은 눈물을 계속해서 뚝뚝 떨어뜨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왕룽은 그의 골칫거리인 삼촌이 마을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이 기뻤다. 어디로 갔는지 자세한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성안으로 갔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아무튼 마을에는 없는 것이 분명했다. 계집애들은 모조리 팔아 먹었다는 것이다. 값이 비싸기 때문에 예쁜 딸은 제 값에 팔았지만 나중엔 그 흉한 곰보딸마저 전쟁터로 가는 군인에게 동전 몇 푼 받고 팔았다고 했다. 왕룽은 흙투성이가 되어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밥먹는 시간조차 아까웠으므로 점심을 먹기 위해 집까지 돌아가야 하는 시간에 빵 조각과 마늘만으로 점심을 싸 가지고 가서 밭둑에서 선 채로 먹었다. 그렇게 서서 밥먹는 동안에도 '저쪽 밭이랑에는 울콩을 심고 이 논에는 못자리를 만들고' 하는 생각들로 분주했다. 한낮이 되어 너무 고단하면 그대로 밭이랑에 누워 포근한 흙 기운을 느끼며 한잠 달게 잤다. 집에 있는 오란도 결코 쉬지 않았다. 그는 손수 거적으로 지붕을 고치기도 하고 흙을 파다가 구멍난 벽을 바르기도 했다. 또 바로 뚫어진 방바닥도 고쳤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같이 성안에 들어가서 침대와 탁자와 의자 여섯 개와 가마솥을 사고 그 밖에도 필요치는 않았으나 검은 꽃 모양이 그려진 붉은 찻병과 모양 예쁜 찻잔을 여섯 개 샀다. 다음엔 향 파는 가게에 가서 대청 탁자 위에 모셔 놓은 복신상(福神像)과 그 앞에 불을 밝힐 양초와 향로 등도 샀다. 그 양초는 암소 기름으로 만든 것인데 갈대 잎을 쪼개어 만든 것으로 가느다란 심지가 박힌 굵은 초였다. 살 것을 다 사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왕룽은 사당의 지신님이 문득 생각 나 그곳을 한번 들여다보았다. 지신님의 모양은 민망스러울 정도로 비참했다. 흙으로 만든 몸체는 비에 씻겨 눈도 코도 분간할 수 없었고 종이옷은 다 낡아서 살이 다 드러나 보였다. 그러게 무서운 흉년인지라 아무도 거들떠본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왕룽은 고소한 듯이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일을 저지른 아이를 꾸짖는 것처럼 언성을 높였다. "사람을 못 살게 하면 그렇게 되는 거야." 왕룽의 집은 다시 새로와졌다. 대청 탁자 위에 향로가 놓이고 향불과 함께 큼직한 촛불이 춤을 추었다. 그리고 예쁜 찻병과 찻잔도 놓여 있었고 침대도 있고 가구들도 모두 제 모양을 갖추었다. 그의 침대 봉창엔 새로운 종이를 바르고 문짝도 새로 달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왕룽은 지나친 행복이 새삼 두려워졌다. 오란은 임신하여 배가 불룩했다. 아이들은 강아지처럼 집 안팎으로 뛰어다니고 늙은이는 양지쪽에 기대어서 졸기만 하는 것이 무한히 만족한 모양이었다. 그는 졸면서도 빙긋이 웃는 것 같았다. 그의 논에선 벼가 무럭무럭 자라고 심어 둔 콩은 껍질을 쓴 채 땅에서 고개를 뾰족뾰족 내밀었다. 돈을 아껴만 쓴다면 가을까지는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다. 왕룽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흰 구름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흘러가는 것 같았다. 곡식이 자라는 들판과 왕룽은 모두 햇볕과 비가 알맞게 조화를 이룬 기쁨에 느긋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는 마지못한 듯이 중얼거렸다. "사당에 모신 지신님에게도 향을 피워야겠다. 아무래도 지신님 덕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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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