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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극대도] 2권 제4장 강호(江湖)에 풍운(風雲)이 일다 ① 비 개인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청명(淸明)하고, 물먹은 수목은 만 족한 듯 활짝 기지개를 펴고 있다. 딩띵! 디디딩띵! 그 싱싱한 생명력 사이로 그윽한 금음(琴音)이 춤추듯 흐르고 있 었다. 금음은 주변의 넘치는 생명력과는 달리 무척이나 슬픈 음조 (音調)를 띠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구름다리를 건너 정자로 다가가는 신선풍의 노인, 즉 왕도연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여야서회곡(旅夜書懷曲)을! 사부께서 외로우신 건가, 그런 건 가?' 두보(杜甫)의 여야서회(旅夜書懷:객지에서 밤을 지새며)란 시구에 음률을 가미시킨 이 곡은 천지간을 날다가 모래밭에 앉은 한 마리 갈매기와 같이, 떠돌다가 늙음과 병으로 죽는 신세를 한탄하는 곡 이었다. 정자에 오른 왕도연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몸가짐으로 서서 사부의 등을 보았다. 사부의 등은 자신보다 훨씬 작다. 그러나 언제나 다가갈 수 없는 하늘처럼 보이던 사부의 등이 오늘은 예전같이 보이지 않은 이유 는 무엇인가. 왕도연이 청년기(靑年期) 시절, 사부는 수많은 군웅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하를 피로 물들이려는 한 마인(魔人)을 죽이는 위대함을 보였다. 그러나 그 화려한 뒤안길에서 사부는 삼 년 동안 면벽을 하여야만 했다. 당신 손으로 죽인 마인이 바로 하나밖에 없는 딸의 낭군이 었기에. 금음이 멈추고, 사부의 창노한 음성이 들렸다. "공사다망(公私多忙)하신 자네가 어쩐 일로 이 늙은이를 찾았는 가?" 제자에게 하는 말치고는 극히 정중했다. 하기사 제자의 나이가 백을 바라보니 그렇겠지만, 왕도연은 옛날 처럼 추상같은 꾸짖음이 더 그리웠다. 그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허리를 굽혔다. "알려 드릴 일이 있어 왔습니다, 사부님." "이 쓸모 없는 늙은이에게 알릴 일이라……." 혼자말처럼 중얼거린 마의노인은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단호삼이라는 아이에 관한 일인가?" 흠칫! 청심거(淸心居)라 이름 붙인 이곳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던 사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왕도연을 놀라게 하기에 충 분했다. 진정 사부는 앉아서 천 리를 본다는 신선(神仙)인가. 그가 묻기 전, 마의노인이 먼저 입을 어디인가 다녀온 장백검유 왕도연은 칠파일방의 장문인들을 등룡 전 의사청으로 불러 모아 무림맹이 처한 현실과 가장 먼저 해결해 야 하는 일들을 설파(說破)한 후에 그 대처 방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다른 이견(異見)이 없냐고 물었을 때, 곽여송은 벌떡 일어 나 소리쳐 물었다. 왜 단호삼에게는 청성파만 붙이느냐고. 그제야 잊고 있었던 사실이 생각난 듯 이마를 가볍게 두드리며 하 는 대답 왈, "단호삼이란 아이에 대해 조사를 해보니 비록 산적질을 했을망정 인명을 상하게 하지 않았음이 드러났소. 그리고 몇 번에 걸친 살 인행각은……." 그는 옆에 공손히 시립해 있는 마룡 비천혈신 하후천을 가리키며 담담하게 말했다. "어리석은 이 아이가 자존심을 회복한답시고 화(禍)를 자초한 것 이니. 그런 이유로 무림공적으로 몰아붙인다면 형평성에 어긋남이 오. 해서, 이번 기회에 노부는 이 자리를 빌어 감히 여러 장문인 께 명하고자 하오!" 의논이 아니라, 명이라 하는데 누가 왕도연의 뜻을 거스르겠는가. 그에게 칠파일방의 장문령부가 있다는 사실 외에도, 당금 강호에 서 홀연히 사라진 무면탈혼검 사하립을 제외하고 어느 누가 상대 가 되겠는가. 하물며 단호삼에 대한 재평가도 사실인 데다, 무림맹을 만든 목적 도 오직 피의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는 강호무림의 역사를 바꾸고자 함이고 보면 왕도연의 말에 반발을 한다는 것은 곧 스스로 마도인 이라고 자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단호삼은 공적에서 제외되었고, 그나마 다행한 것은 후계 자를 잃은 청성파만이 나설 자격이 있다 하여 보내 주었다는 것이 다. 처음부터 단호삼을 공적으로 만든 우리들에게도 그 죄가 있으니, 최대한 생포해서 무림맹에 데려다주길 바란다는 왕도연의 당부의 말을 떠올린 순간, 곽여송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미친! 갈가리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을. 흥! 어림없다! 놈이 공적이든, 아니든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버리고 말겠다!' 빠드득 하고 이 가는 소리에, 사정이 이러한데 어쩌겠소 하는 식 으로 침을 튀며 설명하던 최익경은 뜨끔했다. '그렇게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다니! 이렇게 말귀가 어두운 사람이 어떻게 장문이 됐지? 쯔쯔! 청성도 완전히 날샜군, 샜어.' 자신과 관계도 없는 청성파의 앞날을 걱정할 때, 실내로 옷자락을 끌며 들어오는 여인이 있었다. 부모나 형제자매, 혹은 가까운 친지들이 죽었을 때 입는 누런 삼 베 상복(喪服)을 입고, 얼마나 울었는지 눈두덩이가 퉁퉁 부풀어 오른 여인은 바로 비봉 모용약란이었다. 천장으로 시선을 돌려 분을 삼키고 있는 곽여송 뒤에 다가간 그녀 는 처연한 음성으로 불렀다. "아버님……." 거의 울음에 가까운 부름에 고개를 돌린 곽조웅의 눈에 언뜻 애처 로움이 스쳤다. '불쌍한 녀석. 얼마나 상심이 컸으면 부용 같던 얼굴이 반쪽이 됐 어…….' 한 시진 전에 은검보에 그가 도착했을 때 모용약란의 모습이 보이 지 않아 물어본 결과, 지금 방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 리고 덧붙이기를, 지난 열흘 동안 식음을 전폐(全閉)하고 탁천용 검 곽조웅 곁에서 울다가 졸도하기를 몇 차례였다는 것이다. 주위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심금(心琴)을 울리다가 기어코 어젯 밤에는 완전히 혼수 상태에 빠져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 을 듣고 한달음에 모용약란을 찾아가고 싶은 것을 그는 이를 모질 게 깨물고 참았다. 일양자(一陽子). 무림맹에서 보여 준 모용약란의 사부이자, 곤륜장문 일양자의 행 위가 너무 괘씸했다. 일양자에게 도움을 바라는 눈길을 보냈을 때, 그가 모른 척하고 고개를 외면하던 장면이 눈에 선했기 때문 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이 사람 마음이라더니, 모용약란을 보는 순 간, 일양자에 대한 실망이 깊어 냉정히 대하리라던 마음은 봄눈 녹듯 사라지고 애틋함만이 가슴에 차 올랐다. '네게 무슨 죄가 있을까.' 감정이 흔들린다고 밖으로 나타낼 정도로 무공이나 그 수양이 낮 은 사람이 아니었다. 곽여송은 담담하게 물었다. "그래, 몸은 좀 어떻느냐?" "아버… 흑!" 그렇게 울고도 눈물샘이 마르지 않았는가. 사랑하는 이가 닮은 곽 여송을 보자 모용약란은 왈칵! 눈물을 쏟으며 품으로 몸을 던졌 다. "오냐, 오냐… 네 마음 안다, 알아……." 등을 토닥거리는 곽여송의 눈에도 뿌연 물막이 피어 올랐다. ②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침묵은 마의노인에 의해 깨어졌다. "부탁이 있네." 부탁이라니! 황송한 표정으로 허리를 구부리는 왕도연의 입에서 '제자가 어찌 감히…….'라는 말이 나오기 전, "사령마황의 후예가 나타났으니, 단호삼… 그 아이가 희생양이 아 니라면 공적이란 굴레를 벗겨 주게. 이것은 이 늙은이의 부탁이기 도 하지만 유명(遺命)을 달리한 하립이의 부탁이기도 하네." '기어이……!' 왕도연이 내심 탄식할 때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마의노인은 심중 (心中)에 들어 있는 말을 하고 말았다. "만약 이 늙은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곳 일을 자네에게 맡기 겠네. 허허, 강호를 평화롭게 하는 것이 바로 자네 사형을 돕는 길이며, 우리 민족을 위한 길임을 명심하고 최선을 다해 주게나." 분명 우리 민족(民族)이라 했다. 마치 중화인(中華人)이 아닌 것 처럼. 그런 대로 평화를 유지하던 강호무림이 흔들렸다. 별 볼일 없는 산적 떼들이 무서운 집단을 만들었는가 하면, 그 산 적 떼 중 한 명은 무림공적으로 낙인 찍혔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조차 두려운 전설 속의 악인(惡人)인 사령마황 의 후예가 나타났다. 녹색 광채에 휩싸였다 하여 녹광마영(綠光魔影)이라고 이름 붙인 그도 철탑검귀 단호삼과 같이 무림공적의 반열(班列)에 올랐다. 어디 그뿐인가. 녹림칠십이채! 강남마도의 태산북두(泰山北斗) 격인 녹림칠십이채는 무림맹이 보 낸, 지닌바 무공을 전폐시키고 녹림칠십이채를 해체하라는 첩지에 도 불구하고, 강남에 산재해 있는 군소마방(群小魔 )을 불러들여 일전불사의 뜻을 비추었다. 일이 이쯤 되자, 괜히 무림맹을 만들어 평지풍파를 불러들인 것이 아니냐는 원성(怨聲)마저 듣게 된 무림맹주인 장백검유 왕도연은 이 세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해결하고자 했다. 소림사(少林寺), 점창(點蒼), 곤륜(崑崙), 아미(峨嵋), 개방( ) 을 녹림칠십이채로 보냈고, 왕도연 자신은 공동( ), 화산(華山) 과 함께 녹광마영의 추적에 나섰다. 그리고 청성(靑城)은 단호삼을 쫓기 시작했으니, 이제 강호무림은 바야흐로 폭풍전야의 고요함에 잠겼다. 자랑스런 아들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어느 누구에게도 '이 아이가 바로 내 자식이외 다.' 하고 말할 수 있는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이 이제 가고 없다. 아니,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 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했으니 언제까지고 함께 살아 숨쉴 것 이다. 아들의 부릅뜬 눈을 감기는 복마신검 곽여송의 깡마른 손은 중풍 걸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인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의 몸을 만지는 것이……. 마지막인데, 그런 것인데 왜 이리 차가운가, 전처럼 뜨겁지 않고. ③ 푸시싯! 단단하기가 청강석(靑剛石) 못지않다는 흑단목(黑端木) 탁자가 곽 여송의 육장 아래 연기를 뿜으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해 보시오, 최보주?" 음성은 아들을 잃은 사람이라 할 수 없을 만치 담담하다. 그러나 내화진기로 흑단목 탁자를 태울 정도로 곽여송이 분노하고 있음을 은검보주인 남천은수검 최익경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저러한 눈을, 분노를 안으로 삼킬 줄 아는 저런 눈을 가진 사람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음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까딱 말 한번 잘못했다가는 단호삼에게 향한 원한의 검이 자신에 게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도총관이 필사적으로 놈을 쫓았지만, 폭우 때문에 그만……." "그래서!! 그래서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앉아서 본 장문을 맞이하는 것이오!? 사건은 진회하에서 벌어졌는데, 하 남성에 앉아서 말이오!" "!" 곽여송은 서릿발같이 몰아붙이고, 최익경은 자라목같이 오그라들 었다. 의사청이라 할 수 없는 작은 곳이지만, 그래도 은검보의 제반업무 를 수행하는 여기에 자신의 수하가 없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젠장! 나이도 노부보다 열 살이나 아래인 것이 너무 심하군. 제 놈 새끼를 그 비싼 흑오석관(黑烏石棺)에 넣고도 모자라 행여 부 패할까 봐 없는 돈에 얼음까지 채워놓은 공도 모르고. 빌어먹을! 힘이 없다는 게 이렇게 서러울 줄이야.' 나름대로 할 일을 다했으니, 할말도 많다. 하지만 입을 열어 왜 내게 화풀이냐고 따질 배포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한다는 소리가 겨우, "곽장문의 심정은 이해하오. 하지만 노부가 추적에 나서려는 순간 에, 아… 글쎄 공교롭게도 맹주님의 친서(親書)가 도착했지 뭡니 까." 말끝을 흐린 그는 오 일 전에 가장 빠른 연락책인 전서구(傳書鳩) 를 통해 받았던 서신을 소매에서 꺼내 기세 좋게 탁자 위에 펼쳤 다. "바로 이것이오. 에, 그 내용을 보자면……." 가상하게도 최익경은 서신의 내용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잘 읽을 수 있도록 펴놓고도 말이다. 혹시 천하에서 자신만이 글을 읽을 수 있다고 착각한 건지……. 하지만 곽여송은 보지도, 듣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무슨 내용인 지 뻔하니까. 어디인가 다녀온 장백검유 왕도연은 칠파일방의 장문인들을 등룡 전 의사청으로 불러 모아 무림맹이 처한 현실과 가장 먼저 해결해 야 하는 일들을 설파(說破)한 후에 그 대처 방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다른 이견(異見)이 없냐고 물었을 때, 곽여송은 벌떡 일어 나 소리쳐 물었다. 왜 단호삼에게는 청성파만 붙이느냐고. 그제야 잊고 있었던 사실이 생각난 듯 이마를 가볍게 두드리며 하 는 대답 왈, "단호삼이란 아이에 대해 조사를 해보니 비록 산적질을 했을망정 인명을 상하게 하지 않았음이 드러났소. 그리고 몇 번에 걸친 살 인행각은……." 그는 옆에 공손히 시립해 있는 마룡 비천혈신 하후천을 가리키며 담담하게 말했다. "어리석은 이 아이가 자존심을 회복한답시고 화(禍)를 자초한 것 이니. 그런 이유로 무림공적으로 몰아붙인다면 형평성에 어긋남이 오. 해서, 이번 기회에 노부는 이 자리를 빌어 감히 여러 장문인 께 명하고자 하오!" 의논이 아니라, 명이라 하는데 누가 왕도연의 뜻을 거스르겠는가. 그에게 칠파일방의 장문령부가 있다는 사실 외에도, 당금 강호에 서 홀연히 사라진 무면탈혼검 사하립을 제외하고 어느 누가 상대 가 되겠는가. 하물며 단호삼에 대한 재평가도 사실인 데다, 무림맹을 만든 목적 도 오직 피의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는 강호무림의 역사를 바꾸고자 함이고 보면 왕도연의 말에 반발을 한다는 것은 곧 스스로 마도인 이라고 자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단호삼은 공적에서 제외되었고, 그나마 다행한 것은 후계 자를 잃은 청성파만이 나설 자격이 있다 하여 보내 주었다는 것이 다. 처음부터 단호삼을 공적으로 만든 우리들에게도 그 죄가 있으니, 최대한 생포해서 무림맹에 데려다주길 바란다는 왕도연의 당부의 말을 떠올린 순간, 곽여송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미친! 갈가리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을. 흥! 어림없다! 놈이 공적이든, 아니든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버리고 말겠다!' 빠드득 하고 이 가는 소리에, 사정이 이러한데 어쩌겠소 하는 식 으로 침을 튀며 설명하던 최익경은 뜨끔했다. '그렇게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다니! 이렇게 말귀가 어두운 사람이 어떻게 장문이 됐지? 쯔쯔! 청성도 완전히 날샜군, 샜어.' 자신과 관계도 없는 청성파의 앞날을 걱정할 때, 실내로 옷자락을 끌며 들어오는 여인이 있었다. 부모나 형제자매, 혹은 가까운 친지들이 죽었을 때 입는 누런 삼 베 상복(喪服)을 입고, 얼마나 울었는지 눈두덩이가 퉁퉁 부풀어 오른 여인은 바로 비봉 모용약란이었다. 천장으로 시선을 돌려 분을 삼키고 있는 곽여송 뒤에 다가간 그녀 는 처연한 음성으로 불렀다. "아버님……." 거의 울음에 가까운 부름에 고개를 돌린 곽조웅의 눈에 언뜻 애처 로움이 스쳤다. '불쌍한 녀석. 얼마나 상심이 컸으면 부용 같던 얼굴이 반쪽이 됐 어…….' 한 시진 전에 은검보에 그가 도착했을 때 모용약란의 모습이 보이 지 않아 물어본 결과, 지금 방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 리고 덧붙이기를, 지난 열흘 동안 식음을 전폐(全閉)하고 탁천용 검 곽조웅 곁에서 울다가 졸도하기를 몇 차례였다는 것이다. 주위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심금(心琴)을 울리다가 기어코 어젯 밤에는 완전히 혼수 상태에 빠져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 을 듣고 한달음에 모용약란을 찾아가고 싶은 것을 그는 이를 모질 게 깨물고 참았다. 일양자(一陽子). 무림맹에서 보여 준 모용약란의 사부이자, 곤륜장문 일양자의 행 위가 너무 괘씸했다. 일양자에게 도움을 바라는 눈길을 보냈을 때, 그가 모른 척하고 고개를 외면하던 장면이 눈에 선했기 때문 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이 사람 마음이라더니, 모용약란을 보는 순 간, 일양자에 대한 실망이 깊어 냉정히 대하리라던 마음은 봄눈 녹듯 사라지고 애틋함만이 가슴에 차 올랐다. '네게 무슨 죄가 있을까.' 감정이 흔들린다고 밖으로 나타낼 정도로 무공이나 그 수양이 낮 은 사람이 아니었다. 곽여송은 담담하게 물었다. "그래, 몸은 좀 어떻느냐?" "아버… 흑!" 그렇게 울고도 눈물샘이 마르지 않았는가. 사랑하는 이가 닮은 곽 여송을 보자 모용약란은 왈칵! 눈물을 쏟으며 품으로 몸을 던졌 다. "오냐, 오냐… 네 마음 안다, 알아……." 등을 토닥거리는 곽여송의 눈에도 뿌연 물막이 피어 올랐다. ④ 뜻밖에, 어릴 적에 깨밭을 뒹굴었는지 얼굴에는 주근깨투성이에다 다리까지 약간 저는 청년이 은검보를 찾아왔을 때에는 곽조웅의 시신을 청성으로 운구할 준비가 끝날 무렵이었다. 생김새답지 않게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는 청년은, 대담하게 도 곽여송과의 단독면담을 요청해 한바탕 실소를 터뜨리게 만들었 다. 곽여송이 누구라고 감히 볼품없는 청년과 단독면담을 하겠는가. 면담은커녕 말 한마디도 붙이지 못할 것이다. 쓸데없는 말하지 말고 돌아가라는 권고에도 불구하고, 청년의 진 드기처럼 통사정을 하였다. 필유곡절(必有曲折)이라. 저렇게까지 애원하는 데는 분명 무언가 있다는 생각에 청성의 무 사가 곽여송에게 아뢰었고, 평소의 그답지 않게 곽여송은 순순히 청년을 만났다. 그리고 한참 후, 곽여송은 굳은 얼굴로 청년과 함께 은검보를 떠 났다. 자신이 청성에 갈 때까지 시신을 매장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 "저… 사양하면 안됩니까요?" "좋은 생각이다. 선택은 네게 달렸으니… 사양해도 된다!" "가,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 형제는 이만……." "잠깐!" "……." "가더라도 어깨 위의 있는 물건은 내려놓고 가라!" "어깨 위?"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이다, 하고 잠시 생각하던 텁석부리 사내 는 언젠가 자신이 채무관계로 한 농부를 닥달할 때 써먹었던 말임 을 깨달은 순간, 머리가 독사대가리같이 튀어나왔다. "하, 하겠습니다!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운대산(雲臺山). 구름을 받치듯 이고 있다 하여 운대산이라 불리는 이 산을 혹자는 삼해산(三海山)이라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다. 세 개의 바다를 가진 산이라 불리는 연유는 이러했다. 멀리서 보면 구름바다[雲海]였고, 좀더 가까운 곳에서 보면 자욱 한 안개의 바다[霧海]며, 마침내 운대산을 지척에서 볼라치면 그 윽한 죽향(竹香)과 더불어 푸른 대나무가 망망대해를 이루고 있음 이니 죽해(竹海)라 불렀다. 게다가 산세를 이루는 능선이 여인의 나신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절경 중 의 절경이었다. 풍경(風景)이 이렇게 절묘한데 어찌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겠는가. 그리고 사람이 찾는 곳에는 언제나 먹는 장사치들이 판을 치는 것 이 상례이다. 한데 세상사에는 언제나 예외가 있다. 예외가 없으면, 또한 사는 재미가 반감되는 법이다. 그 예외라는 것이 이곳 운대산에 적용되고 있었다. 운대산에 있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주루는 그 흔한 이름도 없 다. 하지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주루명(酒樓名)은 어처구니 없게도 천하일미루(天下一味樓)였다. 모르는 사람이 이 말을 들으면, 천하일미가 어디 말라 비틀러진 말 뼈다귀 이름인가, 겨우 스무 명 남짓 앉을 수 있는 주루에 갖 다 붙이다니, 하며 비웃음을 던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왜 천하일미루가 됐는지에 대해 자상한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운대산에는 족히 삼십 개가 넘는 주루와 객점이 있었는데, 삼 년 전에 사순 가량의 한 부부가 와서 이 주루를 지은 뒤에 하 나 둘씩 없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천하일미루뿐이라고. 이쯤 되면 호기심이 일기 마련이다. 왜 몹쓸 전염병이라도 돌아 모두 떠났느냐고 물으면, 천하일미루 의 주인의 과거에 대해 들을 수 있다. 나이 일곱에 조실부모(早失父母)한 까닭에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름도 그 유명한 동정호반(洞定湖畔)의 황학 루(黃學樓) 점소이부터 시작해 나이 스물에 주방 보조가 되었으 며, 선천적으로 타고난 뛰어난 미각과 후각, 그리고 감각으로 이 년 만에 부주방이 되었다. 그 후 오 년 뒤에 주방장이 되었다. 그러다 나이 사십에 결혼을 해 이곳으로 이주한 그가 바로 요식업 계(料食業系)에서 신화로 불리는 이삼룡(李森龍)이라는 말이 끝나 기 전에 어처구니없어 하던 사람은 이미 자리를 떠나 벌써 천하일 미루로 달려간다. ⑤ 푸른 대나무로 촘촘한 벽면에 걸린 산수도(山水圖)와 수렵도(狩獵 圖), 백호도(白虎圖)를 둘러보던 황보영우는 혀를 내둘렀다. "음식 솜씨만 뛰어난 줄 알았는데… 실내를 치장하는 데도 상당한 조예가 있군요." 단호삼도 내심 감탄하고 있던 터라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장식에 대해 문외한인 내 눈에도 어딘지 모르게 남다 르게 보이는군요." 때마침 소문만큼 빠른 솜씨로 주문한 음식을 들고 나오던 이삼룡 은 그 말에 주춤,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거… 두 분, 공자께서 소인을 너무 과찬하시니, 몸 둘 바를 모 르겠습니다." 악기(惡氣)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선량한 눈을 보던 단호삼은 빙그레 웃었다. "몸 둘 곳을 찾지 못해도 관계는 없소만, 음식 둘 곳은 잘 찾으시 오." 싫지 않은 농담이다. 많은 사람을 접해 사람 보는 눈이 남다른 이삼룡은 지하에서 솟아 나는 암반수(巖盤水)에 소 뼈다귀와 당귀(當歸), 봉령(茯笭), 백 출(白朮)을 넣고 이틀 동안 푹 고아 만든 육수(肉水)를 얼음처럼 차게 만든 후, 마지막으로 메밀국수에다 먼지처럼 곱게 빻은 콩가 루를 살짝 뿌린 콩국수와 인삼을 넣어 만든 잉어탕, 그리고 운대 산에 올라 죽엽청(竹葉淸)을 먹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가지 말아 라,라는 말을 만들어낸 문제의 죽엽청 한 병을 탁자에 놓으며 신 기하다는 듯 웃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공자같이 늠연(凜然)하게 생기신 분이 그런 농담을 다 하시다 니." "하하하, 주인장, 정말 옳게 봤소이다. 사실 그래서 나도 지금 놀 라고 있는 중이라오. 하하하!" 황보영우까지 맞장구를 치자, 단호삼은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나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놈인데." 그 말에 휘둥그래진 눈으로 손을 들어 단호삼을 가리키던 황보영 우는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저, 저런. 하하하!" 아무리 우스운 이야기라도 손님 앞에서 큰소리로 웃는다는 것은 장사를 안하겠다는 뜻이다. 일찍부터 이런 상도덕을 안 이삼룡은 입을 가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잠시 후, 황보영우가 웃음을 멈추자, 그는 거의 구십 도에 가깝게 허리를 숙였다. "정성껏 만들었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그 뛰어난 요리 솜씨에 태도가 이렇게 깍듯하니 어찌 다른 주루가 망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면서 단호삼은 살짝 고개를 숙여 답례를 하며 말했다. "고맙소. 내 다음에 꼭 들리리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어 몸을 돌린 그는 혼자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나직이 중얼거 렸다. "참, 이상하네. 오늘따라 왜 이리 손님이 없지." 단호삼과 황보영우는 무예고수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조심한 다고 하는 그 말을 못 들을 리가 없었다. 저런 사람이 잘 살아야 할 텐데 하고 걱정 어린 시선으로 서로의 눈을 찾던 그들은 곧 빙그레 웃은 뒤에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은은하게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와 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해가 뜨면, 반드시 지는 법이다. 사람도 만남이 있으면, 반드시 헤어짐의 고통이 뒤따른다. 어떠한 관계이든 마찬가지인 것이다. 인간의 종착역은 죽음이니까. 천하일미루를 나온 두 사람은 한 시진이 지나도록 서로간에 대화 를 하지 않았다. 경공술을 전개하면 다음날 새벽 무렵이요, 이렇게 황보영우는 풍 취에 흥겨운 듯이 시구를 흥얼거리고, 단호삼은 그 시구에 짐짓 귀를 기울이는 듯이 하며 터덜터덜 걸으면 이틀거리에 헤어짐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팽후와 만나기로 한곳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솨아― 쏴―! 가끔씩 부는 바람에 청죽(靑竹)이 거세게 흔들리며 내는 소리가 어쩜 저리도 거센 빗소리와 같을까 하고 생각할 무렵, 문득 황보 영우의 흥얼거림이 뚝 멈추었다. 자신도 모르게 자연히 멈추어지는 발. 돌아보는 얼굴에는 농부가 자신이 기울인 노력의 결실을 거둘 때나 봄직한 소박하며 따뜻한 미소가 눈과 입술에 걸려 있었다. "무척 듣기 좋았는데, 왜 멈추는 거요?" "……." 단호삼은 쑥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 치켜올렸다. 대답을 안하고 빤 히 쳐다보는 황보영우의 마음을 왜 모르겠느냐마는 그는 의뭉스럽 게 물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소?" 그러면서 짐짓 얼굴을 쓰다듬으며 '아무것도 없는데.' 하며 중얼 거리는 단호삼을 잠시 더 물끄러미 쳐다보던 황보영우는 슬쩍 얼 굴을 돌리면서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왜 경공술을 전개하지 않습니까? 몹시 만나고 싶을 텐데요." 뜻밖의 말이지만 단호삼은 놀라지 않았다. 여인처럼 고운 선을 지닌 황보영우의 옆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 웃음을 보지 못하리라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황보형이 무척 지루했나 보오. 하긴, 내가 재미가 없는 사람이니 그럴 만도 하지." 그는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자, 어서 갑시다!" 움찔. 황보영우의 눈과 몸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어깨를 맞았기 때문만 은 아닐 것이다. 그가 뭐하고 입을 열려는 바로 그때였다. "아악!" 이히힝… 힝! 비단 폭 찢어지는 듯한 여인의 음성과 말울음 소리가 동시에 들렸 다. 소리가 희미한 것을 보니 제법 먼 거리인 듯싶었다. 단호삼이 천하일미루에서 식사한, 수심 가득한 부인과 시녀, 그리 고 초라하게 늙은 노인이 탔던 이두마차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황 보영우의 눈을 찾을 때, "빨리 가봅시다! 아마도 좀 전에 지나간 그 마차 같소!" 하며 황보영우는 이미 몸을 날리고 있는 중이었다. ⑥ 푸레질을 하는 이두마차 곁에는 가슴이 갈라진 노인이 눈을 부릅 뜬 채로 죽어 있고,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세 사내가 보는 가운데 바지를 반쯤 내린 사내의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있었 다. 맨 땅에 저 짓을 할 리는 없고, 분명 사내 밑에는 여인이 깔려 있 으리라. 그런데도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사내의 몸에 가려서 일 테고, 강간을 당하면서도 꼼짝도 않고 소리도 없는 것을 보니 혈도를 제 압당한 모양이었다. "형님, 빨리 좀 하쇼. 미치겠소이다." 얼굴에 긴 칼자국이 있는 삼십 중반의 사내가 바지춤을 움켜잡고 소리치자, 그 옆에 마마자국이 선명한 곰보가 불퉁하게 외쳤다. "맞아.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야. 대충 좀 하쇼! 오늘따라 정말 길 게 하네!" "에이! 여기 있다가는 피 말라죽겠어." 투덜거리며 고개를 돌린 작달막한 사내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다 가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그가 가고자 하는 곳에 한 사내가 등을 보이고 꿇어앉아 연신 손 을 놀리고 있었다. 찌익! 손이 움직일 때마다 허공을 훌훌 나르는 찢어진 옷자락의 색깔은 눈처럼 하얀 백색이었다. 그리고 대략 이십 삼사 세쯤 되었을까? 늘씬한 키에 적당히 풍만하고 얼굴도 반반한, 어디서나 부잣집 맏 며느리 감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예쁘장한 여인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미인 축에 낄 수 있는 여인은 좀 전에 지른 비명으 로 혈도를 제압당한 채 게침을 줄줄 흘리며 옷을 찢고있는 텁석부 리 사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텁석부리의 손이 멈추어졌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의 나신을 내려다보던 텁석부리 사내의 표정이 흔들렸다. 기가 막히도록 아름다운 여인의 몸매에 경탄했다. "죽여주는 몸이야!" 분을 칠해 놓은 듯 뽀얀 피부에 우뚝 솟아난 젖가슴은 조금도 이 지러짐이 없어 그저 놀라울 다름이었다. 새파란 실핏줄이 보이는 젖가슴 아래는, 소위 개미허리라고 하는 잘록한 허리가 있었고, 늘씬하게 빠진 두 다리는 대리석같이 매끄러워 보였다. 그리고 비림(秘林)은 말 그대로 비림이었다. 너무나 짙고 길어 안 을 들여다볼 수 없는……. 꿀꺽! 이런 여인은 몸이 무척 뜨거워 감창(感愴)을 허벅지게 한다는 것 을 그 동안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그의 입안 가득 차 있던 군침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목구멍을 타고 들어갔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불길이 확 일었다. 바로 뒤에, 큰 형님이 좋은 일을 할 때 옆에 있으면 안된다는 경 고를 무시하고 작달막한 사내가 다가온 것도 모르고 그는 바지를 끌어내려 전위 작업도 없이 덮쳤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멈춰라!!" 산 속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대갈일성이었다. 얼마나 컸던지 주 위의 나무들이 부르르 몸을 떨 정도였다. 그런 대갈성을 들은 텁석부리는 번개같이 몸을 일으켰다. 마치 기 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그와 동시에, "이 나쁜……." 좀 전의 음성과는 다른, 치를 떠는 듯한 음성에 이어 휙! 하고 무 언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악!' 하는 비명이 들렸다. 이 모든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듯 앞뒤 구별이 잘 안될 정도 였다. ⑦ 귀에 익은 음성이 내지른 비명에 고개를 돌리던 텁석부리의 안색 이 변했다. 쪽빛 장삼에 방금까지 자신 밑에 있었던 백의여인보다 예쁘게 생 긴 사내가 싸늘한 눈빛으로 서 있었고, 그 앞에는 칼자국과 곰보 사내가 있었다. 그런데 없었다. 백의여인의 시녀를 강간하던 둘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이기는 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낮은 신음을 흘리며 일어나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었으니까. 상당한 부상을 입은 듯하지만 죽지 않았다는 데에 내심 안도한 텁 석부리는 그제야 자신을 쏘아보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흠칫! 놀랐다. 불길 같은 눈을 가진 한 사내. 가히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는 말을 실감케 하는 거구의 사내는 바 로 단호삼이었다. 기실 비명을 듣고 달려오던 단호삼은 텁석부리 사내가 백의여인을 덮치는 것을 목격하고 너무 다급한 나머지 고함을 질러 행동을 제 지하였고, 한발 앞선 황보영우는 강간을 하고 있는 쪽으로 날아가 목덜미를 잡아 그대로 집어 던져 버린 후였다. '이거 잘못하다가 죽는 거 아냐.' 기세가 심상치 않아 그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힐 때, 단호삼은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말했다. "별로 크지도 않은데, 바지나 끌어올리지 그래." '바지?' 그 말에 고개를 숙인 텁석부리 사내는 좀 전까지 한껏 기세 좋게 부풀어올라 있던 자신의 물건이 지금은 형편없이 쪼그라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얼른 바지를 추슬렀다. 그리고 이내 등뒤에 있는 감배산도(坎背山刀)를 뽑아 다짜고짜 휘 둘렀다. 그때였다. "뒈져!" 기다렸다는 듯 작달막한 사내가 험악한 말을 하며 단호삼에게 짓 쳐드는 것이 아닌가.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 단호삼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녹산영웅문도들에게 듣기로는 대개 이런 경우에는 점잖게 몇 마디 타이르고,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손을 쓴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 놈들은 일언반구도 없이 먼저 죽이고 보자는 심보가 아닌가. 휙! 휙! 제법 날카로운 칼바람이 동반되었고, 위와 밑을 동시에 공격하는 것으로 보아 한두 해 해본 솜씨가 아닌 듯했다. 원래 이들은 운대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낭산(狼山) 일대에서 힘 약한 사람에게는 범과 같고, 용과 같이 용맹한, 그러나 강자 (强者)에게는 새색시 같은 상냥함을 결코 잃지 않은 낭산오흉(狼 山五兇)―약자들에게는 낭산오웅(狼山五雄)이라 불리는―이란 자 들로, 친형제는 아니지만 오랜 세월 동안 같이 흉악한 짓을 해왔 기에 눈짓 하나로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합벽술(合壁 術)이 뛰어났다. 일류고수라도 단번에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허나 상대는 불행히도 당금 강호를 진동시키는 철탑검귀 단호삼이 었다. 게다가 그들은 다섯이 아니라, 둘이었다. "괜찮은 솜씨야." 낮게 중얼거린 단호삼은 슬쩍 허리를 뒤로 젖혔다. 간발의 차이로 텁석부리의 감배산도가 스치듯 지나가는 순간, 그의 몸이 빙글 한 바퀴 회전하면서 두 발을 차올렸다. 발끝에 단단한 물건이 닿았 다. 빠각! 뼈가 부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들리며 처절한 비명이 뒤따랐다. 단호삼이 허리를 젖히자, 완벽하게 드러난 하체를 향해 회심의 미 소를 짓던 작달막한 사내의 비명이었다. 턱이 부러져 삼사 장을 훌훌 날아가는 그의 입에서 피와 함께 부 러진 이빨과 잘린 혀가 허공을 수놓았다. 헛칼질을 한 텁석부리, 즉 낭산오흉의 첫째인 마평(馬平)의 얼굴 이 일그러졌다. '속았어. 기습을 하면 이길 수 있다더니. 이럴 줄 알았다면…….' 후회가 밀물처럼 일었다. 허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 다. 그는 이를 악물며, 회전 돌기를 하고 자세를 잡는 단호삼에게 자 신이 가장 자랑하는 칼질을 퍼부었다. 쌔액! 도풍(刀風)이 일었다. 죽음을 각오한 만큼 칼질 또한 날카로웠다. '됐다!' 일순 마풍은 이겼다고, 기습을 하면 능히 이길 거라고 하던 자들 의 말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자세를 잡던 단호삼이 엉거주춤 서 있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단호삼의 머리통이 두 쪽이 날 찰나, "기회는 잘 잡았다만, 그 정도로는 어림없어." 차분한 음성에 마평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리고 단호삼의 두툼 한 손이 불쑥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크악!" 가슴에 거대한 충격을 받은 그는 피분수를 쏟으며 삼사 장을 날아 가 땅에 떨어졌다. 꼼짝도 않은 것이 즉사한 모양이었다. "이런 놈들을 살려줘 봐야 세상에 도움이 안돼. 선량한 사람들만 더 다쳐." |
첫댓글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