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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음양궁(陰陽宮)
①
서걱... 스스걱.......
바람에 몸을 비비는 갈대들이 스산한 몸짓으로 울었다.
동정호 연변에는 갈대들이 수없이 밀집되어 자생적으로 생겨난 갈대밭이 십 리를 이루고 있었다.
또 한차례 동정호를 건너온 바람이 갈대숲을 휩쓸며 지나갔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한 줄기 자광(紫光)이 갈대밭 한가운데에서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하늘을 향해 뻗었다가는 사라지고는 하는 것이었다.
좀체로 타인의 시선이 머물지 않는 갈대밭 한가운데.
한 혈의인이 가부좌를 튼 채로 운공에 열중하고 있었다. 혈의인의 몸은 은은한 자광으로 감싸여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혼천역지파라심공(混天逆地破羅心功)을 운공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혼천역지파라심공.
이는 대혈륜서에 기재된 대마성의 심법으로써 마공 중의 마공이었다. 인적이 없는 갈대밭에서 마공 중의 마공을 운공하는 혈의인은 다름아닌 백천강이었다.
우웅!
기묘한 진동음이 일며 또다시 자광이 그의 머리 위로 석 자 가량 뻗어올랐다.
파앗!
그러나 잠시 후 자광은 방전(放電)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백천강의 백회혈(百會穴)로 모두 흡수된 것이다.
마침내 백천강이 눈을 떴다. 일순 그의 눈은 자안(紫眼)이 되었다가 원상태로 화했다.
바로 그때였다.
"으윽!"
백천강이 갑자기 신음을 발하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냉막한 그의 얼굴에 고통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도림에서 지나친 심력을 소모하여 내공이 오성으로 줄어 들었다."
그는 천무대법사와의 대항 직후 입었던 중상이 채 아물기도 전에 무유생 상무효와 대면했던 것이다.
그 당시 백천강은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무효와의 대면에서 그는 엄청난 심력을 소모해야 했다. 그러한 탓에 백천강은 지금 고작 오 성(五成) 정도의 내공밖에 발휘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적어도 육 개월은 정양해야 가까스로 본래의 무공을 회복할 수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한시가 급했다. 그는 그 어떤 고통과 시련도 결코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흔들리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가부좌를 풀었다.
"나는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
백천강은 중얼거리며 서편 하늘을 보았다.
황혼이었다. 석양이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서쪽 하늘 아래로 기울어갔다. 그때였다.
"......!"
백천강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웬지 모르게 핏빛만 보면 들끓는 가슴을 억제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들끓는 가슴을 부여안고서 한동안 지는 해를 응시했다. 황혼이 스러지며 마침내 박모(薄暮)가 찾아들었다. 어둠이 뉘엿뉘엿 갈대밭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휘익!
백천강은 돌연 신형을 날렸다. 그의 몸이 갈대숲으로부터 한 마리 야조처럼 솟구쳐 올랐다.
"호호호호......!"
귀를 찢듯이 가까이서 들려오는 여인의 간드러진 음성 때문이었다.
②
"헉헉! 소... 소저, 서... 서시오. 제발... 내 품에......!"
한 쌍의 남녀가 갈대밭을 헤치며 쫓고 쫓기는 놀이를 계속하고 있었다.
홍의를 입은 여인의 몰골은 참으로 볼만했다. 옷이 헝클어지고 찢겨져 몸을 날릴 때마다 뽀얀 허벅지와 눈부신 어깨가 드러나곤 했다.
홍의여인을 뒤쫓는 황의청년은 이십오 세쯤 되어 보이는 나이였다.
청년은 제법 영준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그는 허겁지겁 홍의녀를 뒤쫓는 것이었다. 시뻘겋게 충혈된 청년의 눈에는 탐욕과 욕정의 빛이 가득했다.
"헉헉! 더이상 참을 수 없소. 어서......."
청년은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홍의녀의 실룩거리는 둔부를 잡으려 허우적거렸다.
"호호호! 장(張)공자. 글쎄 하북(河北) 신권문(神券門)의 권보(券譜)를 소녀에게 잠깐만 보여주기만 한다면 즐거움을 드린다니까요?"
"여... 여기 있소!"
장공자라고 불리운 청년은 더이상 뒤쫓아갈 재간이 없었다. 그는 허겁지겁 품 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꺼내더니 여인을 향해 내던졌다.
"호호홋...! 고마와요."
재빨리 달아나던 몸을 세운 홍의녀가 손을 뻗어 떨어지는 책자를 나꿔챘다.
그 순간을 청년은 놓치지 않았다.
휙!
젖먹던 힘까지 동원해 청년은 와락 홍의녀를 덮쳤다.
찌익!
청년은 이미 욕정에 눈이 멀은 후였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것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는 정신없이 홍의녀의 옷을 찢었다. 황의청년의 몸밑에 깔린 홍의녀는 삽시에 알몸이 되었다.
"아이.... 천천히... 아음!"
여인의 춘궁은 어둠이 깃든 채 강렬한 색향을 발산했다.
"허억!"
청년은 마침내 거추장스러운 자신의 옷마저도 찢어버렸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여체를 탐하기 시작했다. 이미 그의 머리 속에는 명예도, 윤리도, 인간의 도리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여체는 관능적으로 꿈틀거리며 연신 교성을 발했다. 청년은 탱탱하게 부풀어오른 여인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미친 듯이 욕정을 쏟았다.
여인은 탕녀였다. 그녀의 방중술은 청년의 혼백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두 육체가 뱀같이 얽혀들며 갈대밭을 뒹굴었다. 갈대잎들은 나뒹구는 두 사람의 육체 밑에 깔리며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마침내 하늘도 그들의 음탕한 짓거리를 차마 볼 수 없는지 마지막 남은 어스름빛 한 조각을 거두어가 버렸다. 바로 그 순간을 노리고 있었던 것일까?
쌔액!
종잇장처럼 얇은 타원형의 물체가 청년의 뒷통수를 향해 파공성을 흘리며 날아들었다.
"크악!"
무척 짧은 순간이었다. 처절하기 짝이 없는 비명 하나가 청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절정에 오르기 직전 눈을 까뒤집으며 몸을 마구 떨던 청년의 뒷통수를 노리며 날아든 타원형의 물체. 그것은 한순간 청년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버렸다.
"아악!"
그 순간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암흑에 묻혀가는 갈대밭을 뒤흔들었다.
사내의 목덜미에서 솟구친 뜨거운 피가 그녀의 얼굴을 때리듯이 뒤덮었기 때문이었다. 뜨거우면서도 끈적거리는 피였다. 피는 비릿한 혈향을 풍기며 여인의 젖무덤 아래로 흘러들었다.
"아아악!"
불시에 찾아든 공포가 그녀를 짓눌렀다. 쾌락의 몸부림으로 인해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일시에 쭈삣거리며 치솟았다.
"으... 으으으!"
여인의 턱이 달달달 떨리며 이와 이가 맞부닥쳤다.
여인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녀는 알몸인 것도 잊고 무작정 어둠 속의 갈대밭을 헤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갈대밭을 빠져나가기 위해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렸다.
대체 무엇 때문에, 누가 황의청년의 목숨을 끊어놓았는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본능적인 공포심만이 맹목적으로 그녀를 움직이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여인이란 또 얼마나 요물(妖物)이던가.
혼백을 잊고 무작정 내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여인은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까지 노릴지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추적자 때문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윙!
환청처럼 그녀의 귓전에 가는 파공성이 들렸다. 아니 들리는가 싶었다.
"......?"
공포에 쫓기며 달리는 와중에서도 그녀는 뒤를 돌아보려는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바로 그 찰나,
무엇인가 싸늘한 것이 등을 뚫고 들어와 앞가슴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녀는 단말마의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죽음의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공포의 사풍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사풍인(死風刃). 그것은 말 그대로 죽음의 바람을 일으키고 다니는 칼날이었다.
또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사풍인은 어김없이 탕인들의 목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 피의 축제(?)는 불행히도 동정호 인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금 중원무림의 시선과 촉각이 한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곳은 바로 동정호 인근인 군산에 세워진 음양궁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삼척동자도 다 알았다.
음양궁의 음행이 중원무림을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도와 사도를 망라한 중원 전역의 모든 문파는 혼란에 빠져 헤어나올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유는 참으로 황당한 것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음양궁의 탕녀들에게 현혹된 각파의 젊은 제자들이 색에 눈이 멀어 자파나 가문의 비급, 또는 지보(至寶)를 훔쳐 스스로 음양궁에 투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빼어난 절경(絶景)으로 유명했던 동정호 일대는 이제 살기가 등등한 죽음의 땅으로 바뀌고 말았다.
음양궁에 투신하려는 청년들과 그들을 막으려는 각파의 고수들, 그리고 음양궁의 탕녀들이 벌이는 추악한 행동으로 인해 피의 행진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사풍객의 사풍인까지 피의 혈겁에 가세를 한 것이었으니.......
불과 보름 사이에 동정호 일대에서 사풍인에 의해 죽음을 당한 자는 백여 명에 가까웠다. 그들은 모두 색에 현혹된 각 문파의 전도유망한 청년들과 음양궁의 궁녀들이었다.
...... 사풍객은 색(色)을 증오한다!
그런 소문이 삽시간에 무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③
배(船).
거대하면서도 화려한 범선 한 척이 동정호의 푸른 수면을 산보하듯 유유히 떠있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범선이었다. 범선은 피의 파도가 휘몰아치는 중원이라는 거대한 땅에서 영욕(榮辱)에 울고 웃으며 떠도는 무림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동정호의 푸른 수면 위를 유유히 떠 있는 것이었다.
붉은 글씨가 씌여진 황금색의 깃발이 범선의 돛대 위에 매달려 펄럭이고 있었다.
- 음양천하(陰陽天下).
그 범선은 바로 음양궁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범선이 그 화려한 모습을 한 달에 한 번씩 어김없이 동정호에 드러내는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유는 자명했다. 바로 음양궁에 투신하는 자들을 받아들여 군산의 음양궁으로 데려가기 위한 것이었다. 이번에도 범선은 어김없이 제 날짜에 그 화려한 모습을 나타냈다.
"......."
범선이 닿은 기슭에는 수많은 무림인들이 매복하고 있었다. 그들은 범선에 타려는 자파의 제자들을 가로막으려는 자들이었다.
음양궁에 투신하려는 자들을 막기 위한 각파의 방해공작은 치열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스승과 형제를 배반하고 떠나는 것도 모자라 몸담고 있던 가문의 유일무이한 비급을 훔쳐가지고 떠나는 제자들을 그냥 두고 볼 장문인은 천하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어찌된 셈인지 오늘따라 범선에 오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변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다. 사풍객이 그들을 모두 죽였기 때문이었다.
범선은 사흘 동안 호변에 닻을 내린 채 정박해 있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아니 개미새끼 한 마리도 범선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음양궁이 생기고 범선이 동정호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사흘째 되던 날 황혼 무렵.
마침내 몸을 숨긴 채 범선을 지켜보던 자들이 지치기 시작했다. 아무도 범선에 오르려 하지 않는데 굳이 찬이슬을 맞아가면서까지 몸을 숨기고 있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결국 몸을 숨기고 있던 각파의 고수들이 지친 몸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범선도 더이상 기다려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범선은 닻을 올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
군웅들은 보았다.
일신에 노을처럼 붉은 혈의를 입은 냉막한 얼굴의 청년 하나가 범선에 오르는 것을. 혈의청년은 군웅들의 놀란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서서히 범선으로 올랐다.
"......!"
숨을 죽인 군웅들은 만면에 의혹의 빛을 띄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혈의청년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무림에 그런 인물이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뚜우… 뚜….
마침내 닻을 올린 범선이 괴이한 음향을 토해내며 돛을 올리고 출발했다.
황혼을 받으며 호심으로 사라져 가는 범선을 바라보는 중인들의 얼굴에는 한가닥 의혹과 함께 분노심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한가닥 의혹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혈의청년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분노심은 음양궁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자금성(紫金城)보다도 더 화려하게 꾸며진 음양궁의 대전.
대전은 호화로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바닥은 얼굴이 비칠 정도로 매끄러운 대리석(大理石)이 깔려 있었으며 지붕을 바치는 기둥은 황금이 입혀져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천장에는 한 알이면 하나의 성(城)을 통째로 살 수 있는 거대한 야명주(夜明珠)가 박혀 있었다. 석면 벽에는 현란한 벽화가 새겨져 있었다.
낯 뜨겁게도 벽화는 남녀간의 정사를 그린 춘화도였다.
"귀하의 이름은?"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있는 백천강을 향해 궁장을 한 여인이 요염하게 웃으며 물었다.
이제 삼십을 전후해 보이는 궁장여인은 한눈에 보아도 아찔할 정도의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의 미모는 사내의 혼백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앵두같은 입술과 눈같은 살결에서는 사내의 넋을 홀리는 기이한 향기가 풍겨났다.
어디 그뿐이랴?
그녀의 몸매는 폭발적인 육감을 풍겨냈다. 옷자락이 터져라 부풀어 오른 앞가슴은 물론이거니와 육체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궁장은 몸에 꼭 맞았다.
그녀의 좌우로는 궁장여인과 비교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육감적인 몸매와 용모를 지닌 십인의 시녀들이 시립해 있었다.
"혈륜공자."
"혈륜공자라고요? 처음 듣는 이름인데?"
궁장여인은 아미를 교태롭게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호호! 아무튼 좋아요. 그럼 공자께서는 본궁에 입궁하러 오셨나요?"
궁장여인은 교태롭게 웃으며 물었다. 그 순간 백천강이 차갑게 되물었다.
"너는 누구냐?"
궁장여인의 안색이 싹 변했다.
"너... 라고?"
"누구냐고 물었다."
"......!"
궁장여인의 얼굴은 몇 차례나 더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느닷없이 그녀는 교소를 터뜨렸다.
"호홋! 공자. 당신은 정말 매력있는 분이군요. 감히 본궁에 와서도 태연하다니."
"......."
"내가 누구냐고요? 좋아요. 대답해 드리죠. 공자는 이십 년 전 혈향색후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혈향색후 염교교?"
백천강이 흠칫하며 중얼거렸다.
혈향색후(血香色后) 염교교(艶嬌嬌).
염교교는 본래 무림의 명문세가의 가녀였다.
하지만 사랑했던 사내에게 버림받은 이후 그녀는 잠적했다. 그리고 다시 무림에 나타났을 때 그녀는 예전의 염교교가 아니었다.
누구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가공할 색공을 익혀 무림의 명문자제들을 유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정혈을 빨아먹은 후 잔인하게 죽였다.
사랑의 배신이 그녀를 가공할 절세마녀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결국 그녀를 버렸던 사내도 그녀의 독수에 잔인하게 희생당하고 말았다.
혈향색후.
그날 이후 그 이름은 무림을 뒤흔들었다. 결국 그녀는 무림의 공분을 사 만리추적(萬里追跡)을 당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녀는 백도 고수들의 협공에 중상을 입고 비마산(飛馬山) 귀발애(鬼魃崖)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날 이후 혈향색후라는 이름은 무림에서 잊혀졌다.
그런 여인이 음양궁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백천강은 되물었다.
"그렇다면 그대가 음양궁주인가?"
그 말에 혈향색후 염교교는 교태롭게 웃었다.
"어찌 감히? 천첩은 단지 부궁주일 뿐이에요."
"그렇다면 궁주를 불러라."
백천강은 안하무인의 태도로 말했다. 교태롭게 웃던 혈향색후는 마침내 두 눈에 살기를 띄웠다. 그녀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혈륜공자.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 하는 것이 아닌가요? 이 염교교는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것인가요?"
"솔직히 그렇다."
"뭐... 뭐라고!"
혈향색후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일순 그녀의 눈에서 독기가 흘러 나왔다.
"제법 영준하게 생겨 본궁의 호궁무사로 쓰려 했는데 감히 나를 능멸하다니!"
혈향색후는 문득 팔을 저으며 외쳤다.
"천향마녀소혼무(天香魔女笑魂舞)를 펼쳐라!"
그때였다. 염교교를 호위하듯 서 있던 열 명의 시녀들이 느닷없이 교소를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는 사내의 혼백을 빼앗을 듯이 요염했다.
"호호호......!"
동시에 그녀들은 발을 움직여 백천강을 에워쌌다. 백천강은 한순간에 십방에 갇히고 말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놈! 잠시 후면 가랑이 밑에 기어들며 살려달라 할테지."
혈향색후는 의자에 상체를 깊이 파묻으며 비웃음을 흘렸다.
"......."
그러나 백천강의 얼굴은 한결같았다. 아니다. 오히려 무심(無心)하기까지 한 표정이었다.
그때였다.
"색혼(色魂)!"
십인의 궁녀 중에 하나가 외쳤다.
사르르.......
궁녀들이 춤을 추며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잠자리 날개같이 얇은 궁장나의가 꽃잎처럼 나부끼기 시작했다. 색색의 궁장이 날리며 대전 안은 기묘한 분위기에 휩싸여 들었다.
백천강은 알아차렸다.
색정을 유발하는 기이한 향기가 점차로 짙어지며 궁장나의가 일으키는 바람을 타고 그를 향해 퍼져 온다는 것을.
빙글... 빙글.......
궁녀들의 춤사위가 도는 동안 수없이 많은 꽃잎들이 낙화하듯 시야가 가려졌다.
"나무(裸舞)!"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교태로운 음성이 다시 들렸다.
뒤이어 놀라운 장면이 벌어졌다. 궁장나의를 나부끼며 춤을 추던 음양궁녀들이 일제히 옷을 벗어 던지는 것이 아닌가?
현란했다. 십인의 음양궁녀들은 삽시에 나신이 되었다.
녹아내릴 듯한 관능적인 육체가 풍겨내는 뇌쇄적인 육향이 대전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터질 듯 부푼 젖가슴이 율동에 따라 묘한 분위기를 풍겨내며 움직였다.
갸냘픈 허리가 휘저어질 때마다 방향(芳香)을 뿌리며 허공을 메우는 둔부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자극을 가지고 있었다.
"호호호!"
"호호... 나를 취해요. 어서!"
인간이라면, 아니 사내라면 어찌 그런 강렬한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나녀들은 자기도취에 빠진 듯했다. 여인들은 스스로의 손으로 젖가슴을 문지르고 자신을 애무하며 백천강에게 다가들었다.
언제부턴지 장내에는 분홍빛 기류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자욱한 홍무에는 강렬한 최음제가 섞여 있었다.
"흐으윽... 흐윽!"
나녀들의 군무는 더욱 음탕하게 변해갔다. 정녕 신이라 해도 녹아나지 않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호호... 아무리 철심골이라도 배겨낼 수 없으리라!'
혈향색후 염교교는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백천강을 바라보았다.
"학!"
백천강을 바라본 순간 그녀는 심장이 오그라 붙는 듯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저럴 수가!"
염교교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는 눈을 한껏 치뜨고 백천강을 주시했다.
백천강의 얼굴은 마치 얼음덩이처럼 싸늘했다. 어디 그뿐인가? 여체를 보는 그의 눈에서는 증오와 경멸이 서리서리 뿜어나오고 있었다.
"아!"
염교교는 절규의 탄성을 발했다.
그녀는 대번에 자신을 잃고 말았다. 혈의공자. 그는 도저히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잘못 보았다!'
그녀는 손을 들어 나녀들의 춤을 중지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멈추어......"
염교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불현듯 백천강의 눈에서 살기가 뻗어나갔다.
번쩍!
뒤이어 그녀는 백천강의 몸에서 핏빛 도기(刀氣)가 뻗는 것을 보며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아아아악!"
모든 것은 한순간에 끝났다. 혈광이 번뜩이는 순간 십인의 나녀들의 목이 피분수를 뿌리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던 것이었다.
투투툭!
피보라와 함께 번질거리는 대리석 바닥에 열 개의 목이 떨어져내렸다. 도끼에 찍힌 나무등걸처럼 둔중한 소리를 내며 벌거벗은 여체들이 목을 잃고 쓰러져갔다.
④
"이럴 수가?"
혈향색후 염교교는 의자에 앉은 채로 넋을 잃고 말았다.
혈륜공자. 그는 음양궁의 한복판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아끼는 수하들을 베어버린 것이었다. 그것도 단 일도(一刀)에.
"너... 너는 환락소요산을 맡고도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냐?"
혈향색후 염교교는 넋을 잃은 듯이 소리쳤다.
환락소요산(歡樂消遙散)은 극히 강렬한 음약(淫藥)이었다. 대전 안에 자욱이 퍼진 홍무가 바로 그것이었다.
환락소요산은 나녀들이 머리칼 속에 품고 있던 것으로 백천강이 그것을 마시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천강은 너무도 태연했다.
백천강이 입을 열었다.
"겨우 이 정도였느냐?"
그는 냉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작 놀랄 일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백천강의 미소를 보는 순간 염교교는 정신이 어지럽게 도는 것을 금치 못했다.
"아아......!"
그녀는 온몸의 힘이란 힘이 한순간에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오금이 저려오는 것을 경험하고 말았던 것이다.
"후후훗!"
백천강은 내처 웃었다.
그의 웃음은 얼음같이 차가왔다. 그러나 그 웃음은 혼백을 앗아갈 정도의 마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소녀미향탈심대법(素女迷香奪心大法)이라는 전설의 마공이 전개된 것이다.
"교교, 이리 가까이 오너라."
"아!"
염교교는 허우적거리듯 의자에서 일어나서는 항거할 수 없는 마력에 이끌리듯 백천강에게 다가왔다.
백천강의 눈은 투명했다. 시리도록 투명했다. 그것은 소녀미향탈심대법이 극(極)에 이른 조짐이었다.
소녀미향탈심대법은 세 가지가 있었다.
미심술(媚心術).
섭혼술(攝魂術).
제령술(制靈術).
미심술이 미공(媚功)으로 상대를 취하게 하는 것이라면 섭혼술은 상대의 심령을 제압하는데 쓰여졌다. 제령술은 이른바 활시(活屍), 즉 시체를 부리거나 강시( 屍)를 다루는 술법이었다.
백천강은 미심술과 섭혼술을 함께 동원했다.
"나는 너의 주인이다."
"당신은... 천첩의 주인......."
염교교는 넋을 잃은 표정으로 따라했다.
"묻겠다. 음양궁주는 누구냐?"
백천강의 말에 염교교는 한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대답했다.
"궁주는... 환락천마녀랍니다."
백천강은 흠칫했다.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한동안 염교교를 응시했다. 그는 내심 이렇게 중얼거렸다.
'음양궁주가 강호칠기의 한 명인 환락천마녀라고?'
그것은 너무도 뜻밖의 일이었다.
환락천마녀(歡樂天魔女).
그녀는 강호칠기 중의 마지막 인물로 신비에 싸인 여인이었다. 그녀가 강호칠기에 든 것은 불과 수 년 전의 일이었다. 원래는 강호육기였는데 그녀로 인해 칠기로 불어났던 것이다.
그런 환락천마녀가 음양궁주라는 사실은 참으로 뜻밖의 일이었다.
백천강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음양궁의 색공을 이용해 백도의 명예를 무너뜨리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음양궁주가 환락천마녀였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구나.'
그때였다. 몽롱해졌던 염교교의 눈이 문득 반짝 빛났다. 미심술과 섭혼술이 풀렸기 때문이었다.
쌔액!
그녀는 돌연 백천강의 가슴을 향해 흰 손을 뻗었다. 혈향색후는 역시 여마다웠다.
'아차! 방심했다.'
백천강은 그녀가 미심섭혼술에서 벗어난 것을 깨닫고는 즉시 우수를 뻗었다.
펑!
폭음이 일어난 순간 염교교는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백천강은 그녀의 공격을 봉쇄함과 동시에 쌍장을 흔들었다.
파파파팟!
어지러운 수영(手影)이 그녀를 뒤덮었다.
"호호홋! 대단한 놈! 그러나 이미 늦었다!"
염교교는 쌍장으로 맞서며 뒤로 날아올랐다. 그 탄력으로 그녀는 대전 밖으로 날아갔다. 쾌속무비한 몸놀림이었다.
백천강은 즉시 발을 굴러 그녀를 뒤쫓기 시작했다.
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혈향색후 염교교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대전 밖으로 빠져나온 백천강은 그녀의 종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커다란 화원의 중앙에서 염교교를 놓친 백천강은 신형을 멈추었다.
어느새 밤(夜)이었다.
음양궁의 밤은 뜻밖에도 고즈넉했다. 화향이 코를 진동했으나 들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이곳이 음양궁인가 하는 회의감이 들 정도였다.
어둠 속에 산재한 누각과 소축 등의 건물들에게서는 아무런 조짐도 일어나지 않았다.
"......."
백천강은 천시지청술을 전개했다.
스스스.......
주위를 향해 귀를 기울이던 백천강이 한 건물을 향해 신형을 날린 것은 그로부터 일각 후였다.
엄지손가락만한 야명주(夜明珠)가 삼 장의 사이를 두고 박혀 있는 긴 회랑이었다. 그곳에 접어드는 순간 백천강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서서히 그의 안색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야음을 뚫고 들려오는 거친 신음소리. 그것은 바로 남녀가 교접을 하며 토해내는 열락의 소리였다. 회랑 양 옆은 연이어진 방사(房舍)였다. 쾌락의 신음소리는 바로 방사들로부터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백천강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곳은 바로 외부에서 음양궁으로 투신해온 무림인들이 넋을 빼앗긴 채로 쾌락을 즐기는 곳이었던 것이다.
백천강은 회랑 가운데 서서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이어서 그는 매서운 눈초리로 잠시동안 방사를 노려보았다.
마침내 백천강은 신형을 돌렸다. 그곳을 떠나기 위해서 였다. 그때였다.
휘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회랑의 천장 위에서 무수한 인영들이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인영들은 즉시 백천강을 에워쌌다.
"......."
백천강은 서릿발같은 냉기를 흘리며 그들을 쏘아보았다.
인영들은 모두 간신히 중요한 부분만 가리고 있었을 뿐 거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쾌락과 욕정의 빛으로 인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대부분이 청년들이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중년인도 있었고 빡빡 민 머리에 인(印)을 박아넣은 승려도 있었다.
"흐흐흐.... 멈춰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침입했느냐!"
그들은 백천강을 포위한 채 다가섰다. 그때였다. 중인들의 뒤로부터 교태로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호호홋! 침입자를 해치우는 자에게는 본 부궁주가 특별한 선물을 주겠다. 환락십선자(歡樂十仙子)와 잠자리를 할 영광을 부여하겠다!"
그 말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이야얏!"
파파파팟!
벌거벗은 인영들이 미친 듯이 고함치며 백천강을 공격했다. 그들은 비록 지나친 방사로 인해 공력이 많이 탕감되었으나 수십 명이 펼치는 공세는 무시무시했다.
츠츠츠츳!
그러나 그들은 백천강의 상대가 아니었다.
백천강이 신형을 한 바퀴 회전시킨 순간 그의 몸에서 핏빛 도기가 나선형을 그리며 뻗었다.
"크악!"
연이은 비명이 긴 회랑을 울리며 메아리쳐 나갔다.
그것이 혈풍의 시작이었다. 백천강은 추호도 인정을 두지 않았다.
파계자들은 추풍낙엽처럼 날아갔다. 그들은 단지 번쩍이는 혈광만 보았을 뿐이었다. 그다음 그들은 황천으로 직행했다.
피보라가 자욱이 일어났다.
백천강은 냉혹무비했다. 단 일도에 그는 상대의 목숨을 가차없이 끊었다. 전광석화가 따로 없었다. 그것은 삽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파츠츠츳!
"크아악!"
"......."
마침내 회랑이 조용해졌다. 장내에 더이상 서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제 명(命)에 죽지 못한 넋들의 원한이 사무친 때문이었을까? 회랑을 가득 채운 자욱한 혈무(血霧) 속에서 비릿한 혈향이 무겁게 떠돌았다.
백천강은 혈죽도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뚝... 뚝.......
죽도를 타고 흐른 피가 대리석 바닥을 적시며 고여들었다.
"......."
피를 바라보는 백천강의 눈은 무심했다.
마침내 혈죽도를 거두어들인 백천강이 시체를 밟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회랑에는 일백여 구가 넘는 시신이 싸여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팔다리가 잘린 채 제멋대로 널려 있었다. 그 시신들은 추악하고 역겹게 보였다.
백천강은 회랑을 따라 걸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또다시 하나의 대전이 교교한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백천강은 망설이지 않고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이미 그는 피맛을 본 후였다.
"색을 탐하는 자들을 모조리 죽이리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백천강은 창백한 입가에 냉소를 띄우며 중얼거렸다.
그는 내처 걸었다. 달빛에 드러난 그림자가 앞서가며 백천강의 발을 잡아당겼다. 그림자도 피를 뚝뚝 흘리는 혈죽도를 하나 들고 있었다.
백천강은 마침내 대전 앞에 이르렀다. 그때였다.
"호호호홋!"
심금을 뒤흔드는 음탕한 교소(狡笑)가 대전 옆에서 들려왔다. 그와 함께 대전 옆의 어둠 속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혈향색후 염교교였다.
"......."
백천강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였다.
스스스.......
대전 주위의 어둠 속에서부터 수십 명의 여인들이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절세의 미녀들이었다. 한결같이 육체가 환히 비쳐보이는 나삼을 입고 있었다.
백천강은 냉혹한 눈으로 염교교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또다시 피를 볼 셈인가?"
염교교는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번에는 정말 귀빈을 접대하겠어요. 이 아이들은 본궁의 칠십이화혼시(七十二花魂侍)들이에요. 호호... 공자에 마음이 들리라고 믿어요."
찰나지간 백천강의 입가에 싸늘한 냉소가 어렸다.
"내 눈에는 칠십이 구의 시신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오... 오만한 놈!"
염교교가 기가 질린 듯 휘청거렸다. 백천강은 칠십이화혼시들을 둘러보았다.
나삼 사이로 비쳐보이는 터질 듯한 젖가슴과 선명한 유두는 가히 금단(禁斷)의 열매와 같았다. 은은히 비치는 삼각비역은 태초의 신비를 간직한 듯 뿌우연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백천강의 눈은 두 개의 얼음조각일 뿐이었다.
정말 어이없게도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백천강이 아니라 혈향색후 염교교였다.
'참으로 냉혹한 자다. 아아... 그러나 저 자의 냉혹한 얼굴이 웬지 자꾸만 나를 흔든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녀는 선홍빛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덧 그녀 나이 이미 사십이 아니던가? 사랑이란 감정은 죽은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교교의 감정은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혈륜공자라는 냉혹한 사나이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의 꺼져버린 영혼에 갑자기 사랑이라는 불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본궁에 무릎 꿇지 않는다면 환락파천대무(歡樂破天大舞)를 전개하겠다!"
염교교는 입술을 깨물며 외쳤다. 그러나 백천강은 여전히 차가운 냉소를 흘릴 뿐이었다.
"그 따위로 나 혈륜공자를 얽어맬 수 있다고 본다면 오산이다. 나는 한 번 칼을 잡으면 거둘 줄 모른다. 후회하지 말고 궁주를 불러라."
백천강의 차가운 대꾸였다. 불쾌해진 염교교는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대체 궁주님을 만나려는 의도는 무엇이냐?"
"네가 알 일이 아니다."
"건방진 놈!"
염교교는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에는 붉은 삼각깃발이 들려 있었다.
"회륜(廻輪)!"
그녀가 앙칼지게 외쳤다.
빙그르르.......
칠십이화혼시는 일제히 신형을 움직였다.
그녀들은 백천강을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처음에는 대단히 느린 회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회전은 점차로 빨라졌다.
칠십이화혼시의 신법이 점점 빨라지면서 나삼자락이 공중으로 휘날리기 시작했다. 칠십이화혼시들은 뽀얀 다리로 대전 바닥을 차면서 백천강의 주위를 풍차처럼 돌았다.
터질 듯한 젖가슴 앞에 선명하게 드러난 주홍빛의 유두가 나삼을 뚫고 나오는 듯했다.
휘리리릭!
여체는 확연히 굴곡을 드러내며 회전했다.
"환락소(歡樂笑)!"
염교교가 또다시 외쳤다.
"호호호호!"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칠십이화혼시는 일제히 교소를 터뜨렸다. 영롱하면서도 황홀한 교소가 대전을 가득 메우며 퍼져갔다.
"......!"
그 순간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던 백천강의 안색이 무겁게 변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백천강은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넘어질 듯이 비틀거렸다. 사방으로부터 물밀듯이 엄청난 경기가 조여들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백천강의 눈 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황홀한 여체의 그림자뿐이었다.
"파천영락무(破天永樂舞)!"
염교교의 세 번째 외침이 월광 가득한 밤하늘로 울려퍼졌다. 순간 칠십이화혼시는 일제히 몸에 걸치고 있던 나삼을 벗어 던지는 것이었다.
교교한 달빛아래 눈부시게 흰 여체가 드러났다. 정말이지 현란의 극치를 이루는 광경이었다. 칠십이인의 발가벗은 나신이 달빛을 받으며 춤을 추었다. 그 춤으로 인해 대전 앞은 황홀한 환상으로 가득차는 듯했다.
"허... 허헉!"
마침내 백천강의 호흡이 점차로 가빠지기 시작했다. 뒤이어 전신의 혈맥이 터질 듯이 팽창되기 시작했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을 맴도는 칠십이화혼시로부터 싸늘한 경기(勁氣)가 퍼져나오기 시작했다. 경기는 거대한 무형의 벽을 이루며 백천강을 조여들었다.
"차체전력파혼공(叉體傳力破魂功)!"
다시 염교교의 외침이 들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어리고 있었다. 염교교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칠십이화혼시는 갑자기 진세를 바꾸었다.
여덟 명이 아홉 개 조(組)를 이루어 각각 등에 쌍장을 붙인 것이었다.
위이이잉!
백천강을 입박해 들어오던 경기가 그 순간 수십 배나 강해졌다.
"우욱!"
그는 비명을 토해내며 비틀거렸다. 때를 놓치지 않고 한 조의 나녀들이 무섭게 쇄도했다. 맨 앞의 나녀가 쌍장을 뻗었다.
백천강은 즉시 손바닥을 뒤집었다.
콰쾅!
대전이 흔들리는 폭음이 일었다.
"윽!"
백천강은 기혈(氣穴)이 뒤집히는 것을 느꼈다. 찰나지간 그의 입과 코로부터 실같은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콰콰콰!
태산같은 장경이 쉴새없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백천강은 쌍장을 연신 뻗으며 몇 차례나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그는 놀라고 있었다. 칠십이화혼시의 장경은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나녀들은 가공할 마도의 수법을 구사하며 공력을 합쳐 백천강을 공격해왔다.
콰콰쾅!
"윽!"
백천강은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어느새 그의 안색은 백지장같이 창백해졌다. 바로 그 순간,
번쩍!
백천강의 몸에서 묵광과 혈광이 동시에 뻗었다. 일순 교교한 달빛을 가르는 엄청난 빛이 암천을 갈라내며 가공할 폭음과 함께 뻗었다. 백천강이 비검과 혈죽도를 동시에 발출한 것이었다.
나녀들은 가공할 검기와 도기에 썰물처럼 갈라졌다. 그 순간 백천강의 신형이 놀랍게도 수십 개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스스스스슥.......
그의 모습은 삽시에 삼십육 개의 혈영을 이루었다. 그것을 본 염교교가 대경하여 부르짖었다.
"저... 저것은... 마도에서 수백 년 전 사라진 유령연태마환술(幽靈連台魔幻術)이 아닌가!"
그 순간 백천강의 입에서 뼈를 얼리는 듯한 냉갈(冷喝)이 터졌다.
"아수라광혈참정도(阿修羅狂血斬正刀)!"
츠츠츠츳.......
"한세사망팔검(恨世死亡八劍)!"
위이이... 잉!
눈을 뜰 수조차 없을 검광도영(劍光刀影)이 현란하게 장내를 휩쓸었다. 그것은 가공할 절기였다. 도저히 한 사람이 펼쳤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삼십육인의 혈륜공자가 동시에 펼친 것이었다. 한 순간에 천지는 종말을 고하는 듯 싶었다.
"아아악!"
꼬리에 꼬리를 물고 처절한 비명이 퍼져나갔다.
휘르르르.......
장내에 자욱이 피보라가 퍼지기 시작했다.
"......."
섬광과도 같았던 묵광과 혈광이 스러졌다. 그 순간 밤하늘에 교교한 빛을 뿌리기 시작하던 만월이 잿빛으로 화하는 것이었다. 마치 저주의 신이 내리기라도 한 듯이.
밤바람이 어둠을 뚫고 대전의 뒤쪽으로부터 불어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피보라가 걷히면서 만월 아래 대전 앞의 광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 이럴 수가!"
혈향색후 염교교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그녀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공포 때문이었다. 만월을 향해 커져가는 달이 교교한 월광을 흩뿌리고 있는 대전 앞. 그곳은 온통 물컹거리는 피로 뒤덮여 있었다. 칠십이화혼시의 시신들까지 짓이겨져 피떡이 되어버린 후였다.
⑤
백천강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다. 그는 가까스로 혈죽도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백랍같았다. 과도한 진기의 소모가 그를 탈진케 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냉혹했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바닥에 누워 있는 칠십이화혼시들의 짓이겨진 시신들을 바라보았다.
나신들, 아니 이미 그것들은 인간의 형상을 잃어버린 후였다. 오로지 짓이겨진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벌거벗은 시신에는 역겨움만이 고여있을 뿐이었다.
백천강은 고개를 들었다.
"아... 악마!"
가까스로 살아남은 염교교는 경악하듯 외쳤다.
"악마라구? 내가? 크크크......."
불현듯 백천강이 웃었다. 조소가 가득 담긴 차갑고 냉막한 웃음이었다.
"너희들의 더러운 몸뚱이를 피로 씻어 주었는데... 악마라고?"
백천강은 염교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아!"
염교교는 절규의 탄식을 내뱉았다. 이어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냉혈한! 도대체가 그 무엇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사내. 아아!'
내심 중얼거리는 그녀는 갑자기 백천강이 무서워졌다.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두려움이란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후후......!"
백천강은 기소를 흘렸다. 그는 뒷걸음질치는 염교교를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혈신(血神). 백천강은 정녕 피를 먹고 사는 혈신만 같았다.
사실 그는 거의 탈진상태였다. 그러나 피를 본 그의 마음은 광적인 흥분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몸 속 깊숙이 흐르는 마성이 잠을 깬 것이다.
"후후후!"
일그러진 백천강의 입에서 으시시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사신(死神)의 저주와도 같은 웃음이었다. 붉게 충혈된 그의 눈에서는 혈광이 쏟아질 듯이 뿜어져 나왔다.
"아아악!"
염교교는 절규를 멈출 수가 없었다. 백천강은 기소를 멈추지 않았다.
"악마... 너는 사람도 아니다!"
염교교는 미친 듯이 외쳤다.
"그렇다. 나는 악마다."
백천강은 음침하게 내뱉았다. 이어 그는 염교교의 목덜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뚝.
혈죽도 끝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아악!"
염교교가 경악의 비명을 내질렀다. 혈죽도가 목을 그은 것이다.
뭉클!
그녀의 새하얀 목에서 선홍의 피가 치솟았다가 목줄기를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저... 정말 죽일 건가요?"
염교교가 공포에 질려 더듬거렸다. 그녀의 눈에는 애원의 빛이 역력했다. 백천강은 기소를 멈추지 않으며 차갑게 말했다.
"죽이는 일은... 내 기분을 충족시켜 준다."
바로 그때였다.
"중원에서 혈천(血天)의 마공을 익힌 자가 있었다니... 정말 뜻밖이로군!"
백천강의 등뒤로부터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옥음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여인의 옥음은 사람의 혼백을 빨아들이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원에 혈천마국(血天魔國)의 마공(魔功)과 혈정단(血精丹)을 복용한 사람이 있을 줄이야."
여인의 옥음이 계속되었다.
"......!"
백천강의 몸이 굳어졌다. 그의 몸이 천천히 돌아섰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