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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문權門을 빛낸 현조賢祖
kwonbh1708 ・ 2026. 1. 10. 23:20
안동권씨(安東權氏)는 고려중기 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높은 권수평(權守平)을 비롯하여 조선 문종비(文宗妃)인 현덕왕후(顯德王后), 왕실의 부마였던 화성위(花城尉) 권상검(權尙儉), 길창위(吉昌尉) 권규(權跬) 등을 배출할 정도로 누대 문벌을 이루어왔다.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봉해진 고려후기의 명신(名臣) 권보(權溥)를 비롯하여 충선왕의 양자가 된 계림부원대군(鷄林府院大君) 권재(權載)(왕후王煦), 조선 태종조의 명상(名相) 예천백(醴泉伯) 권중화(權仲和) 등 계속 상신(相臣)을 배출하였다. 각 왕조의 공신(功臣)으로 책봉받으면 왕실(王室)과 운명을 같이 하며 토지, 노비를 하사받아 경제적 기반을 이룰 뿐 아니라 음직(蔭職)을 통해 자손대대로 부(富), 귀(貴)를 누릴 수 있었는데, 권문(權門)에서는 조선조에 계속적으로 공신(功臣)을 내어 가문의 영달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태종조의 좌명공신(佐命功臣) 권근(權近), 세조의 집권과정을 둘러싸고 책봉된 정난공신(靖難功臣), 좌익공신(佐翼功臣) 권람(權擥), 성종조의 좌리공신(佐理功臣) 권감(權瑊) 등은 정권의 변동기에 공신(功臣)반열에 들어 가문을 일으킨 인물들이고, 선조조의 선무공신(宣武功臣) 권율(權慄) 등은 국가가 위급할 때 왜적을 물리쳐 나라를 보전하는데 기여한 인물이다.
추밀공파(樞密公派)의 파조(派祖)인 10세조 권수평(權守平)은 청렴한 관리의 표상으로 ‘고려사’에 입전(立傳)된 인물이다. 순후질직(淳厚質直)하여 고인(古人)의 풍모가 있었다 한다. 대정(隊正)이었을 때 집안이 가난했다. 낭중(郎中) 복장한(卜章漢)이 유배간 동안 그의 전시과(田柴科)를 경작하며 살다가 복장한(卜章漢)이 사면되어 돌아오자 그에게 전시과(田柴科)는 물론 전조(田租)까지 돌려주어서 당시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에 감탄했다.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견총(牽寵) 벼슬이 있어 권귀자제(權貴子弟)들이 서로 하고자 했는데, 권수평(權守平)은 그 직(職)에 임명되자 가난하다는 이유로 마다했다. 친구가 부가(富家)에 다시 장가들고 이 벼슬에 나아갈 것을 권했으나, 부(富)를 구해서 어찌 20년 조강지처를 버리겠느냐고 반문하면서 거절하였다. 관직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이르렀다. 아들인 권위(權韙)는 판태복사사(判太僕寺事),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으며 사관수찬관지제고(史館修撰官知制誥)에 충당되었다. 예(禮)에 밝았다.
권위(權韙)는 권수평의 아들이다. 최씨 무신정권의 사부로서 추앙받으며 판태복시사(判太僕寺事),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했다.
권단(權㫜)은 권수평(權守平)의 손자이며 권보(權溥)의 아버지인데 ‘고려사’에 입전(立傳)되었다. 중외(中外)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염근정명(廉勤精明)하다는 평을 들었다. 동경유수(東京留守)로 재직하면서 향리가 백성의 토지세를 포탈하는 것을 엄히 다스렸고, 부고(賦庫)의 경비를 전혀 사용(私用)하지 않아 1년 경비로 3년 동안 썼다 한다.
그의 정치를 두고 당시의 재상이 “단이 백성을 위해 폐단을 혁파하니, 이보다 더 백성을 위하는 자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한림학사(翰林學士), 제주(祭酒), 대사성(大司成), 판도판서(版圖判書) 및 전라도·경상도·충청도 감사(監司)를 역임하였다. 지공거(知貢擧)로 권한공(權漢功)·김원상(金元祥)·최성지(崔誠之)·채홍철(蔡洪哲)·백이정(白頤正)을 뽑았는데 이들이 후에 모두 명상(名相)이 되었다. 충선왕 3년에 죽으니 문청(文淸)이라 시호를 내리고 증직하였다.
국재(菊齋) 문정공(文正公) 권보(權溥)는 충렬왕 5년 19세로 등제(登第)하였다. 충선왕 즉위 후 사림원학사(詞林院學士)로서 박전지(朴全之) 등과 함께 총애를 받았다. 충렬왕 복위(復位) 후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사에 이르고, 충선왕 복위(復位) 후 찬성사(贊成事), 판총부사(判摠部事)에 올랐다. 충숙왕 때 첨의정승(僉議政丞), 판총부사(判摠部事)에 올라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가 가직(加職)되었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다. 추성익조동덕보리공신(推誠翊祚同德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성품이 충성스럽고 친척들에게 화목하게 하였다.
늙어서도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주자사서집주(朱子四書集註)’를 간행하도록 건의하여 우리나라에 성리학(性理學)이 그에 의해 인도되어졌다고 한다. 아들 준(準)과 사위인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역대의 효자 64인을 뽑아 효행록(孝行錄)을 저술해 유포시켰다. 아들인 준(準)·종정(宗頂)·고(皐)·후(煦)·겸(謙) 및 사위인 이제현(李齊賢)·종실(宗室) 숙(璹)·순(珣)이 모두 봉군(封君)받아 1가(家)9봉군(封君)으로 당대 최고의 가세(家勢)를 떨쳤다.
권준(權準)은 등제(登第) 후 충선왕의 신임을 받아 대언(代言)이 되었다. 원제(元帝)에 의해 무위장군합포만호(武衛將軍合浦萬戶)에 임명되고 밀직부사(密直副使),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였다. 심왕(瀋王) 고(暠)의 난(亂)과 조적(曹적)의 변(變)에 동조하지 않았으며, 충혜왕이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으로 봉하고 창화(昌和)의 시호를 받았다. 그의 외손녀(外孫女)를 화비(和妃)로 삼았다. 공민왕을 국왕으로 즉위시키도록 원(元)에 상소하였다. 충선왕부터 공민왕까지 6조(朝)를 섬겼다.
권염(權廉)(형(衡))은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의 아들인데, 충숙왕 때 삼사부사(三司副使)를 거쳐 부직(父職)을 이어받아 선무장군합포진변만호(宣武將軍合浦鎭邊萬戶)에 임명되었다. 좌상시(左常侍)가 되었고, 딸이 충숙왕의 수비(壽妃)가 되었다. 현복군(玄福君)에 봉해졌다.
권적(權適)은 충혜왕의 폐행(嬖幸)으로 충혜왕의 폐위와 복위(復位)를 둘러싸고 정치적 변화를 겪었다. 판전객사사(判典客寺事), 밀직대언(密直代言),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첨의참리(僉議參理)를 역임하고 충혜왕 복위(復位) 후 공신호를 받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다가 후에 영가군(永嘉君)으로 다시 봉해졌으며 관직은 검교시중(檢校侍中)에 이르렀다.
권보(權溥)의 세째아들 고(皐)는 충렬왕 때 문화군(文化君)에 봉직되고 이어 영가군(永嘉君)을 받았다. 충숙왕은 친히 우상시(右常侍) 칙서를 내렸으며, 충정(忠靖)의 시호를 받았다.
권왕후(權王煦)는 권보(權溥)의 넷째 아들이며 처음 이름은 권재(權載)였다. 충선왕이 총애하여 양자로 삼고 왕후(王煦)라고 성명(姓名)을 하사하였다. 충숙왕 때 계림부원대군(鷄林府院大君)에 봉해졌고, 충선왕이 원(元)에 알리어 계림군공(鷄林君公)에 봉함을 받았다. 충선왕이 토번에 귀양갈 때 자신이 대신하고자 했고, 심왕(瀋王)이 고려왕위를 빼앗고자 할 때도 전혀 거기에 동조하지 않았다.
충목왕 원년 첨의우정승(僉議右政丞)이 되어서는 문란해진 선법(選法)을 바로 잡아 그 권한을 전리(典理), 군부(軍簿)에 돌렸고, 관리들의 탈점된 녹과전(祿科田)을 돌려주게 하였다. 충목왕 대에 설치되었던 정치도감(整治都監)의 정승(政丞)이 되어 당시 권귀나 부원세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탈점된 토지를 과감히 개혁하고자 했다. 이 개혁에 불만을 가졌던 기황후족(奇皇后族)과 노책(盧頙) 등의 책동으로 정치도감(整治都監)의 개척사업은 실패하고 죽은 후 장례도 관(官)에서 치르지 못하게 되었으나, 공민왕이 즉위한 후 정헌(正獻)으로 증시(贈諡)되고 공민왕묘정에 배향되었다. 평생에 망언(妄言)을 하지 않았으며, 성품이 장중했다 한다. 대의(大義)에 통했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에도 반드시 예를 다했다고 한다. 왕후(王煦)의 후손은 조선에 들어온 후 그의 손자인 권숙(權肅)과 권근(權近)의 노력에 의해 권씨(權氏)로 복성(復姓)했다.
권중귀(權重貴)는 왕후(王煦)의 아들이며, 고려말의 권신이던 기철(奇轍)의 사위였다. 공민왕 초에 좌부대언(左副代言)에 임명되었으나 기철(奇轍)이 복주(伏誅)된 후 사위이므로 유배되었다. 후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으나 신돈(辛旽)의 집권 때에는 파직되었다. 공민왕 18년 북원(北元)의 사신으로 온 노은(盧訔)의 무고(誣告)로 효수되었는데, 사람들이 그가 무고하게 죽은 것을 애석해 하였다. 부인 기씨(奇氏)는 당시 재상이던 지윤(池奫)이 강제로 취하고자 하였으나 의를 지켜 수절하고, 당시 청직한 관리이던 최영(崔瑩)에게 알린 절부(節婦)였다.
권겸(權謙)은 권보(權溥)의 다섯째 아들이며 충숙왕초 사복부정(司僕副正), 민부전서(民部典書)가 되고, 충목왕때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찬성(贊成)을 거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 공민왕 초 복안부원군(福安府院君)으로 원(元)의 황태자에게 딸을 바쳐 태부감대감(太府監大監)에 임명되었다. 당시 원제(元帝)의 후비족(后妃族)으로 고려 조야에 세력을 떨치던 기철(奇轍)·노책(盧책) 등과 함께 공민왕 5년에 복주(伏誅)되었다.
권수홍(權守洪)은 권수평(權守平)의 동생이며 복야공파(僕射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다.
권수홍(權守洪)의 아들 권자여(權子輿)는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고, 손 권책(權책)은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치사(致仕)하였다.
증손 권한공(權漢功)은 충렬왕조에 등제(登第)하여 충선왕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다. 충선왕이 귀국하지 않고 원경(元京)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권한공(權漢功)은 최성지(崔誠之)와 함께 선법(選法)을 주관하였다. 밀직부사(密直副使), 첨의평리(僉議評理)를 거쳐 충숙왕 초에 삼사사(三司使)가 되었다. 충선왕이 실각하며 토번에 귀양가자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고, 충숙왕 때 심왕(瀋王)을 고려왕으로 세우려는 심왕파(瀋王派)에 속하여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같은 권씨(權氏) 집안에서 고려국왕에 충실해서 칭송을 받았던 왕후(王煦) 등과는 대조적으로 시왕(瀋王)을 옹립하고자 하였다. 첨의정승(僉議政丞)의 관직에 올랐으며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에 봉해졌다. 원(元) 조정의 명을 받아 태자좌찬선(太子左贊善)에 임명되었다.
권한유(權漢有)는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이르렀고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권윤평(權允平)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권구(權具)는 흥위위보승장군(興威尉保勝將軍)을 지냈다.
권수홍(權守洪)의 현손 권중달(權仲達)은 추성정책안사공신(推誠定策安社功臣)의 호를 받고 삼중대광(三重大匡),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지냈으며, 화원군(花原君)에 봉해졌다.
아들인 권계용(權季容)은 단성명량찬화공신(端誠明亮贊化功臣)으로 전법판서(典法判書)를 거쳐 예천군(醴泉君)에 봉해졌다.
권중달의 아우 동고(東皐) 권중화(權仲和)는 공민왕조에 과거에 오른 후 조선 태종 때 영의정에까지 오른 조선 전기의 재상이다. 영의정으로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졌으며, 권희(權僖)와 함께 기영회(耆英會)를 설립했다. 王命에 의해 ‘동국제현비록(東國諸賢秘錄)’을 편찬했다.
아들 권방위(權邦緯)는 도총제(都摠制)를 지냈다.
권수평(權守平)·권수홍(權守洪)의 후손들이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려 중앙정부의 관리로서 당대 최고의 세가(勢家)를 이룬 한편, 권체달(權棣達)·권지정(權至正)·권영정(權英正) 등의 후손들은 그대로 안동에 남아 향직(鄕職)에 종사하였다.
권보(權溥)의 손 권염(權廉)(형衡)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권용(權鏞)은 삼중대광(三重大匡)·현성군(玄城君)에 봉해졌고, 권현(權鉉)은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권호(權鎬)는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에, 권균(權鈞)은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이르렀고, 권주(權鑄)는 상의밀직제학(商議密直提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역임하였다.
권중화(權仲和)와 함께 기영회(耆英會)를 세운 권희(權僖)(권보의 손)는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을 지내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다. 조선 개국 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다.
권화(權和)는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의 큰 아들로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지냈다.
권충(權衷)은 조선개국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참여하였으며 공조판서(工曹判書), 호(戶)·병(兵)·이조전서(吏曹典書), 한성판윤(漢城判尹)을 거쳐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로 치사(致仕)하였다.
권보(權溥)의 증손 양촌(陽村) 권근(權近)은 권희(權僖)의 셋째 아들로 조선초의 대표적인 문인이요, 정치가였다. 공민왕 때 18세로 과거에 급제하고 직강(直講),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를 역임했다. 공양왕 때 창왕(昌王)의 외조(外祖)인 이림(李琳)의 일파로 몰렸으나, 이성계(李成桂)의 구원으로 모면하고 윤이(尹彛)의 사건 때는 이색(李穡)과 함께 청주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조선 개국 후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다시 등용되어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었고, 명(明)에 보낸 표문(表文)으로 명(明)과 조선 사이에 외교문제가 발생했을 때, 정도전 대신 명(明)나라에 들어가 해명했는데, 명태조(明太祖)는 그 일을 불문에 붙이고 ‘노실(老實)한 수재’라고 칭찬하였다. 태종의 집권에 협력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에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고, 그의 아들 권규(權跬)가 태종의 부마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후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문장에 뛰어나 언제나 문한직(文翰職)에 임명되었고, 경학(經學)에도 밝아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을 정했는데, 그의 ‘입학도설(入學圖說)’은 후일 이황(李滉)·장현광(張顯光) 등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도학(道學)은 목은(牧隱)에게서 연원하여 야은(冶隱)에게 전해졌다 한다. ‘양촌집(陽村集)’, ‘입학도설(入學圖說)’,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 동현사략(東賢史略)‘ 등을 저술했다.
권우(權遇)는 공양왕 말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고, 조선 개국 후 예문관제학에 올랐다.
권숙(權肅)과 권엄(權嚴)은 왕후(王煦)의 손자로 조선이 서자 장단(長湍) 백목곡(柏木谷)에 은거하였다. 태조 3년 양촌(陽村)의 주(奏)에 의해 권(權)으로 복성(復姓)하였다.
겸교공(慊校公)의 현손 권정(權定)은 고려말 좌사간(左司諫)을 거쳐 김해부사(金海府使)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고려가 망하고 이태조(李太組)가 승지(承旨)로 태종(太宗)이 대사헌(大司憲)의 교지를 내렸으나 받지 않고 안동의 옥산동(玉山洞)에 은거하니 후인들이 그 마을을 기사리(棄仕里)라 고쳐 불렀다.
권홍(權弘)(권보權溥의 현손)은 공양왕 원년(元年) 정몽주의 당파로 몰려 유배갈 정도로 이성계(李成桂) 세력과는 관계가 소원했었으나, 개국 후 정종 때에 이르러 좌보궐(左補闕), 성균관악정(成均館樂正) 등을 역임하고 딸이 태종 빈(嬪)이 되자 영가군(永嘉君)에 봉해졌다.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예조판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거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좌윤공(佐尹公)의 7대손 권진(權軫)은 우왕 3년 등과(登科) 후 이성계(李成桂)의 추천으로 전주판관(全州判官)이 되었다. 태종 초에 강원도·경상도관찰사를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태종 7년, 세종 4년에 각각 흠문기거사(欽問起居使), 정조사(正朝使)로 명(明)에 다녀왔고,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찬성(贊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고 세종 13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권담(權湛)은 고려말 문과(文科)를 거쳐 간관(諫官),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지내고, 태종 2년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 전주부윤(全州府尹)을 역임하였다.
권극화(權克和)는 태종 14년 알성문과(謁聖文科)를 거쳐 직강(直講), 이조판서(吏曹判書),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거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행첨지중추부사(行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은 딸을 문종(文宗)에 출가시켜 현덕왕후(縣德王朽)가 되었다.
권제(權踶)는 양촌(陽村)의 둘째 아들이다. 음보로 관직에 나아갔고 태종 14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했다. 집현전부제학, 대사헌, 한성부윤, 이조·예조판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좌참찬(左參贊) 등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올랐다.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었고, 그 외에도 ‘역대세년가(歷代世年歌)’, ‘영가련괴집(永嘉連魁集)’이 전한다.
권규(權跬)는 양촌(陽村)의 셋째 아들이며 태종의 셋째딸 경안궁주(慶安宮主)와 결혼하여 길천군(吉川君)에 봉해졌다. 호분사상호군(虎賁司上護軍)을 거쳐 겸우군도총제(兼右軍都摠制)를 지냈고, 태종 16년 길창군(吉昌君)에 개봉(改封)되었다.
권채(權採)는 권우(權遇)의 둘째 아들이며 태종 1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관직에 나아갔다. 응교, 우부승지, 대사성을 지냈고, 유호적(兪好適), 노중례(盧重禮) 등과 함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 발행했다.
권자신(權自愼)은 단종 때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있다가 세조 즉위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이 되었으나, 성삼문(成三問) 등과 단종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거열형(車裂刑)을 받았다. 중종 8년에 관직이 복구되고 단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세조정권에 참여하지 않은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인물로 권절(權節)이 있다. 추밀공파 왕후의 현손으로 세종 29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집현전에 들어갔고, 단종 3년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수양대군이 그가 문무(文武)를 겸비했음을 알고 누차 그의 집을 찾아가 단종(端宗)을 폐할 뜻을 의논했지만, 거짓 귀먹은 체하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세조(世祖)는 즉위한 뒤,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첨지중추부(僉知中樞府)를 삼았으나, 거짓 미친 시늉을 하며 받지 않았고, 사람만 보면 머리를 조아리며 “나라가 태평하고 성주께서는 만수무강하옵소서”하며 비뚤어진 세사을 비꼬았다. 끝내 의(義)를 지켜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생애를 마쳤다.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세조의 집권과정에서 공신에 참여한 사람으로는 권람(權擥)·권반(權攀) 형제와 권언(權躽)·권경(權擎) 등이 있다.
권람(權擥)은 세종 32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하고, 문종 때 친책(親策)에서도 급제하였다. 세종 33년 교리(校理)로서 ‘역대병요(歷代兵要)’를 함께 편찬하던 수양대군과 뜻이 통하여 그의 참모가 되었다. 계유정난(癸酉靖難) 때에 한명회와 같이 1등공신이 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에 특진되고, 세조 즉위 후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으로 대제학(大提學)에 승진, 고창군(古昌君)에 봉해졌다. 우(右)·좌찬성(左贊成),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세조8년 좌의정(左議政)에 올라 다음해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문장에 뛰어났다.
권반(權攀)은 형과 함께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가담했고, 세조원년(元年)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으로 전농사소윤(典農寺少尹)에 발탁되었다. 후에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으며 경기도 관찰사로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겸했다.
권근의 증손 권언(權躽)은 무과(武科)를 거쳐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으로 복성군(福城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권경(權擎)(권근의 손)은 음보로 사용(司勇)이 되고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이 되어 형조정랑(刑曹正郞), 판사복사사(判司僕寺事), 이조판서(吏曹判書),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고 영가군(永嘉君)에 봉해졌다.
권규權跬의 아우 권준權蹲은 세조원년 사헌부대사헌, 정난공신靖難功臣 안천군安川君에 봉직되고, 형조판서와 호조판서를 하였다.
권벽權擘은 권준權蹲의 현손으로서 총명하여 7세에 시를 짓고 중국사신이 올 때는 제술관, 종사관을 하였으며 예조참의겸지제교를 지내고 광국공신원종일등공에 서훈되었으며 습제집習齋集을 남겼다.
석주石洲 권필權韠은 권벽의 다섯째 아들이다.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호방하고 매사 얽매이지 않는 성품으로 벼슬하지 않고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허균許筠은 석주의 시가 청묘하다하고 김만중金萬重은 당시에 밝아 성대한 시기를 열었다고 하였다. 정조는 우리나라 기사에서 권석주權石洲가 성당의 바른 소리를 얻었다고 하였다. 석주 5형제는 모두 문장과 시에 뛰어나 당시 제가들이 당가오보唐家五寶에 비하기도 하고 강상칠현이라 일컬었다. 석주집石洲集에는 시 836수 문 25편이 있다. 권필은 광해군 비 문성군부인의 아우 유희분(柳希奮)을 풍자한 궁류시宮柳詩를 지었다고 광해군의 친국을 받고 유배길에 장독으로 죽었으며 인조가 즉위하자 사헌부 지평으로 추증하였다.
권수權𢢝는 생부가 권양權讓이나 권속(權謖)에게 입양되어 임금이 권필의 대를 잇게 하였다. 관직은 승지를 지냈다.
권수權𢢝의 아들 권적權𥛚은 전라감사, 경기도관찰사, 한성판윤을 거쳐, 예조, 병조, 호조판서를 지내고 효정孝貞의 시호를 받았다.
권양의 맏아들 수초당 권변(權忭)은 이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냈고 둘째아들 제월재 권성權𢜫은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네째아들 권업權𢢜은 형조판서와 좌참찬을 지낸 명문가였다.
권감(權瑊)은 성종조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이 되었으며 대사헌(大司憲), 좌참찬(左參贊),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했고,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권건(權健)은 부제학(副提學),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연산군 때 성현(成俔)과 함깨 ‘역대명감(歷代明鑑)’을 지었다.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권찬(權攢)은 의술을 연구해서 ‘의방유취(醫方類취)’를 남겼다.
권경유(權景裕)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인데, 김일손(金馹孫)과 함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었다가 무오사화(戊午士禍)때 사형되었다.
권보의 증손 권균(權鈞)은 성종 22년 별시문과(別時文科)에 급제,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교리(校理), 도승지(都承旨),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했다. 중종반정 때 정난공신(靖難功臣) 4등으로 영창군(永昌君)에 봉해졌다. 형조판서(刑曹判書), 좌찬성(左贊成) 등을 거쳐 1518년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온 후 영창부원군(永昌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호조(戶曹)·예조판서(禮曹判書),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권전(權磹)은 16세기 사림(士林)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중종 14년 현량과(賢良科)에 급제, 수찬(修撰)이 되었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직되고, 신사무옥(辛巳誣獄) 때 사형 당했다.
사화(士禍)와 당쟁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길을 간 인물로는 권전(權磹) 외에 권상하(權尙夏)와 권대운(權大運)·권벌(權橃)이 있다.
권상하(權尙夏)는 서인(西人) 송시열(宋時烈) 등의 학통을 계승한 기호(畿湖)학파의 중진이다. 그는 남인(南人)의 득세로 송시열(宋時烈)이 유배된 후 초야에 묻혀 유학강론에 전념했다. 이이(李珥)를 조종(祖宗)으로 하는 기호학파의 지도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했다.
반면에 남인(南人)이었던 정헌공의 10대손 권대운(權大運)은 숙종조에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라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세도를 부렸던 인물이다.
복야공 10세손 충재 권벌(權橃)은 1545년 (명종(明宗)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공을 세워 위사(衛社)공신에 올랐으나, 정순명(鄭順明)의 반대로 삭훈되고 그 후 반대파에 몰려 유배지에서 죽은 인물이다. 인종(仁宗) 때 우찬성(右贊成)으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했고, 명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었다. 권벌은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의 추할된 위호회복에 소를 올려 복권시키고 충성과 절개를 다하여 충정의 시호를 받았다.
권철(權轍)은 중종(中宗) 2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사관(史官) 등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1544년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으로 경상도경차관(慶尙道敬差官)이 되었다. 경기도어사(京畿道御使)·우승지(右承旨) 등을 거쳐 1552년 (명종(明宗)7)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의 관찰사(觀察使), 형조(刑曹)·병조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이 되었으며, 1565년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그 후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그는 충성심이 강하고 사무처리에 사려가 깊어 오랜 기간 정권에 있었으나 아무도 그의 허물을 말하는 사람이 없었고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덕많은 거공(鉅公)이라 불렀다고 한다.
권율(權慄)은 권철(權轍)의 아들이다. 선조 1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승정원정자(承政院正字), 예조정랑, 의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로 참전, 뒤에 의용군 1천명을 모집하여 금산(錦山)에서 적을 격파하고, 전라도순찰사에 승진했다. 행주산성(幸州山城) 싸움에서는 2백~3백명의 병력으로 3만여 명의 왜군을 맞아 싸워 크게 이겼고, 그 공으로 도원수(都元帥)에 올랐다. 한성부판윤, 비변사당상(堂上) 등을 역임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권응수(權應銖)는 복야파윤보의 9대손으로 의병장으로 학연, 예천, 문경 등지에서 적을 물리쳐 경상도 병마절도사 겸방어사를 지냈다.
권순장(權順長)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의병을 모집, 전투를 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자 좌의정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자결했다.
권희(權憘)는 문과를 통해 관직에 나아갔다. 임진왜란 때 역대왕의 신주(神主)와 어보(御寶)를 가지고 행재소(幸在所)에 도착했다. 그 공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고, 호성(扈聖)·선무(宣武)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권희인(權希仁)은 의병장으로 진주성 싸움에서 공을 세워 옥천군수가 되었고, 후에 웅천(熊川)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권진(權縉)(양촌의 8대손)은 경주부윤, 한성판윤, 좌참찬(左參贊)을 지냈으며, 인조반정 후 권신(權臣)들과 동화(同和)하지 않아 무고로 참형당했다.
권호문(權好文)은 복야파 윤평의 9대손으로 학자로 이름이 있었고, ‘독락팔곡(獨樂八曲)’과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을 지었다.
권협(權悏)은 1577년(선조 10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호군(護軍)으로 5위장(衛將)을 겸임, 부총관(副摠管),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1607년 예조판서를 거쳐 1609년 정헌대부에 이르렀으나, 광해군 때 탄핵을 받아 관직을 버렸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권대재(權大載)는 권협權悏의 손자로 1653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1658년(효종 9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청남(淸南)으로 활동하며 전라도관찰사, 대사간, 대사헌, 호조판서를 역임했고,
권상유(權尙游)는 전라도·평안도관찰사, 호조·예조판서, 좌참찬(左參贊)을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명관(名官)으로 이름이 높았던 권성(權偗)은 부총관(副摠管)을 거쳐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권업(權𢢜)은 숙종 17년에 등과(登科), 한성부판윤을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고,
권상일(權相一)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권선학(權善學)은 이인좌(李麟佐)의 난에서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으로 화원군(花原君)에 봉해지고,
권만(權萬)은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조선후기에 들어 관직에 나아간 인물 중에서는 시중공파 권상하의 5대손 권돈인(權敦仁)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순조 12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헌종 2년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있으면서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경상도관찰사, 이조판서, 우·좌의정을 거쳐 1845년 영의정에 올랐다.
권상신(權常愼)은 순조 원년(元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 한성부좌윤, 호(戶)·형조판서(刑曹判書), 도총관(都摠管),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구한말 망국의 시기에 즈음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든 인물로는 권기일(權奇鎰), 권병덕(權秉悳) 등을 들 수 있다.
권기일(權奇鎰)은 한일합방 후 만주로 망명, 독립군양성을 목적으로 중학교를 설립했고 뒤에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활동하였다. 봉천 하미하(河尾河)에서 일본경찰에 살해되었다.
부정공의 23대손 권병덕(權秉悳)은 동학교도로 활동, 3ㆍ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에 서명했다. 그후 천도교(天道敎)에서 활동했다.
권학규(權學奎)는 임시정부의 이동녕과 연락을 취하며 항일선전문(抗日宣傳文)을 인쇄하여 발송하였고,
권동진(權東鎭)은 천도교(天道敎)에 들어가 3ㆍ1운동 때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3년형을 살았다. 출옥 후 신간회(新幹會)를 조직, 부회장이 되고 광주학생운동 때 참여하다 다시 복역했다.
권준(權晙)은 3ㆍ1운동에 참가하고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후 중국에서 황포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를 졸업하고 중국정부의 북벌전(北伐戰)에 참여하기도 했고, 한국인군사학교를 설립, 독립군 간부 양성에 종사했다. 해방 후 무한(武漢)지구의 교포선무단장과 광복군 5지대장으로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귀국하여 수도군단장 등을 역임했다.
권용일(權用佾)은 1907년 창의, 의병장으로 제천, 안동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권종해(權鍾海)는 1906년 강원도에서 창의, 다음해 인제의 운두령(雲頭嶺)과 백담사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1908년 정선에서 일본군 8백여명을 사살하고 만주로 건너가 의군부(義軍府) 유격장으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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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권문權門을 빛낸 현조賢祖|작성자 kwonbh1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