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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처구니없는 악녀
백야무축(白夜武築)!
백옥(白玉)의 석실(石室).
사흑련의 총련주만이 출입할 수 있는 연무실이다.
한 사나이가 정중앙에 가부좌를 튼 채 오연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서궁장청!
그 앞에는 하나의 철궤와 묵직한 두께의 서책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서궁장청의 뇌리로는 좌명붕이 들려준 말이 하나씩 스쳐가
고 있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신릉군에서부터 이십팔 대를 이어온 사흑련
총련주의 절학을 아는 자는 없네.
어둠 속의 사흑련이 무한대의 힘을 감추고 있듯이… 사흑련 총련
주의 진정한 절학은 천년이란 세월 동안 은밀히 이어져 오며 발전해
왔지.
그 절학의 실체는 하나의 신병(神兵)으로 시작되니 이름하여 팔황
십방산(八荒十方傘)이라 하네!>
"팔황십방산……!"
조용히 되뇌는 서궁장청의 가슴에는 기이한 떨림이 일고 있었다.
<팔황십방산은 천하만병(天下萬兵)의 으뜸으로, 사흑련의 지존을
의미하네.
팔황십방산은 오직 사흑련의 사활(死活)이 걸린 난세지난세 때에
만 사용하기 위해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네.>
"팔황십방산! 사흑련 최대의 위기를 타개키 위해 천년 동안 숨겨
져 온 천하제일의 지존신병(至尊神兵)!"
그의 눈에 강렬한 호기심이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그는 천천히 검은 철궤를 향해 손을 뻗어갔다.
끼이― 익―!
흑궤가 열렸다.
아니 천년의 세월이 열렸다.
순간 엄청난 광채가 서궁장청의 눈을 찔렀다.
버번― 쩍!
눈을 멀어버리게 할 듯 쏟아져 나온 휘황찬란한 백광(白光)이 흑
궤의 중앙에 놓여 있는 하나의 백옥산(白玉傘)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
었다.
백옥산(白玉傘=백색의 우산)!
팔황십방산은 바로 비가 올 때 쓰는 백옥의 우산이었던 것이다.
"훗! 이렇게 아름다운 백옥산이 만병지왕(萬兵之王)이라… 어울리
지 않는걸."
서궁장청은 기오하게 웃으며 천천히 팔황십방산을 펼쳐 보았다.
촤악―! 촤르르르―!
순간 섬칫한 기음과 함께 팔황십방산이 쫘악 펼쳐지며 그 실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백색의 산박(雹=우포)에는 일월(日月)을 짓밟고, 선 천왕상(天王像)
이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고, 칠십이 개의 살대는 희귀하기 이를 데
없는 적향단옥(赤香丹玉).
그리고 산대는 정교한 자룡(紫龍)이 수놓아진 자강백금자(紫剛白
金子)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단하군."
서궁장청의 눈이 커졌다.
팔황십방산은 실로 천하에서 가장 희귀한 금속과 옥, 나무로 만들
어진 기병(奇兵) 중의 기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서궁장청의 손이 팔황십방산의 손잡이를 만지는 순간이었
다.
철컥―!
파앗―! 쏴아― 아―!
무언가 작동이 되는 예리한 소음과 함께 팔황십방산에서 붉은 적
광(赤光)이 소리 없이 폭발했다.
적향단목으로 만들어진 예리한 칠십이 개의 살대.
그것들이 일제히 팔방(八方)의 방위와 천지(天地)를 포함한 십방
(十方)의 방향을 향해 무섭게 폭사된 것이었다.
파바― 박!
칠십이 개의 살대는 여지없이 백야무축의 석벽에 박히고 말았다.
실로 놀라운 현상이 아닌가!
"음… 칠십이 개의 살대가 하나의 가공할 병기라… 팔황십방산이
만병지왕이란 말이 결코 허언은 아닌 듯하구나."
서궁장청은 은은한 놀람을 자제하며 서책을 살피기 시작했다.
서책 속에는 한 통의 서찰이 들어 있었다.
<팔황십방산은 기실 다섯 가지의 천고기병으로 이루어져 있네.
팔황적방시(八荒赤方矢)!
일월백산박(日月白傘雹)!
신릉자룡검(信凌紫龍劍)!
십방만리추(十方萬里鎚)!
십방백린(十方百鱗)!
천년 동안 이십팔 명의 총련주들이 갈고 닦아 온 비전은 바로 이
다섯 가지 천고기병의 묘용에서부터 시작되었네.>
서찰!
그것은 다름아닌 좌명붕이 남긴 서찰이었다.
그 밑으로 하나하나의 묘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팔황적방시!
바로 적향단목으로 만들어진 칠십이 개의 살대.
적향단목은 지상에서 가장 무겁고 단단한 나무이다.
어떠한 호신강기나 물체라도 여지없이 꿰뚫는다.
일시에 칠십이 살, 팔황적방시가 쏘아지면 그 누구도 살아날 수 없
다.
왜냐하면 그것이 쏘아지는 순간 이미 상대의 모든 퇴로가 차단되
기 때문이다.
일월백산박!
일명 하늘의 방패(防牌).
병기, 독(毒), 암기(暗器) 등 어떤 외세의 공격이라도 능히 분쇄할
수 있는 무적의 방패이다.
가장 완벽한 방어초식을 구사할 수 있는 기병으로, 바로 팔황십방
산의 산박(傘雹=우포) 부분이다.
신릉자룡검!
철왕(鐵王)이라 불리는 자강백금자로 만들어진 팔황십방산의 산대
부분.
산대를 잡아 빼면 신릉자룡검이 드러난다.
신릉군이 목숨처럼 아끼던 제황의 검(劍)으로써 검기(劍氣) 하나로
모든 것을 끊어 버린다.
십방만리추!
일명 죽음을 집행하는 검은 손(黑手).
인간의 손을 그대로 복제(複製)한 듯한 철수(鐵手)에 백 장(百丈)
길이의 은빛 사슬이 매달린 기병이다.
어떤 물체라도 철수에 걸리면 단순간에 바스러지고 만다.
평소에는 팔황십방산을 이루는 둥근 살대 속에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일단 손잡이의 기관을 작동시키면, 번쩍! 하는 순간 이미
상대의 목은 그 악마의 손가락 안에서 산산조각나고 만다.
십방백린!
린화(鱗花=비늘 꽃).
팔황십방산의 꼭지 부분에 달린 린화이다.
그것은 수만 개의 편린(片鱗)으로 이루어진 가공할 암기이자 기병
이다.
속칭 살인파편이라 불리며 일순간에 수만 개의 파편으로 폭발하여
오십 장 방원을 초토화시키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주로 대량 살상이
필요할 때 최대의 묘용을 발휘한다.
"으음… 무서운 병기다. 이 팔황십방산 하나만으로도 능히 천하를
독보할 수 있으리라!"
서궁장청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병기 자체의 위력이 이러할진대 이 팔황십방산으로 펼치는 절기
의 위력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그것은 그의 뛰어난 머리로서도 얼른 상상이 안되는 것이었다.
문득 그의 눈에 벽에 박힌 붉은 빛을 발하는 칠십이 개의 살대가
비쳐 들었다.
"팔황적방시! 하늘을 가르는 붉은 침. 이것을 회수하는 장치가 이
홍석(紅石)인가?"
장홍석(長紅石).
그의 시선은 팔황십방산의 손잡이 부분에 박혀 있는 붉은 홍보석
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가볍게 그것을 눌렀다.
찰칵―!
순간 무서운 소음이 터지며 벽에 박힌 칠십이 살, 팔황적방시가 빨
려들듯 원래대로 회수되었다.
쫘아― 아― 악!
"놀랍군!"
서궁장청은 싱긋 웃으며 다시 서찰로 시선을 옮겼다.
<팔황십방산을 사용하는 절예는 백팔 가지. 이름하여 팔황난비백
팔예(八荒亂飛百八藝)라 한다.
팔황난비백팔예는 이천 년 간 수정되고 바뀌며 나 천세백작 좌명
붕 대(代)에 이르러 마침내 완성되었다.
그 위력은 능히 천세의 으뜸이라 자부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이 팔황난비백팔예를 익히기 전에 모든 무학을 완성한 자만이 연
성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즉 신법(身法), 장법(掌法), 검법(劍法) 등 십기(十技), 십술(十術),
십예(十藝), 십도(十道)를 완성할 자만이 수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십기, 십술, 십예, 십도를 완성한 자만이 익힐 수 있는 절학이라…
그럴 듯하군."
서궁장청은 씩 웃었다.
"훗! 그러나 나에게는 별다른 지장이 없겠군."
사실이었다.
서궁장청, 그가 누구이던가?
십삼태극지체(十三太極之體)!
전사(戰士)의 왕국 객리습아가 가져다준 최대 복연!
바로 전신의 기능을 모든 무신(武神)들의 기능과 똑같이 변화시킨
무적 신체의 소유자.
검을 쥐면 검신이 되고 도(刀)를 쥐면 도신(刀神)이 되는 불가사의
한 신체.
의원들의 신인 태극활민숙의 단왜수명사 완안주에 의해 탄생된 지
상최강의 신체 소유자가 곧 서궁장청인 것이다.
<그러나 장청, 그대는 무난히 팔황난비백팔예를 연성할 수 있을
것이네.
그러나 천금삼황과의 일이 있으니 가능한 한 최단 시간 내에 속성
해야 하네.
기실 내가 무리를 하여 천금삼황의 일을 벌인 것은 바로 아우를
위한 것이었네.
그것은 천금삼황이 비할 데 없는 악마들이나 그들의 힘이야말로
아우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그들을 굴복시켜 대야망에 보탬이 되도록 하게.>
"천금삼황! 명붕형께서 이토록 권하는 것을 보니 꽤 골치 아픈 인
물들임에는 분명하군."
서궁장청은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끝으로 지금 천금등혈옥에는 천하의 최강고수들로부터 시작하여
수천 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팔황절대좌의 고수들과 대원
제국의 황실고수들까지 대거 운집해 있네.
기실, 그들을 모이게 한 것은 나일세.
사흑련의 존재와 유랑구구종횡천의 신비를 내가 고의적으로 유출
시킨 때문일세.>
"명붕형께서 그들을 모이게 하였다고……?"
서궁장청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 이유는 자네가 천금삼황의 일을 매듭 지은 후에 말해 주겠네.
천금삼황과의 일이 일어나는 대로 이곳을 들러주게.
아우의 무운(武運)을 비네.
천세백작 좌명붕 서(書).>
"음……."
서궁장청은 침중한 신음을 흘려냈다.
생각할수록 호기심은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호기심을 떨쳐 버리고 팔황난비백팔예에 몰두해
갔다.
팔황난비백팔예!
사흑련이 일천 년 동안 소장해 온 천고비전,
그런데 차츰 천고비전을 살피는 서궁장청의 몸에 무서운 경련이
일었다.
무엇인가?
이 지상최강의 사나이를 이토록 전율케 하는 팔황난비백팔예의 실
체는!
풍운(風雲)은 이제 좀더 가까이서 불고 있었다.
천금제황축의 아침은 어스름한 안개와 함께 시작된다.
청객사(靑客舍)의 후원(後園).
이곳은 사시사철 꽃으로 뒤덮여 있다.
말 그대로 별유천지(別有天地)!
그러나 그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은 모두 독화(毒花)요, 사목(死木)
이다.
한마디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죽음의 화원(花園)인 것이다.
저벅… 저벅!
한 사나이가 아침 이슬을 밟으며 후원으로 들어섰다.
"이 아름다운 꽃들과 나무조차 죽음의 요기(妖氣)로 가득 차 있
군."
쓸쓸하게 미소 짓는 사나이, 서궁장청이었다.
"그러나 이 삭막한 땅 위에 이토록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가꿀 수
있다니. 누군지 모르지만 정말 대단하군."
그는 진실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천사(天使)의 정원(庭園)!
만발한 온갖 기화이초.
아침 이슬을 머금은 채 활짝 핀 꽃송이들.
그것들은 서궁장청으로서도 일찍이 접해 본 적이 없는 진귀하고
아름다운 꽃들이었다.
칠색(七色)의 조화(造化)라 한들 이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을 것이
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그 한마디로 족했다.
서궁장청은 오랜만에 삭막한 피 냄새에서 벗어나 매혹의 향기에
젖어들었다.
그런데 문득 불현듯 한 가지 의혹이 솟구쳤다.
"이 정원의 주인은 누구일까?"
그때였다.
돌연 꾀꼬리가 우짖는 듯 청아한 소녀의 옥음(玉音)이 등뒤에서
들려왔다.
"이쁜 아저씨, 안녕!"
서궁장청의 시선은 홀린 듯 뒤로 돌려졌다.
"나… 나 말인가?"
삼 장 뒤, 탐스러운 꽃송이로 뒤덮인 거대한 녹목(綠木)이 있었고
그 위 나뭇가지에 앙증맞게 걸터앉은 한 소녀(少女)가 있었다.
이제 십 사오 세쯤?
치렁한 흑발 위에 생화(生花)로 만들어진 화관(花冠)을 눌러쓴 긴
머리 소녀였다.
꽃의 요정(妖精)인가?
소녀의 용모는 실로 깜찍스러운 것이었다.
쌍꺼풀 진 기다란 속눈썹에 깜박거리는 커다란 눈, 능금 같은 두
볼에 쏙 패인 보조개.
마늘쪽같이 곧은 콧날.
그러나 서궁장청을 고소 짓게 한 것은 그 깜찍스러운 용모가 아니
라, 소녀가 하고 있는 자세였다.
나무 위에 걸터앉은 채 하얀 백목련 생화를 단 꽃신을 신은 두 발
로 연신 발장구를 치고 있는 치기 어린 모습.
'훗! 이쁜 아저씨라…….'
서궁장청은 그녀가 부른 호칭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절로 미소를
머금었다.
그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지어 보인 티없는 미소였다.
이때 그 미소를 넋나간 얼굴로 바라보던 소녀가 다시 탄성을 터뜨
렸다.
"햐―! 미소 띤 모습은 더욱 이쁘고 귀여운데!"
'이쁘고… 귀여워?'
누가 할말을 누가 하는가?
서궁장청은 일순 멍해졌다.
소녀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앙증맞게 턱을 괴며 말했다.
"정말… 아저씨는 꼭 껴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이쁘고 귀엽다."
'윽!'
서궁장청은 갑자기 머리가 지끈해짐을 느꼈다.
"쳇! 자신이 멍청한 것을 증명하는 그런 표정 짓지 말고… 다시 한
번 웃어봐. 빨리… 응?"
서궁장청은 난감해졌다.
난감해져도 이렇게 난감해지기는 실로 처음이다.
"정말 골 아플 말괄량이로군."
"말괄량이……."
순간 소녀의 큰 눈이 더욱 크게 치켜 떠졌다.
그러나 이내 소녀는 볼우물이 쏙 패이는 깜찍하기 이를 데 없는
미소를 지어냈다.
"훗, 내가 조금 곤란하게 했다고… 금방 토라져서 나에게 말괄량이
라고 응수하다니… 정말 귀엽다."
이처럼 황당무계한 소녀를 본 적이 있는가?
서궁장청은 도리 없이 순순히 그녀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소졌다.
"자, 이렇게 웃으면 되나, 꼬마 낭자?"
소녀는 배시시 웃었다.
"응! 하지만… 수상한데 좀……."
"수상?"
서궁장청의 눈이 다시 커졌다.
소녀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사내들이 여인을 향해 멋있게 웃을 때는… 응… 십중팔구 야릇한
딴 생각을 품고 있다고 엄마가 그랬거든."
"딴 생각이라니?"
"있잖아! 사내가 아름다운 여인에게 품는 그렇고 그런 생각 말야!"
서궁장청은 비로소 짚이는 바가 있었다.
"그럼 내가 지금 꼬마 아가씨를?"
"그래. 솔직히 사내답게 한 번 대답해 봐. 아저씨 같은 미남이면
한 번쯤 고려해 볼 수도 있는 문제니까 말야."
소녀의 입에서는 실로 엄청난(?) 말이 흘러 나왔다.
서궁장청의 입이 딱 벌어졌다.
충격이었다.
이때 소녀가 그의 옆으로 사뿐히 내려섰다.
이어 자못 신중한 표정으로 서궁장청의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
다.
흡사 마음에 드는지를 감정하는 것 같았다.
"왜 내 말에 대답을 못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정말 수상한데. 수
상해… 진짜 수상해……."
서궁장청은 넋을 잃었다.
그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하랴!
이윽고 소녀는 그의 정면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양손을 허리에 척 걸쳤다.
"혹시 아저씨는 지금 나를 자빠뜨릴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아니
야?"
"자빠뜨릴… 생각?"
"있잖아. 남자가 여자를 자빠뜨리는 흉측한 것 말이야."
"으윽―!"
드디어 서궁장청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세상에!
아무리 산 넘어 산이라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지 않는가?
서궁장청은 소녀를 다시 한 번 빤히 쳐다보았다.
분명 요정처럼 깜찍하고 귀여운 소녀이건만 그의 눈에는 지금 무
슨 괴물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괴팍하고 괴상하고 도깨비 같은 소녀!
문득 서궁장청은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 꼬마 도깨비 같은 소녀는 누구일까? 그리고 지금 나는
이 꼬마 도깨비와 무얼 하고 있는 거지.'
그는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 보아도 지금의 현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궁장청같이 냉철한 사나이에게 이런 기괴한 상황이 벌어질 줄이
야 그 누가 짐작이나 했으랴!
그러나 그 불가능한 상황은 이루어졌다.
그것은 모두 소녀의 보이지 않는 마력 때문이었다.
사정없이 상대를 빨아들이는, 아무리 미운 짓을 해도 그저 예쁘고
귀엽게만 보이는 기이한 마력.
실로 악마라도 미소 짓게 할 소녀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다.
이때 소녀는 짐짓 부드러운 표정을 떠올렸다.
"이제 그만할 테니 그런 이상한 표정 짓지 마. 그대가 그런 표정을
지으니까 괜히 내 마음이 이상해지잖아."
"알겠네. 꼬마 낭자!"
서궁장청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행여 더욱 무서운(?) 말이 그녀 입에서 튀어나올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꼬마 낭자는 누구지?"
"나? 으응… 나는 천사해화채(天使海花寨)의 주인인 칠촌금미(七
寸琴美)야."
"천사해화채 칠촌금미?"
물론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특이하고도 생소한 이름이었다.
소녀, 칠촌금미는 그의 의문을 느낀 듯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천사해화채는 바로 이 꽃밭의 이름이야. 다른 사람들은 천사의 정
원이라고도 불러. 그리고 칠촌금미라는 이름은 나의 본명(本名)인데,
이 세상에서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나와 엄마, 그리고 아저씨뿐이
야."
소녀 칠촌금미는 자신이 말해 놓고도 쑥스러운 듯 은은히 얼굴을
붉혔다.
'이 꼬마 도깨비가 수줍어할 때도 다 있나?'
서궁장청은 내심 의혹에 쌓였으나 결코 내색하진 못했다.
"나는 서궁장청이라는 사람이네, 꼬마 낭자."
"알고 있어."
"응? 꼬마 낭자가 나를 어떻게?"
칠촌금미는 배시시 웃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진주 옷을 입고 다니는 원숭이가 얘기
해 줬어."
"원숭이?"
"십광마성 초류백 말이야. 그는 자칭 제황이라지만 난 언제나 그를
원숭이라고 불러. 그것도 많이 봐준 거지만……."
십광마성 초류백을 원숭이라고 부르는 소녀.
서궁장청은 도대체 뭐가 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칠촌금미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그 원숭이가 나에게 서궁 오빠를 죽여 달라면서 그대에 대해서
얘기해줬어."
오빠… 그대… 그녀는 서궁장청을 제멋대로 불러댔다.
"십광마성이 꼬마 낭자에게 나를 죽여달라고 부탁했다고……?"
서궁장청이 놀라며 물었다.
"응, 막 눈물까지 흘리면서 부탁하기에 내가 그러마고 그랬어."
"으음……."
서궁장청은 나직한 신음을 흘려냈다.
'대체 이 깜찍하고 귀여운 소녀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이기에…….'
그러나 그는 담담하게 물었다.
"그래, 꼬마 낭자는 날 어찌할 생각이지?"
칠촌금미의 안색이 돌연 시무룩해졌다.
"난 그대를 죽이고 싶진 않지만 난 약속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
거든."
"흐흠… 그럼 꼬마 낭자는 날 죽일 수밖에 없겠군?"
"응! 하지만 죽이고 나서 심심하지 않게 내가 날마다 옆에 있어 줄
게. 또 아프지 않게 죽이고 말이야."
"으음……."
"그러니까 날 미워하면 안돼! 알았지?"
아프지 않게 죽여줄게!
날 미워하면 안돼! 알았지!
그녀는 서궁장청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손톱만큼의 죄의식이나 망설임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죽음을 흡사 무슨 소꿉놀이처럼 생각하는 듯했다.
악녀(惡女)인가?
아니면 죽음이란 단어의 의미조차 알지 못하는 순진무구한 소녀인
가?
'순진한 악녀! 대체 이 소녀는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서궁장청은 알지 못할 전율과 함께 그녀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이때 칠촌금미가 스스럼없이 그의 손을 척 잡았다.
"나하고 같이 가! 보여줄 게 있어."
그리고 그녀는 서궁장청이 어떤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다짜고짜 그
의 팔을 잡아끌었다.
무심결에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서궁장청의 표정은 아주
야릇했다.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다는 표정, 바로 그것이었다.
꽃(花).
이 세상에서 가장 희귀하고 아름다운 꽃.
구십구 송이의 꽃송이 속에 현란하게 피어 있는 꽃.
꽃잎은 각기 색깔이 다른 찬란한 칠채서기(七採瑞氣)를 뿌리고 있
다.
환상(幻想)의 꽃이런가?
무지개를 따다 만들어 놓은 천상의 꽃이런가?
흡사 구십구 명의 시녀를 거느리고 고고하게 선 여왕처럼 구십구
송이의 꽃송이 속에서 찬연히 피어난 꽃 중의 꽃 화중지화(花中之
花)!
칠촌금미가 서궁장청을 데리고 온 곳은 바로 이 화중지화 앞이었
다.
"이 꽃의 이름은 홍예용설란(紅藝龍舌蘭)!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야."
"으음……."
"하지만 아주 키우기가 힘들어.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사람의 피를
주어야 하거든. 그것도 아주 신선한 피를……."
그녀는 웃고 있었다. 아주 천진스럽게…….
그리고 서궁장청을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음… 피 좀 줘. 그대의 피는 아주 신선할 거야. 조금이면 돼."
'피를 달라고……?'
충격의 연속.
서궁장청은 어이가 없었다.
마치 악마로 변신한 요정에게 자신이 홀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칠촌금미는 여전히 생글거렸다.
"그대가 싫다면… 안 줘도 괜찮아.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아니거
든."
말과 함께 그녀는 홍예용설란 한 송이를 조용히 꺾어 들었다.
뚝!
"이 꽃은 내가 그대를 만난 기념으로 주는 거야. 아주 귀중하고 또
아주 특별한 거야."
요염한 보랏빛을 띤 자화(紫花).
서궁장청은 무심코 그것을 받아 들었다.
예리한 가시에 찔린 듯한 느낌이랄까?
그 순간이었다.
그의 엄지에 한 방울의 붉은 핏방울이 배어 올랐다.
'훗! 금강불괴나 다름없는 신체를 지닌 내가 피를…….'
그는 씁쓸히 웃었다.
"금미! 네 말대로 이 꽃은 아주 특별한… 죽음의 꽃인 모양이군!"
칠촌금미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결코 대수롭지가 않았다.
"응, 맞아! 그 자화는 가시가 없는 것처럼 보이나 만지는 순간 가
시가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 일단 그 가시에 찔리면 어느 누구도 살
아나지 못해."
그녀의 말 대로라면 그녀는 지금 살인(殺人)을 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절대로 살인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 가시에는, 독(毒)은 아니나 혈관을 수축시키는 기이한 성분
이 들어 있기 때문이야. 결국 금강불괴나 만독불침의 신체를 지닌
사람이라도 서서히 죽게 돼. 아주 편안하게… 천천히 말이야."
문득 서궁장청은 빙긋 웃었다.
"그래. 친절한 설명 정말 고맙구나. 하지만 나는 죽을 수 없으니
어떻게 하지?"
"응? 왜?"
칠촌금미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서궁장청은 담담히 대꾸했다.
"그것은 불행히도 내가 십상태극지체라는 조금 특이한 신체를 가
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십상태극지체? 그게 얼마나 특이한 건데?"
"예를 들자면 십상태극지체는 평상시에는 범인과 똑같은 신체이나
일단 외세의 힘을 받게 되면 세포 하나하나가 상호 융합 반응을 일
으켜 그 힘을 밀어내게 되지."
"응, 그러니까 반사신경이 느낌과 동시에 강력한 반진력(反進力)을
발휘하는 신체로구나."
그녀는 실로 공포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서궁장청의 말 한마디에 그대로 십상태극지체의 핵심을 꿰
뚫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가시에 찔려 혈관에 독성분이 퍼지려는 순간, 신체
스스로 그 힘을 밀어내니까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겠구나."
"그렇지!"
"화아! 정말 완벽한 신체인데? 그게 사실이라면 반사신경이 느낄
수도 없을 만큼 빠르게 목을 베어버리지 않는 이상에는… 절대 죽일
수 없겠는걸?"
서궁장청은 침묵했다.
그는 지금 일종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이 소녀는 단번에 나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꿰뚫고 있다. 너무도
정확히… 다른 점은 몰라도 두뇌만큼은 나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가 모르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칠촌금미!
이 소녀야말로 살인제황 서궁장청은 물론 하늘이라도 마음만 먹으
면 능히 죽일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칠촌금미는 생긋 웃었다.
"그러나 난 다른 방법으로도 그대를 죽일 수 있어."
"으음… 그게 뭐지?"
그러나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은 말할 수 없어. 나 갈 테야. 그 방법을 실험해 봐야 하거
든."
서궁장청이 담담히 말했다.
"그런데 나는 금미를 보내줄 수 없겠는데 어쩌지?"
"왜? 왜 나를 보내줄 수 없다는 거지?"
서궁장청은 씩 웃었다.
"그것은… 금미가 아주 나쁜 생각을 하고 있어 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지."
돌연 칠촌금미는 우스워 죽겠다는 듯 허리를 잡았다.
"킥―! 그대는 참 재미있는 사람이야."
"재미있는 사람?"
서궁장청은 멍해졌다.
"시간이 있으면 그대와 좀더 놀고 싶지만 이만 떠나야 해. 잡을 생
각은 마. 원숭이가 와 있으니까."
"원숭이……?"
서궁장청이 흠칫하는 순간이었다.
스스스슷―!
흡사 빗물이 모래 속으로 스며들 듯 그녀의 모습이 액체처럼 흐물
흐물하게 변하며 지면 속으로 사라졌다.
"법환술(法幻術)!"
서궁장청의 입에서 짤막한 경호성이 터졌다.
법환술!
일명 법술(法術)!
도가(道家)의 심오한 이치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상상키 어려운
수법이다.
극성의 경지에 도달하면 혼과 육체를 분리할 수 있음은 물론, 전신
을 기체처럼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전설적인 신비술이다.
바로 천하의 환술(幻術), 사술(邪術), 장안술(障眼術) 등이 모두 이
법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물론 서궁장청은 그녀를 잡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재능을 지닌 순진한 악녀! 어
쩌면 천하는 저 소녀로 인하여 혈해(血海)로 변할지도 모른다. 그러
나 언젠가는 내 앞에 나타나겠지.'
서궁장청은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의 뇌리에는 여전히 불길한 예감으로 칠촌금미라는 순진
한 악녀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그 생각을 지워야 했다.
지상에서 가장 화려한 진주 옷을 걸친 한 인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십광마성 초류백이었다.
첫댓글 굿,,,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