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장군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무관이 천시받는 분위기에서 무과에 늦은 나이에 급제하여 서해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수군통제사로 몇계급 승진하였으며 위기의 조국을 국란으로 부터 건져냈다.하지만 여기서 그의 백전 백승의 불패신화보다는 인간로써 격어야했던 고난이 그를 더욱 빛나게 한다. 물론 라이벌이었던 원균도 마지막 싸움에서 전사하였지만 호방한 성격의 원뉸은 불패신화의 명장이었고 군인다운 호탕한 기질을 가졌다.섬세한 충무공과는 대조된다. 일본해군의 집결지를 섬멸하라는 조정의 명을 거부한 죄로 모든 관직을 삭탈당하고 백의 종군이라는 치욕(권률은 단 한번의 행주대첩으로 일약육군참모총장이 됐는데 그뒤로는 계속 패전함., 수많은 승리로 해군참모총장 이 됀 이순신이 그의 휘하에 일개 사병으로 종군하는 치욕이었고 권률이 만나서 위로코져했지만 자존심의 충무공은 거절한다) 백의종군기간에 아들 이면은 왜놈들이 집을 찾이와서 죽임을 당했고 옥중에서는 홀어머니의 병사를 듣지만 초상도 참여치 못했다. 원균의 패배로 다시 복귀하지만 왜 이순신이 왜구의 근거지를 치지못했는지 이유가 분명해젔음에도 선조왕은 사과 한마디 없이 충성을 강요한다.명랑해전등을 거쳐 재해귄을 장악하지만 이순신은 인간으로서 모진갈등을 느꼈다고 본다.전쟁이 끝나고 도망치는 왜선을 그냥 보내지 않고 최후의 노량해전에 임한 이순신은 갑옷도 갖추지 않고 군사들을 독려하며 앞장선다.차라리 죽음으로써 불효의 괴로음과 아들을 지키지못한 부정 그리고 선조왕에대한 서운함등 모든 걸 마무리 하고 싶었을 것이다.그리고 장렬히 전사한다. 요는 웃기는 조정의 대응이다.임란후 일등공신은 3명이 나왔다.권률은 살아서 받았고 원균은 죽어서 일등공신이 되었다.하지만 이순신은 3년동안이나 찬반이 분분하다가 일등공신에 봉해진다.질투가 많은 선조대왕일까? 하여튼 이순신의 역할은 지대했다.적의 보급로와 왜구의 병력보충을 차단함과 동시에 호남의 곡창지대를 보호하여 의병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장기적 군량미 확보라는 의미도 크다. 과거 몽고족의 침입때 30년동안 몽고군에게 항거할 수 있었던것은 경주왕도까지 내륙 깁숙히침입하여 약탈하고 불태웠지만 호남땅은 그냥 넘어갔다.삼별초군등이 어찌 군량미 없이 싸웠겠는가?호남곡창지대가 보호됐기 때운이다ᆞ 중국의 동방삭도 조선땅의 간지,즉 호남땅에서우주원리의 기가 생성된다고 한무제에게 말했다.과거에는 호남이라는 지방명칭보다는 기호지방으로 불리었다.즉,충청과 전라도를 함께 묶어서 기호지방이라고 했는데 구한말까지도 호남보다는 기호지방으로 더 통용되었다.조선실록의 사화등에도 조광조의 혁신정치는 문정왕후등이 작당하여 기호지방선비들을 몰살시키면서 실패하고만다.십여년전 사극 여인천하에 나오는 이야기였다.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핵심이 뭐였지?ㅇ하여튼 그럿다~^^ 거북선은 이순신이 실전에 응용하도록 계량하였지만 태종때 이미 발명되었던것이고 일본군의 배는 전투용이라기보다는 수송선의 성격이었다.가볍고 빠르게 병력과 군수품을 대량수송하도록 만들어졌으므로 충격에 약했다.원균은 단순 무식하게 이런 약점을 파고들어 적의 중심을 깨뜨리고 들어가 적의 대열을 무너트린후 부딧쳐 파괴하는 전법을 구사하여 모두 승리하였다.하지만 적함도 포와 조총으로 무장하였으며 휠씬 크고 보충용 병력도 많이 승선하였기 때문에 해상의 승리는 육상에서의 전투보다도 중요하였던것 이다.정말 존경해야할 인물이다 일제식민시대는 충무공이야말로 민족자존심이었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