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단(韃靼 : 타타르)인 그들은 누구인가? (1)
○ 몽고(蒙古)인!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몽고인(蒙古 人)”이란 역사서에 기록된 옛 몽고인(蒙古 人) 말하는 것이며, 현재의 “외몽골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조선사(朝鮮史), 개인 문집, 연행(燕行)록 등의 조선사(朝鮮史)에서는 ;
➊ 『몽고(蒙古)는 곧 원(元)나라의 유종(遺 種)으로 예전의 달단(韃靼 타타르)이다.』라고 설명한다.
➋ 『의 무려 산(醫巫閭山) 밖의 대 사막(沙漠)지대에 살고 있는 자들을 “명(明)”나라 때 “달단(韃靼)”이라 하였고, 후에 “몽고(蒙古)”라 하였다.』고 전한다.
○ 대륙 사(大陸史)에서는 ;
➊ 명사(明史)에서, 『달단(韃靼 : 타타르)은 몽고(蒙古)이며, 원(元)의 후손』이라 하였다. <韃 靼. 即 蒙 古, 故 元 後 也>
➋ 청사(淸史)에서는, 『“달단(韃靼)”은 원(元)이 망하고 난 뒤에 사막(沙漠)의 북쪽으로 도주(逃走)한 후, 남아있던 몽고(蒙古)족들을 “달단(韃靼)”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이들의 거점(據點)지는 중원(中原) 서북(西北)방 지역이며, 청사(淸史)에서는 현 신강(新疆)성 적화 부(迪 化 府)였다. <淸史 志/新疆/迪 化 府/元末,猛可鐵木兒據之,為瓦剌國.至明正統中為乜先.>』고 적고 있다.
○ 또한 이들 종족(種族)들의 생김새에 대해서 말하기를 ;
➊ 몽고(蒙古)인은 청인(淸人)과는 아주 다르게 생겼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푸르며(靑眼) 수염이 붉다. 그리고 모두 사납고 거칠며 집에서 살지 않는다.
➋ 대비달자(大 鼻 韃子)는 곧 아라사[鄂 羅 斯]인데, 몽고(蒙古)의 별종(別種)으로 나라가 사막(沙漠) 바깥 지극히 먼 땅에 있다. 그들은 키가 크고, 몸이 건장(健壯)하여, 상모가 극히 흉한(凶 悍) 영악(獰 惡)하다. 눈은 푸르고(靑眼),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코가 주먹같이 높고, 붉은 수염이 텁수룩하게 났다.
➌ 서달(西 㺚) 역시 서쪽 변두리에 있는 몽고(蒙古)의 일종이다. 그 풍속이 본래 집이 없고, 사람은 사나우며, 군사가 강하다.
➍ 통전(通典) / 서융 오손 : 서역의 여러 융(戎 : 오랑캐. 되) 중에서 그 형상이 가장 기이(奇異)하다. 지금의 호인(오랑캐 사람이다)이다. 청안(靑眼 : 푸른 눈동자)과 콧수염(髭)과 구 렛 나루(鬢)가 붉은 색이며, 형상(용모)이 원숭이(獼猴 : 미후) 종류와 같은데, 본시 그런 종족이다. 【烏 孫 於 西 域 諸 戎 其 形 最 異. 今 之 胡 人, 青 眼 赤 髭 鬢, 狀 類 彌 猴 者, 本 其 種 也. 】- 조선사인 연행록 “연행기사 문경잡기(하)”에 기록된 ➊의 설명과 똑같은 종족의 모습이다.
-------------------------------------------------------------------------
※ 위와 같은 기록을 접하면 ; 『이렇게 시대가 다른 기록에서도 그들의 “형상”에 대해서 똑같이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곧 『“몽고(蒙古)인”은 당시의 “오손(烏孫)종족”과 같은 무리들이다. 』라 할 수 있으며, 이는 현재의 몽골(외몽고)인들의 선대(先代)가 될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당시 몽고(蒙古 : 달단)의 영토(領土) 또는 거점(據點)지를 살펴보면 ;
(1) 『의 무려 산(醫巫閭山) 밖의 대 사막(沙漠)지대에 살고 있는 자들을 “명(明)”나라 때 “달단(韃靼)”이라 하였고, 후에 “몽고(蒙古)”라 하였다.』
(2) 청사(淸史)에서는, 『“달단(韃靼)”은 원(元)이 망하고 난 뒤에 사막(沙漠)의 북쪽으로 도주(逃走)한 후, 남아있던 몽고(蒙古)족들을 “달단(韃靼)”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이들의 거점(據點)지는 중원(中原) 서북(西北)방 지역이며, 청사(淸史)에서는 현 신강(新疆)성 적화 부(迪 化 府)였다. <淸史 志/新疆/迪 化 府/元末,猛可鐵木兒據之,為瓦剌國.至明正統中為乜先.>』고 적고 있다.
(3) 연행기사 문견잡기(하)에서 말하기를, 『의 무려 산(醫巫閭山) 뒤는 모두 몽고(蒙古) 땅에 속하며 망망한 큰 사막(沙漠)인데, 북해(北海)가 둘러 있다. 』고 하였다.
위 (1) 조선사(朝鮮史 : 연행록)에 기록된 것이며, (2)는 대륙의 청사(淸史)에 기록된 것이다. 이를 살펴보면,
-------------------------------------------------------------------------
(1)의 설명은 ; 현 요 녕(遼寧)성에 있는 북진(北鎭) “의 무려 산(醫巫閭山)”산을 말하는 것으로 『이 산의 뒤쪽에 대 사막(沙漠)이 펼쳐져 있는데, 이곳에 달단(韃靼 : 타타르)들이 살던 곳이다.』라는 설명인데, 이곳은 『우리나라 장백산(長 白山)에서 산맥(山脈)이 갈라져 내달아 큰 사막(沙漠)을 가로질러 막았다. 서북(西北)으로 7, 8백 리를 가도 산만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의 무려 산’ 밖은 옛 흉노(凶 奴)의 땅인데, 명(明)나라에서는 달단(韃靼 타타르)이라 하였고 지금은 몽고(蒙古)라고 일컫고 있으니, 이것이 하늘이 이적(夷狄)과 중화(中華)를 한계(限界)지어 준 것이다.』라는 지형(地形), 지세(地勢)는 요 녕(遼寧)성이나 그 이북의 내몽골, 외몽골 땅에 존재(存在)하지 않는 유령【幽靈 : 이름뿐이고, 실체가 없는 것】뿐인 설명(說明)이다. 사막(沙漠), 큰 산, 산맥(山脈)등은 하루, 이틀 사이에 형성(形成)되는 것이 아니며, <수천 년, 수만 년, 아니 그 이전에 이미 형체가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전혀 설득력이 없는 내용이다.
여기서 또 중요한 한 가지는 『이적(夷狄)과 중화(中華)를 한계(限界) 지었다.』는 내용이다. 현 <요 녕 성의 의 무려 산(醫巫閭山)> 남쪽은 발해(渤海)바다이며, 또 요동(遼東)만(灣)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인간이 살아 갈 수 없는 바다(海)이기 때문에 『중화(中華)』라 이름 지어 질 수 없는 지형(地形), 지리(地理)이다. 그러면 중원(中原). 중국(中國)이 중화(中華)라는 것은 무엇인가? 따라서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요 녕 성’에 존재할 수 없다. 또 수(隋)가 대륙(大陸)을 통일(統一)하고, 황제(皇帝)가 된 후 이곳에 “북진(北鎭)”을 설치(設置)했다고 하면, 그만큼 중요한 곳이니 “북쪽의 진”이란 “북진(北鎭)”을 설치했을 것이나, 당시 이곳을 북쪽이라 하여 “북쪽의 진”을 설치했다면, 방향(方向)도 제대로 파악치 못하는 그렇게 어리석은 자들이 대륙을 통일(統一)하고, 수(隋)제국(帝國)을 건설했다는 것 역시 거짓일 것이다.
결국 위에서 말하는 “의 무려 산(醫巫閭山)”은 현 요 녕(遼寧)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곳, 즉 <대 사막(沙漠)지대의 남쪽에 있었던 산의 이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야 『이 산의 북쪽에 대 사막(沙漠)이 펼쳐질 수 있으며, 7, 800 리를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이 펼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그 산이 사막(沙漠)을 가로 막고 있어, 북쪽은 흉노(匈奴) 곧 달단(韃靼 : 타타르)의 땅이 되고, 남쪽지방은 중국(中國 : 나라이름이 아님)지방이 되어, 이적(夷狄 : 오랑캐)과 중화(中華)를 한계(限界)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산은 1) 중원(中原) 서북방 황하 연변에 있는 “음산(陰山)”일 수도 있으며, 2) 또한 “하란(河蘭)산”일 수도 있으며, 3) “기련(祁連)산”일 수 있으며, 4) 신강(新疆)의 “천산(天山)”일 수도 있다.
(2)의 청사(淸史)에서는 현 신강(新疆)의 “적 화 부(迪化府)”가 달단(韃靼 : 타타르)의 중심지역으로 말하고 있다.
(3)의 <의 무려 산(醫巫閭山) 뒤는 모두 몽고(蒙古) 땅에 속하며 망망한 큰 사막(沙漠)인데, 북해(北海)가 둘러 있다.>는 말은, 반도(半島)나 그 북방3성 지방과는 전혀 무관(無關)한 지형(地形)과 지리(地理)를 설명하고 있다. 반도(半島)의 대부분 국민(학자를 포함한)들은 “몽골의 바이칼 호수”를 “북해(北海)”로 상식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건 희망사항일 뿐이다. 대륙(大陸)의 지형도 지도를 보면, 영하(寧夏)를 관통하는 황하 서북방 “고비사막”을 한해(澣海 : 북해와 같다)로 표기하고 있으며, 당(唐)시대의 시인들이 지은 시 내용 속에는 중원(中原) 돈 황(燉煌)의 북(北)쪽과 서북(西北)방으로 표기했으며, 산해 경을 주석(註釋)한 옛 학자들은 사막(沙漠)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사기열전 주석(註釋)을 보면, 최호가 이르기를, 『한해(澣海)는 북해(北海)의 이름이며, 새무리가 털을 가는 곳인데, 예부터 이르기를, 한해(澣海)』라 하였다. 광역지에서, 『사막(沙漠)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崔 浩 云, 北 海 名 ,群 鳥 之 所 解 羽 ,故 云 翰 海. 廣 異 志 云 在 沙 漠 北. >
※ 결과적이긴 하나, 요 녕(遼寧)성에 있는 “의 무려 산(醫巫閭山)”은 『산은 산이로되, 역사서 에 기록된 “의 무려 산(醫巫閭山)”의 이름만 같은 짝퉁 산 일 뿐이며』또한 『그들(옛 몽고족)의 특이(特異)한 모습은 오늘날의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종족들과 비슷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몽골인과는 전혀 다른 종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위와 같은 “달단(韃靼 : 타타르)” 이 『조선(朝鮮)의 북변(北邊)을 어지럽혔다.』는 기록이 왕조실록(王朝實錄)에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
○ 현 세기(世紀) 역사해설(歷史解說)에서, 『달단(韃靼 : 타타르)무리들이 “반도(半島) 북방”과 “요 녕 성 의 무려 산 밖”에 있었다.』하면서, 이들이 반도(半島) 조선【朝鮮 : 고려 및 조선을 총칭한다.】를 시도 때도 없이 침탈(侵奪)하였는데, 이들은 『함 관(咸關 : 함 관 령)의 북쪽에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 그러나 후대(後代)의 『타타르공화국』은 이와는 전혀 다른 대륙(大陸)의 서북(西北)방 지대와 우랄산맥 주위에 타타르 공화국【 위키-백과 : 국명은 ‘타타르스탄’ 공화국이며, 13세기 중엽 몽골족[蒙古族]의 후예인 타타르 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여, 선주민인 핀-우골 계 민족들과 함께 볼가 강과 카마 강 유역에서 볼가 ‘불가르’ 국을 건설한 튀르크 계 소수 토착민을 흡수한 후, 점차 발전하였다. 동유럽 평원에 접해 있다. ‘볼가’강과 ‘카마’강 사이에 접해 있고, ‘우랄’ 산맥이 위치해 있다. 주민은 타타르족 (51.3%), 러시아인 (41%), 추바슈인 (3%), 우크라이나인 (0,6%) 이 거주하고 있다. 모르도바인, 우드무르트인, 마리인, 바슈키르인도 타타르스탄에 거주하고 있다. 인구는 377만 9,265명 (2002년)이다. 】 이 존재하고 있다.
현재의 역사해설로 보면, 황 당(荒唐)한 일로, 대한민국이 “조선(朝鮮)왕조(王朝)”의 뒤를 이은 왕조(王朝)라면서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 있다.』고 한다면?????????????? 역사(歷史)가 인간의 삶의 발자취임을 고려할 때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다.
역사서 원전(原典)에 기록된 몽고(蒙古)인은 『청안【靑眼 : 푸른 눈 곧 색목인을 말한다.】 을 가지고 있으며, 수염과 털은 붉은 색이며, 거칠고, 사납고, 잔인하며, 아주 지저분하다.』고 기록하고 있음을 알면, 진짜 몽고(蒙古)족이 어떤 종족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러면 현재 “몽골 인”들의 모습은 어떤가! 전혀 다른 인종이다.
결국 옛 역사서에 기록된 “몽고(蒙古)인”과 현재 몽골에 살고 있는 “몽골인”들과는 전혀 다른 인종(人種)이란 이야기다. 그러면 여기서 “철 목진(鐵木眞)이라 하는 거목(巨木), 성길사한(成吉思汗) 곧 원 태조(太祖)”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백과사전을 보면, 『칭기즈 칸의 정확한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정설로 인정되고 있는 것은 아직 없다. 』고 한다. 이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백과사전을 보면,
【➊ 유목민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여 변방의 평화를 유지했던 금(金)은 가끔씩 변방정책을 바꾸어 그들의 동맹세력인 『타타르족』을 공격했다. ‘토 그릴’과 함께 ‘철 목진’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타타르족』의 배후를 공격했다.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자 그는 강대한 『타타르족』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 것이다. 전투에서 『타타르족』을 패배시킨 뒤 수레바퀴보다 키가 큰 자들은 곧 어른은 모두 죽이고, 단지 아이들만 살려두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커서 자신들의 신분을 잊고 몽골의 충실한 추종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라 하여 철 목진(鐵木眞) 이전(以前) 이미 달단(韃靼 : 타타르)족은 큰 종족이었으며, 철 목진(鐵 木 眞)에게 패한 뒤 복종하게 된다.
【➋ 칭기즈 칸에 대항했던 마지막 몽골 부족인 ‘나이만’의 한 신하는 그에게 문화(文化)의 유용함을 일깨워 주었고, 몽골어를 문자로 정착시키는 일을 도와주었다. 〈몽골 비사〉에 따르면 1222년 말 『아무다리야 강(고대명은 옥수스)과 시르다리야 강(고대명은 작 사 르 테스)』 지역에서 호라즘 ‘샤’ 왕조와 전쟁을 벌였을 때, 칭기즈 칸은 이슬람 출신의 측근으로부터 성읍(城邑)의 의미와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다. 한때 금(金)나라의 신하였던 또 다른 측근인 ‘야율초재’는 농민과 장인들이 생산해내는 물품은 과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일러주었다. 칭기즈 칸은 당초 중국 북부의 비옥한 전답들을 말의 목초지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몽골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시킬 위대한 정복은 아직 수행되지 않은 단계였고 그 주목표로 중국이 떠올랐다.
➌ 칭기즈 칸은 중국 북서쪽 변방지역의 국가인 서하(西夏)와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1211년 중국 북부에 자리 잡고 있던 금을 향해 진격했다. 1214년 금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다가 1215년 전쟁을 재개하여 연경을 함락시켰다. 그 뒤 중국 북부의 완전한 장악은 부장인 무 칼리에게 맡겨졌다. 칭기즈 칸은 중국에서 더 나아가 호라즘 샤의 정벌에 나섰다. 그 전쟁은 칭기즈 칸의 보호 하에 있던 450명의 이슬람 대 상단을 몰살시킨 ‘오 트라 르’ 시(市)의 지사(知 事) ‘이 날 축’ 때문에 촉발되었는데, 호라즘 제국의 샤(황제)는 이에 대한 보상을 거부했다. 호라즘 샤와의 전쟁은 조만간 벌어지게 되어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 전쟁을 연기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몽골족은 끔찍한 야만적 행동을 자행하여 ‘이 그 만 족’이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몽골족은 모든 도시를 휩쓸었고, 주민들은 몰살되거나 동족이라도 자신들보다 높은 신분이라면 모두 몰살(沒殺)시키는 몽골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강요되었다. 칭기즈 칸이 호라즘 샤를 상대로 무자비한 복수전을 펼쳐나가는 동안 전답(田畓)과 화원(花園)은 황폐화되었고 관개시설은 파괴(破壞)되었다. 1223년 마침내 그는 철수(撤收)했고, 1226~27년 서하(西夏)를 상대로 마지막 전역(戰役)에 나설 때까지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는 1227년 8월 18일에 죽었다.】
【➍ 한편 서하(西夏)를 점령(占領)한 칭기즈 칸은 대대적인 민족 학살(虐殺)을 실시했는데, 이는 서하(西夏)의 ‘호라즘’ 전(戰) 참가 거부가 칭기즈 칸을 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며, 2차 침략에 대한 저항(抵抗)이 끈질겼기 때문에 칭기즈 칸의 ‘섬 태 멸진’ 방식의 정복(征服) 전쟁에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➎ 중국 국영 CCTV의 보도에 의하면, 매우 철저하게 살육해서 멸족(滅族)시켰기 때문에 현재(現在)까지 서하(西夏)인의 유전자를 가진 서하(西夏)인의 후손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한다. 정복지 나라의 국민(國民)이 이처럼 멸족(滅族)당한 예는 세계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일로, 이는 칭기즈칸과 몽골 제국이 얼마나 잔학(殘虐)한 정복자였는지 알 수 있는 사례이며 학자들에 의해 비판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 ➎의 부분 곧, 『중국 국영 CCTV의 보도에 의하면, 매우 철저하게 살육해서 멸족(滅族)시켰기 때문에 현재(現在)까지 서하(西夏)인의 유전자를 가진 서하(西夏)인의 후손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한다.』하였으나, 이는 일방적인 주장(主張)이며, “서하(西夏)”라는 나라가 현 대륙의 영하(寧夏)성 지방에 있었다고 한 전제아래 설명하고 있을 뿐이며, 『서(西)쪽의 하(夏)나라』가 어찌 중원(中原)지방에 있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그들은 중원(中原)의 백성(百姓)들이었으니 서하(西夏)의 유전자를 가질 수 없는 것이 정상이다.
또한 《철 목진(鐵木眞 : 칭기즈 칸)은 서하(西夏)를 정복(征服)하려 여러 차례 공격했으나, 번번 히 실패(失敗)하고, 마지막 서하(西夏)를 정복(征服)키 위해 그의 군대(軍隊)를 이끌고, 육 반산(六 盤 山 : 2,942m)을 넘어오다가 병사(病死)했다.【중국고금지명대사전 육 반 산(六盤山)조를 보면, 원 태조가 이곳에서 몰(沒)하였다고 적고 있다.】》고 하는데, 『병(病)에 걸려 죽은 철 목진(鐵木眞)이 서하(西夏)의 백성(百姓)들을 멸절(滅絶)시켜 서하(西夏)인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는 말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러한 역사 해설은 현 대륙(大陸)의 파렴치(破廉恥)한 역사왜곡(歷史歪曲)의 한 부분일 뿐이다.
-------------------------------------------------------------------------
○ 야선(也 先)! 그는 달단(韃靼 : 타타르)이며, 또한 오이라트(와랄 : 瓦剌)족이라 한다. 와랄(瓦剌)은 위 청사(淸史)를 인용, 설명한 것처럼 그의 거점(據點)지는 “신강 적화 (迪 化)부”였다. 그들은 서(西)몽골 종족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들이 “조선(朝鮮)의 북방을 위협(威脅)했다.”는 말은 참으로 가소로운 이야기다. 그 “조선(朝鮮)”이 대륙(大陸)의 요충지에 있었다면 몰라도 말이다!!!!!!!!
【 야선(也先) : 먀 선 (乜 先)이라고도 한다. 야선(也先)은 몽고(蒙古) 와 랄 부(瓦 剌 部)의 승상(丞相) 탈환(脫 懽)의 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승상(丞相)이 되어 태사(太師)라 칭하고 국정(國政)을 멋대로 하여 자주 명(明)나라의 변경(邊境)을 침범하였다. 명 영종(明 英宗) 정통(正統) 14년에 대거 침입하여 친정(親征) 나온 영종을 토목 보(土木 堡)에서 사로잡아 몽고(蒙古)로 데려가고, 그 기세를 몰아 경사(京師)를 함락하였으나, 영종의 아들 경종(景宗)에게 패배하였다. 뒤에 명(明)나라에 화친을 청하여 영종(英宗)을 돌려보냈다. 영종은 출정(出征)에 앞서 조선(朝鮮)에 구원(救援)을 청했는데, 조선(朝鮮)에서는 말 5백 필(匹)만을 보냈다.《明史 卷320 朝鮮 傳》】: <고전번역원의 해설 참조>
○ 오이라트족(와랄(瓦剌) [출처: 브리태니커관련태그]
【Oyrat Oirat라고도 쓰며, 와랄(瓦 剌)이라고도 함. 몽골어족의 서부지역 방언을 쓰는 종족. 13세기에 ‘서 몽골족’은 칭기즈 칸 제국을 건설한 ‘동 몽골족’과 대립했다. 그 후 몇 세기 동안 서 몽골족은 되르벤 오이라트(4개 부족이 맺은 연맹으로 오이라트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됨)라는 동맹을 맺고 독립을 유지했는데, 칭기즈 칸에 협력하여 ‘동 몽골족’의 동맹군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적이 되기도 했다. ‘서 몽골족’의 일부는 그들의 본거지인 신장자치구[新 疆 自 治 區] 북부지역인 준갈이분지[準 噶 爾 盆 地]와 몽골 서부에 남아 있었고, 토르구트족· 코슈트족· 도르베트(또는 데르베트)족을 포함한 오이라트 동맹의 또 다른 일부는 17세기 초 시베리아 남부를 건너 우랄 강 남부로 이주했다. 거기서 다시 볼가 강 하류로 옮겨갔고, 1771년까지 1세기 반 동안 볼가 강 하류 동쪽 지역과 서쪽 지역으로 유랑생활을 했다. 18세기에 당시 동서(東西)로 영토를 확장하던 러시아 제국에 흡수되었으며, 1771년 볼가 강 동쪽 기슭에 살던 부족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오른쪽 기슭에 살던 토르구트족· 도르베트족· 부자와족 등 칼미크족은 러시아에 남았다. 현재 중국 서북부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와 칭하이 성[靑 海 省] 지역에 많은 오이라트족이 살고 있으며, 오이라트 방언을 쓰는 인구는 10만 명으로 추산된다. 몽골 서부지역에도 5만 명이 살고 있으나, 수적으로 압도적인 할하족의 지배를 받고 있다.】
☞ 『오이라트』족은 『와랄(瓦剌)』이며, 『달단(韃靼 : 타타르)』이다. 이들은 본시 『신강(新疆)의 천산산맥 북쪽 준갈이분지(準 噶 爾 盆 地)와 그 동쪽 알타이산맥을 포함한 서(西)몽고지방에 살던 자들이다.』이것은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이 설치했다는 삼위【三衛 : 瓦 剌 . 朵 顏(福 余 . 泰 寧)】 와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에 “조선사(朝鮮史)” 영토와 직결(直結)되는 문제이다. 이는 곧, 『삼위(三衛)의 동(東)쪽과 남(南)쪽은 조선(朝鮮)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 明史 列傳 第216 外國 九 [ 瓦 剌 . 朵 顏(福 余 . 泰 寧)] 편을 보면,
【也 先 攻 破 哈 密, 執 王 及 王 母, 既 而 歸 之。又 結 婚 沙 州、赤 斤 蒙 古 諸 衛, ☞破 兀 良 哈, 脅 朝 鮮. 】라는 구절이 있다. <삼위(三衛)에 관해서는 이미 설명한 글이 카페에 있다.>
○【올 량 합(兀 良 哈)을 깨뜨리고(破), 朝鮮(조선)을 협박(脅迫)했다.】는 역사적 事實(사실)을 어떻게 받아 드릴 수 있겠는가!!!!!!!!!!!!! 조선(朝鮮)과 신강(新疆)과는 대략 10,000 리쯤 떨어져 있으나, 이는 직선(直線)거리를 말하는 것이니, 행군거리로 본다면 12,000-13,000 리도 더 될 것이라 추측된다. 이러한 내용은 소위 정사(正史)라고 말하고 있는 “명사(明史)”에 기록된 내용이다.
분명한 것은 『<와랄(瓦剌 : 오이라트 : 달단)>이 <올 량 합>을 파하고 <조선(朝鮮)>을 협박했다. 』는 것이다. 이는 이러한 사건(事件)이 전개되었으므로 명사(明史)를 편찬한 학자들은 이의 없이 기록하여 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와랄(瓦剌)이 조선을 협박(脅迫)할만한 지리(地理)적 관계 곧 『땅이 연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사건(事件)』이란 얘기다.
● 이 말은 곧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에 없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언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아래 명사(明史)의 기록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 와랄(瓦剌)이 올 량 합(兀良哈)을 파(破)하고, 조선(朝鮮)을 협박했다. 』는 구절에서 “올 량 합(兀良哈)의 땅”이 어디인가? 같은 명사(明史) 기록 속에 있다.
【朵顏,福余,泰寧,高皇帝所置三衛也.其地為兀良哈,在黑龍江南,漁陽塞北.漢鮮卑,唐吐谷渾,宋契丹,皆其地也. : <타안, 복 여, 태 녕>은 고 황제 (명 태조)가 설치한 삼위(三衛)이다. 그 땅은 ‘올 량 합’의 땅인데, 흑룡강(黑龍江)의 남쪽이며, 어 양 (漁陽)새 북쪽이다. 한(漢)나라 때 선비(鮮卑), 당(唐)의 토 곡 혼(吐谷渾), 송(宋)의 글란(契丹), 이 모두의 땅이다. 】
여기서
1) 흑룡강(黑龍江)이니, 선비(鮮卑) 땅이니, 글란(契丹) 땅이니 하는 곳은 식민사관에 의하면, 모두 “반도(半島) 북방(北方)”과 현 “하 북 성” 땅이다.
2) 그러나 “토 곡 혼(吐谷渾)의 땅”은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의하더라도 신강(新疆)일부, 청해(靑海)성, 감 숙성(甘肅省)서부 지방이다.
3) 이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토 곡 혼(吐谷渾)”이란 글자가 편찬 당시 잘못된 것일까? 아마도 “토 곡 혼(吐谷渾)”이란 글이 잘못된 것이라면, 이미 수정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4) 그런데 말이다.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세종 30년 무진(1448,정통 13) / 2월26일 (임 오) 편을 보면 가당치 않은 기록이 있다.
《의정부 좌의정 하연(河演) 등을 불러 비변책(備邊策)을 의논하고 함길도 도절제사(都節制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야선(也 先)의 병마(兵馬)가 지난겨울에 해서(海西)에 이르렀은즉, 본도(本道)는 경계가 저들의 땅과 연접되었으므로 성식(聲息)을 듣는 데에 어렵지 아니하기 때문에, 전에 이미 유서(諭書)를 내려 이를 물었는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아뢰지 않는가. 다시 친신(親信)하는 야인(野人)에게 자세히 성식(聲息)을 들어 아뢰라. 대개 성식을 알지 못하고 미리 군졸을 모으는 것은 진실로 옳지 못한 것이니, 아직 연대(煙 臺)에서 망을 보고 봉화(烽火)·방수(防守) 등의 일을 더욱 더 조심하고 삼갈 것이며, 연변(沿邊)에 사는 백성들의 농사짓는 일은 또한 전과 같이 권과(勸 課)하라.” 》하고, 또 평안도 도절제사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적변(賊變)이 나타나지 않는데 먼저 우리 백성들을 피로하게 하는 것은 진실로 좋은 계책이 아니니, 병마(兵馬)를 별도로 징발하지 말고 예전대로 척후(斥候)를 멀리 보내고 봉화(烽火)를 삼갈 것이며, 변방 백성들의 농사[耕種] 는 또한 때를 잃지 말게 하라.” 하였다. 또 양도(兩 道)의 비어 사건(備禦事件)을 유시하기를,》
1. 삼위 달단(三衛韃靼)과 해서 야인(海西野人), 이 만주(李 滿 住) 등 여러 종류의 야인(野人)들이 혹 야선(也 先)에게 몰리게 되면, 일이 궁(窮)하고 형편이 군색하므로, 와서 혹 귀순하여 머무르겠다고 사칭(詐稱)하더라도, 그들로 하여금 강을 건너게 하지 말 것이며, 저들이 만일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고 오랫동안 견디면서 먼저 침범할 마음이 있으면, 기회를 봐서 날쌔게 칠 것이며, 또 만일 식량을 청하면 마땅히 대답하기를, ‘군수(軍需)는 함부로 줄 수 없으며, 또 남은 것도 없으니 청(請)을 들어주기 어렵다.’ 하고, 비록 범찰(凡 察)과 동창(童 倉)이라 하더라도 역시 강을 건너게 하지 말고, 그 무리의 많고 적은 것과 성심(誠心)의 여부(與否)를 관찰해서 비보(飛報)하여, 상지(上 旨)를 받아 시행하라. 이 조항은 절제사(節 制 使)와 변장(邊將)이 깊이 생각하여 처리해서 삼가고, 시끄럽게 떠들지 말라.
1. 연대(煙 臺)에서 망보는 것은 비변(備 邊)의 중사(重事)인데, 관리(官吏)를 단한(單寒)하고 노약(老弱)하며 어리석은 사람으로 쓴데다가, 또 다른 일을 시켜서 허술할 염려가 있게 하니, 전날 실패를 본 것이 모두 이 때문이었다. 이제부터는 부실(富 實)한 인호(人戶)를 택하여 정해서 때때로 식량을 주게 하고, 몹시 추워지면 또한 털옷도 주어서 곡진하게 긍휼(矜恤)을 가하되, 전과 같이 마음을 쓰지 아니한 관리는 그 죄를 중하게 논하라.” 하였다.
위 글 ➡표 한 곳의,【야선(也 先)의 병마(兵馬)가 지난겨울에 해서(海西)에 이르렀은즉, 본도(本道)는 경계가 저들의 땅과 연접되었으므로】라는 내용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➊ 『“야선(也先)”의 병마(兵馬)가 “해서(海西)”에 이르렀는데, 본도(本道 : 함길도를 말함)는 이들의 땅과 연접(連接 : 서로 맞닿고 있다.)하여 있으니』라는 내용이다. 신강(新疆)의 천산(天山)산맥 북쪽지방과 그 동쪽 알타이 산맥등지에서 올 량 합(兀良哈)을 파한, 야선(也先)의 군대가 10,000 리도 더 넘는 머나 먼 반도 북방 함길도의 땅과 서로 맞닿고 있다고 한다면!!!!!!!!!!!
➋ 『해서(海西)』란 또 어디를 말함인가? 《바다의 서쪽? 서쪽의 바다?》이것은 아닐 것이다. 넓고 넓은 평원 서쪽의 어느 특정지역을 말하는 것 일게다.
➌ 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는 “해서(海西)지방”은,
1) 해서 위(海西 衛) : 명(明)나라에서 송 화 강(松 花 江) 내지의 해서 여진(海西女眞) 지역에 설치한 위소(衛 所)라 하였으며,
2) 해서 여진(海西女眞) : 송 화 강(松 花 江) 중상류 유역에 살던 내지 여진족(女眞族)을 말하고,
3) 모련 위(毛 憐 衛) : 명나라 영락 연간(永樂年間)에 두만강(豆 滿 江) 유역의 두문(豆 門)· 아 적 랑 귀(阿 赤 郞 貴) 일대의 토착 여진을 다스리기 위하여, 잡종 올 량 합(兀良哈) 지역에 설치한 위소(衛 所)라 설명합니다.
○ 송화(松花)강 내지(內地)나, 송화(松花)강 중, 상류나 대동소이한 곳을 말하는 것 같은데, 이곳이 어떻게 “해서(海西)”지방이 될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차라리 현 발해(반도의 서해)의 동쪽에 있으니 “해동(海東)”지방이면 모를까? 아니면 반도 함길도 동쪽의 동해바다를 기준하여 그 서쪽 육지에 있으니 “해서(海西)”지방!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 또 3)의 “모련 위”를 보면, 올 량 합(兀良哈)지역에 설치(設置)했다고 하는데, 이곳이 올 량 합(兀良哈)들이 살던 곳이라면, 10,000 리쯤 떨어져 있던 “야선(也先)”의 “와랄(瓦剌)”들이 이곳까지 와 “올 량 합(兀良哈)”들을 쳐부수고, 그 남쪽의 “조선(朝鮮)”을 협박했다는 이야긴가? 그렇다면 『신강(新疆)으로부터 감 숙, 내몽고, 섬서 북변, 산서북변, 하 북 북변, 요 녕 성, 길림성 모두 야선(也先)의 와랄 땅이었다?』 와랄(瓦剌)의 “야선(也先)”이 북방(北方)의 대 제국(帝國)을 건설했었다는 것인가!!!!!!!!!!!!!!!!그러나 명사(明史). 청사(淸史)등에서는 이러한 역사기록이나 해설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 야선(也先)은, 1439년 몽골 오이라트 부족의 추장이 되었다. 1449년 에센은 중국에 공물을 바치는 것을 거부하고 중국 국경으로 병력을 집결시켰다. 1450년 사로잡은 황제를 풀어주었다. 3년 후 명과의 휴전조약에 서명하고 공물을 다시 바치기 시작했다. 그의 아들이 점령지를 물려받았지만 얼마 안 가서 오이라트 권력은 기울어졌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백과사전의 기록은 【명(明)나라를 습격하여 황제를 사로잡았고, 일시적으로나마 중앙아시아에서 몽골 세력을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설명이다.
《 이는 곧 “야선(也先)”은 중앙아시아에서 잠시나마 몽고세력을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을 뿐, 하(河)의 동쪽지방과 반도(半島) 북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인물이란 것이다.》
● 이러한 여러 기록을 비교해보면, ‘와랄(瓦剌)’ 또는 ‘오이라트’족으로 대표되는 “야선(也先)”과 반도(半島)지방과는 전혀, 한 점 관계없는 것이다.
● 결국 『반도(半島)조선(朝鮮)』이란 허구(虛構)의 사실이며, 반도(半島) 북방에서 일어났던 사건(事件)과 지명(地名)들을 대륙(大陸)의 중원(中原) 서북(西北)변에 갖다 놓으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➍ 왕조실록 / 세종 29년 정묘(1447,정통 12) 6월27일 (무자) / 평안도 감사에게 야인에 대한 방비를 유시하다
《 평안도 감사에게 유시하기를, “이제 통사(通事) 김 신(金 辛)이 요동(遼東)으로부터 돌아와서 아뢰기를, ‘달달(達達)의 야선(也先)의 대군(大軍)이 황하(黃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겨울철에 해서 야인(海西野人)을 치려하므로, 요동 열군(遼東 閱 軍)이 방비하고 있다.’ 하고, ‘건주(建 州)의 이 만주(李 滿 住)가 저번에 북경에 갔다가 호종(扈從)하기를 자청하고 윤4월에 집안을 거느리고 북경으로 갔으므로, 동창(童 倉)· 범찰(凡 察)도 또한 어쩔 수 없어서 장차 동쪽으로 가서 둔거(屯 居)하려 한다.’ 하니, 내 생각하건대, 야선(也先)이 이미 삼위(三衛)를 멸망시키고 해서(海西)를 섬멸하려 함에 여러 종족의 야인(野人)이 두려워하지 않는 자 없어 감히 편안하게 살지 못할 것으로, 대개 그 세력이 한참 커져서 이같이 성해 간다면 장래의 변란을 다 알 수 없는 것인즉, 경(卿)은 주밀하게 이 뜻을 알아서 일 응(一 應) 방어할 모든 일을 미리 신중하게 펴 두게 하라.” 하였다. 戊子/諭平安道監司:今通事金辛回自遼東啓:達達也先太師屯兵黃河,冬月,欲攻海西野人,遼東閱軍隄備.建州李滿住曾往北京,自請扈從,閏四月,挈家赴京,童倉,凡察亦無如之何,欲將向東屯居.予料也先旣滅三衛,欲殲海西諸種,野人莫不畏懼,不敢寧居.蓋其勢方張,如此其盛,將來之變,難以盡知.卿密知此意,一應防禦諸事,預愼布置.》
○ 위의 글을 보면, 『오이라트(와랄=달단)의 “야선(也先)”이 병마(兵馬)를 “하(河=황하)”에 주둔시키고, 겨울철에 “해서(海西)야인(野人=올 량 합)을 치려 준비하고 있었다.』라는 내용이다.
○ 여기서 “황하(黃河)”라면 최소한 『섬서(陝西)와 산서(山西)의 성계(省界)를 이루는 북변(北邊)이나』,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서쪽지방의 감 숙성(甘肅省) 서쪽지방이나 청해 성(靑海 省)지방일 것이다.【와랄(瓦剌)의 당시 거점지로 보아 이곳일 가능성이 크다.】』이러한 곳에서 반도(半島) 북방(北方)의 해서(海西)여진(女眞)을 친다? 당시 이들에게 현대와 같은 수송기(輸送機)기와 특수낙하산부대를 가지고 있어 수 천리를 넘나들었다?
이러한 역사 해설은 차라리 “우리의 선대(先代) 국가(國家)는 없으며, 오직 해방(解放) 후 건국(建國)된 대한민국(大韓民國)이 있을 뿐이다.”라는 절규(絶叫)가 차라리 떳떳할 것이다.
2011년 03월 18일 <글쓴이 : 문 무>
|
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전 북해가 러시아 북극해라고 생각했었는데...
대륙사의 산해경, 사기, 한서등지에서 주석을 단 학자들의 설명을 보면 "북해"는 최소한 고비사막 북쪽과 신강성 북쪽
내지 서북쪽지방을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한해"인데, 대륙사 사기 주석에서는 한해는 북해의 이름이라 했으니 조금
헷갈리는 부분이 있긴 합니다. 당나라 때 시인들이 지은 당시를 보면, 당시의 북해나 한해는 옥문관의 최 북쪽과 서북쪽
지방을 지칭하고 있어요.
여러가지 사서들의 설명을 종합해 보면, 북해는 사막의 북쪽 추운지방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이곳은 바다를 칭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황폐한 땅을 말하여, 아주 옛 날 염수가 있었던 내륙의 바다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