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신교는 왜 머리에 너울을 쓰지 않는가?
1. 너울을 쓰는 것에 대한 본문 연구
고린도전서 11:4-5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바울 시대에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열등한 존재로 간주되었습니다. 유대인 남자들은 심지어 자기들이 이방인이나, 여자, 혹은 종으로 태어나지 않은 사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당연히 여자에게는 회당예배 때 어떤 중요한 역할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28)
이처럼 구속으로 말미암아 옛 창조의 전형적인 세 가지 구분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종과 주인의 구별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 결과 여자들에게 자유가 주어졌고, 예배 중에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자들은 이 자유를 오해하여 그릇 행하였습니다. 당시 헬라인들의 남녀 의상은 아주 비슷했습니다. 한 가지 차이가 있었는데, 여자들이 머리에 너울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들은 평상시뿐 아니라, 교회에 갈 때도 너울을 썼습니다. 너울은 여성의 외적인 표시요, 결혼한 여인이 존중받아야 하는 품위 있는 존재임을 알리는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기도하거나 예언을 할 때 이 너울을 벗어버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성의 구별을 무시하고 무너뜨리는 행위입니다. 또한 예배에 함께 참여한 자들 특별히 남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어 예배 분위기를 망치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은 남녀를 다르게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남자처럼 보여야 하고, 여자는 여자처럼 보여야 합니다. 고대 고린도 관습에 의하면, 그것은 남자의 경우 자기의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이고, 여자의 경우는 너우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남자가 머리에 쓰고 공중예배 때 기도하거나 예언을 하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존중하지 않고 욕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만일 여자가 너울을 벗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면, 머리인 자기 남편을 욕되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당시 헬라-로마 관습에는 아내가 공중 앞에서 머리에 쓰지 않으면, 남편과 혼인한 상태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당연이 그것은 남편을 부끄럽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어떤 여자들은 공중예배에서 기도나 예언을 할 때 의도적으로 너울을 벗어버렸습니다. 바울이 볼 때, 그런 행동은 여자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한 자기의 고유 역할을 망각하는 행위였고 자기 머리인 남편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그것은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고린도전서 11:5)
당시에는 간음을 행하여 남편을 욕되게 한 여자의 머리를 미는 로마법이 있었습니다. 그 법은 로마 식민지인 고린도에서도 시행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은, 남편을 수치스럽게 하는 것입니다(11:5). 그래서 바울이 이를 책망하고 교정하고자 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6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바울은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자들이 공적 예배에서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을 격려했습니다. 하지만 창조질서를 무너뜨리고 사회적인 관습을 무시하는 일부 여자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제동을 걸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소위 여성해방론자들에게 도전합니다. 정말로 성의 구분, 상호존중, 품위, 예의 같은 것에 무관심하다면, 차라리 머리를 다 깎아버리거나 밀어버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부끄러움이 된다면, 머리를 가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의도를 살려서 찰스 하지는 이 구절을 이렇게 주해했습니다.
"이 말은 그녀의 행동을 일관되게 하라는 것이다. 만일 그녀가 평판이 좋은 여자로 생각되기를 원한다면 그녀의 행동을 기존의 관습에 순응시키도록 하라. 그러나 만일 그녀가 평판에 전혀 신경을 안 쓴다면 행동을 그녀의 부류에 속한 다른 여인들과 맞게 하도록 하라. 그녀는 반드시 평판 좋은 부류나 평판 나쁜 부류 가운데 속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 부류에서의 이탈은 다른 부류에 순응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1:7-9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것은 머리에 너울을 쓰라는 바울의 충고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근거하여 바울은 남자를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 부르고, 남자가 머리를 가리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가리는 일이라 하여 금했습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예배에서 자신의 머리를 드러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돕는 배필"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므로 그것을 드러내면 남자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되니 머리를 너울로 가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에게 주어진 권위에 대해 어떤 이들은 "그러면 동물들이 먼저 지음 받았으니 동물들이 사람보다 더 나은 권위를 가지고 있느냐?" 혹은 "하나님도 특히 성령 하나님은 돕는 분인데 그것이 낮은 것을 의미할 수 있느냐?"라고 반박합니다. 이것은 상당히 그럴듯하지만 올바른 논리가 아닙니다. 그것을 크레이그 블롬버그가 잘 지적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창조로부터 논증을 공급하고 있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창조의 순서는 권위의 체계와 논리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순서가 권위와 관련이 있다면, 동물들이 사람들 위에 있어야 한다. 창세기 1장에서 동물들이 사람들보다 먼저 창조되었기 대문이다. 하지만 바울은 창세기 1장으로부터 논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2장으로부터 논증하고 있다. 그는 순서가 '항상' 서열을 함축한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다. 단순히 그것은 그가 언급하고 있는 창조 기사의 일부일 뿐이다. 장자가 보유하고 있었던 특권에 익숙하였던 고대 세계의 사람들(왕조의 계승, 유산상속 등등)도 바울의 논증이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 논증은 두 번째 논증(하와가 아담을 돕는 자로 창조되었다-9절)과 함께 고려해야 한다. '돕는 자'(helper)에 대한 히브리 용어가 자주 하나님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는 사실(하나님이 구약성경에서 많은 어려운 환경 중에 있는 인간을 도왔던 것처럼)은 이 용어가 본질적으로 종속을 함축하고 있지 않음을 증거하지만 그렇다고 종속을 함축하고 있지 않다고 증거하지도 않는다. 어떤 돕는 자는 권위적인 인물일 수 있고, 다른 경우에는 동료일 수 있고, 많은 다른 경우에는 아랫사람일 수 있다."
고린도전서 11:10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이 구절은 매우 난해한 구절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 다룰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의외로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찰스 하지는 이 구절에 대해 단정적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여자가 너울을 써야 한다는 것이 그 자체로도 타당한 것이었고, 그리고 일반적인 예절에 의해서도 요구되었으므로 예배를 드리는 집회들에서는 그것이 더욱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배를 드리는 집회들에서 여자들은 남자들뿐만 아니라 천사들도 임재해 있는 면전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론에 대한 복종에서뿐만 아니라 더 높은 지성적 존재들에 대한 존경에서도 여자가 예법의 모든 규칙들에 당연히 순응해야 한다. 이것이 본절에 대한 일반적이고 유일하게 만족스러운 해석이다."
홍인규 교수님도 이 구절에 대해 비슷한 설명을 했습니다.
"이 구절은 대단히 난해하다. 따라서 여러 가지 해석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천사들은 창조질서의 수호자와 하나님께 드려지는 교회 찬양의 동참자로서 예배 가운데 임재한다. 이런 천사들 때문에 여자가 예배드릴 때 품위 있게 행동해야 한다. 곧 창조질서 속에서 부여된 역할을 기쁘게 받아들여, 자기 머리를 예의 바르고 품위 있게 관리해야 한다."
여러분, 이것이 이 말씀의 의미입니다.
요즘 천사에 관한 책들이 제법 많습니다. 그중 하나로 테리 로가 쓴 『천사들을 만난 사람들』이라는 책인데, 거기에 보면 이런 간증이 나옵니다.
"예배 시간에 천사가 기뻐하다!
아가페교회에 출석하는 의사의 아내인 샤론 아브람은 예배시간에 두 명의 천사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 천사들은 성도들 머리 위를 팔을 쭉 편 채로 날아다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밝은 색상의 피부와 밝은 빛의 머릿결을 가지고 있었으며 2m 10cm에서 2m 30cm 정도의 장신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광대뼈가 좀 나온 듯싶은 넓적한 얼굴이었으며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염이 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세상의 남자들과 별다를 것이 없는 생김새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천진난만함이 흐르고 있었으며 기쁜 표정의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들은 신을 신고 있지 않았지만 금색 끈이 달린 길고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 금색 줄이 가운 어디에 달려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우리가 찬송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예배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존귀와 영광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성전 안에 더 많은 천사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 둘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