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중국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우연이었다. 94년 초에 모단체에서 자비유학생에 대한 영어과외를 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자비유학을 보내는 학생들에게 영어시험을 PASS해야 한다는 자격조건이 있었다. 깜짝 놀랐던 것은 대부분이 중국에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이었다. 이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중국어지 왜 영어일까 라는 생각은 했지만 돈을 받고 하는 일이기 때문에 충실하게 가르쳤다. 한 3개월을 가르쳤을까 애들을 위해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나에게는 불행한 일로 자비유학시험이 폐지가 되어버렸다. 더 이상 중국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원장과 마지막 날, 그 동안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커피대접을 받았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던중에 중국얘기가 나왔고 나의 관심을 자극했다. 한중수교 후 중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시기였었고 많은 학생들이 중국에 유학을 가는 시기였던 것이다. 원장이 소개로 한중문화협의라는 곳을 소개를 받았서 중국어학연수에 대한 설명을 듣고 바로 결정을 했다.
가자 중국으로.. 그런데 당시에 나는 중국어공부를 한적도 없었고 당시에 학원에서 중국어를 공부하는 중문학과 학생들을 보면 중국어를 배우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지 사실 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던 것이었다. 1개월동안의 준비기간을 통해 94년도 6월 여름단기연수를 가는 대학교 중문학과 학생들과 인천에서 심천으로 들어가는 정기운항선을 타고 심천을 경유해 북경으로 갔다. 당시에 우리에게 붙여진 이름은 생활연수원팀이었다. 북경에 있는 북경대학,청화대학,어언학원 등의 커리큐럼에 따라 어학연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중국어가 목적이었고 중국에서 알게되었지만 학교후배녀석인데 집에서 군대가기전에 중국어를 배우라고 2개월동안 중국에 보내준것이고 나머지 3명의 학생들을 보면 중국도자기전문학교 입학, 중의대학입학, 북경대학입학을 목적으로 하는 특수목적인 3명을 포함해서 총 5명을 통칭해서 생활연수원팀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사설집중코스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청화대학의 커리큐럼의 경우는 오전 또는 오후에 3시간의 수업을 받는 것으로 기억을 하지만 당시에 우리는 오전 3시간 오후 4시간 총 7시간에 시간이 할애가 되었다. 선생님은 평양외교관을 역임했던 한국어가 능통한 선생님이 배정이 되었다. 교재는 북경대학출판이 초급 중급의 책이 선정이 되었고 장소는 처음 2개월간은 여름단기연수원생들과 같이 생활했던 청화대학 기숙사 18호였다.정말 환경은 중국다운 분위기였다.화장실은 문이 없는 화장실이 었고 방은 시멘트바닥에 철판침대만 있는 정말 초라하기 그지없는 방이었고 그방에서 처음 생활을 하게 된것이다. 값이 싸고 중국학생들과 접할 기회가 많은 최적의 장소였다.
처음 2개월동안은 청화대학 강의동에서 강의를 받았다. 그 때의 생활은 정말 잊을 수가 없는 생활이었다. 모든 것이 낮설고 중국다운 분위기였다. 그렇기에 좋았다..사실 5명 모두가 중국어를 중국에 와서 처음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발음부터 시작이 되었다. 남들이 얘기하는 것은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단지 나는 언제 저말을 알아들을까. 언제 쯤 나는 저 애들과 자연스럽게 얘기를 하지 하는 조급함만이 나를 압박해왔다. 다만 만국공통어인 몸짓을 통한 대화만 가능했던 때였다. 생활은 나도 대학생이었지만 여름단기연수를 온 학생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청화대학교 CAMPUS는 정말 좋았다. 구내에서 파는 수박은 우리나라와는 형태가 틀리지만 싼값에 매혹이 되어 굉장히 많이 먹었다. 북경맥주는 아마 당시에 인민폐로 2원인가 했었다. 밤이면 청화대학 매점앞에 있는 파라솔에서 중국음식을 안주삼아서 맥주와 백주를 마시곤했었다. 정말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주로 학생들과 같이 많이 생활을 했고 그 당시에 월드컵이 한 참이었기 때문에 중국학생들과 같이 밤새도록 축구를 본 적도 있었다. 중국의 기숙사는 정말 축구열기로 가득찼다. 중국이 월드컵에 진출한적이 한번도 없었지만 중국학생들의 축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정말 가히 감동적이었다.그러나 중국축구실력을 보면 우리선상님의 말이 생각이 난다..우리 중국인은 말이죠..세계에서 자전거타는 인구가 제일 많은데 사이클에서 1등하는 선수가 없어요.. 그러면서 혼자 웃고 있는 선생님이 기억이 난다. 하였튼..우리의 공동관심사는 언제나 축구였던 것이었고 중국학생들과 운동장에서 축구도 많이 했다. 축구를 하면서 이름을 부르기 보다는 로마리오, 베베토 등 당시 월드컵에서 인기를 얻은 축구선수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축구를 하고 나서 다같이 모여서 맥주를 마시는데 한 녀석이 군대얘기를 하면서 자랑을 하는 것이다. 나도 거기출신이기 때문에 급기야는 술내기로 이어졌다. 500CC정도의 맥주를 다 마시고 머리에 BOTTOM UP하는 것으로 계속해서 내기를 했었다. 8잔 정도를 마셨던 것 같다. 나도 같자기 더 이상을 못 마시겠다고 생각을 했을 때 그녀석이 약속이 있다고 가봐야 한다고 어디를 간다는 것이다.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한 잔을 더했더라면 속검사를 다했을 것 같았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아마 중국에 온지 2개월 정도가 되었을 때 였을 것이다. 나와 같이 공부하던 놈중에 내가 보기에도 외모가 준수한 녀석이 있었다. 참 잘 생겼다. 성격이 외모만큼은 못 따라가더라도 성격도 괜찮은 녀석이었다. 어느 날 중국여학생이 그 녀석을 만나고 싶다고 누군가를 통해서 MEMO를 전달해왔다. 그 녀석은 혼자가기가 쑥수러운지 나하고 같이 가자고 해서 같이 만나기로 했다. 사실 그날 나는 가슴이 설레였다. 여자를 만난다는 것 조차가 나로 하여금 설레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도 예쁜여자란다....기숙사밖에서 만났는데 20분 정도를 얘기를 했을 것이다. 우리는 중국어 실력이 안되기 때문에 대부분은 듣는 자세만 취했다. 기숙사로 돌아가기 전에 그 녀석한테 한국어로 잠깐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런데 그 여자가 나한테 하는 말이 정말 충격적이었다. "어 한국어 정말 잘하네요" (Aiya Ni Hanguohwa shuo de zhen hao le)...응...기숙사로 돌아와서 생각을 했다. 왜 그여자가 그렇게 얘기했을까...사실 식사를 학교식당에서 부폐식으로 되어 있는 식단을 밥그릇에다 담아서 중국학생들처럼 웃통벗고 걸어가면서 먹곤했고 외형적으로 중국인으로 생각을 했었나 보다. 한국사람한테 한국어 잘한다는 것이 정말 치욕적인 표현인가. 정말 재수없어..그 가시나.
수업이 진행되면서 한마디씩 한마디씩 들리는 문장도 생겨나고 말할 수 있는 관용어가 늘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생활이 점점 편안해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조급함이 나 자신을 압박해 오는 것을 버릴 수는 없었다. 2개월이 지나고 여름단기연수원생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고 남아있는 것은 우리 4명, 이제는 우리가 홀로서야 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청화대학의 숙소에서 강의가 시작이 되었다. 이제는 발음의 단계를 넘어서 문장으로 진행이 되기 시작했다. 정말 나를 포함해서 4명이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낮에는 수업을 듣고 밤에는 별도로 자습을 했고 서로간에 경쟁체제가 보이지 않게 있었다. 2개월동안의 숙소강의가 끝나고 다음의 강의숙소를 옮긴곳은 임업대학이다. 임업대학에서 1개월동안 강의가 시작이 되었다. 추가적으로 여자선생님이 같이 합류했다. 교직에서 퇴직하신 분인데 우리는 정말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성심성의껏 가르쳐주는 선생님들로 부터 수업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정착지가 된 것이 청화대유학생기숙사에 숙소를 정하고 강의는 대학내 판디엔에서 접대실을 임대하여 교육을 받았다. 시간이 가면서 늘어나는 중국관용어도 많았고 북경출판서의 교재가 문법을 자세하게 잘 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초를 튼튼히 하면서 중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초급을 마치고 중급으로 넘어갔다. 중급의 경우는 발음보다는 문장을 구성하는 것과 해석을 하는 것, 그리고 복합문법 등 내용도 많았고 가르쳐주는 것도 많았다. 이제는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화가 가능해지는 시기였고 받아들이는 학습량도 많아지는 시기였다. 청화대학 유학생센테에 있는 장기유학생들은 우리들을 보고 빨치산이라고 했다. 한 동안 있는가 하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러다 얼마있다가 다시 나타나고 해서 종잡을 수 없는 집단으로 생각해서 빨치산이라고 불렀다. 겨울이 다가오고 1년만에 TARGET으로 하는 목표를 성취하고 돌아가야 하는데 하는 조급함도 있었고 선상님이 지금대로 열심이 하면 한어수평고사 7급정도는 받을 것이라는 고무된 얘기를 많이 해주어 개인적으로도 그렇게 목표를 잡았다. 6개월동안에 많이 향상이 되었고 책을 읽는데도 부족함이 없었다. 7개월이 되던 때에 어언대학에서 한어수평고사시험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정상 수평수평고사를 보는 것으로 예정이 되었기 때문에 신청을 했고 시험을 치렀다. 생각보다는 쉬었다고 생각을 했고 잘 치렀다고 생각을 했다. 내심 7급 정도는 나왔지 안았을까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점수표를 받아보니깐 5급을 받았다 그리고 준수한 녀석도 5급을 받았다. 선생님은 기대보다는 적게 나왔다는 것으로 약간은 실망을 했듯보이듯 하다. 우리모두가 열심히 했고 잘 해왔기 때문에 약간은 기대를 했었던 것 같다. 한 언어를 처음시작해서 7개월만에 얻어낸 성적으로는 정말 놀랄만한 성적이었다. 그만큼 공부만 했다고 생각을 한다.
원래 1년을 체류하기로 했었지만 여름에 받은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8개월 어학연수로 계획을 조정을 했다. 중국어학연수를 온지 얼마안되어서 집에 연락했는데 대학성적표가 도착해있었다. 어학연수를 가기 위해서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하고 갔던 것이 었는데 수강했던 과목 중에 한 과목이 F가 나온것이다. 치명적일 수 밖에 없었다. 사실 4학년 2학기를 22학점을 수강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F는 졸업을 제때에 못한다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고민한 끝에 8개월의 어학연수로 재조정하고 1학기에 재복학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4학년을 3학기만에 마치고 졸업했다. 24학점을 12학점씩 나누어 널널하게 4학년을 마치게 되었다. 정말 8개월동안에 중국에서 공부만 했던 것 같다. 나름데로 수업시간외에는 근처를 자전거를 타고 많이 돌아다녔지만 북경시내는 유명한 곳외에는 별로 돌아다닌 것기억이 없다. 아직도 북경의 지리를 잘 모를 정도이다. 그렇게 9년이 세월이 흘렀다.
속성으로 쌓아올린 중국어 실력이고 직장생활하면서 중국어를 사용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재경팀에 있을 때, 중국현채인들이 본사방문할 경우에 경리회계교육을 시키는 것을 담당한 적이 가끔 있었다. 사실 교육을 시킬정도의 중국어 실력이 아니었기에 주로 영어로 교육을 시키고 나머지 식사를 하거나 시내관광을 할 때에 중국어로 회화하는 정도의 기회만 있었다. 계속해서 중국어공부를 해야 했는데 직장생활이 허용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가끔 찾아오는 중국손님과 기억을 더듬어 회화하는 정도로 나의 중국어는 정체되어 있었다. 티카오는 못하더라도 유지만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그것 조차도 못한 것 같다. 사실 영업본부로 자리를 옮기어 삼국간거래를 초기에 개발하면서 중국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영업이 활성화되면서 자주 중국 광주,동관을 방문할 기회가 많았지만 주로 영어를 사용을 했다. 벌써 9년의 세월이 흘렀다. 언제가는 기회가 되면 다시 중국어를 공부하고 싶다. 정체된 중국어를..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중국에서 발견하고 싶다. 그리고 아들한테 최소한 중국어를 가르칠 생각이다. 중국에 대해서 아직까지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단 하나다. 거창하게 얘기를 하면 중국을 이해하지 못하면 한국에 대한 과거는 이해할 수 있어도 미래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가 하고 싶고 그것을 통해서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마 중국에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심리라고 할까..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은 아니다. 그냥 찾고 싶다. 그게 한국이 되었든 중국이 되었든 간에 말이다. 스프링님이 말했던가 끊임없이 배움의 자세로 평생을 살아가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이처럼 불확실한 사회에서 도태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계화가 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보면 그만큼 기회도 많겠지만 개인개인에게는 위기상황이 더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을 한다.
지금생각해 보면 그때가 그립다. 순수하게만 보였던 중국이 아니었던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순수해 보였고.모든게 새롭고 신기했던 시절이었다. 그때 공부를 같이 했던 송모형님은 지금 이천에서 도자기를 연구하고 있고 그 용모가 준수한 녀석은 인민대학에서 언론학을 배우고 지금은 졸업하고 사회생활하고 있을 것이다. 한 녀석은 중의대학을 입학하지는 못하고 계속 공부했던 것으로 아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갑작스럽게 새벽에 짐을 싸서 천진으로 배타러 가던 날.. 연락처를 미처 챙기질 못했다. ZHAO라오스도 보고 싶고 그때 공부를 같이 했던 사람들이 보고 싶다. 북경은 지금 많이 변해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마음먹고 하얼삔 삥동제를 보러 간적이 있는데 영하 40도 이상일 것이라는 소문에 추위에 대한 대비를 했다. 그 당시에 서울 모여대 학생들이 2명이 같이 동반했는데. 한 여학생이 여학생 펜티스타킹을 입으면 그렇게 따듯하덴다 그리고 입어보라고 추천을 한다.죽기는 싫었기 때문에 그래 입자. 해서 그 여학생한테 여자펜티스타킹을 받아서 입을 려고 하는데 주위에 보는 인간들이 보면 변태로 생각할 것 같아 화잘실에 가서 입었는데 참 곤욕이었다.
좁은 화장실에서 한 다리집어넣고 다른 한 다리집어 넣으려고 하니깐 중심이 안잡히는 거라 이리 잡고 저리 기대고 간신히 입는데 성공했다. 거기에 추리닝을 입고 바지를 입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차를 타고 하얼삔으로 갔다. 첫날은 펜티스타킹이 추위를 완빵으로 막아주었다. 경장히 따스했다. 역시...이래서 좋구나. 거기에 꽉 쪼이는 기분...나는 변태가 아니다.다만살기위해서 변태를 선택을 했을 뿐이었다.
두번째 날이 되니깐....아침에 어름길을 조심스럽게 조심스럽게 걸어가는데 찌지직... 지찌직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다리의 운동반경이 유연해지는 것이다...저녁에 확인해 보니깐 펜티스타킹이 처참하게 찢어져 있었다 엉덩이 부분은 온전한 채....
여기까지 읽은신분은 복 받을 것입니다.
첫댓글 근 십년전 일인데도,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시군요.8개월간이라 하나 집중적인 공부는 어리버리 5년하는것 보다도 낫지요.이제는 활용할 여건이 못되어 추억으로 남겠으나 귀중한 인생의 자산일거라 생각듭니다.지금 여건은 예전과는 천양지차이지요.환경도 그려느니와 당시 유학생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만 했었는데....ㅠㅠ
정서나 취향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20대 초반에 고착되어 있는 게 인지상정인 것 같네요. 한참 피가 끓는 나이였기 때문에 그때의 추억이 가장 선연한 게 아닐까요... 님의 글을 읽으니 제 마음은 왠지 중국과는 상관도 없는 저의 20대 후반으로 돌아가 그리움에 잠기네요.
9년이 지났다...라는 글귀가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습니다.저도 시간이 지나면 똑 같은 회상을 할 것 같습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저두 대학 졸업하던 해에 중국유학을 가기로 결심했지만 집안의 반대로 실행을 하지 못했는데요. 지금 직장 생활을 하면서 틈틈히 배운 중국어로 운좋게 유학파견을 나온걸보면 중국과 인연은 있나봅니다. 그때 다녀왔더라며 님처럼 중국어 배운지 어언 십몇년이라는 여유있는 회고도 할 수 있었을텐데, 부러 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