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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의거 학술논문총서>,(사)3.15의거기념사업회, 2010. 12. 30.
기록을 거울로 삼는 의로운 시들
―3․15와 한국시
맹문재
1.
평전이나 자료집이나 의거사 등이 문학작품보다 힘이 강한 것을 경험할 때마다 기록의 사회적 가치를 깨닫게 된다. 역사적 사실이 문학의 이미지를 앞서고, 기록 작성자의 성실성이 작가의 천재성을 능가하고, 기록의 역사관이 문학의 미학보다 숭고함을 느끼고 한 인간의 역사적 존재성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예는 일일이 나열할 수 없으나 전태일 평전이 그렇고, 전태일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의 회상집 어머니의 길이 그렇고, 그리고 3․15의거기념사업회가 펴낸 3․15의거사가 그렇다.
그리하여김영호․김용실․김주열․김영준․전의규․김영길․김효덕 ․김삼웅․오성원․김종술․김평도․조현대 등의 3․15의거 당시 희생자 명단을 지나칠 수 없다. 강융기․김동섭․권종림․강경술․하병열․박세현․김시민․이상규․문채영․김무신․구판주․김태열․이휘규․김정수․황응선․노치준 등 3․15의거로 인한 부상 후유증으로 타계한 이름들도 다시 새기게 된다.
그와 반대로 “난동을 한 사람들과 난동을 좌시하고 막지 못한 공무원들은 처벌을 받을 것이다”, “3․15폭동 사건은 계획적인 폭동이다”, “마산사건은 공산당과 연결되어 있다”, “준비되었던 500발 중 458발을 쏘았다”, “대(나라)를 위하여 소를 희생했다”, “경찰들에게 총을 준 것은 쏘라고 주었지 장난감으로 준 것이 아니다” 등과 같이 마산의거를 불인정하거나 폄하한 자유당과 행정부 고위층의 반응에 대해서는 분노하게 된다.
그리고 3․15 1차 마산의거, 4․11 2차 마산의거, 4․18 고려대생 봉기 및 피습, 4․19혁명, 4․25 대학교수단 시위, 4․26 이승만 대통령 하야 등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인지하게 된다. 나아가 자유당과 경찰이 한통속이 되어 저지른 3․15부정선거,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비참하게 죽은 김주열, 그의 죽음을 가장 먼저 달려와 알린 부산일보 마산주재 허종 기자, 정치깡패, 좌시할 수 없다는 의분심으로 나선 마산의 고교생들과 해인대학(현재 경남대학) 학생들, “피로써 찾은 자유 총칼로 뺏을쏘냐?”라는 시민 구호, 돈을 모아 희생된 동료 오성원을 장사지내준 구두닦이 친구들, 전우가, 통일행진곡, 경무대 국무회의, 이기붕 일가의 자살 등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어느 것이 옳고 그른가를 평가하고 선택하게 된다. 또한 역사라든가 정의라든가 민주라든가 민중이라든가 하는 개념이 속옷을 적시는 빗물처럼 촉촉이 스며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고민은 역사 선택에 대한 불안이나 갈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확신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기록을 부단히 읽고 그 역사적 가치를 현재의 삶에 부지런히 옮겨야 한다는 당위적 고민인 것이다. 진정 기록에 들어 있는 역사성을 새기고 있으면 자기 선택의 순간에 갈등하지 않고 타락하지도 않는다. 역사적 기록은 분명 한 개인의 거울이고, 실천행동의 잣대이다.
점점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횡행하는 이 자본주의 시대에 기록을 읽어야 하고 기록의 정신을 예술작품이나 일상으로 승화시키는 일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아무리 자본이 인간의 가치를 왜곡시키고 인간을 수단적 조건으로 유린한다고 할지라도 기록의 정신을 품고 있는 한 인간은 무너지지 않는다. 아무리 인간이 유적(類的) 존재로부터 상실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기록의 눈빛을 품고 있는 한 이성적 존재를 상실하지 않는다. 3․15의거를 거울로 삼고 시를 창작하는 일이 가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2.
그날은 콜럼비아 찻집에서 시화전을 여는 날이었다.
손수 만든 시화전 입간판을 둘러메고 신마산 부두 쪽으로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낮게 갈앉은 희뿌연 하늘과, 감기 기운이 도는 음산한 바닷가, 갈매기 두어 마리 날고 있는 황량한 부둣가에 잠시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그날 1960년 4월 11일 아침 11시 30분……
너는 바다 속 깊은 곳에서 나를 향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물위에 반쯤 떠 있는 너의 머리가 처음에는 바가지처럼 예사로 보였다. 1분, 3분, 10분……. 그렇게 눈먼 시간이 내 무료를 찍어 누를 때 바다 너는 천근같은 음모를 감춘 파도자락을 가르며 한 발 또 한 발 부둣가로 다가왔다.
드디어 내 눈높이에 너의 주검이 닿아 왔을 때 나는 후딱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얼굴 중심부에 큰 쇠붙이 덩이가 박힌 채 너의 눈은 아직도 부릅뜨고 있었고 너의 두 주먹은 불끈 쥐어 있었다.
(저건 분명 金朱烈이다. 온 나라 사람들이 마산 땅을 다 뒤지며 찾던 주열이다)는 확신이 용수철처럼 내 몸을 공중에 튀겼다. 순간 나는 달렸다. 콜럼비아 다방을 향해 숨가쁘게 달렸다. 카운터 밑으로 전화기를 숨긴 채 馬山日報의 B기자에게 이 사실을 통보했다.
그리고 또 달렸다. 제일여고 뒷산으로 도망치듯 달렸다. 30분쯤 지나자 신마산 부둣가는 수천 명의 성난 군중들로 꽉 메워졌다.
그날 밤 마산 3․15의거 제2차 민주시민항쟁의 의로운 횃불이 마산 하늘을 뒤덮었다. 저마다 뜨거운 가슴으로 민주의 깃발을 올린 마산의거는 마침내 4․19학생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90년 4월 11일 나는 혼자서 그 부둣가로 나가 보았다. 여객선 뱃머리가 된 그 분노의 바다는 아직도 잠들지 못한 채 보채고 있었다. 아직도 해명이 덜 된 金朱烈의 시퍼렇게 부릅뜬 두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산의 정신, 마산의 민주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구암동 허름한 야산 3․15의거 영령 유택에서 金朱烈은 지금도 마산시민을 향해 전화를 걸고 있다.
―이광석, 「김주열 사설」 전문
위의 작품은 기록을 창작품으로 잘 살려내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인 기록에 나타나 있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시작품을 통해 새롭게 인식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기록에서는 찾기 어려운 “콜럼비아 찻집”이며 “시화전을 여는 날”이며 “카운터 밑으로 전화기를 숨긴 채 馬山日報의 B기자에 이 사실을 통보”한 일이며 “제일여고 뒷산”과 같은 상황을 통해 역사적 사실의 기록을 새롭게 발견해주고 있다. 또한 “너의 머리가 처음에는 바가지처럼 예사로 보였다”, “천근같은 음모를 감춘 파도자락”, “(저건 분명 金朱烈이다 온 나라 사람들이 마산 땅을 다 뒤지며 찾던 주열이다)는 확신이 용수철처럼 내 몸을 공중에 튀겼다”와 같은 비유를 통해 기록의 상황을 한층 더 구체화시켜주고 있다.
그리하여 위의 작품은 역사의 기록을 현재의 역사로 잘 이어주고 있다. 시인은 마산의거가 일어난 지 “30년이 지난 90년 4월 11일” “그 부둣가로 나가 보”는데, 그 바다가 “아직도 잠들지 못한 채 보채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아직도 해명이 덜 된 金朱烈의 시퍼렇게 부릅뜬 두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마산의 정신, 마산의 민주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라고 반문한다. 이러한 면은 한편으로는 마산의거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하는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거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점을 새삼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를 계승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이기 때문에 현재의 시간과 공간에서 그 유효성이 깎일 수밖에 없다. 이때 이곳 사람들의 식성이 다르고 의복이 다르고 헤어스타일이 다르고 거주 형태가 다른 것은 물론이고 학교 교육, 정치제도, 유행가의 가사가 또한 다르기 때문에 그때 그곳의 역사가 직선적으로 계승되는 일은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위의 작품에서의 반성은 도덕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적인 차원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반성이 정직할수록 시대인식은 치열해지고 엄숙해지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3․15를 말하지 맙시다.
5․16의 민족중흥을 뇌까리며
10월, 그 찬란한 아침을 찬양하고
5․18, 다리 뻗고 길게 자다
그 6월 올림픽을 외쳐대던
그 요사스런 혓바닥으로
다시는 3․15를 말하지 맙시다.
―이재금, 「3․15를 말하지 맙시다」 부분
위의 작품은 3․15의거를 제대로 계승시키지 못하면서 함부로 수단화하는 상황을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함부로라는 의미는 진지하지 않고 가볍게 대한다는 것을 넘어 역사적 가치를 왜곡시키거나 방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준엄한 자기반성으로 함부로 “3․15를 말하지 맙시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실제로 “5․16의 민족중흥을 뇌까리며/10월, 그 찬란한 아침을 찬양하고/5․18, 다리 뻗고 길게 자다/그 6월 올림픽을 외쳐대”다가 기념식장에서 3․15의거를 찬양하는 표리부동한 정치인이나 기업인이나 언론인이나 심지어 문인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역사가 계승되는 과정에는 변화가 있을 수 있고 또 변화되어야 마땅하지만, 진정성이 없는 변화는 곤란하다. 그것은 시대의 변화를 수용한 계승이 아니라 역사적 가치를 왜곡시키는 일에 불과하다. 따라서 자기반성의 토대가 굳건할 때 바람직한 역사의 계승도 창작의 발전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3.
그러나 그러나
아직 피지 못한 동백꽃 봉오리
붉게붉게 스러진 그대들의 처참한 죽음이
억울해서
겹겹이 억울해서
아픔보다 더 아린 분노가 가슴을 찢는다
불의에 항거한 것이
민주주의를 갈망한 것이
죽을죄가 되더란 말인가
아직 눈 못 감은 그대들 영령 앞에
내 무슨 낯으로 말할 수 있으랴
그동안
강산이 변해도 몇 번은 변했을 세월에
민주주의는 지금껏 제자리 못 잡고
윤리와 도덕이란 스스로 인간됨을 거부하는 파렴치로 흐르고
몸 사려 비굴한 목숨 이어감이 오히려 낯뜨거움을 느낀다
―이효정, 「다시 3․15의거탑 앞에서」 부분
3․15의거사를 읽는 동안 가장 절실하게 느낀 점은 그 어떤 권력의 탄압에도 무너지지 않는 민중의 힘보다도 민중에 의한 혁명이 얼마나 어려운가였다. 하늘의 도움이 있어야 민중혁명이 가능하겠다는 생각까지 든 것이다. 이는 민중의 힘이 약하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이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민중을 억압하고 있으며 또 잔인하게 지배하고 있는가를 드러내려고 하는 말이다. 그러한 면은 위의 작품의 “강산이 변해도 몇 번은 변했을 세월에/민주주의는 지금껏 제자리 못 잡고”라는 사실로도 확인되고 있다.
4․19혁명이 일어난 지 4개월이 지난 1960년 8월 27일 3․15의거부상자동지회 회원 40명이 마산에서 상경해 국회 앞에서 반혁명 세력 규탄 시위를 벌이며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또 같은 해 10월 11일에는 4․19혁명 부상 학생 60여 명이 국회에 들어가 의장석을 점거했다. 3․15의거 희생자인 김주열의 아버지 역시 마산 시민에게 보낸 글에서 “1년이 지나도록 민주 반역자 하나 똑똑히 처단 못하고, 부정축재자 하나 처리 못하고, 파쟁과 정쟁만으로 소일하고 있음은 정말 염치없는 일이며, 한심하기 짝이 없다”라며 부정선거와 부정부패 사범에 대한 사법적 처리가 지지부진하고 있음을 비판했다. 이런 일들은 부정선거 관련 재판에서 의외의 결과가 나온 데 대한 민중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3․15의거를 이은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할 정도로 민중의 힘이 강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지만, 민중들의 요구는 여전히 무시되고 있었다. 따라서 독재정권 때에는 얼마나 민중들이 탄압 당했을 것인가가 명확해진다. 그렇지만 민중들의 힘 또한 독재정권의 철퇴 못지않게 강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패배한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음을 다음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 그러나 마산이 마산임을 선언한 가장 빛나는 사건은
3․15의거이다.
이승만 독재 정권의 마지막 발악이었던
부정선거가 이 나라 전역에서 자행될 때
마산은 동조할 수 없었다.
마산은 좌시할 수 없었다.
마산은 인내할 수 없었다.
민족 정기 앞에서 마산 시민 정신은
배신할 수 없었다
불종거리에 운집한 군중들
남성동 해안 쪽으로 달려가던 사람들.
경찰 트럭에 잡혀가던 사람들
카빈 총탄에 쓰러지던 학생들
기차 철로에 깔린 자갈을 치마폭에
담아 나르던 여학생들.
아 김주열의 시체는 자유당의 죽음의 상징이었다.
마산 시민은
이 나라 전역에 민주의 불을
질렀다. 부산에서, 서울에서
마침내 그 불길 타올라
새로운 민주 정부가 들어섰다.
불의 마산이여
그 불은 부마사태에도
변하지 않는 불이었다.
―이우걸, 「아, 마산이여」 부분
위의 작품에 나타나고 있듯이 3․15의거는 “이 나라 전역에 민주의 불을/질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진정 3․15의거는 해방 이후 최초로 민중이 연대해서 일어난 민주주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총과 칼로 인권을 유린한다고 할지라도 정의를 믿고 있는 민중들은 목숨 걸고 맞선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민중주의 운동이었다. 3․15의거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발전의 효시였다. 국가의 주인이 결코 권력을 쥐고 있는 몇 사람이 아니라 민중이라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시켜준 것이다. 이런 점에서 3․15의거는 미래의 민주주의 운동의 거울이 되었다.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민중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민주화 운동의 초석이 된 것이다. 그러한 면은 “그 불은 부마사태에도/변하지 않는 불이었다”라는 사실에서 볼 수 있다. 3․15의거는 이후에 일어난 4․19혁명, 10․18부마항쟁, 5․18광주항쟁, 6월항쟁 등과 같은 민중 투쟁의 선두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마산의거에 대한 다음의 고백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마산의 삼월이 나에게 분노를 가르쳤다. 누런 황사바람이 두척산을 넘어와 마산의 하늘을 가리기 시작하면, 흉문처럼 적조가 발생하는 합포만의 검고 죽은 파도가 마산의 바다를 덮기 시작하면, 나는 마산의 삼월이 가르쳐주는 분노를 배웠다. 민족과 국가를 총칼로 모독하는 정권에 대해, 민중과 인권을 군홧발로 짓밟는 독재에 대해, 권력과 금력에 눈멀어 바르게 기록되지 못하는 역사에 대해, 산처럼 일어서서 바다처럼 펼쳐졌던 그 해 삼월 마산의 분노, 그 뜨거운 분노의 방식을 배웠다.
―정일근, 「분노가 없으면 사랑도 없다」 부분
위의 작품에서 “분노”라는 것은 단순한 감정으로 볼 것이 아니라 정의에 대한 열정과 실천 행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열정과 대항 방식을 3․15의거에서 배웠다고 토로하고 있다. “민족과 국가를 총칼로 모독하는 정권에 대해, 민중과 인권을 군홧발로 짓밟는 독재에 대해, 권력과 금력에 눈멀어 바르게 기록되지 못하는 역사에 대해, 산처럼 일어서서 바다처럼 펼쳐졌던 그 해 삼월 마산의 분노, 그 뜨거운 분노의 방식을 배웠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러한 토로는 진정 신념에 찬 열정인 것이다.
4.
1960년 10월 8일 3․15부정선거와 관련된 48명의 피고인(부정선거자, 발포자, 정치깡패 등)에 대한 일괄 판결이 있었다. 이 재판은 4․19혁명의 정신이 판결에 반영되기를 국민들이 절실히 요청하는 사안이어서 관심이 높았다. 재판 결과 전 서울시경 국장이 사형을, 경비과장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을 뿐 나머지 피고자들은 짧은 징역이나 무죄 선고를 받았다. 이에 대해 국민의 불만이 전국적으로 번져갔는데, 국회는 국민들의 감정을 무마시키기 위해 민족반역자 처벌 및 부정축재 환원에 관한 특별법안을 제출, 통과시켰다.
특별법안이 통과됨으로써 1961년 1월 4일부터 경남에서도 반민주행위자 및 부정축재자 처벌 절차가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40일 간으로 한정된 특별검찰의 수사 결과 기소율은 2.5%에 불과했다. 거물급 관련자들 대부분은 수사망을 벗어났고 부정선거 관련자와 선거자금 조달자에 대한 불기소 처분이 많았다. 발포 관계에 관한 수사도 진전을 보지 못했다. 결국 3․15의거를 통해 정부와 국회가 구성되었지만 과거 권력자들의 기득권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3․15의거의 정신이 무시되는 것은 이후의 정권에서도 이어졌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군부 세력은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성 정치인들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반민주 행위자와 부정축재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계속 추진했다. 그 결과 소수이기는 하지만 시민 시위자들을 살해한 경찰들이 처벌받게 되었다. 또한 정부 주도의 기념사업이 진행되었는데, 1962년 3․15의거 2주년 기념식에서 군사쿠데타 세력은 자신들의 행동이 혁명이라고 당위성을 내세우며 3․15의거 정신과 연결시키려고 했다. 자신들의 군사쿠데타가 국민들의 권리를 헌신짝같이 유린하던 자유당 정부에 대항하여 일어난 민족적 민주혁명이라고 아전인수로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1963년 12월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으로 공식적으로 취임하자 정권을 잡은 세력들은 3․15의거의 의미를 서서히 묻어버리기 시작했다. 군사정권의 입장에서는 3․15의거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국민적 저항이었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69년 대통령 연임금지 조항을 철폐하고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킨 후에는 3․15의거를 역사의 평가에서 완전히 제외시켰다. 이러한 왜곡은 1979년 10․26사태와 1980년 5․18광주민주항쟁을 무참히 짓밟고 정권을 잡은 신군부에서도 이어졌다. 그러므로 다음의 작품에서 내세운 경계는 새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평안한 일상을 보장하면
그동안 가지고 놀다 싫증난 3․15탑은
어쩌면 헐릴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 자리에
조국의 줄기찬 번영을 가져온 12․12를 위한
용감한 군인들의 탑이 서거나 1000억불 수출의 탑이 설지도 모르지
4․19탑 자리엔 10월 유신 기념탑이 서고
5․16 영웅을 위한 기념시집 원고청탁도 있을는지 모른다
이다음에 우리 손녀가 3․15탑에 대해서 저게 뭐야 물으면
시행착오 속에 살다 개죽음을 당한 불쌍한 젊은이들을 위한 위령비란다라고
말하게나 안 될는지 정말 아무도 아무도 모른다.
―가나인, 「3․15탑과 1990년 이른 봄 앞에서」 부분
물론 “이 다음에 우리 손녀가 3․15탑에 대해서 저게 뭐야 물으면/시행착오 속에 살다 개죽음을 당한 불쌍한 젊은이들을 위한 위령비란다”와 같은 폄훼가 함부로 일어날 수는 없다. 그것은 3․15의거 정신이 어느 정권에 의해서도 함부로 왜곡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몰지각한 행정가에 의해서 함부로 묻힐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 어느 누구도 국민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온몸으로 추구한 3․15의거를 왜곡시키거나 폄하시킬 수 없는 것이다.
도로점유율이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느 철없는 인사(?)가 변두리로 이전하자는
제의를 했었지만
안심하라 그대들은 안심하라
이 고장 시민들의 여론이 물끓듯하니깐
일언지하에 그 인사의 제의는
취소 소동이 벌어졌음을
그대들은 이 땅의 위대한 역사입니다
이런다고 역사가 없어지나요
이렇게 한다고 역사가 지워지나요
―이선관, 「함성을 위하여-3․15 그날 산화한 12명을 위하여」 부분
5.
3․15의거에서 찾아야 할 또 한 가지의 의미는 이 항쟁이 예외적이고 돌출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민중항쟁사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1862년의 진주민란으로부터 1894년의 동학혁명, 1897년의 만민공동회, 1919년의 2천만 민족이 참여한 3․1운동, 1926년의 6․10독립만세운동, 1928년의 수원고농 항일투쟁, 1929년의 광주학생 항일운동, 1960년의 2․28대구 학생시위 등의 전통과 맥을 같이한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3․15의거는 부정부패와 독재로 찌든 정권으로부터 민중의 정의를 회복시켜준 것으로 유구한 역사적 전통을 잇는 항쟁이었다. 따라서 다음의 작품과 같이 3․15의거에 대한 자긍심은 아무리 가져도 지나침이 없는 것이다.
마산(馬山)은
고요한 합포만(合浦灣) 나의 고향 마산은
썩은 답사리 비치는 달 그림자에
서정(抒情)을 달래는 전설의 호반(湖畔)은 아니다.
봄비에 눈물이 말없이 어둠 속에 괴면
눈동자에 탄환(彈丸)이 박힌 소년의 시체가
대낮에 표류하는 부두―
학생과 학생과
시민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민주주의와 애국가와
목이 말라 온통 설레는 부두인 것이다.
―김태홍, 「마산은!」 부분
3․15의거의 정신은 민중 정의의 실현이라고 집약시킬 수 있을 것인데, 결국 마산의 민중들이 그 역사의 장을 열어젖힌 것이다. 부정선거와 부패와 무능한 독재 정권을 좌시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민권 회복을 쟁취한 것이다. 따라서 3․15의거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전근대적인 차원에서 근대적인 차원으로 전개되어 가는 데 초석이 되었다. 위정자들은 국민의 주권을 존엄하게 인정해야 된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확인시켜 준 것이다. 따라서 “학생과 학생과/시민이//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민주주의와 애국가와//목이 말라 온통 설레는 부두”를 가지고 있는 마산에 대한 자긍심은 마땅한 자격을 지닌다. 그러므로 이제 그와 같은 의미를 더욱 되살릴 것이 요청된다.
① 29일 낮 12시 40분, 이동영(19) 군 등 7명의 소년들은 오 군이 잠들어 있는 창원군 내서면 합성리 아래 부락 뒷산에 2대의 택시로 오 군이 죽은 이유의 글발이 새겨진 비석을 옮겼다. …… 아침부터 대지를 적시는 봄비는 소리도 없이 내려 울분에 찬 소년들의 슬픈 가슴속을 더욱 미어지게 하는 것 같았다. …… 무덤 앞에 모여선 전우들은 일제히 “성원아……” 목멘 소리로 불렀으나 대답은 없고 산울림만 메아리쳤다. 이제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오 군의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의 후면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길 가는 나그네여. 여기 민주주의를 찾으려다 3월 15일 밤 무참히도 떨어진 21년의 꽃봉오리가 누워 있음을 전해다오……’
② 3․15의거 희생자인 구두닦이 소년 오성원 군의 친구 3명이 집단 자살하고, 그들의 근거지였던 ‘보리수 다방’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위의 인용글은 3․15의거사에 수록되어 있는 의거 당시의 희생자인 오성원에 대한 기사인데 ①은 1960년 3월 30일 부산일보 마산주재 이순명 기자가 취재해서 실은 것이고, ②는 1965년 3․15의거 5주년과 관련하여 부산일보가 소개한 기사이다. 위의 글들을 통해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의 가치가 깎이고 있는 사실을 한편으로 확인하게 되어 안타깝기만 하다. “오성원 군의 친구 3명이 집단 자살”한 사건, 그들은 왜 그와 같은 극단적인 행동을 했을까? 그것은 변하지 않는 부패 사회에 절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3․15의거가 있었지만 민주주의의 실현은커녕 철새 정치인, 출세주의 공무원, 정치자금으로 반대급부를 거래하는 부정축재형 기업인, 권력에 기생하는 정치깡패, 금전에 눈먼 학자와 문인 등이 세상을 지배하자 그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기록을 거울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했을 때 민권 회복의 토대가 되는 사회 제도의 형성도 가능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기록을 창작하거나 창작을 기록하는 일은 매우 필요한 일이다.
시인이 아니라도 읊어야 한다
화가가 아니라도 그려야 한다
악사가 아니라도 노래부르자
방대한 어휘를
전설로만 들리지 않기 위하여
진실된 행동을
흥분으로만 미루지 않기 위하여
이 성스러운 벽혈(碧血)을
먼 후예들이 핏줄기로 하기 위하여
우리 모두가 참되게 참되게
춘추(春秋)의 붓끝으로 기록해야만 한다.
―김상중, 「기록」 부분
기록을 창작하는 방향은 “총칼로써도/민권을 뺏을 수 없다는 것을/인민의 불타는 염원은/그 누구도 꺾을 수 없다는 것을”(정태영, 「피로 뿌린 씨 내일은 꽃피리」) 보여주어야 한다. “생명보다 더한 아름다움이 없고 조국보다 귀한 사랑이 없”(김세익, 「진혼가」)다는 것도 추구해야 한다. 또한 국가의 권리가 권력가의 손에 있지 않고 민중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도 확인시켜주어야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사사로운 이해타산을 추구하지 않고 일어난 정의로운 의거가 유구한 전통이 될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왜곡시키는 대상에 대해 가장 완강하게 대응하는 민중에 의한 전통, 민중을 위한 전통이 될 것이다.
(『서정과 현실』상반기, 2005. 3)
맹문재
1963년 충북 단양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및 같은 대학원 수학. 저서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패스카드 시대의 휴머니즘 시』『다시 읽는 정지용 시』(공저) 『시창작이란 무엇인가』(공저) 『지식인 시의 대상애』『현대시의 성숙과 지향』『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시학의 변주』『한국 현대시사』(공저) 『시론』(공저) 『행복한 시인 읽기』『현대시론』(공저), (공)편저로 『한국 대표노동시집』『박인환 깊이 읽기』『박인환 전집』『김명순 전집-시·희곡』 등이 있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
2011년_01월(3.15의거_논총,_기록을_거울로...).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