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다가 돌아온 안토니우스 블로크는 흑사병이 만연하여 죽음의 땅이 되어 있는 고향 스웨덴의 해변에서 죽음의 방문을 받는다. 자신을 '죽음'이라고 소개한 그에게 블로크는 체스 내기를 하고, 죽음은 그에게 동의한다. 만일 죽음이 이긴다면 그를 따라 나설 것이요, 기사가 이긴다면 죽음이 물러가야 한다. 승산이 없는 내기에서 정말로 블로크가 원하는 것은 체스가 진행되는 동안 신으로부터 구원에의 확신을 얻는 것이다. 죽음으로 끝나게 될 삶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기사는 교회를 찾아가기도 하고, 마녀로 낙인이 된 소녀 옆을 지키기도 하지만 어디에도 '죽음'만이 보일 뿐. 신의 구원은 찾을 수 없다. 기사는 오히려 광대부부와 미카엘이라는 이름의 아이를 보며 잠시 충만한 평화를 느낀다. 그들을 지키기 위해 동행을 자처한 기사는 자신의 시종 옌스와 그를 따라나선 여인과 일행을 이루어 길을 떠난다. 일행에 대장장이의 아내 리사가 합류한다. 그러나 밤에 죽음과 체스를 두는 기사를 본 광대 부부는 황급히 떠나고, 남은 일행들은 비바람을 피해 들어간 성에서 기사의 아내 카린을 만난다. 그들 모두에게 죽음이 찾아오고, 기사는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올리지만 죽음에게 정복당한다.
▶ 신과 대결하며 묻는 존재의 의미
잉마르 베르히만의 <제7의 봉인>은 1957년에 세상에 나왔다.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은 쇠퇴기를 이미 지나고 있었고, 프랑스에서는 한 무리의 청년 비평가들이 누벨바그의 전조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영국에서는 프리시네마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무도 더 이상 신을 말하지 않았고 유럽인은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대중문화의 중심은 고통의 세대에서 전후세대로 옮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물결처럼 보였다. 그때 베르히만은 전혀 뜻밖에도 신의 존재와 부재에 대해서 질문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제7의 봉인>의 시대배경이 중세인 것만큼이나 중세적인 질문으로 보였다.
<제7의 봉인>은 14세기 중엽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온 기사 안토니우스 블록의 귀향기이다. 그는 청년시절을 무의미한 전쟁에 흘려보내고 스웨덴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의 귀향길은 '삶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공포'에 짓눌려 있다. 영화의 서막을 여는 바닷가 장면에서 체스판을 뒤로 한 채 비스듬히 상체를 일으키고 있는 블록의 표정은 이미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그에게 사신이 찾아온다. 그는 체스게임을 제안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삶의 마지막 의미를 찾기 위한 시간을 유예 받기 위해서이다.
마을은 페스트와 함께 마녀사냥의 집단적 광기가 휩쓸고 있다. 도처에 삶의 공포가 만연해있으나 신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에게 있어 유예 받은 삶의 마지막 목표는 신을 감각하는 것이다. 그는 고해성사에서, 감각으로 신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신은 왜 불완전한 약속 뒤로 숨어버렸는지를 격하게 묻는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신은 침묵을 지킨다'는 것일 뿐이다.
마을에서 벌인 두 번째 체스판에서도 그는 이긴다. 그러나 그가 절망 속에서 찾는 신은 끝내 현전하지 않는다. 집으로 향하기 전 한 무리의 마을 사람들과 숲을 지나면서 그는 다시 사신과 마지막 체스게임을 벌이나 그것은 그가 유예된 시간을 반납할 결심을 굳힌 후의 일이었다. 신은 아예 부재하든가 아니면 부재와 다름없는 침묵에 빠져있는 것이다.
잉마르 베르히만이 이 절망적인 귀향기에 요한계시록의 이야기를 따서 '제7의 봉인'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알다시피 그것은 종말을 상징하는 7개의 봉인 중 마지막 봉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중세를 빌어 현재의 인류가 '제7의 봉인' 앞에 서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극단의 비관주의를 표출했거나 감히 다룰 수 없는 주제를 건드린 셈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인간은 그 봉인을 그대로 덮어둘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가지지 못한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제7의 봉인>은 교리문답에 관한 것도 신학논쟁에 관한 영화도 아니다. 결국 베르히만이 강조점을 찍은 것은 사람들 사이의 단절이다. 그것이야말로 삶의 참을 수 없는 공포를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고 신을 부정하며 신을 침묵하게 만드는 원인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블록이 체스말을 쓰러뜨리며 광대 요프 일가를 구하는 영화의 마지막은 매우 역설적이다. 이 장면은 베르히만의 예술가로서의 자기존재와 인간에 대해 마지막 믿음의 끈을 잡으려는 몸부림에 가까운 절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요컨대 <제7의 봉인>은 중세적 주제가 아니라 현대의 삶의 공포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본명은 에른스트 잉그마르 베르히만. 1918년 7월 14일 스웨덴의 웁살라에서 태어났다. 스톡흘름 대학교에서 문학과 미술사학위를 받았다. 10대부터 연극을 접했고, 청년기에는 무대연출, 창작 희곡, 오페라와 라디오극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2차대전이 끝난 1946년에 첫 번째 영화를 만든 이후, 10년간 연극과 영화를 오가며 21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초기영화들은 단막극이 주조를 이루는 19세기 실내극의 내용과 스타일을 차용하여 공간과 시간으로 둘러싸여진 미장센에 몰입하여 디테일과 영상적 리듬에 치중하였고. 동시에 영구중립국 스웨덴의 고립과 초조, 불안, 공허와 소외를 담았다. 베르히만은 입센과 스트린드베리의 영향 아래 놓인 19세기 근대 연극의 사실주의와 북구의 신비주의 영화 전통. 전후 세대의 실존주의와 목사였던 아버지에게서 영향 받은 것이 분명 한 그 자신의 개인적인 신학적 회의의 세계로 들어갔다.
스톡홀름의 젊은이들의 태양과의 만남 <모니카와의 그 여름>, 19세기말 스웨덴 남부 시골의 군상을 통해 바로크적인 미장센을 보여준 <광대들의 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각색하여, 유머로 그려낸 연애풍속도 <한여름 밤의 미소: 어느 로맨틱한 희극>이 초기의 대표작을 이룬다. 그러나 1957년 깐느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은 <제7의 봉인>에서 베르히만은 죽음을 형이상학의 이미지로 끌어올려 신학적 토론을 시작하면서. 60년대 유럽 모더니즘 영화논쟁에 첫 번째 영화 철학자로서의 변모를 보여주었다. 이 영화에서 냉전 이데올로기의 핵의 공포로부터 베르히만은 중세의 '흑사병에 대한 신의 침묵' 에 관한 사유의 구도를 만들어냈으며, 의인화된 죽음과의 체스게임으로 기사는 신을 향해 간절히 외치나 보답 받지 못하고 신의 침묵 앞에서 죽음 앞에 끌려 들어가는 로드무비의 형식으로 유럽 예술영화의 하나의 모델을 제시했다. <제7의 봉인>은 연극적 알레고리, 영화적 스펙터클, 신학적 주제의식을 통해 베르히만의 작가적 세계관을 집약해놓은 영화이며, 동시에 세계영화의 역사에서 새로운 영화적 사유를 시도한 하나의 단절이다. 연극적 비전과 영화제 담론이 서로 만나서 한 노인의 기억과 공포. 회상과 예감의 내면적 풍경의 세계로 여행하는 <산딸기>는 동시에 베르히만의 영화가 그의 자서전적 요소를 이루고 있음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우디 앨런으로 대표되는 베르히만 '이후'의 수많은 작가 영화 감독들의 영화에서 자서전적 요소를 끌어들이는 하나의 고전이 되었다. 신의 침묵' 3부작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겨울빛>, <침묵>으로 베르히만은 상징주의로 가득찬 신화와 전설의 메타포와 결별하고 엄격한 간결함으로 인 간의 내면과 세상의 심연을 파고들었다. 두 여자의 만남과 관계를 다룬 <페르소나>는 영화라는 페르소나에 대한 한편의 영화로서 영화의 본질에 질문을 던지는 화두이며, 카오스로서의 60년대를 바라보는 베르히만의 시선이다. '악마의 유혹' 3부작 <늑대의 시간>, <수치>, <정열>은 막스 폰 시도우를 자기반영적 페르소나로 등장시켜 예술가로서의 베르히만 자신의 회의에 가득 찬 자문자답이다. 이들 영화들은 모두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동세대의 베트남전과 문화혁명, 핵전쟁의 위기 학생운동과 내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것은 유럽작가영화들이 탈 정치적이라는 비판에 대한 베르히만의 응답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이후 지나치게 영화형식에 함몰되어 버린 베르히만은 <접촉>에서 거의 완전한 예술적 파산을 경험하고, 72년<외침과 속삭임>으로 다시 모더니즘과 실내극 양식으로 돌아와서 히스테리에 빠진 인간 심리의 내면으로 들어간다.
'디아스포라' 3부작 <얼굴 대 얼굴>, <가을 소나타>, <꼭두각시인형의 인생으로부터>에서 베르히만은 자신의 실존을 완성시키기 위해 죽음이라는 주제에 다시 파고들어 노쇠한 모더니즘의 자취를 살펴본다. 83년 영화와 연극, 그리고 TV작업을 병행했던 베르히만의 자전적인 영화 <화니와 알렉산더>는 베르히만을 규정지어온 모든 코드와 변모된 가치의 전복을 모두 배열시킨 낭만주의적인 노스탤지어 드라마이다. 여기서 베르히만은 그 스스로 영화적 상상력이 모두 고갈하였으므로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은퇴선언을 하였다. 그리고 처음 그가 출발하였던 연극에로 돌아갔다. 그 이 후 만든<리허설이 끝난 후>는 연극을 충실하게 영화매체로 담은 다큐멘터리이며, <화니와 알렉산더>의 속편인 베르히만의 부모에 관한 자서전 <최선의 의도>는 덴마크의 영화감독 빌 어거스트가 만들어 92년 깐느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았다. 베르히만은 46년에 데뷰하여 83년에 은퇴하는 순간까지 영화역사에서의 모더니즘의 흥망성쇠 과정을 지켜보면서 신에 대한 질문과 예술가로서의 회의를 담아내면서 동시대성을 항상 답지하고 있었던 북구의 시네아스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