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접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공화당을 지지하고 있는 《월 스트리트 저널》은 4일 존 케리 상원의원이 지난 20년 간 등장한 역대 민주당 후보들 가운데 가장 유리한 조건에 놓여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대선을 앞두고 분열됐던 민주당이 이번에는 유례 없이 단합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케리 의원이 유권자들에게 긍정적 이미지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뚜렷한 악재가 돌출하지 않아 케리 의원의 대중적 이미지는 지금까지는 좋은 편이다. 하지만 그의 앞길이 장밋빛만은 아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이 케리 의원에 대한 파상 공격에 나설 경우 그의 이미지가 손상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부시 대통령은 이미 유권자들에게 노출되어 있는 반면 케리 의원은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케리와 부시는 대학 선후배, 같은 학생 클럽 소속...인생 역정과 정치 노선은 정반대
두 사람의 인생 역정은 정치 노선만큼 차이가 난다. 케리 상원의원과 부시 대통령은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의 명문 대학인 예일대를 졸업한 동문이다. 1966년 정치학과를 졸업한 케리와 1968년 역사학과를 나온 부시는 또 대학 재학 중 '해골종단'(Skull and Bones)이라는 비밀 써클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172년의 역사를 가진 이 비밀 클럽은 매년 3학년 학생들 중 출신 배경과 장래 지도자가 될 만한 자질 등을 고려해 학생 15명을 선발, 신입회원으로 가입시켜왔다. 부시 대통령의 부친인 조지 부시 전 대통령도 이 클럽 회원이었다. 두 사람은 미국의 최고지도자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지만 대학 시절 서로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었다.(우측사진=존 F 케네디와 케리<1962년 8월 26일 나라간셋만 요트>)
이처럼 같은 학교 출신이지만 두 사람이 정치 지도자로 가는 과정을 보면 매우 다르다. 한 사람은 가문의 기대를 부응하지 못하다 정치에서 입문, 최고지도자로 올랐다.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정치를 통해 가문을 빛내려는 야심을 갖고 있으며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보수적인 텍사스를 대표한다면, 케리 의원은 진보적인 매사추세츠를 상징한다. 텍사스와 매사추세츠는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이념적 성향이 다르다. 텍사스 주지사를 연임한 부시와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으로 4선을 기록한 케리 역시 지역의 정치 성향을 대변하고 있다. 동부 출신이지만 남부에서 정치적으로 성장한 부시와 동부의 엘리트로서 워싱턴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케리의 대결은 21세기 초 미국의 정치 풍향을 가늠하는 시험무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부시, WASP의 대표적 인물...석유 사업가로 성공하기를 희망
부시 대통령은 할아버지가 코네티컷주 상원의원이었으며 아버지는 대통령을 역임한 말 그대로 정치가 집안출신이다. 부시는 매사추세츠주 북동부에 위치한 미국 최고 사립학교 중 하나이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다녔던 필립스 아카데미 앤도버를 졸업했다. 이 명문 고교는 뉴햄프셔주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와 함께 항상 최고의 사립고교 자리를 다툰다. 대학 시절 부시 는 반전운동이나 민권운동에는 무관심했고 정치에도 뜻이 없었으며 학업보다는 술과 연예 등 사교 활동에 열심이었다. 부시는 젊은 시절 조부와 부친의 희망과는 달리 오히려 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는 정치가보다는 사업가가 되기를 바랬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텍사스주 방위군에 입대, 조종사 훈련을 받고 예비역 장교로 임관한 그는 베트남전에 참전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텍사스주에서 석유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31세 때 하원의원 선거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사업 역시 실패를 거듭해 300만 달러의 빚더미에 올랐다. 부친은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거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나서 부통령에도 당선됐다.
부시는 1986년 40세 때 금주를 선언하는 등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적자 회사를 팔아치우고 프로야구 구단주로 성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친이 재선에 실패하자 그는 정치에 뛰어 들었고 텍사스 주지사를 연임하고 2000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부시는 부친이 실패한 재선에 도전, 가문의 역사를 새로 쓰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어렸을 적에 정치를 외면하고자 했던 부시는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정치에 몰입하고 있다. 특히 '전시지도자'라는 사명감과 책임감까지 느끼고 있다. 부시는 부친과는 달리 서민적이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실제 유권자들은 부시 대통령을 동부출신 귀족이 아닌 남부 텍사스에서 성공한 보통사람으로 생각한다.
케리, 유대인 출신...학창시절부터 정치에 대한 야심 가져
미국의 대표적인 지배계급인 와스프(WASP:앵글로 색슨계 백인 신교도)인 부시와는 달리 케리 의원은 미국 사회의 주류임에는 틀림없지만 WASP 계층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오히려 WASP의 일원이 되고자 노력했으며 현재는 그 일원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좌측사진=케리 의원의 베트남 방문)
케리의 부계(父系)는 유대인 출신이다. 성(姓)을 보면 아일랜드 출신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조부는 체코계 유대인이다. 조부 프리츠 콘(Fritz Kohn)과 헝가리계 유대인인 조모 이다 로베(Ida Lowe)는 1905년 유대인 박해를 피해 고향 체코를 떠나 미국에 정착했다 당시 조부 콘은 지도를 들여보다 아일랜드 케리 카운티를 발견하고 성을 케리라고 바꿨다. 이름도 프레드릭으로 고쳤으며 종교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조부 프레더릭은 시카고에서 비즈니스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자리를 잡은 후 매사추세츠로 이사했다. 조부는 당시 제화업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조부는 1921년 사업이 실패하자 보스턴의 한 호텔 남자화장실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럼에도 불구, 다행히 상당한 재산이 남아있던 덕분에 부친 리처드는 예일대를 졸업했으며 하버드대 로스쿨을 나왔다. 이후 리처드는 1940년 포브스가의 딸인 로즈마리와 결혼했다. 포브스가는 17세기 초 영국에서 보스턴으로 이주한 유서 깊은 집안이다. 리처드는 2차 대전 중 육군 항공대의 비행생도로 훈련을 받기도 했으나 병으로 참전하지는 못했다. 리처드는 종전 후 독일 주재 미국 고등 위원회(후에 미국 대사관으로 개편)의 법률 자문관으로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11세였던 케리는 스위스의 기숙학교에서 지냈으며 주말마다 서베를린에서 부모를 상봉했다. 외국 생활을 해야만 했던 리처드와 로즈마리 부부는 케리를 매사추세츠에 사는 이모 글라라 윈스롭에게 보냈다.
케리는 10대 때부터 정치에 대한 야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명문이었던 매사추세츠 콩코드 세인트 폴 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학생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이 학교 사상 처음으로 정치클럽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정치 토론이 벌어지면 항상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예일대에 진학하기 전 그는 케네디 대통령의 셋째 동생인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사무실에서 인턴으로 일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 재키 여사의 이복 동생 재닛 아우친크로스와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로드 아일랜드에 있는 재닛의 집에 놀러갔던 그는 우연히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으며 함께 요트를 타고 인근 바다를 항해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두 사람은 1년 간 사귀다가 헤어졌다. 케리는 학창시절 예일대 진보당 의장과 학생정치연합회 회장까지 지냈다.
케리는 절친한 친구이자 예일대의 동기인 데이브 쏜의 여동생 줄리아와 6년간 사귀었으며 이후 둘은 결혼했다. 쏜가(家) 역시 월 스트리트에서 금융업을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한 가문이었다.
특권계층의 자제로서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으나 그는 베트남전 참전으로 삶의 행로를 바꾼다. 은성무공훈장, 동성무공훈장 등을 받는 등 전쟁 영웅이었던 그는 전역후 반전운동가로 변신했다. 1972년 하원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그는 보스턴 로스쿨에 진학, 법조인의 생활을 한다. 검사로서 조직범죄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그는 1982년 마이클 두카키스의 러닝 메이트로서 매사추세츠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 부지사가 된다. 여세를 몰아 그는 1984년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 마침내 정치인으로서 대권의 꿈을 가질 수 있는 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그가 상원의원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게 된 계기는 1991년 베트남전 미군 실종자 및 전쟁포로실태에 관한 상원조사위원회의 위원장이 되면서부터다. 그는 17번이나 베트남을 직접 찾아가는 등 조사를 진두 지휘했다. 그는 이란 콘트라 스캔들, 노리에가 정권 마약거래 조사 등도 이끌었다. 그는 풍부한 의정 경험이 있지만 유권자들을 사로잡을 만한 카리스마와 친화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 있다.
2000년 대선 처럼 부시가 케리보다 유리할 수도
두 사람은 이처럼 대조되는 퍼스낼리티를 갖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와 관련, 정책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은 인간적으로도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2004년 3월 3일자 보도) 빈 웨버 전 하원의원(미네소타주)은 '케리는 부시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동부의 엘리트'라며 '뉴잉글랜드에 가문의 뿌리가 있지만 이를 스스로 거부했던 부시는 자신이 그렇게 싫어했던 부류의 사람과 대적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 말처럼 부시의 가문은 그를 똑똑하고 지적인 동부의 엘리트로 만들려고 했으나, 부시는 이를 거부하고 학창시절에 공부를 외면했으며 40세 때까지 부모 덕분에 편안한 삶을 살았다. 반면 케리는 학창시절부터 정치에 뜻을 품고 베트남전에도 참전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도 불구, 오히려 장교로서 참전했고 이후 반전운동을 통해 입신하는 등 치열한 삶을 살았다.
서로 다른 인생 항로를 달려온 두 사람은 건곤일척의 싸움을 할 수 없게 됐다. 유권자들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일단 지난 2000년 대선 때의 상황을 고려해볼 때 부시가 유리한 측면이 있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2000년 대선 때 앨 고어 민주당 후보에 비해 외교.안보 분야의 경험이나 지적 능력과 식견이 상당히 부족했으나 특유의 친화력과 보스 기질 등을 보여 유권자들의 호감을 받았다. 케리 의원은 베트남전 참전 및 18년에 걸친 의정 경험, 외교.안보 분야탁월한 식견 등이 장점이지만 친화력과 유연성이 부족하다.
미국 언론들은 케리 의원이 1996년 공화당 경선 때의 밥 돌과 같은 인물이 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돌은 공화당 지도부의 지지로 경선 초기부터 선두주자가 됐지만 막상 본선에서는 형편없는 후보였다고 지적했다. 또 1988년 당시 마이클 듀카키스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아버지 부시와의 대결에서 공화당의 공격에 소극적인 대응을 하는 등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해 패배한 바 있다. 미국 유권자들은 의외로 지적이거나 경험이 많은 후보보다는 리더십이 강하고 친근한 이미지를 주는 후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부재 등 거짓 정보 문제와 병역 문제로 신뢰를 잃기는 했으나 아직도 국민들에게 리더십에서만큼은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3일 케리 의원이 테러리즘에 우유부단하고 유약한 인물이라고 첫 포문을 열었다. 그는 '테러와의 전쟁에 회의적인 사람들이야말로 전쟁 그 자체'라면서 '케리 의원이 주요 문제에 대해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부시 대통령은 9.11 테러를 상기시키며 테러와의 전쟁 과정에서 '안정된 리더십'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케리, '나는 전사다'주류론 내세우며 강한 이미지 보여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케리 의원은 '나는 지난 30년 간 공정성과 미국의 핵심가치를 위해 싸워온 전사(戰士)였다'고 강조하면서 리더십을 내세우고 있다. 그는 '부시 행정부는 극단이고, 우리가 주류'라며 '11월 2일 선거는 우리가 주류의 편에 설 것인가, 부시 행정부가 추구해온 극단의 길, 우리의 역사와 희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갈 것인가를 심판하는 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주류론'은 1988년 듀카키스가 패배할 때 공화당이 사용했던 공격 방식을 다시 들고나올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우측사진=케리와 첫 부인 줄리아<1972년 하원의원 출마때>)
특히 케리 의원은 아직도 미국 국민의 가슴에 신화로 남아 있는 故 케네디 전 대통령의 이미지를 자신과 연결시키겠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케리 의원과 케네디 전 대통령은 매사추세츠 출신이자 상원의원, 해군 전쟁영웅이란 점에서 이력이 일치한다. 두 사람의 종교도 가톨릭이다. 두 사람 모두 미국 사회의 '주류'이지만 WASP는 아니다. 민주당도 '제 2의 JFK 대통령이 탄생할 것'이라면서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케네디가 리더십을 보여준 것처럼 케리도 미국을 잘 이끌어 나갈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케리 의원은 '불행하게도 신뢰성 없이는 '안정적인 리더십'을 줄 수 없다'면서 '무모하고 동맹국을 분열시킨 부적절한 외교정책으로 테러와의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한 부시는 명백히 국민들을 잘못 이끌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부시 VS 反부시의 첨예한 대립..리더십 대 신뢰성의 대결
이번 대선의 승자가 누가 될 것인지 예측하기는 아직 시기상조이다. 지난해 12월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을 체포했을 때만 해도 부시 대통령의 재선은 확실하다는 전망이 나왔었다. 하지만 올 들어 부시에 대한 지지율은 계속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는 반면 민주당 경선의 영향으로 케리의 지지율은 상승하고 있다. 미국 선거전문가들은 대부분 2004년 대선이 2000년처럼 박빙의 접전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부시 대통령이 집권한 후 미국 사회가 과거와는 달리 '50 대 50'으로 극명하게 갈라졌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이번 예비선거에서 높은 참여율을 보이는 등 '부시 타도'에 힘을 모으고 있다. 공화당도 이에 자극 받아 세를 결집하고 있다. 선거 때마다 경쟁 정당이 대립하는 건 당연하지만 공화당과 민주당간의 적대감이 극도로 고조되고 있는 것은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이다.
민주당원들은 요즘 ABB라고 쓰인 배지를 달고 다니고 있다. '부시가 아니면 누구라도 좋다'(Anybody But Bush)는 뜻이다. 케리 의원이 최종 후보로 결정된 것도 부시 대통령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민주당이 이번 대선에서 총력 투쟁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지난 2000년 대선에서 부시에게 대통령직을 도둑맞았다는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또 2002년 중간선거에선 공화당이 상.하원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했고 주지사까지 휩쓸었다.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은 이를 바탕으로 민주당을 완전히 코너에 몰아넣었다. 특히 9.11 사태 이후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은 사사건건 '애국주의'을 앞세우면서 정책을 입안했다. 민주당은 더 이상 밀릴 수 없다는 의식과 함께 부시의 재선 저지에 모든 힘을 쏟게 된 것이다. 때문에 이번 대선은 2000년 대선 때보다도 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미국 사회가 심각한 분열 양상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대선 까지는 8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았으며 앞으로 많은 변수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전체 유권자들의 45% 정도를 각각 지지 세력으로 확보하고 있다. 결국 10%의 부동층이 이번 선거를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선거 전략을 어떻게 짜고 이에 따라 적절한 정책을 제시하면서 유권자들을 효과적으로 설득하느냐가 관건이다. 특히 정책 분야에서의 대결이 막상막하의 양상을 보이고 있어 양측이 어떤 논리와 대의명분을 내세울 것인지도 매우 중요하다.
첫댓글 8개월전의 글이지만 오늘을 반추하는 좋은 내용이 되었으면 합니다.그리고 와스프의 원어는 [화이트 앵글로 색슨 프로테스탄티]입니다..미국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힘의 실체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