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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리기 전에 정리해두려구요.
독일의 낭만주의는 계몽주의를 비판하면서 시작되는데요. 18세기에 사회의 주요한 계급으로 성장한 부르조아는 왕권과의 연합으로 지배적인 세력으로 등장하고 결국은 프랑스대혁명으로 왕정을 전복하게 되는데요. 이 과정에서 부르조아들은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계몽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인간의 이성을 경제적 유용성만을 따지는 기계적 사고로 변질시켜가게 됩니다. 이제 소수의 부르조아가 대다수의 민중을 지배하게 된 거지요.
독일의 낭만주의는 영국의 산업혁명, 그리고 프랑스의 대혁명을 지켜보면서 이제 계몽주의의 몰락을 느낀 상태에서 시작된 거지요. 낭만주의는 시민사회, 부르조아지에 대한 최초의 비판으로 시작했던 거지요. 괴테는 시대의 심연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 그를 또한 근원으로, 새로운 탄생을 알리는 지점으로 인식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계몽주의가 독일의 경건주의를 만나면서 낭만주의로 나아갔다고 보고 있습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낭만주의는 계몽주의가 무시했던 인간 본성의 비합리적이고 감성적인 측면을 부활시키고 여기서 나아가 그것을 좀더 높은 윤리적 이성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의 참다운 완성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초기의 부르조아 가정에서 가정의 따뜻함을 느꼈던 것처럼 인간 내면의 생활, 그 깊이를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부르조아들은 타락했고 초기의 건강함을 잃어버렸던 거지요.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보편적인 사람의 권리로 인정하지 않았고 자신들만을 특수한 계층으로 여겼던 거지요. 승리감에 취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을 모방하고자 했고 이제 사회는 모든 것이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로 나아가게 된 거지요. 부르조아는 대체로 도시에서 자유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나중에는 상업, 법률, 행정직의 전문직으로 나아갔다고 하지요. 즉, 땅에서 먹을 것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인 것 같은데요. <고양이 대학살>에 보면 부르조아들이 나중에 어떻게 타락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데요. 그들은 더이상 부지런하고 이성의 빛으로 사물을 비추는 사람들이 아니게 된 거지요.
그 영향은 아이들에게도 미쳤을 것 같은데요. 처음에는 따뜻한 가정의 보호 아래 근원적인 순수성을 찾아가던 아이들도 그런 부모세대의 변질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그것이 교육에 반영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세습했고 여기서 불평등이 다시 태어났다고 보는 사람도 있더군요. 아마도 옛날 <초원의 집>을 보던 사람들이라면 기억할텐데 그 읍내에 있던 가게집 딸 일라이자였던가요. 그 아이의 눈빛, 태도, 말들을 보면 전형적인 부르조아 가정의 아이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땅을 떠난 사람들은 땅의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일까요.
여기에 반기를 든 것이 바로 낭만주의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낭만주의는 물질과 정신의 결합을 추구하니까요. 사람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좀더 완전한 내적 세계를 추구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것만이 아니라 세상과의 연대 또한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내면과 외면이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해가는 존재로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하나의 개인은 이제 완전한 존재로서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개인들의 내면의 깊이를 인식하게 된 거지요. 수동적인 존재이던 개인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로써 신과 같은 완전한 이성의 빛으로 세계창조에 동참해가는 존재가 된 것이지요.
존 로 타운젠드가 얘기한 것처럼 하나의 시대적 징후로써 낭만주의는 시작되었던 거지요. 낭만주의 또한 그당시 유럽사회에서 혁신적인 사상이었다고 합니다. 18세기에는 모든 것이 분화되어 전문성을 띠게 되는데 이는 프랑스의 합리주의의 영향이라고 합니다. 데카르트의 분석이성은 모든 것을 잘게 잘게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라구요. 이런 전문성의 폐해는 현대에도 마찬가지인데요. 낭만주의자들은 그래서 고대, 중세의 총체성, 대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독일의 낭만주의는 문학, 예술의 각 영역, 그리고 정치 사회면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고 영국, 프랑스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어린이책의 역사>에서 얘기하던 고딕양식의 부활이라는 걸 저는 이해하지 못했었는데요. 인성기씨의 논문에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어서 옮겨보겠습니다. 관심있으신 분은 이 논문을 한번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유럽 계몽주의와 독일 낭만주의>입니다.
독일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높은 탑과 뾰족 지붕의 고딕 양식건물들은 19세기에 독일낭만주의자들의 낭만적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고딕양식은 고대의 완결된 형식미를 떠나, 본원적인 것의 깊이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중세때 문화의 불모지이던 북부 독일에서 시작되어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된 뒤에도 독일에서는 17세기 중엽까지 계속 선호되었으며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다시금 부활해 수많은 성당들이 개축 또는 신축되었다.1) 쾰른 대성당의 재건축은 그 대표적인 예였다.
르네상스의 건물들의 수평선 구도가 안정감을 준다면, 고딕 건물들의 수직선은 중력을 거부하고 하늘로 치솟는 정신성, 영혼성을 대변했다. 고딕식 성당은 익명의 중세 건축가들의 종교심의 발로였다. 수직선은 그야말로 신과 천국을 향해 솟아올랐을 뿐 아니라, 그 높은 형상자체로 존재의 다른 차원을 시각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2)
고딕 성당의 내부 형태 역시 무한자에 대한 알레고리로 설계되어 있었다. 내부 평면도의 기하학적 구조는 신의 세계를 상징했었다. 좌우에 깊은 벽감이 있어 심오한 깊이를 강조했고, 하늘에서 내려다 볼 때는 십자가형으로서 그리스도의 신체를 상징했다. 자연채광을 중시하는 르네상스 건물과 대조적으로, 고딕 성당은 두터운 벽으로 외부와 차단되어 있고, “신앙의 광휘를 발견하는 느낌을 주기 위해” 외부 장식보다 내부 공간의 구성을 중시했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한 빛은 집중성과 분산성의 효과로 그런 느낌을 강화시켰다. 고딕 양식은 유한한 예술수단으로 무한한 존재를 표현하고자 하는 낭만주의적 열망의 표현이었다.
빈 근교 벨베데르(Belvedere)궁의 구조에서도 우리는 그런 알레고리 예술관을 확인할 수 있다. 정원과 본관의 미로(迷路)는 절대자를 향한 도정에 있는 인간행로에 대한 알레고리였다. 진리는 추구해서 발견해야 하는 미지의 것이었다.
논문 가운데 그림형제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요. 또 옮겨보겠습니다.
낭만주의는 세계 탐험중에 동화, 전설, 민요의 세계를 발견했다. 계몽주의의 퇴색한 학문에 비교해 볼 때, 이 세계에는 민중의 원초적인 힘이 살아 있었다. 그래서 아르님과 브렌타노는 민요집 소년의 기적 뿔피리 Des Knaben Wunderhorn (1805)을 편찬했다. 환상의 예술 세계로 산문적 현실의 한계를 돌파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림 형제는 자신들의 동화 편찬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방에서 불어 오는 바람이 정치가들의 머릿속에 옛 먼지를 불러 일으키고 다시 내몰아내기 때문에 그들이 세계를 15분만에 열번씩 계몽과 몽매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도록 하는 동안에, 나는 어린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 수공업자들의 편력은 제한되어 있거나, 적어도 위축되어 있으며, 낯선 나라에 군대를 파병하는 일도 요즘은 완전히 중단되어 있고, 대학생들에게는 조국 땅의 도처에서 지혜를 짜내려 이용하려 하므로 미리부터 국외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 반면에 낯선 것을 전력을 다해 받아들이고, 이로써 토착적인 것을 균형잡는 일은 자유로운 시대의 최고의 업적이 될 것이다.
사실 그림형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페로가 동화를 모으고 출판한 것과는 아주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페로는 부르조아로서 그 당시 자신이 필요로 했던 것을 옛이야기 속에서 보아냈다면 그림형제는 그보다는 좀더 근원적이고 정신적인 힘을 보아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부르조아가 아니라 민중들 속에 살아있는 원초적인 정신성을 옛이야기속에서 보았던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것을 되살리려 하고 있는 것이지요. 페로가 옛이야기의 주인공들에게서 수동성을 보았다면 그림형제는 옛이야기속의 인물들에게서 세계를 인식하고 자신의 삶을 창조해나가는 능동적인 존재를 보았다는 것이지요. 만약 이야기를 고쳤다면 이러한 인식과 세계관의 차이가 반영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18세기에 사람들이 주고받은 옛이야기 속에는 지금은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의 성과 폭력, 잔인함, 죽음에 대한 묘사들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중세시대의 농민들은 아주 비참한 생활을 했다고 하지요. 굶어죽는 사람들도 속출했고 입 하나라도 덜기 위해 집을 떠나 세상을 방랑하며 거지도 되고 산적이 되기도 했다구요. 길에 널려있는 건 시체였고 도둑이나 강도를 만나는 건 일상적인 일이었다고 합니다. <고양이 대학살>을 보면 이런 정경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그들이 주고받던 옛이야기에는 이러한 그들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고 보는 거지요. 이 점에 대해서는 완전히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긴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의 의식 또한 반영되어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하겠지요.
사회가 이렇게까지 된 것은 무슨 까닭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18세기 프랑스는 절대왕정의 시대였고 부르조아의 약진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귀족들은 점차로 몰락해갔고 마지막 반격을 준비하고 있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귀족들은 장원을 소유한 영주들이었지만 그들의 재산은 점차 왕권에 귀속되어 갔지요. 부르조아들에 의해 도시화와 근대화가 진행되었고 농촌은 점차 몰락해갔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농민들을 지탱해준 것은 이야기였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보는데요. 그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찾아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이야기를 덧붙이기도 했겠지요. 또는 빼기도 하고. 하지만 이들을 지배했던 정신은 합리주의였습니다. 이 점 또한 그 나라의 이야기를 이해하려할 때 고려해야 할 점인 것 같습니다. 무엇이 그 이야기를 그렇게 표현하도록 했을까 하는 점도 그렇지요. 왜 성과 폭력을 주요한 코드로 삼았던 것일까요.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요. 그림형제의 동화들을 읽어보면 아주 세련되게 그리고 정성껏 손질되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다른 나라의 이야기들은 좀더 생명력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거칠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아무튼 좀더 많이 공부해야 할 필요만 잔뜩 느낍니다. 그림형제의 작업은 그래서 낭만주의의 영향아래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세계 인식의 차원에서 이런 수집이 이루어졌고 정신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성장과 발달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들의 가치를 인정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계몽주의에 의해 발견된 어린이 또는 어린 시절의 순수성, 근원성을 인정하고 돌아가고자 하는 바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단턴은 그림형제의 작업을 약간 폄하하는 말을 하고 있는데요. 저는 그것보다는 깊은 배경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쓰다보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선생님이 공부하라고 하신 대로 잘 따라가 보려고 하는데 잘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네요.
첫댓글 나카자와 신이치가 쓴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을 보니 페로와 그림형제의 <신데렐라>를 견주어본 내용이 나오더군요. 신이치에 따르면 <신데렐라>는 신화적 사고에 따라 쓰여진 민담인데요. 그림형제의 <재투성이 아센푸텔>이 훨씬 신화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고 신화적 사고에 충실한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림형제는 구전되던 이야기가 문자로 기록될 때의 미묘한 차이를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 그래서 채집한 이야기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하네요. 하지만 처음 출판한 것과 나중에 출판한 것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은 역시 손을 좀 보았다는 뜻인데요. 그래도 신화적 사고에 충실하게 고쳤다고 봐야겠지요.
페로의 <신데렐라>는 여러 판본 가운데서도 가장 전달하는 메시지가 적다고 하는데요. 그건 근대인들이 신화적 사고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법의 지팡이를 휙 휘두를 필요가 생기는 거라구요. 신화적 사고를 하던 고대인들보다 근대인들이 논리적으로 더 미숙했다는 애기지요
이건 신이치의 견해였구요. 저는 페로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고친 것은 계급적 이해가 바탕에 깔려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좀더 공부해 봐야겠어요. 근데 신이치의 책들이 참 재미있거든요. 답답한 구석도 있긴 하지만 신화를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네요. 읽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