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반부 서론에 했던 언급을 다시 반복할 필요를 느낀다.
로마군은 기본적으로 3세기에서부터 시작되어 내려온 전술 방향은 큰 변화가 없었다.
로마 보조병 (장창, 장검) 의 전술에 덧붙여진 페르시아식 전술의 모방 (경장 기병, 중무장 기병의
적극적인 활용, 종심 방어 중시)은 이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을 처음으로 당할 때까지는
크게 변한 것 같지가 않다.
마우리키우스 - 헤라클리우스 개혁
종전의 문무관 분리 제도가 전면적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한 속주의 군사와 민사를 통합하는
단위 (테마)와 그것을 총괄하는 스트라테고스 (군관구장) 가 마우키리우스 때부터 처음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기존의 총독과 보병 총감, 기병 총감 따위의 조직은 여전히 존재했고, 군관구제로
운영되는 지방과 기존 행정 조직으로 운영되는 곳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여하튼 마우리키우스가 종전의 문무관 분리 제도를 재평가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이는 기존의 군제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개혁의 물꼬를 튼 것이기 때문이다. 마우리키우스는
황제 자리를 수성하지 못했다는 점만 빼면, 한 사람의 행정가로써는 굉장한 수완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흡사 광해군을 연상케한다.)
마우리키우스의 아이디어는, 페르시아의 약진으로 위기에 처한 헤라클리우스 때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채택이 되기 시작한다. 이에 이르러 제국은 종래의 용병 제도를 버리고, 테마의
농민병들이 스스로의 무기로 스스로를 방어하는 체제로 개편을 가속화했다.
한편 중앙 수도에는 상비군으로 유지되는 중앙 군대, 타그마타가 조직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원수정 로마의 군제와 3세기 때부터 내려온 종심 방어 전략 개념이 절충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보병의 무장은 저 테오도시우스와 스틸리코 때의 '로마군'에 비하면 상당 부분 양호해졌다.
유스티니아누스 패치
그러나 헬라클리우스와 마우리키우스의 개혁이란 것에는 중요하게 미비되어 있는 것이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그것보다 더 좋은 개혁이 없었으나, 실질적으로 채워넣을 "내용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것은 바로 "돈"과 "사람"이었다. 마우리키우스는 저 "돈"때문에 허접한 포카스 따위에게
넘어지고야 말았고, 헤라클리우스는 "사람"의 부족으로 기껏 지켜낸 제국의 절반을 거덜냈다.
제국으로써는 바로 "유닛"의 보충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것은 헤라클리우스 가문의 황제들에 의해 수행되게 된다. 그 유명한 "사민"정책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 황제가 이것의 달인이었다.
그는 기존 아나톨리아의 그리스인들 일부를 펠레폰네소스 반도로 이주시키고, 펠레폰네소스와 발칸 반도의 슬라브 혹 게르만계 주민들 일부는 아나톨리아의 사라센 접경 지대로 옮기며, 아르메니아 계들은 또 마케도니아와 발칸 반도 내지는 아나톨리아 서부 인근으로 옮기는 등 제국 내의 주민 성분을 마치 믹서기 마냥 휘저었다. 이것으로 마우 - 헤라 체제는 과거 테오도시우스 체제 때부터 내려오던, "통제 안되는 내부 야만족"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동시에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돈"의 보충도 중요시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정책 덕택에 마우 - 헤라 체제는 내용물이 채워지게 되었으나. 유스티니아누스는 백성들이 "유닛"이 아니란 점을 까먹고 있었다. (군대 행보관들이 흔히 저지르는 잘못이다.)
미친 듯이 세금을 올리고, 사람을 잡아다가 여기저기 조리 돌리며 군사 낳는 기계 취급을 하니 백성들이 이런 극단적인 조치에 순응할 리 없었다. 흡사 아시리아의 가혹한 사민 정책을 연상케 한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결국 파멸하고 헤라클리우스 왕조도 무너졌지만, 이후에 이 왕조의 뒤를 이른
왕조들은 모두 저 사민 정책의 결과로 인한 자식들이었다. 이사우리아 왕조란 것은 저 사민정책으로
옮겨졌던 게르만 계 주민이 조상이었으며, 아모리움 왕조도 원래는 아르메니아계였다. 마케도니아
왕조도 마찬가지.
이후의 비잔티움 왕조들은 모두 저 "돈"과 "사람"의 충원을 기본 목적으로 하였다. (기본적으로는
유닛 관리의 체계화이다.) 이 유닛 관리의 달인이 바로 후세에 유명한 바실리우스 2세다.
니케포로스 포카스 패치
감히 말하건데 장군으로써는 이 자가 바실리우스보다 더 뛰어났을지도 모른다.
그가 장군으로 때 비잔티움 군대는 극도로 단련된 전쟁 기계로 탈바꿈되었다.
그러나 슬슬 이 체제에도 바이러스가 침투하게 되었다. 게다가 군사 귀족들과 중앙 타그마타만을 우선시하는 니케포로스 패치는 이 바이러스에 더욱 취약하였다.
귀족들의 토지 겸병 및 중소 농민층의 몰락이라는 바이러스였다. 한때 백신 바실리우스 2세가 투입되어 이 바이러스를 한 번에 치료하였으나, 이후의 바보같은 황제들 그리고 평화에 안주한 무리들의
한심한 작태로 말미암아, 제국의 우수한 군제는 점점 무너지고야 말았다.
안 좋은 전례도 똑같이 로마로부터 물려받았던 이 제국은, 공화정 말기의 혼란상과 3세기의 혼란상을 동시대에 함께 겹쳐서 나타내게 된다. 그예 이후의 제국은 그전의 자율적인 군제 개혁과는 달리, 타율적인 모습을 자주 보여주게 된다.
1071년 만지케르트 쇼크 => 시스템 다운
(종말부에서 계속)
트레드골드에 따르면 아르메니아-이베리아의 군대는 '놀고 먹는 군대'가 아니라 최근 투르크인과의 교전을 통해 '실제로 싸우는' 군대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일단 트레드골드 역시 병사 해산조치는 '필요하다'라고 했지만, 콘스탄티노스의 방식은 '무엇을 해산해야하고, 무엇을 해산하지 말아야할지'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거죠. 즉, 이미 상비군이 군의 주력이 된 국경 테마, 해군 테마, 타그마쪽에는 적용했어야 했지만, 이것이 남부 이탈리아와 아르메니아까지 확대 적용되면서, 동방과 서방 양쪽 모두에 치명적인 부작용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메소포타미아를 공격한 투르크인의 규모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메소포타미아 자체가 주력 테마도 아니고(규모도 썩 많지 않고, 이 지역은 오랜 평화로 군대 훈련도 떨어졌으며), 아르메니아에서 테마 병사들이 받았전 지형적인 이점을 잘 살릴 수 있는 지세도 아닙니다. 테오도시우스 때부터 상류 유프라테스는 제국 방어의 약한 고리를 이루고 있었고 메소포타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따져보면 투르크인을 가장 잘 저지할 수 있었던 지역은 아르메니아이고, 이 아르메니아 방어선이 붕괴한 시점은 1054년, 즉 1053년 테마병사들을 해산시키고 그 지역 방어를 타그마타와 용병부대에 위임한 시기와 맞물립니다.
정리하자면, 1048년의 성공적인 방어사례의 예시로 볼 때, 이미 아르메니아의 테마 둔전병들은 실제로 군역을 지고 있었고 이를 잘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평지라면 몰라도, 산지가 많고 요새가 뿌려져 있으며, 무엇보다 제국 최정예 테마를 제공하는 아르메니아의 사정은 메소포타미아와는 다르게 봐야합니다. 이 상황에서 콘스탄티노스가 해산시킨 둔전병은 [놀고 먹는 병사] 외에 [실제로 싸우는 병사]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해 세금을 높여 용병대를 고용한 뒤, 아르메니아 수비를 맡겼으나, 결과는 테마가 수비하던 때와는 다르게 아르메니아 방어선 붕괴와 그에 따른 일련의 동방 테마 붕괴입니다.
테마 둔전병으로서 아르메니아 방어를 맡았을 일부 군대들은, 로마노스 4세의 시기까지도 아르메니아에서 싸우면서 투르크와 제국의 완충지대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서방 페체네그의 위협도 1026~27년까지 콘스탄티노스 디오게네스의 지휘하에 제국군은 이를 격파한 바 있었습니다. 32~36년까지 페체네그의 침입도 있지만, 페체네그의 침입이 더욱 치명적으로 다가온 것은 토르니키오스의 반란과 그에 따른 서부 테마가 타격을 받은 이후입니다. 양쪽 모두 테마의 붕괴가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죠.
콤네노스님 말씀대로 테마의 전투력 향상, 그리고 상비군의 증강 요구가 꾸준히 이루어져왔음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전시에 어느 정도의 훈련과 경험만 있다면 테마의 둔전병들은 '최소한' 방어전에 있어서는 자기 능력을 잘 선보여 왔습니다. 아르메니아나 아나톨리아의 테마 병사들은 꾸준히 공격에도 동원되었으며, 테오도시우스나 레오의 개혁 이후에는 테마의 병사들도 용병보다는 못해도 상당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합니다.
효율성이라면, 분명 전투력 자체는 테마는 용병보다 떨어집니다. 하지만 클라우제비츠가 말했든, 전쟁에서 '머릿수' 자체가 주는 장점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그만큼 '머릿수'를 동원하는것 만으로도 쓸데가 많으니까요. 최대한 병참을 줄여야 하는 공격전이라면 몰라도, 방어전에서 이들은 여러 요새에서 배치되기도 하고, 이들 덕분에 깊은 종심 방어와 다양한 작전수행도 가능합니다. 1054년 용병에 의존한 아르메니아 방어선이 붕괴되자 2,3차 방어가 불가능해진 제국은 순식간에 상류 유프라테스까지 쫓겨났고, 평상시 같으면 패배했더라도 후방에 남아있는 둔전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어야 할 shadow tactics 역시 좌절되었습니다.
굳이 사이프의 예를 든 것은, 페체네그인이 발칸까지 내려왔다고 하여 그것이 제국군 방어체계의 무력함을 상징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슬람, 사이프는 물론, 사무엘의 군대는 펠로폰네소스까지, 클레이디온 전투 이후에도 불가르 약탈대의 일부도 콘스탄티노플 인근까지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하지만 위 사례가 제국 방어체계가 총체적으로 무력했다고 할만한 증거가 되지는 못하지요. 페체네그인의 습격은 빠른 기동과 약탈에 의한 것이지, 이 전투에서 특별히 제국군의 대군을 격파했다거나 하는 실적이 없고, 본질적인 지배권을 흔들지도 못했다면, 이를 '방어체계의 무력함'과 연관짓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메소포타미아와 1071년 붕괴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를 띄고 있습니다. 콤네노스님께서 이야기하신 정치적 불안정과 요새 넘겨주기도 큰 문제가 맞지요. 하지만 아르메니아의 경우를 볼 때, 테마가 보다 잘 조직되어 있고(지형상, 그리고 평화와 권귀의 세력확대로 무력화된 메소포타미아, 혹은 기타 테마와 차별되게), 로마노스 디오게네스가 계획했던 대로 테마를 재조직시킬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면(역으로 테마 둔전병 체제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면) 동방 방어체계가 그리 쉽게 무너져 내리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음, 이제 곧 기말고사라는 개인적인 사정도 있고해서-_-;; 한 번 논쟁을 하려면 한 시간이 넘어가는 이런 고급 논쟁을 계속하기는 힘이드는군요;; 콤네노스님의 고견은 잘 들었고, 제 부족한 점을 메꿔주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런 드문 토론 자리를 만들어주신데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배...백플이다... 귀찬싸 공께서 두분 모두 궁형에 처할지도...ㄷㄷㄷ;;;
게볼공의 테마제의 역량에 대한 견해는 저도 같은 생각이지만, 콤네님의 제국의 용병들의 역량에 대한 논의도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군요. 올만에 좋은 논쟁 잘 봤다능~.~
어휴...두분다 내공빨이 쪄네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