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상세하게 강이식 장군에 대한 자료조사를 한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자료 고맙습니다.
질문한 강이식 그분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라는 문제는 참 어렵습니다. 여기서는 냉정하게 판단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그 분에 대해 전해오는 자료는 크게 족보와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두 가지로 나누어지고 있는데, 조선상고사는 대동운해 등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자료를 근거로 하고 있어 사실 여부를 판단하기 힘듭니다. 또 강씨 족보라는 것이 1450년 처음 나왔다고 하지만, 이것은 전해지는 자료일 뿐이며, 남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 우리나라 족보는 문화유씨 족보를 시작으로 16세기 이후에 쓰여진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특히 족보에서 선조에 관한 기록은 대체로 신빙성이 있는 자료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시조를 신성시하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강씨족보를 근거로 강이식 장군을 국사교과서에 이름을 올릴 수는 없습니다.
강이식 장군에 대한 전승 가운데 수나라 도원수로 있다가 망명했다는 것은 특히 믿기 어려운데, 이것은 조상을 중국계에서 찾으려는 조선시대의 일반적 경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조상이 중국인이라면 더 대접해주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지금 미국교포가 연변동포보다 더 대접받듯이 말입니다. 만약 강이식이 수나라 사람이었다면 수나라 군대를 물리친 것은 수의 입장에서는 배신자겠지요.
현 단계에서는 강이식을 고구려 인명사전에 넣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598년 전쟁에서 분명 수나라는 고구려 군대의 습격으로 패배를 했고, 그때 고구려 장군의 이름이 강이식이라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양만춘도 고구려 인명사전에 넣어서는 안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소설이나 드라마 등에서는 강이식이나 양만춘 모두 다 사용해도 무방합니다. 또 이런 전승이 전해진다고 주를 달거나, 전제를 제시한 후 강이식 이분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다만 아무런 전제 없이 논문이나 역사서에 기록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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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강이식 장군은 신채호님이 <대동운해(大東韻解)>와 <서곽잡록(西郭雜錄)>를 인용해 <조선상고사>에 기록해서 알려진 인물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강이식 장군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엠파스에서 '강이식'이란 키워드로 검색을 했더니 138개의 검색결과가 나오더군요.
그중에서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에서는
중국인 예부랑(禮部郞) 문성(文星)의 아들이다. 수(隋)나라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있을 때 정적의 모함으로 고구려에 귀화하였으며, 그 후 고구려 도원수로 많은 공을 세웠다. 597년(영양왕 8) 수나라 문제(文帝)가 침략의 야욕을 품고 무례한 국서(國書)를 보내오자, 도원수로서 정병 5만을 인솔하고 임유관(臨楡關)을 정벌하여 수나라 군사 30만 명을 단번에 격퇴하고 개선하였다. 603년 수나라 양제(煬帝)가 다시 200만 대군으로 쳐들어 왔을 때에도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고 요동성(遼東城) ·살수(薩水) 등지의 싸움에서 수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라고 나오더군요.
그런데 수나라 망명인 이란 말은 처음 들었습니다.
검색결과들을 잘 뒤져보니 15~16세기에 들어 강이식에 대해 기록된 글 중에 수나라 사람이었다는 말들은 있더군요.
1685년 남한보가 간행되기 이전에 각 문중에서 보관해 오던 조상님들의 행장이나 비문에 시조님(강이식)의 휘자가 처음 기록된 것은 사인(舍人) 신재 최산두(崔山斗 1483∼1536)가 지은 대사간공<휘열(烈)>의 행록이다.
행록은 다음과 같다.
遠祖姜以式爲隋元帥伐高句麗因留東國
원조(遠祖)는 강이식(姜以式)이니 수 나라 원수(元帥)로 고구려를 토벌하고 동국(東國)에 머물렀다
강씨의 본관은 문헌상으로 114본이 전한다. 그 중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진주·금천·안동·배천·해미·동복·광주 등 7본의 시조가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강씨는 대부분 진주 강씨에서 갈라진 것이 확실하다.
오늘날 강씨는 고구려 때 도원수를 지낸 강이식(姜以式)을 도시조로 삼는다.
진주 강씨는 다섯 파로 대별되는데, 그 중에서 인헌공파는 파조인 강감찬(姜邯贊)의 출생지가 금천(衿川)이라고 하여 금천 강씨라고 불리기도 한다.
강씨는 아득한 옛날부터 진양 지방(진주)에서 하씨(河氏)·정씨(鄭氏)와 더불어 '진양3성'으로 일컬어 오는 전통적인 영남의 명문이다.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 227,097가구에 958,1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이식을 시조로 하고 진주를 관향으로 삼기는 것은 신라말에 태중대부 판내 의령을 지낸 강진으로 부터 비롯되었다더군요.
강진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845∼860년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숭인전(崇仁殿) 사운과(四韻科)에 장원으로 급제<당나라 임금이 안동(평양)지방에 준재를 발탁하기 위해 설과>하여 태중대부(太中大夫) 판내의령(判內議令)을 역임. 시호는 정순(正順)이며 진양후(晋陽侯)로 피봉(被封)되어 이로부터 관향(貫鄕)을 晋州로 득본(得本)했다 한다.
저는
강이식장군이 강문성(姜文星)의 아들이며 수나라 병마원수로 있다가 망명한 것 사실일까 란 점과
족보에 전해지는 강이식 - 강운기(姜雲紀) - 강수손(姜秀孫) 로 이어지는 이름들이 고구려 인물 D/B에 들어갈 수 있는지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