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era (January 10, 1954 - ) is South Korean-born popera singer.
Her music style was that of pop opera (similar to pop symphony yet with more techno beat). She created the style of "popera." Her music career stage was in Europe, mostly in France & Spain. Her first album was in 1985 titled, "the Lost Opera."
1980년대 중반 우리나라의 김홍희가 키메라 (Kimera) 라는 예명으로 오페라 아리아를 대중적으로 편곡하여 잃어버린 오페라 The Lost Opera 라는 앨범을 출반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적이 있다. 이를 전후로 성악가와 팝뮤지션들이 앞을 다투어 오페라 아리아를 편곡하여 부른 여러 음반들을 출반하였다.
키메라는 서울 동덕여고를 졸업한 후 프랑스로 유학, 1984년에 프랑스 파리 제7대학을 졸업하여 유학 중에 만난 레바논의 거부 레이몬드 나카치안씨와 결혼하여 프랑스로 귀화하였다.
그녀의 음악 스타일은 비록 시기가 매우 빠르긴 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새로운 음악시장의 가능성을 미리 예측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1985년에 키메라의 더 로스트 오페라 라는 오페라 아리아 모음앨범이 발매되면서 프랑스 전역을 강타하였고 프랑스 유력지 르몽드지가 1면톱으로 내보낸 기사에 헤드라인 '한국에서 온 팝페라의 여왕' 이라면서 오늘날 팝페라 라는 칭호가 가장 먼저 사용되었다.
당시 그녀의 인기는 유럽을 강타하여 골든 플레티넘을 넘을 정도였으며 실제 당시 유럽 성악가들은 잊혀져 가는 오페라를 다시 살렸다고 키메라에게 공공연히 감사를 표했을 정도였다.
그녀의 음반은 팝페라임에도 불구하고 런던 심포니와 함께 작업을 하는등 여러가지면에서 음반 자체의 완성도를 높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재미있겠도 이것은 상업적인 음반 출반의 목적이 아니라 엄청난 거부였던 그녀의 남편이 그녀의 대학졸업과 딸 멜로디의 출산에 대한 축하선물이었다.
원래 정통 오페라 집을 녹음할 계획이었으나 남편이 락 애호가였기에 이를 맞춰 편곡했고 그녀는 별로 맘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녹음에 착수하였지만 당시 거물급의 지휘자와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정통클래식이 아닌 락리듬을 연주했다는 것은 금세 언론의 뉴스거리가 되고 곧이어 밀려드는 상업적 출반 요청에 따라 음반을 내놓고 결과는 말 그대로 대박. 프랑스 음반차트의 톱을 단숨에 거머쥐고 유럽이 온통 락오페라 열풍에....그리고 키메라는 계획에도 없던 가수활동을 시작했고 3장의 음반을 내며 연속 대박, 그녀가 음반을 내고 싶었던 이유는 사실 어렸을적 성악을하고 싶었으나 광대짓은 절대 못시킨다는 부친의 완고한 고집으로 접었던 꿈을 실현하고자 하였던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친으로부터 사정 사정하여 얻은 프랑스 유학 자리로 불문학을 전공하였고 당시 아르바이트하다가 그녀의 남편을 통역하다 만나게 된다. 음악 애호가였던 그녀의 남편은 우연히 사무실TV에서 나오는 오페라를 따라 부르는 김홍희씨 모습에 반하여 청혼하게 되고 결국은 말그대로 억억 거리는 부호에 아내가 된다.
덕분에 그녀의 앨범의 제작은 당시 약 25만달러라는 거금을 들여 제작했다. 어쨌거나 88올림픽 이전 한국이란 미개한 나라의 이름도 모르던 유럽의 현실에서 그녀는 당당하게 한국이란 이름을 널리 홍보하게 해주었고 실제로 그녀 또한 그녀의 짙은 눈썹 화려한 복식을 우리 옛 벽화 등에서 나오는 문양과 인물에서 따 한국을 널리 알리는데 일조했다.
그녀가 갑작스럽게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은 남편의 스페인 별장으로 여행을 갔다가 그녀 유명세와 남편의 부를 노린 납치범들에게 딸이 유괴당하는 사건이 발생, 당시 그때의 충격으로 그녀는 조용히 가정으로 돌아가버렸다. 만약 그녀가 한 가정의 아내로 어머니로 조용히 살지 않고 계속해서 활동을 해왔다면 오늘날의 팝페라 시장이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그 누구도 장담 못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키메라의 음반을 국내에서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지만 팝페라의 창시자로 첫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그녀의 이름을우리는 기억해야하지 않을까 한다.
그녀의 앨범은 총 다섯장이 발매되었고 1집 '더 로스트 오페라', 2집 '오페라익스프레스', 3집 서울올림픽 성공의 염원을 담은 '마칭 포 에버', 4집 크리스마스 앨범인 '칸타 노엘', 5집 은퇴 앨범인 '어머니' 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낯설지 않게 다가온 단어 팝페라 (Popera)는 팝(pop)과 오페라(opera)를 합성한 단어이다. 안드레아 보첼리, 플립파 죠르다노, 사라 브라이트만 등의 스타들이 활동하고 있는 팝페라의 영역은 슈퍼스타(superstar)가 부재(不在)한 클래식 음반시장을 이끌며 인기를 높여가고 있다.
과연 '팝페라'라는 말은 언제부터 사용되었으며 팝페라'라는 영역을 개척한 아티스트는 누구일까?
1997년에 워싱턴포스트지가 만들어낸 말이라는 이 '팝페라' 라는 용어는 클래시컬 오페라를 팝 스타일로 부르거나 팝과 오페라를 넘나드는 음악 스타일, 또는 대중화한 오페라를 가리키는 말로 유럽이나 일본에서는 매우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이기도 하다.
음반사의 상업적인 기획과 한번쯤 외도 하고픈 아티스트의 호기심이 맞아 떨어져 팝이 클래식처럼,클래식이 팝처럼 연주되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하지만 여성 보컬에 있어 팝과 오페라의 크로스오버를 하나의 독자적인 장르로 굳혀 놓은 것은 사라 브라이트만이라는 견해도 있고 시각 장애인으로 스타가 된 안드레아 보첼리가 이러한 역할의 중심에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사실 이 두 스타는 팝페라 시장에서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고 있는 거물이기도 하다. 한국 출신의 세계적인 소프라노인 조수미도 [온리 러브]라는 앨범을 통해 이러한 대열에 동참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