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일입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는데 택시기사가 “법원에서 근무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근무하지는 않지만, 일하고는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부터 그 기사는 “판사들은 모두 변호사에게 돈을 먹고, 판결은 변호사 뜻대로 이뤄진다.”며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다가 저도 모르게 “제가 2년 넘게 법원을 출입했지만, 그런 판사는 정말 찾아볼 수가 없다. 매일 밤 12시까지 야근하고, 주말에도 법원에 나와서 기록을 보고 판결문을 쓰는 판사가 훨씬 많다.”고 옹호했습니다. 그 택시기사는 혀를 끌끌 차며 “너도 돈 먹었구나!” 한마디 내뱉었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억울함이란, 마음 속을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형사사건을 맡은 일부 변호사들이 ‘판사 로비 자금’이라며 의뢰인에게 웃돈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의뢰인은 일종의 뇌물이라 여기고 순순히 변호사에게 거금을 건네지요. 그러나 그 돈이 정말 판사에게 전달되는지는 변호사 말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의뢰인이 법정에서 “제가 드린 뇌물 잘 받으셨나요?”라고 판사에게 물을 수 없으니까요. 이런 분위기를 악용해 변호사가 ‘배달사고’를 내는 경우가 있을 것이라고 저는 추측합니다. 물론 제가 기사에서도, 블로그에서도 판사나 판결을 많이 비판하지만, 기본적으로 저는 대다수의 판사가 부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사명감을 갖고 오늘도 치열하게 ‘실체적 진실’을 찾으려 고민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저는 그런 판사를 한 명 소개할까 합니다. 주인공은 전주지법 군산지원 정재규(45) 부장판사입니다.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한다지만, 인간적으로도 정 부장판사는 참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납북어부 서창덕씨가 지난해 11월 무죄 판결을 받을 때 군산까지 내려가 정 부장판사의 선고 재판을 방청했습니다. 당시 재판장은 서창덕씨에게 24년 만에 무죄를 선고하며 “피고인은 과거 법원의 유죄 판결로 수형생활을 했고 정신적·육체적으로 고통을 입었습니다. 새로운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그 고통이 조금이나마 덜어지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고 말했습니다. 서씨는 법정에서 ‘재판부 만세’를 부르며 참았던 눈물을 쏟아냅니다. 재판이 끝나고 정 부장판사를 만나러 판사실로 올라갔더니 그는 “당연한 판결이고, 오히려 늦은 것”이라며 겸연쩍어 했습니다. 재심 재판을 청구한 지 7개월만에 법원의 재판 개시 결정, 검찰의 무죄 구형, 법원의 무죄 선고가 이어진 이례적인 신속한 재판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지난 2월 형사부에서 민사부로 옮긴 정재규 부장판사(전주지법 군산지원 민사합의1부)는 9월 11일 또 한번 ‘멋진 판결’을 내립니다. 국가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소멸시효가 지났다며 배상을 거부하는 국가에 “국가로써 갖춰야 할 위신을 스스로 무너뜨리지 말라.”며 일침을 가한 것입니다.
평범한 어부였던 임모씨는 1985년 7월 세 들어 살던 집의 주인이 간첩 혐의로 보안부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자 평소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강제 연행돼 28시간 동안 고문을 받습니다. ‘혐의 없음’으로 풀려났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는 시름시름 앓다가 2주 후 숨졌습니다. 당시 서른 살 청년이었습니다. 유족은 2005년 12월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진실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 신청을 냈고 진실화해위는 “망인이 보안대에 의해 영장 없이 불법 구금됐고 수사 과정에서 구타, 잠 안 재우기 등 가혹행위를 당해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합니다. 임씨의 동생 2명은 국가를 상대로 각각 3억 1000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습니다. 국가는 불법 구금 등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소멸시효(10년)가 지났다며 배상을 거부합니다.
군산지원 민사합의1부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리며 국가의 비겁한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합니다.
“피고(국가)는 자발적으로 망인(임씨)과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손해를 배상해 주기는커녕 망인이 사망이 사망한 이후 약 24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들의 피해나 명예 회복을 위하여 어떠한 조치를 취한 바가 없다. 이에 (원고가) 진실화해위가 밝혀낸 진실을 토대로 피고(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하기까지 하였는데 정작 이 사건 소송에서 (국가가)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주장을 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기본적인 의무는 도외시한 채 오로지 권리만을 주장하는 것으로 용납될 수 없는 태도다.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국민 통합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는 진실화해법의 기본적 취지에도 반하는 것이다. 나아가 법에 의하여 설립된 국가기관인 진실화해위의 명시적인 배상 권고를 무시하는 것으로서 국가로서 갖춰야 할 위신까지 무너뜨리고 있다.”
특히 ▲ 이 사건은 공권력에 의해 무고한 개인이 사망에 이른 사건으로 위법성이 매우 심각하고, ▲ 망인 및 유가족의 피해를 회복시켜 줄 유일한 조치가 금전적 배상이며, ▲ 사법부가 소멸시효 항변을 받아들일 경우 ‘민주화운동 보상법’ 같은 특별법이 제정되지 않는 한 (원고가) 손해를 배상받을 방법이 없게 되어 사실상 사법부가 원고에 대한 권리 보호를 포기하는 셈이 되고 ▲ 민주화운동 관련 피해자들과의 형평성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는 점을 고려할 때 국가의 소멸시효 항변을 허용할 수 없다고 재판부는 밝혔습니다. 이 같은 판결은 국가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을 신의성실 원칙에 반한 권리남용으로 볼 수 없다는 대법원의 기존 판례보다 한 발짝 나아간 것입니다. 결국 재판부는 망인의 위자료를 1억원, 어머니 위자료를 5000만원, 동생 위자료를 각 1000만원으로 정해 상속계산법에 따라 유족인 동생에게 각 7000만원씩 지급하라고 판결합니다.
판결문을 읽으며 저는 짜릿한 전율을 느꼈습니다. 사법부를 왜 ‘인권의 최후 보루’라고 칭하는지 알 것만 같았습니다. 정재규 부장판사 같은, 가슴 떨리도록 매력적인 판사를 좀더 자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만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뿌리 깊은 불신이 사라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만났던 그 택시기사를 다시 만난다면 정 부장판사의 이야기를 해주어야겠습니다.
국가의 소멸시효 항변을 배척하는 전주지법 군산지원 민사합의1부 판결문 내용을 첨부합니다
출처:http://ejung.blog.seoul.co.kr/104
첫댓글 사법부를 국민 대다수는 인권의 최후 보루지라고 알고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러한 판사는 극소수라고 생각합니다 ,
훌륭하신 모범적인 판사님이시군요.
판사님의 기준이 이 정도는 돼야,,,
이런분들이 정말 많이 있다면 ....
하여튼 감동,희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