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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3월 10일 일요일 <새재사랑산악회> 창립 기념 주흘산 산행 (문경새재 제1관문) |
♣ [한마음으로 결속된 산악회] — 자연과 하나 되는 정겹고 참신한 …
그리하여 지금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한마음이 되는 숭고한 뜻’을 같이 하는 산우들을 중심으로 가족적인 분위기의 ‘산악회’를 이룬 것이다. 장장 17년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백두대간(白頭大幹)을 중심으로 한 전국의 산(山)을 두루 찾아 오르며 심신을 단련하여 왔고 무엇보다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정겨윤 추억의 서사시(敍事詩)를 써 왔다.
올해 2019년, <새재사랑산악회>는 현재 제9대 김준섭 회장을 중심으로 한영옥·조인규·장태임 부회장, 민창우 기획위원, 박은배 총무, 김의락 자문위원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산행대장으로 김재철·유형상 대장이 안전한 산행을 위하여 노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정인·오상수·장병국·남정균 고문 등은 건실하고 보람 있는 산행을 위하여 측면 지원을 해 오고 있다.
♣ [오늘 산행의 들머리] — 새재주차장-옛길박물관-제1관문
오전 10시 정각, 새재주차장에서 산행이 시작되었다. 차에서 내리니, 잔뜩 흐린 날씨에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원들은 배낭에 커버를 씌우고 우장(雨裝)을 했다. ‘새재 옛길박물관’ 앞을 지나, 조령계의 맑은 물을 따라 이어지는 가로수 길, ‘제1관문’까지 나아갔다. 길목은 싱그러운 신록의 가로수가 열을 지어 반뜻하게 도열해 있었다. 궂은 날씨 때문인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보통 때는 주말에는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다. 관문에 도착하니 마침 비는 그쳤다. 관문(주흘관)은 개수(改修) 중이었다. 2002년 3월 10일 창립 산행 때 ‘주흘관’을 배경으로 해서 사진을 찍었는데, 오늘은 관문의 안쪽의 광장에서 주흘산의 신록을 배경하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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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관문, 주흘관에서 혜국사 입구] — 깊은 산곡의 여궁폭포
오전 10시 25분, 제1관문에서 본격적인 산행에 돌입했다. 오늘 산행의 첫 번째 구간은 ‘여궁폭포’를 경유하여 ‘혜국사 입구’까지 가는 여정이다. 산길은 쾌적했다. 지난 달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한 신록(新綠)이 싱그러운 녹음을 이루기 시작했다. 선선한 기운이 감도는 산길, 서서히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봄 가뭄 탓인지 계곡에는 물이 아주 적었다. 서서히 길이 가팔라지고 험한 돌길이 이어졌다. 좁은 산길, 대원들이 열을 지어 올라간다. 비는 그쳤지만 잔뜩 흐린 날씨, 그러나 선선한 기운이 감돈다.
오전 10시 45분, 오늘 산행의 첫 경유지인 ‘여궁폭포’에 도착했다. 산곡의 은밀한 곳에 숨어 있는 폭포이다. 깎아지른 듯한 20m의 높은 절벽 사이의 좁은 골을 따라 흘러내리는 모습이 ‘여궁(女宮)’을 연상하게 하는 폭포라는 것이다. 워낙 봄 가뭄이 심하여 물의 양이 적어 장엄한 폭포의 진경은 볼 수 없으나 주흘산 주봉이 품은 혜국사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청정한 물이다. 여름철이면 더운 몸을 식히는 최적의 장소이다. 폭포 아래 고여 있는 맑은 물이 작은 소(沼)를 이루고 있다. 대원들이 폭포를 배경으로 하여 포즈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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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궁폭포에서 혜국사 입구까지] — 초록빛 햇살이 내리는 계곡과 너덜길
다시 산길을 오른다. 본격적으로 고도를 높여가는 산길이라, 길은 지그재그의 형태로 나 있다. 오늘따라 산길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조용한 산행이 이어졌다. 여궁폭포를 거치지 않고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지점(해발 350m, 이정표)부터 가파른 바윗길이다. 철계단을 타고 오르고 절벽 아래의 좁을 길을 걷는다. 오월의 신록이 무성한 산이다. 활엽수 수림 속에 장대한 소나무가 그 기개를 드러내고 있다. 산길을 쾌적한데, 온몸이 더워지고 땀을 나가 시작했다.
너덜지대 계곡의 나무다리를 , 오른쪽의 계곡을 건너는 무지개다리, 비록 오래된 낡은 다리이긴 하지만 여기 숲속에서는 매우 운치가 있는 다리이다. 다리 위에서 신록이 싱그러운 숲을 배경으로 대원들이 포즈를 잡는다. 정면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받아 초록색의 나뭇잎이 더욱 순결하게 빛난다. 다리를 건너고, 팍팍한 돌길을 따라 오른다. 벼랑의 철제 계단 길을 지나며 더욱 가파른 산길이다. 조금 올라가면 깊어지는 계곡의 산길이 이어진다. 다시 다리를 건너 산길을 돌아 올라가니 저만큼 혜국사의 담장이 보인다. 계곡의 끝자락이다. 모든 대원이 휴식을 취하며 간식을 나누었다.
혜국사는 신라 846년(문성왕 8년) 보조체징(普照體澄, 804~880) 스님이 창건했는데, 당시의 이름은 법흥사(法興寺)였다. 그 뒤 고려 말 공민왕(재위1351∼1374)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 절에 피신했던 일이 있었다. 공민왕은 오래지 않아 개성으로 돌아갔고, 당시 절의 노고를 치하하며 왕이 재물을 내려주었다. 절에서는 이 재물로 가람을 중수하고 ‘국왕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의미에서 혜국사(惠國寺)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1867년(고종 4년)에 작성한 「혜국사중건기」에 전한다. 또 조선 세조 임금이 역시 여기에 머물었다고 하는데, 1592년(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이 절의 승려들이 크게 활약하였고 왜란 당시에 청허(淸虛), 송운(松雲), 기허(騎虛) 대사 등이 이 절에 머물며 승병을 지도했다고 한다. 이후 쇠락하여 안적암에 속하였다가 1927년에 중건되었다.
♣ [혜국사에서 대궐터 약수까지] — 장대한 금강송의 군락지
오전 11시 23분, 계곡에서 휴식을 취하고 난 뒤,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완만하게 올라가는 산길이다. 간밤에 비가 내린 탓인지 물기를 머금은 길이 촉촉했다. 혜국사에서 주흘산 중턱에 있는 대궐터[약수터]까지는 소나무 군락지이다. 장대한 노송들이 하늘로 뻗어있는 울창한 적송(赤松)들이 자라고 있다. ‘금강송(金剛松)’이라도 불리는 이 소나무는, 곧게 쭉쭉 뻩은 품새가 가히 일품이다. 금강송은 백두대간에 주로 자라는 소나무의 수종이다. 우리나라 소나무을 크게 적송(赤松), 곰솔, 리기타소나무가 있다. 적송은 그 주간(主幹)이 붉은 색을 띄며 하늘 높이 곧게 자라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곰솔은 해송(海松), 흑송으로 불리는 것인데 그 주간이 휘어져 있다. 리키다소나무는 삼엽송이라고 하는데 목피가 거칠다. 자라는 속도가 빠르지만 볼품도 없고 목재로서도 적당하지 않다. 백두대간 주흘산의 소나무는 바로 그 금강송[적송]으로 그 품새가 장대하다.
♣ [주흘산의 대궐터] — 청량한 약수 한 모금, 그리고 903개의 계단 길
낮 12시 10분, 주흘산 오름길의 중턱에 위치한 ‘대궐터’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사철 마르지 않는 약수가 있다. 시원한 물맛이 좋다. 산록의 가장자리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다행이 비는 오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능선에 오르기까지는 나무테크 계단이다. 계단은 가파르고 길었다. 그 전에는 지그재그로 난 산길을 오르는 산길이었다. 토산(土山)의 흙길이었으므로 산의 훼손이 심해지니 지자체에서 계단을 설치한 것이다. 능선에 오르기까지 그대로 쭉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표시된 숫자를 보니 전체가 903계단이다. 계단은 자연의 길보다 유난히 팍팍한 느낌이 든다. 올려다보면 아득하게 올라만 가는 길이 기분을 압도해 온다.
12시 40분, 지맥의 능선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나아간다. 수평의 나무테크 보도로 시설해 놓아서 걷기에 아주 쾌적했다. 싱그러움 숲이 어우러진 산길, 스멀스멀 안개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조곡관(제2관문)으로 내려가는 골짜기 갈림길(이정표)을 지났다. 이제 정상을 향한 막바지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이곳도 나무테크 계단이다. 아주 가파르게 올라가는 긴 계단이다. 지금까지의 피로감에 더욱 묵직한 힘이 들어가는 길이다. 계단의 중간쯤에 영봉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 우리가 하산 코스로 잡는 길목이다.
♣ [주흘산(主屹山) 정상] — 정상석에서 200차 산행을 기념하고
오후 12시 55분, 오늘 산행의 제1포인트인 주흘산(主屹山, 1,076m) 정상에 도착했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지만, 주흘산 주봉의 아래쪽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 사방을 풍경이 안개로 덮여 있어 그 장엄한 풍경을 보지 못해 아쉬웠다. 사실 주흘산의 동쪽은 백두대간 포암산-대미산의 첩첩 산줄기가 이어져 오고, 서쪽에는 조령계 너머 조령산의 거대한 산봉이 이어져 나간다. 북쪽으로는 주흘지맥의 정상 주흘영봉과 부봉의 암봉이 포진하고 있는데 날씨이 맑으면 월악산까지 보인다. 주흘산 남쪽으로는 문경읍의 산곡이다. 정상석을 중심으로 대원들이 자리를 잡고, 오늘 ‘창립 200차 기념 산행’ 기념사진을 찍고 개인별로도 인증샷을 눌렀다. 정상석 바로 아래에 있는 공터에서 도란도란 점심식사를 했다.
12년전, 2007년 10월 주흘산 등정 기념 (문경 전국산악체전 단체일반부 1위)
오후 1시 40분, 점심식사 후 산행을 계속해 나갔다. 백두대간 부봉(제1봉)에서 영봉을 지나 주흘산 주봉으로 이어지는 주흘지맥의 산길이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산길을 아주 쾌적했다. 그러나 능선의 좌우는 천길 벼랑이다. 스산한 바람이 능선을 넘어가면서 한기가 스며들었다. 몸을 따듯하게 하기 위해 걸음을 빨리하여 걸었다. 주봉에서 영봉까지 1.3km이다. 산록의 숲속에는 자주색 병꽃이 수줍은 듯 피어있고, 산길의 가장자리에는 소복하게 자란 초록의 풀잎들이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시기적으로 아주 끝물인 연분홍 철쭉이 이제야 꽃망울을 터뜨리며 수줍은 듯 피어나고 있다. 지나는 길손을 위하여 오랜 기다림 끝에 피워내는 꽃처럼 여겨져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신록 속에 핀 하얀 물푸레나무꽃이 귀한 자태를 보여주기도 했다. 오월 신록의 산속에 드문드문 핀 꽃들이 가슴을 환하게 열어주었다.
♣ [주흘영봉(主屹靈峰)의 정상] — 안개 속에서 산의 정기를 호흡하며
오후 2시 15분, 주흘영봉(主屹靈峰, 1,106m)에 도착했다. 영봉은 주흘산의 최고봉이다. 문경읍에서 바라보면 주흘산(1,076m, 주봉)이 우뚝 솟아있어 영봉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영봉(靈峰)이라고 따로 명명한 것이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능선을 따라가면 부봉 제1봉(2.3km)을 경유, 백두대간에 이어진다. 오늘따라 영봉 주위는 짙은 안개가 몰려왔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산봉의 이름이 그래서인가 신령스러운 분위기가 감돈다. 오늘 영봉을 오른 사람은 우리 대원들뿐이었다. 김준섭 회장, 호산아 고문, 김재철 대장, 윤종선 대원, 전진국·안상규·강재훈의 삼익장, 그리고 박은배·이경숙·이명자 대원 등 아홉 명이었다. 잠시 동안 안개 속에서 머물며, 환담하고 정상석을 배경으로 포즈를 잡기도 했다.
오후 2시 25분, 하산 길에 접어들었다. 영봉에서 조곡관[제2관문](3.6km)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은 가팔랐다. 비가 오거나 눈 쌓인 겨울이면 경사가 급하여 아주 위험한 코스이다. 오늘은 다행히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아래로 쏟아지는 속도를 조절하지 못하면 ‘접촉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다. 산길은 지그재그로 쏟아진다. 산은 온통 신록의 기운이 싱그럽다. 새로 피어나는 맑은 엽록소가 잎들이 순결한 빛깔로 온몸을 감싼다. 신선한 자연의 기운을 받으며 한 발 한 발 바쁘게 내려오는 길목, 때늦게 활짝 핀 연분홍 철쭉이 선연히 미소를 짓고 있다. 참 곱고 아름다운 기품이다. 화사한 꽃무리가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지난 달, 남도의 두륜산 암릉에서 만난 진분홍 진달래가 뜨거운 가슴의 표현이라면, 이곳 주흘산 신록 속에서 은연히 피어있는 연분홍 철쭉은 애틋한 그리움의 언어이다. 연연한 사람,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사랑이다. 그 고운 자태로 하여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대원들의 간격이 좀 떨어지기는 했지만 내려오는 길은 하나다. 선두에는 전진국 대원이 내려가고 뒤쪽에는 김재철 대장이 후미를 수습하여 내려온다. 활엽수 수림 속에 장대한 소나무는 군계일학의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계곡이 가까워오는 것이다.
♣ [조곡관으로 흐르는 계곡 길] — 차갑고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오후 3시 15분, 계곡에 이르렀다. 주흘산 주봉과 영봉 사이의 깊은 골짜기이다. 이 계곡의 물은 제2관문으로 흘러가, 제3관문 쪽에서 내려오는 물과 합류하여 조령계를 이룬다. 낙동강 최상류의 청정한 물이다. 계곡의 수량이 많지 않았으나 맑은 물이 고여 있었다. 온몸은 열기로 달아올라 있고 옷은 땀에 흠뻑 젖어 있다. 차가운 물이 발을 담그고 손을 씻고 세수를 했다. 청량하고 시원한 기운이 온몸에 엄습하면서 여간 신선하지 않았다. 깊은 숲속에서 맛보는 차가운 물, 산은 이 물을 품고 있으므로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뒤 후미에 내려오는 박 총무가 다급하게 소식을 전한다. 우리 산악회 장병국 고문이 오늘 오전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내려오는 하산 길에 문자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모두 놀람과 안타까움에 말을 잊었다. 서둘러 계곡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괜히 마음이 조급해진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꽃밭서들’의 너덜지대를 지나 계곡을 따라내려 왔다. 계곡은 길었다. 우선 빈소에 우리 산우들의 마음을 담은 조화를 보내도록 조치했다.
꽃밭서들
♣ [제2관문, 조곡관(鳥谷關)] —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아름다운 새재 길
오후 4시, 새재의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에 도착했다. ‘조곡관(鳥谷關)’은 조선 선조 때(1594년) 축성된 관문으로 새재의 세 개의 관문 가운데 그 풍광과 문루가 가장 아름다운 명소이다. 관문의 동쪽은 주흘영봉(1,106m)에서 뻗어 내려온 장대한 산줄기와 닿아 있고 서쪽은 조령산의 신선암봉(939m)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가 절벽을 이루고 있다. 성문 앞에는 동쪽 주흘산에서 흘러내려온 계곡이 가로질러 나가고 있다. 산과 절벽과 물과 문루가 어우러진 풍광도 아름답지만 이곳은 전술상 아주 좋은 지형을 갖추고 있다. 성문 앞은 해자(垓字, 성곽 주위를 둘러친 물) 역할을 하는 계곡이 흐르고, 성문의 안쪽은 비교적 너른 울창한 송림(松林)이어서 많은 군졸이 주둔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은 성문 앞의 계곡 위에 조곡교(鳥谷橋)를 만들어 꽉 짜인 산세가 준수하고 골짜기의 한 가운데를 장악하고 있는 성곽과 문루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주위에는 쭉쭉 뻗은 장송의 군락이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보여 주고 있다. 장대한 노송(老松)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고 계곡의 가장자리에는 암반에서 솟아나는 ‘조곡약수’가 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조곡관에서 주흘관[제1관문]까지는 3km, 거기서 주차장까지는 1km이니 앞으로 4km를 더 내려가야 한다. 빗방울이 흩뿌리기는 했지만, 맑은 조령계를 따라 내려오는 ‘마사토 길’은 쾌적했다. 맨발로 걸으면 건강에 좋다는 곳이다. 몇 년 전 한국관광공사에서 발표한 우리나라 100대 명품 길 가운데 1위를 차지한 산책길이다. 조령계의 맑은 물과 장대한 노송이 어우러진 숲길, 거기에는 용추 계곡과 같은 절경도 있고, 산에서 떨어지는 시원한 폭포도 있고, 곳곳에 편안한 쉼터도 있다. 경상도 관찰사가 관인을 주고받은 의식이 진행된 교귀정(交龜亭)이나 옛날 행인들이 쉬었다 가는 주막(酒幕)도 있고 관리들이 말을 갈아타고 유숙하는 조령원(鳥嶺院)도 있었다.
조곡폭포
조령계의 용추소
교귀정
그래서 <조곡관>에서 <주흘관(主屹關)>까지의 구간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비는 곳이다. 일반 관광객들은 보통 이 구간을 왕래하기 때문이다. 제1관문으로 내려가는 길은 낙동강의 원류 중의 하나인 조령계곡(鳥嶺溪谷)을 따라 이어진다. 길 따라 흐르는 계곡물은 수정처럼 맑다. 그러므로 길의 서쪽은 낙동강의 원류 중의 하나인 조령계곡이요, 동쪽은 주흘산(主屹山) 줄기에서 뻗어내려 온 가파른 산록이다. 이 길은 싱그러운 숲이 터널을 이룬다.
♣ [제1관문, 주흘관(主屹關)] — 주흘산과 조령산의 산줄기 내려와 만나는 곳
오후 4시 50분, 우리 일행은 문경새재 제1관문 <주흘관(主屹關)>에 이르렀다. 청정한 새재 길을 걷는 맛이 아주 쾌적해서 좋다. 곳곳에 산재한 유적지와 산천의 풍경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는 여유도 있다. 문경새재에는 사적 147호로 지정되어 있는 세 개의 관문이 있다. 관문(關門)은 신라시대부터 외적의 방비나 입국자의 조사를 위해 국경·군사요충지에 세운 성(城)의 출입문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은 조정은 문경새재에 3개의 관문을 축성했다. 제1관문이 주흘관(主屹關)이요, 제2관문은 조곡관(鳥谷關), 제3관문은 조령관(鳥嶺關)이다.
조령원
개수 중인 제1관문(주흘관)
제1관문인 <주흘관(主屹關)>은 새재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오른쪽의 주흘산(1,076m)-관봉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와 왼쪽의 조령산(1,026m)에서 뻗어 내려온 산맥이 만나는 자리에 위치해 있다. 자연적 지형을 잘 살린, 그 규모가 아름답고 위엄이 있는 성문이다. 좌우의 성곽은 학(鶴)의 날개를 펼친 듯 축성하고 그 성문 앞은 시야가 확연하게 열린 광장(廣場)을 조성하여 모든 상황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설계했다.
♣ [새재, 문희경서(聞喜慶瑞)의 길목] — 남부지방과 한양을 잇는 영남대로
☆… 이곳 문경 새재의 옛길은 영남대로(嶺南大路)로 지칭되는데, 조선 태종(太宗) 때 개설 되어, 약 600여 년 동안 영남과 충청도-경기도-한양을 잇는 요로(要路)였다. 이곳 새재 옛길은 과거를 보는 선비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올라가고 과거에 급제하여 금의환향하는 그 길이다. 그래서 이곳을 문희경서(聞喜慶瑞)의 고장이라 했다. 기쁘고 상서로운 소식이 처음 듣는 곳이라 하여 이곳의 지명이 ‘문경(聞慶)’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돌아온 바로 그 길목이다.
문희경서
조선시대의 사림(士林)의 중심은 지방의 선비들이었다. 고려가 망하자, 자신의 고향인 경상도 구미로 낙향하여 채미정(採薇亭)을 짓고 제자를 길러낸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위시하여, 그 문하에서 용출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등이 모두 이 길을 오고가면서 문명(文名)을 떨치며 세상의 영욕을 다했다. 무엇보다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비롯하여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등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모두 이곳을 통해 관직에 나아갔으며, 조선시대 전기의 대문장가 서거정(徐居正)도 대구의 양친을 그리워하며 이 고개를 넘었고, 한때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안동 예안의 퇴계(退溪) 선생을 뵙고 한양으로 올라간 길도 이 길이었다. 경주 양동의 이언적(李彦迪)도 이 길을 오가고, 정조 때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도 암행어사가 되어 이 길을 넘어서 영남의 민정을 살피러 갔다. 새재를 지나는 수많은 선비들의 사연이나 감상도 많다. 그래서 이름난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지나면서 한두 편의 시(詩)를 남기지 않은 사람이 없다.
새재 <옛길박물관>
♣ [천혜의 요새 문경새재] — 때로는 처절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새재는 한편, 역사적으로 비운(悲運)의 현장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1592년 4월 14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18,500명의 왜군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할 때 지나던 곳도 바로 이 길이었다.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고니시 부대는 부산에서 열흘 만에, 척후병들이 그렇게도 경계(警戒)한 문경 새재 입구에 도착했다. 비조불입(飛鳥不入), 문경새재는 나는 새도 못 들어간다는 천혜의 요새였고, 여기만 뚫으면 한양까지는 일사천리였다. 그러나 선조 임금으로부터 삼도도순변사로 임명된 신립(申砬)은 천혜의 요새인 이곳을 그냥 왜적에게 내줌으로써 충주 탄금대에서 적을 맞아 참패하고 처절한 최후를 맞았다. 전투 이틀 만에 신립 장군은 자결했고, 부장 김여물은 전사했다. 그리고 열흘이 채 안 되어 한양은 왜군에 넘어갔다. 왜적은, 사흘 전 피난 간 선조를 쫓아 진군했다. 백성들은 몰래 도주한 왕과 관료들에 분노해 궁궐과 관아를 불태우며 분노했다.
♣ [聞慶縣監申吉元忠烈碑] — 왜군과 맞선 의기(義氣)와 장렬한 순국(殉國)!
문경새재는 장렬한 충혼(忠魂)이 살아있는 곳이다.… 임진년 4월 26일, 문경현감 신길원(申吉元)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왜군이 접근해오자, 피하지 않고 대적했다. 몇 안 되는 군사마저도 다 달아나고 총상을 입은 현감은 홀로 적장 앞에 섰다. 북상하는 왜군의 길을 가로막았다. 적장이 칼을 빼어들고 속히 항복하여 길을 비키라고 협박하자, 공(公)은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내가 너희를 동강내어 죽이지 못함을 한탄하니 빨리 죽여서 나를 더럽히지 말라” 하며 꾸짖었다. 적병이 성내어 먼저 한 팔을 자르고 계속 위협을 가해 왔으나 공은 얼굴빛도 바꾸지 않고 꾸짖기를 계속하니, 마침내 사지가 잘리는 모진 죽음을 당하였다. 숙종 32년(1706년) 조정에서는 공(公)의 장렬한 순국을 기리어 ‘縣監申吉元忠烈碑’(현감신길원충렬비)를 세워 그 충혼(忠魂)을 기리고 있다. 새재 <옛길박물관> 입구 오른쪽 길목에 충렬비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간과(看過)한다.
문경현감 신길월 충렬비각
<縣監申候吉元忠烈碑> (현감신후길원충렬비)
* [에필로그] — <산악회> 제200차 기념 산행을 마치고
우리 새재사랑산악회 이름이 그렇듯, 새재와 주흘산은 우리 산악회의 주산(主山)이다. 오늘 제200차 기념 산행을 ‘새재-주흘산’ 코스를 잡은 것은 그런 연유이다. 그런 의미에 오늘의 주흘산 산행은 큰 의미가 있다. 그런데 오늘 200차 산행을 하는 날, 2002년 우리 <산악회> 창립 멤버이며, 2010년부터 6년 간 회장을 역임한 장병국 고문이 유명(幽明)을 달리하여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다. 오늘따라 산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간간히 빗방울이 흩뿌리고 있었다. 그 하산 길에서 비보를 들은 것이다, 오늘 오전 10시경에 장 고문이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동행하는 모든 대원들은 차오르는 슬픔에 말을 잊었다. 오늘 제200차 산행을 기념하는 예정된 ‘뒤풀이 일정’도 취소하고 급거 상경,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상청을 찾아, 고인을 추모하고 슬픔에 잠긴 유족을 위로했다. 오늘 장 고문의 타계를 안타까워하며 생전 그의 공덕을 기린다. 그리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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