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정요와 史鑑(사감)
貞觀(정관)과 筆法(필법)
唐太宗(당태종) 李世民(이세민)은 청조의 강희제와 더불어 성군의 표상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의 치세 때 당나라는 정치경제와 문화예술 등 모든 부면에서 최고의 성세를 이뤘다. 명실상부한 世界帝國(세계제국)이었다. ‘황제-칸’의 호칭을 처음으로 사용한 게 이를 뒷받침한다. 사가들이 그의 치세를 貞觀之治(정관지치)로 칭하며 전한 때 문제에서 경제에 이르는 文景之治(문경지치)와 청조 때 강희제에서 건륭제에 이르는 康乾盛世강건성세와 더불어 ‘3대 성세’로 꼽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정관정요’는 당태종이 신하들과 나눈 얘기를 모아 놓은 책이다. 당나라 때의 사관 吳兢(오긍)이 편찬했다. 그는 ‘정관정요’를 집필하면서 모든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春秋筆法(춘추필법)을 고수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일화가 있다. 당현종 개원 9년(721)에 ‘측천실록’을 편찬케 됐다. 재상 張說장열이 자신에 관한 기록을 바꿔줄 것을 강력 요청했다. 측천무후 때 보여준 행보를 가감 없이 그대로 기록한 탓이다. 오긍이 정중히 거절했다.
“내가 만일 인정에 흔들린다면 어찌 直筆(직필)이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정관정요’가 수천 년에 걸쳐 제왕학의 기본 텍스트로 널리 읽히게 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정관정요’에는 당태종 이세민의 장점과 단점이 적나라하게 기술돼 있다. ‘직필’을 고집한 덕분이다. 오긍은 최고통치권자인 제왕의 잘못된 행동이 백성은 물론 나라에 엄청난 재앙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통찰하고 있었다. ‘정관정요’를 저술한 근본이유다. 후대의 제왕과 군신들에게 치국평천하에 임하면서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정확히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 것이다. 그가 가장 감명을 받은 것은 위징 사후에 나온 당태종의 탄식이다. ‘임현論任賢’의 해당대목이다.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가히 의관을 단정하게 할 수 있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천하의 흥망성쇠와 왕조교체의 원인을 알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신의 득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짐은 일찍이 이들 3가지 거울을 구비한 덕에 허물을 범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지금 위징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마침내 거울 하나를 잃고 말았다!”
여기에 언급된 銅鏡(동경)과 史鏡(사경), 人鏡(인경)을 흔히 ‘三鏡(3경)’이라고 한다. 원래 鏡(경)은 鉴(감)을 바꿔 표현한 것이다. 동감, 사감, 인감을 ‘3감’이라고 한다. 군주가 3감을 통해 스스로 경계하며 제왕의 덕을 쌓는 것이 바로 三鑑之戒(3감지계)이다. 줄여서 鑑戒(감계)라고 한다. 당태종이 ‘사감’과 ‘인감’을 역설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새 왕조를 이끌 유능한 인재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는 인재를 얻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정관2년(628) 그는 신하들에게 이같이 말했다.
“나라를 다스리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재를 얻는 것이오. 만일 기용한 사람이 재능을 갖추지 못했다면 나라는 반드시 다스리는 일이 곤란해 질 것이오.”
그러고는 군신들에게 인재의 천거를 적극 권장했다. 실제로 그는 천거의 내용을 보고 해당 관원의 능력을 평가했다. 이를 게을리 하는 신하는 엄하게 꾸짖었다. 주목할 것은 그가 당시로는 매우 특이하게도 23년의 재위기간 동안 단 하나의 연호만 사용한 점이다. 그게 바로 ‘정관’이다. ‘정관’은 ‘주역'[繫辭傳계사전]에 나오는 ‘천하를 다스리는 도가 바로 정관이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치세는 ‘정관’의 연호가 결코 허언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창업과 守成(수성)
‘정관정요'[논군]의 일화에 따르면 정관 10년(636) 당태종은 신하들에게 창업과 수성 가운데 어느 게 더 어려운지 여부를 물은 적이 있다. 무장 출신으로서 당태종과 함께 숱한 전장을 누빈 房玄齡(방현령)은 ‘창업이 더 어렵다.’고 답했다. 그러나 위징은 ‘수성이 더 어렵다.’고 반박했다. 창업은 하늘의 뜻을 받아 백성의 지지를 얻는 일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수성은 군주가 창업 이후 교만하고 방자해져 백성과 괴리되기 십상이므로 더 힘들다는 게 위징의 논지이다. 쉬지 않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군주의 自强不息(자강불식)을 역설한 셈이다.
당시 이세민은 위징의 주장을 전폭 수용하면서 이제 ‘창업’의 시기가 지났으니 앞으로는 군신들과 함께 다스리는 자세로 ‘수성’을 착실히 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원래 창업은 위기의 난세에 행하는 사업이고, 수성은 위기가 지난 이후의 치세에 행하는 사업을 말한다.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들은 창업과 수성을 각각 무력을 토대로 한 覇道(패도)와 덕치에 기초한 王道(왕도)의 논리로 설명했다. 난세에는 패도, 치세에는 왕도를 추구하는 게 타당하다는 게 논지이다. 그럼에도 유독 이 문제를 최초로 거론한 맹자는 난세조차 왕도를 좇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런 주장은 이상적이기는 하나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당시 열국의 군주들이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낸 이유다.
이상과 현실의 조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치의 영원한 과제이다. 현실을 무시한 채 이상만을 추구하면 종교 내지 윤리도덕이 정치를 지배하는 서양의 중세 내지 동양의 성리학시대를 자초케 된다. 그렇다고 이상을 포기한 채 현실에만 집착하면 정치가 삭막해져 이내 민심이반을 자초하게 된다. 노동과 휴식이 동시에 필요하듯이 죄었다가 풀어주는 식으로 완급조절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상황에 따라 왕도와 패도를 적절히 섞어 쓰는 王覇幷用(왕패병용)의 통치술이다.
당태종은 이를 통찰했다. 그는 원래 태자로 있던 친형 이건성을 죽이고 보위에 오른 인물이다. 권력을 잡기 위해 가차 없이 패도를 구사한 셈이다. 그럼에도 이건성의 참모로 있던 위징을 자신의 측근으로 끌어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직언을 서슴지 않는 그의 충성스런 행보를 높이 산 것이다. 이는 왕도의 행보에 해당한다. 당태종이 군웅을 제압하고 보위를 차지하는 난세의 과정에서 패도를 전면에 앞세웠음에도 인재를 발탁할 때는 과감히 왕도를 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보위에 오른 뒤 천하를 다스리는 치세의 과정에서 유사한 모습을 보였다. 왕도를 전면에 내세웠음에도 상황에 따라서는 가차 없이 패도를 구사한 게 그렇다.
객관적으로 볼 때 ‘정관지치’는 기본적으로 당태종의 이런 겸허한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도 사람인 까닭에 때로는 필부처럼 喜怒(희로)의 감정에 마구 휩싸이곤 했다. 실수가 적지 않았던 이유다. 성급하게 신하의 목을 친 뒤 크게 후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다른 덕목이 있었다. 이게 ‘정관지치’의 배경이 됐다. 크게 3가지다.
첫째, 신하들에게 逆鱗(역린)을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히 직간할 것을 적극 권장했다. 위징이 그 역할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사람을 거울로 삼은 이유다. 둘째, 공자처럼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手不釋卷(수불석권)을 실천했다. 특히 역사를 통해 흥망의 이치를 터득코자 했다. 사서를 거울로 삼은 이유다. 셋째, 自强不息자강불식의 자세로 최상의 통치를 이루기 위해 주변에 자문을 구하며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가 희로의 감정에 휩싸이면서도 끝내 이를 절도 있게 극복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師友(사우)와 參謀(참모)
‘정관정요’의 가장 큰 미덕은 난세에 필요한 覇道(패도)의 創業(창업) 논리와 치세에 통용되는王道(왕도)의 守成(수성) 논리를 하나로 녹여낸데 있다. 창업과 수성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스스로를 낮춘 채 곁에 스승과 같은 인재를 두고 수시로 조언을 받으며 전진하는 이른바 師友(사우)의 정신이다. ‘사우’는 스승 같은 신하 내지 친구 같은 신하를 뜻한다. 당태종이 이를 행했다. ‘정관정요'[논정]에 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 나온다.
“짐은 사서를 읽으면서 옛 제왕 가운데 교만하고 자만심에 가득 차 결국 실패한 사례를 많이 보았다. 내심 교만과 자만에 빠질까 두려워하는 이유다. 매번 신하들의 솔직하고 바른 건의와 간언을 들을 때마다 정치교화에 이를 그대로 반영하면서 그들을 ‘사우’로 대우코자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우’는 조조가 최초로 언급한 것이다. 조조는 魏王(위왕)의 자리에 오를 때 최측근인 夏侯惇(하후돈)을 위나라가 아닌 한나라 조정의 관직에 임명하면서 이같이 말한 바 있다.
“내가 듣건대 신하 가운데 최상은 스승 같은 신하인 師臣사신이고, 그 다음은 친구 같은 신하인 友臣우신이라고 했다. 무릇 신하란 덕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어찌 구구하게 위나라의 신하가 되어 나에게 몸을 굽힐 수 있겠는가?”
고금을 막론하고 ‘사우’를 두지 못하면 최소한 똑똑한 參謀(참모)만이라도 곁에 두고 그들의 계책을 적극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천하의 인재를 두루 그러모으는 게 관건이다. 이마저 없으면 주변에 아첨을 일삼으며 사리를 챙기려는 자들이 들끓게 된다. 이는 패망의 길이다. 21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정관정요’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사우’ 정신에서 찾는 이유다.
‘붓’과 ‘칼’
‘정관정요’는 주로 당태종 이세민과 魏徵(위징)의 대화로 구성돼 있다. 위징이 당태종에게 수시로 올린 간언의 요체는 居安思危(거안사위)이다. 편안할 때 위기가 닥칠 때를 생각해 근면히 정사에 임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관 15년(1641) 문하시중 위징은 당태종에게 이같이 간했다.
“역대 제왕을 살펴보면 위기 때 현능한 자를 임용해 간언을 받아들이지만 일단 위기를 벗어나 안락하게 되면 반드시 느슨하고 태만한 마음을 품습니다. 이런 일이 지속되면 나라는 곧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옛날 성인이 ‘거안사위’를 행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당태종을 ‘롤 모델’로 삼은 강희제가 ‘정관정요’를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며 안일과 자만을 경계한 이유다. 위징의 간언에 크게 공명한 결과다. 사실 한국도 고려 때까지는 經筵(경연) 자리에서 사서삼경 대신 ‘정관정요’를 놓고 국정을 논하면서 ‘거사안위’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조가 들어선 후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이면서 ‘맹자’를 극도로 중시하게 됐다. ‘맹자’의 가장 큰 폐단은 난세조차 ‘붓’을 들고 천하에 임할 것을 주장한데 있다. 난세에는 반드시 ‘칼’로 폭력을 제압해야 한다고 역설한 ‘정관정요’와 정반대이다. 조선조와 정반대로 일본의 에도막부를 연 德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관정요’의 애독자였다. 그는 ‘정관정요’를 탐독하며 ‘거사안위’ 자세를 다졌다. 당태종도 ‘정관정요'[구간]에서 이같이 말한 바 있다.
“수양제는 허물을 지적해 주는 말을 듣지 않은 탓에 악행이 날로 쌓이고 재앙이 날로 가득 차 마침내 나라가 패망하고 자신 또한 죽임을 당하는 화를 입게 된 것이다. 군주의 행동이 옳지 못한데도 신하가 바로잡아 주지 않은 채 구차하게 아첨이나 하며 하는 일마다 칭송만 하면 군주는 이내 어리석어진다. 군주가 어리석고 신하가 아첨을 일삼으면 패망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객관적으로 볼 때 ‘거사안위’는 ‘사우’를 곁에 두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당태종은 이를 차질없이 실현했다. 그런 점에서 당태종은 ‘사우’ 정신과 ‘거사안위’ 자세를 견지하며 난세의 창업과 치세의 수성 이치를 하나로 꿴 超世(초세)의 명군에 해당한다.
첫댓글 거사안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