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상서공파 18세 : 주○ 병부공파 27세 : 주○
판상서공파 19세 : ○환 병부공파 28세 : ○환
판상서공파 20세 : 재○ 병부공파 29세 : 재○
판상서공파 21세 : ○석 병부공파 30세 : ○석
1.할아버지: 양증수 1-1) 판상서공파 19세 : ○환 1-2) 병부공파 28세 : ○환 1-3) 족보 이름(諱)은 수환으로 등록되셨는지요
2.아버지형제들: 양득수 양삼수 양재구 2-1) 판상서공파 20세 : 재○ 2-2) 병부공파 29세 : 재○ 2-3) 족보 이름(諱)은 재득, 재삼, 재구로 등록되셨는지요
3.우리형제들:양태석 양형석 입니다 정확한 족보을 알보싶습니다. 3-1) 판상서공파 21세 : ○석 3-2) 병부공파 30세 : ○석
병부공파와 대방군파는 항렬이 왜 일치했을까요?
병인보(1686년)에 수록된 대방군편입니다. 이 족보만 놓고 보면
판상서 양변이 2대이지만 현대에 와서는 판상서 양변을 1대라고 놓고 대수를 헤아리고 있습니다.
대방군 2대(2세) 양변을 1대로 헤아리기 때문에
대방군의 22세(21세손) 양형석이 판상서공의 21세(20세손) 양형석이 됩니다.
그러나 병부공파 30세 양형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사실일까요
병인보(1686년)의 대방군파 족보는 정해보(1587년)를 보고 편찬한 것인데 정해보(1587년)에 여러 파의 족보가 있었고 友龍(우룡)派(파)의 족보도 있었습니다.
정해보(1587년)에 友龍(우룡)派(파) 족보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判尙書(판상서:장관) 卞(변)의 큰아들(長子) 諱(휘) 友龍(우룡)派(파) 족보 그리고 友龍(우룡)은 족보에 다음과 같이 수록되었습니다. 선공시(繕工寺)에서 丞(승)의 관직을 지냈고 東洛隱士(동락은사): 낙동강 동쪽(경상남도)에 숨은 선비이며 以(이)文章嗚世(문장명세): 문장이 세상에 크게 알려졌다 그런데 정해보(1587년)의 족보 중에 앞 페이지에 병부공파 선대계보 족보가 있었습니다. 병부공 10세 梁祐(양우)의 큰아들(長子) 梁友龍(양우룡)이 등록되었는데 이름 옆의 방주에 선공시(繕工寺)에서 丞(승)의 관직을 지냈고 東洛隱士(동락은사)라고 등록되었습니다. 정해보(1587년)의 友龍(우룡)派(파) 족보편에 등록된 선공시승(繕工寺丞) 동락은사(東洛隱士) 우룡(友龍)과 정해보(1587년)의 병부공 11세로 등록된 선공시승(繕工寺丞) 동락은사(東洛隱士) 우룡(友龍)은 같은 인물일까요 다른 인물일까요 기미보(1799년)에서는 이렇게 평가를 내렸습니다. 병부공 10세 양우(梁祐)의 처음 이름이 양변(梁卞)이라는 행장을 기록함으로 인해 혼동이 생긴 것이지만 병부공파의 양우(양변)-양우룡-양사귀 와
대방군파의 양우-양우룡-양사귀 는 3대의 이름이 똑 같고 3대의 관직이 똑 같고 특히 양우룡은 족보에 등록된 모든 내용이 똑 같으니 또 어떤 병부공파 족보에는 文章嗚世(문장명세)까지 똑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방군파는 알고보니 병부공파구나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기미보(1799년)를 편찬했습니다. 그리하여 같은 항렬을 사용하고, 같은 대수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병부공파와 대방군파의 항렬이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5대 150년을 지켜오다가 그렇게 5대 150년을 같은 항렬을 사용하다가 양우룡-양사귀의 후손들이 병인보(1686년)를 검토하면서 5대 150년 동안 지켜왔던 항렬이 잘 못 된 것으로 선언하고 대방군파의 종파를 만들었습니다. 서로 다른 주장을 할 수도 있고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선조님의 업적을 쉽게 허물지는 말아야 합니다. 선조님의 견해와 다른 나의 견해를 주장할 수 있고 후손들에게는 선조님의 말씀보다 내 말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양우룡의 큰 아들 양사귀 선조님은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을 지내시고 김해부사를 지내며 은거한 동락은사이십니다. 양사귀 선조님의 묘갈은 면우 곽종석이 지었고 묘갈의 내용을 살펴보면 병부공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묘비석을 철거하고 새로운 비문을 세겼습니다. 선조님의 업적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구 비석은 그대로 두고 새 비석을 세우면 될 것인데 구 비석을 허물고 새 비석을 세웠습니다. 면우 곽종석 선생의 묘갈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새로운 묘갈을 지으면 될 것인데 면우 곽종석 선생이 지은 묘갈을 고쳐서 면우 곽종석 선생의 묘갈인 것처럼 비석에 세기고 대방군파 족보에 면우 곽종석 선생의 묘갈인 것처럼 등록했습니다. 면우선생 문집에 등록된 양사귀 묘갈과 대방군파 족보와 사간공 비석에 세긴 면우선생의 묘갈 내용이 다릅니다 (병부공파인데 병부공파가 아닌 것 처럼 수정했습니다) 각자가 다른 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각자가 다른 주장을 하더라도 확실한 것은 대사간을 지내신 양사귀 선조님의 18세이시니 사간공파 18세라고 하시거나 사간공 17세손이라고 하시면 될 것입니다. 언론 3사의 하나인 사간원에서 최고의 관직이 대사간이고 양사귀 선조님이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습니다.
기미보(1799년) 편찬이후 대방군파 선조님들은 병부공파 30세 양형석이라고 알려 주셨고 현대의 대방군 어르신들은 판상서공파 21세 양형석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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